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과 요한복음 11 장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권영진 목사
1. 서론(序論) : 개구리 이야기와 키에르케고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개구리를 조용히 죽이기 위해서는 개구리가 들어 있는 양동이의 물을 조금씩 데우면 된다. 펄펄 끓는 물에 바로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개구리는 살기 위해서 바로 튀어 나오게 되지만 개구리가 들어 있는 물을 서서히 데우면 개구리는 유유히 헤엄치다가 서서히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구리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일을 종종 이야기하지만 실상 인간의 모습도 영적인 문제에 이르러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숨 가쁜 현실을 살아가면서 인간들은 거의 대부분 정신적인 문제, 특히 영적인 문제를 도외시한다. 당장의 먹고 사는 현실에 붙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부주의하거나 혹은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눈 앞에 일들을 보느라 양동이 속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무지(無知)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을 집필했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에 대한 고찰(考察)을 통해 현상 너머에 있는 영적 문제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그의 삶 또한 평범하지 않았기에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일반인이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날카롭고 대담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의 접근 방식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지적하고 있는 현상과 영원에 관련된 내용, 무엇이 진정한 절망이며 무엇이 죽음이며 무엇이 사람을 진정한 죽음으로 이끌게 되는가에 대한 그의 고찰은 의미심장한 내용이 많다. 연구자는 그의 연구인 [죽음에 이르는 병] 속에 나오는 그의 이러한 사상들에 대한 이해와 함께 특별히 요한복음11장에 등장하는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한 요한복음 저자가 주장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내용을 키에르케고르적 사고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철학자의 깊은 자기 이해와 성찰이 성경의 진리와 어떻게 맥을 함께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2.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요약
2-1)비(非)신앙적 자기와 [절망]
2-1-1)무관계성에서의 자기
내적 의식 활동이 결여된, 아직 [자기 자신]을 내적, 정신적으로 규정하지 못하고 단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을 무관계성에서의 자기, 혹은 외적인 자기라고 한다. 이러한 자기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내부에서 관계를 맺거나 고민하고 운동하는 요소가 전혀 없다. 이러한 자기는 모든 대상이 추상화되고 객관화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의 특징은 순수한 직접성에 있다. 이러한 부류의 인간들은 감각적이거나 감성적인 환경적 변화에 의해 지배되고 살아간다. 이들은 단지 외부적인 자극에만 반응하며 이것에 대해 좋거나 혹은 싫은 단순한 반응들만을 보이고 살아간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이러한 이들은 정신이나 진리와는 거의 상관이 없으며 이러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거나 고민해 본 적 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며, 이들에게 관심사는 오직 외부의 사람들에게 보이는 부분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허영심이나 자만심등의 감정에 잡혀서 살아가게 된다. 이들은 정신이 결여된 안정성의 증상인 불안을 가지고 있으며 불안은 다름 아닌 절망이라는 병에 나타나는 징후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절망의 상태에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며 이들은 비록 자신의 상태에 대해 무지한 상태지만 자신이 절망의 상태에 있다고 인식하면서도 거기에 머무르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구원과 진리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1-2)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자기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절망의 모습을 [약함의 절망]이라고 책은 표현한다. 약함의 절망은 현세적인 것이나 혹은 무한하고 영원한 것에 대한 절망에서 찾아오며 인간은 결국 절망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현세적인 유한성에 대한 절망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유한함을 일깨워주는 무한성의 가치와 죽음의 공포를 알게 되어서 절망한 유형이다. 그는 어느 정도의 자기 성찰을 통하여 외부 세계와 자기 자신을 구별할 줄 알게 되는 다소 정신적으로 진보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유한성에 대해 절망한 그는 내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대신 군중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 속의 하나로 남기를 원한다. 즉,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고 만들어진 다른 자기가 되기를 원한다. 그는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인격의 소유자이거나 훌륭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자기 상실의 대가를 지상의 행복과 윤리로 채우려는 경우가 많다.
2-1-3)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자기
앞선 경우와 대비되는 경우로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자기는 밀폐성에 함락된 자기다. 그는 유한함에 대한 절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에 절망하는 자기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고독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자기가 되지 않으려는 자기의 모습을 [고독]이라고 표현한다. 그도 역시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자기의 모습을 만들고 거기에 빠져든다. 다만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자기와는 반대로 내면적인 면에 집착하여 자신을 상실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원과 관계하는 자기의 모습을 만들고 거기에 안주하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은 예술이나 학문적 실험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러한 자기의 모습을 만들고자 노력하게 된다.
