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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탄생화와 꽃말 1/5일[ 1월 5일 탄생화] 노루귀(Hepatica)
꽃말 : 인내
미나리아재비과
원산지: 유럽
'Hepatica'의 그리스 어원은 '간장(肝腸)', 세 개로 나뉘진 잎새 모양이 간장을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꽃이 필 때면 줄기에 긴 흰 털이 많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양이 노루의 귀와 비슷하다 하여노루귀라고 불리고 있답니다.
봄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고하듯이 눈을 헤치고 산속 바위틈이나 커다란 나무의 뿌리께에 작은 꽃을 내밀어 파설초(破雪草)라고 한답니다.
꽃점 : 추위에 강한 꽃. 이 꽃을 탄생화로 갖고 있는 당신은 무엇보다도 우선 인내심이 강한 사람. 누구에게나 신뢰를 받고 친구 사이에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부를 아주 싫어합니다.
연애는 수동적이어서 먼저 프로포즈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성의 동경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노루귀 Hepatica -[Hepatica asiatica] 쌍떡잎식물 미나리아재비목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
산의 나무 밑에서 자란다. 뿌리줄기가 비스듬히 자라고 마디가 많으며 검은색의 잔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잎은 뿌리에서 뭉쳐나고 긴 잎자루가 있으며 3개로 갈라진다. 갈라진 잎은 달걀 모양이고 끝이 뭉뚝하며 뒷면에 솜털이 많이 난다. 잎몸 길이 5cm 정도, 잎자루 길이 약 25cm이다. 4월에 흰색 또는 연한 붉은색 꽃이 피는데 잎보다 먼저 긴 꽃대 위에 1개씩 붙는다. 꽃 지름은 약 1.5cm이다. 총포는 3개로 녹색이고 흰 털이 빽빽이 난다. 꽃잎은 없고 꽃잎 모양의 꽃받침이 6∼8개 있다. 꽃받침은 대부분 연한 자줏빛이며 수술과 암술이 여러 개 있다. 열매는 수과로서 털이 나며 6월에 총포에 싸여 익는다. 봄에 어린 잎을 나물로 먹으며 관상용으로 심는다. 민간에서는 8∼9월에 포기째 채취하여 두통과 장 질환에 약으로 쓴다. 한국(전지역)·중국·헤이룽강 등지에 분포한다. (출처: 두산백과)
[꽃 말] : 인내忍耐
[탄생화] : 귀하는 인내심忍耐心이 강强하고 아부를 싫어하심으로 누구에게나 신뢰信賴를 주고 계시면서도, 연애戀愛에 있어서는 수동적受動的이신 분이십니다.
1월 5일 오늘의 역사
995 고려, 관제(官制)를 개정 6부상서(六部尙書)의 칭호 정함
1637 병자호란중 김준룡 청군 격파
1896 (조선 고종 33) 전국에서 민비 시해와 단발령에 저항하는 의병 봉기
1907 한국의 수필가 김소운 출생
1912 아동문학가 이원수 태어남
1916 시인 정호승(鄭昊昇 출생
1924 김지섭(金祉燮), 일본 천황 폭살 기도
1925 조선체육회, 제1회 전국빙상대회 개최
1947 시인 홍사용 세상 떠남
1949 반민특위 활동 시작
1950 소설가 김동인 사망
1951 독립신문 창간한 서재필 세상 떠남
1953 이승만 대통령, 일본 방문 요시다(吉田) 수상과 회담
1958 독립운동가 임용상 사망
1959 신보안법 반대 데모 남한 전국에서 일어남
1961 첫 서울 민선시장 김상돈 취임
1962 예총 창립총회
1965 정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67 대통령배 야구대회 창설로 학생 야구의 전기 마련
1970 박정희 대통령, 고급공무원 등의 호화주택 처분 명령
1971 민정당 창당 (총재 윤보선)
1973 김종필 총리 존슨 미국 대통령과 회담
1979 고조선 시대 유물 100여점 중국 요녕성에서 출토
1981 경기도 양평 -32.6도 온도 측정사상 최저 기온 기록
1981한국과학원 (KAIS)과 정부출연기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IST)를 통합해 한국기술원 (KAIST)으로 명칭 변경
1982 야간 통행금지 전면 해제
1991 소말리아에 군의료부대 파견 결정
1992 부시 미국대통령, 한국 방문
1995 유전공학육성법을 생명공학육성법으로~
1995 케이블 TV, 시험방송 시작
1997 반(反) 김일성 운동가 허진씨 별세
2006 문화관광부, 포르투갈어·네덜란드어·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 제정 고시
2011 함바집 운영권 로비 사건
해외 오늘의 역사
675 일본, 최초로 점성대(占星臺)세움
1588 척계광, 명나라 군인 (1528년 출생), 사망
1589 프랑스 국왕 앙리2세의 비 카트린드메디시스 사망
1809 프랑스의 점자 고안자 교육자 루이스 브라유 출생,
1876 서독 초대 수상 (1949-63) 콘라드 아데나워 출생
1885 안전면도칼의 발명자 질레트 출생
1895 독일물리학자 뢴트겐 X-선 발견 발표
1899 필리핀 아키날도장군 독립선언
1902 프랑스 신문 창립자 위베르 뵈브 메리 출생
1910 멕시코동란 발발
1919 독일노동자당(후에 나찌당) 결성, 베를린의 20만 노동자 무장봉기
1921 스위스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출생,
1928 蘇, 토지 환수,
1928 파키스탄 대통령 줄피카르 알리 부토 출생
1931 미국의 무용수겸 안무가 에일리(Ailey Jr., Alvin) 출생
1932 이탈리아 기호학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 출생,
1933 미국 샌프란시스코 만(灣) 골든게이트교(금문교) 공사 시작
1933 미국 제30대 대통령 쿨리지 세상 떠남
1943 흑인인권운동가 카이버 세상 떠남
1948 킨제이보고서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 출판
1949 트루만 미국 대통령, 페어딜 정책 발표
1950 트루만 미국 대통령, 대만과 중국과의 내분에 불개입 성명
1953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파리에서 초연
1954 미국-영국-프랑스, 대 유고 경제 협정 체결
1956 모나코 국왕 레니에 3세와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 약혼 발표
1957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 독트린 신중동교서 발표
1960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 세상 떠남 1957년 노벨문학상 받음
1964 동·서방교회 수장, 분열 910년 만의 만남
1968 두브체크, 체코 제1공산당 서기장 취임
1974 일본과 중국, 통상협정 조인
1985 홍콘 공항 컨테이너에서 방사능 물질 누출, 19명 오염
1993 스코틀랜드 세틀랜드 군도에서 유조선 좌초, 원유 2천400만 갤런 유출
1994 토머스 오닐 前 미국 하원의장 사망
1996 미국, 화이트워터 문서 발견
2000 17세의 티베트 불교 지도자 카르마파 라마 인도로 탈출
2010 中 최초 소수민족 외교부 부부장 몽골족 출신 푸잉 대사
2011 함바집 운영권 로비 사건
2010 中 최초 소수민족 외교부 부부장 몽골족 출신 푸잉 대사
2006 - 문화관광부, 포르투갈어·네덜란드어·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 제정 고시
포르투갈어 등 3개언어 새 표기법 마련
포르투갈어 등 3개언어 새 표기법 마련
바스코 다가마 (×) 바스쿠 다가마 (○)
에인트호벤 (×) 에인트호번 (○)
차이코프스키 (×) 차이콥스키 (○)
국립국어원은 5일 포르투갈, 네덜란드, 러시아 등 세 언어의 새로운 표기법을 고시했다. 이 표기법은 현지 언어의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 △포르투갈어에서 r를 ‘ㄹ’과 ‘ㅎ’으로 구분하여 적고 브라질 지명·지명은 포르투갈어와 다른 브라질의 발음 특성을 반영하고 △네덜란드어의 g는 ‘ㅎ’으로 적고, v는 ‘ㅍ’과 ‘ㅂ’으로 나누어 적으며 △러시아어 p, t, k, b, d, g, f, v가 무성 자음 앞에 올 때는 받침으로 적고 sh와 shch는 ‘시’로 적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의 인명 Ronaldo는 ‘호나우두’, Rivaldo는 ‘히바우두’로 적어야 한다. Jorge는 포르투갈 사람이면 ‘조르즈’로, 브라질 사람이면 ‘조르지’로 적어야 한다. 이과수폭포(브)는 이구아수, 리우그란데(브)는 히우그란지, 바스코 다가마(포)는 바스쿠 다가마 등으로 바뀐다. 네덜란드어의 경우 에인트호벤은 에인트호번, 에라스무스는 에라스뮈스, 호이징가는 하위징아, 스키폴 공항은 스히폴 공항으로 써야 한다.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는 차이콥스키, 고골리는 고골, 하바로프스크는 하바롭스크, 흐루시초프는 흐루쇼프, 푸슈킨은 푸시킨, 루빈슈타인은 루빈시테인으로 각각 바뀐다. 그러나 리우데자네이루, 아드보카트, 하멜, 보드카, 프라우다 등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 표기를 그대로 인정키로 했다.
이번 표기법 고시는 1986년에 제정한 현행 표기법이 이들 언어에 대해 자세한 표기 규칙을 두지 않아 현지 발음과 동떨어지거나 체계적이지 못하여 언어생활에 혼란을 빚어 온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러시아어 등에 써오던 표기와 달라지는 것이 많아 상당한 혼란이 예상되며 정착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립국어원은 올해 안에 그리스어, 아랍어, 터키어 등 3개 국어에 대한 표기법을 고시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이로써 24개 외국어에 대한 표기법이 완성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몽골, 아프리카어에 대한 표기법은 특별한 불편과 수요가 없어 따로 두지 않기로 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한겨레 2006-01-08 오후 08:36:05
문화관광부, 포르투갈어·네덜란드어·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 제정 고시
문화관광부는 지난해 12월 28일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러시아어 등 3개 언어의 외래어 표기법을 고시하였다.
1986년에 제정된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는 이들 언어에 대해 자세한 표기 규칙이 없어 외래어 표기법의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에 따라 표기해 왔다.
그러나 이 원칙을 적용한 표기는 현지 발음과 동떨어져 있다는 불만을 사 왔고, 일부 관용적으로 현지 발음에 따라 표기한 경우에는 체계적이지 못하여 언어생활에 혼란을 빚어 왔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 출신 축구 감독 이름이 ‘코엘류, 쿠엘류, 코엘료’ 등 여러 가지로 쓰여 왔으며, 브라질 사람 Ronaldo(호나우두)의 R은 ‘ㅎ’으로, Renato(레나투)의 R은 ‘ㄹ’로 적는 등 혼란이 있어 왔다.
러시아어의 shch는 ‘시ㅊ’으로 적도록 하여 우크라이나 대통령 Yushchenko를 ‘유시첸코’로 적었으나 현지 발음이 ‘유셴코’에 가깝다는 것이 확인되어 표준 표기형을 다시 ‘유셴코’로 번복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문화관광부 국립국어원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 언어의 발음 특성을 체계적으로 반영한 외래어 표기법을 새로 제정하게 되었다.
현지 언어의 발음에 가깝게 표기
- 브라질 지명과 인명 표기에는 유럽 포르투갈어와 다른 브라질의 발음 특성을 반영함
- 포르투갈어에서 r를 ‘ㄹ’과 ‘ㅎ’으로 구분하여 적음
- 네덜란드어의 g는 ‘ㅎ’으로 적고, v는 ‘ㅍ’과 ‘ㅂ’으로 나누어 적음
- 러시아어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차이코프스키’ 등을 ‘도스토옙스키, 차이콥스키’로 적음
브라질 포르투갈어는 유럽 포르투갈어와는 차이가 있어 브라질의 지명과 인명을 적을 때에는 몇몇 브라질 언어 특유의 발음 특성을 반영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같은 포르투갈어라도 달리 표기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Jorge가 포르투갈 사람이라면 ‘조르즈’로 적으나, 브라질 사람일 때에는 ‘조르지’로 적는다. 지명 São Vicente는 카보베르데(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서부의 공화국) 지명일 때에는 ‘상비센트’가 되지만, 브라질 지명일 경우에는 ‘상비센치’로 적는다.
포르투갈어에서 단어 첫머리의 r를 ‘ㅎ’로 표기한다. 이는 Ronaldo를 ‘호나우두’로 Rivaldo를 ‘히바우두’로 적는 등, 포르투갈어의 r 소리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개 ‘ㅎ’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Rodrigues는 ‘호드리게스’로 Ribeiro는 ‘히베이루’로 적는다.
네덜란드어의 g는 현지 언어 발음을 따라 ‘ㅎ’로 적는다. 따라서 Groningen 은 ‘흐로닝언’, Goes는 ‘후스’로 적어야 한다. 또한 v는 단어 첫머리에 올 때에는 ‘ㅍ’으로, 그 밖에는 ‘ㅂ’으로 적는다. Veltman은 ‘펠트만’으로, Flevoland는 ‘플레볼란트’로 적는다.
러시아어 p, t, k, b, d, g, f, v가 무성 자음 앞에 올 때에는 받침으로 적는다. 이에 따라 그동안 ‘차이코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표기는 ‘차이콥스키, 도스토옙스키’ 등으로 바뀐다. 또한 sh와 shch를 서로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시’로 적는다. ‘바슈키르’로 적던 Bashkir는 ‘바시키르’로, ‘흐루시초프’로 적던 Khrushchyov는 ‘흐루쇼프’로 적어야 한다.
이미 굳어진 외래어에 대해서는 관용 표기를 인정함
새로운 표기법이 제정되었지만, 우리 언어생활에서 이미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아래 단어들에 대해서는 새 표기법을 적용하지 않고, 이전 표기를 그대로 쓰도록 하였다.
새 표기법에 따른 「외래어 표기 용례집」 발간
국립국어원은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 맞추어 「외래어 표기 용례집」(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러시아어)을 발간하였다. 외래어 표기법이 새로 제정되었지만 이들 언어들에 대해 직접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을 하나하나 적용하여 표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국립국어원은 이들 언어권의 주요 용례 2,200여 항목에 대해서 원어와 표준 한글 표기를 수록한 용례집을 발간하였다. 문화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새 표기법의 제정과 그에 따른 용례집의 발간으로 혼란스러웠던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러시아어의 외래어 표기가 일관성을 지니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1995 - 유전공학육성법을 생명공학육성법으로~
유전공학육성법(1983)-생명공학육성법(1995)
생명공학연구의 기반을 조성하여 생명공학을 보다 효율적으로 육성·발전시키고 그 개발기술의 산업화를 촉진하여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고자 만든 법률. 1983년 12월 31일 제정된 <유전공학육성법>을 개정하여, 1995년 1월 5일 법률 제4938호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997년 8월 28일 5차 개정되었으며, 전문 20조와 부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법에서 생명공학은 산업적으로 유용한 생산물을 만들거나 생산공정을 개선할 목적으로 생물학적 시스템, 생체, 유전체 또는 그들로부터 나오는 물질을 연구·활용하는 학문과 기술을 말한다. 생물학적 위험성,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 및 윤리적 문제발생의 사전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강구되어야 하며 유전적으로 변형된 생물체의 이전·취급·사용에 대한 안전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15 ②). 기본계획의 수립·집행·조정에 관한 업무를 맡기 위해 과학기술부장관 아래에 생명공학종합정책심의회를 둔다. /Paran 사전
1982년] 야간통행금지 해제 ← 1982년 1월 5일, 통금해제 후 처음 맞는 주말 밤. 서울야경을 관광하려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뤘다.
