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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주일 공동 예배
예 배 순 서
10월 11일 오전 11시
인도자 목사
하나님의 초청
예배의 부름 ……………………… 마태 11 : 28-30 …………………… 인도자
찬 송 ……………………………… 25장 …………………………………… 다같이
교독문 ……………………………… 74번…………………………………… 다같이
신앙고백 …………………………사도신경………………………………… 다같이
말씀 속에서의 만남
찬 송 ……………………………… 274장 …………………………………… 다같이
기 도 …………………………………………………………………………… 장로
성경봉독 ……………… 구약 사 52 : 7-10(1032쪽) …………………… 인도자
신약 마 28 : 16-20(52쪽)
설 교 ………………… 복음을 부탁받은 사람들 …………………… 목사
공동기도 ………………………………………………………………………… 다같이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백년 전 절망과 실의에 빠진 이 민족을 기억해 주셔서
복음을 주신 것 감사드리옵니다.
미국 남장로교 서교사들을 보내 주셔서
우리 호남지역의 영혼들을 구원하시며
학교들을 세워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병원을 세워 건강을 보살펴 주신 것 감사드리옵니다.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친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을 기억하여 주셔서
위로해 주시고, 크신 은총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에게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을 이 땅에 꽃 피우게 하시고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이웃을 주님께 인도하고
어둠과 혼돈에 빠진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며
구부러진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를
나누인 마음과 지역감정을 없애는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시고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아픔을 당한 사람들과
아픔을 나누며,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시며
이 땅에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흐르도록 하는
일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끄럽게도 늦게 깨닫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수 있는 선교사를 보내려고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성령님을 충만히 허락하여 주셔서
우리 모두가 기쁨으로 참여하여
이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번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마음들이 하나가 되고
초대교회 오순절의 역사를경험함으로
하나님께 한없는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찬 송 ……………………………… 259장 …………………………………… 다같이
예물봉헌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성도의 소식 ……………………………………………………………………… 인도자
세상의로의 파송과 복주심
송 영 …………………………………… 4장 ………………………………… 다같이
위탁의 말씀 ……………………………………………………………………… 인도자
선교사들을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세상 속에서 빛되고, 소금되며,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전력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축 도 ………………………………………………………………………… 목사
□ 기념예배
예 배 순 서
인 도 : 김 윤 식 목사
묵 도 …………………………………………………………………………… 다같이
찬 송 ……………………………… 273장 ………………………………… 다같이
기 도 …………………………………………………………………… 임순선 목사
성경봉독 …………………… 마태 9 : 35~38 …………………… 이창희 장로
찬 양 ………………………………………………………… 명성교회 샬롬찬양대
설 교 ……………………선교 100년을 돌아보며………………… 남정규 목사
미장로교 약사 ………………………………………………………… 주계명 목사
기념사 …………………………………………………………………… 정복량 목사
기념패 증정 ………………………………………… 한영제 총회장, 김인식 박사
인사말 …………………………………………………………………… 김인식 박사
광 고 ……………………………………………………………… 명성교회 당회장
찬 송 ……………………………… 350장 ………………………………… 다같이
축 도 …………………………………………………………………… 김윤식 목사
□ 설 교
선교 100년을 돌아보며
마태복음 9 : 35-38
남 정 규 목사
증경총회장,광주동광교회
어떤 사람이 배가 과서 떡을 사먹게 되었습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여섯 개까지 먹어도 도무지 배가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한 개 더 일곱 개를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배가 부르지 않았던 것이, 일곱 개째 반도 먹기 전에 배가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물 한모금을 마신 후 말하기를, “일곱 개째 떡 하나로 이렇게 배 부를 줄 알았더라면 지금까지 여섯 개를 괜히 먹었네.” 라고 하더랍니다.
사람이 웬만큼 살게 되면 과거를 잊어버립니다. 과거생활을 잊어버리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을 곧잘 합니다. 그러나 신앙세계에서는 과거를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신앙은 그때그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은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세계에서는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세계에서는 유독히 과거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보고 현재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신앙이 얼마나 빗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과거의 전통을 통해서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땅히 그분들이 복음을 들고 이땅에 들어와서 수고하고 애쓴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그분들이 전해 준 것을 잔 전승해 가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을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뜻에서 오늘 말씀드릴 제목을 ‘선교 100년을 돌아보며’라고 선정해 보았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9 : 35에 보면 예수께서 행하셨던 세 가지 주된 사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일이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며, 셋째는 병을 고쳐 주는 봉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교육, 전도, 봉사는 주님의 3대 사업이었습니다. 이러하 예수님의 사업을 이어받아 한국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고, 가르치기 위하여 학교를 설립했으며, 봉사하는 일을 위해서 곳곳에 병원을 지었더 것입니다. 그 사업을 오늘의 한국교회들이 계승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활동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입국한 최초의 선교사는 1884년 9월 1일에 미국 감리교에서 파송한 ‘알렌’ 의사입니다. 미국과의 통상 수교가 맺어지기는 하엿찌만 아직까지 선교사 파송이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알렌 의사를 선교사로 파송한 것입니다. 그 때부터 28년 후인 1912년 총회가 조직되어서 금년이 만 80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실은 이러기에 앞서서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가 만주. 봉천 지금의 심양에서 한국어 성경을 번역할 때 한국청년 서상륜, 백홍준등이 영어도 공부할 겸 성경번역에 동참했다가, 예수를 믿고 귀국하여 의주와 황해도 소래에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한국 최초의 교회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나라 예수교는 1884년을 전후하여 이땅에 자생하게 된것입니다.
그 후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뿌리내린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84년 9월 1일 감리교 선교사로 ‘알렌’ 의사 입국. 1885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 입국. 이는 개혁교회 목사로서 북장로교 파송으로 보냄으 받았고 1889년 호주교회의 ‘데이비드’ 선교사 입국. 189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테이트’ 목사가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에 캐나다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경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호주 선교사는 주로 영남 지역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는 중부지방, 남장로교 선교사는 호남지역에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893년에는 장로교선교교회가 하나의 공의회로 조직되면서, 장로교 신학교가 설립된 것입니다. 1907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7시찰로 조직이 되고, 최초로 목사 7인을 안수하여 세웠고, 성령운동이 일어나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1912년에는 7노회로서 최초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고, 중국 산동성에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80년이 된 것입니다. 1912년에는 남선교회전국연합회와 기독교청년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928년에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전신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총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엽의 지속적인 교회탄압과 신사참배 강요에 시달려 제 31회 총회에서부터 제 34회까지 5년가 총회가 폐쇠되었다가, 8.15 해방된 후에는 북한교회는 공산주의에 의해서 더욱 심한 탄압으로 약화되어 버렸고, 남한 지역 장로교는 1946년 남부총회로 재건되고 제 35회 총회부터 총회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변경한 것입니다. 6.25 동란 때 1회기를 모이지 못하여 80년이 지났지만 현재 77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국의 장로교회는 분열이 거듭되어 1951년 6.25 당시 고신측이, 1953년 기독교장로교가, 1959년 제 55회 총회 때 합도측이 분립되어 나가게 된 것입니다. 1954년 제 39회 총회에서 27회 총회 때 결정한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하기로 결정하고 참회의 기도회를 가졌었습니다. 1974년 500교회 150만 신도운동을 벌여, 10년만에 교세는 배로 증가했으며, 1894년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를 가졌고 서울 연지동에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했으며, 1892년 금년에 총회 80주년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현재 총회 산하 교회수는 5,045교회, 신도수 1,989,965명, 신학대학은 4년제 정규대학 3곳, 4년제 대학에 준한 각종 학교가 4곳, 성경학교가 27곳, 일반대학이 5곳, 전문대학이 7곳, 중,고등학교가 42곳, 국민 학교가 4곳, 병원이 8곳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의 수가 46개 국에 265명이며, 동역관계를 맺고 있는 교단은 미국 장로교를 비롯해서 20개 국에 20개 교단입니다. 다음에 동역관계를 맺고 있는 기관은 WCC(세계교회협의회), WARC(세계개혁교회연맹), CWM(세계선교협의회), CCA(아시아기독교협의회)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서 우리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 100년의 역사와 국민의 4분의 1인 1,200만 명이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2. 이제 우리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려고 합니다.
1892년 9월 한국에 이미 나왔던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들어가 시카고에 있는 맥코민신학교에서 한국선교를 보고할 때, 남장로교에 속해 있던 테이트가 큰 감화를 받았고, 한편 한국의 명문지주인 윤치호가 한국에 관한 강연을 했는데 그 연설에 감화를받은 맥코믹 신학생 테이트, 유니온 신학생 전킨과 레이놀즈가 한국선교사로 자원하였고, 그들은 매일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열심 으로 선교의 정신을 굳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장로교 선교사로 최초로 파송받은 테이트(최의덕), 레이놀즈(이눌서), 전킨(전위렴)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최초의 선교사 3명이 확정되자, 4명의 여선교사들이 함께 지원하게 되었고 이들은 테이트 목사의 여동생인 베티 테이트(최마태)양과, 전킨 목사의 부인인 괴번, 그리고 레이놀즈 목사의 부인인 불링이었습닏. 이렇게 해서 처음 선교사 7명이 1892년 9월 7일에 파송예배를 드리고 출발하여 1893년 전라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남장로교 미노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이눌서 목사, 서기에 전위렴 목사, 회계에 최의덕 목사가 선정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호남지방 선교는 시작되었습니다.
1) 전주선교회
1894년 2월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최의덕 목사 남매를 전주지방에 최초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들은 성 밖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내로 들어가지 않아도 자연히 전도가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긴 서양 여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하루에 4~500명이 몰려든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세우고 장차 여러 장소에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1896년에 최의덕 목사가 전주 서문교회를, 1897년에 전위렴 목사가 김제 송파교회를, 1898년에는 배유지, 변창연 목사가 목포 양동교회를, 1899년 정원삼, 이문호, 윤상삼 등이 나주 삼도리교회를 세우고, 1900년에는 전주 옥구에 지경리교회와 구암리교회를, 전남 함평에 교장리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장로교 최초 의료선교사 유대모 의사가 들어와 군산을 중심하여 의료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897년 전주에서 김창국, 김내윤, 그리고 부인 3명, 도합 5명이 세례를 받고 최초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 중에는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고 있으면서도 순교적 각오의 신앙으로 인해 교회는 날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1902년 잉골드 의료선교사를 통해서 현재 전주 예수병원이 설립되었고, 시작한 지 1년내에 1,500명의 환자를 진료하게 되었습니다.
2) 군산선교회
1894년 전위렴 목사와 유대모 목사가 군산에서 선교를 시작하여 1896년 7월 20일에 김봉례, 송영도 두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분들이 전주보다 1년 빠르게 호남에서 제일 먼저 세례교인이 된 것입니다. 1900년도 교인현황을 보면 이 군산 선교회가 가장 모범적이었는데 전주에서 19명, 목포에서 8명, 군산에서 105명이 되었습니다.
3) 목포선교회
1897년 배유지, 하위렴 목사가 전남 나주에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수리하여 전도를 시작하였고, 1898년 배유지 목사 가족과 오웬 의료선교사가 목포에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1901년 배유지 목사는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도저히 일할 수 없어 미국으로 돌아가고 불행하게도 오웬 의사는 몸이 연약해져 본국으로 돌아가 버려, 6개월 동안 선교회를 폐쇠했다가 이눌서 목사에 의하여 다시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배유지, 오웬이 다시 목포에 왔고, 선교사 변요한 목사 내외가 증파되어 활발히 일하는 가운데 당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석조건물로 교회당을 건축하였는데, 그 건축비의 4/5는 목포교인들이 헌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당시 1900년에 세례교인수가 132명이었고, 1903년에는 세례교인 267명을 포함한 전체 교인수가 1,100명이나 되는 큰 교회로 발전한 것입니다.
