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어머니와 아이와의 관계가 남편과의 관계보다 더 깊습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둘을 이루고 아버지는 국외자가 되는 세 번째 역할을 떠맡습니다. 이걸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혹은 변화시켜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질서를 앎으로 충분합니다.
▪ 확신은 용감합니다. 전혀 확실할 수 없는 미래의 어떤 것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보장을 찾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 합니다. 더 가지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확신만이 우리를 앞으로 가게 합니다. 그러나 확신은 언제나 무보증을 동반합니다. 아직 많은 것을 앞에 둔 청소년기적인 어떤 것을 갖습니다. 출발하려는 분위기를 갖기에 감동시킵니다. 확신은 생명을 계속되게 합니다. 확신은 기쁨에 찬 기대입니다.
▪ 가끔 우리는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 시험에 합격하려고 노력과 수고도 하지 않고 자유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능력 없는 자유는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노력하지 않고 얻는 실적 없는 자유는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 결국 행복은 무엇보다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생명에 봉사하고 생명이 계속가게 하는 모든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행복도 생명에 봉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선 개인적인 생명을 넘습니다. 개인적인 생명은 전체로써의 생명과 공명에 옵니다. 모든 생명 뒤에서 작용하고 있는 어떤 힘들과의 공명에 옵니다. 든 행복의 근원과 공명에 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행복에 도달하여 편히 쉽니다.
▪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시절처럼 행복하려면 행복한 어린시절은 시간이 되면 지나야만 합니다.
▪ 옛것들 중 어느것은 재건될 수 있어 자신의 옛 힘을 현재에 작용하여 미치게도 합니다. 드레스덴의 프라우엔 교회의 재건을 생각합니다. 그런 재건은 과거의 많은 것을 잊게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것은 온전히 지나도 됩니다. 그러나 잘 보존돼 우리 영혼에 자리잡은 옛것조차도 였던 그 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봉사하려면 변화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보수와 확장과 개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여러 방법으로 끊임없이 건설 중에 있습니다. 새로운 어떤 것과 옛것에 어떤 것을 세움으로 건설 중에 있습니다. 새로운 것도 오직 옛것에 건설하기에 새로울 수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많이 건설합니까? 좋은 생각들이 건설합니다. 우리를 위하는 좋은 생각들과 남을 위하는 좋은 생각들이 가장 많이 건설합니다. 건설하는 좋은 생각들은 실천된, 살아 있는 사랑입니다. 모든 사랑은 결국 건설입니다.
▪ 제외는 좁힙니다. 제외는 겉으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제외함으로 우리는 어찌하든 내게 속하는 어떤 것을 잃습니다. 그 어떤 것은 내게 속하기에 나에게 다시 오려고 합니다. 또한 제외된 것은 우리를 자신께 이끕니다. 제외를 통해 형성된 긴장은, 나와 제외된 것이 다시 서로 만나야 해소됩니다.
▪ 영적인 것도 또한 천천히 됩니다. 본질적인 통찰은 우리에게 언제나 갑자기 옵니다만, 우리가 통찰을 얻으려고 노력하며 준비한 후에야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통찰은 오랜 성장과 그에 따른 기다림 후의 잘 익은 열매와 같습니다.
정신집중도 천천히 됩니다. 잘 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랑도 천천히 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위해 시간을 바쳐야만 사랑은 깊이 연결합니다.
▪ 대립되는 것은 서로 끕니다. 서로 보완하기 때문입니다. 남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사랑과 증오 등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선은 악을, 정의는 불의를, 증오는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상대와의 대비에서야 각각은 자신에게 옵니다.
우리가 이 대립들을 유지해야 합니까?
우리가 그 대립들을 더 심화시키지 않으면 충분합니다 그 대립들이 생명과 생명의 성장에 봉사하는 한 우리는 그들의 긴장을 받아들입니다.
누가 그 대립들을 넘어섭니까? 양쪽을 똑같이 존경하면, 더 나아가, -아마 제가 너무 멀리 갑니다만 _ 양쪽을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넘어섭니다. 이게 바로 앞당겨진 완성일 겁니다 : 지옥 없는 천국, 적대자 없는 신, 그럼 우리는 신처럼 모든 대립들과 저 깊이에서 하나입니다.
▪ 반박은 찬성입니다. 모든 본질적인 것은 서술과 반박의 긴장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본질적인 것을, 겉으로는 대립하는 많은 것들을 똑같이 포괄하여 각각을 지양하는 이편도 저편도 아닌 중간에서 찾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반박한다면, 당신은 나를 돕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께 반박한다면, 나는 당신을 돕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직면하여 함께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신의 말이 반박 당하지 않고 정당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자신의 견해에 머뭅니다. 반박을 경험하여 자진해서는 아니지만 그 반박에 순응할 때까지 머뭅니다.
당연히 제멋대로의 생각인 자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의에서의 서술과 반박은 장난이 되어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고 적어도 잠시라도 도움이 되는 일반적인 인식에의 믿음을 잃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해를 입습니다.
그렇습니다. 서술과 반박은 함께 손을 잡고 같은 인식의 길을 갑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상대를 통해 앞으로 갑니다.
저는 독특한 인식과 독특한 인식에의 길에 관심을 갖습니다. 생명이 개인뿐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그룹에서 어떻게 잘 되는가에 관한 인식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이 인식을 얻습니다. 그런데 경험은 모두에게 다릅니다.
우리의 경험은 자주 상반됩니다. 그러기에 그 경험에 기초한 인식도 상반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반대되는 다른 인식에 우리를 열면, 우리는 또한 다른 경험에 우리를 엽니다. 그리하여 다른 경험은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는 함께 더 큰 공동경험을 하여, 다르고 새로운 방법으로 서로를 이해합니다.
반박으로 우리는 서로 성장합니다. 사랑에서 성장합니다.
▪ “내가 그에게 확신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끔 그런 질문을 상대에게 합니다. 또한 그들은 상대가 자신에게 확신할 수 있는가에도 스스로 확신하지 못합니다.
