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유형문화재27호(한글 고비 노원구) 한글 고비 시도유형문화재27호(노원구)
이것은 조선(朝鮮) 제11대 중종(中宗) 때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 이윤탁(李允濯)의 묘비(墓碑)에 묘의 훼손을 경계(警戒)하는 한글 30자를 비석 서쪽면에 2행으로 음각(陰刻)한 것으로 공(公)의 세째아들 문건(文楗)이 비문을 짓고 각자(刻字)한 것이다. 비 뒷면에 새겨진 가정(嘉靖) 15년(1536: 중종(中宗) 31년)으로 비의 건립 연대를 알 수 있고, 훈민정음(訓民正音) 통용 초기의 어법(語法)을 보여주는 희귀한 한글 금석문(金石文)이다. 보물 제1524호 이윤탁 한글 영비로 명칭변경 및 승격지정됨에 따라 2007년9월18일 해지.
부산시 유형문화재27호(어산집 책판 금정구) 어산집 책판 시도유형문화재27호(금정구)
이 책판은 모두 30판으로, 간행기록에 의하면 숙종 26년(1700)에 동래도호부 금정산 범어사에서 처음으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범패란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말하는데, ‘어산(魚山)’이란 범패의 일종으로 이 책은 범음집(梵音集)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판으로 간행한 책 자체도 범어사 소장 도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매우 귀중하다. 특히 박운월씨가 소장하고 있는 동음집에는 53곡의 짓소리(불교에서 재를 올릴 때 불경을 길게 읊는 소리) 가운데 빠진 부분이 많은데 반해 범어사에 소장된 서산집 책판은 모든 짓소리를 다 싣고 있다.
대구시 유형문화재27호(탁영 종택 문적 남구) 탁영 종택 문적 시도유형문화재27호(남구)
이 문적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생된 탁영 김일손(1464∼1498) 선생과 부인에게 내린 교지 5종과 자계서원에서 의식이 있을 때 그 순서를 적은 글인 홀기 및 둔전답 등본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문인이며, 14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낸 후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몰두하다가, 그 후 다시 벼슬길에 올라 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있은 후 신원되어 홍문관 직제학을 추증받았으며, 이후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 문적은 그가 죽은 후 도승지, 이조판서에 추증한다는 내용의 교지와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는 내용을 담은 교지 및 그의 두 부인을 정부인에 올린다는 교지 등이다. 홀기는 자계서원에서 봄,가을에 제사를 올릴 때 쓰던 것이며, 「둔전답 경자개양등록」은 서원의 전신인 자계사(紫溪祠)가 1578년 사액서원이 되면서 종전의 둔전답을 고쳐 만든 등본이다.
인천시 유형문화재27호(보문사 석실 강화군) 보문사 석실 시도유형문화재27호(강화군)
보문사에 있는 석굴사원으로, 나한상(羅漢像)을 모시는 나한전의 구실을 한다. 이 보문사는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4년(635)에 회정대사(懷正大師)가 창건(創建)하였다고 전하여 오는데, 조선(朝鮮) 순조(純祖) 12년(1812)에 중건(重建)하였고, 그후 몇 차례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곳 나한전(羅漢殿)은 자연암벽 밑에 석실을 마련하여 그 안에 나한상(羅漢像)들을 모신 석굴사원(石窟寺院)이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홍예문(虹예門)을 만들고 동굴 안에 감실(龕室)을 마련하여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비롯하여 미륵(彌勒)·제화갈라보살(提和渴羅菩薩)과 나한상들을 안치하였다. 이 석불들은 신라 선덕여왕 때 어떤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현몽(現夢)대로 안치했더니 거부(巨富)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지만 불상의 제작 연대는 오래지 않은 것이다.
대전시 유형문화재27호(설고 시첩 대덕구) 설고 시첩 시도유형문화재27호(대덕구)
청음 김상헌(1570∼1652) 선생이 병자호란(1636∼1637)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동안(1640∼1641)에 지은 기행 한문 시첩이다. 저자인 김상헌(金尙憲)은 선조 3년(1570)에 나서 효종 3년(1652)에 돌아간 분으로 호가 청음(淸陰)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 시첩은 심양에 함께 잡혀갔던 조한영(1608∼ 1670)이 편찬한 것으로, 병풍처럼 펼쳐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32cm, 세로 34.5cm이다. 첫머리에는 김상헌 선생이 고국에 돌아와 쓴 서문이 있으며, 본문의 각 시마다는 서명을 하였는데 각 시마다 저자가 "서간노인(西磵老人)초", "간졸(磵拙)초", "서간노졸(西磵老拙)초", "풍산노인(豊山老人)초"등으로 서명하였고, 동궁인 봉림대군에게 올린 시에만 김상헌이라고 성명을 썼다. 권의 끝부분에는 조한영의 글이 있다.