4) 광주선교회
1904년 2월 목포선교회 주최로 대사경회가 열렸는데 전주에서 26명, 군산에서 21명, 전 선교지역에서 76명 등이 참여했는데 사경회를 마치고 전남의 중심지인 광주에 선교회를 둘 것을 결의하고 배유지, 오웬, 변요한 등이 광주 양림리에 선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양림리에서 교회를 시작하여 도심지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하여 현재의 제일교회와 북문안교회를 세워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선교 6년이 되는 1910년에 교인수 500명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1909년 광주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 전도하러 다니다가 폐렴에 걸려, 목사이며 의사인 오웬 선교사가 순직했느데 그 피의 대가로 당시 교회당 40곳에서 2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480명의 원입교인을 세웠습니다. 그를 기념하는 오웬기념관이 지금도 광주에 잇습니다.
5) 순천지방에도선교회가 조직되어 크게 발전하였는데, 순천, 여수, 보성을 중심하여 선교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큰 교회들이 설립되고 부흥 발전하였습니다.
6)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썼습니다.
1908년 전주에서 전위렴 목사가 학교를 시작하여 현재의 기전학교를 설립하였고, 유서백 목사가 신흥학교를 세웠습니다. 목포에는 정명학교를, 광주에는 숭일과 수피아 남녀학교를, 순천에는 매산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신학교로서는 전주에 한일신학교와 광주의 호남신학교가 있습니다.
7) 병원을 세워 사회봉사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료선교사가 들어왔으나 병원을 경영하는 것보다 먼저 복음전도하는 일에 힘쓴 나머지 병원은 약해지고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병원이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오늘의 전주 예수병원과 광주 기독병원 같은 대종합병원이 되어 사회에 큰 봉사를 합니다.
8) 교회로서는 남장로교 선교사가 활동했던 지역으로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포함하는데, 1991년을 기준으로 본다면 교회수 1,700 교회, 교인수 85만 명이 됩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기고 그들은 고국을 떠나 복음을 전하다가 우리 한국땅 광주 양림동에 묻혔고, 지금도 그분들의 무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제 선교 100년만에 외국선교사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그분들의 일터는 모두 우리 한국교회에 이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는 우리 교단에서만 해도 46개국에 256명이나 해외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늘 발전되어 갈지라도 신앙은 항상 새로이 창작되는 것이 아니며, 선조들의 신앙을 유전받아서 전통을 잘 지켜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초대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을 잘 지키고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의 교회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먼저 사업적인 면에서 주님의 3대 사업을 이어받아 최초의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고 학교를 설립, 교육에 힘썼으며 병원을 지어 봉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모든 유산을 우리들에게 물려 주고 그분들은 모두 떠나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유산으로 물려 받은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을 잘 지켜 나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우리 교회가 전통을 살려 처음에 전해 받은 대로 잘 보존되어 나가고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1) 그동안 우리 교회는 신앙의 외모도 변했지만 신앙의 내용도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2) 믿음을 황금으로 비유한 이유는 황금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했을 터인데 그 믿음도 많이 변모되어 감을 느낍니다.
3) 교회지도자들은 에스겔 선지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대언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너무나 보는 것 같습니다.
4)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죽었다라고 가르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5) 어떤 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사회운동이나 인권운동만 잘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엄격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데, 디모데 전서 2:5에 보면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니라.”고 했고, 사도행전 4:12에는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6) 어느 종교를 믿어도 다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신학자들이 생겼습니다.
7)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날짜와 시간은 예수님도 모른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요즈음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와서 교인들을 얼마나 유혹해가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대언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을 확실하게 대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천국복음을 그대로 전하고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 그대로를 잘 지켜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에서 떠나고 변질되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가르치기 위하여 세워 놓은 학교를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선교사들이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우리에게 물려 주고 떠난 학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학교는 옛날처럼 교회나 노회가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으로 이사회를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이 사유화되어 간다는 증거입니다. 국가의 시책 때문에 기독교학교에서 성경을 떳떳하게 가르치지 못하는 형편에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큰 문제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는,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들이 그 설립 목적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노회나 총회, 그리고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개인들로 구성된 이사진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습니다. 설령 총회와 노회에서 파송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사유화되어 가는 문제는 해결되지 아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과 달리 운영상의 문제점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회나 총회에서 운영해도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는 법은 없지만, 현재 사유화되어 가는 병원에서 신앙적인 분위기와 복음전파의 사역이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문제점입니다.
여러분! 학교나 병원이 옛날과 같지 않게 그리스도의 냄새가 점점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학교까지 그러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크게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물려 받은 학교와 병원을 그리스도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운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선교사 시대로부터 교회와 학교, 봉사기관인 병원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그리스도와 정신으로 운영하고, 계속해서 유전과 전통을 잘지키는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 되도록 힘써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보다 더 발전시켜서 구관보다는 신관이 낫다는 칭찬을 받고 하나님 앞에 가서도 잘했다 칭찬받는 오늘의 교회, 오늘의 지도자들이 되도록 하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년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앞날을 설계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기념사
기 념 사
정 복 량 목사
대회장, 전주 전성교회
토끼 모양의 한반도 중앙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거기로부터 남쪽으로 동해안을 따라 태백산맥이 뻗어 내리고, 그로부터 서쪽을 향하여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다시 뻗어 내려 서해안에 이르면서 산맥 사이에 평원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곡창 비사벌은, 창조 이래 복음의 불모지로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19세기 말엽은 이 민족사회의 근저가 흔들리고 백성은 심한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갑신정병 이후 사회적 정황은 몹시 불안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 있었습니다. 특히 호남지역은 동학란, 청일전쟁, 을미사변으로 이어지는 대혼란과 격변의 현장으로 어느 지역보다 많은 수난을 겪어야 했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나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탄압과 처형을 감수해야 했던 이 지역 주민들의 가슴속에는 깊은 상처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가려져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한국의 서남부는 절실하게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호남인들의 고통을 기억하시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1891년에 북 장로교회의 선교사 언더우드(원두우) 목사님이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시카고에서 한국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보고하시고, 네쉬빌에서 열렸던 미국 신학생 연합 외국 전도대회에서는 윤치호 선생이 한국에 대하여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 때 당시 맥코믹 신학교의 학생 테이트(최의덕)와 유니온 신학교의 학생 레이놀즈(이눌서)와 전킨(전위렴) 등 젊은이들의 가슴속에는 한국선교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미국 남장로교회 외국선교부에 지원을 하고 한국에 나오기를 서둘렀지만 당시 한국의 상황이 어렵다는 이유로 파송이 보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 기도운동을 벌인 결과, 한국선교의 문이 열려지고 드디어 그들은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1892년 10월 17일에는 데이비스 양이 11월 3일에는 테이트와 그 여동생, 전킨 부부와 레이놀즈 부부 등 7명이 최초의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들이야말로 호남인들에게는 진정한 기독교의 메신저들이요, 참 생명의 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파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버려진 땅에서 살고 있었던 호남인들의 영혼에 비취는 희망의 등불이요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일찍이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하여 교단을 초월해서 연합 사엽에 동참한 미국 남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부는 1893년에 열린 선교협회에서 호남지역을 선교지로 할당받아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처음 전주에서 선교 사업을 착수하였을 때 동학 난이 일어나 일시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흑암 속에서 헤매이던 호남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성서적이요 복음적인 신학에 기초한 뜨거운 신앙과 사랑으로, 거칠고 험난한 호남의 역사적 벌판에서 온갖 고생과 희생을 무릎 쓰고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고 달렸던 것입니다. 전주를 기점으로 해서 군산으로, 서천으로, 목포로, 광주로, 순천으로, 대전으로 달려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미국 남 장로교회는 450명에 이르는 선교사들을 계속 파송하여 고을마다 교회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워서 통합적인 생명신학을 실천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운동을 펴신 주님의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그들은 호남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선교 초기부터 장로회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성서신학을 교수하여, 한국교회의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의 기초를 닦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극단적 보수주의나 정통성보다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하여 교회를 위한 교회중심의 신학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선교초기부터 각 지역에 성경학교를 세우고 농어촌 교회를 위하여 평신도 지도자와 교역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자급 전도자들이 많이 육성되어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동리마다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자성경학교를 세워서 당시 무시되고 천대받던 여성들을 가르쳐,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여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1920년대에 최초로 호남지역에서 교회의 여성 조력 회를 조직함으로 조력회 운동이 전국에 파급된 것은 남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미개한 이 지역에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고 기독교 문화를 이루고자 수십 개의 소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등 교육기관들을 세워 인재양성에 힘써 왔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우리 총회 산하에 전주신흥중고, 기전여중고, 기전전문대, 예수간호전문대, 한일신학교, 군산실업전문대, 광주 수피아 여중고, 간호전문대, 광주보건전문대, 호남신학대학, 목포 정명여중고, 순천 매산 중고, 여중고, 대전 한남대학교, 대전신학교 등이 그 명문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지에 병원을 설립하여, 의학의 전문 지식과 의료시설이 없어 죽어가는 우리 민족의 육신과 영혼을 치유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오늘도 전주예수병원, 광주기독병원등 종합병원에서 전인 치유에 힘쓰고 있고 여수 애양원의 재활병원에서는 나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로 기독교의 실천적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1세기 동안 수십 명의 선교사들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선교의 현장에서 순직하여 그들의 묘소들은 오늘도 전주에서, 광주에서 말없이 그들의 사랑과 믿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보수적이고 뜨거운 순교적인 신앙은 호남지역에서 자라난 신앙인들의 가슴속에 살아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공산주의자들의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신 수백 명의 순교자들을 낳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수한 믿음과 헌신의 유산을 이어받아 총회 적으로,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공헌하신 자랑스런 얼굴들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지역은 비록 다른 지역에 비하여 10여 년이나 복음이 늦게 전파되었지만 1912년에 창립된 우리 총회의 보고된 통계에 의하면, 불과 20년 만에 전국 교세의 거의 20퍼센트에 육박하는 교회성장을 이루었고, 오늘에 와서도 인구밀도를 감안하면 결코 타 지역에 뒤지지 않는 교회의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서울에 있는 어느 큰 목회자에게 “나는 호남인이 아니지만 우리 교회의 교인 70퍼센트가 호남교인들입니다.” 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호남지방에 복음의 씨가 뿌리깊이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선교 초기에 호남인의 사회경제적 파탄과 종교 문화적 피폐와 정치군사적 억압이라는 역사적 조건 아래서 기독교 복음이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선교하신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고를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서 받은 신앙은 우리들의 역사에서 민족 신앙의 토대가 되었고 이 백성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 애국운동이 일어나고 기독청년들이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김인전 목사가 호남교인들의 심정을 담아 작사한 ‘전라선교 25주년가’ 중 몇 절을 인용함으로 결론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후렴) 기념합시다. 기념합시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영원 기념합시다.
동아반도 우리조선 4천여 년 이민족이
흑암중에 생활하고 죄악에서 신고하여
두눈있다 하면서도 보지못한 소경이요
두손있다 할지라도 속박당할 뿐이로다.
신성민족 이천만인 마귀노예 되었었네
화려강산 3천리에 지옥고통 뿐이로다
망망죄악 바닷속에 나올길이 전혀없네
불쌍하고 가련하다 구원할자 그 누구시뇨
자비하신 상제께서 무한하신 사랑으로
이백성을 돌아보고 그리스도 복음으로
저나하기 경윤하사 저태평양 너른바다
일엽편주 싣고오니 복음사신 이아닌가.