확신하려는 것은 우리의 깊은 욕구입니다.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합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부모에 확신해야 합니다. 이 확신이 없는 아이는 자신에게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어린시절의 그 기본적인 확신이 없는 어른은 배우자에게서 서로 확신하려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갖는 확신을 배우자인 상대에게서 얻으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요구는 상대와 연결하기보다 사슬로 묶어 구속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는 확신에의 욕구를 충족시킵니까? 남녀가 사랑의 순간에 서로 확신하면 충분합니다. 사랑의 순간인 지금 확신하면 충분합니다. 이 순간을 넘지 않으면 확신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성장합니다. 그럼 확신에의 욕구는 사랑의 순간에 더 이상 끼지 않습니다. 확신에의 욕구는 미래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확신에의 욕구가 순간에 있는 사랑에 끼면, 사랑뿐 아니라 확신도 시달립니다.
남녀간의 사랑에선 순간에 있는 사랑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확신입니다.
우리가 신에게서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순간에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 권력은 관계에서 생깁니다. 관계에서 권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권력이란 내가 상대에게 상대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나로부터 어떤 것을 원하거나 필요로 하기에 나에게 권력을 줍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을 줌으로 권력을 받습니다. 상대가 나로부터 어떤 것을 원하는 동안에만 나의 권력은 지속됩니다. 나로부터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면 나의 권력은 끝납니다. 또한 관계도 끝납니다. 권력은 관계에 봉사하며 관계를 지속시킵니다. 권력이 없으면 관계도 없습니다.
관계에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돼 있습니다. 의존이 없으면 관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관계에선 권력이 상호적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선 언제나 같은 정도는 아닙니다.
남녀관계에서처럼 긴밀한 관계에선 권력을 기꺼이 주고 또한 기꺼이 받습니다. 이 권력은 사랑의 권력이 됩니다. 사랑에서 권력은 기분 좋게 경험됩니다. 상호 교환일 동안만 사랑과 권력은 기분 좋게 경험됩니다. 상호 교환일 동안만 사랑과 권력은 지속됩니다. 권력은 또한 유대감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연결돼 있다고 경험하는 한, 그는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권력을 갖습니다. 줌보다 더 많이 받음으로 권력을 초과하여 사용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권력을 잃습니다. 그는 외롭게 됩니다. 권력을 잘못 사용하다 잃은 사람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권력과 함께 사랑도 잃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우리에게 해롭게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권력에 넘겨져 저항할 수 없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 권력은 권력에 알맞은 줌으로 정당화 되지 않기에, 그 권력은 저항 움직임을 불러 일으켜 시간이 지나면 무너집니다.
제겐 여기에서 무엇보다 기분 좋게 하여 힘이 나게 하는, 사랑에 있는 권력이 관심입니다.
▪ 우리 호의는 우리 영혼 저 깊이에서 옵니다. … 중략…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 호의는 의도가 없습니다. 해와 같이 거리를 두고 멀리서 비추지만 모든 것을 따뜻하게 합니다.
어디에서 가장 가깝게 우리는 이 호의를 경험합니까? 우리 몸에서 입니다.
▪ 호의는 우리의 관계도 치유합니다. 우선 우리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호의가 마지막까지 포괄적인 호의와 공명에 있도록, 그리고 우리 호의가 의도 없을 뿐 아니라 거리를 두도록 해야 합니다. 이 호의는 우리 부모가 그러하신대로와 그분들이 이룩하신 모든 것에 동의함이며, 더 나아가 그분들이 견디고 감수해야 할 것에도 동의함입니다.
우리가 우리 부모님이 그러하신대로 기뻐할 때 그 호의는 가장 많이 치유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분들을 통해 선물로 주어진 생명에 기뻐할 때 그러합니다. 동시에 우리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려웠던 모든 것뿐 아니라 우리 기를 꺾고 우리를 강요했던 모든 것을 포함할 때 그러합니다. 그 모든 것도 우리의 호의를 받아 따뜻하게 되어 단번에 환하게 빛납니다. 그리하여 옛 상처는 아물고 마침내 치유됩니다.
▪ 무엇이 이 호의를 방해합니까? 무엇보다도 걱정이나 염려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걱정이나 염려입니다. 걱정이나 염려는 갑갑하고 무겁게 합니다. 우리의 건강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건강에도 방해가 됩니다. 걱정이나 염려도 공간을 창조합니다. 호의의 공간과 반대로, 그 공간은 그릇된 추측으로 우리를 서로 분리시키는 좁은 공간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걱정과 염려를 놓기만 하면 무엇이 일어나는 지 상상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편안한 숨을 쉽니다. 다른 사람들도 안도의 숨을 쉽니다. 무엇보다 부모가 걱정과 염려를 놓으면, 자녀들은 안도의 숨을 쉽니다.
▪ 현대의학은 많은 병들이 영혼과 관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기에 많은 질병들의 영혼과 영적인 배경에 대하여, 영적인 장의 작용을 통해 우리가 얻은 인식을 현대 의학은 점점 더 많이 주목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그의 병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영혼에서 자신이 병들어 죽으려 합니다. 이 상관관계가 드러나고 존중 받으면 치유에 좋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하여 그 통찰은 현대의학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돕습니다.
이제 문제는 : 질병과 고통은, 그것이 육체적이든 영혼의 것이든 넓은 의미에서의 영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입니다. 확실히 영적인 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육체의 아픔을 영혼에서의 과정과 관련시키는 것은, 영적인 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 가족 구성원의 제외를 통해 생긴 영적인 장에서의 무질서는 다른 한 가족구성원의 영혼과 몸에 무질서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이 영적인 장에서 질서가 아픈 그 구성원과 다른 가족구성원들에 의해 다시 잡혀져야, 몸과 영혼에서의 그 무질서가 다시 질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즉 가족공동체에 의하여 거절되었거나, 상처받았거나, 아주 극적으로 추방되었거나, 혹은 살해된 가족구성원을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입니다. 어떤 구성원들에게, 무엇보다 직접 관계된 구성원들에게 아주 고통스러울 지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치유는 사랑의 움직임을 통해 일어납니다. 이제까지의 사랑이 거절한 모두를 사랑하는 사랑의 움직임을 통해 일어납니다.