37년간 규제속에 묶여 있었던 야간통행금지가 1982년 1월 5일 해제됐다. 정부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통금해제안을 의결, 전국 50개시, 1백39개군, 1천4백41개 읍 면 중 53개군 2백92개 읍.면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통금이 계속 실시되는 전방 전접지역으로는 경기도내 56개 유인도시와 인천시의 행정부에 속한 2개 유인도시 등 58개 도시를 포함한 10개군 71개 읍.면이며 후방 해안지역은 43개군 2백21개 읍.면으로 통금해제에서 제외됐다. 통금이 풀리는 지역의 면적은 전국 면적의 82%였다.
통금해제 첫날은 버스와 지하철이 자정 이후까지 연장 운행했고 택시도 철야로 다녔으며, 철야영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도 속속 등장했다. 그러나 시민생활의 역사적 전환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금이 없어진 첫날밤은 귀가 전쟁은 없어졌으나 서울시내의 도심이나 변두리 할 것없이 통금시점과 별다른 변화를 발견할 수 없었다.
[어제의 오늘]1982년 야간통금 전면해제
ㆍ37년만에 풀린 ‘족쇄’
충청도 사투리 특유의 가락을 잘 살려낸 유장한 문장으로 농촌 문제를 형상화한 작가 이문구의 <산너머 남촌>에는 노름꾼 심씨가 통금(通禁) 해제에 대해 소회를 밝히는 대목이 나온다. ‘늘 통금에 쫓겨 끗발 오를 만하면 아쉽게 일어서야 했던’ 심씨는 “그동안은 말로만 하루 24시간이었지. 우리가 실지로 쓴 시간은 하루 스무 시간밖에 더 됐나…”라고 내뱉는다.
야간통행금지는 자정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통행을 금했던 제도로 줄여서 ‘통금’이라고 불렀다. 통금은 1945년 9월7일 미군정 포고령 1호에 따라 치안 및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시작된 이래 82년 1월6일 폐지될 때까지 모두 36년4개월 동안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인천이 대상지역이었으나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54년 4월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통행이 금지됐다. 61년에는 통금시간이 자정에서 새벽 4시로 축소됐고, 64년에는 제주, 65년에는 충북이 통금지역에서 제외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지만 통금제도 자체는 계속 유지됐다.
전두환 정권이 일부 해안·전방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통금을 해제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광주시민의 피’ 위에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 결여를 보완하기 위해 갖가지 유화정책을 실시해야만 했다.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자유화, 정치·사상범 사면복권 등도 통금 해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또한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등을 위해서라도 통금 해제는 필수적이었다. 통금을 그대로 두고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를 치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통금 해제가 88 올림픽 유치 결정 이후 이뤄진 것도 이때문이었다.
통금이 있던 시절 밤 11~12시에는 귀가를 서두르는 인파로 인해 대중교통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0시 사이렌이 울리면 거리 곳곳에 철제 바리케이드가 설치됐고, 골목골목에는 2인1조 야경꾼들이 나무 딱따기를 치며 “통금!”이라고 길게 소리쳤다. 통금 위반자들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물어야 했다. 71년 발표된 배호의 노래 ‘0시의 이별’은 곧바로 금지곡이 됐다. ‘남녀가 0시(밤 12시)에 헤어지는 것은 통금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손동우 사회에디터 /경향신문 2009-01-05 17:58:14
1981년] 한국과학원(KAIS)과 정부출연기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통합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명칭 변경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고급 과학기술 인재의 양성과, 국가적 중 장기 연구개발 및 국가 과학기술의 첨단화를 위하여 설립된 이공계 대학 기관이다.
1971년 2월 설립된 이공계 대학원인 한국과학원(KAIS)을 전신으로 한다. 1981년 1월 5일 한국과학원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통합하여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84년 이공계 학사 과정인 한국과학기술대학이 설립되었고,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으로 분리된 뒤, 한국과학기술대학을 통합하면서 서울특별시에서 대전광역시 대덕연구단지 내로 이전하였다. 이에 따라 대덕연구단지에 본원을 두었으며,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207-43번지에 분원을 두고 있다. 1996년에 고등과학원을 설치하였다. /naver
1979 고조선 시대 유물 100여점 중국 요녕성에서 출토
20세기 후반 요서 지역에서 중요한 고고학 발굴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하가점문화이다. 하가점夏家店은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의 한 촌락으로, 건조한 기후 때문에 유적과 유물이 빗물에 유실되지 않고 시대별로 층층이 잘 보존된 곳이다. 그 상층에서 유목민 문화가 나타났고, 하층에서 BCE 2400∼1500년에 걸친 농경집단의 청동기 문화가 나타났다. 하층에서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문헌 기록으로 보나 유물로 보나,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드넓은 땅을 차지한 동북아시아의 대국이었다. 송호정 등 일부 학자들은 당시에 이런 제국이 존재할 수 없다고 단정하지만 역사적으로 기마민족 국가는 농경민족 국가보다 훨씬 광대한 영토를 가졌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59) 말의 질주 속도는 시속 60킬로미터가 넘으며, 실제로 13세기 몽골 기마군단은 유럽에서 하루에 100킬로미터 이상 진군하였다. 고조선은 기마민족적 요소를 가진 나라였기 때문에 동북아의 광대한 강역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었다.
고인돌 , 비파형동검 출토지역은 고조선의 영토
고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 고인돌 과 비파형 청동검입니다. 고인돌 은 중국 요녕성에서부터 우리나라 남쪽 흑산도에까지 같은 형식의 고인돌 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같은 내세관, 같은 문화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산동반도에서도 한두 점 발굴됐는데, 화하족이라고 불리는 중국민족이 사는 지역에서는 단 한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식 동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나라의 모든 문명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청동기나 철기도 다 중국에서 왔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교과서가 서술됩니다.
그러면 실제로 그러냐? 청동은 주석과 아연의 합금인데, 우리나라 청동검에는 아연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아연은 섭씨 7∼8백도에서는 날아갑니다. 그런데 청동검을 만들려면 섭씨 1200도씨 이상 가열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청동기에 아연을 섞는다는 것은 굉장히 고난도의 기술입니다.
우리나라 청동기에는 아연이 20∼30%씩 들어있습니다. 반면 중국 청동기는 아연이 거의 함유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아연을 합금할 기술이 없었던 거죠. 고조선의 청동기술이 중국보다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비파형 동검은 중국지역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습니다. 이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이 바로 동이족의 세력범위, 즉 고조선의 세력범위하고 아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몽고 지역에서도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이 발견되었습니다. 거푸집은 비파형 동검을 만드는 틀인데, 그 틀이 나왔다는 것은 그곳이 고조선의 중심지역 중 하나라는 걸 뜻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포항제철이나 광양제철과 같이 철생산의 중심지라는 뜻이죠.
고조선의 청동 제조기술은 당시 세계 최고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청동기에서 철기로 발전하는데, 철기 제조기술도 우리가 아주 압도적으로 발달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철기는 위만이 갖고 온 것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기록에 위만이 철기를 갖고 왔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_ 이덕일 초청 고대사 특강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1968년] 두브체크(Dubcek, Alexander), 체코 공산당 제1서기에 선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중앙위원회에서 안토닌 노보트니 대통령 겸 공산당 제1서기를 당제1서기로부터 해임, 대통령직만 유지하게 하고 1968년 1월 5일 알렉산더 두브체크(Dubcek, Alexander, 1921~1992)를 당제1서기로 선출했다. 소련의 압력을 배제한 선출로 동구권중 최초의 수뇌교체였다.
이날 두브체크가 당제1서기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체코는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워지는 시기를 맞게 됐다.
3월에는 검열법, 신문지법 등의 언론통제법이 개정되고 4월의 당중앙위원회에서는 결사-집회-정치적 신념의 자유에 더해져 국내여행과 국외체류가 승인됐다. 그러나 이 '프라하의 봄'은 8월의 바르샤바조약기구군의 침공으로 겨울을 맞게 됐다. /조선
1967 대통령배 야구대회 창설로 학생 야구의 전기 마련
고교야구
한국에서는 1905년에 한성고교(현 경기고)가 야구를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청년회 팀과 빈번한 경기로 정착하기 시작한 고교야구는 1907년 경신·휘문, 11년에 보성·오성·중앙·배재 등이 팀을 창단해 활발한 교환경기를 가졌으며, 실력이 한 수 위였던 동경유학생 팀과의 대전은 초창기 야구 발전에 공헌하였다.
초기 한국 야구는 엄격한 의미에서 실업·대학·고교팀 간 기량이 비슷하였는데, 어떤 때는 고교가 대학이나 실업보다 실력이 앞설 정도였다. 무명옷의 유니폼에 짚신을 신고 시작한 고교야구는 1920년 11월 4일에 창설된 조선체육회 첫 행사로 등장할 정도까지 성장하였고, 마침내 제1회 전국야구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1923년에는 한국 고교팀으로는 처음으로 일본고교야구선수권대회(일명 甲子園大會) 제9회 대회에 휘문고교 팀이 조선 예선 우승팀으로서 참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중단되었으나, 8·15광복과 더불어 1946년 9월 12일에 개최된 제1회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자유신문사 주최, 제8회 때부터 조선일보사 주최:현 청룡기대회)와 1947년 8월 21일에 제1회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야구쟁패전(동아일보사 주최:현 황금사자기대회)가 창설되었다. 이 두 대회에서, 사상 첫번째 3연패(황금사자기대회 1∼3회)란 대기록을 세운 장태영(張泰英) 투수가 중심이 된 경남중(慶南中)이 또 하나의 3연패(청룡기대회)를 위해 벌인 김양중(金洋中) 투수의 광주서중(光州西中)과 일전은 명승부의 하나이다.
6·25전쟁으로 3년간 공백기를 거쳐 1953년 10월부터 각종 대회가 부활하였는데, 이때 신인식(申仁植) 투수가 중심이 된 인천 동산고(東山高)가 서동준(徐東俊) 투수가 중심이 된 인천고의 3연패를 저지하고, 사상 두번째의 3연패(청룡기대회 10∼12회)의 대기록을 세웠다. 1957년 한국일보사 장기영(張基榮)사장의 주선으로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 경기가 실현되어 근대감각의 야구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고교야구가 급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고교야구 발전에 박차를 가한 것은 1967년 창설된 대통령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중앙일보사 주최)와 1971년 창설된 전국고교팀이 전부 출전하는 봉황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한국일보사 주최)이다. 이때부터 임신근(林信根) 투수가 중심이 된 경북고(慶北高)는 고교야구의 최강자로 군림하기 시작, 1971년 남우식(南宇植)·정현발(鄭鉉發) 때는 전국고교야구대회를 모두 휩쓸고 사상 세번째로 3연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대통령배대회 4∼6회). 이 밖에 부산의 화랑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국제신보사 주최:33회 대회부터 부산일보사 주최)가 있고, 대구의 대붕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매일신문사 주최)가 있다.
고교야구의 수준은 1970년에 시작된 일본고시엔대회(일본선수권대회) 우승팀과의 한일 고교대항전에서 1981년에 거둔 3전 3승이란 압승을 포함, 27전 14승 9패 4무의 종합 전적이 모든 것을 증명해준다. 세계무대 진출은 1981년 미국 뉴저지주(州) 뉴어크에서 열린 제1회 세계 청소년야구대회 결승에서 미국을 3:1, 3:2로 이김으로써 남자 구기종목 국제경기에서 최초의 우승을 차지, 한국 고교야구의 국제적 수준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편, 2011년 3월부로 고교야구 주말리그제를 도입, 고등학생 선수가 운동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게 하였다.
참조항목 : 대학야구, 야구, 프로야구
1965 정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고속도로
“대국토 건설계획을 발전시켜 고속도로와 항만 건설 및 4대 강 유역의 종합개발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 착공하겠습니다.”
지난 67년 4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제6대 대통령 선거공약을 발표했다. 이어 그는 5월 초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ㆍ강릉ㆍ부산ㆍ목포를 잇는 기간고속도로 건설’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을 밝혔다. 35년 간 우리 국토의 대동맥으로 불려온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본격화하는 동시에 건설산업이 경제성장의 견인차로 우뚝 서기 위한 국토 대개발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대역사=경부고속도로는 한국 건설사는 물론 경제에서도 단순한 고속도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최근 대한건설협회가 건설 60주년을 기념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사회간접자본(SOC) 부문 최고의 프로젝트로 꼽힌 것도 이 때문이다.
건협의 한 관계자는 “경부고속도로는 당시만 해도 이렇다 할 기술력이 없던 우리 건설업계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며 “우리 경제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데는 경부고속도로에서 비롯된 물류망 확충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428㎞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은 박 전 대통령의 공약이 발표된 후 10개월이 지난 68년 2월1일이었다. 그리고 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은 공사 시작 불과 2년 반 만인 70년 7월7일이었다.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대역사가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단지 하나 짓는 기간에 이뤄진 셈이다.
◇“주판은 처음부터 엎어놓았잖아”=경부고속도로가 이처럼 단기간에 건설된 것은 ‘불도저식’으로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준공을 두 달 앞두고도 공사에 진척이 없었습니다. 고 정주영 회장께 ‘주판을 맞춰놓고 하실 겁니까. 엎어놓고 하실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답은 ‘주판은 시작할 때부터 엎었다’였습니다.”
최대의 난구간으로 꼽히는 당재터널 건설 당시 현장소장을 맡았던 현대건설의 양봉웅옹(84ㆍ전 고려산업개발 회장)의 회고다.
이후 공사현장에는 일반시멘트보다 훨씬 비싼 조강시멘트(굳는 속도가 빠른 시멘트)가 투입됐고 280일로 예정됐던 공기가 40일로 줄어들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런 대공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황간 공구 묘금리~마산리 구간 공사를 맡았던 대림산업은 사사(社史)에서 “집 한채 보이지 않는 산간벽지여서 20㎞나 떨어진 주변 지역에서 인부들을 모아 출퇴근시키며 시공해야 했다”고 밝혔다.