일천팔백 구십이년 동 11월초 4일에
경기도의 인천항구 하륙한자 일곱이라
상제님에 파송받아 우리 전라남북도에
인정풍속 생소함을 불구하고 내려왔네
산도설고 물도설며 인심조차 파측한곳
당하기도 어련고생 받을수도 없는핍박
당하고도 또받으며 수지않고 밤낮으로
가르치며 전파하니 영생하는 참이니라
계속하여 나온사신 다섯곳에 등대되어
선교사업 발달하여 택한백성 날로오네
못본눈을 보게하고 묶은손을 풀어주니
신령자가 얻었으며 의의자녀 되었도다
구주생명 빛으로써 아니비친 곳이없네
25년 오늘날에 일만 6천 참 열매라
할렐루야 찬송으로 영화로신 보좌앞에
하나님의 크신사랑 영원기념 하옵세다
우리는 향후 한국교회의 미래를 바라보며 미국 남장로교회 100년의 선교 유산을 고이 가꾸면서 이 민족을 위한 교회에 전통을 심화하고 발전시켜 교회의 갱신과 일치, 그리고 민족 통일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선교사들과 과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눈물과 땀과 피로 얼룩진 선교일선에서 전 세계를 향하여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고 성령의 능력으로써 평양으로, 북경으로, 모스코바로, 그리고 바그다드와 제 3세계로 우리 모두 줄기차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지구촌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한국의 오순절을 일으키사, 우리로 충선된 증인이 되게 해주시기를 기원하면서 기념사로 가름합니다.
1992년 9월27일
□ 기념대회
대 회 순 서
인도: 대회장 정복량 목사
대 회 사 ………………………………………………………………………… 대회장
하나님의 초청
예배의 부름 ……………………… 마태 28:19-20 ……………………… 인도자
송 영 …………………………………………………………………………연합성가대
찬 송 ……………………………… 13장 …………………………………… 다같이
교 독 ……………………………… 74번 …………………………………… 다같이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말씀속에서의 만남
찬 송 ……………………………… 273장 …………………………………… 다같이
기 도 ………………………………………… 증경총회장, 대회 고문, 남정규 목사
성경봉독
구 약 ………사 52: 7-10………………… 전북 여전도회연합회장, 이희주 권사
신 약 ………행 28: 30-31………………… 개혁측 증경부총회장, 김대전 장로
찬 양 ………………………………………………………… 전주시 교회연합성가대
(지휘: 유영수 집사, 반주: 박은미 선생)
설 교 …………………………………담대한 전파… 직전 총회장, 김윤식 목사
기 도 ………………………………………………………………………… 설 교 자
찬 송 ……………………………… 259장 ………………………………… 다같이
헌 금 …………………………………………………………………………… 다같이
봉헌기도 ………………………………………… 대회 재정위원장, 김대현 장로
경축의 시간
특 송 ………………………………………… 하늘노래선교단 지휘자, 최 관 선생
선교약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총무, 주계명 목사
기 념 사 ………………………………………증경총회장, 대회고문, 한완석 목사
축 사 ………………………………………………………… 전라북도 지사, 강상원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장, 기장증경총회장, 고문 최희섭 목사
인 사 …………………………………… 선교유공자 대표, 전 예수병원장 구바울
미국 장로교회 대표, 선교회 총무 김인식 박사
내빈 소개 ……………………………………………………… 대회장 정복량 목사
공로자표창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한영제 장로
기념품증정 ………………………………………… 대회 준비위원장 전수진 목사
대회선언문 …………………………………………… 대회 지도위원 송봉규 목사
광 고 ………………………………………………… 대회 사무총장 이점용 목사
세상속으로
송 영 ……………………………… 애국가 ………………………………… 다같이
위탁의 말씀 …………………………………………………………………… 인도자
축 도 ………………………………… 합동측 증경총회장, 대회고문 유인식 목사
□ 설 교
담대한 전파
사도행전 28 : 30-31
김 윤 식 목사
증경총회장, 종암교회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감격한 마음으로 감사 기념예배를 드리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바입니다.
기독교의 선교행적은 사도행전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람에서, 안디옥에서, 마게도냐에서, 유럽을 거쳐서 북미주를 경유, 태평양을 횡단하여 아세아 땅 한국에 100여년 전에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 복음을 직접 전한 미국장로교회는 1706년에 첫 노회가 조직되었고, 1717년에 첫 대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첫 총회는 1789년에 열리게 되었습니다. 남북전쟁 후 미국장로교회는 분열되었습니다. 1958년에 북장로교회와 당시 연합장로교회가 통합되었고, 1983년에 통합된 연합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는 재통합이 되어 남북교회가 분열된 지 120여 년 만에 통합의 성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미국교회의 내적인 사정으로 한국선교의 과정도 좀 다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884년 9월에 의사 알렌의 내한은 정규 선교사의 자격으로 오지 못하고 의사의 자격으로 내한하여, 정부와 관계개선으로 다음 해 언더우드 선교사가 정식으로 오게 하는 길을 열어준 셈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원래 미국개혁(Reformed)교회 신학을 졸업한 선교사 지망자였지만, 당시 미국 개혁교회(R.F.A)에서는 한국선교에 관심이 없었고 언더우드를 선교사로 파송할 계획도 없어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당시 미국장로교회 뉴욕노회의 파송으로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한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감사하고 기념하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 100주년은 1892년 10월 17일 인천에 도착한 미스 데이비스(Davises)와 그의 일행 7명이 내한하여 호남지방 선교를 시작함에 그 역사적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바대로 미국, 호주, 캐나다, 선교회들이 한국 선교에 동참하게 되어, 선교사역에 혼선을 방지하고자 선교회들은 지역을 분담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 남장록회 선교부는 제주도를 포함한 호남지역을, 캐나다 선교부는 함경도 지역을 맡고, 북장로교회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와 경북지방을 담당하고, 호주선교회는 경남지방 선교에 주력하였습니다. 각 선교회는 나름대로 선교에 주력하여 놀라운 성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역사적인 교훈을 남긴 것은 선교부의 역할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인식케 하고 있습니다. 함경도와 캐나다 선교회, 호남지역과 남장로교 선교회의 관계입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44회 이후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 상당기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노력하려고 했으나, 그것이 도리어 호남지역 교회들의 분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캐나다 선교회의 영향으로 기장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처럼 많은 교회가 이 땅에 세워졌고, 많은 교육기관, 의료기관 등, 이 민족 구원 역사가 성숙하게 진행되어졌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그간 이 위대한 선교사역을 감당해 주신 미국장로교회와 현지에서 순교하시고 고난과 싸워가며 애써 오신 선교사 동역자들과 그분들의 가족, 배후에서 후원해 주신 미국 남장로교회 가족들에게 뜨거운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1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00년 전에 씨를 뿌린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의 복음의 씨는 그간 싹이 나고, 자라고, 꽃이 피어서 이제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장로교회에 있는 선교부와 한국에 와 있는 선교회간에 협의를 통해서 이 시대에 적절한 선교정책으로 1983년에 자매관계(Sisters Church)에서 동역관계(Partner Church) 교회로서의 새로운 관계성을 가지고 함께 선교하고, 협력하여 세계선교의 동반자가 되도록 선교협정을 갱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미국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에 있는 모든 선굑부 재산을 우리 총회산하로 이관하여 주었고, 이제는 같은 사무실에서 선교동역자로서 훌륭한 사역을 담당해 나가는 중입니다.
미국장로교회와 선교부 직원, 그리고 선교동역자 여러분! 나는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여러분들에게 큰 절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선조들의 복음의 열정이 이곳 한국 땅에까지 전파되어서 우리들이 복음을 받고, 구원을 얻었으며, 우리 민족이 크게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날로 변천을 거듭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변화가 있다 해도 미국 남장로교회가 이곳 호남 땅에 뿌려 놓은 복음의 씨앗은 자라고 또 자라서 거목이 될 것이며, 세계선교의 큰 몫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는 영원히 변치 못할 사랑의 줄로 튼튼히 매여져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감사하는 동시에 많은 역사적 책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많은 복음의 빚진자로서 이제는 주는교회의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많이 빚진 사람은 많이 갚을 의무가 있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11장에 있는 안디옥교회를 연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환난으로 인하여 이방도시 안디옥으로의 피난은 그리스도인들의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가운데 교육에 크게 힘을 기울였습니다. 엘리트인 바울과 바나바는 큰 목회를 가르쳤습니다. 미국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선교에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호남지역에 많은 교육기관을 세워주셨습니다. 전주에, 광주에, 순천에, 군산에, 목포 등지에 세워진 교육기관들은 이 지역, 이 민족을 깨우치는 일에 놀라운 공헌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능한 민족 지도자들을 낳게 하였습니다.
친애하는 동역자, 그리고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이 기념예배를 통해서 선교동역자들이 남겨 놓은 교육선교의 정신적인 유산을 더욱 훌륭하게 계승해 나가야 한다는 다짐과 서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재로 섬기는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모국 예루살렘교회가 흉년이 들어 고난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맣은 구제금을 모아서 장로들의 손에 돌려보내주는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섬기는 일일 것입니다. 일찍이 선교동역자들은 성경에 가르치신 대로 섬기는 일을 위해서 예수병원, 광주기독병원과 애양원 등을 세워서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섬기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뜻입니다. 극단의 이기주의로 치닫는 오늘의 사회에 교회의 나아갈 길을 새롭게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안디옥교회는 선교에 열중하는 교회였습니다. 교육도, 의료도 선교의 일환이지만 사도행전 11:20에 있는 말씀에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헬라인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이방선교는 상상키 어려운 때에 성령으로 충만한 저들에 의하여 세계선교의 문이 크게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6월에 미국개혁교회(R.F.A)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총회 지도자들이 강조한 것은 한국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목사는 R.E.A의 교인이고 목사였는데, 우리의 관심부족으로 당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에 의해서 한국에 파송되었는데, 만일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들의 파송을 받고 한국선교에 힘썼더라면, 지금 한국에는 개혁교회가 중심이 되었을 터인데라고 아쉬워했습니다. 오늘도 R.E.A의 사람들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은 선교정책의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미국 남자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예배에 우리들을 향한 권고가 있습니다.
1. 지난 100년간 남겨 둔 선교의 유산들을 믿음으로 잘 계승하라!
2. 이방선교의 효시가 되었던 안디옥교회의 선교정책을 그대로 보여준 남장 로교 선교정책을 성공적으로 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지난날 받던 교회로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주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 선교에 열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미국 장로교회는 4가지 기본목표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장로교인으로서의 Identity 동질성 강화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다양성을 강화
셋째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행하는 선교와 목회에 대한 헌신을 다짐
넷째는, 새로운 눈으로 미래를 본다는 목표 아래 1억 5천만 불(약 1,200억원)의 예산으로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들도 동역교회들의 새로운 선교의 계획과 목표를 공감하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부름 앞에 경건한 대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미국장로교회에 깊고도 정중한 감사와 아울러, 그간 헌신하여 주신 선교동역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면서 축복받은 호남지역의 성도들과 함께 선교의 새로운 비전을 가슴에 새기면서 내일의 여명을 향한 우리들의 새로운 출발의 제 2의 사도행전이 시작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선교약사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년의 연혁
주 계 명 목사
총회총무
오늘 우리들은 호남지방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100년 전에 복음을 들고 선교사역에 임했떤 미국 남장로교 호남선교 100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장소에 모였다. 여기 이들의 사역이 너무 놀라와 모든 호남인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간단한 연혁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미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사로 활동했던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성공리에 선교사역을 하던 중, 안식년을 맞이해서 잠시 귀국하여 미국 전 지역을 순회하고 있었다. 1891년 10월에는 미국 네쉬빌에서 모인 ‘미국신학생연합선교회’에서 언더우드가 한국선교에 대해서 역설하자, 이때 미국 남장로회 소속 신학생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한국 선교에 뜻을 두고 지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보가 너무 어두웠고 또한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거절을 하였지만 독지가들의 헌금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자, 여자 4명, 남자3명을 선교사로 임명하고 1892년 9월에 미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개인의 건강사정 때문에 좀 늦게 한국에 도착한 사람도 생겨나게 되었다.
