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6차시 습작품 첨삭 작품 (2023년 4월 8일 토)
1. 기워 갚기 / 이성호
어른이 되어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엄마와 부딪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고 나면 둘 사이에 따스한 공기가 감돌게 될 수도 있다. 부딪치는 것은 뭔가에 함께 참여하는 행위이고, 제대로 이뤄지기만 하면 친밀해질 수도 있는 행위다. 물론 엄마가 친밀한 관계를 주도하고 어른 아이가 주저하는 경우도 있다. (재스민 리 코리의 「엄마의 상처 떠나보내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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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에 큰 변화를 주었다. 전 세계적으로 장기화되면서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영화나 콘서트 같은 문화 활동이나, 스포츠 경기장을 찾는 것도, 심지어 집 앞 나들이나 지인과의 만남조차 망설여지게 하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에 익숙해져 갔고, 기존에 누렸던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언제쯤 과거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니 되돌아갈 수나 있을까 하는 암울한 의문을 누구나 갖게 되었다.
코로나19 신규 확진 추이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던 작년 이맘때였다. 그동안 전면 금지해온 대면 집합교육은 방역 수칙을 지키는 조건으로 완화되었다. 때마침 퇴직 후 취업에 도움이 될만한 교육강좌가 개설되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공기업에 근무하고 있어 그 어떤 조직보다 철저하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해온 터에 사회적 거리 유지가 가장 어려운 서울에서 교육이 시행된다고 하니 잠시 망설여졌으나 원했던 교육인지라 신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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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열흘이나 진행되기에 생각이 많아졌다. 어디서 묵어야 하나? 친구에게 얘기해볼까? 아니면 마음 편하게 에어비엔비 숙소로 예약할까?
그러다 아들 집이 생각났다. 서른을 훌쩍 넘겼으나 아직 혼자인 아들이 떠올랐다. 숙박비를 남겨서 아들에게 주는 것이 (좋아하진 않더라도) 좋지 않을까? 그동안 소원했던 아들과의 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되겠지. 스스로 대견한 마음이 들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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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장에 들어가기 전에 신속 항원검사 코로나 자가진단키트로 양성 여부를 확인하였다. 일과 중에도 마스크를 쓰도록 안내받았다. 거기다가 실내에서는 물도 마시지 않았고, ‘나만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 이중으로 신경을 썼다. 설령 운 나쁘게 코로나에 걸리는 한이 있어도 아들에게만은 결단코 옮기지 않겠다는 다짐이 한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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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젊은 남성의 심장 사망과 관련이 있어 18세에서 39세 사이 남성은 코로나 백신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미국 플로리다주 보건장관 조셉 라다포의 주장, 가슴 통증과 숨 가쁨을 유발할 수 있는 심근염이 소년과 청년에게 불균형적으로 발생한다는 소식 등은 코로나 치료제가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방접종 효능에 대한 의구심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불확실성은 좌절감을 준다고 하였던가? 정부에 대한 불만이 더해지면서 불신은 증폭되었으리라. 이유야 어떻든 흔쾌히 열흘간의 동거를 허락해준 아들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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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보상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들 집에 기거하면서 방 청소와 정리 정돈, 재활용품 분리배출, 빨래, 식사 준비와 설거지까지 도맡아서 했다. 가장은 돈 잘 벌어다 주면 되고, 온갖 집안일은 여자가 하는 걸로, 경상도 남자는 속정만 깊으면 돼, 라는 철없는 아버지 상을 가졌던 지난날. 회사 일을 한답시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지 못했고, 아들의 고민을 들어줄 여유도 없었다. 굳이 핑계를 댄다면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생겼고, 취업하자마자 승진에 유리한 각종 자격증을 따느라 다른 일에 관심이 없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정도로 어렵다는 진급시험에 몇 년째 매달리느라 더욱 그랬다. 더군다나 부모 노릇은 생전 처음인지라 말해 무엇하겠는가? 책임감은 강했고,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이 대신 채워주길 바라는 욕심은 컸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상황에서 부자 관계가 소원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비정상. 