이렇다 할 시공경험은 물론 자재와 장비조차 부족했음에도 토공량 6,000만㎥, 연인원 900만명이 투입된 대역사는 혼을 아끼지 않은 건설업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셈이다.
◇산업기반을 닦다=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이후 우리 경제가 대규모 SOC 확충과 함께 70년대 고도성장의 기반이 된 중화학공업 기반 건설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2년 후인 72년부터 81년까지 10년 간 이뤄진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이 그것이다.60년대 울산ㆍ마산ㆍ포항에 이어 구미ㆍ창원ㆍ여천 등 한국을 대표하는 중화학공업기지가 잇따라 건설된 것도 이 시기다.
70년대 초 착공된 319만평 규모의 구미공업단지의 경우 낮밤을 가리지 않고 1,000여대가 넘는 중장비가 동시에 동원돼 멀쩡했던 야산이 하루가 지나면 평지로 변하곤 했다. 당시 헬기로 이 지역을 순시했던 고 박 전 대통령이 “결전장이 따로 없다. 저기가 바로 결전장”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하지만 70년대 국토개발은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 건설산업과 사회에 ‘거점 개발’로 많은 문제점을 남기기도 했다. 대도시와 대규모 공단으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70년대 말부터 ‘주택’ 문제가 본격적인 사회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조우현 전 건설교통부 차관(현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원장)은 “70년대 말부터 집이 본격적인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며 “이후의 주택정책은 ‘집값 안정’과 ‘주택경기 회복’이라는 상반된 정책목표의 반복”이라고 말했다.
1964년] 동·서방교회 수장, 분열 910년 만의 만남
1964년 1월 5일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동·서방교회 수장이 예루살렘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그리스도교는 크게 로마 가톨릭, 개신교 그리고 동방정교회의 3개 분파로 나누어진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문화적 차이, 교리논쟁,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얽힌 복잡한 권력 다툼을 벌이다 서로 등을 돌리고 말았다. 성상파괴논쟁에서 관할지역 다툼까지 이르는 긴 불화 끝에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마침내 '1054년의 교회 대분열'(동·서방분열)을 초래했다. 교리 차이에 대한 이견을 해소한 페라라-피렌체 공의회 등의 성과도 있었지만, 화해와 화합을 위한 획기적인 진전은 20세기 들어서야 이루어졌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와 동방정교회 콘스탄티노플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인 아테나고라스 1세는 예루살렘에서 첫 만남을 가졌고 1965년 상호 파문을 거두었다. /브리태니커
1962 예총(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 창립총회,
*한국 예술문화인들의 친목과 권익옹호를 위하여 결성된 예술문화단체 로 한국 예술문화인들의 친목과 권익옹호를 위하여 결성된 예술문화단체이다. 줄여서 예총(藝總)이라 부른다. 1947년 설립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의 후신이다. 당시 문총 산하에는 중앙문화협회·전국문필가협회·극예술연구회 등의 단체가 있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가 각 단체의 분야별 통합을 종용하자 문총 해체를 결의하고, 한국음악협회·한국국악협회·한국문인협회·한국사진작가협회·한국연예협회·한국미술협회·한국연극협회·한국건축가협회·한국무용협회·한국영화인협회를 구성한 뒤 초대 회장으로 유치진(柳致眞)을 선출하였다. 이들 각 협회의 대표는 당시 국회의사당(현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1962년 1월 5일 창립총회를 갖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를 결성, 1963년 1월 30일 사단법인으로 설립인가를 받고 출범하였다. 창립 이래 신인예술상 시상, 각종 경축일과 예술제 개최, 예술인의 복지사업 및 창작·연금 지원 등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 출판사업으로는 월간 《예술세계》를 발간하고 있다. 1986년 8월 사무소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동숭동으로 옮기고 각 도에 지부를 두었다. 1995년 현재 회장 1명, 부회장 4명, 이사 24명, 감사 3명의 임원진으로 운용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61 첫 서울 민선시장 김상돈 취임
김상돈(金相敦)에 대하여
1960 프랑스소설가 극작가 알베르 카뮈 사망,
1960 프랑스소설가 극작가 알베르 카뮈[Camus, Albert, 1913.11.7-1960.1.4] 사망, 1957년에 노벨문학상 받음,
*1913년 11월 7일 알제리 몽드비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아버지가 마른 전투에서 전사하자, 귀머거리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빈곤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L.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서는 평생의 스승이 된 J.그르니에를 만났다. 결핵으로 교수가 될 것을 단념하고 졸업한 뒤 신문기자가 되었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흥미를 가져,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작품 《표리(表裏)》(1937) 《결혼》(19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이 보이며, 이때 이미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민, 존재의 부조리성(不條理性) 문제 등이 서정적인 에세이풍으로 서술되었다. 1942년 7월, 프랑스는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는데, 그의 문제작 《이방인(異邦人) L’tranger》(1942)은 발표되자, 칭송과 함께 그를 일약 문단의 총아(寵兒)로 만들어 놓았다.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로 살다가, 살인죄를 범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사나이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와 행복을 깨닫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성과 반항의 의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시지프의 신화(神話)》(1942)이다. 《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써 펼쳐 보인 것이라면,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하였다. 희곡 《오해(誤解)》(1944) 《칼리굴라 Caligula》(1945)에서도,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의 어려움을 역설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 《콩바》지(紙)의 주필로서 레지스탕스의 필봉(筆鋒)을 들었다. 사르트르는 “나보다도 카뮈가 훨씬 더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회고한 일도 있다.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1945)는 전시 중에 썼던 4편의 서간형식의 ‘독일인론(獨逸人論)’으로서, 편협한 애국심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그 후 《페스트》(1947)는 그의 명성을 더욱 빛내주었으며, 이것은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암시하면서 페스트의 유행과 싸우는 선의(善意)의 사람들의 행동을 단순 명쾌한 문체와 힘찬 필치로써 그렸다. 희곡 《계엄령》(1948)은 《페스트》의 주제를 극화한 것이다. 시사평론을 쓰면서 연극을 상연하여 청년층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그를 실존주의자로 보는 세상 사람들과 매스컴에 대해서는 항상 그것을 부정했으며, “실존주의가 끝난 데서부터 나는 출발하고 있다”라고 그는 언명하였다. 그러므로 《반항적 인간》(1951)을 둘러싸고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여 10년 가까이 맺어온 우정에 파탄이 갔다는 사실이 뜻밖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희곡 《정의(正義)의 사람들》(1949) 속에서 열렬히 변호되는 제정 러시아의 혁명당원의 행동을 주제로 한 에세이인데, 형이상적(形而上的)·역사적·예술적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고, 혁명적 수단과 유물사관(唯物史觀)에 반대하여, 점진적·개량적인 중용의 방법을 주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에 발표된 《전락(轉落)》(1956)은 깊은 내성(內省)에서 우러나온, 어두우면서도 순수한 반짝임을 지닌 걸작으로, 사르트르도 절찬하였다. 이 동안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서도, 알제리에 거주하는 친척과 친지 들을 생각하여 정치적 발언을 일체 삼가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정치참여에서 정관주의(靜觀主義)로 처신을 바꾼 것으로 여겨지기는 하나, 그 침묵의 배후에 영혼의 격렬한 갈등과 고뇌가 없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고 나서, 최초의 본격적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두산백과)
1958 독립운동가 임용상 사망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일제에 대항하여 거의를 결심하고 김재서(金在瑞) 등과 의병을 조직하여 동해창의대장(東海倡義大將)에 추대되어 청하ㆍ영덕 등지에서 일본군 주재소를 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1907년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의병진을 결성하기 위하여 각 지방별로 계획을 추진하는 담당자를 선정할 때, 서종락(徐鍾洛) 등과 청송지역을 맡아 산남의진 성립에 기여하였다.
그 해 4월 산남의진은 청하읍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정용기가 투옥되고 전력이 약화되어 7월경 해산되었으나, 이듬해 4월 다시 의진이 창군되자 동해지구 유격장에 임명되어 청송ㆍ영천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그 해 7월 산남의진이 동해방면으로 진출할 때 본진에 합류, 좌포장이 되었다.
9월 영일군 죽장면전투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그의 아버지 환직(煥直)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200여 신병을 이끌고 청도 운문산(雲門山)에 들어가 훈련시켰으며, 1908년 봄에는 운문산을 근거지로 경주ㆍ언양ㆍ양산ㆍ밀양ㆍ영산ㆍ창녕 등지의 적을 격파하였다.
그 해 6월 일본군에 붙잡혀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10개월 만에 석방되어 1910년 4월에 옛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여 보현산에서 산남의진을 재결성, 대장이 되어 청송ㆍ의성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다가 다시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57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신중동 정책 발표(아이젠하워 독트린) ← 아이젠하워(1952)
아이젠하워가 왜 한국전을 서둘러 종식시키고, 또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전을 종식시켰는지, 수에즈 운하 국유화 사건으로 빚어진 제 2차 중동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했는지 원칙을 담고 있는 아이젠하워 독트린은 1957년 1월 5일 의회에 중동정책의 협조를 구하며 보낸 메시지를 가리킨다.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한 뒤 1956년 10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한 뒤 유엔의 이름으로 휴전을 성사시키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철수를 성사시킨 직후의 상황이다. 아직,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군을 거부하며 강짜를 부리던 시점이다. 아이젠하워는 이스라엘의 고집으로 중동 평화가 위협받을 시점에 놓이자, 특사를 보내기 전 의회의 협력부터 구한 것이었다.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1957년 1월 5일 독트린을 발표한 아이젠하워는 특사를 보내 이스라엘로 하여금 중동평화안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고, 결국 이스라엘은 1957년 3월 군대를 철수한다.
의회에 전하는 메시지 1957년 1월 5일(A Message to Congress, January 5, 1957)
중동은 유구하고도 긴 역사에서 갑작스럽게 새롭고도 아주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다. 지난 수십년간 중동에서는 자율적인 통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이후 자주적인 정부와 독립국가를 향한 능력이 꾸준히 향상돼 왔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환영하며 격려하는 바이다. 우리는 중동에 있는 모든 나라의 전면적인 주권과 독립을 주저없이 지지한다.
독립을 향한 진보는 평화롭게 진전돼야 한다. 그러나, 분쟁이 있어 왔다. 10월(1956년)에도 이스라엘에 의한 광범위한 공격으로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들간의 차이점을 더욱 증폭시켰다.
우리는 무력이 공격적인 목적을 위해 국제적으로 사용될 수 없고, 또 중동 각국의 독립이 침해돼서는 안된다는 원칙에 의심할 여지 없이 충실할 것임을 보여 줬다. 중동에는 미국이 중동 어느 나라 국민에 대해서도 정치적 혹은 경제적 지배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퍼져 있다. 우리의 희망은 자유로운 세계환경이지 노예상태가 아니다. 전부 다는 아닐지라도 많은 중동국가들은 소련에서 비롯되는 국제 공산주의의 위험을 잘 알고 있으며 독립과 경제적 번영, 정신문화의 성숙이라는 유엔의 목표를 그들 스스로 실현시키기 위해 미국과 더 많은 협력을 반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의회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린다. 오직 그런 협력만이 우리로 하여금 침략을 저지하는데 필요한 확신을 줄 수 있으며, 자유에 헌신적인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고, 자유세계를 중대한 위험에 빠트릴 사건의 지속적인 발생을 예방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천명한다. 먼저,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경제력의 발전 속에 중동 각국을 돕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느 나라와도 협력하고 군사적 도움을 줄 프로그램에 착수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국제 공산주의로부터 통제되는 어느 나라의 공격에 대해서도 영토의 존엄성과 국가의 독립을 확보하고 보호하기를 원하는 중동각국의 요청에 호응해 미국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돼야 한다
이런 조치는 당연히 미국의 조약의무는 물론 유엔 헌장과 유엔의 권고, 유엔의 조치와 호응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무장 공격을 하게 된다면 이는 유엔 헌장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절대적인 권위에 종속되는 범위에서만 이뤄질 것이다.
경험적으로 보건대 직접 공격에 대한 합리적인 안전책이 있다면 간접적인 공격은 성공하지 못한다. 충성스런 군대를 갖고 있고 또, 경제적인 조건들이 공산주의를 매력적인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을 만큼 주어져야 한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우리는 국가 전복사태에 저항하고, 독립 유지에 명백히 헌신적인 중동 각국을 경제적으로 성장시킬 필요성이 있다. 그런 조치만이 국제 공산주의를 중동에 발붙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대한 위협은 가끔 나타나지만, 야심적인 독재자가 상황을 오판하는 것이다. 권력에 굶주린 공산주의자들이 오판이든 제대로 된 평가든 중동이 효율적인 방어체제를 갖지 못했다고 평가한다면 무장공격을 감행할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미국도 군사행동으로 개입하게 된다. 확신컨대 혹 있을 수 있는 이런 위험스런 상황을 막기 위해 가장 좋은 대책은 유엔헌장의 목적과 원칙에 따라 중동에 있는 우리의 친구들과 다방면에서 충분하고도 자유롭게 협력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명확히 해두는 것이다
자유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이 단결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천명하고, 나아가 크든 작든 모든 국가의 권리와 독립을 미국이 마음속 깊이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미국의 목표는 폭력이 아니다. 평화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힘과 단호한 의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부여해야한다.
이상이 주요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원칙이다. 카터나 클린턴 같은 평화의 전도사들이 나오기까지 아이젠하워같은 훌륭한 선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늘날 중동평화가 지켜지지 않는 불행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아이젠하워가 천명한 원칙이 중동의 다른 국가들에는 적용되지 않고 오로지 이스라엘에만 적용되는 불평등과 불합리에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유엔과 절대적인 협력을 추구했던 평화의 아이젠하워. 이와 달리 유엔의 원칙을 무시한 채 일방주의 외교를 강행하는 부시. 부시에게서 통제할 수 없는 일탈된 절대권력의 폐해를 들여다 보게 된다. 한반도를 넘어 지구촌의 평화를 논해야 할 한민족 구성원 입장에서 더욱 그렇다./(27. 민주주의 창-평화의 미국④:아이젠하워 2 2006-08-23 10:03)/김문환 기자 kim34@sbs.co.kr
1953년] 이승만대통령 일본 방문, 요시다 수상과 회담
일본에 대한 군정을 종료하고 일본을 자주독립 국가로 탄생시킨 1951년 9월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 수립을 주선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국교 수립을 통해 극동의 안보 강화를 모색하려는 미국의 노력으로 한일 수교회담은 1951년에 시작됐다. 그러나 청구권 문제 등 이해관계 상충으로 회담이 결렬돼 있던 때였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양국 수뇌가 직접 만나게 함으로써 중단된 회담을 재개시키고 한일 수교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출발은 1953년 1월 5일이었다. 클라크 장군이 보내온 C-54 수송기가 부산 수영비행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 수행원은 나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었다. 유엔군사령부 연락장교단장으로 도쿄에 주재하고 있던 김정렬 공군 소장이 현지에서 합세하게 돼 3군의 선임자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모양새가 됐다.