1892년 10월 17일 데이비스 여자 선교사가 최초로 인천항에 도착함으로, 호남선교가 역사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후 나머지 6명인 테이트(최의덕), 그의 여동생 베티 테이트(최마태), 전킨(전위렴) 부부, 레이놀즈(이눌서) 부부 선교사들이 그해 11월 3일 역시 인천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7명이 한국에 도착하자, 선교예항협정에 의해서 호남지방을 선교구역으로 삼고 그 전초 기지를 전주로 정하고, 1893년 2월 레이놀즈 선교사 조사인 정해원으로 하여금 전주 성밖 은송리에 자리잡고 예배드리게 된 것이 전주교회의 첫 출발이 되었다. 다시 1894년 2월에는 테이트 남매가 전주에 상주하면서 선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나 동학운동으로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선교가 재개되었다.
이들 선교사는 지방을 답사하고 선교지 확보를 찾던 중 군산에 선교부를 설치(1896)하였고, 그후 광주(1904)에, 순천(1912)에 설치하였다. 그런데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교회만 서립한 것이 아니라, 선교부가 설치되는 곳마다 미션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전주에는 신흥학교(1900), 기전여학교(1900), 군산에는 영명학교(1902), 멜본디여학교(1902), 목포에는 영흥학교(1903), 정명여학교(1903), 광주에는 숭일학교(1908), 수피아여학교(1908), 순천에는 매산남여학교(1913)를 설립하였으며, 또한 병원도 전주예수병원(1897)을 비롯해서 군산구암병원(1896), 목포푸렌취병원(1898), 광주기독병원(1906), 순천알렉산더병원(1913)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많은 선교활동을 했떤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출국당한 일도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다시 귀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던 중 대전에 선교부를 설치(1954)하고 이어서 한남대학교를 설립(1958)하였다. 이들의 선교구역은 멀리는 제주도로부터 시작해서 충청남도 서천, 부련, 부여지방ᄁᆞ지 활동하였다.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에서는 지금까지 45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1983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와 연합하면서 미국 장로교회 선교부의 선교사로 계속해서 호남지방에서 선교사역에 임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은 이들의 선교사역의 결과로 어느곳을 가든지 교회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선교 100주년을 맞이해서 미국교회 여러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면서 연혁을 소개하였다.
1992년 10월 18일 호남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 기념사
기 념 사
한 완 석 목사
증경총회장, 광주제일교회
주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개화파와 수구파의 피비린내 나는 분쟁은 마침내 1884년 갑신정변으로 번져, 궁중의 혼란은 물론이요 민란마저 곁들여 세상이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그때 미국의사 ‘알렌’ 박사가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뎠고 그 다음 해인 1885년에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복음의 사신으로 이 땅에 들어온 지 8년이 지난 1892년 10월 18일, 다시 말하면 100년 전 이 날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데이비드 목사가 워싱턴 D.C.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공사로 있던 이자윤 부인과 함께 태평양을 넘어 제물포에 상륙한 것이 남장로회 미국선교회의 기점이 된것입니다.
이때는 이미 세계 각국에서 파송되어 이 나라에 와서 선교하고 있는 9개 교단의 선교사들이 있는 때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선교전열을 가다듬어 1893년 1월 28일 한국 주재 선교사들을 전원 회집하여 장로교 치리 정치 준수의 선교사공의회를 열어 선교지역을 분담하게 될 때 전라도와 충청남도를 남장로회 선교부가 맡아 오늘까지 호남지방과 남장로회 불가불간의 동체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맺어 선교역사 어언 100년 한동안을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오늘의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게 되었으니, 초대교회의 선배님들은 거의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는 실로 감개무량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도바울 선생은 로마서 10: 13~15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전하려고 선교사들이 이 고장에 발을 디디려 할 때 1893년 2월에 이눌서(레이놀즈) 선교사가 그의 비서 정해원 친구를 먼저 전주에 보내어 거처를 준비하였습니다. 동년 9월에 첫선교사 테이트와 전킨 두분이 전주로 오는 도중 때 아닌 폭우로 급류에 휘말려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구하게 된 것은 전도자가 가야 할 수난의 서곡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 국내사정을 보면 조정의 부패와 외국인들의 침입하에 경제계가 혼란했고 안으로는 탐관오리들이 성행하여 과세추징과 압정으로 농민들은 도탄에, 백성들은 원한에 사무치던 때였습니다. 이와 같은 와중에 고부군수 조병갑이 새로 부임하여 가진 학정을 다함으로 농민들은 1894년 고종 31년에 동학농민 혁명이란 병란을 일으켜 1년동안에 3,4만의 희생자를 내어, 그야말로 전라도는 쑥대밭이 되었고 민심은 험하여 공포사회를 형성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선교사들이 낯선 땅을 찾게 되었으니 그 때의 어려움이 얼마나 컸던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격량의 현장에서 굴하지 아니하고 착착 선교를 시작해 나갔던 것입니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것은 물론이요, 생활양식과 사회구조의 이색 속에서 기성종교의 배타성, 거기에 걸쳐 무속종교의 도전은 감히 인내하기 어려운 형극의 역정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기획은 한치의 차도 없이 포교와 더불어 병원을 설립하여 개화의술로 많은 환자들을 고쳐주었고, 나환자도 치료하여 소생시켜 국민들의 절찬을 받기도 했고, 다른 일반 학교를 설립하여 문맹의 거리에서 방황하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신문화와 지식을 전수하였으니 여기서 이 지역 애국자들의 산실이 되었고 수많은 지도자들의 요람이 된 것입니다.
더욱이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국가적 치욕 속에 미천한 교인들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제와 싸우기를 시작하였고, 1919년 기미독립운동에 주역을 담당하게 되었다가 광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수많은 희생자만 내고 말았으나, 나라와 민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국민들이 분명히 깨닫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제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일제는 기독교를 적성국의 종교라고 몰아쳐 핍박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신사참배는 동방요배이었고, 거기다 내한 일체라는 구호 아래 창씨개명과 징병제도를 내려 민족혼을 뿌리 뽑으려는 만행으로 단말마적인 악정이 무소부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 우리는 장로교 총회는 1938년 제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예배당은 작업당으로, 교회종은 군납으로, 성경, 찬송은 일제정책에 어긋나는 곳마다 먹칠하여 지워 버리고 또 찢어 그야말로 교회는 만신창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최악의 수단으로 교회를 박해할 때 인간의 인내는 한계가 있는지라 최후에 자학방법으로 병원과 학교의 정문에는 철장으로 폐쇠해버렸고 목메어 부르짖는 학생들의 울부짖음도 아랑곳없이 폐교를 선언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선교현장을 떠나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걸었던 골고다의 길이요 선교자가 가야 할 가시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전쟁은 종말을 고하고 세계 역사는 지구상 국경선을 다시 그어 승과 패의 결론은 원형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악의적인 일본의 사꾸라는 하룻밤 세풍에 낙화가 되고 숨겨 놓은 무궁화는 양지속에 미소를지며 꽃을 피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요 선과 악의 열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6년간 나라 잃고 종노릇하던 우리 나라는 해방의 자유를 얻게 되었고 철못으로 닫았던 학교문과 병원의 대문은 활짝 개방되게 되었으니 연약한 이나라 학도들이 주야로 부르짖은 기도를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진저, 눈물짖고 돌아갔던 선교사들이 웃음짓고 이 땅을 다시 찾아 돌아왔으니 오직 높으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로 찬양할 뿐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의 민족복음화를 위한 연단이었고 시련이 아니었던가 그저 엎드려 값없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는 자유 속에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교회는 사분오열되어 한 지체는 동서와 남북으로 찢어졌고 일치된 이목구비는 기능마저 상실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장로교단을 만든 작품을 우리들의 손으로 산산조각 찢어 놓고 말았으니 선배들의 지혜로운 예지에 무슨 말로 변명할 수 있겠는가, 그저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잘못을 책임지고 언젠가는 본래의 위치로 통일하는 작업을 완수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백년의 세월 속에 선교역사의 현장은 변천의 극치를 이루어놓았습니다. 남장로회 선교부의 모체는 미국 북장로회와 통일하여 이 땅에 설립했던 모든 기관은 현지 교회로 이양되어 한국교회는 낙락장송과 같이 거목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00년 전 겨자씨와 같았던 우리 장로교회는 명실공히 장자교회 답게 성장하여 이제는 복음선교를 역수출하는 현상을 가져왔으니 할렐루야!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오묘하신 그 뜻을 입을 모아 찬양할지라. 우리는 이제부터 또다시 100년이 가고, 1000년이 지나도 우리 호남교회의 요람인 남장로교교회의 역사적 은혜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축 사
축 사
강 상 원 지사
전라북도 지사
한완석 총회장님과 정복량 대회장님! 그리고 신도 여러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원드리며 진난날 우리 고장이 선교사업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것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1세기 전 암울한 시대의 척박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내한하신 선교사님들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며, 지금도 신도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계시는 수많은 순교자님들의 실천적 사랑과 믿음에 한없는 경의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개화의 여명기에 선교사업을 위해 고을마다 세운 교회는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의 기틀을 마련했음은 물론 이와 함께 펼친 의료사업은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새로운 학문과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설립한 교육재단은 기독교의 실천적 사랑을 통해 영혼의 무지함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그후 이나라의 근대화를 앞당기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일곱 분 선교사님들께서 시작한 선교사업이 밀알이 되어 오늘날 번영된 나라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고, 이제 신앙적으로도 선택받은 나라가 된 것은 모두가 그분들이 흘린 눈물과 피의 대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지역 신도들께서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선교사들의 유업이 헛되지 않도록 오늘에 거듭나야 하며, 이 민족을 일으켜 세운 교회의 전통을 받들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지금 민주화와 개방화의 전환기적 과정에서 가치관의 혼돈과 도덕성의 실종을 겪고 있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복음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때라고 생각됩니다. 고난의 역사를 슬기롭게 헤쳐 왔던 신앙의 횃불을 다시 밝힘으로써 이시대가 요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기념식이 위대한 선교유산을 한층 더 계승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성령의 불길이 온누리에 불타오르기를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다시 하번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마음 깊이 축원드리며, 여러분의 교회와 시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92. 10. 18
□ 대회선언문
선 언 문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으로 1892년 10월 18일 이 땅에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을 보내어, 죽어가는 우리 백성의 영혼을 살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제의 학정 속에 갖은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민족의 장례를 위하여 기도하였던 신앙의 조상들의 눈물과 6.25 동족상잔의 전란 속에서 순교 당한 순교자들의 피를 상기하면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죄를 위하여 속죄의 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앙을 고백하고, 이 땅 위에 정의와 진리를 펴신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감사드리며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은혜속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대가로, 수많은 교회들이 성장하고 세계역사상 보기드문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을 감사드리며, 특히 우리 민족을 위하여 교육기관을 세워서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하여 수많은 의료기관을 세운 그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드리며, 그들의 고귀한 뜻을 이 땅에 영원토록 간진학 것을 선언합니다.
2. 우리는 1세기 전 선교사들이 이 땅에 뿌린 순수한 복음의 의미를 이 시대에 재조명하여 팽배해 있는 물량주의, 패권주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계층 간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회개운동을 전개하고, 교회가 한국역사에 맡 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갱신운동을 전개하고 확신할 것을 선언합니다.
3.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지난날 미국 남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복음의 열정과 용기를 본받아, 이 시대의 현실이 병등수록 현실동화보다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성령 님의 인도를 받아, 민족과 교회의 역사에 책임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뜻을그 역사 가운데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와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4. 우리는 선교사들의 교육정신을 본받아 병든 사회의 현실을 고치기 위하여 탁월한 지도자들을 육성하여, 이 시대를 개혁하고 나아가 세계선교의 문을 열어, 세계 만방에 선교의 빚을 갚는 교회들이 되기 위하여 힘을 합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합니다.