이러한 과욕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환갑이 가까워지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기워 갚는 마음으로 아들과의 동거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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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교육받는 내내 자가진단 결과는 음성으로 나왔다. 그럼에도 교육이 끝나갈 즈음 연신 재채기가 터져 나왔고 미열이 있는 것은 왜일까? 다행히 원룸의 좁은 공간에서 같이 생활한 아들은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안심했다. 새벽에 너무 열심히 운동한 탓일 거라고, 때늦은 찬바람에 약간의 미열이 생겼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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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교육을 마치고 자격증을 손에 쥔 채 뿌듯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내려왔다. 아내 앞에서 아들네에서 수고했던 일들을 - 삐걱거리는 화장실 문을 고쳤고, 환기팬과 실내 스위치를 교체해주었고, 야간근무하는 아들 건강을 위해 찌개를 끓이는 등 – 정성을 다했노라고 한껏 너스레를 떨었다. 또 오시라는 복음 같은 아들의 배웅 말도 곁들이면서...... 아들에게서 카톡이 오기 전까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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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내려가셨는지요, 라는 안부 인사 대신 자가진단을 해봤더니 양성반응이 나왔다는 가슴 철렁한 내용이었다. 회사에서 여러 차례 예방 접종하라는 것을 소신껏 거부했는데 확진인 걸 알게 되면 어렵게 구한 직장에서 잘릴 거란다. 그동안의 수고와 친밀한 관계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에어비엔비에서 없는 듯 지내다 올걸, 하는 후회가 밀어닥쳤다. 철든 아버지 노릇이 이토록 힘든 것인가!
그 이후 아들은 누가 들어도 코로나에 걸린 게 분명한 갈라진 목소리로 열흘간 어렵게 숨기며 근무했단다. 목을 많이 쓰는 직업인데 어떻게 버텨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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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통장에 코로나 생활지원금이 입금되었다. 미안한 만큼 더 보탤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받은 10만 원 전액을 보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여 아들에게 그대로 송금하였다. 미안한 마음 가득 담아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아들로부터 예쁜 꽃액자가 왔다. 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라는 문구가 새겨진.
2. 단란한 평행선 / 장미
나는 생각한다. 엄마와 나는 늘 평행선이라고. 가치관이나 생각이 안 맞아도 이토록 안 맞을 수가 없다. 엄마 입장에서는 당신 속으로 낳은 자식이 이렇게나 다르다고 생각하실 게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당신 속으로 낳은 자식을 이왕이면 좀 더 이해해 줄 수는 없으신가 싶다. 아, 고집이 쇠줄 같은 것은 닮았다. 둘 다 각자의 생각을 굽힐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말이다.
내 꿈은 늘 ‘밥벌이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막혔다. 장래희망이 밥 ‘벌어’먹는 일이면 ‘좋은’ 희망이고, 밥 ‘빌어’먹는 일이면 아주 ‘나쁜’ 희망이 된다.
중학교 3학년 말, 미술 선생님은 내게 교무실로 오라 하셨다.
장미야, 예고(예술 고등학교) 진학은 어떻노? 네 그림 실력이 너무 아깝다. 예고에 진학하면 선생님이 물심양면 니 뒤를 봐줄게. 집에 가서 부모님과 상의 좀 해봐.”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에 자부심이 있던 터였다. 그런데 미술 선생님이 예고 진학 권유와 더불어 뒤까지 봐주시겠다니…….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안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 엄마께 이 모든 말들을 전했다. 이 정도면 엄마 역시도 ‘고민’이란 걸 조금은 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엔 1초도 안 걸렸다.
“미술? 흥, 그거 밥 빌어먹는 거다. 우리 집은 그런 거 밀어줄 돈 없다. 미술로 성 공? 유학 갔다 와도 보장 못하는데?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미술 같은 거는 할 생각도 하지마라.”
진짜 바늘로 찔러도 틈 하나 없을 것 같은 대답이었다. 아니, 왜 본인 생각 외엔 고민도 하지 않으실까. 그리고 내 보기엔 집안 형편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 때의 난 공인(公人)인 분의 인정을 받았다는 게 제일 기뻤다. 그런 인정의 말에 대한 ‘엄마의’ 인정과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 “미술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단 말이야? 우리 딸 정말 대단한데?” 류의 말들 말이다.― 내가 너무 드라마를 많이 봤던 걸까? 아니면 그때까지 우리 집안의 분위기를 아직은 덜 파악했던 걸까? 그렇게 첫 번째 내 꿈은 바로 차단당했다.
