1. 민족말살정책과 기독교
⑴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일제는 한국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고 세계공황이 일어나자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군사 파쇼 체제로 전환하고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1931 만주침략―1932 상해침략―1937 중일전쟁―1941 태평양 전쟁―1945 패전
이 과정에서 일제는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였으며, 국민정신총동원령을 내려 경제적 수탈과 인력수탈을 극대화하였다. 일제가 취한 민족말살 정책을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다양하다.
황성요배, 신사참배, 국기(일장기) 존종, 국어(일어) 생활화, 조선 육군특별지원병 제도(1937), 황국신민서사 제정(1938), 일왕사진의 전학교 배포(1938), 조선교육령제정(1938), 조선어 상용금지, 국가총동원법(1938), 창씨개명(1939), 국민징용령(1939), 학도 동원령(1943), 징병령(1944), 여자정신대근무령(1944)
궁성요배 전단 및 궁성요배 모습
황국신민서사
내선일체 포스터 내선일체비 전시동원체제
강제 징병
강제 징발 창씨개명
전쟁 위안부 동원, 증거 인멸을 위해 위안부 학살
⑵ 종교단체법
1) 일본인의 종교관: 일본은 귀신들의 나라(800만개의 神), 복수 종교 숭배(불단, 가미다나 동시설치, 종교 인구가 총 인구보다 많음), 신의 개념은 힘, 권력, 현세적, 천황=現人神, 인간도 죽으면=神
2) 왕정복고를 이룩한 일본 메이지 정부는 국민통합과 통치를 위해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사용했고, 신도(神道)를 국교화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서구사상과 기존 종교의 반발에 직면했다.
3) 1889년 일본 제국헌법은 겉으로는 정교분리를 표방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정부가 종교를 통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종교의 자유(제28항)를 명시하면서도 천황의 신성불가침(제3항)를 명시하여 헌법상에 모순되는 조항을 삽입했다. 정부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서구 사회의 비판을 피해가기 위해 국가 신도(神社神道)와 종파 신도(宗派神道를) 구분했다. 즉 국가신도는 국민적 도덕이라고 주장하였고 종파 신도는 종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둘은 같은 신들을 섬기고 같은 종교 의례를 가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39년에 국가가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종교단체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국회에서 박관준 장로와 안이숙은 중의원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경고문을 투척하였다.
4) 한국에는 1915년 포교규칙, 1920년 개정포교규칙, 1940. 4.1 종교단체법안을 적용하여 종교를 어용화하였고, 교회 교단의 통합을 강요하였다.
⑶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
1)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한 이유
①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기독교는 공존이 불가했다.
② 한국교회는 민족운동 및 독립운동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③ 교회는 세계 여론 및 서구 제국과 연결된 세력이었다. 따라서 일제에 예속시켜 통제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예 105인 사건, 3.1운동)
2) 일제의 탄압정책
① 무단적 폭력(주로 3.1운동과 1930년대 후반)
② 회유 분열책(1920-1930년, 선교사 이용, 배척)
③ 1938. 2 조선총독부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다음과 같이 마련했다.
④ 1940 조선총독부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사상휘보」 제25호 12월호)
8) 집회 시에는 반드시 다음의 행사를 실시하게 할 것.
4대절, 기타 이유가 있는 의식을 거행할 때에 국가의 봉창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2. 신사참배 문제
⑴ 신도와 신사문제
1) 신도의 기원: 3~4세기에 발생한 일본의 토착종교이다. 그것은 다신교적인 정령신앙, 자연숭배, 조상숭배, 영웅숭배, 천황숭배를 포괄하는 만신전(萬神殿)을 가지고 있다.일본의 고대신화에서 일본 천황은 태양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의 후손으로 신적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도주의는 도쿠가와 시대(1600~1868)에 약화되었으나 메이지 시대에 강화되었다.
2)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국가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3) 다이쇼(大政, 1912~26) 시절, 의회와 정당제가 발전했다.
4) 1929년 세계공황으로 위기의식은 강화, 군국주의 발전, 신도는 초종교적 국가제의로 발전했다.
5) ‘신도주의’는 ‘천황제이데올로기’이고, 신학적으로는 초국가주의 숭배(cult)였고, 일본의 국가적 메시아사상이었다.
6) 1931년 일본의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일본 군부는 정치요인을 암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조선에서 일제는 내선일체, 동조동근을 주장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36년 2.26 사건
젊은 청년 장교들은 1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수상관저 등을 공격하여
내무장관 사이토 마코토, 재무장관 다카하시 코레키요,
군훈련책임자 와타나베 조타로 장군을 살해했다. (사진은 와타나베 조타로)
7) 목적: 한반도를 전쟁의 병참기지로 사용하고, 물적, 인적 동원을 하기 위한 한민족 말살정책이다.
⑵ 신사참배의 강요
일제교육의 목적은 천황의 신민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사참배 강요는 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교회와 개인에 대한 강요로 확대되었다.