광주시 유형문화재27호 (광주 덕림사 소장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 남구) 광주 덕림사 소장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 시도유형문화재27호(남구)
광주 덕림사 소장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은 1680년 수은이 화주가 되고 색난과 그의 제자들이 조성하여 사찰에 봉안된 신앙대상물이다. 조성연대와 화주 및 조각승이 밝혀진 점과 독립적인 전각에 모셔지는 명부신앙의 초기자료란 점에서 한국불교신앙연구의 소중한 자료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 백양사 신중도 백양사 신중도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27호
신중탱(神衆幀)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을 그린 불화로, 조선후기 18세기부터 20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그려졌으며, 작품 하단의 화기를 통해 1878년 금어 덕운영운을 비롯한 2명의 화승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양사(白楊寺) 신중도(神衆圖)는 전체적으로 화면 중심에 그려진 위태천과 향우측의 합장형 법천, 향좌측 연꽃을 두손으로 받쳐든 제석천이 삼각구도를 이루는 구성이다. 채색은 명도가 높은 적색을 주로 사용하고, 녹색과 청색의 사용이 눈에 띄며, 색조의 화려함에 비해 전체적으로 문양이 억제된 편이다. 화기가 정확하게 남아있어, 제작연도와 제작자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 19세기 후반 신중도(神衆圖)의 양식 및 특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27호(창절사 영월군) 창절사 시도유형문화재27호(영월군)
단종(재위 1452∼1455)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재위 1455∼1468)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육신과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 장릉(莊陵) 곁에 육신창절사(六臣彰節詞)가 있었는데, 숙종(肅宗) 11년(1685)에 감사(監司) 홍만종(洪萬鍾)이 도내의 힘을 모아 개수(改修)하여 사육신(死六臣)인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愷)·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와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와 박심문(朴審問) 등을 모셨으므로 팔현사(八賢詞)가 되었다. 정조(正祖) 15년(1791) 창절사에 단(壇)을 세우고 생육신(生六臣) 중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을 추가로 모시고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경내에 있는 문루인 배학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1층은 앞면 3칸에 모두 문을 설치하였고, 2층은 누각으로 되어있다. 강원도에 있는 사당이나 서원 중 대문이 문루인 곳은 이곳 뿐이다. 창절사는 현재 남아있는 강원도 내의 사당이나 서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지어졌을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27호(연미정 강화군) 연미정 시도유형문화재27호(강화군)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형(黃衡)이 국가에 공로(功勞)가 많아 조정에서 세워 하사(下賜)하였다 한다. 장무공(莊武公) 황형은 중종(中宗) 5년(1510) 삼포왜란(三浦倭亂) 때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그후 도총관(都摠管)을 거쳐 중종 7년(1512) 함경도(咸鏡道)지방의 야인(野人)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이를 진압하였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이곳은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西海)로, 한 줄기는 강화해협(江華海峽)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이라 부른 것이며, 높은 석주 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英祖) 20년(1744) 중건(重建)하였고, 고종(高宗) 28년(1891) 중수(重修)한 후 수차 보수(補修)되었다. 인조(仁祖) 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締結)한 곳이기도 한다. 경기도와 인천광역시 분리되면서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24호로 재지정됨에 따라 1995년3월1일 해지.
경북 유형문화재27호(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재사3동, 사당> 안동시)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재사3동, 사당> 시도유형문화재27호(안동시)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1445∼1534)와 증손자 김해(1555∼ 1592)를 모시고 있는 사당과 후조당에 부속된 재사(제사지내는 집)이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5년 오천리 낙동강변에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김효로가 죽은 지 2년 뒤인 조선 중종 31년(1536)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오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영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김해를 같이 모시고 있다.
장량상 동정마애비 시도유형문화재27호(남해군)
선소마을 선착장의 오른쪽 해변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중국 명나라 장수인 장량상이 동쪽을 정벌하고 바위에 글을 새겼다 하여 ‘장량상 동정마애비’라 이름붙인 것이다. 비의 형태는 커다란 자연석의 윗면을 직사각형으로 평평하게 갈아 글을 새겼다. 직사각형의 테 주변에는 덩굴무늬를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비문은 이여송과 진린이 원군으로 조선의 남해에 와서 왜군을 무찔렀다는 내용으로, 명나라 군인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전승기념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역사적 자료에는 선소마을에서 명의 수군과 왜군이 싸웠다는 기록이 없어 비문의 내용이 의심스럽지만, 노량해전 직후나 그 이듬해인 선조 32년(1599)에 이 글을 새겨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남해지방과 관계있는 비는 아니지만, 역사에서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명나라 장수의 마애비라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명나라 이여송과 진린이 왜군을 무찔렀다는 전승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어 일제 시대 당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파괴대상 왜구격파 기념비’목록에 이 비가 포함되었었다 한다.