일반고 진학 후 나는 두 번째 장래희망인 ‘작가’를 꿈꿨다. 우선 재료비나 배우는 값이 드는 일이 아니라 꿈을 품고 있기엔 걸림돌이 없었다. 문제는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당연히 ‘국문학과’들을 썼다. 그 때 엄마는 또 옆에서 말씀하셨다.
“작가? 흥, 그거 밥 빌어먹는 거다. 작가가 아무나 되는 줄 아나? 정 글이 쓰고 싶 으면 회사 다니면서 글 쓰면 되는 거다. 뭘 작가를 해. 평생 빌빌 거리고 싶나?”
엄마가 부푼 마음에 초를 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속상한 것은 이런 말에 내 의견을 더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거다. 난 내 꿈에 ‘하고 싶은 것’만 생각했지, ‘밥벌이’랑은 결부시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잘하는 걸 하고 싶다는 데에 ‘돈’이 들어가야 하는지 몰랐다. 내 두 번째 꿈은 ‘돈을 잘 벌 수 있는 일인가?’에 대한 대답은 하지 못한 채 또 무산되었다.
그렇게 진학한 과는 ‘밥벌이가 잘 될’ 치위생과였고, 나는 그 때부터 인생의 열정 자체가 사라졌다. 과 공부도 싫어서 시험을 째는 바람에 유급을 맞아 3년제를 4년 동안 다녔다. 그러다 다닌 치과에도 의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느 치과도 늘 내가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정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치과는 여자들의 기 싸움, 진료실의 예민함에 늘 서슬 퍼런 분위기였다. 항상 몇 달을 일하다 그만두고, 그만두고를 반복하다 이제는 치과 일 자체를 그만 두고 싶었다. -그래도 3년은 이 치과, 저 치과를 떠돈 게 대단할 지경이었다.― 엄마는 그만두고 싶다 말하는 순간부터 늘 다음 치과를 정해놓고 그만두라 하셨다. 하지만 난 이미 치과 일 자체가 그만 하고 싶었다.
집에서 쉬는 날이 길어지니 엄마의 폭언이 쏟아졌다.
“왜 사지육신 멀쩡해가지고 장애인 보다 못한 삶을 사노! 내가 니 뭐가 모자라게 키 웠는데? 팔, 다리 다 멀쩡해가지고 왜 일을 못하겠냔 말이다! 왜 남들 다 다니는 직 장 하나 못 다니고 이렇게 빌빌 거리는데? 옆집에 용욱이(지적장애자이다.)도 공장 다니면서 즈그 엄마한테 용돈까지 준단다. 이 용욱이보다도 못한 년아! 내가 니보고 내 용돈을 달랬나? 그냥 니 밥벌이는 니가 하란 말이다!”
난 듣다 듣다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엄마의 말을 계속 곱씹었다. 매번 한량 취급을 받지만 그 당시 누구보다도 인생의 괴로움을 맛보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늘 쫓기는 마음이었다. 인생은 돈을 벌어야만 유효한 것인가? 그러다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엄마의 이날 이 몇 마디가 엄마의 좌우명을 다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와 나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얼마 전, 6 살배기 딸이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되고 싶단다. 내가 단 한 번도 화가가 되라 한 적도 없는데 얘는 왜 또 나랑 똑같은 말을 할까? -역시나 핏줄은 무섭다.― 그리고 그와 동시의 엄마의 신념도 무서움을 다시금 알았다. 엄마에게 말했다. 당신의 손녀가 화가가 되고 싶다 했다고. 난 적어도 6살짜리가 하는 꿈에는, 자식이 아닌 손주가 하는 꿈에는 지지하는 말을 하실 줄 알았다. 이번에도 엄마는 1초 만에 대답했다.