1) 1925 조선신궁 건립시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 명령―교회의 거부
2) 1932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광주) 참배명령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평양) 참배명령
3) 1935. 11. 14 평양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1936. 1. 평양 숭실, 숭의 교장 파문
George McCune, Miss Velma L. Snook
4) 농촌진흥운동(새마을운동전신) 실패, 精神作興運動, 心田開發運動 황민화로 전환
5) 1936. 8 조선신사제도 개정 - 1면 1신사 정책 수립
6) 1938년부터 교회에 대해서도 신사참배 강요
남산의 조선신궁(1918착공-1925완성)
남산의 조선신궁
귀신들을 모아놓은 신사의 내부
신사참배 모습(매년 9월6일 애국일로 지정 신사참배 강요)
아동들의 조선신궁 참배
⑶ 교회의 대응
1) 1915 전주 제4회 장로회총회는 학생들에 대한 제일(祭日) 참여문제를 총독부와 교섭했다.
2) 1932평양 제21회 장로회 총회는 “교회학교 학생이 신사 및 제식과 일요일 송영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총독부와 교섭
3) 1933 교섭위원 위임, 1934 이인식 총회장의 청원서 기각, 1935 연구위원구성, 이 와중에 평양 숭실과 숭의학교 교장의 참배 거부사건이 일어났다.
4) 1935. 12. 평남 안주노회는 참배거부를 결의했다. 평양노회는 경찰의 방해로 회합과 토론이 금지
⑷ 선교사 및 기독교계학교의 반응―교인인퇴(맥큔과 언더우드 논쟁)
1) 1936. 6.1 북장로회 세속교육의 즉각 인퇴한다는 안건 통과(69:16)
1938. 5 최종결정- 그러나 연희전문은 계속 학교를 운영했고, 1941년에 총독부로 운영권이 넘어갔다.
한국 선교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미션 스쿨을 포기하는 일은 미국 본국의 선교본부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교육선교사들은 즉각 인퇴에 반대했다.
2) 1937. 2. 남장로교선교부 풀턴성명 발표
한계 :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한 인퇴를 결정한 것은 도피적 성격이 짙다.
1937. 9. 6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의 승리를 천조대신에게 기원하라는 명령이 하달 되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학교를 폐쇄했다.
3) 1936. 2. 호주선교부 참배거부 방침, 1939. 1. 신사참배 불가 교육인퇴 결의
⑸ 신사참배 가결
1) 천주교 신사참배공인 (1932 교리서 내용 수정, 1936.5 로마 교황청 참배 허용 훈령)
2) 감리교 신사참배 공인(1936), 1938. 9. 재확인
3) 캐나다 선교회는 (1938. 10.21)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수용
4)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대부분이 신사참배에 응했다.
⑹ 장로교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결의 (1938.9.10)
제27회 총회 임원들(1938)
가운데가 홍택기 총회장 왼쪽이 김길창 부총회장
(난세에 권력을 탐한 결과 민족사와 교회사 앞에 부끄러운 죄를 범했다.)
아등(我等)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함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① 이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과 총회의 헌법에 위배된다.
② 모든 총대들은 동의안에 대해 발언권과 거부권을 무시당했다.
③ 강압으로 이루어진 결정은 일본정부에 의해 인정된 종교자유에 위배된다.
김길창 목사 양주삼 총리사 이명직 목사
3. 기독교의 훼절
⑴ 기독교의 변질
1) 1937. 7. 중일전쟁 이후, 교회내부의 친일화 변질 초래, 이유: 일제의 압력과 민족 독립의 희망 상실
2) 1938. 2. 평북노회 신사참배 결의
3) 1938. 5. 경성기독교연합회→7월 조선기독교연합회로 확대 개편 일본적 기독교 표방/ 9월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NCC) 해체
4) 1939. 9. 장로교 제28회 총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조직.
총회중앙상치원회(총간사 정인과 목사)
목적: 일본적 기독교의 수립과 국가시책에 적극 협력
5) 1940. 10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 「혁신안」
6) 군소교단 : 11월 구세군→구세단; 12월 조선성공회→일본정신에 의한 새출발 다짐
7) 교파합동 획책
8) 1940. 9. 일본기독교연합회장 아베 내한―기독교 황민화 교파합동 역설
9) 1942. 1 교파합동추진위원회 구성, 1943. 1. 조선기독교 합동준비위원회 개최
10) 감리교와 경기노회 전필순은 “혁신기독교단 12개조 혁신안”을 제출
그 내용은 “유대사상을 제거”하고 “구약성서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었으나 교계의 반발로 혁신교단 논의는 소멸하였다.
11) 교파별 일본기독교로 예속ㆍ해산ㆍ통합
일제에 의한 교단의 통합은 올바른 에큐메니칼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같다.
① 권력에 의해 강제된 반민족적인 교파연합이었다.
② 복음전파와 정의ㆍ평화의 도구가 되기 위한 교회연합이 아니라 전쟁의 도구가 되는 반신앙적 연합이었다.
③ 세계교회와 친교를 단절한 반에큐메니칼적 연합이었다.