2-2)신앙적 자기와 [절망]
2-2-1)신앙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절망과 죄의 관계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절망은 신과의 관계의 단절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관계의 단절을 죄라고 정의한다. 절망의 상태란 죄의 상태로 연결된다. 그리고 절망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자기 이해가 죄에 대한 이해 없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런 상태에서의 자기 이해는 죄인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죄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의 관념을 가지고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것, 또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함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죄는 약함 또는 고집의 도(度)가 강해진 것, 다시 말해서 절망의 도가 강해진 것이다.
이러한 절망의 의식이 상승할수록 영원한 것에 대한 의식도 또한 상승하게 되는데 이러한 절망이 죄가 되는 원인은 자신들이 절망의 의식을 통하여 육신과 영혼의 종합으로서의 자기를 깨닫고 영원한 것 앞에서 행동하게 되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죄는 [신 앞에서 행하여지기 때문에] 죄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행하는 것은 죄가 되지 못하여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만이 죄가 신 앞에서 행하여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신 앞에서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계속해서 머무르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죄의 지속이 된다. 따라서 신과의 관계의 불균형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계속해서 죄가 되며 그것은 새로운 죄의 추가가 아닌 죄의 지속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절망 가운데 머무르며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모든 시도와 상태는 모두 죄가 되는 것이다.
이 죄 중에서 가장 강화된 형태는 의식이 강화되어서 자기 자신이려고 고집하는 자기다. 이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며 자시 자신과만 관계하고 자기 자신의 내부에만 갇혀 있으려고 하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모든 선과의 관계의 회복을 아예 단절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로 인해 그의 구원의 가능성은 무한하게 멀어지게 되며 그는 더욱더 자신의 절망을 감추고자 광포(狂暴)해지고 자신이 행해왔던 모든 것이 다 무익한 것이며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더욱 그것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이 되고자 고집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상이 대두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고집 속에서 외부의 도움을 구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신앙과 죄 사이의 중요한 갈림길이 된다는 것이다. 신앙적인 자기란 관계를 정립한 타자와 다시 관계를 정립하는 긍정적인 제3자가 되는 것이며 이렇게 관계하는 행위가 바로 신앙이다. 모든 절망의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 한 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죄와 절망은 인간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길을 통하여서 절대적인 신 앞으로 나아가 그와 관계할 수 있다. 이를 역설(Paradox)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이 개념적으로 알고 있던 신이 아닌 현존하고 실제 하는 신 앞에서 단독으로 서야 하며 이것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 하고 이해하려고 하며 또한 이로 인해 끊임없이 절망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다.
2-2-2)관계의 불균형을 해소한 자기
관계에 관계하는 자기는 구체적인 자기이며 이 자기는 관계의 불균형, 즉 죄의 상태를 극복한 자기이다. 이는 새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지적했던 죄의 가장 완고한 형태인 고집으로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형태를 극복한 것을 의미한다. 즉, 도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동시에 신의 내부에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두려고 하는 상태를 말한다.
죄가 신과의 단절된 관계를 말한다면 신앙은 그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 죄로부터의 구원 - 다시금 신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또한 신앙은 신을 안다는 인식의 개념이 아니라 신을 향하고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다. 인간이 이를 오해하고 자꾸만 신을 개념적으로만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에 실족하게 된다고 책은 말한다. 절망은 죄이며 죄란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만 죄의 종류와 형태에만 매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실족하며 그곳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는 죄를 알 수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여기서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인간의 오성(悟性)을 벗어난 영원한 것을 알고자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그 이상의 것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관계의 불균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적인 신앙과 사변적 지식의 조화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는 성육신을 말한다. 신은 인간이 되어서 죄가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알려주기 위해 육신이 되어서 인간들에게 다가 왔고 인간은 이제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진정한 절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절망의 관념과 폭발적인 분노를 일으키는 동시에 영원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을 거부하든가 혹은 자신이 걸려 넘어졌던 바로 이 신으로 돌아가든가 하는 문제는 신앙의 영역이 된다. 결국 인간이 죄 앞에서 분노하고 혹은 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자기 자신을 고집하는 것은 결국 신이 있다는 역설이 되며 또한 인간 자신이 구원받고 싶어 한다는 역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이란 결국 역설 속에서 존재하며 관계의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자기 역시 이 역설 속에서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요한복음 11장에 나타난 [죽음]이해
3-1)제자들의 입장
제자들은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이 뚜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다시 돌아가 나사로의 가족들을 만나겠다고 하시는 상황에 대해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곳에서 죽음의 위기를 넘겼기 때문이다.(11:8)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자신들의 안전이었다.(엄밀히 말하면 자신들의 안전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곳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들은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잠들기를 바랐고(11:12) -그래야 그곳으로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것을 바랬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현실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도마를 대표로한 그들의 최종적 입장은 스승인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다.(11:16) 이것이 제자들의 진정한 신앙고백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적어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죽음의 위협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께 뭔가를 더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3-2)나사로의 가족들의 입장