제외의 원인이 되는 사람들도 함께 이 사랑에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의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제외가 다시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영적인 사랑이 우리의 선과 악에 대한 상상을 넘어 작용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선악 분별을 뒤로 합니다. 영정인 장은 가족의 장보다 더 넓습니다. 가족의 장 밖에서도 영적인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람과 세계에, 그들과 그것이 그대로인대로 사랑으로 향하길 요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영적인 사랑의 움직임과 함께 하여,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서 그 움직임과 공명에 있어야 이 넒은 영적인 장도 우리와 질서에 옵니다.
▪ 나는 어디로 이끌립니까? 나의 길은 어디로 갑니까?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더 이상 모른다면, 나는 어느 길과 방향을 결정해야 합니까? 어떤 길이 아직도 나에게 열려 있습니까?
옳은 길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며 길을 잘못 들었다면 우리는 불안하게 됩니다. 아직도 나에게 열려 있습니까?
옳은 길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며 길을 잘못 들었다면 우리는 불안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첫째, 멈춥니다. 틀린 방향으로의 한걸음 한걸음은 더 많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멈춰, 단지 기다리면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내면의 방향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감각에 정신집중 합니다. 그리고 내면에서 감지합니다: 어디에서, 어느 길과 방향에서 내가 가장 평온하게 됩니까? 어느 길에서 내가 가장 안전하고, 내 힘에 머뭅니까?
우리에게 알맞지 않는 목표를 추구할 때 우리는 불안하게 됩니다. 아마 우리는 환상이나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따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미래가 없는 어떤 것에 우리를 잃습니다.
▪ 우리가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을 생각하고 행동합니까? 그러기에 그러합니다. “그러기에”란 무엇을 뜻합니까? “그러기에”는 목표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이 목표를 향합니다. 이 목표를 향하여, 생각하며 행동하면 잘 됩니까? 목표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보답합니까? 대답이나 합니까?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만질 수도 없기에, 목표에게는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닙니까? 그러기에 고생하며 목표를 향해 생각하고 행동할 보람이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러기에”, 어떤 것을 생각하며 행동한다면, 목표는 우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의 목표를 가질 수나 있습니까? 우리에 의해 생각되고 추구된 것이, 정말 우리에게 본질적인 현실과 어떤 관계나 있습니까? 혹은 이 생각과 행동이 우리에게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우리에게 가장 깊이 알맞은 목표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알맞은 생각과 행동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를 밖에서 덮치는 동시에 저 깊이에서 우리에게 맞는 것으로 경험되는 움직임과 연결돼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움직임을 신뢰하여 통찰을 경험한다면, 처음엔 우리에게 두려울지라도 우리가 상상한 것을 훨씬 넘는 길로 우리는 인도됩니다.
“왜”와 “그러기에”는 이 움직임 밖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왜”란 질문과 “그러기에”란 대답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기에 그렇습니다.
▪ 인도하는 사람은 앞서 갑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을 이끕니다. 왜 사람들은 그를 따르려고 합니까? 그가 그들에게도 중요한 목표에 이르는 길을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 길을 앞서 갔기 때문입니다.
인도하는 사람은 그 길이 어디로 이끄는지 경험으로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분야에서 그렇습니다. 즉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 길을 스스로 벌써 갔어야 합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 갔어야 합니다. 이 분야에서 이끄는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이끌 수 있고, 이끌어도 되고, 더 나아가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까? 스스로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덮친 움직임과 공명에서, 그는 움직임에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면서 따랐기 때문입니다.
▪ 봉사하는 사람은, 주인에게 봉사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는 봉사합니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으로 자신의 위에 놓습니다. 이렇게 부모는 자녀에게 봉사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 있습니다. 남녀도 서로 사랑으로 이렇게 봉사합니다. 남녀는 서로를 위해 삽니다. 여기에서 위와 아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는 아래를 위해 있기 때문입니다. 남녀는 서로 바꿔서 봉사하기에 사랑으로 경험됩니다. 그들의 봉사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지속적인 상호교환으로 서로를 위해 삽니다.
비슷한 방법으로 조직도 구성원에게 봉사합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비록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오직 명령하며, 봉사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기업이나 회사에서도 부하를 위해 상사가 있습니다. 아랫사람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조직에 봉사하는 정도에 따라 보장을 받는 것처럼, 윗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힘과 권위를 얻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일과 봉사도 서로 교환입니다.
봉사가 대가 없이 요구된다면, 봉사할 맘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조직과 공동체를 깊이 연결합니까? 모든 인간 관계에 적용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오직 서로의 봉사에서만 함께 연결돼 있고 함께 할 수 있다고 승인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 관계나 조직, 회사는 무너집니다. 싸움으로 와해됩니다.
와해로 이끄는 싸움은 어떻게 생깁니까? 봉사대신 지배가, 사랑대신 권력이 앞서면 그렇게 됩니다.
▪ “잘 되었네.” 무엇이 잘 되었습니까? 발생한 모든 것이 결국 우리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힘들에 의해 이끌리고 원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첫째로 결정하는 운명은 우리의 출생과 우리 부모의 삶입니다. 즉 우리 부모는, 당신들이 그러 하신대로, 우리에게 신의 섭리 였습니다. 처음부터 부모는 우리를 규정하는 운명에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의 운명입니까? 오직 우리의 운명일 뿐이니까? 부모의 운명은 아닙니까? 과거뿐 아니라 미래의 많은 사람들의 공동운명이 아닙니까? 그들과 우리의 운명은 뗄 수 없이 얽혀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기에 운명에의 순응은 오직 개인적인 순응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한 많은 사람들의 공동운명에의 순응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내가 내 개인적인 운명에 염려해도 됩니까? 내 운명이기도 하는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내가 염려해도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 운명에 염려해도 되겠습니까?