올바른 교회일치 안에는 교회갱신과 선교운동이 있어야 한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규칙초안
12) 신학교
조선신학교 (1940) -승동교회 안
일제말엽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개교한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일동(1941)
만주 봉천신학교 (1945.1)
1941. 10 감리교신학교 교역자 황민화 교육 실시→경성기독교 교사 연성소 설치
1943. 만주신학원 입시문제 : ‘대동아전쟁의 의의’, ‘일본제국의 조국정신’, ‘八紘一宇’
⑵ 기독교계의 부일협력
1) 1938. 6~7 기독교단체들 일본단체에 예속 (YMCA, YWCA, 조선주일학교연합회 등)
2) 장로교의 부일협력: 1939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 연맹 사업보고―타 교파와 부일경쟁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 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히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 … 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 … 이만하며 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정인과 목사의 보고)
애국기 헌납, 금속품 공출, 폐품회수
조선장로교도 애국기헌납기성회 조직
일본해군성은 비행기 이름을 “조선장로호”로 명명
나라신궁참배 (1942.11)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설립 임원 및 교구장들(45.5.7)
3) 감리교의 부일협력
취지: 민족주의, 자유주의 배격, 일본 정신의 함양, 일본감리교와 통합,
일본적 복음 천명, 교인들을 지원병에 다수 참가케 할 것.
정동제일교회에서 시국신도대회―조선 신궁참배, 애국헌금, 애국행사
전시대응 교역자 강습회
교구대표자 부여신궁 어조영 봉사
교회당 부속공지―집회 및 피난소 특별작업장으로 사용
교회 소유 철문과 철책 헌납
지방별로 사경회 전에 시국대응 강연 좌담회를 개최
부여신궁근로봉사대 동원된 감리교신학교 학생 및 교수들
용지절약의 국책순응 찬송가 100여 곳을 삭제 정정
징병제도 실시 이후 부인들 계몽을 위한 강연회
34개 교회철폐, 판매, 비행기 3대 헌납
전력 증강, 생산 활동을 위해 1회 예배
1944. 9 “황도문화관”(관장 갈홍기) 설립
목사들에게 일본정신과 문화강의, 신관(神官)의 인솔로 한강에서 미소기바라이(淸淨),
일장기가 그려진 두건을 쓰고 남산까지 뛰어가서 신궁 참배
미소기바라이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평안교구 목사 근로보국대 (44.5.10)
1. 구약금지, 신약에서 재림과 최후심판은 삭제(천황모독)
2. 교회병합, 한 지역에 한 개 교회만 둔다.
3. 모든 교회 안에 작은 신사를 설치, 天照大神之宮 푯말 부착
4. 교회지도자들과 임원들은 모두 미소기하라이(淸淨)
5. 교회모임은 1주일에 한번 1시간 미만, 지역경찰서의 사전 허락
6. 일요일에도 평상시와 같이 사업과 모든 일을 지속
7. 그리스도인들은 신사참배에 지도 역할을 한다.
8. 복음 설교자는 총독부로부터 허락을 맡은 자로 제한
9. 서구식 교회건물은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개조
10. 한국인 교회는 항상 일본 기독교회와 긴밀한 관계 유지
⑶ 기독교인들의 부일행각
1) 기독교인들의 배교
2) 기독교 지도자들의 타협 “전향”
① 변절원인 : 일제의 회유와 가혹한 탄압, 독립에 대한 희망 상실
② 결과 : 기독교지도자 상실, 교회에 대한 부정적 영향
3) 1937. 9 총독부가 파견한 시국순회강연회 연사의 명단에 속한 기독교인들/ 신흥우, 유형기, 윤치호, 박희도, 차재명
1938. 10. 24-29 기독교도 전쟁협력 講道
일자 |
강사 |
제목 |
24일 |
정춘수 |
지나사변의 진의 |
|
차재명 |
신앙과 국가 |
25일 |
신공숙 |
빛은 동양으로부터 |
|
박연서 |
기독교와 비상시 |
26일 |
박현명 |
국민정신총동원과 기독교회 |
|
이하영 |
기독교와 애국운동 |
27일 |
이정로 |
기독교와 선조경의 |
|
이동욱 |
기독교와 절제보국 |
28일 |
강태희 |
근로와 저축보국 |
29일 |
김영주 |
폐물이용에 대하여 |
|
홍병선 |
조선기독교의 현재와 장래 |
‘영미타도 좌담회’ 관련 기독교지도자들의 부일 논설
〈동양지광〉(1942년 2월호)
이 름 |
논설제목 |
백낙준 |
미‧영의 민정과 식민정책 |
신흥우 |
영국인의 민족성 |
전필순 |
미국인의 민족성 |
이용설 |
미국인의 민족성 |
정춘수 |
미‧영인의 종교정책 |
정인과 |
미‧영인의 종교정책 |
양주삼 |
미국은 왜 싸우는가? |
박희도 |
일본은 왜 전쟁하는가? |
박인덕 |
미국 부인의 전쟁관 |
〈동양지광〉
신흥우 - 조선기독교의 국가적 사명
김활란 - 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최태용 - “기독교인의 재출발”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 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일본국에 바치도록 신에게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징병제 실시가 그것이다.”
유각경 - “어머니 자신부터 가질 大和魂” “내지의 어머니들을 근본적으로 본받을 때가 이때라고 생각합니다. . .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박마리아 - “자식을 둔 보람 어미 된 면목”
김활란 -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이명직 - “국가주의와 황국신민의 본의 함양에 노력함으로써 종교도덕과 신앙정신을 부흥케 하여 양 방면에 결함이 없기를 기약하는 바입니다.”