“잉? 화가? 에그그……. 그거 밥 빌어먹는 건데…….”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엄마에게 늘 인정받고 싶어 했던 내 모습이다. 작가가 되고 싶어도 ‘돈 잘 버는 작가’가 되고 싶고, 사업이 하고 싶어도 ‘돈 잘 버는 사업가’가 되고 싶어진다. 일생에 한번은 엄마의 인정하는 말이 듣고 싶다. 아니, 듣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내 행동을 보아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이 시간부로 명확히 하겠다. 엄마와 나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엄마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겠다. 엄마와 나의 생각을 존중하겠다. 각자의 고집만은 닮아 우린 영원히 만날 수는 없겠다. 영원히 교차할 순 없어도 옆에 나란히는 서 있겠지. 평행선, 어쩌면 나란해서 단란해 보인다고 애써 위로해 본다.
3. 군밤타령 /최정란
어떤 음악은 어느 한 시절의 나를 생각나게 한다. 음악과 함께 그때 내 곁에 함께 있던 사람이나 그 노래를 유난히 좋아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오늘 아침밥을 먹고 햇살 드는 창가에 멍하니 앉았다가 생각나는 겨울 동요를 불러보았다. 송이 송이 눈꽃송이 하얀 꽃송이로 시작해서 손이 꽁꽁꽁 발이 꽁꽁꽁을 거쳐,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을 부르고 이후 몇 곡을 지나 불현듯 <군밤타령>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자주 들으시던 노래 중 <새타령>과 <군밤타령>이 끼어있었다. 새타령이야 자라는 동안 방송에서 종종 들었다 쳐도 군밤타령은 통 들을 일이 없었는데, 부를 일은 더더욱 없었는데 왜 갑자기 그 노래가 생각났을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혼자서 흥얼흥얼 부르다 보니 중간에 끊어지는 부분도 없이 온전히 다 기억해내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어린 날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겨울날 맑았던 공기, 평상에 앉아계시는 할아버지, 길게 늘어져 약간은 지루하고 슬픈 느낌의 노래들 사이에 밝고 흥겨운 기운을 품고 좁은 마당에 떠돌던 군밤타령 소리. 그 기억이 믿을 수 없이 선명해서 반갑고도 서글펐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초등학교 3학년 봄, 외아들인 아빠는 가족을 데리고 할아버지가 계신 포항으로 이사를 했다. 조부모님은 무척 금실이 좋았는데 할머니가 예고 없이 잠결에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행동이 바쁘고 목소리가 컸던데 반해 할아버지는 움직임이 차분하고 목소리가 나직하며 생전 화내는 일이 없었다. 시골 마을 훈장답게 한자를 많이 아시고 붓글씨를 잘 쓰시고 옛이야기를 재미나게 해주시던 분이었다. 담배갑 안의 은박지를 펼쳐 글씨를 쓰셨고, 길에 떨어진 못 하나까지도 주워 오시곤 했다. 유난히 아들 손주를 챙기던 할머니와 달리 할아버지는 나를 오빠와 차별하는 일 없이 참 귀히 여겨 주셨다. 산 아래 목장에서 두꺼운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받아 우리 남매에게 먹이시고, 옥수수 박상도 똑같이 한 그릇씩 나눠주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아무 말 않고 저쪽에 앉아만 계셔도 괜히 마음이 든든했다. 붓글씨를 쓰는 할아버지 곁에서 먹을 갈 때면 내가 그 일을 할 만큼 자랐다는 게 좋았고, 먹 가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능숙해지는 자신에 대해 기분 좋은 우쭐함을 느끼곤 했다. 어쩌면 나는 먹 갈기를 통해서 반복하다 보면 점차 잘하게 된다는 사실을 처음 깨우치게 된 것도 같다.
이제 와 돌아보니 우리가 이사 오고서 세 해를 넘기지 못하고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할머니 안 계신 세상이 쓸쓸해 금방 좇아가셨다고 했다. 말년에는 자리보전하고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는 상태로 일 년을 넘기다 가셨으니 꼽아보면 강건했던 할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할아버지 마고자의 호박 단추가 햇살을 받아 맑고 예쁘게 빛나던 일, 그걸 신기해하는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미소 지으시던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늘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으로 안경 너머의 눈에 웃음을 담고 계시던 나의 할아버지. 겨울 햇살이 비치는 창가 앞 나무 소파에 앉아 군밤타령을 부르는 오늘 아침, 나는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회상한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평안했던 날이고 가장 온전히 사랑받았던 날의 따스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글을 쓰는 동안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걸까? (2023. 1. 26)
4. 그 붉음 / 이명조
오랜만에 태화강 강변을 찾았다. 무더위가 훌쩍 떠나버린 강가는 날듯이 시원했다. 온갖 꽃들로 채워 태화강의 정취를 한껏 돋우는 긴 강변에, 어느 새 활짝 핀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아 껴안고 싶은, ‘하늘을 활짝 연 달’ 시월 하늘이 청명하다. 그 푸름 아래 ‘신이 만든 꽃 중에서 최초의 작품’ 이라는 코스모스의 하늘거림이 더욱 싱그럽다.
