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배역과 사건을 활용한 저항의 시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만죽]

1부 국권 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가상 배역과 사건을 활용한 저항의 시

우리 오빠와 화로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었어요

왜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 날 밤에

연거푸 맡는 권연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었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 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 가슴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소리와 함께 ㅡ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糸機를 떠나서 백장의 일전짜리 봉투에 손톱을 뚫어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투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

오빠-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에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갔습니다

눈물 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슬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어 이만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동생

출처 (임화문학예술전집 1: 시》 (2009) 첫 발표 (조선지광》(1929. 2)

임화 林和 (1908~1953)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일제강점기 카프 서기장을 맡았고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였으며 한국전쟁 직후 남로당계 숙청 과정에서 처형되었다. 주요 시집으로 카프 해산 무렵의 좌절감과 낭만적 극복 의지를 노래한 《현해탄》(1938), 해방기의 정치의식을 담은 《찬가》(1947) 등이 있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조직적 저항으로서의 시

흔히 시는 개인의 주관적인 내면을 표현하는 목소리로 여겨진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사회 현실에 깊이 감응하고, 나아가 집단행동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될 때도 있다. 애초에 시가 정치·사회 영역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일제강점기 카프의 시가 그러하다. 그리고 이 작품 <우리 오빠와 화로〉는 그중에서도 전범(典範) 격이라는 평을 받아 왔다.

이 시가 발표된 1920년대 후반 한반도에서는 제조업의 규모가 확대되고 있었는데, 특히 경공업의 비중이 높았다. 시에서 삼남매의 직장으로 암시되는 인쇄 공장, 제사(製絲) 공장, 연초 공장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연관된다. 그런데 당시 공장의 노동 현실은 더할 나위 없이 비참했다. 공장노동자는 고용이 불안정한 자유노동자에 비해 그나마 처지가 나았다고는 하지만, 많은 이들이 생계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고 하루 12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강동진, 1980: 518-527).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공장에서 보냈다는 ‘영남’의 일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쟁의 역시 꾸준히 증가했다. 공업이 발전하고 공장노동자 수가 급증하면서 성장한 노동운동은 지역별·산업별 노동조합 연합체를 지향하고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파업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에도 노동운동이 결속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주체적인 의식이 있어야 했다. 이에 따라 강습회, 순회강연, 잡지 회람 등이 의식 제고의 밑거름이 되었고, 사회주의 문학예술운동 단체 카프가 여기에 관여했다. 연극·영화·미술 등의 분야에서 노동계급의 각성을 도모하였으며 파업 현장에서는 카프 시인의 작품이 낭송되기도 했다. 카프 시는 시 창작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추동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 카프 시의 양식적 전범

그러나 시가 현실 저항의 역할을 맡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노동계급을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생경한 이념적 어휘나 식상한 선동 문구가 작품 속에 남발되기 일쑤였다. 이에 대한 반성이 카프 내부에서 일어나던 차에 <우리 오빠와 화로＞가 발표되었고, 평론가 김기진의 상찬을 받는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소설처럼 생생한 사건을 전하고, 그러면서도 시의 압축성을 살리는 이른바 ‘단편 서사시’ 양식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김기진, 1929). 비록 단편 서사시라는 명칭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기는 했지만, 김기진이 지적한 작품의 면모는 지금까지도 대체로 인정받고 있다.

이 작품에는 노동자 남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부모가 없는 집에서 오빠가 가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한데, 어느 날 밤 그는 고뇌에 찬 모습으로 연거푸 담배를 피우고는 집에 들이닥친 누군가와 함께 떠나 버린다. 행선지는 화자가 있는 ‘세상’과 격리되어 있고 ‘떨리는 몸’으로 지내야 하는 감옥이다. 거칠게 들이닥친 자들은 아마도 형사나 경찰일 것이다. 한편 오빠와 그 친구들이 “세상을 뒤집”는 동안 그 일이 알려진 모양인지 동생들도 공장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두 동생은 좌절하지 않는다.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지금의 섭섭하고 분한 일에 함께 싸워 줄 ‘우리 동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열심히 오빠의 옥바라지를 하는 화자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비록 긴 소설처럼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한 편의 사건이 시 속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몇몇 표현들은 시에 현실감과 생생함을 입힌다.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와 같은 정겨우면서도 쓰라린 대화나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골며 자는 애틋한 동생의 이미지가 그러하다. 이에 더해 시가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현실의 사건을 진솔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당시 편지는 연간 발착 수가 인구의 30배에 이를 정도로(천정환, 2003: 157)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핵심 수단으로 기능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시는 평이한 언어로 현실의 사건을 그려냄으로써 당대 노동자와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생경한 어휘나 식상한 구호 없이도 이러한 성취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카프 시의 중요한 양식적 가능성으로 보였다. 또한 사건을 묘사하되 시어의 암시성과 압축성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은 문학성이 척박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던 카프 문학의 입장에서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었다. 오빠가 떠나고 두 동생만 남은 상황을 ‘거북무늬 화로’가 깨지고 ‘화젓가락’만 외롭게 남은 형상에 빗댄 것, 오빠가 떠나던 날의 급박한 사정을 ‘쇳소리’, ‘거치른 구두소리’라는 청각적 심상으로 압축시킨 것이 그 예이다. 오빠를 수식하는 ‘사랑하는, 용감한, 위대한’ 등의 표현이 과도하게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선명한 관용구의 반복을 통해 청자의 의식을 고양하는 구어체 텍스트의 전통에서 보면 큰 흠결이라 할 수 없다.