⑴ 항일민족운동 1) 일반 기독교인의 반일 저항은 소극적이었지만 기도문과 설교문에서 자주 나타났다. 일제 말기 기독교인들 가운데 반전ㆍ반일 언동으로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설교자들의 설교에는 ‘전쟁은 죄악이다.’라는 표현이 그 예이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평화주의와 박애주의 관점에서 빠른 종결을 기원했다. 2) 동우회 사건(1937.6) 동우회는 미국에서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국내조직이었다. 이 단체는 외형상 총독부의 양해를 얻은 인격수양ㆍ민족개조를 표방하는 친목단체였으나 그 목적은 “실력양성”을 통한 주권회복이었다. 1926년 이광수 등의 수양동맹회(1922)와 김동원 등의 동우구락부(1923)가 합동하여 수양동우회를 조직했다. 1929년 적극적 민족운동을 하자는 내부 여론으로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그 참가자들은 주로 서북계 장로교인들이 다수였다. ―서울의 주요한, 이용설, 김윤경, 이대위, 이윤재 등 ―평안도의 김동원, 백영엽, 정인과, 김성업, 김선량, 김항복, 김하현, 한승곤, 한승인, ―함북의 송창근 1937년 5월 기독교청년면려회 서기 이양섭이 35개 국내 지부에 발송한 금주운동 관련 인쇄물이 일제에 적발되어 조사를 받던 중 동우회 관련 인사들이 검거되었다. 일제는 변호사, 의사, 목사, 저술가, 상공인 등 민족지도자이며 교회인사들로 구성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동우회사건을 조작했다. 1941년 10월 무죄판결이 났다.
기독청년면려회 제3회 총회(1937) 수양동우회(1931)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 송창근 목사, 안창호, 조병옥 3) 흥업구락부 사건(1938. 5) 흥업구락부는 미국에서 이승만이 조직한 동지회 계열의 국내조직 이었다. 이 단체는 외형상 국민복리와 산업 진흥을 표방했으나 그 목적은 해외 독립운동 자금의 지원, 국내 동지 확보, 계몽활동 전개를 통한 조국독립지원이었다. 1925년 신흥우, 이상재, 윤치호, 유억겸, 안재홍, 구자옥 등 기독교 유력 간부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YMCA 간부의 반수는 흥업구락부 회원이었다. 흥업구락부는 1932년부터 전국 각지의 장로교 감리교 목사 중 12-20명을 선발하여 민족적 단결정신 함양하였고, 100여명의 중견지도자들을 양성하였다.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조선기독교연합회, 조선기독교감리회, 청구회, 우생회, 영교구락부, 조선물산장려회, 조선교육회, 우리친목회, 조선어학회, 신간회, 적극신앙단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38년 2월 연희전문학교 “경제연구회”사건 취조 중에 일제는 교장 유억겸의 방에서 동지회와의 연락을 증명하는 문서 발견하였다. 그들은 유치영을 취조하여 흥업구락부의 실체를 확인하였고, 조선기독교연합회 총무 구자옥의 가택수색 중에 ‘흥업구락부 명단’을 발견하였다. 신흥우, 이건춘, 구자옥, 이관구, 최두선, 홍병덕, 정춘수 등 54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사상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6개월 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나왔다. 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은 사실상 기독교 민족운동이 일제에 의해 뿌리가 뽑힌 사건이었고 그 이후 일부 지도자들이 사상 전향을 하고 친일 행위를 하게 되었다. ⑵ 민족문화 수호운동 1) 국학수호운동은 우리의 얼과 문화가 깃든 국어, 국문, 국사 등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운동이었다. 그 지도자들은 주시경, 이윤재, 김윤경, 정태진, 정인승, 장지영, 최현배 등이었고 주로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2년 이들은 일제의 국어 탄압사건인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선어사전편찬회 큰사전편찬을 위한 1차독회 1935 조선어학회 회원들 1935 조선표준어 사정회 분실되었던 큰 사전 원고(1929-42) 45.9 경성 역에서 발견 조선말 큰사전 1957 2) 식민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사관으로 역사를 서술한 운동 남궁억 《동사략》5권, 《죠션니약이》5권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성서조선〉에 게재 김교신 〈성서조선〉운동
동사략 3) 모곡리 무궁화 사건, 십자가 당 사건(1933) 일제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 장려하였다. 그에 대항하여 남궁억은 1918년 강원도 홍천 모곡에 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자로 시무하면서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선교활동과 민족교육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한국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면서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전국적으로 ‘무궁화심기운동’을 펴고 무궁화 묘목을 가꾸어 보급하였다. 1933년 일제는 불온사상을 고취한다고 하여 직원, 친척을 구속하고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사르고 학교도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했다. 이 과정에서 1932년 춘천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십자가 당이 적발되어 남천우 목사, 유자훈 목사들이 옥로를 치렀다. 모곡리 무궁화 마을 여학생들이 수놓은 무궁화 지도 모곡리 3.1만세 운동 남궁억 작사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기타 문학: 전영택 목사, 김말봉 장로, 김현승 박두진 발목월 윤동주 등 미술: 김은호, 김기창 등 음악: 현제명, 안익태 등 ⑶ 신사참배 거부운동 1)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 1934 장로교 총회는 이인식 목사 명의로 2차에 걸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 저지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수 차례 총독에게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 구류 취조를 받았다 1939. 2 박관준 장로는 일본정계 요로 및 제국회의에 호소할 목적으로 안이숙과 함께 도일하였다. 그들은 제74회 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서 경고서를 투척하였다. 그 내용은 ① 종교법안제정 반대, ② 국교를 신도에서 기독교로 할 것, ③ 신사참배 강요와 양심적 교역자 구속 철회 박관준 장로(순교) 안이숙 선생 1938. 8 김선두 목사는 일본에 가서 정계와 군부 요인을 만나 총독의 신사참배 결의를 막으려 했으나 발각되어 구속되었다. 의미: 이들은 순교를 각오로 일제의 종교탄압에 대항하고, 불의를 경고하였다. 이들의 신앙적 용기는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 한계: 그러나 청원운동은 일제에 의해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고, 일제의 권력구조를 인정하는 체제내적인 운동이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2)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한 이후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들과 신도들은 조직적으로 연대를 맺고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들 지역 인물 평안남도 주기철 평안북도 이기선 경상남도 한상동.이주원, 주남선 전라남도 손양원 만 주 박의흠 헌트 이주원 전도사는 전국연락 3) 한상동 목사(1901~76)
