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1장
구원론적인 하나님의 섭리(9:1-11:36)
로마서 9-11장은 로마서 전체에서 중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 분석에 의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에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구원론적인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를 살펴 볼 수 있는 곳이 로마서 9-11장이다.
1. 이스라엘의 선택과 유기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9:1-10:21)
사도 바울은 그를 이방인에게 보내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방인의 사도로 불린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9장 1-3절에서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기를 심히 원하였음을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심지어는 자신이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들을 위하여 대신에 죽을 것도 각오한 비장함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사도의 부르심에 있은 것은 유대인과 함께 이방인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전파하는 것에서 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의 사도요 또한 이방인의 사도였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며 배척함에 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악의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를 알려주고자 하였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거역함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으셔서 영광의 광채가 가득한 구름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베풀 복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율법을 주심으로써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위대한 약속을 주셨다. 그러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산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있게 하셨다. 육신으로 말한다면 그들이 거부하며 배척하는 그리스도도 그들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인 유대인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와 유대인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리스도와 같은 유대인인 그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선민으로서 믿음의 조상이 받은 복을 받음에 함께 하려 한다면,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배척함에 있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참 이스라엘에 대한 설명을 해 준다. 이를 다음과 같은 논리 정연한 이야기로 해 나간다. (1) 9:1-13. 약속을 잇는 자손 (2) 9:14-24. 토기장이 비유 (3) 9:25-29. 남은 자 사상 (4) 9:30-10:10. 믿음으로 얻는 구원 (5) 10:11-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듣고 순종하지는 않음.
1-1. 약속을 잇는 자손(9:1-13)
9:1-13 / 1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1절에 포함됨)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사람인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다. 육체를 따라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참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외에도 다른 아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은 이삭과 그 약속을 잇는 자손에게만 적용되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아닌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구원의 약속을 믿는 사람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때문이다. 옛적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년에 내가 너와 사라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에 사라는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잇는 아들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외에도 하갈을 통해 먼저 낳은 이스마엘이 있었으며 그리고 여러 아들이 더 있었으나 아브라함의 기업을 이을 후사는 오직 이삭 한 사람 뿐이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아들 이삭이 성장하여 결혼하였으며, 그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낳을 때,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쌍둥이 형제 중에서 먼저 태어나는 아들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기록된 성경 말씀 그대로 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그들이 아직 아무 선한 일도 악한 일도 행하기 전에 하신 것이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것을 그 기뻐하시는 원하심대로 실행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1-2. 토기장이 비유(9:14-24)
9:14-24 /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기쁘신 뜻대로 실행하심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는 자손(갈 3:16)에 의하여 긍휼을 베푸심으로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분이심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것에 의해서 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누가 불평하며 불만을 토로하고 힐난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자비는 누가 그것을 얻으려 결심을 했다거나 노력을 하였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고자 하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완고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신다. 애굽의 바로의 경우가 그 실예이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애굽에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이신 하나님만이 오직 살아 계신 참 신이심을 그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퍼지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인 유대인을 하나님은 질책하신다. 왜 그러시는가?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까닭이다. 이에 대해 이렇게 묻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거역하는 것을 왜 나무라십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로 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이다. 이를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누가 그렇게 말하며, 감히 하나님을 비난하는가? 만들어진 물건이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하고 말할 수 있는가?(사 29:16, 참조, 사 45:19).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모두 만들 권리가 있지 않은가?(렘 18:6) 하나님께서는 애굽 바로의 마음을 강팎하게 내벼려 두셨듯이 또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 진노와 힘을 보이실 당연한 권리를 하나님께서 지니시지 않으신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멸망할 인간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줄곧 참아 오셨으니, 이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차별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풍성하게 베푸시려고 지으신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시려는 것에서 이다.
1-3. 남은 자 사상(9:25-29)
9:25-29 / 25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선지자 호세아가 기록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입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려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이들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해변의 모래알같이 많을지라도 지극히 적은 수만이 남아서 먼 훗날에 돌아오는 것에서였다(사10:22-23. 참조, 호 1:10) 이는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소멸시키기로 이미 작정하심으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해질 것에서 구원을 받음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사 1:9).