하네다 공항에는 클라크 장군 부부와 일본 정부 측에서 오카자키 가쓰오(岡崎勝南) 외무장관이 아시아국장을 대동하고 마중을 나왔다. 이 대통령은 클라크 장군과 인사를 나눈 뒤 전날 작고한 히로히토 일왕의 동생 치치부노미야(秩父宮) 야스히토(雍仁) 친왕 상사에 조의를 표하고 회담장으로 직행했다.
유명한 반일 정치가의 일본 방문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정부 수립 직후였던 1948년 가을 이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방일 직후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터져 급거 귀국하는 바람에 일본 정치인들과의 만남은 없었다.
첫 한일 정상회담은 1월 6일 클라크 장군 숙소인 도쿄 마에다(前田) 하우스에서 열렸다. 신주쿠에 있는 마에다 하우스는 에도 시대 가가(加賀) 영주 마에다의 에도저택으로, 9000평이나 되는 호화주택이었다. 미군의 군정은 끝났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유엔군사령부가 도쿄에 개설돼 있었기 때문에 미군이 접수했던 시설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저택 종사자 수만 19명이라고 기억이 난다. 우리는 회담장에는 못 들어갔다. 한국 측에서는 이 대통령과 김용식 주일공사(외무장관 역임), 일본 측에서는 요시다 수상과 오카자키 외무장관, 미국 측에서는 클라크 장군과 머피(Murphy) 주일 미국대사, 이렇게 6명이었다.
7순의 양국 정상은 석양을 받으며 기념촬영하고 회담장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 모두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그리 우호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수교 회담은 결렬상태고, 이승만 라인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 나포 문제 등으로 양국관계가 좋지 않았던 때다.
배석했던 김용식 공사에 따르면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는 주로 이 대통령이 발언을 했고, 요시다 총리는 듣는 편이었다고 한다. 양국 수교 교섭 등 현안이 잘 풀리기를 희망한다는 이 대통령 발언에 대해 요시다 수상은 앞으로 일본은 어느 나라도 침략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군국주의 부활을 우려하는 것은 기우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회담과 관련해 분명히 밝혀 둘 것이 있다. 항간에 나도는 ‘호랑이 이야기’다.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는데 아직도 많이 있느냐?”는 요시다 수상의 질문에, 이 대통령이 “없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다 잡아갔기 때문이다”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대화는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은가 한다./<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정리=문창재 언론인> 2008.11.20<861>老兵이 걸어온 길-111-한일 정상회담 수행 /국방일보
1953년]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파리에서 초연
아일랜드의 극작가 사뮤엘 베케트(Beckett, Samuel, 1906~1989)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가 1953년 1월 5일 파리 바빌론극장에서 초연됐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파리에 와서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고 있는 베케트를 주목할 사람은 물론 이 연극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본은 연출가들 사이에서 돌고 돌아다녔지만 통속극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출가들의 외면을 받았다.
공연 다음날 피가로지 1면에는 '광대들에 의해 공연된 파스칼의 명상록'이라고 대단한 호평이 실렸다. 극장은 연일 만원이었고 배우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고 희희낙락했다. 자신의 예술에 방해된다고 아무도 만나려 들지 않는 베케트를 촬영하기 위해 미국 텔리비전 방송팀은 아파트 8층에 사는 그의 모습을 찍으려고 사다리를 올릴 정도로 법석이었다. 공연이 성공하자 '기상천외한 작가' '불가능한 완전한 침묵의 작가' 등의 수식어가 그를 따랐다.
그는 한때 더블린에서 교수생활도 했지만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며 1938년 파리로 떠나 그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 1969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 싫다며 스톡홀름에도 가지 않고 수상연설도 하지 않은 작가였다. /조선
1951년] 서재필(徐載弼) 박사 별세
← 서재필
1864. 11. 20 ~ 1951. 1. 5
독립운동가 송재 서재필이 1951년 1월 5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전남 보성 출생으로 18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이 됐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워싱턴대학에 입학했다.
본국의 민씨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1897년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돼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인친우회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 고문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으며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 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조선
1950 - 소설가 김동인 사망
작가 김동인. /조선
소설가 김동인 사망
이광수 염상섭 등과 함께 한국 현대 소설사의 첫머리에 우뚝 솟아 있는 작가 김동인이 1951년 1월 5일 사망했다. 그는 1919년 신문학 최초의 동인지 `창조`를 창간했다. 한국 리얼리즘 또는 자연주의의 빗장을 연 개척자이기도 했다. 일제하에서 3.1운동의 격문을 만들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일왕에 대한 불경죄 죄명으로 6개월을 복역한 적도 있다. 그는 한국 문학사에 기념비로 남을 주옥같은 단편들을 남겼다.
사실주의 계열에 속하는 `감자` `배따라기` `김연실전` `명문` `태형` `발가락이 닯았다` 등이 있고, 탐미주의 계열 작품으로는 `광염소나타` `광화사` 등이 있으며, 민족주의적 색채를 보인 작품으로 `붉은 산` 등이 있다. 그는 이광수의 계몽주의나 신경향파 및 카프의 사회주의 문학에 맞서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걸고 탐미주의적 순수문학을 지향했다.
김동인이 한국 문학사에 끼친 공로는 그 소설들의 무르익은 구성 못지않게 문체에 있다. 그는 작중 인물의 호칭에서 영어의 he나 she를 `그`로 통칭하고,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즐겨 사용해 문장의 시간 관념을 또렷하게 했으며,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현대소설의 문체를 개척했다. /조선
1951 소설가 금동 김동인 金東仁(1900.10.2∼1951.1.5) 사망,
*본관 전주. 호 금동(琴童)·금동인(琴童人)·춘사(春士). 창씨명(創氏名)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안남도 평양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1935년부터 《왕부(王府)의 낙조(落照)》 등을 발표하고 야담사(野談社)를 설립하여 월간지 《야담(野談)》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설 쓰기에 전심하다가 몸이 쇠약해진 후에 마침내 마약 중독에 걸렸다. 병마에 시달리던 1939년 '성전종군작가'로 황군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에는 불경죄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내고, 1944년 친일소설 《성암(聖岩)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는 장편 역사소설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단편 《망국인기(亡國人記)》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생활고로 중단하고 6·25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에서 작고하였다. 소설 외에 평론에도 일가견을 가졌는데 특히 《춘원연구(春園硏究)》는 역작이다. 김동인은 작중인물의 호칭에 있어서 'he, she'를 '그'로 통칭하고, 또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도입하여 문장에서 시간관념을 의식적으로 명백히 했으며,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이른바 간결체를 형성하였다. 1955년 사상계(思想界)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제정·시상하였으나, 19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두산백과)
*[대표작: <배따라기>] -1921년 《창조(創造)》지 9호에 발표.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모란봉(牡丹峰)에 올라 봄경치를 즐기다가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영유 배따라기 소리를 듣는다. 이윽고 그 소리의 주인공을 만나 그 사연을 듣게 된다. 그는 영유 사람으로 아우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장가를 들었는데, 부부의 금실도 좋았고 형수와 시동생의 사이도 원만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아내와 동생 사이를 의심하게 되어 자주 부부싸움이 일어났다. 어느 날 장에 가서 아내에게 줄 거울을 사 가지고 돌아온 그는 아내와 동생이 방 안에 든 쥐를 잡느라고 옷매무새를 흐트린 것을 보고는 결정적으로 오해하여 아내를 내쫓고 만다. 며칠 뒤 아내는 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동생은 영유를 떠난다. 그후 형은 동생의 종적을 찾아 20년 동안이나 배따라기 노래를 불러가며 정처 없이 헤맨다는 것이다. 애조 띤 서정이 전편에 넘쳐 흐르고 단편으로서의 짜임새가 비로소 완벽한 경지에 이른 김동인의 초기 자연주의의 대표작이다. 작가 자신도 이 단편이 “여(余)에게 있어서 최초의 단편소설(형태로든 양으로든)인 동시에 조선에 있어서 조선글, 조선말로 된 최초의 단편소설일 것이다”라고 자부하였다. (두산백과)
* [감자] -게으르고 무능한 20년 연상의 사나이에게 시집을 간 복녀는 칠성문 밖 빈민굴에 살면서 송충이잡이 등 고된 일을 해 가며 생활을 이어가던 중, 중국인 왕서방네 채마밭에 감자를 훔치러 갔다가 들켜 몸을 팔게 된다. 그 뒤부터 왕서방은 수시로 복녀를 찾아왔다. 그러던 차에 왕서방은 어떤 처녀에게 장가를 들게 되는데, 질투심에 불탄 복녀는 칼을 품고 신방에 뛰어들었으나 왕서방 손에 죽고 만다. 사흘 후 복녀의 시체는 돈 몇 푼에 매수된 남편에 의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실려 나간다. 이 작품에 대하여 조연현(趙演鉉)은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예의 바르게 자라난 복녀라는 한 여성이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준 것인데, 아름다운 현실보다는 추악한 현실을, 긍적적인 인간성보다는 부정적인 인간성을 폭로한 점에 있어 현실폭로의 전형적인 자연주의 수법을 적용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두산백과)
*[젊은 그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그의 첫 장편소설로 작가 자신은 통속소설이라 지칭하였다. 흥선대원군 외에 한두 사람만이 실재 인물이며 거의 가공 인물들이므로 역사소설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한말 격동기로서 안재영과 이인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민씨 일파에 의해 숙청된 대원군파 후예들과 민씨 일파의 갈등, 또 이인화가 정혼자를 찾기 위해 벌어지는 활극과 흥미로운 연애담이 전개된다. 장편역사소설 《운현궁의 봄》(1933∼1934)의 하편(下篇)이나 다름없는 이 소설은, 그의 영웅주의적 사관을 잘 드러낸 문학적 이상주의가 반영된 소설이라 하겠다. (두산백과)
1949 - 반민특위 활동 시작
[어제의 오늘]1949년 반민특위 활동 시작ㆍ민족주의 세력의 패배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파들의 민족반역·일제부역 행위를 조사·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본격 활동을 시작한 지 1개월 뒤인 1949년 2월7일 서울 세검정에 있던 춘원 이광수의 집 앞에 검은 지프가 도착했다. 한때 조선의 최고지성이자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춘원. 그러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고 학병참여를 독려하는 등 최고의 친일파로 돌변했던 그를 체포하러 반민특위 조사관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춘원이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반성은커녕 발뺌을 하자 조사관들은 일부러 “가야마(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선생!”이라며 큰 소리로 춘원의 창씨명을 불렀다. 그는 순간적으로 “핫!” 하고 일본식으로 대답했다가 스스로도 계면쩍었던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달 전인 1월5일 반민특위는 중앙청에서 시무식을 열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특위 관계자들은 오후에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경무대에서 다과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열심히 일해줄 것을 당부했다. 대통령의 이런 모습을 보고 특위 관계자들은 이전에 가졌던 의구심을 떨치고 신뢰감을 가졌으나 그것은 철저한 오산이었다. 친일파들과 함께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주범이 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48년 8월 제헌헌법 제101조에 의거하여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 9월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통과되고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국민 대다수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월25일 서울시 경찰국 수사과장 최난수 등이 반민특위 위원을 암살하려하다 미수에 그쳤고, 6월6일에는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난입해 관계자들을 무차별 구타·체포하고 특경대(반민특위의 경비를 맡았던 조직)를 무장해제시킨 ‘6·6사건’이 발생했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특경대 해체와 함께 치명적 타격을 입었으며, 8월22일 폐지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종언을 고했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은 대통령까지 가세한 친일세력에게 치욕적으로 패배했다.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 세력들이 상해임정의 정통성을 폄하하고, 이승만 찬양에 열을 올리는 등 ‘역사 무너뜨리기’에 골몰하고 있는 지금 반민특위의 출범과 와해는 새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손동우 사회에디터 /경향신문 2009-01-04 17:50:56
1949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페어딜 정책 발표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
1949년 오늘 연두교서에서 '미국 국민은 모두 정부의 '페어딜', 즉 공정한 조치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이른바 페어딜 정책!
최저임금 인상과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건설, 그리고 사회보장 대상의 확대가 주요 내용이다.
페어딜정책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시행한 뉴딜 정책을 계승한 사회복지정책이다.
그러나 페어딜정책은 1950년 6.25전쟁 발발로 동서냉전이 심화되자 트루먼 정부의 정책방향이 전환되면서 폐기된다. /YTN
1947 시인 홍사용 세상 떠남
홍사용(洪思容)에 대하여
1943 흑인인권운동가 카이버 세상 떠남
카이버는 미국 노예제도를 끝장낸 남북전쟁 초에 태어난 흑인이다.
그가 자라온 삶은 천대받는 삶이었지만 그의 마음 속은 언제나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쓰레기더미 속에서도 실험도구나 재료를 만들어냈고 진흙 속에서 색소를 찾아냈다.
그는 오랜 동안 면화만 재배해 오던 미국 남부지방에 새로운 품종을 개발함으로써 가난
한 농부들을 가난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며 흑인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카이버는 1943.1.5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1933년] 미국 제30대 대통령 쿨리지Coolidge, (John) Calvin 사망
1872. 7. 4 ~ 1933. 1. 5
미국 제30대 대통령을 지낸 존 쿨리지가 1933년 오늘 세상을 떠났다.
1923년 대통령에 취임한 쿨리지는 미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켈로그 등 유능한 관리들과 함께 선린외교와 청렴결백한 정치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YTN
1933 - 미국 샌프란시스코 만(灣) 골든게이트교(금문교) 공사 시작
골든 게이트 브리지 /위키백과
골든 게이트 브리지(Golden Gate Bridge) 또는 금문교(金門橋)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골든 게이트 목에 위치한 현수교이다. 골든 게이트는 샌프란시스코 만과 태평양을 잇는 목으로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 주 매린 카운티(Marin County)를 연결한다.
1937년에 완공한 이 다리는 당시 가장 큰 다리였다. 그 뒤에 이 다리는 샌프란시스코 시의 상징이 되었다.