그랬지! 오십년 전 시월 그 날도, 가을 맑은 햇살과 코스모스는 이처럼 찬란하고 붉게 빛났지!
내 나이 스물 네 살 된 그 해 시월 첫 일요일 아침, 어머니는 함안에 따로 생활하시는 공무원 아버지께, 내 첫째 여동생은 친구들과 등산을 떠났다. 나는 남은 두 동생과 집을 지켰다. 그 날 밤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고, 늦어지는 동생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무심코 받았다.
“여기 원동역인데요, 이애조씨 집입니까? 부모님은요? 안 계신다고요? 언니 되신다고요? 저어! 동생분이 좀 다치셨는데요. 지금 이리로 급히 좀 와 주셔야 하겠는데요.”
더 자세히 무를 수도 없는 무겁고 짧은 통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누르고, 이웃 사시는 이모부와 함께 택시 대절을 해서 원동역으로 향했다. 부산 온천장에서 그 때 만해도 산골짜기 작은 역인 원동역 가는 밤길은 칠흑같이 깜깜했다. 멀고 험했다. 겨우 도착하니 역사에 불이 환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경찰관 차림의 한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근처 보건소로 안내했다. 택시 안에서 계속 몸을 떨던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입과 두 다리가 얼어 붙어버렸다. 앞서 가던 그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저어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미 사망했습니다. 사망자 확인하셔야 겠습니다. 자세한 사건 경위는 확인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유감입니다. 일행도 각각인데 한꺼번에 여섯 명이나 사고가 나다니 참... .”이라고 침통하게 말했다.
그리고 확인. 그 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옆의 어떤 사람에게 부축을 받으며 늘어져 있던 건 기억났다. 그리고 그냥 반듯이 누워 잠자는, 스무 살 새침 뜨기 이쁜 내 동생이, 거기 있었다. 유난히 동그랗고 흰 동생 옆이마에 붉고 가는 줄 하나 그은 채!
어찌할 수 없어 근처 여인숙 방에서 이모부와 함께 밤을 샜다. 낡고 좁은 그 여인숙 방에는, 한 방과 그 옆방을 막는 더러운 벽이 있었는데, 그 벽 윗부분에 작은 구멍을 뚫어 한 전구로 두 방을 동시에 비추는 붉은 전등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이모부와 단 둘이 30촉짜리 전구의 붉은 빛을 날이 밝을 때까지 지켰다. 그 회색 붉음을!
다음날 새벽, 이모부는 집으로 가시고, 나는 혼자 벌건 눈 비비며 부모님을 모시러 갔다. 어제의 사고를 잊은 역에서, 차가운 첫 기차를 타고 함안으로 갔다. 기차 안에서 내내
‘엄마, 아부지한테 어째 말하꼬? 얼매나 놀래고 슬퍼할 낀데 어째 말하꼬! 우짜꼬!’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함안에 내려 법수 중학교까지 택시 대절을 했다. 뒷자리에서 창밖을 멀거니 보는데 신작로 양쪽 줄지어 끝없이 무리지어 춤추는 코스모스 행렬, 그 눈부신 붉음!
‘애조야! 애조야! 이래 예쁜 꽃이 넘치는 이 세상을, 니는 와? 벌써, 그리도 급하더나!’ 눈물이, 눈물이, 끝없이 내 양 볼을 타고 흘렀다.
도착 후 택시 운전사에게 ‘대기’를 부탁하고 눈짐작으로 사택을 찾아 갔다. 마침 출근 하시려던 아버지, 그 곁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가 놀라 벌떡 일어나시며 “니가 우짠 일이고 이래 일찌기!”