1-4. 믿음으로 얻는 구원(9:30-10:10)
9:30-10:10 / 9: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0: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앞서 말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얻는 죄 사함의 구원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으로 죄 없다는 선언을 받을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열심을 갖고 지키면서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는 믿음에 있지 않고 단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은 예수라는 큰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나 그 돌이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는 믿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든든한 반석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씀하신데 따른 것이다. `내가 시온산 위해 튼튼한 주춧돌을 놓겠다. 그 머릿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이는 멸망하지 않는다!' (사8:14,28:16) 이 예수님은 율법대로 따라 살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한 그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신 율법(레 18:5)의 종결이시오 또한 예수님은 주이심을 입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므로 얻게 하신 구원의 시작이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서 얻게 하신 생명의 구원을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식이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하신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롬 3:20, 갈 2:16).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의로운 사람이 되는 길이라 여기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쓸 뿐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께 믿음을 갖지 않음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지 못한다.
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듣고 순종하지는 않음(10:11-21)
10:11-21 /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를 것이 없다. 그들 모두는 같은 한 주님을 모시는 것이며, 주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누구이든지간에 그들 모두에게 풍성한 복을 아낌없이 주신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욜 2:32).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듣고 순종하지는 않는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사 53:1)라고 말한 그대로 이다. 그런즉 주님을 믿지 않는데 어찌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청할 수 있겠으며, 주님의 이름을 듣지 않는데 어찌 주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참으로 주께 감사를 드린다. 누가 우리에게 주님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들을 수 있었으며, 또 보내는 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누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님을 말하여 알려줄 수 있었겠는가? 성경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사 52:7, 참조, 나 1:15). 그러니 믿음은 우리에게 전파된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며, 그들이 있는 곳이면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음에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계속 자신의 팔을 벌리고 계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를 거부하였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유대인을 향한 구원이 이방인을 향하게 하여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품에 들어올 수 있게 하셨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20절, 사 65:1). 그리고 이를 통해서 또한 유대인에게 시기심을 일으켜 부끄러움을 당함에 있지 않게 하셨다. 해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시오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심을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게 함으로,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하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아니니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외에는 그 음성을 듣지 않는다. 이 또한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예언의 성취에 따른 것이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21절, 사 65:2). 이는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고(팔을 벌리고) 너희를 도와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나에게 나아와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말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11:1-36)
여기에서는 9-10장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이 갖는 의미와 함께 그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친돌로 여겨 버림으로써 그들이 버린 돌에 그들 스스로가 걸려 넘어진 잘못을 언급하루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곧 온 세상에 있는 천하 만민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 얻게 하셨으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악한 죄에 있음에도 하나님은 작정하신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에서 다음 아래의 사실을 다룬다. 11장에서 보게 되는 그 내용을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에 있는 참이스라엘(11:1-10)
2.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11:11-24)
3.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11:25-36)
이상의 내용분석에 의한 구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유대인 및 이방인 모두의 온 세상을 향한 구원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살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섭리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능력을 행하심에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 삼아 선민 삼으신 선택의 은총에서 설명해 나간다. 우리는 이 사실을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섭리해 가시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온 세상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에 있어서는‘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등장시키고 이방인에게로 넓혀 가신 후 모든 사람에게로 그 범위를 더욱 확장해 가시는 섭리를 행하신다. 바울 사도는 이를 9-10장에서 이스라엘의 선택과 유기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이란 논증적 변론을 통해서 설명하였었다. 바울의 이러한 변론은 앞서 3-8장에서 우리의 구원이 율법을 지키거나 어떤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얻어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에 나아감을 얻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방인 그 누구에게도 결코 율법의 멍에를 씌울 수 없다는‘오직 믿음의 의에 의한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게 된 것이다. 바울 사도의 이러한 주장은 율법과 행위를 강조하는 유대인의 유대주의에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또한 이스라엘이나 선민의 특권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고 할 것이다.