1992년 10월 18일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대회 참석자 일동
□ 선교주일 공동 예배
예 배 순 서
10월 11일 오전 11시
인도자 목사
하나님의 초청
예배의 부름 ……………………… 마태 11 : 28-30 …………………… 인도자
찬 송 ……………………………… 25장 …………………………………… 다같이
교독문 ……………………………… 74번…………………………………… 다같이
신앙고백 …………………………사도신경………………………………… 다같이
말씀 속에서의 만남
찬 송 ……………………………… 274장 …………………………………… 다같이
기 도 …………………………………………………………………………… 장로
성경봉독 ……………… 구약 사 52 : 7-10(1032쪽) …………………… 인도자
신약 마 28 : 16-20(52쪽)
설 교 ………………… 복음을 부탁받은 사람들 …………………… 목사
공동기도 ………………………………………………………………………… 다같이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백년 전 절망과 실의에 빠진 이 민족을 기억해 주셔서
복음을 주신 것 감사드리옵니다.
미국 남장로교 서교사들을 보내 주셔서
우리 호남지역의 영혼들을 구원하시며
학교들을 세워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병원을 세워 건강을 보살펴 주신 것 감사드리옵니다.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친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을 기억하여 주셔서
위로해 주시고, 크신 은총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에게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을 이 땅에 꽃 피우게 하시고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이웃을 주님께 인도하고
어둠과 혼돈에 빠진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며
구부러진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를
나누인 마음과 지역감정을 없애는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시고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아픔을 당한 사람들과
아픔을 나누며,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시며
이 땅에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흐르도록 하는
일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끄럽게도 늦게 깨닫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수 있는 선교사를 보내려고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성령님을 충만히 허락하여 주셔서
우리 모두가 기쁨으로 참여하여
이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번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마음들이 하나가 되고
초대교회 오순절의 역사를경험함으로
하나님께 한없는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찬 송 ……………………………… 259장 …………………………………… 다같이
예물봉헌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성도의 소식 ……………………………………………………………………… 인도자
세상의로의 파송과 복주심
송 영 …………………………………… 4장 ………………………………… 다같이
위탁의 말씀 ……………………………………………………………………… 인도자
선교사들을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세상 속에서 빛되고, 소금되며,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전력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축 도 ………………………………………………………………………… 목사
□ 기념예배
예 배 순 서
인 도 : 김 윤 식 목사
묵 도 …………………………………………………………………………… 다같이
찬 송 ……………………………… 273장 ………………………………… 다같이
기 도 …………………………………………………………………… 임순선 목사
성경봉독 …………………… 마태 9 : 35~38 …………………… 이창희 장로
찬 양 ………………………………………………………… 명성교회 샬롬찬양대
설 교 ……………………선교 100년을 돌아보며………………… 남정규 목사
미장로교 약사 ………………………………………………………… 주계명 목사
기념사 …………………………………………………………………… 정복량 목사
기념패 증정 ………………………………………… 한영제 총회장, 김인식 박사
인사말 …………………………………………………………………… 김인식 박사
광 고 ……………………………………………………………… 명성교회 당회장
찬 송 ……………………………… 350장 ………………………………… 다같이
축 도 …………………………………………………………………… 김윤식 목사
□ 설 교
선교 100년을 돌아보며
마태복음 9 : 35-38
남 정 규 목사
증경총회장,광주동광교회
어떤 사람이 배가 과서 떡을 사먹게 되었습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여섯 개까지 먹어도 도무지 배가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한 개 더 일곱 개를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배가 부르지 않았던 것이, 일곱 개째 반도 먹기 전에 배가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물 한모금을 마신 후 말하기를, “일곱 개째 떡 하나로 이렇게 배 부를 줄 알았더라면 지금까지 여섯 개를 괜히 먹었네.” 라고 하더랍니다.
사람이 웬만큼 살게 되면 과거를 잊어버립니다. 과거생활을 잊어버리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을 곧잘 합니다. 그러나 신앙세계에서는 과거를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신앙은 그때그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은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세계에서는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세계에서는 유독히 과거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보고 현재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신앙이 얼마나 빗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과거의 전통을 통해서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땅히 그분들이 복음을 들고 이땅에 들어와서 수고하고 애쓴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그분들이 전해 준 것을 잔 전승해 가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을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뜻에서 오늘 말씀드릴 제목을 ‘선교 100년을 돌아보며’라고 선정해 보았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9 : 35에 보면 예수께서 행하셨던 세 가지 주된 사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일이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며, 셋째는 병을 고쳐 주는 봉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교육, 전도, 봉사는 주님의 3대 사업이었습니다. 이러하 예수님의 사업을 이어받아 한국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고, 가르치기 위하여 학교를 설립했으며, 봉사하는 일을 위해서 곳곳에 병원을 지었더 것입니다. 그 사업을 오늘의 한국교회들이 계승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활동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입국한 최초의 선교사는 1884년 9월 1일에 미국 감리교에서 파송한 ‘알렌’ 의사입니다. 미국과의 통상 수교가 맺어지기는 하엿찌만 아직까지 선교사 파송이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알렌 의사를 선교사로 파송한 것입니다. 그 때부터 28년 후인 1912년 총회가 조직되어서 금년이 만 80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실은 이러기에 앞서서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가 만주. 봉천 지금의 심양에서 한국어 성경을 번역할 때 한국청년 서상륜, 백홍준등이 영어도 공부할 겸 성경번역에 동참했다가, 예수를 믿고 귀국하여 의주와 황해도 소래에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한국 최초의 교회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나라 예수교는 1884년을 전후하여 이땅에 자생하게 된것입니다.
그 후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뿌리내린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84년 9월 1일 감리교 선교사로 ‘알렌’ 의사 입국. 1885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 입국. 이는 개혁교회 목사로서 북장로교 파송으로 보냄으 받았고 1889년 호주교회의 ‘데이비드’ 선교사 입국. 189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테이트’ 목사가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에 캐나다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경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호주 선교사는 주로 영남 지역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는 중부지방, 남장로교 선교사는 호남지역에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893년에는 장로교선교교회가 하나의 공의회로 조직되면서, 장로교 신학교가 설립된 것입니다. 1907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7시찰로 조직이 되고, 최초로 목사 7인을 안수하여 세웠고, 성령운동이 일어나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1912년에는 7노회로서 최초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고, 중국 산동성에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80년이 된 것입니다. 1912년에는 남선교회전국연합회와 기독교청년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928년에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전신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총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엽의 지속적인 교회탄압과 신사참배 강요에 시달려 제 31회 총회에서부터 제 34회까지 5년가 총회가 폐쇠되었다가, 8.15 해방된 후에는 북한교회는 공산주의에 의해서 더욱 심한 탄압으로 약화되어 버렸고, 남한 지역 장로교는 1946년 남부총회로 재건되고 제 35회 총회부터 총회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변경한 것입니다. 6.25 동란 때 1회기를 모이지 못하여 80년이 지났지만 현재 77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국의 장로교회는 분열이 거듭되어 1951년 6.25 당시 고신측이, 1953년 기독교장로교가, 1959년 제 55회 총회 때 합도측이 분립되어 나가게 된 것입니다. 1954년 제 39회 총회에서 27회 총회 때 결정한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하기로 결정하고 참회의 기도회를 가졌었습니다. 1974년 500교회 150만 신도운동을 벌여, 10년만에 교세는 배로 증가했으며, 1894년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를 가졌고 서울 연지동에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했으며, 1892년 금년에 총회 80주년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현재 총회 산하 교회수는 5,045교회, 신도수 1,989,965명, 신학대학은 4년제 정규대학 3곳, 4년제 대학에 준한 각종 학교가 4곳, 성경학교가 27곳, 일반대학이 5곳, 전문대학이 7곳, 중,고등학교가 42곳, 국민 학교가 4곳, 병원이 8곳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의 수가 46개 국에 265명이며, 동역관계를 맺고 있는 교단은 미국 장로교를 비롯해서 20개 국에 20개 교단입니다. 다음에 동역관계를 맺고 있는 기관은 WCC(세계교회협의회), WARC(세계개혁교회연맹), CWM(세계선교협의회), CCA(아시아기독교협의회)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서 우리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 100년의 역사와 국민의 4분의 1인 1,200만 명이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2. 이제 우리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려고 합니다.
1892년 9월 한국에 이미 나왔던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들어가 시카고에 있는 맥코민신학교에서 한국선교를 보고할 때, 남장로교에 속해 있던 테이트가 큰 감화를 받았고, 한편 한국의 명문지주인 윤치호가 한국에 관한 강연을 했는데 그 연설에 감화를받은 맥코믹 신학생 테이트, 유니온 신학생 전킨과 레이놀즈가 한국선교사로 자원하였고, 그들은 매일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열심 으로 선교의 정신을 굳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장로교 선교사로 최초로 파송받은 테이트(최의덕), 레이놀즈(이눌서), 전킨(전위렴)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최초의 선교사 3명이 확정되자, 4명의 여선교사들이 함께 지원하게 되었고 이들은 테이트 목사의 여동생인 베티 테이트(최마태)양과, 전킨 목사의 부인인 괴번, 그리고 레이놀즈 목사의 부인인 불링이었습닏. 이렇게 해서 처음 선교사 7명이 1892년 9월 7일에 파송예배를 드리고 출발하여 1893년 전라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남장로교 미노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이눌서 목사, 서기에 전위렴 목사, 회계에 최의덕 목사가 선정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호남지방 선교는 시작되었습니다.
1) 전주선교회
1894년 2월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최의덕 목사 남매를 전주지방에 최초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들은 성 밖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내로 들어가지 않아도 자연히 전도가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긴 서양 여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하루에 4~500명이 몰려든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세우고 장차 여러 장소에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1896년에 최의덕 목사가 전주 서문교회를, 1897년에 전위렴 목사가 김제 송파교회를, 1898년에는 배유지, 변창연 목사가 목포 양동교회를, 1899년 정원삼, 이문호, 윤상삼 등이 나주 삼도리교회를 세우고, 1900년에는 전주 옥구에 지경리교회와 구암리교회를, 전남 함평에 교장리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장로교 최초 의료선교사 유대모 의사가 들어와 군산을 중심하여 의료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897년 전주에서 김창국, 김내윤, 그리고 부인 3명, 도합 5명이 세례를 받고 최초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 중에는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고 있으면서도 순교적 각오의 신앙으로 인해 교회는 날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1902년 잉골드 의료선교사를 통해서 현재 전주 예수병원이 설립되었고, 시작한 지 1년내에 1,500명의 환자를 진료하게 되었습니다.
2) 군산선교회
1894년 전위렴 목사와 유대모 목사가 군산에서 선교를 시작하여 1896년 7월 20일에 김봉례, 송영도 두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분들이 전주보다 1년 빠르게 호남에서 제일 먼저 세례교인이 된 것입니다. 1900년도 교인현황을 보면 이 군산 선교회가 가장 모범적이었는데 전주에서 19명, 목포에서 8명, 군산에서 105명이 되었습니다.
3) 목포선교회
1897년 배유지, 하위렴 목사가 전남 나주에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수리하여 전도를 시작하였고, 1898년 배유지 목사 가족과 오웬 의료선교사가 목포에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1901년 배유지 목사는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도저히 일할 수 없어 미국으로 돌아가고 불행하게도 오웬 의사는 몸이 연약해져 본국으로 돌아가 버려, 6개월 동안 선교회를 폐쇠했다가 이눌서 목사에 의하여 다시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배유지, 오웬이 다시 목포에 왔고, 선교사 변요한 목사 내외가 증파되어 활발히 일하는 가운데 당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석조건물로 교회당을 건축하였는데, 그 건축비의 4/5는 목포교인들이 헌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당시 1900년에 세례교인수가 132명이었고, 1903년에는 세례교인 267명을 포함한 전체 교인수가 1,100명이나 되는 큰 교회로 발전한 것입니다.