운명은 제게 개인적인 운명 이상입니다. 그러기에 운명은, 다른 사람의 운명에 비해 내 운명이 이 좋게 보인다 할지라도 언제나 좋은 운명은 아닙니다. 아마 힘든 운명으로 느껴지는 것이 나나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운명이지는 않겠습니까? 좋은 운명이 좋은 운명이기도 하고 나쁜 운명인 것처럼, 나쁜 운명도 좋은 운명도 아니고 나쁜 운명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나의 운명과 공동운명에 대해, 이 운명들의 위대함과 이 운명들을 안고 있는 창조적인 힘에 알맞는 내 내면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첫째, 이 운명에 그대로 동의하는 겸손입니다.
둘째, 운명이 내게 원하고 기대하는 바대로 하는 행동입니다.
셋째, 이 운명에 향하는 사랑과 더불어 내 운명을 손에 쥐고, 나를 이끌며 안고 있는 힘들에 향하는 사랑입니다.
넷째, 이 운명에의 귀의입니다. 무엇보다 움직임에 있기에 모든 것 뒤에서 작용하고 있는 창조적인 움직임과의 공명에 있는 헌신입니다.
이 헌신은 포기나 놓음보다 더 많습니다. 이 헌신은 행하는 귀의이기에, 발생하는 모든 것과 마지막까지 함께 작용하는 하나입니다.
▪ 당연히 우리는 유행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 하기에, 유행과 함께 하려고 노력합니다.
누구의 유행입니까? 우리의 길입니까? 우리에게 보여지는 유행은 혹시 나귀 눈 앞에 있는 당근은 아닙니까? 나귀가 다른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당근은 아닙니까? 만약 우리가 유행을 따르면, 우리는 어디에 머뭅니까?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다른 사람들의 분야에 머물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개입할 수도 없는 유행을 따르다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합니까? 유행을 따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최신 정보에 정통하고 있습니다. 그 정보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사정 거리 밖에 있는 것에 대해 함께 걱정합니다.
나는 이 정보를 통해 나 자신에 정통합니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잘 압니까? 사랑에서 정통하고 있습니까? 나를 정말 좋게 하는 것과 통하고 있습니까? 나를 좋게 하는 것에 내가 정통하고 있으면, 아마 나는 홀로 서 있기에 외롭습니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닙니다. 내 곁에 아마 사랑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좋게 하는 것에 정통하고 있는 사람이 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 아주 좋습니다. 그럼 우리는 지속되는 깊은 행복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 내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또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까? 우리는 자주 그런 질문을 우리에게 합니다. 우리에게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느 정도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결과를 선택할 자유를 갖습니까?
결과는 나의 결정과 선택으로 생깁니다만, 그 결과를 변경하거나, 그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제가 자유롭습니까?
내가 그 결과들에 순응하면 어떤 것이 변합니까? 내가 한 원래의 결정에서 어떤 것이 변하기나 합니까? 내가 내린 결정의 결과들에 순응함으로써, 처음엔 다른 결정이었으면 한 결정이, 단번에 위대한, 넒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 되지는 않습니까? 그 결정이 분명히 호의를 가진 다른 힘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힘들에 의해 안겨간 결정이 되지는 않습니까? 어찌 하든 그 결과는 내가 결정할 때 상상한 결과는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또는 내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까? 나는 자유롭습니까? 또는 나는 자유롭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해야 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자유롭기도 하고,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 우리는 두려움 없이 위험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공포를 이기면, 그 위험에 조심스럽고 결정적으로 우리를 세우도록 돕는 특별한 경각심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우리가 죽음을 평온하게 마주 볼 때 입니다. 생명도 생명이 존재하는 그대로 평온하게 마주 볼 때 입니다. 우리가 먼저 죽음에 눈을 감지 않고, 죽음을 깨어, 정신차려, 겁나서 물러서지 않고 마주하고 난 후에야 우리는 생명을 평온하게 마주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살고 싶어 합니다만, 그런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런 삶은 실재의 삶을 지속적으로 회피하는 삶이 아닙니까? 정말 산다는 것은 두려움을 마주한다는 것입니다. 죽음뿐 아니라 죽음에의 공포를 마주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생명엔 무엇이 일어납니까? 모든 순간이 값지고 값집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태롭기에 그렇습니다. 기이하게도 그 순간엔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직 앞과 뒤에만 두려움이 있습니다. 순간에 온전히 삽니다. 공포 없이 삽니다. 그렇다면 두려움 없는 삶이 있겠습니까? 순간에서 순간으로 사는 삶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 그럼 무엇이 사랑에 우리 마음을 열어, 우리는 사랑에 마음을 닫기보다 엽니까? 행복했던 사랑에의 추억이 마음을 열게 합니다. 아주 먼 과거의 행복했던 사랑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 행복했던 사랑의 추억에 흠뻑 빠집니다. 그러다 가끔 눈을 뜹니다. 그 추억은 아직도 우리 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눈은 빛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눈은 사랑으로 빛나기 시작합니다.
▪ 많은 것은, 제 시간이 되면, 저절로 지납니다. 어린시절은 그렇습니다. 가끔 어떤 사람을 향한 사랑도 다하면 그렇게 지납니다. 꿈도, 우리가 꿈이 물거품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갈게 되면 그렇게 저절로 사라집니다.
길이 목적지에 도달하면 끝나는 것처럼 우리 생애도 삶의 목적지인 죽음에서 끝납니다.
▪ 모든 것은 끊임없이 끝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단지 언제나 다르게 시작합니다. 아마 우리도 그렇지는 않습니까?
▪ 고통은 우리를 본질적으로 만듭니다.
여기에서 본질적이란, 아무 것도 아닌 것, 지난 것 그리고 일시적인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안됩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우리를 온전히 요구하는 것만이 본질적입니다. 그것만이 오직 거기 있음(순수 존재)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파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대로 아픔을 완화시킵니다. 그들이 자신 스스로를 그 고통에 맡기고, 스스로 서서, 그 고통이 그들을 이끌도록 우리는 해야 합니다- 그외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들의 고통과 그렇게 함께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우리를 그 고통에 맡기고, 그들과 함께 그 고통에 우리를 세우고, 그 고통이 그들과 함께 우리를 이끌게 합니다. 그럼 우리도 그들처럼 그 고통 앞에 거기 있습니다. 괴로워 하지 않고 오직 거기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고통과의 공명에서, 그 고통이 우리에게 요구하거나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간청하는 어떤 지시를 그 고통으로부터 받아야만, 우리는 그 고통이 원하는대로 그리고 그 고통이 우리를 돕는대로 행동합니다.