한상동 목사는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마산문창교회 목사를 사면하고 경남지역의 항거자들을 조직하였고, 서북과 경남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연결했다. 호주선교사 호킹과 트루딩거는 이 일에 협조했다. 1939년 12월 이주원 전도사는 평북 참배 반대운동의 기본방법을 한상동 목사에게 전달했다. 한상동 목사 일행은 종교운동 만으로는 신사참배거부 운동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은 급진적 방법을 택했다. ①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를 파괴할 것(노회참석을 막고 상회비 납부거부) ②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로 신노회를 조직할 것 ③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 세례받지 못하게 할 것 ④ 항거자들 사이에 상호원조하고 용기를 줄 것 ⑤ 가정 예배 및 가정기도회를 힘써 개최 개인전도 등의 수단으로 동지를 획득할 것 1940년 3월 5일 부산 항서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 부인전도연합회에서 임원전원(회장: 최덕지)은 신사참배 반대자들로 선출되었고, 이 것은 반대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태매시와 경남전도부인들 태매시 선교사와 최덕지 선생 1940년 한상동 목사는 평양에 가서 다른 지도자들을 만났고, 4월 감옥에서 풀려나온 주기철 목사를 지도자로 해서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전국적 조직을 건설하려고 계획했다.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이전에 경찰은 7월부터 지도자들을 검거하였다. 4) 이기선 목사 이기선 목사는 1938년 7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교회를 사임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참배 거부를 권유하여 여러 차례 검속을 당했다. 1940년 3월 이기선, 박의흠 등은 만주의 안동에서 회합하여 “거부운동방법 5개항”을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① 신사참배를 죽어도 반대 할 것 ②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③ 세속화되어 신사참배 하는 현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④ 신사 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 예배를 드릴 것 ⑤ 신앙동지들을 확보하여 신령한 교회출현의 소지를 육성할 것 5) 주기철 목사
주기철은 1897년 경남 창원군 웅천읍에서 주현성 장로의 7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탄생했다. 그는 오산학교를 졸업 후 연희전문상과를 다니던 중에 안질 악화로 귀향했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중생을 체험했다. 1921년 평양 장신 재학 중에 평안도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1926년 30세에 부산초량교회에 청빙을 받았고, 1931년 마산문창교회로 이전하여 부흥사로 명성을 얻었다. 부인을 잃고 마산의신 여학교 오정모와 결혼했다. 1936년 그는 송창근 목사의 후임으로 부산 산정현 교회에 부임했다. 1938년 2월 주목사가 검거되자 교회는 담임 목사 없이 헌당식을 했고,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주 목사는 석방되었다. 주목사는 1937년 7월 유재기 목사의 “농우회” 사건과 연루되어 7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는 감옥에 있을 때 순교를 준비하면서 “5 종목의 나의 기도”를 하였고 그것을 설교하였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장기(長期)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義)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1940년 주기철 목사는 일제에 의해 다시 체포되었고, 평양노회 노회장 최지화 목사는 평양감옥에 찾아와 주기철 목사에게 목사 사직서를 강요했으나 주목사는 거절했다.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를 제적하고 산정현 교회는 폐쇄되었다. 평양경찰서는 평양노회의 결의를 따라 주 목사 가족들과 세간을 끌어내고 폐쇄하였다. 1944년 4월 주기철 목사는 면회 온 오정모 사모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 대신 어머님을 잘 모셔주오 따스한 숭늉이 먹고 싶소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주님의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교회에 이 말을 전해 주시오. 나를 웅천에 데려 가지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주오 1944년 4월 21일 하오 9시, “내 영혼의 하나님여 나를 붙으시옵소서” 외치는 소리와 함께 주기철 목사는 47세의 나이에 순교하였다. 주기철 목사 안갑수 사모 주기철 목사 오정모 사모 마산 문창교회 (메크레이 선교사, 주기철 목사) 평양 산정현교회 산정현교회 제직 주기철 목사의 장례식 6)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의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고 교회의 신앙적 변질을 경고하는 신앙운동이었고 또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의 성격도 담겨 있었다. 7)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한계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신사참배 반대논리가 우상숭배라는 점에만 국한되었고, 그 저항 에너지는 주로 신비적 종말론에 근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부 논리와 운동범위가 종교 신앙운동에만 국한 되었고 저항의 신학적 근거도 협소했다는 평가가 있다.