나사로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무척 사랑하고 그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들은 우선적으로 예수님께 그 사실을 알렸다.(11:3)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한계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사로가 살아 있을 때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고 막상 나사로가 죽고 나서는 예수님이 오셨어도 거기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체념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11:21;32) [만약 그때 계셨더라면]의 뉘앙스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단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무척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이미 육신의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간 사람의 일은 예수님께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마르다는 통상적인 반응으로의 대답만을 했던 것이다.(11:24)
3-3)유대인들의 입장
유대인들 역시 예수님의 이적을 여러 번 경험했던 사람들로써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든 사실에 대해 통보 받았을 때 분명히 무엇인가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님과 나사로의 가족들 간의 친밀함을 알고 있었고(11:36)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분명 오셔서 치료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야 그곳에 도착했고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유대인들은 이미 모든 상황은 종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왜 빨리 오지 못했는가에 대해 한탄하는 정도에서 상황을 정리했다.(11:37) 또한 나중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유대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졌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그를 믿게 된 것과(11:45) 당시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고한(11:46) 것이다.
3-4)종교 지도자들의 입장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리와 생명의 문제가 아닌 현실에서의 자신들의 기득권과 위치에 관련된 것이었다. 확고히 기틀을 잡은 종교적 가치와 또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던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나사로를 부활시킨 사건은 심각하고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이 일로 인해 자신들의 자리가 흔들리게 되고 민중들의 관심이 예수님께로 쏠릴 것을 염려했다.(11:47-48)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그들이 쓸데없는 염려를 한다고 책망하며(11:49) 예수를 죽여서 로마인들의 개입을 없애고 자신들의 기틀을 튼튼히 다지면 될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11:50) 결국 그들은 나사로의 부활사건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구실로 삼아 예수님을 자신들을 위협하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적대시하게 된다.
3-5)예수님의 입장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사로와 그 가족들을 깊이 사랑하셨고 인간적으로 친밀함을 보이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혈과 육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반증한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 흘리셨고(11:35) 그의 가족들 앞에서 감정의 표현을 보이셨다.(11:33)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과 인정에 하나님의 사역의 우선순위와 중요성을 혼동하지 않으셨다. 나사로의 육신적 죽음의 소식은 하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사역의 미래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삼으실 것을 알았고(11:15) 또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다름 아닌 영원한 부활이시요 생명의 근원됨을 밝히시는 계기로 삼으셨다.(11:25-26)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육신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진정한 생명 됨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히셨고 이것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사상적 체계가 되었다.
4.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에서 바라본 요11장의 죽음이해
4-1)진정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순히 육신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너머에 있는, 즉 현존하는 현실에 있어서의 결과와 현상이 아닌 사람의 자아(혹은 자기)의 실존을 말한다. 즉, 진정한 죽음이란 자아의 죽음이며 그 죽음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하고 거짓 속에서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었다. 자신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고 오히려 더욱 나빠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내면의 성찰을 통해 알게 될 때 어찌할 수 없는 상태(그는 이 상황을 실족(失足))이라고 정의한다)가 바로 절망이며 이것이 인간을 진정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람이 오히려 육신의 죽음을 간절히 원할 정도로 절망하는 것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요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예수님과 제자들, 나사로의 가족들, 유대인들과의 갈등구조는 분명한 하나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육신적 죽음을 인생의 가장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육신적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다른 모든 가능성은 없어지고 절망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르다와 마리아조차도 막상 나사로가 죽고 나자 실낱같이 가지고 있었던 희망을 놓치고 예수님을 원망했음을 - 더 정확하게는 체념하고 포기했음을 -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자 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제자들 역시 나사로의 가족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현실관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사로가 죽고 나자 예수님의 한계를 단정해버린다. 따라서 사람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인간의 상황의 종말로 생각했고 모든 것이 되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인식한다. 주님께는 이 사건이 상황의 종말이 아닌 육신의 죽음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일깨우시기를 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목적인 것이다.