유대인은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은 버림받은 민족이라고 여겨왔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선택을 이야기하면서, 이들이 믿음에 의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지 않고 율법의 행함으로 선한 사람이 되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불신앙하여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예수라는 큰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으나, 이는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을 마음과 입에 두심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사실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그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다 함을 얻어 구원에 이르려고 함으로 하나님의 뜻과 다른 멸망의 길을 걷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힘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은혜로 입게 하시는 섭리를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로마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중심한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선민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며 어떻게 섭리하시어 세상 구원에 이바지하게 하셨는가에 대하여 정확한 관념을 제시하여 주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있어서 앞서 9장 25-29절에서 본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다루고 있는 11장을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필요할 것이다.
2-1.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에 있는 참이스라엘(11:1-10)
11:1-10 / 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로마서 9-10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신 선택의 은총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선민 삼으셨음과 이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버려두셨음을 섭리해 나가셨다는 것을 말씀한다.
그런데 이제 11장에 이르러서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 그래서 이스라엘인 유대인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없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해 그 대답을 해나간다. 11장은 이신칭의(이신득의) 진리가 계시된 시점에서의 이스라엘이 갖는 위상과 구약 선민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전인류 구원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기록한 것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바울은 현재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멸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 중에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그리스도에 의한 은총으로 남은 자들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비록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소수에 불과할 것이지만 이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세상 끝까지 계속해서 지속되어 간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더불어 복음에 대한 유대인의 거부로 구속사의 중심이 이방인에게로 옮겨져 장차 이들의 충만한 수가 찰 것인데 이는 참 감람나무 가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려나간 원가지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이시는 긍휼을 베푸시며 또한 원가지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는 그 때가 오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 구원받아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다 구원의 충만한 수가 될 것이란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해 나간다.
여기에 있어서 11장 1-10절 부분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을 통해서 참 이스라엘을 말해 준다. 1절의 “그러면 내가 묻겠다…셨느냐?”는 본 절 외에도 11절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여기서의 의문문은 부정적 대답이 기대되고 있는 것으로서“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라는 시편 94편 14절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자기 언약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심을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한 질문과 부정의 대답으로서 자신있게 선언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으로, 너무나 확실하여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인 참 이스라엘의 구원을 내다보는 일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에 찬 선언을 하는 것은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여 주신 확실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자신을 들어 말한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베냐민 지파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 ‘베냐민 지파’란 표현은 바울 자신의 족보를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역시 확실한 이스라엘 사람임을 삼중으로 강조한 것이다. 바울이‘이스라엘인’이라는 표현 외에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고 자신을 묘사한 그의 의도는 칼빈이 제안한 것처럼 아마도 단순하게 ‘자신이 진짜 유대인으로 간주되기 위해서’일 것이다. 바울은 삼중적인 표현을 통해서 자기가 어김없는 히브리인인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참 이스라엘로 삼아주시고, 게다가 자기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 절대적인 근거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근거를 통해서 만약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면 무엇 때문에 자기와 같은 순수한 이스라엘인이요 유대인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사도로 삼으실 이유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와 같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참 이스라엘인 남은 자가 있으므로 그들을 모두 다 구원하시기까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있어서 바울은 두 가지의 중요한 원리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미리 아신’은 헬라어에서는 부정 과거 시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예정 예지적 활동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하나님 자신에게서 기원된, 즉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무리 중에 포함되는 자들인 이스라엘의 일부인 남은 자들이다. 이들이 참 이스라엘로 섭리되고 있는 것은 이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이유로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하지 않은데 있다. 이스라엘이 비록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배척했을지라도 그들 중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선택에 포함된 자들이 있음을 바울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1절에서의 자신의 예와 더불어 엘리야의 예를 들고 있다. 엘리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때 온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기는 것처럼 보였고 그런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항변하는 자신만이 홀로 있는 것으로 알았으나 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7천명을 남겨 두셨다(왕상 19:9-18).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둘째는,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의 선택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와 같이 지금도’는 남은 자가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전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이 시대(신약)에도 그 남은 자가 어떻게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답을 주는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은혜의 선택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은혜’란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 행위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구원 사역의 모든 결과들의 본질이다(롬 3:24). 