처음 시작은 침착했다.
“안즈시소, 어무이 아부지예, 애조가! 애조가! 잘못댔심더! 어제 등산 갔다 오다가 원동역에서 고마 기차에 바칬심더!”
그러나 끝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터져 나오는 오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참아야 했다. 우리 셋은 세워둔 택시를 타고, 다시 기차 타고 원동역으로 서둘러 가야 했다. 기차 안에서도 우리는 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시선을 차창 밖으로 줄곧 뱉으며, 복바침을 누르고 또 눌렀다.
그 때 거지아이가 불쑥 나타나더니 마주 앉아 있는 우리 사이에 가로막아 서며 우리를 보면서 두 손을 벌렸다.
“아저씨 아지매, 한 푼 주이소. 배가 고파 죽겠심더. 어지부터 쫄쫄 굶었심더!”
어머니와 나는 거지 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갑자기 두 손으로 양복 주머니를 다 터셨다. 몇 개의 지폐와 수북한 동전을 한 움큼, 아무 말 없이 그냥 그 거지 손에 쥐어 주셨다. 우리는 놀라서 아버지를 보았는데, 그 때 아버지의 붉은 눈, 그 눈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점점 시뻘겋게 달아오르던 그 깊은 붉음을!
그 날 이후 오랜 시간들! 남은 우리 식구, 특히 부모님은 참으로 힘든 시간을 견디셨다. 이제는 두 분 다 이미 고인이 되셨다. 그 때 나는 어머니를 보면서 ‘땅을 치며 통곡하다’라는 말의 진정한 뜻을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당신의 일기장 속에 끼워둔 여고 교복차림의 앳딘 동생 사진과, 애절한 그리움을 일기로 남긴 사연을 읽으며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 는 말을 심장 깊숙이 새겨 넣었다. 그 때 그 붉음도 함께!
5.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엄마 표 동치미 /전선영
“아이고~ 귀한 딸내미가 오셨네. 조금만 기다려. 아줌마가 맛있는 저녁 해줄게.” 곱슬한 파마머리에 결의에 가득 찬 표정, 레이스 달린 앞치마를 두른 절친 지니 어머니는 콧노래를 부르며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잠시 뒤 문틈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고소한 냄새로 인해 나의 입안은 침샘고문을 당해야 했다.
밥상을 기다리는 나의 기대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만 갔다. 그러나 1시간, 아니 2시간이 지나도 지니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아직도 지글 지글 볶고 데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미 뱃속에선 꼬르륵 개구리들이 떼창을 해대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다 지쳐가고 있을 때 쿵탁 쿵탁, 수저 놓는 소리가 들렸다.
“지나, 영아 어서와. 밥 먹자.” 지니 어머니의 앞에는 정성 가득한 12첩 반상이 놓여있었다. 헉! 소리가 절로 났다. 육해공 대표선수들이 자리다툼을 하듯 비집고 줄 선 밥상은 난생 처음이었다. 집에서는 일 년에 2번, 그러니까 설날과 추석에 조상님께 올리는 차례 상을 제외하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상이었다. 저마다 색색의 개성을 뽐내는 반찬 친구들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자기를 먼저 선택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사는데도 이렇게 식탁 문화가 다를 수 있다니.’
17살이었던 나는 친구 집 식탁을 보며 잠시 괴리감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곧 잘 먹겠단 인사와 함께 후각을 자극하는 놈부터 집기 시작했다.
‘아뿔싸! 이게 무슨 맛이지?’
조선 천지에 듣도 보도 못한 맛이었다. 이어 다른 반찬을 집어 들었다. 모양도 색감도 그럴싸한 친구를 골랐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 않는가. 그래, 모든 반찬이 맛있을 순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힘겹게 목구멍으로 밀어 넘겨야 했다. 다음 선수, 그 다음 선수를 입에 넣고 씹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는 반찬인데 예상하는 그 맛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니 어머니는 기대에 가득찬 눈빛으로 나를 보셨다.
“맛있어? 입에 음식이 잘 맞나 모르겠네.”
”아! 어머니. 너~무 맛있어요. 진짜 손맛 최고세요.”
밝게 웃으며 밥을 먹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밥그릇의 밑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긴 사막의 터널을 지나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심정이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조금만 참으면...’