역사
골든 게이트 브릿지(Golden gate bridge)는 조셉 스트라우스(Joseph Strauss)가 설계하였다. 400여개의 교량을 설계한 바 있는 스트라우스는 이 일에 10년 넘게 참여하였다. 초기의 설계는 중앙에 현수교를 설치하고 캔틸레버로 연장하는 형식이었다. 건축가 어빙 머로우(Irving Morrow)가 Art Deco와 채색을 담당하였고 공학가 찰스 앨턴 앨리스(Charles Alton Ellis)와 교량 설계 전문가 Leon Moisseiff가 구조해석을 담당하였다.
골든 게이트 브릿지 앤 하이웨이 사업단(Golden Gate Bridge and Highway District)는 1928년 설립되어 설계,공사,재정을에 관한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 사업단에는 다리가 놓인 샌프란시크 시와 매린 카운티 외에 나파, 소노마, 멘도시노, 델 노르테 가운티를 포함하였다. 각 카운티의 대표가 이사회를 구성하여 1930년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각 카운티의 집, 농장, 사업 소유물 등을 담보로 발행한 채권은 3천 5백만 달러에 이르는 규모었다. 채권은 1971년 모두 회수하였고 원금 3천 5백만 달러와 이자 비용으로 약 3천 9백만불이 소요되었으며 모두 통행 요금을 통해 지불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31년 1월 5일 착공하였으며 1937년 4월 완공되어 5월 27일 보행자에게 개방하는 행사를 가졌고 그 다음날 루즈벨트 대통령이 워싱턴 DC에서 전신으로 개통신호를 보냄으로써 차량 통행을 시작하였다.
이 기록은 1957년 맥키넥 브리지(Mackinac bridge)가 완공되어 총연장 길이 기록을 내주었고 1964년 verrazano Narrow Bridge에게 주경간 기록을 내주었으며 높이는 최근까지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는 총연장과 주경간에서 아카시대교가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모든 세계 최고 기록을 잃었지만 아직도 골든 게이트 브리지는 현수교로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다리이며 다리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가치와 역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다리이다.
샌프란시스코 시에서 북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로 미국 국도 101번과 캘리포니아 주도 1번이 지정되어 있다. 양쪽으로 보행자용 길이 있고 차선은 6차선이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변경차선이며 주중 아침에는 6차선 중 4차선이 샌프란시스코 행인 남행에 할당된다. 규정속도는 시속 70-90km이고 요금은 남행 차선에 한하여 5달러를 받는다. 북행 차량과 보행자는 무료이다. /위키백과
1932 이탈리아 기호학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Eco, Umberto, 1932.1.5∼]출생,
*기호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볼로냐대학교의 교수이다. 1932년 이탈리아 서북부의 피에몬테주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1954년 토리노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으며, 1956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미학적 문제〉라는 논문으로 철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 학위논문을 발간함으로써 문학비평 및 기호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62년 토리노대학교와 밀라노대학교에서 미학 강의를 시작했으며, 최초의 주요 저서인 《열린 작품 Opera apertas》(1962)을 발간해 현대미학의 새로운 해석방법을 제시했다. 이어 《제임스 조이스의 시학 Le poetiche di James Joyce》(1965), 《예술의 정의 La definizione dell'arte》(1968) 등 새로운 이론서를 발표해 문학비평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66년 상파울루대학교와 피렌체대학교에서 시각커뮤니케이션을 강의했으며, 1967년 《시각커뮤니케이션 기호학을 위한 노트》를 출간했다. 1968년 인간의 사고와 문화행위, 이념구성 등에 다양하게 관련되어 있는 기호를 개념, 유형, 의미론, 이데올로기 등으로 명쾌하게 분석 정리한 《텅빈 구조 La struttura assente》를 발간했으며, 이어서 《내용의 형식 Le forme del contenuto》(1971)을 발간한 후 이 두 저서의 내용을 증보해 영문판 《기호학이론 A Theory of Semiotics》(1976)을 발간함으로써 세계적인 기호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1971년 볼로냐대학교의 기호학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국제기호학 잡지 《베르수스》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1974년 밀라노에서 제1회 국제기호학 회의를 주관했으며, 1975년 볼로냐대학교의 기호학 정교수 및 커뮤니케이션·연극학 연구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기호학과 미학의 세계에 열중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친구의 권유로 소설을 집필하게 되었다. 당시 원자핵의 확산과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세기말적인 위기를 문학으로 표현해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는 2년 반에 걸쳐 집필을 완료해 1980년 첫번째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을 발표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논리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경험주의 철학과 자신의 기호학 이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어 1988년 두 번째 장편소설 《푸코의 진자 Il pendolo di Foucauilt》를 발표해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1994년 자전적 작품인 세 번째 장편소설 《전날의 섬 L'isola del giornoprima》을 발표해 작가로서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움베르토 에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퍼스널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기호학·철학·역사학·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전문적 지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에스파냐어까지 통달한 언어의 천재이다. 이러한 이유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이래 최고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다. 현재는 볼로냐대학교에서 건축학·기호학·미학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세계 명문대학의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파리 제4대학인 소르본에서의 강의활동과 미국 예일대학교 교수 폴 드 만(Paul de Mann)과 함께 하는 예일학파로서의 학술활동은 유명하다. 그의 기호학이론은 오늘날 세계 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학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에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동화 《폭탄과 장군》 《세 우주비행사》 등이 있으며, 이론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적 문제》 《열린 작품》 《기호학이론》 《논문작성법 강의》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대중의 슈퍼맨》 《해석의 한계》 《소설 속의 독자》 《기호와 현대예술》 《해석이란 무엇인가》 《중세의 미와 예술》 《소설의 숲으로의 여섯 발자국》 《시간의 종말》 등과 수필집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등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31년] 미국의 무용수겸 안무가 에일리(Ailey Jr., Alvin) 출생 ← 에일리(1960)
1931. 1. 5 ~ 1989. 12. 1
미국의 무용수·안무가.
앨빈 에일리 미국무용단의 감독이다.
1942년 가족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1949년 레스터 호턴 무용단에 입단했다. 1953년 호턴이 죽자 뒤를 이어 1954년 이 무용단이 해체될 때까지 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뉴욕 시로 갔다. 뉴욕에서 다양한 무대공연물에 출연했으며 스텔라 애들러와 함께 연기수업을 하고 마사 그레이엄, 하냐 홀름, 찰스 와이드먼 등과 함께 무용을 공부했다. 1958년 자신의 무용단을 만들었는데 주로 흑인들로 구성된 이 앨빈 에일리 미국 무용단은 미국과 해외를 널리 순회 하며 공연했다. 이 무용단은 그의 작품과 더불어 호턴, 펄 프리머스, 캐서린 던엄 등 몇몇 선구적인 현대무용 안무자들의 작품을 공연했다. 이 무용단의 주제작(主題作)은 그의 초기작인 〈계시 Revelations〉(1960)로서 미국 흑인영가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감동적인 작품이다. 그후 에일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무용과 다른 현대무용단들을 위해 안무를 했다. 앨빈 에일리 미국무용단은 지구상의 모든 대륙에서 매우 성공적인 순회공연을 함으로써 1960~80년대에 그를 해외에서 가장 잘 알려진 미국 안무가로 만들었다. /브리태니커
1928년] 파키스탄 대통령 줄피카르 알리 부토(Bhutto, Zulfikar Ali,) 출생 ← 부토
1928.1.5~1979.4.4
파키스탄의 대통령(1971~73)·총리(1973~77).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군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유서 깊은 라지푸트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인도 식민 정부의 유력한 행정관료였다. 봄베이대학교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1950 졸업)에서 수학한 뒤 옥스퍼드대학교에 진학해 법률을 전공했으며, 영국에 남아 법률 강의를 하면서 변호사업을 시작했다. 1953년 귀국하여 카라치에 법률사무소를 개설했으며 1957년 국제연합 대표단의 일원으로 위촉되었다.
1958년 모하마드 아유브 칸이 정권을 장악하자 상무장관을 지낸 뒤 여러 각료직을 거쳤으며, 1963~66년 외무장관을 지내면서 자치권의 확대 및 중국과의 유대강화에 노력했다. 1965년의 '카슈미르 분쟁' 당시 인도와의 강화협상에 반대하다 사퇴한 부토는 1967년 12월 스스로 '파키스탄 국민당'을 창설했으며, 아유브 칸의 독재성향을 비판함으로써 1968~69년 투옥생활을 했다. 1970년 모하마드 야히아 칸 장군이 아유브 칸을 축출한 뒤 총선이 실시되었다. 부토와 국민당은 서파키스탄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었으나, 총선의 승리는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와미 동맹'에게로 돌아갔다. 부토는 선거의 무효화를 주장하며 분리주의 정당과의 연립내각 구성을 거부했고 파키스탄 전역에 걸친 폭동사태는 내전으로 악화되었다. 인도의 지원 아래 동파키스탄이 독립국 방글라데시로 출범하고, 1971년 12월 20일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군사대결에서 참패하고 만 야히아 칸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았다. 부토는 대통령 취임 즉시 야히아 칸을 가택연금하고, 주요산업체에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으며 대지주들에 대한 과세를 결정했다. 1973년 채택된 신헌법은 대통령직을 의례상의 국가원수로 규정했고 부토는 대통령과 총리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총리 스스로가 외교·국방·내무 행정을 직접 관할하는 가운데 파키스탄의 이슬람화가 진행되어갔다. 국민대중이 법령에 의한 무단통치에 반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부토는 1977년 새로운 총선을 실시했고 국민들의 신임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야당측의 갖가지 선거부정 시비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1977년 7월 5일 육군참모총장 모하마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이 정부의 전복에 성공하자, 부토는 정적의 암살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검거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 4월 4일 수차에 걸친 항소와 각국 지도자들의 사면요청에도 불구하고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저서로 〈독립의 신화 The Myth of Independence〉(1969)·〈대참화 The Great Tragedy〉(1971)가 있다. /브리태니커
1928 蘇, 토지 환수,
*혁명이 위기를 맞았다. 농업 때문이다. 확대재생산을 거듭하는 공업에 비해 농업은 단순재생산에 머물고 있었다. 1927년 농민이 원가 이하의 곡물징발을 거부하고 나섰다. 도시 노동자는 굶주렸다. 1921년부터 시작된 신경제(NEP)로 자본을 축적한 쿨락(부농)과 네프맨(nepman)들의 저항 강도는 높아만 갔다. 비판이 쏟아졌다. 레닌은 ‘부농과의 내전’을 선언했다. 전시공산주의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한 신경제하에서 합법적으로 토지를 늘리고 인부까지 고용하던 부농에 대한 규제책이 잇따랐다. 결정타는 ★1928년 1월5일 단행된 토지 환수. 토지 국유화를 재확인한 이 조치는 부농의 몰락과 농업의 집단화를 가져왔다. 2만여 개의 콜호즈(집단농장)가 들어섰다. 농업의 사회주의화다. 러시아 혁명사는 1928년을 대전환의 시기로 규정한다. 같은 해 1차 5개년계획에 착수한 소련 경제는 1941년까지 연평균 14∼20%에 달하는 성장가도를 내달렸다. 세계가 대공황에 허우적거리던 무렵이다. 소련은 세계 2위의 경제권으로 떠올랐다. 국부의 30%를 잃은 2차대전의 피해도 1956년 복구를 마쳤다. 승승장구하던 소련의 계획경제는 70년대 초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중화학공업과 경공업,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간 불균형이 발목을 잡았다. 지나친 통제와 의사결정의 중앙집중, 생산동기 유발 실패는 소련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콜호즈와 소프호즈(국영농장)도 1991년 옐친의 사유화 조치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신경제가 지속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부자 되세요’란 슬로건을 내걸고 부농 용인정책을 주장했던 부하린 등이 숙청 당하지 않았다면 소련은 균형성장을 이루고 부자나라가 됐을까. (서울경제신문[오늘의 경제소사/1월4일] 2005-01-03/권홍우 경제부차장)
1925 조선체육회, 제1회 전국빙상대회 개최
빙상 경기를 주관하는 대한체육회 가맹 경기단체다. 빙상 경기는 스피드(Speed), 쇼트트랙(Short Track), 피겨(Figure)스케이팅의 세 종목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스케이트가 소개된 것은 1894년 겨울 경복궁 향원정 연못에서 고종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외국인 선교사들이 벌인 피겨스케이팅 시연회였다. 1908년 2월 평양 대동강에서 일본인들이 연 빙상운동회는 최초의 빙상경기대회였다. 1923년 1월 동아일보사 평양지국이 주최한 대동강빙상대회, 1925년 1월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 등이 차례로 열렸고 서울과 평양에 구락부(俱樂部)가 생기는 등 일제강점기에 빙상 종목은 급속히 퍼져나갔다.
1945년 11월 24일 조선빙상경기연맹이 출범했고 이후 조선빙속협회와 조선피겨협회로 분리되었다가 1947년 다시 합치면서 국제빙상경기연맹(ISU)에 가입했다.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동계올림픽은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첫 올림픽 대회였다. 첫 출전한 세계빙상선수권대회는 그해 2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제42회 대회다.
1971년 2월 태릉 국제스케이트장이 문을 연 뒤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되면서 국제무대 상위권에 오르기 시작했다. 1972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여자 1000m 스피드스케이트에서 전선옥이 금메달을 땄고, 1976년 제3회 세계남녀주니어빙상선수권대회에서 이영하는 빙상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1990년 2월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 배기태는 종합우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은 1992년 제16회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는데 김기훈은 1000m에서 한국의 동계올림픽 첫 금메달을 차지했다. 피겨에서는 김연아가 2010년 제21회 밴쿠버 동계올림픽 여자 싱글 부문에서 한국인 첫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연맹의 주요 사업은 ①경기의 기본방침 심의 및 결정 ②국제경기대회와 국제회의 개최 및 참가 ③회원단체의 지원 및 육성 ④국내경기대회 개최 및 주관 ⑤경기기술의 연구 및 향상 ⑥경기시설 및 장비에 대한 연구 및 검사와 공인 등이다. 연맹의 조직은 2011년 신임 김재열 회장 아래에 이사회, 대의원총회(13개 시도연맹과 4개 연맹체 장으로 구성), 6개 분과위원회(경기∙심판 겸 선수, 상벌, 기금운영, 공인심의, 생활체육, 경기용품심의)로 이뤄진다.