그리고 ‘선택’이란 말은 독점적인 하나님의 선택 행위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엘리야 때의 남은 자들에 이어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택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구원이 함께 하는 남은 자들이 된 이스라엘과 관련시켜 말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된 것이 그들 스스로의 결단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을 따라 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6절에서 이 은혜의 선택을 따라 남은 자가 된 것의 은혜성을 행위와 대조하여서 부각시킨다. “은혜로 된 것이라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이미 은혜가 아닌 것이다.” 바울은 9장 29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시지 아니하셨더면(몇 사람이라도 건져주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라고 하는 이사야 1장 9절의 인용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완고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지 않음으로 멸망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남은 자들을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셨는데, 이제 이곳에서 그것이 이미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은데 따른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만일 선택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 아니고 선을 행해서 되어진 행위의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을 해서 얻는 것과 같아서 값없이 주는 선물이 될 수 없을 것이니 이미 은혜가 아니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는 말은 ‘더 이상 행위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만약 선을 행하는 사람의 행위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서 앞에서의 ‘은혜로 된 것’을 사실상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사실을 구약 성경의 여러 곳을 들어 설명하였다.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심판권을 행사하셔서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라고 하셨고, 그 때문에 그런 자들은 심지어 구세주를 기다리다가 자기 목전에 나타나신 주를 보고도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주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며, 마치 사냥꾼이 설치한 올가미에 동물이 걸려들어 기운이 빠지고 맥이 풀려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듯이 복음을 믿지 않고 행함으로 구원받으려는 율법주의를 고집하는 유대인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설명하였다. 그럼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 마음에 있고 그리스도를 보고 듣는 눈과 귀에 있으며, 율법주의의 올가미가 없이 자유한 믿음에 있는 것이 그를 은혜로 선택한 하나님의 섭리에 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2-2.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11:11-24)
11:11-24 /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을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스라엘도 구원함으로 온 세상의 구원이 되게 하셨는지를 설명한다.
11절의 시작을 “그러면 내가 묻겠다. 그들이 아주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로 하고 있는 것은 뒤이어서 말하고 있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 도리어 그들의 실족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미쳐서 이스라엘에게로 시기나게 하였다.…시기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 얼마를 구원할까 하여서이다.” 부정적 대답이 예상되는 의문문을 사용함으로써, 복음을 받는 일에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그러한 상태가 영원히 그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실족으로, 곧 불순종으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감으로써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시작되어 온 세상이 풍성한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때에는 얼마나 더 큰 복을 누리겠는가를 바울은 말한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구원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여 저들이 하나님의 구원에로 나아오도록 하는 방편을 삼으셨다(11-12절).
이러한 논법은 13절 이하에서도 계속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심으로써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져 이스라엘의 버림이 세상의 화해가 되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때에는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면서 두 가지의 예가 제시된다.
첫째, “첫 열매가 거룩하면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하다”를 예로 제시하였다. 여기서 ‘첫 열매’와 ‘떡덩이’, 그리고 ‘뿌리’와 ‘가지’는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민수기 15장 17-21을 인용한 것으로 첫 열매(처음 익은 곡식)를 하나님께 바치면 그 해의 모든 열매를 다 바친 것을 대표하게 되어 곡식을 빻은 것에서 있게 되는 그 해의 음식물도 하나님께 속하게 되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고,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다면 여기에서 나오는 모든 가지도 거룩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회복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므로 이스라엘이 나온 첫 열매라고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의로 의롭다 함을 받아 거룩한 자로 받아들여졌다면, 그가 지닌 믿음을 좇아 나온 그의 자손들도 또한 거룩한 자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둘째,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끊겨져 본성을 거스려 참감람나무에 접붙혀졌다면 하물며 원 가지인 자들이야 원 감람나무에 얼마나 더 잘 접붙임을 받겠느냐!”를 예로 제시하였다. 참감람나무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 가운데 얼마가 꺾이고 그 꺾인 참감람나무 자리에 돌(야생) 감람나무가 접붙혀져 참 감람나무의 기름진 뿌리의 진액을 받아 돌감람나무의 가지가 보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므로 선민 삼으신 이스라엘에서 떨어져 나가 멸망에 처해졌으나 그 떨어져 나간 원 가지에 이방인을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누리는 복의 혜택을 돌감람나무로 표현되어지는 이방인들도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참감람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앙하므로써 그리 된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접붙여주실 것을 말씀하신다. 돌감람나무 가지에 불과한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여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주셨는데 하물며 원 가지인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다시 접붙여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위 두 가지 예의 제시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은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통한 이방인의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론적 방법을 알게 해주시는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예언의 말씀이나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나 교회의 시작까지 모두가 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특권아래 주어졌는데도 도리어 유대인이 불신앙하여 그 구원과 축복의 혜택이 이방인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에 유대인의 자각을 촉구하여, 결국은 유대인이 대폭적으로 주께로 돌아와 본래의 특권과 영광을 되찾게 된다는 참으로 묘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다룸으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시고 있다.
