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이찬수 목사 (분당우리교회)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찬수 목사(분당우리교회)
다니엘 6장 3-10절
“…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설교 한눈에 보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다. (예화: 빅터프랭클, 헤르만헷세)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니엘은 하나님을 의지했다.
다니엘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믿음과 절대감사가 있었다.
감사의 진리
1. 감사는 선택이다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감사를 선택하면 실제로 감사가 된다.
다니엘은 그의 삶 속에서 감사의 뜻을 정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감사를 선택하는 것은 능력이다. (예화: 한비야)
2. 감사는 훈련이다
수많은 연단과 아픔을 거치면서 습득되는 것이 감사훈련이다.
자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3. 감사는 능력이다
다니엘은 감사할 조건이 도래하지 않았을 때 미리 하나님께 감사했다.
다니엘은 순종할 뿐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미리 감사했던 감사내용이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구현되었다.
누가 나에게 감사를 전해 주었는가? 나는 친구에게 감사를 전하고 있는가?
핵심 메시지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선택이다.
청중의 적용 포인트
‘현재 나에게 미리 감사할 내용은 무엇이 있는가?’
빅터프랭클이라는 유대계 정신분석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 갈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갈순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삶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 이건 의미 있는 이야기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빅터프랭클 자기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오슈비츠 수용소에 감금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사람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나랑 동거 동락했던 그 사랑하는 친구가 가스실로 불려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런것들이 계속 반복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내가 불릴지 내일 내 이름이 불릴지 모르는 그런 상황 속에 놓였는데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하지만, 그때 이 빅터프랭클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을 보니,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에도 이미 죽은 목숨이더라는 것입니다. 즉, 이미 절망의 그림자가 얼마나 강하게 엄습했는지 그냥 숨만 쉬고 있을 뿐이지 이미 다 죽은거나 마찬가지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빅터프랭클은 그런 환경에 무너지지 않고, 희망을 불태우기 위하여 깨진 유리조각을 구해 그것을 몰래 감춰 매일 아침마다 면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니까 상처도 나고 피가 나고 했지만, 그는 그런 일들을 매일 반복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수용소에서 절망하며 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환경을 뛰어넘는 몸부림을 치고 나니까 놀라운 게 있었습니다. 독일 나치가 비록 자기의 몸을 수용소에 감금하는 건 할 수 있었지만 독일 나치가 그가 가진 외적인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가는 여기까진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희망을 향한 나의 삶에 대한 태도는 빼앗아가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는 그 태도를 빼앗기지 않고, 끝까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헤르만 헷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은 대상이 아니라 재능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사람들은 보통 어떤 조건이 대상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면 그 대상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어떤 난관 속에서도 그 속에서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을 헤르만 헷세는 재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하고 생각했던 게 무엇이었습니까? 내게 주신 은혜가 뭐지? 내가 월급이 올랐나? 승진이 됐나? 건강이 좋아졌나? 뭘 감사하라는 거지? 우리는 조건을 생각했습니다. 감사 제목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대상, 행복의 조건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대상과 조건을 뛰어넘어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행복을 가려내고 행복을 쟁취해내는 재능, 능력이 너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바로 빌립보서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있느니라” (빌 4:11-13)
여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헤르만 헷세가 말하는 행복의 대상, 여러 가지 좋은 상황, 좋은 여건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질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형편이나 궁핍에 처하든, 고난에 처하든 심지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서라도 거기에서도 감사 제목을 끌어내고 거기에서도 내가 행복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참 감사한 것은 이런 이야기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지 아니하고 이런 이야기가 무슨 허무한 이론에 그치지 아니하고 지난 1년 동안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아낸 너무나 많은 분들이 이 교회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가 막히게 실낱같은 감사를 뽑아내서 그것을 품고 1년간 지탱해 온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저는 오늘 감사절을 맞이해서 무슨 이론을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이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삶으로 보여준 두 인물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한 인물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고 또 다른 한 인물은 실제적으로 이 땅을 사는 사람입니다.