그럼 우리도 그 고통과 함께 _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 _ 본질적으로 돼, 고통처럼 우리도 오직 거기 있습니다.
▪ 죽음은 맡김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얼마나 깊이 갈지 알지 못하지만 죽음은 마지막 맡김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의식하면서 맡길 시간과 정신집중이 없이 갑자기 죽으면, 그의 마지막 맡김을 위해 정신집중된 완성이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죽은 자들은 아직 어떻게든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자들께 매달리고, 그들의 생명으로부터 어떤 것을 빼앗으며, 더 나아가 살아 있는 자들을 죽음으로 이끌기까지 합니다. 마치 살아 있는 자들과 함께 생명으로부터 아직 하다만 것을 늦게나마 끝마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럴 거라는 경험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에서 우리는 이 생각들에 대한 대답을 느낍니다.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대답을 느낍니다. 우리는 벌써 마지막 맡김에 우리 정신을 집중합니다. 단지 태도로써 말입니다. 이 태도에서 우리는 지금 벌써 많은 것들로부터 내면에서 거리를 두고, 마지막 놓음을 향해 정신집중 합니다. 단지 태도로써 말입니다. 이 태도에서 우리는 지금 벌써 많은 것들로부터 내면에서 거리를 두고, 마지막 놓음을 향해 정신집중합니다. 그럼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삶이 더 풍부해집니까? 아니면 더 빈약해 집니까? 우린 모든 면에서 더 자유롭고, 더 풀어져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모든 것에 고맙게 향하여, 저 깊이에서 모든 것과 평온에게 하나임을 느낍니다.
이 맡김은 벌써 하나의 효과를 갖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해도 될지, 혹은 멀리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맡김은 영혼에 _ 가끔 몸에도- 치유의 효과를 갖습니다.
우리가 벌써 이렇게 이 마지막 맡김에 정신집중하면, 아마도 우리에게 매달리려는 죽은 자들은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겁니다.
마지막 맡김을 향한 그들의 정신집중을 방해하는 아무 것도 그들은 찾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맡김에서 함께 데려갑니다.
▪ 감사는 신 앞에 그저 있음입니다. 신이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든지 또는 감추든지 신 앞에 그저 있음입니다. 감사는 깊은 예배입니다. 말없이,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 앞에 단지 있음입니다.
▪ 각 자아가 통찰을 통해 얽힘으로부터 풀릴 수도 있지만, 결코 초자아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오직 초자아의 요구와 공명에서 그리고 초자아가 원하는 것에 봉사함으로 가능합니다. 자아가 초자아의 법칙에 동의해야, 자아는 초자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 동의에서 자아는 그룹 초자아에의 의존성으로부터 풀어져 행동할 수 있는 여유를 갖습니다. 그 여유는 자아를, 다른 자아들뿐 아니라 다른 자아들의 권리와 간청에 연결하여 서로에게 가장 좋게 많은 자아들에게 봉사합니다. 반대로 이 그룹 초자아에게 대항은 더 강렬하게 우리를 초자아에게 넘깁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아는 정말 무엇입니까? 우리 자아는 무엇과 마지막으로 연결돼 있습니까? 또한 그룹 초자아는 무엇과 마지막으로 연결돼있습니까? 모든 생명과 움직이는 모든 것 뒤에서 작용하고 있는 창조적인 힘과 연결돼 있습니다
▪ 정말로 우리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자아의 정화가 필요합니다. 다른 자아에 잡혀진 상태에서 벗어나는 정화가 필요합니다. 그 다른 자아들은 우리 자아의 자리를 차지하여 우리 자아를 자신에게 잡아 끕니다. 전에 얽힘들이 있는 곳에서만 이 정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얽힘들도 정화에 봉사하기에, 얽힘들은 이 마지막 자아에 의해 원하여 집니다. 얽힘들은 이 마지막 자아에 대항 할 수 없습니다.
이 정화는 어디로 끕니까? 이 마지막 자아와 그 움직임과의 공명으로 끕니다. 아는 공명들로 끕니다. 이 자아에의 맡김이 우리 자아가 할 마지막 일입니다.
▪ 우리가 전생에 살았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앞선 생명의 연속입니까? 우리는 전생을 통해 우리에게 부족한 본질적인 어떤 것을 완성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어떤 경험을 축적합니까? 이런 상상을 하는 종교나 문화가 있는 걸 우리는 압니다.
여기에서 생각하고픈 것은 이 상상들이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선 개인적인 완성이 문제입니다. 우리와 여러 면에서 연결된 운명공동체와 상관 없이 개인적인 완성이 문제입니다. 많은 생명의 흐름에 있어서 각 개인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인류와 전체로서의 세계가 왼성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여기에서 직선으로 발전한다는 상상을,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 발전한다는 상상을 우리 뒤로 해야 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양함에서 모든 것은 존재하는 대로 완전합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방법대로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사라진 것도, 예를 들면 멸종된 종들도 완전했습니다. 창조적인 것은 결국 더 이상 될 수 없는 그런 힘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조적인 힘은, 자신이 완성시킨 것에서 더 이상 되어야 하고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벌써 지난 것에서 자신의 힘을 얻어야만 합니다. 창조적인 것이 서로 나란히 있다고 하는 것이 되어진 것의 다양함에 더 알맞습니다. 창조적인 것은 전에나 후에 완전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때 온전히 거기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지금 생명은 우리 전의 생명이나 후의 생명보다 더 많거나 또는 더 적거나 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같은 멜로디에 맞춰 춤추는 끝 없는 윤무입니다.
그럴 때 당연하게도 지난 것이 같이 현존하는 것처럼, 이미 지난 것에도 미래가 벌써 현존했습니다.