2-3.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11:25-36)
11:25-36 /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한 비밀을 밝힌다. 그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하여지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하는 것이다. 바울에 의하여 비밀이 드러나 밝혀진 것은 이방인들 중에 그리스도께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올 때까지 이것에 의한 이스라엘의 시기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구원하시는 이가 시온으로부터 오셔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제하실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할 때에 그들에게 대한 나의 언약이다”(사 59:20-21) 라고 기록된 것과 같다. 시온으로부터 구원자가 나와서 야곱의 후손을 모든 불경건에서 돌아서게 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그들의 죄를 없애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복음의 불신앙에서 보인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은 이방인에게는 유익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줄 선물을 이방인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이 영원히 유기된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 때문에 변함없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에 자비를 베푸셨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으나 그들도 돌이켜서 이방인들이 입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에게 골고루 자비를 베푸시려고 온갖 불순종을 참고 계신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란 사실을 주저 없이 말한다. 바울은 이를 찬송의 시로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 기사의 종결부인 11장 33-36절에 이르러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는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서 구약 선민 이스라엘이 갖는 위상이 무엇인지와 더불어 구약 선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의 구원의 원리와 그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나타나는 절대 주권에 대하여 말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과의 언약적 사랑이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삼으시는 자비로 나타내시고, 또한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시기심을 일어나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여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구속사의 전개 과정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에 따른 것이다.
이 가운데 33-34절은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를 찬양하고 있는 시이다. 여기에는 당시 바울이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를 깨달으면서 감격하는 표현이 잘 드러난다. ‘깊도다…부요함이여’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오, 부의 깊음 혹은 부의 무진장함이여”이다.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를 이처럼 ‘깊음’으로 표현한 것은 ‘무진장’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측량할 수 없거나 불가해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와 ‘지혜’와 ‘지식’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심오한(깊은) 속성을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심오한 속성을 감격해 하며 갖는 찬양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코자 하시는 경륜의 한 단계이며,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는 비밀을 깨달은 데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하심과 그의 지혜의 오묘하고 그의 지식의 깊이는 제아무리 뛰어난 이성과 지성의 소유자라도 감히 헤아릴 수 없고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측량할 수 없도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그의 상담자가 되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한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이를 깨닫게 하셨으며, 그를 통해서 그 비밀의 오묘함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6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주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이제 끝부분인 36절에 이르러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와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도다. 아멘.” 하는 송영으로 종결한다. 모든 만물의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아 왔다는 것이고, 또한 만물은 주께서 섭리하심으로 주 뜻대로 유지되어 나간다는 것이며, 더구나 만물은 주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마지막 결판을 내게 된다는 뜻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명 깊은 찬양이다.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주관자 되심과 최종 목적이 되심을 깨달은 모든 피조물이 소리 높여 외쳐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섭리론적인 사역에 우리의 믿음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창조와 그 세계의 경영에서 말해지고 있으며, 특히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로마서 11장의 내용 분석에 의한 고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의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상의 이방인들과 완고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오게 하는 일을 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우리는 단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라고 찬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고 창세 전에 택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이를 섭리해 나가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임을 확인케 하는 것이요 겸손함으로 그 은혜에 더욱 견고히 서나가게 하는 것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