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 뿌리 지키는 시제
삼베 생산지로 유명한 전라 남도 곡성군 석고면을 ‘돌실’이라 부르는데, 돌실은 ‘돌이실’이 줄어든 말이다. ‘돌이실’은 삼베 짜는 골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 짜는 세포(細布) 솜씨는, 비록 대마(大麻)로 짜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산 모시나 안동포 못지않게 알아준다.
지금의 석곡면은 광주에서 순천으로 빠지는 고속도로의 위엄에 깔려 보잘것없이 되어 버렸으나, 이곳을 아는 사람은 고속도로 휴게소에 잠깐 차를 세우고는 그 유명한 돼지 갈비 별미를 맛보며 한 잔 기울이고 가는 곳이다.
골짜기 마을에서 정성스레 기른 토종 돼지를 시루에 쪄 기름을 살짝 빼고는, 옛날 임금님께 진상하던 순창 고추장을 발라 구워 안주로 삼고, 물 맛 좋은 이곳 농주 한 사발을 들이키는 맛이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곳을 지나 이십 리쯤 가면 곡성과 순천 땅의 경계선이 나온다. 그곳 봉정리 높은 산에 시제(時祭)를 모시는 우리 선산(先山)이 있다. 파평 윤씨(坡平尹氏) 소정공파(沼靖公)가 낭랑군으로 흘러내려 뻗친 한 가지가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손들을 번창시켰던 것이다.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싸인 선산에서 바라보면 보성 강물이 앞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만 보이지 태안사 골짜기 압록으로 흘러 내려가는 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곳을 명당이라 했다.
이 묘에 성묘를 올리다 보면 어른들은 “예로부터 전해지는 말 중에 할아버지로부터 구대째 되는 자손 중에 나라를 건질 수 있는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 했다. 너희들이 바로 구대째 손이니 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시제를 모실 때는 순천에 사는 옥천 조씨들도 많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음식을 대접받기 위함이 아니라 선산에 묻힌 조상들과 사돈간이어서 참석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일년에 한 번 있는 양 성씨의 만남으로도 큰 뜻이 있었다.
봄날 한식(寒食) 때 선산에 성묘하고 나무 심고, 시월에는 온 문중이 모여 시제를 올렸으니 객지에 나간 자손들까지 다 모이는 날이었다. 물론아버지도 반드시 숙부들과 함께 아침 일찍부터 행차 준비를 했다. 이럴 때면 길가에 농부들은 아버지 형제분이 우애스럽게 선산에 가시는 모습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곤 했다.
제물 실은 수레를 삼쇠가 몰았는데, 졸랑졸랑 말방울 울리는 소리도 재미있고, 같이 걷다가 달구지에 올라타는 일도 재미있었다. 일가 친척 중에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그 길만은 꼭 걸어갔기 때문에 나도 자동차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날 도로가 생기고 교통이 편리하져 선산에 성묘가기는 더 쉬워졌지만 오히려 옛날보다 성묘 횟수는 줄어들고 있다.
보통 시제를 올리기 전에 산신제를 먼저 올린다. 자손 중에 한 사람만 산소 뒤로 올라가 적당한 자리에 제물을 차려 놓고 향불을 피워 연기를 피우고, 땅에는 술을 부어 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그것은 연기와 술로 하늘과 땅을 한 줄기 맥으로 이어 놓는다는 뜻이 있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 온 우리 조상들이었기에 산신을 주신(主神)으로 하여 먼저 제례를 올렸던 것이다.
시제에서 모시지 않고 집 안에서 제를 올리는 증조부모님, 조부모님 제상 앞에서 깨끗한 모래를 그릇에 담고, 그 가운데 상투만한 짚뭉치를 만들어 세워 놓고 분향을 하고 거기에 술을 붓는 것도 시제 때의 산신 제례와 같은 것으로 축소된 형태이다.
산신제를 지내고 나면 조상들의 각 묘 앞에서 정성껏 차례로 의례를 올렸다. 먼저 종손이 잔을 올리고 절을 한 후, 나이 순으로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축(祝)을 읽고 축문을 살라 바쳤다. 그리고 제물을 내려 복을 나누어 먹고 시제에 참석하지 못한 가족들에게 그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 음식을 나누어 보내기도 했다. 나무에 꽃이 피어 열매를 맺고, 땅에 떨어진 열매(씨)가 뿌리를 내리고, 다시 싹이 자라 큰 숲을 이룬다. 이렇든 한 문중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많은 자손을 내기 마련이다.
꽃을 꺾어 꽃병에 꽂으면 화려한 꽃은 볼 수 있지만 열매도 맺지 못하고 뿌리도 내리지 못한다. 나뭇가지를 꺾는 순간에 맥이 끊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 가지가 꽃병에 꽂혀 있을 때는 사랑받고 화려하지만, 어느 한계점에 이르면 생명이 끊어져 죽고 만다.
자연과 맥이 끊긴 뿌리 없는 꽃가지처럼 맥이 끊긴 자손, 곧 시제를 모르는 자손은 이미 자손이라 할 수 없으며, 시제에 참석할 줄 모르는 사람은 꽃 시장에 상품으로 묶여 있는 꺾어진 꽃가지와 같다. 조상에게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시류에 따라 돈도 벌고 벼슬도 하고 영화를 누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대에 그치고 만다. 꽃병에 꽂힌 꽃처럼 결국은 꽃병에서 죽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이다.
시제가 있었기에 문중이 있고, 죽보와 뼈대가 있기에 어디 데려다 놓아 뿌리내릴 수 있었던 자손이 우리 민족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