4) 광주선교회
1904년 2월 목포선교회 주최로 대사경회가 열렸는데 전주에서 26명, 군산에서 21명, 전 선교지역에서 76명 등이 참여했는데 사경회를 마치고 전남의 중심지인 광주에 선교회를 둘 것을 결의하고 배유지, 오웬, 변요한 등이 광주 양림리에 선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양림리에서 교회를 시작하여 도심지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하여 현재의 제일교회와 북문안교회를 세워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선교 6년이 되는 1910년에 교인수 500명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1909년 광주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 전도하러 다니다가 폐렴에 걸려, 목사이며 의사인 오웬 선교사가 순직했느데 그 피의 대가로 당시 교회당 40곳에서 2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480명의 원입교인을 세웠습니다. 그를 기념하는 오웬기념관이 지금도 광주에 잇습니다.
5) 순천지방에도선교회가 조직되어 크게 발전하였는데, 순천, 여수, 보성을 중심하여 선교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큰 교회들이 설립되고 부흥 발전하였습니다.
6)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썼습니다.
1908년 전주에서 전위렴 목사가 학교를 시작하여 현재의 기전학교를 설립하였고, 유서백 목사가 신흥학교를 세웠습니다. 목포에는 정명학교를, 광주에는 숭일과 수피아 남녀학교를, 순천에는 매산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신학교로서는 전주에 한일신학교와 광주의 호남신학교가 있습니다.
7) 병원을 세워 사회봉사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료선교사가 들어왔으나 병원을 경영하는 것보다 먼저 복음전도하는 일에 힘쓴 나머지 병원은 약해지고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병원이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오늘의 전주 예수병원과 광주 기독병원 같은 대종합병원이 되어 사회에 큰 봉사를 합니다.
8) 교회로서는 남장로교 선교사가 활동했던 지역으로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포함하는데, 1991년을 기준으로 본다면 교회수 1,700 교회, 교인수 85만 명이 됩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기고 그들은 고국을 떠나 복음을 전하다가 우리 한국땅 광주 양림동에 묻혔고, 지금도 그분들의 무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제 선교 100년만에 외국선교사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그분들의 일터는 모두 우리 한국교회에 이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는 우리 교단에서만 해도 46개국에 256명이나 해외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늘 발전되어 갈지라도 신앙은 항상 새로이 창작되는 것이 아니며, 선조들의 신앙을 유전받아서 전통을 잘 지켜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초대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을 잘 지키고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의 교회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먼저 사업적인 면에서 주님의 3대 사업을 이어받아 최초의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고 학교를 설립, 교육에 힘썼으며 병원을 지어 봉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모든 유산을 우리들에게 물려 주고 그분들은 모두 떠나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유산으로 물려 받은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을 잘 지켜 나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우리 교회가 전통을 살려 처음에 전해 받은 대로 잘 보존되어 나가고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1) 그동안 우리 교회는 신앙의 외모도 변했지만 신앙의 내용도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2) 믿음을 황금으로 비유한 이유는 황금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했을 터인데 그 믿음도 많이 변모되어 감을 느낍니다.
3) 교회지도자들은 에스겔 선지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대언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너무나 보는 것 같습니다.
4)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죽었다라고 가르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5) 어떤 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사회운동이나 인권운동만 잘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엄격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데, 디모데 전서 2:5에 보면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니라.”고 했고, 사도행전 4:12에는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6) 어느 종교를 믿어도 다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신학자들이 생겼습니다.
7)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날짜와 시간은 예수님도 모른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요즈음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와서 교인들을 얼마나 유혹해가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대언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을 확실하게 대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천국복음을 그대로 전하고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 그대로를 잘 지켜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에서 떠나고 변질되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가르치기 위하여 세워 놓은 학교를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선교사들이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우리에게 물려 주고 떠난 학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학교는 옛날처럼 교회나 노회가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으로 이사회를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이 사유화되어 간다는 증거입니다. 국가의 시책 때문에 기독교학교에서 성경을 떳떳하게 가르치지 못하는 형편에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큰 문제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는,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들이 그 설립 목적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노회나 총회, 그리고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개인들로 구성된 이사진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습니다. 설령 총회와 노회에서 파송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사유화되어 가는 문제는 해결되지 아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과 달리 운영상의 문제점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회나 총회에서 운영해도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는 법은 없지만, 현재 사유화되어 가는 병원에서 신앙적인 분위기와 복음전파의 사역이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문제점입니다.
여러분! 학교나 병원이 옛날과 같지 않게 그리스도의 냄새가 점점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학교까지 그러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크게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물려 받은 학교와 병원을 그리스도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운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선교사 시대로부터 교회와 학교, 봉사기관인 병원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그리스도와 정신으로 운영하고, 계속해서 유전과 전통을 잘지키는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 되도록 힘써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보다 더 발전시켜서 구관보다는 신관이 낫다는 칭찬을 받고 하나님 앞에 가서도 잘했다 칭찬받는 오늘의 교회, 오늘의 지도자들이 되도록 하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년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앞날을 설계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기념사
기 념 사
정 복 량 목사
대회장, 전주 전성교회
토끼 모양의 한반도 중앙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거기로부터 남쪽으로 동해안을 따라 태백산맥이 뻗어 내리고, 그로부터 서쪽을 향하여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다시 뻗어 내려 서해안에 이르면서 산맥 사이에 평원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곡창 비사벌은, 창조 이래 복음의 불모지로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19세기 말엽은 이 민족사회의 근저가 흔들리고 백성은 심한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갑신정병 이후 사회적 정황은 몹시 불안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 있었습니다. 특히 호남지역은 동학란, 청일전쟁, 을미사변으로 이어지는 대혼란과 격변의 현장으로 어느 지역보다 많은 수난을 겪어야 했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나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탄압과 처형을 감수해야 했던 이 지역 주민들의 가슴속에는 깊은 상처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가려져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한국의 서남부는 절실하게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호남인들의 고통을 기억하시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1891년에 북 장로교회의 선교사 언더우드(원두우) 목사님이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시카고에서 한국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보고하시고, 네쉬빌에서 열렸던 미국 신학생 연합 외국 전도대회에서는 윤치호 선생이 한국에 대하여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 때 당시 맥코믹 신학교의 학생 테이트(최의덕)와 유니온 신학교의 학생 레이놀즈(이눌서)와 전킨(전위렴) 등 젊은이들의 가슴속에는 한국선교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미국 남장로교회 외국선교부에 지원을 하고 한국에 나오기를 서둘렀지만 당시 한국의 상황이 어렵다는 이유로 파송이 보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 기도운동을 벌인 결과, 한국선교의 문이 열려지고 드디어 그들은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1892년 10월 17일에는 데이비스 양이 11월 3일에는 테이트와 그 여동생, 전킨 부부와 레이놀즈 부부 등 7명이 최초의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들이야말로 호남인들에게는 진정한 기독교의 메신저들이요, 참 생명의 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파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버려진 땅에서 살고 있었던 호남인들의 영혼에 비취는 희망의 등불이요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일찍이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하여 교단을 초월해서 연합 사엽에 동참한 미국 남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부는 1893년에 열린 선교협회에서 호남지역을 선교지로 할당받아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처음 전주에서 선교 사업을 착수하였을 때 동학 난이 일어나 일시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흑암 속에서 헤매이던 호남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성서적이요 복음적인 신학에 기초한 뜨거운 신앙과 사랑으로, 거칠고 험난한 호남의 역사적 벌판에서 온갖 고생과 희생을 무릎 쓰고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고 달렸던 것입니다. 전주를 기점으로 해서 군산으로, 서천으로, 목포로, 광주로, 순천으로, 대전으로 달려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미국 남 장로교회는 450명에 이르는 선교사들을 계속 파송하여 고을마다 교회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워서 통합적인 생명신학을 실천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운동을 펴신 주님의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그들은 호남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선교 초기부터 장로회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성서신학을 교수하여, 한국교회의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의 기초를 닦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극단적 보수주의나 정통성보다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하여 교회를 위한 교회중심의 신학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선교초기부터 각 지역에 성경학교를 세우고 농어촌 교회를 위하여 평신도 지도자와 교역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자급 전도자들이 많이 육성되어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동리마다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자성경학교를 세워서 당시 무시되고 천대받던 여성들을 가르쳐,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여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1920년대에 최초로 호남지역에서 교회의 여성 조력 회를 조직함으로 조력회 운동이 전국에 파급된 것은 남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미개한 이 지역에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고 기독교 문화를 이루고자 수십 개의 소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등 교육기관들을 세워 인재양성에 힘써 왔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우리 총회 산하에 전주신흥중고, 기전여중고, 기전전문대, 예수간호전문대, 한일신학교, 군산실업전문대, 광주 수피아 여중고, 간호전문대, 광주보건전문대, 호남신학대학, 목포 정명여중고, 순천 매산 중고, 여중고, 대전 한남대학교, 대전신학교 등이 그 명문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지에 병원을 설립하여, 의학의 전문 지식과 의료시설이 없어 죽어가는 우리 민족의 육신과 영혼을 치유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오늘도 전주예수병원, 광주기독병원등 종합병원에서 전인 치유에 힘쓰고 있고 여수 애양원의 재활병원에서는 나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로 기독교의 실천적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1세기 동안 수십 명의 선교사들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선교의 현장에서 순직하여 그들의 묘소들은 오늘도 전주에서, 광주에서 말없이 그들의 사랑과 믿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보수적이고 뜨거운 순교적인 신앙은 호남지역에서 자라난 신앙인들의 가슴속에 살아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공산주의자들의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신 수백 명의 순교자들을 낳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수한 믿음과 헌신의 유산을 이어받아 총회 적으로,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공헌하신 자랑스런 얼굴들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지역은 비록 다른 지역에 비하여 10여 년이나 복음이 늦게 전파되었지만 1912년에 창립된 우리 총회의 보고된 통계에 의하면, 불과 20년 만에 전국 교세의 거의 20퍼센트에 육박하는 교회성장을 이루었고, 오늘에 와서도 인구밀도를 감안하면 결코 타 지역에 뒤지지 않는 교회의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서울에 있는 어느 큰 목회자에게 “나는 호남인이 아니지만 우리 교회의 교인 70퍼센트가 호남교인들입니다.” 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호남지방에 복음의 씨가 뿌리깊이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선교 초기에 호남인의 사회경제적 파탄과 종교 문화적 피폐와 정치군사적 억압이라는 역사적 조건 아래서 기독교 복음이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선교하신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고를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서 받은 신앙은 우리들의 역사에서 민족 신앙의 토대가 되었고 이 백성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 애국운동이 일어나고 기독청년들이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김인전 목사가 호남교인들의 심정을 담아 작사한 ‘전라선교 25주년가’ 중 몇 절을 인용함으로 결론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후렴) 기념합시다. 기념합시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영원 기념합시다.
동아반도 우리조선 4천여 년 이민족이
흑암중에 생활하고 죄악에서 신고하여
두눈있다 하면서도 보지못한 소경이요
두손있다 할지라도 속박당할 뿐이로다.
신성민족 이천만인 마귀노예 되었었네
화려강산 3천리에 지옥고통 뿐이로다
망망죄악 바닷속에 나올길이 전혀없네
불쌍하고 가련하다 구원할자 그 누구시뇨
자비하신 상제께서 무한하신 사랑으로
이백성을 돌아보고 그리스도 복음으로
저나하기 경윤하사 저태평양 너른바다
일엽편주 싣고오니 복음사신 이아닌가.