⑷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에큐메니칼적 해석 1) 신사참배 문제를 보는 기존의 세 가지 관점 2)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킨 거부자들의 신앙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기존의 견해가 놓치고 있는 새로운 질문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실패했다. 신사참배의 본질은 종교와 정치를 초월한 천황이데올로기였다. 신사참배는 서서히 진행되었던 배교(背敎)의 마지막 골인 점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공동의 대응을 했어야 효과적인 신앙적 저항과 증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도 진보주의자들도 한국교회와 선교사들도 모두 신사참배가 정치인가 종교인가 하는 이분법에 휘말려 분열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⑸ 회개와 반성 1) 한국교회
2) 일본교회 5. 선교사추방 ① 1938. 9월 이후부터, 일제는 선교사들을 탄압했고 학교, 병원, 교회와 모든 기관에서 지도력을 행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한국인들과 서양선교사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강요했다. 한국교회 안에 선교사 배척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② 1940년 10월 일본이 미국에 대한 전쟁의지를 표면화하자 영국의 총영사관과 미국무성은 훈령을 통해 모든 선교사들이 한국으로부터 철수할 것을 권고했다. ③ 1940년 11월 16일, 219명의 북장로교선교사들이 철수했다. 400여 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70%인 280여 명이 철수하고 30%인 119명이 남게 되었다. 남장로회와 감리회는 대부분 철수대열에 섰다. ④ 1941. 2. 28 만국부인기도회사건(the Women's World Day of Prayer) 만국부인기도회는 1887년에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한국교회는 1925년부터 참가해왔다. 이상의 주제와 성구는 반전ㆍ평화운동으로 일본의 전쟁 체제를 위협하는 비판으로 비쳐졌다. 일제는 한국인 기독교인 672명과 선교사 22명을 소환하여 심문하였고, 총독부는 13명의 선교사들을 해외로 추방했다. ⑤ 1941년 일제는 외국인들의 여행을 금지시키고, 연합 국가들의 화폐 교환을 동결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에게 어떤 것도 팔거나 기부할 수 없게 되었다. 미장로교 선교본부는 모든 미국선교사들이 동시에 상하이와 마닐라로 철수하라고 충고하였고, 1941년 11월 16일 대부분의 미국선교사들은 완전 철수하였다.
철수하는 선교사들 (1941) 진주만 사건(1941. 12.7) 히로시마에 터진 원폭 일제의 항복 (45.9.2)-미조리 함상
1. 전도의 다섯 가지 유형 교회성장학파는 전도의 유형을 아래의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Towns, 1995, 212-16; Gibbs, n.d.). 이것은 한국교회 성장을 분류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성공적인 정착의 시기 : 1884-1909 1884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소수의 한국인들은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와 접촉하여 개신교를 수용하였다. 그들은 복음서와 신약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 한국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서 복음을 전했고 최초의 한국인 교회와 신앙인 공동체들을 설립하였다. 그 후에 서양선교사들이 한국이 들어와서 한국인 일꾼들과 함께 선교했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가 열렸을 때에 선교사들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성장하는 선교지라고 말했다. 단지 25년 만에 개신교의 숫자는 약2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⑴ 비신학적인 이유 가운데 첫째는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꼬리표를 달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개신교선교는 해방의 모티브와 근대문화의 가치관을 제공했고 높은 윤리적 삶의 기준을 설립하였다. 성경적 평등주의에 대한 설교는 고도로 계층화된 조선의 계급구조와 여성 차별을 철폐하는 과정을 가속화시켰다. 개신교회는 또한 교육, 의료를 통해 근대문화 형성을 촉진시켰다. 이러 요인들은 전도에 유리한 환경을 w성했고 전통종교의 저항을 크게 약화시켰다. 교회는 축첩금지, 금주금연, 이혼금지,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성도들에게 청교도적인 경건한 삶을 요구했다. ⑵ 두 번째 비신학적인 이유는 한국의 전통종교와 문화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개신교가 전래되고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말, 서구기술로 무장한 일본은 대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했다. 이것을 목도한 한국인들은 500년 간의 정통으로 인정해온 주자학적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안한 사회정치적 상황은 또한 전도하기 좋은 영적인 모판이 되었다. 아래의 <그래프 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개신교는 청일전쟁(1894-5)이후 1000명에서 4000명으로 증가했고, 러일전쟁(1904-5) 이후 35000명에서 55000명으로 급증했다. <그래프1> 한국개신교회의 성장, 1896-1909
초기 한국개신교회가 성장하는데 있어 신학적이고 교회론적인 이유는 향후 한국개신교회의 특징들을 형성했기 때문에 다른 이유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⑶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1890년에 세운 소위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아주 현명한 것이었다. 이 정책의 목적은 가능한 빠르게 자립, 자전, 자치하는 토착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신자 개개인은 이웃을 전도하는 열정적인 전도자로 훈련받았다. 세례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사람 이상을 전도하여야 했다. 이 점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감리교회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⑷ 1905-1907의 대부흥운동은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성령임재의 경험은 한국교회의 영적인 재생을 가져왔다. 부흥운동은 통성기도, 새벽기도, 철야기도, 성미, 날 연보, 사경회와 같은 기독교 문화를 토착화시켰다. 대부흥운동기간 동안 개신교인은 55,542명에서 118,246명으로 두 배가 늘어났다. ⑸ 마지막으로 한국기독교인들의 자발성이 중요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매우 헌신적이다. 그들은 교회공동체에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주일성수, 주일헌금, 십일조, 교회활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자신의 의무이며 믿음의 표현이라고 수용한다. 이런 종교적 헌신성은 초기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초기에 한국교회의 성장이유들은 해방의 동기, 현대문화의 가치, 높은 윤리기준, 대부흥운동, 사경회, 기도 문화 등이었다. 이 시기 한국교회는 전도와 사회참여를 양극화 하지 않았다. “현존유형”(P-1)과 “선포유형”(P-2)이 함께 우세하게 나타났다. 3. 일제 식민통치 시기: 1910-1945 <표 2>에 의하면, 1910-1937년 사이 개신교회의 교인 수는 177,692명에서 374,653명으로 두 배가 늘었다. <그래프 2>는 성장과 감소 곡선이 네 번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프 2> 한국개신교회의 성장, 1910-1942