더 명확하게 생각해봅시다. 모든 각 생명체에서 나타나는 생명은 다른 생명체에서보다 한 생명체에 더 많이 거기 있을 수 있습니까? 생명이 나중에 있는 생명체에서보다 전에 있었던 생명체에서 더 적게 일을 수 있습니까? 생명이 우리의 전 생명에서 _ 그런 생명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_ 우리의 지금 생명이나 후의 생명에서보다 더 적게 있을 수 있습니까? 전 생명은 지금이나 후의 생명처럼 같은 생명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이 생명으로 들어감이, 즉 생명에서 스스로를 나타내고 있는 영적이고 창조적인 힘으로 들어감이 어떤 시간에 더 적거나 또는 더 많거나 하겠습니까? 또는 더 가깝거나 더 멀거나 하겠습니까? 내가 전생이나 후생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해서, 이 창조적인 힘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까? 내가 지금 모든 생명에 있는 이 영적인 움직임에 나를 맡기고 신뢰함으로, 나는 전과 후의 전체 생명과 공명에 있기에 생명과 하나이지는 않습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생명과 하나입니까? 혹은 내가 생명에 나를 맡김으로 나의 개인적인 것을 녹이기에, 나는 였을 뿐 아니라 되어지는 모든 것과 지금 벌써 완성되지는 않습니까?
▪ 우리 삶 뒤에 오는 것에 우리는 염려합니다. 우리는 없어집니까?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존재합니까? 우리는 기억됩니까? 우리의 업적이 남아 있어 그 업적에서 우리가 계속 삽니까?
이런 염려는 지금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칩니까? 우리의 염려로 우리가 그들을 방해하는 건 아닙니까? 우리를 그들 위에 놓는 건 아닙니까? 그들이 더 깊은 통찰, 더 큰 성공, 우리의 능력을 뒤로 하는 위대한 능력을 얻는 걸 우리가 방해하는 건 아닙니까? 우리의 염려로 우리의 삶이 우리가 죽은 후에도 그들의 삶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닙니까?
우리의 염려가 우리의 생명을 훨씬 넘어서는 창조적인 힘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우리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든지 그 힘에 의존돼 있고, 작고, 제한돼 있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염려로 우리를 그 힘 위에 놓고 어떤 것을 우리 손에 쥐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동안에도 우리의 그런 시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대도 말입니다. 우리가 만약 염려를 한다면, 그 힘에 대한 우리의 헌신, 신뢰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염려 없이 우리는 지금 벌써 없어졌으면서도 온전히 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명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전체로서의 생명과 우리가 공명에 와, 우리가 아직 사는 한 공명에 머물러- 그리고 종말에 우리에게 무엇이 발생하든 죽은 후에도 공명에 있습니다.
▪ 통찰과 주체적 포기를 통해 이뤄진 이별을 통해 우리는 더 많아집니다. 우리가 지난 인연들을 계속 존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 다른 것이 아래에 있어야만, 어떤 것은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이 위에 있어야만, 어떤 것은 아래에 있습니다. 인간에서의 위와 아래를 우리는 위에 있음이 더 좋고, 아래 있음이 더 나쁘다는 상상과 연결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래를 넘어 위로 가야 한다고 상상합니다. 위를 우리는 자주 증가와 능력으로, 아래를 감소와 실패로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는 아래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위에 있기 위해, 위는 아래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기에 아래는 위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아래가 없으면, 위는 근거가 없어져 붕괴합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위와 아래를 구별합니까? 이 구별은 누구에게 좋습니까? 아래가 향존하는 것이어서 안전한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행복은 어디에 머뭅니까? 위에 머뭅니까? 혹시 아래에 머물지는 않습니까?
우리 관계를 위해 무엇이 여기에서 풀림이겠습니까? 우리가 위에 있으면서 아래에, 아래에 있으면서 위에 있으면 될 것입니다. 그럼 위와 아래를 어떤 것도 연결하지 않습니다. 위에 있어도 안전하게 합니다.
영에게는 처음부터 위와 아래의 구별이 없습니다. 시간의 바퀴에서는 위와 아래가 쉼 없이 교대하기 때문입니다. 영은 위나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쉬고 있습니다. 위와 아래를 함께 벗어난 바퀴의 중심에 있습니다. 신도 우리를 위해 중심에서 쉬고 있습니다. 위와 아래에 똑같이 멀고 가깝게 교대 없이 중심에 있습니다.
▪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위험합니까? 새로운 생각입니다. 새로운 생각에 우리는 가장 많이 조심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생각에 목숨을 잃었습니까!
새로운 생각의 어떤 점이 그렇게 위험스럽게 합니까? 그 생각이 우리를 이제까지 안전하게 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는다는 두려움입니다.
▪ 부모와의 연결을 찾지 못해 고통스러워 하는 아이가 나중에 어떻게 하면 새로운 깊은 연결에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이 된 아이가 그 첫 번째 이별의 고통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면 극복될 수 있습니다. 또한 첫 연결된 행복의 기억을 다시 한번 영혼에 깊이 각인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자신께 사랑으로 새로운 연결을 제공하고 선물한 모든 사람들을 고맙게 사랑으로 새로운 연결을 제공하고 선물한 모든 사람들을 고맙게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무엇보다 깊은 사랑으로 두 팔을 벌리고 자신께 향하는 파트너를 고맙게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 지혜는 앎 이상입니다. 지혜는 생명과 공명에 있는 앎입니다. 생명에 봉사하고,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을 넓히고, 생명을 깊게 하는 것과 공명에 있는 앎입니다. 그러기에 지혜는 체험됩니다. 생명 경험과 함께 성장하기에, 결국 이뤄진 생명입니다.
▪ 누가 평화를 가져옵니까? 절연된 것을 다시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의도가 없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자신의 책임인 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아래에 있는 사람만이 그들의 평화에 봉사하고 평화를 가져옵니다.