일천팔백 구십이년 동 11월초 4일에
경기도의 인천항구 하륙한자 일곱이라
상제님에 파송받아 우리 전라남북도에
인정풍속 생소함을 불구하고 내려왔네
산도설고 물도설며 인심조차 파측한곳
당하기도 어련고생 받을수도 없는핍박
당하고도 또받으며 수지않고 밤낮으로
가르치며 전파하니 영생하는 참이니라
계속하여 나온사신 다섯곳에 등대되어
선교사업 발달하여 택한백성 날로오네
못본눈을 보게하고 묶은손을 풀어주니
신령자가 얻었으며 의의자녀 되었도다
구주생명 빛으로써 아니비친 곳이없네
25년 오늘날에 일만 6천 참 열매라
할렐루야 찬송으로 영화로신 보좌앞에
하나님의 크신사랑 영원기념 하옵세다
우리는 향후 한국교회의 미래를 바라보며 미국 남장로교회 100년의 선교 유산을 고이 가꾸면서 이 민족을 위한 교회에 전통을 심화하고 발전시켜 교회의 갱신과 일치, 그리고 민족 통일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선교사들과 과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눈물과 땀과 피로 얼룩진 선교일선에서 전 세계를 향하여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고 성령의 능력으로써 평양으로, 북경으로, 모스코바로, 그리고 바그다드와 제 3세계로 우리 모두 줄기차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지구촌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한국의 오순절을 일으키사, 우리로 충선된 증인이 되게 해주시기를 기원하면서 기념사로 가름합니다.
1992년 9월27일
□ 기념대회
대 회 순 서
인도: 대회장 정복량 목사
대 회 사 ………………………………………………………………………… 대회장
하나님의 초청
예배의 부름 ……………………… 마태 28:19-20 ……………………… 인도자
송 영 …………………………………………………………………………연합성가대
찬 송 ……………………………… 13장 …………………………………… 다같이
교 독 ……………………………… 74번 …………………………………… 다같이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말씀속에서의 만남
찬 송 ……………………………… 273장 …………………………………… 다같이
기 도 ………………………………………… 증경총회장, 대회 고문, 남정규 목사
성경봉독
구 약 ………사 52: 7-10………………… 전북 여전도회연합회장, 이희주 권사
신 약 ………행 28: 30-31………………… 개혁측 증경부총회장, 김대전 장로
찬 양 ………………………………………………………… 전주시 교회연합성가대
(지휘: 유영수 집사, 반주: 박은미 선생)
설 교 …………………………………담대한 전파… 직전 총회장, 김윤식 목사
기 도 ………………………………………………………………………… 설 교 자
찬 송 ……………………………… 259장 ………………………………… 다같이
헌 금 …………………………………………………………………………… 다같이
봉헌기도 ………………………………………… 대회 재정위원장, 김대현 장로
경축의 시간
특 송 ………………………………………… 하늘노래선교단 지휘자, 최 관 선생
선교약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총무, 주계명 목사
기 념 사 ………………………………………증경총회장, 대회고문, 한완석 목사
축 사 ………………………………………………………… 전라북도 지사, 강상원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장, 기장증경총회장, 고문 최희섭 목사
인 사 …………………………………… 선교유공자 대표, 전 예수병원장 구바울
미국 장로교회 대표, 선교회 총무 김인식 박사
내빈 소개 ……………………………………………………… 대회장 정복량 목사
공로자표창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한영제 장로
기념품증정 ………………………………………… 대회 준비위원장 전수진 목사
대회선언문 …………………………………………… 대회 지도위원 송봉규 목사
광 고 ………………………………………………… 대회 사무총장 이점용 목사
세상속으로
송 영 ……………………………… 애국가 ………………………………… 다같이
위탁의 말씀 …………………………………………………………………… 인도자
축 도 ………………………………… 합동측 증경총회장, 대회고문 유인식 목사
□ 설 교
담대한 전파
사도행전 28 : 30-31
김 윤 식 목사
증경총회장, 종암교회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감격한 마음으로 감사 기념예배를 드리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바입니다.
기독교의 선교행적은 사도행전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람에서, 안디옥에서, 마게도냐에서, 유럽을 거쳐서 북미주를 경유, 태평양을 횡단하여 아세아 땅 한국에 100여년 전에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 복음을 직접 전한 미국장로교회는 1706년에 첫 노회가 조직되었고, 1717년에 첫 대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첫 총회는 1789년에 열리게 되었습니다. 남북전쟁 후 미국장로교회는 분열되었습니다. 1958년에 북장로교회와 당시 연합장로교회가 통합되었고, 1983년에 통합된 연합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는 재통합이 되어 남북교회가 분열된 지 120여 년 만에 통합의 성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미국교회의 내적인 사정으로 한국선교의 과정도 좀 다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884년 9월에 의사 알렌의 내한은 정규 선교사의 자격으로 오지 못하고 의사의 자격으로 내한하여, 정부와 관계개선으로 다음 해 언더우드 선교사가 정식으로 오게 하는 길을 열어준 셈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원래 미국개혁(Reformed)교회 신학을 졸업한 선교사 지망자였지만, 당시 미국 개혁교회(R.F.A)에서는 한국선교에 관심이 없었고 언더우드를 선교사로 파송할 계획도 없어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당시 미국장로교회 뉴욕노회의 파송으로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한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감사하고 기념하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 100주년은 1892년 10월 17일 인천에 도착한 미스 데이비스(Davises)와 그의 일행 7명이 내한하여 호남지방 선교를 시작함에 그 역사적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바대로 미국, 호주, 캐나다, 선교회들이 한국 선교에 동참하게 되어, 선교사역에 혼선을 방지하고자 선교회들은 지역을 분담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 남장록회 선교부는 제주도를 포함한 호남지역을, 캐나다 선교부는 함경도 지역을 맡고, 북장로교회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와 경북지방을 담당하고, 호주선교회는 경남지방 선교에 주력하였습니다. 각 선교회는 나름대로 선교에 주력하여 놀라운 성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역사적인 교훈을 남긴 것은 선교부의 역할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인식케 하고 있습니다. 함경도와 캐나다 선교회, 호남지역과 남장로교 선교회의 관계입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44회 이후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 상당기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노력하려고 했으나, 그것이 도리어 호남지역 교회들의 분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캐나다 선교회의 영향으로 기장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처럼 많은 교회가 이 땅에 세워졌고, 많은 교육기관, 의료기관 등, 이 민족 구원 역사가 성숙하게 진행되어졌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그간 이 위대한 선교사역을 감당해 주신 미국장로교회와 현지에서 순교하시고 고난과 싸워가며 애써 오신 선교사 동역자들과 그분들의 가족, 배후에서 후원해 주신 미국 남장로교회 가족들에게 뜨거운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1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00년 전에 씨를 뿌린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의 복음의 씨는 그간 싹이 나고, 자라고, 꽃이 피어서 이제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장로교회에 있는 선교부와 한국에 와 있는 선교회간에 협의를 통해서 이 시대에 적절한 선교정책으로 1983년에 자매관계(Sisters Church)에서 동역관계(Partner Church) 교회로서의 새로운 관계성을 가지고 함께 선교하고, 협력하여 세계선교의 동반자가 되도록 선교협정을 갱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미국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에 있는 모든 선굑부 재산을 우리 총회산하로 이관하여 주었고, 이제는 같은 사무실에서 선교동역자로서 훌륭한 사역을 담당해 나가는 중입니다.
미국장로교회와 선교부 직원, 그리고 선교동역자 여러분! 나는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여러분들에게 큰 절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선조들의 복음의 열정이 이곳 한국 땅에까지 전파되어서 우리들이 복음을 받고, 구원을 얻었으며, 우리 민족이 크게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날로 변천을 거듭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변화가 있다 해도 미국 남장로교회가 이곳 호남 땅에 뿌려 놓은 복음의 씨앗은 자라고 또 자라서 거목이 될 것이며, 세계선교의 큰 몫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는 영원히 변치 못할 사랑의 줄로 튼튼히 매여져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감사하는 동시에 많은 역사적 책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많은 복음의 빚진자로서 이제는 주는교회의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많이 빚진 사람은 많이 갚을 의무가 있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11장에 있는 안디옥교회를 연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환난으로 인하여 이방도시 안디옥으로의 피난은 그리스도인들의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가운데 교육에 크게 힘을 기울였습니다. 엘리트인 바울과 바나바는 큰 목회를 가르쳤습니다. 미국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선교에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호남지역에 많은 교육기관을 세워주셨습니다. 전주에, 광주에, 순천에, 군산에, 목포 등지에 세워진 교육기관들은 이 지역, 이 민족을 깨우치는 일에 놀라운 공헌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능한 민족 지도자들을 낳게 하였습니다.
친애하는 동역자, 그리고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이 기념예배를 통해서 선교동역자들이 남겨 놓은 교육선교의 정신적인 유산을 더욱 훌륭하게 계승해 나가야 한다는 다짐과 서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재로 섬기는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모국 예루살렘교회가 흉년이 들어 고난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맣은 구제금을 모아서 장로들의 손에 돌려보내주는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섬기는 일일 것입니다. 일찍이 선교동역자들은 성경에 가르치신 대로 섬기는 일을 위해서 예수병원, 광주기독병원과 애양원 등을 세워서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섬기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뜻입니다. 극단의 이기주의로 치닫는 오늘의 사회에 교회의 나아갈 길을 새롭게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안디옥교회는 선교에 열중하는 교회였습니다. 교육도, 의료도 선교의 일환이지만 사도행전 11:20에 있는 말씀에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헬라인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이방선교는 상상키 어려운 때에 성령으로 충만한 저들에 의하여 세계선교의 문이 크게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6월에 미국개혁교회(R.F.A)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총회 지도자들이 강조한 것은 한국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목사는 R.E.A의 교인이고 목사였는데, 우리의 관심부족으로 당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에 의해서 한국에 파송되었는데, 만일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들의 파송을 받고 한국선교에 힘썼더라면, 지금 한국에는 개혁교회가 중심이 되었을 터인데라고 아쉬워했습니다. 오늘도 R.E.A의 사람들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은 선교정책의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미국 남자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예배에 우리들을 향한 권고가 있습니다.
1. 지난 100년간 남겨 둔 선교의 유산들을 믿음으로 잘 계승하라!
2. 이방선교의 효시가 되었던 안디옥교회의 선교정책을 그대로 보여준 남장 로교 선교정책을 성공적으로 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지난날 받던 교회로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주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 선교에 열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미국 장로교회는 4가지 기본목표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장로교인으로서의 Identity 동질성 강화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다양성을 강화
셋째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행하는 선교와 목회에 대한 헌신을 다짐
넷째는, 새로운 눈으로 미래를 본다는 목표 아래 1억 5천만 불(약 1,200억원)의 예산으로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들도 동역교회들의 새로운 선교의 계획과 목표를 공감하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부름 앞에 경건한 대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미국장로교회에 깊고도 정중한 감사와 아울러, 그간 헌신하여 주신 선교동역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면서 축복받은 호남지역의 성도들과 함께 선교의 새로운 비전을 가슴에 새기면서 내일의 여명을 향한 우리들의 새로운 출발의 제 2의 사도행전이 시작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선교약사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년의 연혁
주 계 명 목사
총회총무
오늘 우리들은 호남지방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100년 전에 복음을 들고 선교사역에 임했떤 미국 남장로교 호남선교 100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장소에 모였다. 여기 이들의 사역이 너무 놀라와 모든 호남인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간단한 연혁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미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사로 활동했던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성공리에 선교사역을 하던 중, 안식년을 맞이해서 잠시 귀국하여 미국 전 지역을 순회하고 있었다. 1891년 10월에는 미국 네쉬빌에서 모인 ‘미국신학생연합선교회’에서 언더우드가 한국선교에 대해서 역설하자, 이때 미국 남장로회 소속 신학생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한국 선교에 뜻을 두고 지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보가 너무 어두웠고 또한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거절을 하였지만 독지가들의 헌금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자, 여자 4명, 남자3명을 선교사로 임명하고 1892년 9월에 미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개인의 건강사정 때문에 좀 늦게 한국에 도착한 사람도 생겨나게 되었다.