| 가상 배역의 빛과 그림자

이 시에서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화자가 누이동생이라는 설정이다. 삼남매 이야기의 여러 배역 중 왜 하필 누이동생일까? 특히 투쟁의 전선(前前)에 서있는 오빠를 화자로 내세웠더라면 저항의식이 더 직접적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이러한 설정은 당시 저항운동이 처해 있던 현실과 관련이 있다. 이 시기에 노동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궁극적인 성공을 거두기는 힘들었고 주도자의 희생 또한 피하기 어려웠다. 이미 일제가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반체제 운동을 혹독하게 탄압하는 한편, 관련 인사에 대한 감시망을 촘촘하게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의 전위(前衛)에만 모든 희망을 걸 수는 없었으며, 그들을 지원하거나 계승하는 세력이 매우 중요했다.

<우리 오빠와 화로>의 누이동생 배역은 바로 이러한 점을 포착하여 선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막강한 적의 탄압이 상시로 예견되는 상황에서, 성인 주동자의 패퇴가 곧 저항운동 전체의 패퇴는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감옥 안에 있는 오빠와 동무들을 지원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감옥 밖의 누이동생이 부각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임화의 시 〈네거리의 순이>(1929)에서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야 할 순이, <다시 네거리에서>(1935)에서 “쓰린 앞길에 광영이 있으라”는 기대를 걸머진 새 세대가 모두 이러한 계열의 인물에 속한다. 아직 어리고 약하지만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이 각자의 자리에서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내며 연대한다면 그것은 큰 희망이 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바로 이 땅 위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던 시인의 신념(임화, 1938)이 이처럼 그의 초기 시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시의 화자인 누이동생의 말이 다분히 교조적이거나 순종적이라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오빠를 잃은 어린 동생이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살아가면서 성인 운동가의 신념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는 대목이 그러하다. 또한 누이동생 스스로가 공장노동자로서 노동 현실의 부조리를 간파하고 성장해 가는 모습보다는, '오빠'를 주술처럼 반복하며 추앙하고 후계자로 지목된 남동생을 보육하는 모습만이 부각되어 있다. 이 점에서 누이동생이라는 가상의 배역은 남성 문학운동가인 시인의 욕망이 투사된 존재라는 혐의가 짙다. 실제로 시인 자신조차 이런 설정을 두고 “자기중심의 욕망에 포화” (임화, 1930)되었다며 무산계급의 진실된 감정을 노래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비판한 바 있다.

시는 매우 다양한 존재를 화자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그 화자가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누이동생이라는 이 시의 화자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꿋꿋이 희망을 발견하고 보듬어 가는 인물이지만, 그것이 주체적인 여성 노동자로서의 자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이 시의 배역 설정이 어느 정도로 성공적인가에 대한 판단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강민규

참고문헌

강동진(1980), 「일제하의 한국노동운동: 1920~1930년대를 중심으로」, 안병직·박성수 외, 『한국근대민족운동사』, 돌베개.

김기진(1929), 「단편 서사시의 길로: 우리 시의 양식 문제에 대하여」, 오태호 편 (2015), 『김기진 평론선집』 지식을만드는지식.

임화(1930), <시인이여! 일보 전진하자!: 시에 대한 자기비판 기타>, 임화문학예술전집 편찬위원회 편(2009), 《임화문학예술전집 4: 평론 1》, 소명출판,

임화(1938), 「언제나 지상은 아름답다: 고통의 은화를 환희의 금화로」, 『조선일보』. 임화문학예술전집 편찬위원회 편 (2009), 《임화문학예술전집 1: 시》, 소명출판, 천정환(2003), 『근대의 책 읽기』, 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