청원 안심사 세존사리탑 시도유형문화재27호(청원군)
안심사는 통일신라 혜공왕 11년(775)에 진표율사가 창건하였다. 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세존사리탑은 절을 창건할 당시 진표율사가 직접 조각하여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은 바닥돌 위에 매우 높직한 8각 받침돌을 두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길쭉하고 둥근 탑신(塔身)을 올린 후 큼직한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조선 후기 양식인 종모양의 형식을 띠고 있다. 탑 옆의 세존사리비(世尊舍利碑)에 의하면 사리탑의 행방을 오랜동안 모른채 내려오던중 동산내(洞山內)에서 발견하여 조선(朝鮮) 고종(高宗) 18년(1881) 구천동(九川洞)에 봉천(奉遷)했던 것을 다시 광무(光武) 4년(1900)에 광우(廣祐)와 등원(等元) 두 스님이 안심사로 이안(移安)했다고 한다.
도림사지 삼층석탑 시도유형문화재27호(청양군)
도림마을 뒷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주변에서 ‘도림사(道林寺) ’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 터가 도림사의 옛 터임을 알게 되었다. 도림사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계속되었던 사찰로 추측되고 있는데, 화재로 모두 불에 타고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위층 기단은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조각했는데 제법 뚜렷한 형상이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이 적당히 줄어들고 있어 깔끔한 균형을 이룬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3단씩 두었으며,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경사면은 네 귀퉁이에서 힘차게 위로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으며,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1973년경 탑을 보수할 때 네모난 사리장치를 발견하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순창 삼인대 시도유형문화재27호(순창군)
조선(朝鮮) 연산군(燕山君) 12년(1506) 훈구세력인 성희안과 박원종이 임사홍, 신수근 등과 결합하여 포악한 정치를 거듭하던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연산군 12년(1506),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성공된 후 공신들은 왕비(王妃) 신씨(愼氏)를 역적 신수근(申守勤)의 딸이라하여 폐출(廢出)하고 장경왕후(章敬王后)(1491∼1515) 윤씨(尹氏)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왕후가 된 지 10년만인 중종 10년(1515)에 돌아가셨다. 이 소식이 전하여지자 당시 순창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 무안현감(務安縣監) 유옥(柳沃) 등이 회동, 결의하여 폐출하였던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 복위상소(復位上疏)를 올렸다. 이들은 관직(官職)으로부터의 추방과 죽음을 각오한 나머지 직인(職印)을 소나무가지에 걸었다. 그 뒤 이곳에 비각(碑閣)을 건립하고 삼인대라 하게 되었다.
선암사 괘불 시도유형문화재27호(순천시)
선암사 괘불은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괘불중 하나다. 이 괘불은 여래상으로 육계(肉계)와 나발(螺髮)을 갖추었고 바르게 뜬 눈은 약간 내려다보는 전형적 부처의 모습이다. 또 귀는 커서 어깨밑까지 내려왔으며 법의는 우견편단의 옷깃에 화려한 영락을 장식하여 장엄미를 더했다. 한편 불화의 상부에 비해 하부처리는 매우 형식화되었고, 특히 옷주름 밖으로 나온 발의 처리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경직되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거대하고 웅장하여 어떤 위압감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또 신광과 두광을 나타냈는데 신광에는 두 줄의 청홍색으로 띠를 두르듯 돌렸으며, 두광은 연한 청색을 가운데에 깔고 그 둘레에는 가늘게 황금띠를 돌렸다. 이 괘불의 색감은 강희 건륭 연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적녹색을 아직까지 오른쪽 중앙에서 보여주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그림 전반에서 엷은 연분홍 계통의 색조가 나타나고 있음은 이 그림이 임진왜란을 분기점으로 해서 조선 후기에 접어든 양식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성년대는 건륭 18년(영조 29, 1753년) 계유 10월이며 작자로서는 여기에 많은 화승들이 참여했는 바 금어에 은기, 치한, 래순, 막영, 시언이고 화사에는 월계, 봉찰, 책화, 계탄, 쾌혜, 쾌윤, 인계 등이다. 그런데 이 괘불에 대한 전반적인 주도는 쾌윤화사였으며 당시상월대화상의 발원과 부촉으로 천삼백여 승려가 참여 백일기도를 올리면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괘불은 사월초팔일 행사 이외에도 나라에 내우외환이 있거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국태민안을 빌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또 기우제를 지내는 데에도 사용되었는데 그 영험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보물 제1419호 선암사 석가모니불 괘불탱 및 부속유물 일괄로 명칭변경 및 승격지정됨에 따라 2004년11월26일 해지.
장한철의 표해록 시도유형문화재27호(제주시)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난 장한철(張漢喆)은 1770년 12월 25일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류쿠제도(오키나와)에 표착을 한다. 「표해록(漂海錄)」은 장한철이 류큐제도에 표착한 뒤 일본으로 가는 상선을 만나 구조된 뒤, 우역곡절 끝에 한양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한 뒤 귀향하여 쓴 책이다. 당시의 해로와 해류((海流)), 계절풍 등에 관한 해양 지리서로서 문헌적 가치가 높고, 제주도의 삼성(三姓)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 백록담과 설문대 할망의 전설, 유구 태자에 관한 전설 등 당시 제주도의 전설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어 설화집으로서의 가치도가 높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