⑴ 이 시기 교회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외적 요인은 한국개신교회가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는 1919년 삼일운동의 주도자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지도자들 중에 16명이 개신교인이었고 15명이 천도교인이었고 2명이 불교인이었다. 약 4만 명이 체포되었고 6천명이 살해되었다. 비록 개신교인들은 전 인구의 2%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체포된 인원의 25%가 개신교인들이었다. <그래프 2>는 1919년에 개신교인의 인구는 잠시 감소되었으나 1920년부터 급속이 증가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한국 민중들로부터 희생이 큰 존경과 신뢰성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⑵ 한국교회는 강력하게 성장했고 서구선교회로부터 독립을 했다. 장로교회 총회는 1912년에 설립되었고 감리교회는 1930년에 독립하였다. 그들은 부흥운동, 사경회, 주일학교, 의료와 교육활동들을 통해 열심히 전도하였다. 심지어 중국, 러시아, 일본, 만주에 한국인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⑶ 일본의 통치 아래서 한국교회는 예수의 재림에 마지막 희망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전천년설 종말론적 신앙은 성도들로 하여금 가능한 전도에 열심을 내도록 만들었다. 교회는 또한 절망과 고난에 처한 민중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누그러뜨리는 영적인 능력을 제공했다. 부흥집회가 있는 곳에서는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났다. ⑷ 한국교회는 전통종교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걸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교인들은 타종교를 가진 가족들, 친구들, 이웃들과 다양한 형태의 종교간 대화(비록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에 참여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겸손하게 박해를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보이면서 신앙을 담대하게 증언하였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라고 공개적인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제 이 시기에 한국교회가 감소하게 되는 원인을 살펴보자. ⑴ 1920년대 중반에서 1945년까지 250만 명의 한국인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만주, 일본, 러시아, 하와이로 이주했다. 이러한 인구 대이동은 교회의 감소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영향력이 커지는 사회주의 운동은 한국교회의 친미주의, 비합리적 신비주의, 타계주의를 비판했고, 많은 수의 지식인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났다. ⑵ 1930년에서 1945년 한반도는 일본의 병참기지화 되었다. 일본정부는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는 일본인들의 정신을 통합시켜 인적 물적 자원을 전쟁으로 동원시키기 위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였고 천황숭배를 강요하는 우상숭배였다. 1938년 장로교총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한 이후, 모든 교파들은 해체되거나 일본기독교회 밑으로 통합되었다. 개신교 인구는 1915년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과정에서 약 2000명의 신앙인들이 고난을 받았고 약50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이 시기 교회성장의 요인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성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며, 겸손한 가운데 용감히 신앙을 증거 하는 교회의 능력이 있었다. 현존유형(P-1)과 선포유형(P-2), 능력전도유형(P-4)이 강하게 나타났다. 1. 전도의 다섯 가지 유형 교회성장학파는 전도의 유형을 아래의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Towns, 1995, 212-16; Gibbs, n.d.). 이것은 한국교회 성장을 분류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성공적인 정착의 시기 : 1884-1909 1884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소수의 한국인들은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와 접촉하여 개신교를 수용하였다. 그들은 복음서와 신약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 한국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서 복음을 전했고 최초의 한국인 교회와 신앙인 공동체들을 설립하였다. 그 후에 서양선교사들이 한국이 들어와서 한국인 일꾼들과 함께 선교했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가 열렸을 때에 선교사들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성장하는 선교지라고 말했다. 단지 25년 만에 개신교의 숫자는 약2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⑴ 비신학적인 이유 가운데 첫째는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꼬리표를 달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개신교선교는 해방의 모티브와 근대문화의 가치관을 제공했고 높은 윤리적 삶의 기준을 설립하였다. 성경적 평등주의에 대한 설교는 고도로 계층화된 조선의 계급구조와 여성 차별을 철폐하는 과정을 가속화시켰다. 개신교회는 또한 교육, 의료를 통해 근대문화 형성을 촉진시켰다. 이러 요인들은 전도에 유리한 환경을 w성했고 전통종교의 저항을 크게 약화시켰다. 교회는 축첩금지, 금주금연, 이혼금지,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성도들에게 청교도적인 경건한 삶을 요구했다. ⑵ 두 번째 비신학적인 이유는 한국의 전통종교와 문화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개신교가 전래되고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말, 서구기술로 무장한 일본은 대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했다. 이것을 목도한 한국인들은 500년 간의 정통으로 인정해온 주자학적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안한 사회정치적 상황은 또한 전도하기 좋은 영적인 모판이 되었다. 아래의 <그래프 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개신교는 청일전쟁(1894-5)이후 1000명에서 4000명으로 증가했고, 러일전쟁(1904-5) 이후 35000명에서 55000명으로 급증했다. <그래프1> 한국개신교회의 성장, 1896-1909