1924 의열단원 김지섭 의사 일본 궁성에 폭탄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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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사서삼경에 능통했던 천재, 대나무처럼 곧은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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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교원 임명장(1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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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섭 통감부 재판소 통역생 임명장(1909). 통감부에서 김지섭을 금산구 재판소로 발령한다는 임명장. |
![]() 김지섭 의열단 특파원 신임장(1923). 김지섭을 의열단 기밀부에서 특파원으로 선임한다는 신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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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김지섭 선생 투탄 의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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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건국공로훈장증(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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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상해임시정부 노백린[盧伯麟, 1875.1.10-1926.1.22] 국무총리 선출
*[노백린]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본관 풍천(豊川). 호 계원(桂園). 황해도 은율(殷栗)에서 출생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을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육군 정령(正領)에 임명되어 한국무관학교의 교육국장·교장을 역임하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에서 활약하다가 군대가 해산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광산(鑛山)·피혁상(皮革商) 등을 경영하였다. 191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朴容萬) 등과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군사훈련에 힘썼고,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軍務總長)을 맡았다. 192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 양성에 진력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항일운동에 종사한 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네이버백과 100.naver.com)
1921 스위스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renmatt, 1921.1.5- 1990.12.14]출생,
*목사의 집안 출생. 저널리스트를 거쳐 작가로 전향하였다. 부조리 연극으로부터 출발하여, 전통적 비극을 부정, 오늘날 가능한 것은 희극뿐이라는 인식에 입각하여, 관객의 충격이나 부정적 반응에는 개의하지 않고, 괴상한 과장(誇張), 통렬한 풍자, 적나라한 진실을 폭로, 비뚤어진 사회와 정신을 역설적으로 제시하였다. 《로물루스 대제》(1952) 《미시시피씨의 결혼》(1952) 《천사 바빌론에 오다》(1953)를 거쳐, 《노부인의 방문 Der Besuch der a1ten Dame》(1956)으로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고 《연극의 제문제》(1955)로 독자적인 연극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물리학자들 Die Physiker》(1962)에서는 과학자들의 정치적 책임의 문제를 신랄한 희극으로 묘사하는 데 성공하고 실러 기념강연에서는 B.브레히트의 비판과 극복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1916 시인 정호승(鄭昊昇1916.1.5일.∼?) 출생
<시인 정호승의 문학> 정호승 시인은 남북분단의 비극적 치열한 사상적 분쟁 속에서 좌익운동을 하다가 월북하여 그 인간은 물론 그의 詩文學 마저 철저하게 매몰되었던 문인 중의 한 시인이다. 농민문학적 성향이 있는 정호승은 농촌활동에 취향을 가져 양축養畜이나 과수원 등을 경영한 바 있다. 농민소설가 이무영의 귀농 농장이 있는 군포에 가서 견학한 바 있으며, 그는 이상농가건설理想農家建設의 꿈을 갖고 경기도 양수리에 가서 농업을 경영하겠다는 의욕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이상주의가 공산주의와 맞물려 좌경하지 않았나 하는 견해도 있다. 정호승의 시에는 다분히 영농하는 농촌의 냄새가 짙게 묻어 나오고 있다. 그의 시를 농촌배경으로 작품화한 당시상황(일제 또는 남북분단과 사상적 대립)으로 헤아려 볼 때 ①,[신생의 봄을 빌려, 농촌수탈을 강조하였다고 보는 작품]: <春詠>, <나물캐는 처자>, <소의 통곡> 등, ②, [봄의 계절을 빌려, 농촌수탈, 고향의 황폐화, 사상적 목적을 찾아 북으로 떠나 방황한 이들의 애환을 그렸다고 보는 작품]: <봄의 서울밤>, <방아찧는 처녀>, <제비>, <헛가마> 등이 그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일제탄압→사상분열→남북분단(민족분열)→월북→가족이산→가족에 대한 사상적 연루죄, 이러한 과정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며 우리 모두의 애환이었다. 그 아픔을 정호승의 장남 정태준(시인, 작곡가)의 시집 <몽산포로 가는 길>의 서문에 일부이나마 그려놓고 있다. 누가 "예술은 길며 인생은 짧다"고 하였는가? 정호승 시인은 고통의 역사 속에 그는 없어지고 <모밀꽃>만이 영원히 살아 가족들의 품에, 시를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 돌아온 것이다.
1912 아동문학가 이원수 태어남(양1912년 1월 5일)
1907 - 한국의 수필가 김소운 출생
김소운(金素雲, 1907년 1월 5일 ~ 1981년 11월 2일)은 한국의 시인이며 수필가이다. 본명은 김교중(金敎重)이고, 호는 삼오당(三誤堂)이다.
생애
부산 출신으로 13세에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인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일본어: 北原白秋) 문하에서 시를 공부한 뒤 일본 시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한국의 민요와 동요, 시를 일본에 번역 소개했고, 수필도 활발히 창작했다.
작품으로는 서간체 장편 수필로 일본에서도 반향을 일으킨 《목근통신》(1952), 수필집 《삼오당잡필》(1955) 등이 있고,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한 부부 세 쌍의 일화를 소개한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이 잘 알려져 있다.
일본 체류 중 제1공화국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에 의해 입국이 거부되어 1965년에야 영구 귀국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해 발표한 예비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까지 발견된 친일 저작물 수는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야마모토 원수의 국장일〉 등 3편이다.
김소운의 친일 혐의에 대해서는, 친일 작품 발표 시기가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일제 강점기 말기에 몰려있고 편수도 적은 점, 평생에 걸친 주요 관심사가 한국 문학의 번역 소개였고 일본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데 일조한 공으로 1980년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는 점, 보통학교 재학 중 밀항으로 도일한 김소운에게는 일본이 문학적인 고향이었다는 점 등 여러 요소로 인해 유가족의 부당하다는 항변이 있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
부인 김한림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전신인 구가협 창설을 주도했고, 딸 김윤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한 농민운동가이다. /위키백과
1902 프랑스[르몽드 Le Monde]지 창간자 위베르 뵈브메리(1902.1.5-1989)출생,
*[르몽드 Le Monde] -프랑스어로 ‘세계’라는 뜻으로 스위스의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및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더불어 유럽 대륙의 대표적인 신문으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파리가 나치스 점령에서 해방된 1944년 12월 18일 드골이 이끄는 새 정부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에 대한 필요한 의견을 수렴하는 수단으로 창간되었다. 타블로이드판(版)으로 사진이나 만화를 싣지 않았으며, 첫 편집주간은 《르 탕 Le Temps》지의 편집장 위베르 뵈브메리였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논설 방침의 자주성 확보를 위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창간된 지 5년이 채 안 되어 15만 부 이상의 발행부수를 확보했다. 국제문제에서는 프랑스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기자들은 자유롭고 소신있는 견해를 피력하며 일관된 이념적 색채는 띠지 않는다. 외국 관계의 기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세계 각국에 40여 명의 특파원이 주재한다. 일간 《르 몽드》의 기사를 발췌한 주간 《르 몽드》와 월간 《디플로마티크》를 발행하고 있는 외에 영국의 《가디언》지와 제휴하여, 《가디언 위클리》에 《르 몽드》의 발췌문을 영역하여 싣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1896 - 전국에서 민비 시해와 단발령에 저항하는 의병 봉기 (乙未義兵)
[오늘의 역사]조선말기 의병 봉기
지난 1896(조선 고종 33)년 오늘 전국에서 민비 시해와 단발령에 저항하는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청일전쟁 후 명성황후 민비 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시행에 분격한 유생들이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들은 갑오경장의 새로운 법령을 시행하는 관찰사·군수 혹은 경무관·순검 등을 친일파로 지목해 처단하거나 문책했고, 관군 및 일본군과 항전했다.
을미의병은 비록 ‘근왕창의’라는 왕조 중심 ‘위정척사론적’인 사상적 한계성을 탈피하지는 못했으나, 청일전쟁 중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본에 대항해 싸운 동학농민운동에 뒤이어 임진왜란 이래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의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9.01.04 20:00
1895 독일물리학자 뢴트겐[Wilhelm Konrad Rntgen,1845.3.27-1923.2.10],X-선발견 발표
*[뢴트겐과 X-선 발견/임경순] -20세기 과학에 대한 시대 구분을 할 때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은 1895년을 그 기점으로 잡는다. 1895년은 독일의 과학자 뢴트겐이 X-선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을 발견한 해였다. 뢴트겐이 이 새로운 광선을 발견한 뒤에 이에 자극되어 그 이듬해 프랑스의 베크렐은 우라늄에서 최초로 방사선을 발견했으며, 1897년에는 영국의 J. J. 톰슨이 음극선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는 데 성공해서 1899년경에는 음극선의 입자성이 강력하게 부각되게 된다. 톰슨에 의한 음극선의 입자성 발견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상대성이론이 출현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X-선의 본성에 대한 논쟁에서 파동-입자 이중성이라는 빛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게 된다. 빛에 대한 이중성 개념은 물질파 개념과 함께 양자역학이 성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방사선의 발견은 핵변환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핵분열이 발견되어 우리는 핵에너지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결국 20세기 과학은 X-선의 발견을 계기로 해서 그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음극선 실험과 X-선] -1850년대부터 독일과 영국의 과학자들은 전기 방전관에서 나오는 음극선을 이용해서 다양한 실험을 해나가고 있었다. 초기 이들의 실험은 주로 음극선 자체의 성질에 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음극선의 성질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과학자들은 음극선을 다양한 물체에 충돌시켜 여기서 나타나는 모습을 분석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X-선의 발견은 바로 이런 실험 과정에서 얻어졌던 것이다. 1892년 본 대학의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 18571894)는 음극선이 얇은 금박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새로운 현상을 발견한 헤르츠는 그의 제자인 레나르트(Philipp Lenard, 18621947)에게 이 실험을 계속해 볼 것을 권유했다. 레나르트는 음극선 관의 한쪽 끝에 얇은 알루미늄 판('레나르트 창문')을 대어서 여기에 음극선을 쏜 다음 이 금속 창문을 통과해서 나오는 광선의 성질을 여러 기체들 속에서 면밀하게 점검했다. 이 실험에서 레나르트는 음극선에 관한 여러가지 중요한 성질들을 관찰했다. 만약 레나르트가 여기서 금속판을 투과해서 나오는 음극선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반대편에도 감광판을 대었더라면 레나르트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X-선 발견의 영광은 레나르트가 아니라 레나르트가 이런 실험을 하는 방법을 알려준 뢴트겐에게 돌아가 버린 것이다. 뢴트겐(Wilhlem Conrad Rntgen, 1845 1923)은 독일의 레네프에서 독일인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 그는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865년 입학시험을 통해서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ETH)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1869년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한 그는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물리학자인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Kundt, 18391894)의 조교가 되어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 뒤 쿤트를 따라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1874년 교수자격과정(Habilita- tion)을 이수하고, 그 이듬해 뷔템베르크의 작은 학교에서 잠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을 거쳐 1879년 기센대학 교수가 되었다. 기센대학에서 10여년간 교수로 재직한 그는 1888년 마침내 프리드리히 콜라우시(Friedrich Kohlrausch)의 후임으로 그가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정착하게 되었다. 50세가 넘은 1895년초까지 뢴트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48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발표한 논문 하나로 그는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1894년 5월 5일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서 음극선을 금속 박판에 쏘기 위한 실험장치에 관한 문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때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 '레나르트 창문'에 사용되는 금속 박편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레나르트의 도움을 받아 뢴트겐은 레나르트가 했던 실험을 반복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을 하던 중 뢴트겐은 대학의 학장으로 뽑혀서 당분간 자신의 음극선 실험을 할 수가 없었다. 1895년 10월 말 임기를 마친 뢴트겐은 1년 전에 자신이 한 실험을 다시 한번 반복해 보았다. 1895년 11월 8일 저녁 뢴트겐은 놀라운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후일 신문기자와 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날 나는 검은 종이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히토르프-크룩스 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백금시안화바륨 종이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고 나자, 종이 위에는 이상한 검은 선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빛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전기 아크등에서 나오는 빛조차도 이렇게 뒤덮인 종이는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관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인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 때 히토르프-크룩스 관에서는 륌코르프 고전압 발생장치에 의해서 음극선이 유리관의 금속벽에 빠른 속도로 충돌해서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이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서 백금시안화바륨을 감광시켰던 것이었다. 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해나갔다. 12월 22일 그는 자신의 처를 실험실로 불러서 그녀의 손을 X-선으로 찍어보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12월 28일 뢴트겐은 그간의 실험을 정리해서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 학회지에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관해서'라는 논문을 접수시켰다. 이 짧은 논문은 곧 인쇄되어 1896년 신년에 이미 뢴트겐은 논문의 별쇄본을 X-선 사진과 함께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1월 4일에는 독일 물리학회 50주년 기념 학회가 있었는데, 뢴트겐의 발견은 이때 전 독일 과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의학자들은 X-선의 의학적 중요성을 발 빠르게 알아차리고 뢴트겐에게 강연을 요청했다. 학계뿐만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언론들도 이 놀라운 발견을 대서특필해서 뢴트겐은 일약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1월 9일에는 카이저 빌헬름 2세로부터 이 새로운 발견을 치하하는 축전이 날아왔다: "본인은 우리의 조국 독일에 인류를 위한 커다란 축복이 될 새로운 과학의 승리를 안겨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는 1896년 1월 20일 인간의 뼈가 찍힌 뢴트겐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회람시켰는데,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인 그해 2월 24일에 베크렐은 아카데미에서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 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발표하게 된다. X-선 발견은 영국 과학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J. J. 톰슨은 X-선 발견의 소식을 듣고 이에 관련된 실험을 하다가 X-선 이온화 현상을 발견했다. 그 뒤 톰슨은 음극선의 본성에 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음전하를 띤 미립자, 즉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X-선의 발견은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뢴트겐은 발견 당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의 물리학 분야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당시에 뢴트겐이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모든 과학자들에게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X선은 뢴트겐 이전에 여러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었을 것이다. 18세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정전기 발생 장치에서 나오는 스파크에서도 이미 X-선이 발생했었을 것이고, 1879년 크룩스 자신도 음극선 주변에서 사진 건판이 흐려지는 것을 불평하곤 했었다. 더구나 레나르트를 비롯한 몇몇 독일 물리학자들은 크룩스 관 주변에서 발생하는 발광현상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음극선의 성질을 연구하는 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는 바람에 발견의 기회를 놓쳤다. 특히 레나르트의 창문 실험은 X-선 발견에 가장 근접했던 실험이었으며, 실제로 레나르트는 뢴트겐이 히르토프-크룩스 관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레나르트는 자신이 이 중대한 발견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으며, 특히 뢴트겐이 X-선 발견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도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X-선의 본성에 대한 초창기의 해석] -뢴트겐이 새로운 종류의 광선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한 뒤 많은 과학자들은 투과력이 강한 이 광선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렸다. 