▪ 바로 자신의 다양함에서 신은 자신의 무한함을 드러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의 무한함을 다양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전체는 하나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직 다양하게 신적인 것은 무한하게 그리고 동시에 전체로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 “나는 거기 있다.” 나는 어떻게 거기 있습니까? 순간에서 순간으로. 순간에서 순간으로 나는 거기에 있는 동시에 거기에 더 이상 없습니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나는 사라지면서 또한 새로 태어납니다. 그러기에 거기- 있음은 우리에게 오직 움직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우리가 서로 존경해야만,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있으면, 이 함께 있음에서 우리는 서로 다르기도 하지만 같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같다고 우리는 중히 여깁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을, 그가 우리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맞추려는 것을 우리는 포기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보다 더 좋지도, 더 나쁘지도 않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두처럼 단지 다를 뿐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모두처럼 독특하고 유일무이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줄 특별한 어떤 것을 가지며, 우리의 특별한 것을 그들과 나눠 그들께 봉사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특별한 것을 존중하여 그들로부터 그 특별한 것을 받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필요로 하기에 우리는 고맙게 받습니다. 또한 서로 함께 있는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 자신들께, 그들의 공단에, 그들의 운명에 놓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 자신의 것을, 우리 자신의 공간과 운명을 지키도록 요구합니다. 오직 모든 것이 자신으로서 서로 나란히 있어도 되기에, 모든 것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나란히 그리고 함께 있어도 된다면, 모두는 사랑을 위해 자유롭습니다. 이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함께 우리의 충족을 찾습니다. 이렇게 함께, 우리는 신 앞에서도 함께입니다.
▪ 평온은 긴장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 기다렸던 폭풍우나 사건 등 전입니다. 우리는 평온으로 그 사건이 완성돼길 기다립니다. 출생의 경우 등입니다. 이런 평온의 경우에 기다림이 끝나, 우리가 행동할 수 있고, 행동해야 하면 우리는 마침내 평온에 옵니다.
사건이 발생한 후에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행하면 우리는 마침내 긴장이 풀어져, 평안히 있을 수 있습니다.
자주 우리 영은 평온하지 못합니다. 우리 영이 찾는 어떤 것을, 예를 들면 하나의 풀림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풀림이 얻어지면, 영 뿐만 아니라 영과 함께 우리 몸도 평안해 합니다. 영과 함께 우리 몸도 불안해 하고 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심장(마음)의 평온은 어떠합니까? 언제 우리 마음이 평안해집니까? 심장의 갈망과 심장의 사랑이 온전히 평안해지는 목표에 도달하면, 마음은 평안해집니다.
그런데 모든 갈망은 충족될 수 없습니다. 아마 갈망이 너무 커, 우리의 갈망이 원하는 것을 그 자신이 갖는 모든 것을 다해도 이뤄줄 수 없는 사람을 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마음이 평안해집니까? 그의 갈망이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정말 충족될 수 있는 곳을 향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를 향하는 원초적 움직임은 오직 어머니에게서만 충족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배우자가 더 나아가 신이 어머니를 대신해 충족해야 한다고 해도 그 갈망은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은 평안해 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평온을 찾아 평온을 얻는 아주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마음은 마음이 갈망하는 것을 줍니다. 마음이 갈망하는 것을 사랑으로 줍니다. 그럼 기이하게도 마음은 여기에서 평안해집니다. 마음이 주는 것을 다시 마음으로 되돌아 오기 때문입니다. 이게 다른 길입니다. 우리가 주는 이 사랑은 순환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로부터 떠나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사랑을 진심으로 고마워 하면, 이 사랑의 순환은 완성됩니다. 이 고마움에서 우리의 마음은 가장 깊이 평온에 옵니다.
그러나 이 평온도 끝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고마움에서 우리 마음은 풍부해지기에, 흘러 넘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평온에서 나와 더 깊은 평온으로 이끄는 다름 순환 움직임이 시작합니다.
우리의 평온은 상승하는 능력이 있기에, 결코 그만두지 않습니다.
▪ 걱정 없는 사람은, 정말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걱정하게 둡니다. 그들의 걱정만이 정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생기게 합니다. 그들의 걱정도 한계에 다다릅니다. 그럼, 그들의 걱정은 걱정하게 하는 것을 좋게 하기보다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걱정으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자신의 소원에 맞게 좋게 되게 하려고 하면, 그런 걱정은 힘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의 걱정하는 것을, 우리의 걱정 그대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힘들에 대해 걱정 없이 있으면, 우리는 이 힘들과 함께 작용합니다. 즉, 우리가 그 힘들에게 걱정을 맡기면, 온전히 맡기면 작용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까? 혹, 이 순간에서야 우리는 어떤 것을 계속 가게 하여 새로운 문들을 여는 것을 정말 할 수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이 힘들과의 공명에서 행동하지 않든지 하면, 원래의 걱정은 걱정이 필요로 하는 활동할 공간을 갖습니다. 그리하여 걱정은 스스로 행동하게 됩니다.
이렇게 걱정 없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것이 옳아야 하고, 혹은 틀려야 한다는 우리의 상상들을 너머, 우리가 낯설은 것에게 열려져 있기에, 우리는 평온하게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 없이 그리고 열려져 있기에, 이 상황에서 우리는 성장합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걱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서장에 더 이상 방해를 하지 않기에, 그들도 우리처럼 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어 있는 사람들이나 죽어 있는 사람들의 운명에 걱정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하면서 스스로 질문합니다. 무엇보다 죽어 있는 사람들이 죽을 죄를 졌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들의 죄로 피해자가 되었다든지 하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걸 해도 됩니까? 할 수나 있습니까? 그들이 아직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우리가 알기나 합니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안다 해도, 우리가 그들께 그것을 줄 수나 있습니까? 우리가 그들의 운명의 주인입니까?
아마도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다.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 그 힘들이, 우리를 사로잡아 죽어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우리 스스로 뿐 만 아니라 살아 있거나 생존한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 힘들에 의해 원하여 졌다고 존중하여, 죽어 있는 자들뿐 아니라 그 힘들께도 영광을 돌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때입니다. 여기에서도 걱정 없이, 우리를 위해 그리고 그 힘들에 대해서도 걱정 없이, 이 걱정도 그 힘들의 손에 있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의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하면서, 그 미래를 저지하려고 성급하게 시도합니다. 여기에서도 무엇이 세계를 위해 좋거나 나쁘다는 자신들의 상상에 따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에 대해서도 걱정합니다. 신의 영광,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합니다. 걱정이란 외로운 나무가 기이한 꽃들을 피우게 하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결국 이 걱정들은 본래의 힘들에 대한 불신입니다. 그 힘들을 신뢰함에서 우리는 깨어 행동할 능력과 준비를 갖추고 걱정 없이 있습니다. 이 힘들과의 공명에선 그 행동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옳아, 그 힘들이 그 행동을 원한다고 증명하기에 걱정 없이 있습니다.