먼저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니엘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다 아시겠지만 다니엘은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나라는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게 정복을 당했고 나라가 자기를 지켜주지 못하니까 그 어린 청소년 나이에 원수의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다니엘이 그 역사에 함몰되어 그 인생이 하루아침에 비극의 한복판으로 끌려가 버리고만 것입니다. 그리고는 창씨개명을 비롯해서 엄청난 수모를 겪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단 1:6-7)
이 다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재판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쳐진 이름 벨드사살은 ‘벨이여 왕을 보호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벨이라는 것은 바벨론 신의 봉사자와 예배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의지하는 이름에서 초라한 이방 잡신을 섬기는 이름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적으로 바벨론 왕에게 충성을 강요당하는 그런 불행한 일이 펼쳐졌습니다. 여러분 그 다니엘의 자괴감이 어떠했겠습니까? 안 그래도 청소년기는 생각이 많고 갈등이 많고 반항하는 시기인데 다니엘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많은 원망을 했겠습니까? 사실 그런 비극이 초래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교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에 그 죄의 대가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자의적입니다. 자기가 한 짓들은 생각 안하고 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도와주지 않느냐고, 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이렇게 멸망가운데 가도록 내버려 두시냐고, 무능하신거 아닌가, 하나님 없는거 아닌가라는 불평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니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니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다니엘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다니엘 6장을 보면, 그는 페르시아 제국에 중앙 총리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다시 패권을 잡고 왕조가 바뀌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왕조를 뛰어넘는 인정을 받던 그런 요직을 그가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가 어떻게 그런 진흙탕 속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것 같은 인생이 됐을까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이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감사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담겨져 있는 것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6장 10절을 한번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 하였더라” (단6:10)
지금 다니엘에게는 절대 절명의 위기입니다. 다니엘의 정적들이 지금 다니엘이 급부상하는 것을 경계해서 그에게 올가미를 씌웠습니다. 이제 다니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목숨을 부지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배신하지 않고 사자 굴에 가서 죽음을 당하든지 하는 이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그는 선택합니다. 하나님을 택합니다. 죽음을 택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믿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할게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절대 믿음과 절대 감사.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본문 속의 다니엘을 보면서 감사와 관련해서 참 중요한 몇 가지 진리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감사는 선택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다니엘은 감사할 조건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정적에게 둘러싸여있습니다. 정적의 올가미에 씌어있습니다. 죽음이 자기를 기다릴지 모르는 위기에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다니엘이 감사를 선택하니까 그게 감사가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한비야씨를 아실 것입니다. 지금 그녀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분이 되었습니다. 이분이 언젠가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참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습니다. 원래 아버지가 유능한 기자출신으로 유복한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그 후로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비야씨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대학진학을 못했습니다. 옛날에는 보릿고개가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명문대학교를 다니는 남학생이 한비야씨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마치 스토커처럼 따라다녀 그게 정이 들고 교재를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교재하다 보니 남자친구 집에서 사귀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래서 한비야씨가 남자친구 집으로 초정받았다고 합니다.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뛰어나와 반갑게 그녀를 맞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비야는 어느 학교 다니니?” 한비야씨는 아무 생각없이 “저는, 아직 학교를 안 다니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반갑게 맞아주었던 남자친구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꼭 이런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아니, 고졸인 네가 감히 내 아들을?’ 얼마나 그것이 마음에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었겠습니까?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날 이후로 한비야씨는 그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상황에서 아픔이 넘쳐 마음이 심약한 사람들은 2박 3일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심지어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한비야씨가 했던 말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날 그 모욕적인 순간을 그녀는 대학에 진학하는 에너지로 썼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잊혀지지 않는 눈빛을 마음에 그리면서 대학을 가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 상황이 얼마나 상처가 됐으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하겠습니까만은 한비야씨는 그것을 자기를 파괴시키고 자기를 무너뜨리는 쪽으로 흐르지 아니하고 그 상황을 인생을 비상하는 쪽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 찰스 스윈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제의 10%는 객관적인 사실인데 나머지 90%는 우리의 반응에 의해 결정이 된다”
한비야씨가 그날 그렇게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한 그것이 보통사람에게는 100%의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사실이 ‘나는 자살해도 될만한 충분한 조건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사실적인 것은 10%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90%는 이것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해서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감사는 선택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객관적으로 너무나 많은 풍요로움 때문에 많아서 감사하는게 아니고 그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내가 감사를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행복했고 나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저는 믿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단1:8)
이것이 다니엘을 다니엘 되게 했다면 다니엘은 그의 삶 속에서 감사도 뜻을 정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환경을 탓하지 아니하고 감사를 선택할 줄 아는 능력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감사는 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57편을 보면, 처음부터 다윗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저절로 감사했습니까? 1-7절까지 얼마나 많은 엎치락 뒷치락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았다가 원수를 보고 마음이 무너지고 다시 회복이 되는가 싶으면 또 현실 앞에 함몰이 되고 또 힘을 내는가 싶으면 또 마음이 무너지는 이것을 무려 1-6절까지 계속 반복하고 반복하다가 9절에 가서야 드디어 감사가 나왔던 것입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57:9)
1절서부터 대뜸 감사가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훈련입니다. 수많은 연단을 거치고 수많은 아픔을 거치고 넘어지고 깨지면서 습득되는 것이 감사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할 수만 있으면 평탄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감사훈련학교에 입학시키실 때 그 눈물을 삼키고 감사를 선택하는 능력을 구비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아까 읽었던 빌립보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1)
자족은 배우는 것입니다. 성격이 아닙니다.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것은 훈련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눈물 나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아픔과 어려움들이 자족을 배우는 도구로 사용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들여다보십시오. 그가 하나님께 감사한다 했는데, 지금 감사할 내용은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집에 돌아가셔 가지고 오늘 본문 전후를 가만히 읽어보시면 놀라운 걸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0절에서 그가 상황적으로는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도 그는 미리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뿐만이 아니라 그런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그가 미리 감사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것은 그 이후부터 사자 굴에 들어가는 과정과 그 후의 삶에 미리 감사했던 그 수많은 감사내용이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 들으셔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감사가 매일 여러분 삶에 실제 구현되는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환경이 너무 답답하고 감사가 나오지 않고 원망과 불평이 나올 상황에 당겨서 감사하시면 오늘 드린 이 감사가 내일의 여러분의 삶에 능력이 될 줄을 믿습니다.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성경 한 구절 읽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아까 읽어드렸던 그 말씀을 다시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있느니라” (빌 4:11-13)
하나님이 그 삶에 개입해서 그런 감사를 선택하도록 만들어 주셨는데 날개 달린 천사를 사용하신 게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두 가지를 적용해서 여러분에게 기도제목을 드리고 싶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메신저였습니까? 두 번째로 여러분은 그 누군가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고 계십니까?
이찬수 목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일리노이 주립대(U.I.C, 사회학 전공)
현 총회교육위원회 교육전문위원
KOSTA 국제본부 강사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저서 「세상에 없는 것」, 「YY부흥 보고서」,「교육은 감동이다」, 「청소년 리바이벌」,「틴틴 리바이벌」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