그런데 그 때 지니 어머니가 일어나면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영아~ 벌써 한 그릇 뚝딱했어? 양에 안 찼나 보네.”
지니 어머니는 빛의 속도로 밥솥 앞에 가더니 빈 그릇에 산만큼 밥을 쌓아오셨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으로 밥그릇을 받자 한마디 덧붙이기까지 하셨다.
”실컷 먹다가 나중에 많다 싶으면 그 때 남겨.”
오, 주여. 이런 저를 가엽게 여기시어... 당시 교회도 안다녔는데 주님을 찾았다.
그렇게 길고도 험난한 식사를 한 뒤 우리 집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돌아왔다.
며칠 후, 절친 지니는 자기도 우리 집에 놀러오고 싶다고 했다. 나는 누추한 집을 보여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친한 친구이므로 기꺼이 초대했다. 아무도 없는 집의 문을 열자 매일 느껴지는 휑한 기운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런데 마침 엄마가 일을 빨리 끝내셨는지 뒤이어 들어오셨다.
“엄마~ 친구 지니 놀러왔어요.”
“오오~ 그렇구나. 너네 아직 밥 안 먹었지?”
“네!”
지니와 나는 동시에 대답했다. 엄마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부엌에 들어가더니 5분도 안 돼서 밥상을 들고 나오셨다. 상엔 밥, 미역국, 동치미, 김치, 김, 간장, 친구 접대용 계란 후라이가 전부였다. 친구 지니는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내가 받은 문화충격과 비슷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니는 곧 웃으며
”어머니. 잘 먹겠습니다.”
하고는 수저를 들었다. 가짓수 얼마 되지 않는 반찬들을 하나씩 맛보던 지니는 어느 순간 빠른 속도로 밥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지니가 가장 많이 젓가락을 댄 것은 단연코 동치미였다. 동치미 국물을 끝까지 마신 그녀는 급기야 이런 말까지 했다.
“어머니, 저 한 그릇 더 먹어도 돼요?”
그동안 학교 점심시간에 깨작깨작 먹던 모습을 보아온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지니와 나는 종종 그때 이야기를 한다.
“내가 임신했을 때 말이야. 우리 엄마 음식이 생각나야 하는데 너희 어머니 동치미가 그렇게 먹고 싶더란 말이지. 어머니 살아계셨을 때 동치미 조리비법이라도 물어볼 걸...”
나 역시 엄마표 동치미가 참으로 그립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움은 커져만 간다.
소금 간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던 동치미는 엄마의 모습 같기도 했다. 침묵할 때와 말해야 할 때를 알았던 엄마. 울어야 할 때는 크게 울고 웃어야 할 때는 거리낌 없이 웃으라며 본보기가 되어주셨던 엄마. 말에도 ’소금을 친 듯이 하라‘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고 늘 말씀해주셨던 엄마. 음식에 적당히 넣은 소금처럼 말에도 적절한 한마디가 힘이 있다고 말해주셨던 엄마.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은 해야 할 때 꼭 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던 엄마. 마치 소금으로 맛을 내도 맛이 나지 않을 때 라면스프라도 넣는 것처럼.
엄마는 요리할 때 간장, 굴 소스, 다시다 등을 항상 대기 시켜두셨다. 마치 대화 속에서도 공감, 유머, 사랑 등의 재료들이 부족하면 간이 맞지 않은 12첩 반상처럼. 때로는 엄마표 동치미 하나의 반찬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한마디 말이 상대의 마음 깊숙이 막히며 위로와 따뜻함, 촉촉함 마저 줄때가 있는 것처럼. 나도 세월이 흘러 엄마 나이가 되고 보니 그런 말들이 조금씩 더 깊이 내 마음을 울린다.
오늘은 엄마표 동치미와 가장 비슷한 육수를 사서 식탁을 차려본다. 밥과 함께 육수를 왈칵 들이킬 때마다 엄마의 손맛이 잡힐 듯 느껴진다. 가장 따뜻하지만 가장 시원한 동치미가 목울대 안으로 들어오는 지금,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첫댓글 첨삭 작품은 수록 제출 순서대로
가급적 첫 작품을 우선해서 편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