▪ 어떤 것이 끝이라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우리는 그것이 지나 끝나도록 허락하는 방법으로, 그것이 작용하도록 합니다. 그럼, 그것은 거기 있으면서 거기 더 이상 없습니다. 자신의 어떤 미래도 없는 것은 끝나도 됩니다. 미래가 있는 것은 아직 거기 있습니다. _ 다르게 거기 있습니다.
▪ 생각 안 하는이란 생각 없이란 믈은 아닙니다. 생각 안 하는이란 자신의 생각 없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소위 무심한 사람도 생각에 따라 움직입니다. 의식되지 않기에 아마 그를 je 강하게 조종하는 생각에 따라 움직입니다. 오직 우리의 자아만이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 안의 다른 어떤 것도 역시 생각합니다. 자주 이 생각은 의식된 생각이나 의지에 반대하여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목표들을 추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이 다른 생각은 우리를 생각 안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생각들을 아무런 생각 없이 더 강하게 따릅니다.
정말 광범위하게 생각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이 숨겨진 생각과 그 생각의 환상, 소원 그리고 목적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환성들과 소원들은 자주 비 이성적이기에 우리의 깨어 있고 이성적인 생각들의 명석함을 회피합니다. 이 의식되지 않는 생각에 생각 없이 있으면, 우리의 건강과 관계는 심한 훼손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질병이나 더 나아가 우리의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아무도 모르게 우리는 환상을 갖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가금 심사숙고한 목표들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다른 것이 그 목표들을 좌절키십니다. 우리 안의 다른 것은 다른 영적인 힘들과 연결돼 있어, 그 영적인 힘들에 의해 우리의 생각들에 반대하도록 이끄는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들에 대해 의지를 가지고 생각 없게 되어야 합니다. 이 아는 그리고 숨겨진 생각들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많은 잘못된 생각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예를 들면 명상이나 가족세우기 등으로 우리는 벗어납니다.
비슷한 방향을 신에 대한 생각들도 가리킵니다. 신에 대한 생각들은 가끔 감춰진 소원들과 목표들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그 중 많은 소원들과 목표들은 비이성적이고 생명에 적대적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그 소원들과 목표들을 검사하길 두려워 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우선 생각 없이 돼, 의지를 가지고 몇 이 생각들을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도 면밀하게 그 생각들이 우리 생명, 사랑 그리고 인간 공동체에 미치는 효과에 따라 판단하면 더 쉽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오는가에 따라 판단합니다.
좋은 생각 없음을 사람은 연습할 수 있습니다. 이 좋은 생각 없음은 동시에 생각하는 높은 능력입니다.
우리의 건강과 생명에 해를 입히는 다른 무의식적인 생각 없음을 사람은 옳은 생각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경험에 의해 효과가 검증된 생각은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에 대한 생각들을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신에 대한 어떤 생각들도 신적인 것에 이를수도 더 나아가 신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도 없기에, 우리는 그 모든 생각들을 전부 놓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생각 없이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정말 생각 그렇게 생각 없이 됩니까? 우리는 오직 생각들을 놓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놓지 않습니다. 생각 없이 우리는 신적인 것을 가장 순수하게 경험합니다.
▪ 무엇이 정말 최후에 옵니까? 없음입니다. 없음은 아주 여러 층으로 지각됩니다. 어떤 것이 지나서 우리를 더 이상 강요하지 않거나 아프게 하지 않으면, 그 없음은 기분 좋게 느껴집니다. 사랑에서 행복처럼, 좋은 어떤 것이 더 이 상 거기 없으면, 그 없음은 고통으로 체험됩니다.
여기에서 그 없음이 있어야 하지만 순수하게 없기에, 그 없음은 아주 장하여 있는 것처럼 체험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신도 많은 면에선 없음으로 체험됩니다. 우리가 신을 찾을 때, 신은 거기 없었으며, 우리가 그의 형벌을 두려워 했을 때도, 신은 거기 없었습니다. 한 편에서 그의 없음은 고통스러웠지만, 다른 편에서 그의 없음은 우리에게 안도의 숨을 쉬게 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없음을 있어야 하는데 없음으로 체험합니다.
만약 신이 최후에 온다면, 상이나 벌 주기 위해서 온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면 신이 거기 있습니까? 혹 신이 바로 여기에 없습니까? 현존하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신에 대한 우리의 상상이 있기에 없음이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신이 현존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원하는대로, 혹은 우리가 두려워 하는대로 신이 현존할 수 있습니까? 신은 우리가 닿지 않는 곳에 있진 않습니까?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없음에 있진 않습니까?
그렇다면 최후에 무엇이 옵니까? _ 다른 어떤 것이 옵니다.
▪ 전망은 지금 있습니다. 오직 지금 있습니다. 어떤 전망도 지금을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순간에 무엇이 발생할지, 우리의 시선엔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가 순간에만, 오직 순간에만 시선을 고정시킨다면, 어떤 충만과 경험이 우리의 시선과 체험에 다가옵니까? 순간에 마지막도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전망은 가깝게, 아주 가깝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전망은 두려움과 염려 없이, 또한 후회나 불쌍함 더 나아가 우리나 남에 대한 비난 없이 있습니다. 지금 전망은 순수합니다. 지난 어떤 것이나 그리고 미래의 어떤 것도 전망을 흐리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을,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감춰진 그럼에도 모든 순간에 우리에게 가깝게 그리고 거기 있는 마지막을, 향하는 우리의 시선도 그렇게 순수합니다. 이 정신집중 된 전망은 순간에 영원한 전망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전망이 무엇을 향할 수 있겠습니까? 전망은 언제나 거기 있습니다. 온전히 거기 있습니다. 충족돼 거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