즉 뢴트겐의 발견 직후 과학자들은 이 새로운 광선에 대해서 입자, 에테르 내의 와동, 높은 주파수를 지닌 음파 혹은 중력파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했다. 하지만 뢴트겐이 발견한 새로운 광선의 본성에 대한 논의는 곧 전자기파로서 통상의 빛, 종파, 충격파 등 3가지 유형의 해석으로 좁혀졌다. 우선 초창기 유행하던 X-선 본성에 대한 해석으로는 1900년까지 주로 독일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선호되던 해석으로 X-선을 매우 높은 진동수를 지닌 통상의 빛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뢴트겐이 발견한 새로운 광선은 빛과 같이 직진을 하며, 자기장이나 전기장에 의해 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뢴트겐 자신과 루트비히 볼츠만 등은 X-선을 19세기를 통해서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왔던 에테르의 압축에 의해서 생기는 종파(longitudinal wave)로 해석했다. 당시에 빛은 압축가능한 매질에서 전파되는 소리와는 달리 횡파(transverse wave)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만약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압축이 불가능한 완전탄성체라는 극히 이상적인 매질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그런데 만약 에테르가 조금이라도 압축이 가능하다면 소리와 같이 빛의 종파 성분이 존재할 수 있고, 바로 이것이 뢴트겐이 발견한 X-선이라는 것이다. 비헤르트(Emil Wiechert, 18611928), 스톡스(George Gabriel Stokes, 18191903), J.J. 톰슨 등은 X-선을 에테르 내에서 순간적으로 불연속적으로 전파되는 충격파(impulse)로 이해했다. 우선 독일의 비헤르트는 1896년 5월 X-선이 불규칙적인 빛의 충격파라고 제안했다. 뢴트겐이 제안한 압축파의 가설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영국의 스톡스는 1896년 11월 X-선이 기본적으로는 아주 높은 주파수를 지닌 횡파로서 개별 음극선이 아주 빠르게 충돌함으로써 생기는 일종의 충격파라고 주장했다. 맥스웰 전자기학의 대가인 J.J. 톰슨은 이 스톡스의 가설에 대한 자세한 계산을 했다. 톰슨도 처음에는 종파 가설에 대해 고려했지만, 스톡스 가설에 대한 엄밀한 점검을 하는 과정에서 1897년 12월부터 스톡스 가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국의 켈빈 경은 처음에는 X-선이 물질에 잘 흡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X-선을 아주 높은 주파수를 지닌 종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899년에 이르면 켈빈도 암묵적으로나마 X-선이 충격파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미 1899년에도 X-선이 회절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다. 1899년 2월 네덜란드의 윈드(C.H. Wind)와 하가(H. Haga)는 격자에 의해서 X-선이 회절되는 사진을 찍었다. 당시 괴팅겐 대학의 사강사였던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는 이 회절 사진에 대해서 충격파 가설에 입각해서 X-선 펄스의 간격을 계산하기도 했다. 이어 1904년 영국의 바클러(Charles G. Barkla, 18771944)는 X-선이 편광이 된다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X-선의 본성에 대한 충격파 가설을 지지하는 간접적인 증가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1905년까지 충격파 가설은 X-선의 본성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견해가 되게 된다. [레나르트의 방아쇠 가설과 그 문제점] -1905년경부터 충격파 가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이 해석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X-선의 이온화 성질에 관한 이해가 진전되면서 X-선에 대한 충격파 해석에 문제가 있음이 서서히 제기되었다. 우선 X-선이 모든 기체 원자들을 이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극히 통과하는 원자들의 극히 일부만을 이온화시킨다는 것이 설명되어야만 했다. 또한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크다고 하는 특이한 성질도 설명되어야만 했다. 1902년 레나르트는 광전효과에 관한 실험을 하던 중 자외선에 의해서 방출되는 전자의 속도가 빛의 강도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이런 광전효과 현상을 원자 속의 전자는 이미 원자 속에서 퍼텐셜 에너지에 해당하는 속도를 얻고, 빛은 단지 전자를 방출시키는 방아쇠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방아쇠 가설(triggering hypothesis)를 제기했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큰 이유도 이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던 것이다. 한편 방아쇠 가설이 옹호하고 있는 X-선에 대한 충격파 해석 이외에 이와는 전혀 다른 입자론적 해석도 등장했다. 1907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던 윌리엄 H. 브래그(William Henry Bragg, 18621942)는 X-선이 강한 투과력을 갖는 것은 X-선이 펄스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X-선이 두 하전입자가 같은 평면에서 회전하는 중성쌍(neutral pair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야만 보다 잘 설명된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파동론적 견해와는 다른 입자론적 해석을 제기했다. 브래그는 훗날 결정 격자에 의해 X-회절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해서 결과적으로 X-선이 파동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적어도 1907년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X-선이 입자로 되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과학자였다. 그리하여 1908년을 통해서 기존의 펄스 가설을 옹호하던 바클러와 입자론적인 중성쌍 가설을 새로이 제기한 브래그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광양자 가설의 등장] -한편 1905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광양자 가설에 입각해서 광전효과를 설명한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X-선에 대한 다양한 양자론적인 해석들이 나타났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광양자라는 국소적으로 독립된 에너지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레나르트가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던 광전 효과 설명을 이 새로운 광양자 가설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양자 가설에 의하면 빛에 의해 튀어나오는 광전자의 최대 속도는 빛의 세기와 무관하고, 빛의 진동수만이 전자가 받는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이 광양자 가설은 당시의 과학자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과학자들에 의해서 널리 수용되고 있었던 빛의 파동설은 빛과 관련된 아주 많은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광전 효과는 잘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빛의 간섭 현상을 비롯한 몇몇 현상들을 당시 과학자들에게 납득이 갈 정도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양자론적 해석은 독일의 과학자 사회에서 서서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41928)과 요하네스 슈타르크(Johannes Stark, 18741957) 등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X-선의 성질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양자론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등 자신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광양자 가설을 전개해나갔다. 1905년 양극선에서 나오는 양이온선(canal ray)의 도플러 효과를 발견한 슈타르크는 이 양이온선에서 관찰된 현상과 연관하여 광양자 가설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X-선의 성질을 광양자 가설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테르 파동설'과 광양자 가설을 동시에 적용해 본 슈타르크는 전통적인 연속체 물리학의 무비판적인 적용을 반대했으며, 광양자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이유를 독일의 과학자들의 구미에 맞게 제시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에서 빛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이 서서히 수용되면서 레나르트에 의해 제기된 방아쇠 가설은 점차로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X-선 회절 실험: 라우에 반점과 브래그 부자의 실험] -광양자 가설이 등장하고 X-선에 대한 입자론적 가설이 대두되었지만 1911년까지도 X-선이 전자기파인가 아니면 입자인가 하는 것은 좀처럼 분명한 형태로 결판이 나지는 않았다. 한편 X-선 발견으로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뢴트겐은 1900년 뷔르츠부르크를 떠나 뮌헨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 소장 겸 물리학 교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뢴트겐은 이 뮌헨에서 대학의 엄청난 지원 속에서 거대한 연구 시설을 갖춘 연구소를 꾸려나갔다. 이 거대한 연구소 옆에는 이보다는 규모가 작은 이론 물리학 연구소가 하나 있었는데, 1906년 좀머펠트는 뢴트겐의 추천으로 이곳의 교수로 오게 되었다. 결정격자에 의한 X-선 회절 실험에 성공해서 X-선이 파동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밝힌 곳은 X-선을 발견한 뢴트겐이 꾸민 거대한 연구소가 아니라, 바로 이 거대한 연구소 옆에 있었던 좀머펠트의 작은 이론 물리연구소였다. 좀머펠트 역시 X-선의 본성에 대해 연구한 학자였는데, 그는 특히 우수한 학생들을 발굴, 교육, 육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좀머펠트 연구실에는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라는 사강사가 있었다. 그는 베를린 대학의 막스 플랑크 밑에서 상대성 이론과 광학에 대한 연구를 한 뒤 1909년부터 이곳에서 사강사 생활을 하면서 격자에서 나타나던 회절에 관한 것을 연구하던 이론 물리학자였다. 또한 좀머펠트의 연구소 내에는 이론 물리학 분야 이외에 작은 실험 분과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조교로 일하던 사람이 바로 발터 프리드리히(Walther Friedrich, 18831968)였다. 라우에의 X-선 회절 실험을 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인물은 에발트(Peter Paul Ewald, 18881985)였다. 1912년 그는 좀머펠트 연구소에서 결정 속의 입자들의 규칙적인 공간 배열을 기본 가정으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막스 폰 라우에는 바로 이 에발트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X-선을 결정 격자에 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결정적인 착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는 만약 X-선이 아주 짧은 파동이라면 아주 규칙적인 원자 배열로 이루어진 결정 격자를 통해서 나오는 밝고 어두운 회절 무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막스 폰 라우에의 이 같은 생각에 대해서 정작 뢴트겐과 좀머펠트와 같은 뮌헨 대학의 물리학 교수들은 강한 의문을 내비치며 회의를 표명했다. 막스 폰 라우에는 자신의 이 생각을 실험실에 있던 발터 프리드리히에게 개진해보았지만, 좀머펠트의 반대에 눌려 프리드리히도 회의를 표명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막스 폰 라우에는 파울 크니핑(Paul Knipping, 18831935)이라는 젊은 박사과정 학생에게 이 실험을 감행해보자고 설득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12년 4월 21일 막스 폰 라우에, 발터 프리드리히, 파울 크니핑은 X-선 회절 실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황산구리 결정격자에 X-선을 쏘는 실험을 통해서 좀머펠트 연구소의 젊은 과학자들은 X-선이 결정 격자를 통과할 때 회절과 간섭을 일으켜 사진 건판에 소위 라우에 반점이라는 여러 반점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으로 그들은 X-선이 아주 짧은 파장을 지닌 전자기파라는 것을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격자의 존재를 실험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5월 4일 프리드리히, 크니핑, 막스 폰 라우에는 자신들의
1876 - 서독 초대 총리 아데나워(Adenauer, Konrad) 출생
아데나워 [Adenauer, Konrad, 1876.1.5~1967.4.19]
[역사 속의 인물] 가장 위대한 독일인, 아데나워
독일 국민들이 가장 위대한 독일인으로 꼽는 인물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도, 대문호 괴테도 아니다. 다소 의외지만 2차대전 후 첫 서독 총리를 지낸 콘라드 아데나워(1876~1967)다. 패전으로 잿더미였던 독일을 세계무대에 진출시키고 경제 부흥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빌리 브란트(동방외교) 혹은 헬무트 콜(독일 통일) 전 총리를 높게 보는 것은 진보`보수 논리에 맞춘 잣대일 뿐, 독일에서는 이들을 아데나워의 아류로 부른다.
멋없는 학자풍의 관료였다.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는 "할리우드에서 그를 고용했으면 기껏해야 회계주임일 것"이라 비아냥거렸지만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었다. 고지식한 사명감과 엄격함으로 국정을 운영,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닦았다. 1876년 오늘, 쾰른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전체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했다. 쾰른 시장을 지내다 히틀러 시절 12년간 박해를 받았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서방세계의 철의 장막'으로 불릴 정도로 비타협적이었다. 1949년 73세의 나이로 총리에 취임, 14년 후인 1963년 물러났다.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매우 복잡한 사람이 되는 순간, 당신은 비효율적이 된다."
박병선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0년 01월 05일
1855년] 미국의 발명가 질렛 출생 ← 안전성을 강조한 질레트 면도기의 초기 광고
1855. 1. 5 미국 위스콘신 폰덩랙~1932. 7. 9 로스앤젤레스.
최초로 안전면도기와 면도날을 만들었다. 면도를 하다가 얼굴을 베고 나서 직선자 같이 생긴 반영구적인 면도날을 숫돌에 갈던 질렛에게 T자형 손잡이로 고정시킨 평평한 두 판 사이에 양날 면도날을 끼워넣는 묘안이 떠올랐다. 날을 갈기 힘들다는 이유에서 이 착상은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 착상에 따라 만든 제품은 처음부터 성공을 거두었다. 1903년 첫해에는 51개의 면도기와 168개의 면도날을 판매했으며, 1904년말까지 질렛은 9만 개의 면도기와 1,240만 개의 면도날을 생산했다. 이후 질렛은 몇 권의 책과 그외의 저술을 통해 공상적 사회주의 견해를 발표하는 데 전력했다. 그는 경쟁이 낭비라고 생각하고, 경제적인 노력이 기술자들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조직화될 수 있는 계획된 사회를 구상했다. 1910년 그는 대통령을 지낸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애리조나 지역에서 시험적인 '세계기업'의 회장으로 일해 달라고 100만 달러를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1년까지 자기 회사의 사장으로 있었지만, 1913년부터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브리태니커
1809 프랑스의 점자 고안자 교육자 루이스 브라유[Louis Braille, 1809.1.5∼]출생,
[점자 點字] -시각장애자가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을 수 있도록 1829년 프랑스의 맹인 L.브라유가 고안한 한 특수한 부호글자로 지면에 볼록 튀어나오게 점을 찍어 손가락 끝의 촉각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든 데서 점자라고 하며, 점선으로 일반문자 모양을 그리지 않고 독자적인 문자체계를 지니고 있다. 즉 [??]처럼 배열된 크고 작은 6개의 점을 가지가지로 모아 맞추어 문자 및 부호를 나타내게 한 것인데, 현재 세계 각국의 표음문자를 쓰는 나라는 이것을 그 나라 문자에 맞추어 사용하고 있다. 1829년 프랑스의 맹인 ★L.브라유가 고안한 것이어서 서양에서는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브라유라고 한다. 그러나 점자에는 이와 같은 브라유식 6점점자 외에 또 4점으로 된 ‘뉴욕 포인트(New York Point)’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1870년경 미국인 W.B.웨이트가 고안한 것으로 한때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그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으며 6점점자만이 세계 각국에서 통용되고 있다. 한국에는 브라유의 6점식 점자보다 뉴욕 포인트가 먼저 들어오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1880년대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오면서 평양에 의료선교사로 왔던 미국인 여선교사 R.홀이 평양에서 맹인 여성들을 모아 교육을 시킬 때 뉴욕 포인트식 점자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맹인교육의 전문가가 아닌 홀이 브라유식 점자를 알지 못한 탓에 우연히 고교시절에 맹인 친구로부터 배운 뉴욕 포인트를 한글 자모에 맞추어 놓은 것이 뉴욕 포인트 한글점자이다. 1894년에 이 점자로 신·구약성서가 출판되었으나 1926년 브라유식 점자법에 의한 6점점자 성서가 출판됨에 따라 뉴욕 포인트는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한때는 뉴욕 포인트를 ‘구점자’ 또는 ‘평양점자’라 하였고 6점점자를 ‘신점자’라 일컫던 때도 있었다. 현행 한글점자는 1926년 11월 당시 재생원 맹아부(현 서울맹학교) 교사 박두성(朴斗星)이 창안한 것으로 한글 풀어쓰기 원칙을 응용해서 받침도 글자 아래 쓰지 않고 가로쓰기를 한 것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점자는 ‘점자판(점자기라고도 한다)’이라는 도구로 점칸에 송곳처럼 생긴 점필(點筆)을 이용하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며, 읽을 때는 뒤집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간다. (출처: 두산백과)
*[맹교육 盲敎育] -맹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으로 순수한 의학적 입장에서 말하는 맹인이란 시력이 전혀 없는 전맹(全盲)을 뜻하지만, 맹교육은 시력이 다소 있어도 보통교육을 받을 수 없는 사람까지 대상으로 포함한다. 맹교육이 갖는 특색 중의 하나는 점자(點字)를 통한 교육이다. 점자는 1829년 프랑스의 맹인교사 L.브라유가 고안한 것으로, 맹아(盲兒)는 보통의 문자를 보거나 쓸 수 없기 때문에 촉각을 이용하여 읽고 쓰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맹아에게는 촉각을 통한 교육이 매우 중요하므로 가급적 실물이나 모형을 자주 만지게 하여 촉각을 통한 관찰을 시켜야 한다. 또한 언어는 맹아의 지식 습득을 위한 중요한 창구가 되기 때문에 청각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교사의 말에 의한 지도를 비롯하여 갖가지 청각기기의 이용이 중요하며, 라디오 ·테이프레코더 등도 많이 이용된다. 맹인은 보행능력에 제한이 있고 행동범위도 좁으므로 많은 경험을 통해 지식이나 개념을 풍부하게 갖도록 해야 한다. 맹인용의 학습용구로는 점자를 쓰기 위한 점자판과 점자 타이프라이터를 비롯하여 점도(點圖)나 선도(線圖)를 그리기 위한 용구와 맹인용 자 ·컴퍼스 ·각도기 ·그래프판 등이 있다. 그 밖에 계산을 위한 맹인용 수판과 계산기, 촉각으로 알게 되어 있는 맹인용 지도, 입체도식지도, 점도지구의, 부조(浮彫)지구의, 맹인용 저울 ·온도계 등도 있다. 맹인교육의 목적과 내용은 대체로 일반학교에 준하는데 따로 맹인을 위한 감각훈련이나 보행훈련, 점자의 초보지도 등을 실시하며, 고등부에서는 보통과 이외에 직업훈련과(침 ·안마 ·마사지) ·음악과 ·피아노 조율과 등을 두어 직업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맹인교육에서 부각되고 있는 과제 중의 하나는 맹인교육을 일반학교에서 실시하자는 견해이다. 이는 맹인이 장차 사회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일반 정상인과 일찍부터 교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며, 특수학교에서의 교육으로 폐쇄적인 인간을 만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의 교육이 더 효과적인지는 앞으로의 연구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출처:네이버백과 100.naver.com)
1637 병자호란중 김준룡 청군 격파
조선 중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청나라 군대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쟁.