4-2)인간과 죽음과의 관계
요한복음의 저자와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둘 다 [육신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며 진정한 구원은 육신이 살아나는 것이 아닌 영혼(키에르케고르는 이를 자아, 자기라고 했다)이 살아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11장에서도 그러한 예수님의 구원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 즉,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 영혼의 죽음임을 말하고 있다. 육신의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르다와의 부활에 관한 대화 속에서 분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것과 투명하게 관계하는 절대적 관계만이 절망을 넘어설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요한복음 11장에서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현현(顯顯)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사로의 부활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처단해야 할 공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후로 예수님을 죽일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는 데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결국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사건이 되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서 인간의 절대적인 절망의 상황을 극복하는 그 사건을 인간들이 거부하고 견딜 수 없었다고 말하는데 - 그것은 인간의 모든 노력과 수고를 절대적인 허무로 돌려버리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 이것이 요한복은 11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이 되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적 앞에서 믿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부정하고 없애고자 하는 지도자들 앞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분명 설득력 있게 들리게 된다.
4-3)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와 예수님의 십자가
인간에게 육신의 죽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더 구체적이고 절박한 문제가 영혼의 문제임을 요한복음의 저자는 분명히 요11장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정한 문제의 해결이 되심을 11:25-26에서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부활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수여자가 되시며 그를 믿는 자는 육신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 또한 얻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요11장의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 이적사건은 이러한 주제를 분명히 부각시키고 있다.
특기할 점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발언 속에서 드러난 요한복음 저자의 주석 부분이다. 가야바는 단순히 예수님을 처치하고 없애면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이라고 모인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지만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 발언이 오히려 하나님의 큰 구원의 계획을 알려주는 중요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사람들을 영원한 절망의 상태인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고 멸망하지 않도록 하는 오직 유일한 길은 예수님께서 희생하시고 죽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단절을 회복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보혈이 십자가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귀속되며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그의 죽으심은 단순한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인류 전체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계획과 구속의 연장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5. 결론(結論) : 절망, 추하고도 아름다운 단어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다름 아닌 절망이라는 것이다. 이 절망은 인간에게는 끝없이 저주스런 단어며 그것을 회피하고자 자신을 속이거나 혹은 철저하게 자신을 수련하는 모든 수고를 무(無)로 돌려버리는 무서운 것이다. 어떤 인간도 이 절망 앞에서는 더 이상의 희망을 가질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전율스러운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육신의 죽음을 더욱 바라게 될 정도로 인간의 자아를 철저하게 죽음의 상태로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상황에 이른 사람만이 비로소 구원의 길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말한 역설(Paradox)이다. 즉, 이러한 처절한 절망의 자리에 선 사람만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과정 없이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며 그것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그럴듯하게 속이고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의 이러한 지적은 오늘날의 불신자는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자신의 믿음이 올바른 것이라고 안이하고 편안하게 생활하는 기독교인들은 과연 이러한 자신의 영적인 절망과 좌절을 겪고 하나님 앞에 선 것인가? 나의 구원은 이러한 처절한 절망 속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거듭난 것인가를 심각하게 묻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의 질문에 깊은 동감과 성찰을 하는 바이다. 우리의, 아니 나 자신의 신앙과 믿음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를 진지하게 되묻고 거기에 대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쩌면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한 바대로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거부하고 나 자신이 아닌 포장된 자아 속으로 회피해버리는 불신앙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한 절망(切望)은 분명 인간의 한계와 어찌 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버리는 막막한 단어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로소 영원한 자아의 생명을 회복하게 하는 유일한 출구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이고도 한 것이다. 사실 성경적인 개념에서의 죽음도 이와 같은 것일 것이며 이는 세례를 통해 분명히 부각되는 것이다. 또한 갈2:20 말씀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내가 사는 것은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적 고민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절망은 그래서 어찌 할 수 없는 혐오스럽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이것을 통해 자신의 자아가 구원되고 모든 부조리와 불합리에서 건져내어 회복될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기도 한 것이다.
6. 참고문헌(參考文獻)
하 성민,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의 변증법과 신앙 :「죽음에 이르는 병」을 중심으로], 한남대 대학원 석사논문(2003).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김 영목 역, 학일출판사(1994).
첫댓글 키에르케고르를 철학자로 알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실은 뛰어난 신학자이자 주석가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절망]의 개념이 요한복음 11장의 내용과 상당 부분 연관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진실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성경의 답변은 무엇인지 비교해 보면서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죽음에 이르는 병]도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