초기 한국개신교회가 성장하는데 있어 신학적이고 교회론적인 이유는 향후 한국개신교회의 특징들을 형성했기 때문에 다른 이유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⑶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1890년에 세운 소위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아주 현명한 것이었다. 이 정책의 목적은 가능한 빠르게 자립, 자전, 자치하는 토착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신자 개개인은 이웃을 전도하는 열정적인 전도자로 훈련받았다. 세례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사람 이상을 전도하여야 했다. 이 점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감리교회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⑷ 1905-1907의 대부흥운동은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성령임재의 경험은 한국교회의 영적인 재생을 가져왔다. 부흥운동은 통성기도, 새벽기도, 철야기도, 성미, 날 연보, 사경회와 같은 기독교 문화를 토착화시켰다. 대부흥운동기간 동안 개신교인은 55,542명에서 118,246명으로 두 배가 늘어났다. ⑸ 마지막으로 한국기독교인들의 자발성이 중요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매우 헌신적이다. 그들은 교회공동체에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주일성수, 주일헌금, 십일조, 교회활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자신의 의무이며 믿음의 표현이라고 수용한다. 이런 종교적 헌신성은 초기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초기에 한국교회의 성장이유들은 해방의 동기, 현대문화의 가치, 높은 윤리기준, 대부흥운동, 사경회, 기도 문화 등이었다. 이 시기 한국교회는 전도와 사회참여를 양극화 하지 않았다. “현존유형”(P-1)과 “선포유형”(P-2)이 함께 우세하게 나타났다. 3. 일제 식민통치 시기: 1910-1945 <표 2>에 의하면, 1910-1937년 사이 개신교회의 교인 수는 177,692명에서 374,653명으로 두 배가 늘었다. <그래프 2>는 성장과 감소 곡선이 네 번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프 2> 한국개신교회의 성장, 1910-1942
⑴ 이 시기 교회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외적 요인은 한국개신교회가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는 1919년 삼일운동의 주도자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지도자들 중에 16명이 개신교인이었고 15명이 천도교인이었고 2명이 불교인이었다. 약 4만 명이 체포되었고 6천명이 살해되었다. 비록 개신교인들은 전 인구의 2%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체포된 인원의 25%가 개신교인들이었다. <그래프 2>는 1919년에 개신교인의 인구는 잠시 감소되었으나 1920년부터 급속이 증가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한국 민중들로부터 희생이 큰 존경과 신뢰성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⑵ 한국교회는 강력하게 성장했고 서구선교회로부터 독립을 했다. 장로교회 총회는 1912년에 설립되었고 감리교회는 1930년에 독립하였다. 그들은 부흥운동, 사경회, 주일학교, 의료와 교육활동들을 통해 열심히 전도하였다. 심지어 중국, 러시아, 일본, 만주에 한국인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⑶ 일본의 통치 아래서 한국교회는 예수의 재림에 마지막 희망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전천년설 종말론적 신앙은 성도들로 하여금 가능한 전도에 열심을 내도록 만들었다. 교회는 또한 절망과 고난에 처한 민중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누그러뜨리는 영적인 능력을 제공했다. 부흥집회가 있는 곳에서는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났다. ⑷ 한국교회는 전통종교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걸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교인들은 타종교를 가진 가족들, 친구들, 이웃들과 다양한 형태의 종교간 대화(비록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에 참여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겸손하게 박해를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보이면서 신앙을 담대하게 증언하였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라고 공개적인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제 이 시기에 한국교회가 감소하게 되는 원인을 살펴보자. ⑴ 1920년대 중반에서 1945년까지 250만 명의 한국인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만주, 일본, 러시아, 하와이로 이주했다. 이러한 인구 대이동은 교회의 감소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영향력이 커지는 사회주의 운동은 한국교회의 친미주의, 비합리적 신비주의, 타계주의를 비판했고, 많은 수의 지식인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났다. ⑵ 1930년에서 1945년 한반도는 일본의 병참기지화 되었다. 일본정부는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는 일본인들의 정신을 통합시켜 인적 물적 자원을 전쟁으로 동원시키기 위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였고 천황숭배를 강요하는 우상숭배였다. 1938년 장로교총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한 이후, 모든 교파들은 해체되거나 일본기독교회 밑으로 통합되었다. 개신교 인구는 1915년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과정에서 약 2000명의 신앙인들이 고난을 받았고 약50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이 시기 교회성장의 요인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성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며, 겸손한 가운데 용감히 신앙을 증거 하는 교회의 능력이 있었다. 현존유형(P-1)과 선포유형(P-2), 능력전도유형(P-4)이 강하게 나타났다.
조선어학회 사건 출옥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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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과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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