1627년(인조 5) 후금(後金)[뒤의 청나라]의 1차 침입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고친 후금은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조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무리한 세폐와 정병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1636년(인조 14) 12월 9일,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왔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하여 평양을 거쳐 개성에 이르렀다. 인조는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하려 하였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기자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성안의 군사 1만 3,000명으로 성첩을 지키도록 하고, 각도에 알려 근왕병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는 각도 감사와 병사들에게 근왕병을 모집하여 구원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은 각 고을 수령들에게 명하여 근왕병을 모집한 다음, 1636년(인조 14) 12월 29일에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과 함께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 벽암(碧巖) 각성(覺性)도 각각 1천여 명씩의 승군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을 이끌고 근왕 대열에 합세함으로써 전라도 근왕병의 수효는 8천여 명에 달했다.
이시방과 김준룡은 1637년 1월 1일 직산에 도착하여 남한산성에 장계를 띄우고 곧바로 지금의 용인 양지 방면으로 향했다. 1월 2일에 양지에 도착한 이시방은 김준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병력 2천 명을 이끌고 먼저 남한산성으로 진군하게 한 다음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1월 4일, 병사 김준룡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 남쪽 1백 리 지점인 용인의 광교산(光敎山) 방면으로 진출했다. 광교산 7부 능선에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과 화약 등 군수 물자를 진영 중앙에 비축하여 장기 항전 태세를 갖춘 다음 군관을 시켜 남한산성으로 장계를 올렸다.
한편 1월 2일에 험천현(險川峴)에서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한 청나라 장수 양굴리[揚古利]는 광교산 동쪽에 군사를 배치하여 광교산과 남한산성을 차단하는 한편 광교산 일대를 둘러싸고 총공격을 해 왔다. 1월 5일에는 온종일 전투가 벌어졌고 여러 차례 근왕병 진영을 공격하였다.
전라도 근왕병은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진(方陣)을 펼쳐서 맞섰다. 진영의 주변에 목책을 구축하고 제1선에 포수, 2선과 3선에 궁병과 창검병을 배치하였다. 그런 다음 청군이 공격해 오면 총포로 집중 사격하여 타격을 입히고, 퇴각하면 궁병과 창검병이 그 배후를 쳐 큰 전과를 올렸다. 김준룡 부대는 방마다 횃불을 들고 공포를 쏴 그들이 광교산에 진출해 있다는 것을 남한산성에 알렸다. 이곳에서의 전투가 여의치 않게 되자 양굴리는 1월 6일 전군을 광교산 공격에 투입하여 조선군 진영을 압박했으나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청군의 일부가 동남쪽 방어 진지를 뚫어 조선군 진영 안으로 들어오자 혼전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양굴리가 사살되었다.
장수가 사살되자 청군은 순식간에 전열이 와해되었고, 조선군은 이 틈을 타서 일제히 반격하여 대파시켰다. 청군은 이 전투로 병력의 태반을 상실하고 광교산 동쪽 10리 밖으로 패주하였다. 이에 김준룡 부대의 참모들은 청군이 대규모로 복수전을 해 올 것이니 광교산 주변 계곡 일대에 복병을 두고 항전하자 하였으나 김준룡이 그 병력을 수원 방면으로 퇴각시키니 병사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 양지에 머물면서 청군을 공격하려고 준비중이던 전라감사 이시방은 김준룡 부대가 퇴각하는 것을 패주로 잘못 판단하고 1월 7일에 부대를 공주 방면으로 퇴각시켰다. 이로써 김준룡 부대는 감사가 지휘하는 본대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끝내 남한산성의 위기를 타개한다는 근왕병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전라병사 김준룡이 이끄는 근왕병의 광교산 승첩은 병자호란 발발 이래 조선군 측이 거둔 승리로는 최초이자 최대의 것이었다. 이것은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1월 28일에 김화 백동에서 거둔 승리와 함께 병자호란의 2대 승첩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양굴리는 청 태종의 매부로서 아끼는 명장수였다. 따라서 양굴리가 죽고 패전한 것은 청나라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한 때 이 승전 소식은 남한산성으로 전해져 인심을 안정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1589 - 프랑스 국왕 앙리2세의 비 카트린드메디시스 사망
오늘<1308>(1월5일)] 카트린드메디시스
1589년 1월5일 프랑스 국왕 앙리2세의 비(妃) 카트린드메디시스가 70세로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프랑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과 맞먹었다. 이 외국인 출신 왕비의 영광과 오욕 속에서 프랑스 역사도 함께 요동쳤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메디치가(家) 출신으로 프랑스 왕비가 된 카트린드메디시스는 남편 앙리2세와의 사이에 자녀를 열이나 두었다.
그 가운데 아들 셋은 각각 프랑수아2세, 샤를9세, 앙리3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치세 동안 남편의 정부(情婦) 디안드푸아티에에게 밀려 천덕꾸러기 노릇을 했고, 장자인 프랑수아2세의 짧은 치세 동안에도 왕실 친척 기즈공(公)에게 밀려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
카트린드메디시스가 프랑스 최고권력자가 된 것은 차남 샤를9세의 즉위와 함께 섭정이 된 뒤다. 그녀의 나이 41세 때다. 그 뒤 카트린드메디시스는 신교에 기울어진 부르봉 왕가와 가톨릭에 기울어진 프랑스 최고 귀족가문 기즈가(家) 사이의 갈등을 때로는 조정하고 때로는 부채질하며 14년간 프랑스를 쥐락펴락했다. 3남 앙리3세가 즉위한 뒤 섭정을 사임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죽을 때까지 프랑스의 최고 어른이었다.
그녀의 치세 아래 벌어진 가장 끔찍한 사건은 성(聖)바르톨로메오의 학살(1572)일 것이다. 국왕과 가까운 위그노(신교도) 콜리니 장군의 암살 미수 사건을 얼버무리기 위해 기즈 집안과 카트린드메디시스가 선동한 이 난리통에 수천명의 신교도가 목숨을 잃었다.
탁월한 정략가 카트린드메디시스는 한편으로 문화애호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파리에 루브르궁을 건축하고 튈르리 정원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공식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상 최초의 발레 공연을 직접 하기도 했다. 1581년 10월15일 그녀가 몇몇 귀족들, 시종들과 함께 공연한 발레의 표제는 ‘왕비의 발레 코미크’였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5/01/04 15:07
앙리 2세의 어머니이자 프랑스의 섭정 카트린느 드 메디치 사망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1519년 4월 13일 - 1589년 1월 5일)는 프랑스의 왕비이자 섭정이다. 카트린은 아버지 우르비노 공 로렌초 데 메디치와 부르봉가의 피가 흐르는 어머니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딸로 1519년 4월 13일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부모님을 모두 잃었으며, 피렌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탓에 수녀원에 감금되거나 추방되는 등 많은 질곡을 겪었다. /위키백과
1588 - 척계광, 명나라 군인 (1528년 출생), 사망
척계광(중국어 간체: 戚继光, 정체: 戚繼光, 병음: Qī Jìgūang, 1528년 11월 12일 - 1588년 1월 5일)은 중국 명나라 후기에 만리장성의 수비를 담당한 장군이다. 왜구 및 몽골과 싸워 전공을 세워 그 이름이 알려졌다. 자는 원경, 시호(元敬)는 무의(武毅). 룡행검이라고 하는 검법의 개조로도 전해진다.
생애
등주위(산둥성 펑라이 현) 출신으로,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밀무역을 하던 왜구 토벌에 종사한다. 저장 성 진화, 이우로 군사를 모아 척가군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정병, 수군을 조련한다. 호종헌의 지휘 하에 유대유, 류현 등가 함께 왜구를 토벌한다.
1567년에 해금령이 풀리면서 왜구의 활동이 뜸해지자 북방을 방비하는 장군으로 종사하며, 알탄 칸의 침입에 대응한다. 대규모의 만리장성 보강, 증축 공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무력으로부터 내각대학사로 당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장거정에게 중용 되었지만, 1582년 장거정의 사후, 척계광의 공적을 시기하는 대신들로부터 탄핵되어 만력제로부터 1583년 면직되었다. 그러한 처치는 3년 후에 철회되지만, 실의에 빠져 죽고 말았다. /위키백과
995 고려, 관제(官制)를 개정 6부상서(六部尙書)의 칭호 정함
중국, 한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에서 행정기구인 6부(六部), 6조(六曹)의 수장(首長)인 여섯 고관(高官)의 직위를 나타냈던 말로, 중국 주(周)의 관제(官制)에서 비롯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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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周) 시대의 관제(官制)를 기록하고 있는 <주례(周禮)>는 서주(西周) 왕조(王朝)가 천지(天地)와 4계(四季)에 따라 천관(天官), 지관(地官), 춘관(春官), 하관(夏官), 추관(秋官), 동관(冬官) 등으로 직제(職制)를 구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들 6관(六官)의 수장(首長)을 6경(六卿)이라 하였는데,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의 3공(三公)에 버금가는 국가의 최고위 관직이었다. 6경은 삼공(三公)의 직무를 보좌하는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의 3소(三少, 三孤라고도 함)와 함께 9경(九卿)이라 불리기도 했다. 주대(周代)의 6관(六官)은 후대에 6부(六部), 6조(六曹)의 행정 체계로 계승되었고, 6부(六部), 6조(六曹)의 수장(首長)도 6경(六卿)이라고 하였다. 주(周) 시대에는 대재(大宰), 사도(司徒), 종백(宗伯), 사마(司馬), 사구(司寇), 사공(司空)을 6경(六卿)이라 하였으며, 이는 상(商)의 태재(太宰), 태종(太宗), 태사(太史), 태축(太祝), 태사(太士), 태복(太卜) 등 6태(六太)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재(大宰)는 천관(天官)의 수장(首長)으로 궁중(宮中)의 일과 국정(國政)을 총괄하여 총재(冢宰)라고도 했다. 사도(司徒)는 교육(教育), 인사(人事), 토지(土地)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지관(地官)의 수장이었다. 종백(宗伯)은 국가의 예법(禮法)과 제사 등을 담당하는 춘관(春官)을 이끌었으며, 사마(司馬)는 군사(軍事)와 병마(兵馬)를 담당하는 하관(夏官)의 수장(首長)이었다. 사구(司寇)는 형벌의 업무를 담당하는 추관(秋官)을 이끌었으며, 사공(大司)은 국가의 토목(土木)과 공작(工作)을 담당하는 동관(冬官)의 우두머리였다. 수(隋)와 당(唐) 시대에 3성 6부제(三省六部制)가 확립되면서 6관(六官)은 6부(六部)로 바뀌었다. 그리고 천관(天官)은 이부(吏部), 지관(地官)은 호부(戸部), 춘관(春官)은 예부(禮部), 하관(夏官)은 병부(兵部), 추관(秋官)은 형부(刑部), 동관(冬官)은 공부(工部)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각 부의 수장을 상서(尙書)라 하였다. 이것이 중국 관제(官制)의 기본 골격이 되었는데, 역대 왕조마다 6부 상서(尙書)를 6경이라 하였다. 한국에서도 발해가 3성 6부제를 도입하여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지부(智部), 예부(禮部), 신부(信部)의 6부를 운영했으며, 고려는 995년(성종 14)에 이부(吏部), 병부(兵部), 호부(戸部), 형부(刑部), 예부(禮部), 공부(工部)의 상서6부를 설치했다. 조선에서는 중앙관청을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6조(六曹)로 나누었고, 그 수장(首長)인 판서(判書)를 6경이라고 했다. |
- 화상이 매일 연재하고 있는 오늘의 역사 는 [오늘의 인물과 역사]의 기초자료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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