1892년 10월 17일 데이비스 여자 선교사가 최초로 인천항에 도착함으로, 호남선교가 역사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후 나머지 6명인 테이트(최의덕), 그의 여동생 베티 테이트(최마태), 전킨(전위렴) 부부, 레이놀즈(이눌서) 부부 선교사들이 그해 11월 3일 역시 인천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7명이 한국에 도착하자, 선교예항협정에 의해서 호남지방을 선교구역으로 삼고 그 전초 기지를 전주로 정하고, 1893년 2월 레이놀즈 선교사 조사인 정해원으로 하여금 전주 성밖 은송리에 자리잡고 예배드리게 된 것이 전주교회의 첫 출발이 되었다. 다시 1894년 2월에는 테이트 남매가 전주에 상주하면서 선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나 동학운동으로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선교가 재개되었다.
이들 선교사는 지방을 답사하고 선교지 확보를 찾던 중 군산에 선교부를 설치(1896)하였고, 그후 광주(1904)에, 순천(1912)에 설치하였다. 그런데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교회만 서립한 것이 아니라, 선교부가 설치되는 곳마다 미션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전주에는 신흥학교(1900), 기전여학교(1900), 군산에는 영명학교(1902), 멜본디여학교(1902), 목포에는 영흥학교(1903), 정명여학교(1903), 광주에는 숭일학교(1908), 수피아여학교(1908), 순천에는 매산남여학교(1913)를 설립하였으며, 또한 병원도 전주예수병원(1897)을 비롯해서 군산구암병원(1896), 목포푸렌취병원(1898), 광주기독병원(1906), 순천알렉산더병원(1913)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많은 선교활동을 했떤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출국당한 일도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다시 귀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던 중 대전에 선교부를 설치(1954)하고 이어서 한남대학교를 설립(1958)하였다. 이들의 선교구역은 멀리는 제주도로부터 시작해서 충청남도 서천, 부련, 부여지방ᄁᆞ지 활동하였다.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에서는 지금까지 45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1983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와 연합하면서 미국 장로교회 선교부의 선교사로 계속해서 호남지방에서 선교사역에 임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은 이들의 선교사역의 결과로 어느곳을 가든지 교회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선교 100주년을 맞이해서 미국교회 여러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면서 연혁을 소개하였다.
1992년 10월 18일 호남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 기념사
기 념 사
한 완 석 목사
증경총회장, 광주제일교회
주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개화파와 수구파의 피비린내 나는 분쟁은 마침내 1884년 갑신정변으로 번져, 궁중의 혼란은 물론이요 민란마저 곁들여 세상이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그때 미국의사 ‘알렌’ 박사가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뎠고 그 다음 해인 1885년에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복음의 사신으로 이 땅에 들어온 지 8년이 지난 1892년 10월 18일, 다시 말하면 100년 전 이 날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데이비드 목사가 워싱턴 D.C.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공사로 있던 이자윤 부인과 함께 태평양을 넘어 제물포에 상륙한 것이 남장로회 미국선교회의 기점이 된것입니다.
이때는 이미 세계 각국에서 파송되어 이 나라에 와서 선교하고 있는 9개 교단의 선교사들이 있는 때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선교전열을 가다듬어 1893년 1월 28일 한국 주재 선교사들을 전원 회집하여 장로교 치리 정치 준수의 선교사공의회를 열어 선교지역을 분담하게 될 때 전라도와 충청남도를 남장로회 선교부가 맡아 오늘까지 호남지방과 남장로회 불가불간의 동체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맺어 선교역사 어언 100년 한동안을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오늘의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게 되었으니, 초대교회의 선배님들은 거의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는 실로 감개무량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도바울 선생은 로마서 10: 13~15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전하려고 선교사들이 이 고장에 발을 디디려 할 때 1893년 2월에 이눌서(레이놀즈) 선교사가 그의 비서 정해원 친구를 먼저 전주에 보내어 거처를 준비하였습니다. 동년 9월에 첫선교사 테이트와 전킨 두분이 전주로 오는 도중 때 아닌 폭우로 급류에 휘말려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구하게 된 것은 전도자가 가야 할 수난의 서곡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 국내사정을 보면 조정의 부패와 외국인들의 침입하에 경제계가 혼란했고 안으로는 탐관오리들이 성행하여 과세추징과 압정으로 농민들은 도탄에, 백성들은 원한에 사무치던 때였습니다. 이와 같은 와중에 고부군수 조병갑이 새로 부임하여 가진 학정을 다함으로 농민들은 1894년 고종 31년에 동학농민 혁명이란 병란을 일으켜 1년동안에 3,4만의 희생자를 내어, 그야말로 전라도는 쑥대밭이 되었고 민심은 험하여 공포사회를 형성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선교사들이 낯선 땅을 찾게 되었으니 그 때의 어려움이 얼마나 컸던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격량의 현장에서 굴하지 아니하고 착착 선교를 시작해 나갔던 것입니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것은 물론이요, 생활양식과 사회구조의 이색 속에서 기성종교의 배타성, 거기에 걸쳐 무속종교의 도전은 감히 인내하기 어려운 형극의 역정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기획은 한치의 차도 없이 포교와 더불어 병원을 설립하여 개화의술로 많은 환자들을 고쳐주었고, 나환자도 치료하여 소생시켜 국민들의 절찬을 받기도 했고, 다른 일반 학교를 설립하여 문맹의 거리에서 방황하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신문화와 지식을 전수하였으니 여기서 이 지역 애국자들의 산실이 되었고 수많은 지도자들의 요람이 된 것입니다.
더욱이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국가적 치욕 속에 미천한 교인들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제와 싸우기를 시작하였고, 1919년 기미독립운동에 주역을 담당하게 되었다가 광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수많은 희생자만 내고 말았으나, 나라와 민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국민들이 분명히 깨닫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제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일제는 기독교를 적성국의 종교라고 몰아쳐 핍박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신사참배는 동방요배이었고, 거기다 내한 일체라는 구호 아래 창씨개명과 징병제도를 내려 민족혼을 뿌리 뽑으려는 만행으로 단말마적인 악정이 무소부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 우리는 장로교 총회는 1938년 제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예배당은 작업당으로, 교회종은 군납으로, 성경, 찬송은 일제정책에 어긋나는 곳마다 먹칠하여 지워 버리고 또 찢어 그야말로 교회는 만신창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최악의 수단으로 교회를 박해할 때 인간의 인내는 한계가 있는지라 최후에 자학방법으로 병원과 학교의 정문에는 철장으로 폐쇠해버렸고 목메어 부르짖는 학생들의 울부짖음도 아랑곳없이 폐교를 선언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선교현장을 떠나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걸었던 골고다의 길이요 선교자가 가야 할 가시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전쟁은 종말을 고하고 세계 역사는 지구상 국경선을 다시 그어 승과 패의 결론은 원형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악의적인 일본의 사꾸라는 하룻밤 세풍에 낙화가 되고 숨겨 놓은 무궁화는 양지속에 미소를지며 꽃을 피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요 선과 악의 열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6년간 나라 잃고 종노릇하던 우리 나라는 해방의 자유를 얻게 되었고 철못으로 닫았던 학교문과 병원의 대문은 활짝 개방되게 되었으니 연약한 이나라 학도들이 주야로 부르짖은 기도를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진저, 눈물짖고 돌아갔던 선교사들이 웃음짓고 이 땅을 다시 찾아 돌아왔으니 오직 높으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로 찬양할 뿐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의 민족복음화를 위한 연단이었고 시련이 아니었던가 그저 엎드려 값없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는 자유 속에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교회는 사분오열되어 한 지체는 동서와 남북으로 찢어졌고 일치된 이목구비는 기능마저 상실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장로교단을 만든 작품을 우리들의 손으로 산산조각 찢어 놓고 말았으니 선배들의 지혜로운 예지에 무슨 말로 변명할 수 있겠는가, 그저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잘못을 책임지고 언젠가는 본래의 위치로 통일하는 작업을 완수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백년의 세월 속에 선교역사의 현장은 변천의 극치를 이루어놓았습니다. 남장로회 선교부의 모체는 미국 북장로회와 통일하여 이 땅에 설립했던 모든 기관은 현지 교회로 이양되어 한국교회는 낙락장송과 같이 거목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00년 전 겨자씨와 같았던 우리 장로교회는 명실공히 장자교회 답게 성장하여 이제는 복음선교를 역수출하는 현상을 가져왔으니 할렐루야!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오묘하신 그 뜻을 입을 모아 찬양할지라. 우리는 이제부터 또다시 100년이 가고, 1000년이 지나도 우리 호남교회의 요람인 남장로교교회의 역사적 은혜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축 사
축 사
강 상 원 지사
전라북도 지사
한완석 총회장님과 정복량 대회장님! 그리고 신도 여러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원드리며 진난날 우리 고장이 선교사업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것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1세기 전 암울한 시대의 척박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내한하신 선교사님들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며, 지금도 신도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계시는 수많은 순교자님들의 실천적 사랑과 믿음에 한없는 경의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개화의 여명기에 선교사업을 위해 고을마다 세운 교회는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의 기틀을 마련했음은 물론 이와 함께 펼친 의료사업은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새로운 학문과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설립한 교육재단은 기독교의 실천적 사랑을 통해 영혼의 무지함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그후 이나라의 근대화를 앞당기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일곱 분 선교사님들께서 시작한 선교사업이 밀알이 되어 오늘날 번영된 나라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고, 이제 신앙적으로도 선택받은 나라가 된 것은 모두가 그분들이 흘린 눈물과 피의 대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지역 신도들께서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선교사들의 유업이 헛되지 않도록 오늘에 거듭나야 하며, 이 민족을 일으켜 세운 교회의 전통을 받들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지금 민주화와 개방화의 전환기적 과정에서 가치관의 혼돈과 도덕성의 실종을 겪고 있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복음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때라고 생각됩니다. 고난의 역사를 슬기롭게 헤쳐 왔던 신앙의 횃불을 다시 밝힘으로써 이시대가 요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기념식이 위대한 선교유산을 한층 더 계승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성령의 불길이 온누리에 불타오르기를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다시 하번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을 마음 깊이 축원드리며, 여러분의 교회와 시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92. 10. 18
□ 대회선언문
선 언 문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으로 1892년 10월 18일 이 땅에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을 보내어, 죽어가는 우리 백성의 영혼을 살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제의 학정 속에 갖은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민족의 장례를 위하여 기도하였던 신앙의 조상들의 눈물과 6.25 동족상잔의 전란 속에서 순교 당한 순교자들의 피를 상기하면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죄를 위하여 속죄의 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앙을 고백하고, 이 땅 위에 정의와 진리를 펴신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감사드리며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은혜속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대가로, 수많은 교회들이 성장하고 세계역사상 보기드문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을 감사드리며, 특히 우리 민족을 위하여 교육기관을 세워서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하여 수많은 의료기관을 세운 그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드리며, 그들의 고귀한 뜻을 이 땅에 영원토록 간진학 것을 선언합니다.
2. 우리는 1세기 전 선교사들이 이 땅에 뿌린 순수한 복음의 의미를 이 시대에 재조명하여 팽배해 있는 물량주의, 패권주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계층 간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회개운동을 전개하고, 교회가 한국역사에 맡 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갱신운동을 전개하고 확신할 것을 선언합니다.
3.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지난날 미국 남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복음의 열정과 용기를 본받아, 이 시대의 현실이 병등수록 현실동화보다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성령 님의 인도를 받아, 민족과 교회의 역사에 책임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뜻을그 역사 가운데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와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4. 우리는 선교사들의 교육정신을 본받아 병든 사회의 현실을 고치기 위하여 탁월한 지도자들을 육성하여, 이 시대를 개혁하고 나아가 세계선교의 문을 열어, 세계 만방에 선교의 빚을 갚는 교회들이 되기 위하여 힘을 합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합니다.
1992년 10월 18일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대회 참석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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