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4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주현절 4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1월 28일(주일)
요한복음 4:19-26
“지금 여기에서, 삶이 예배가 되기를!”
2024년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정한 주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평화∙선교 공동체”입니다. 이를테면 한 해를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예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예배(禮拜)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교회당에 나와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 듣는 것을 예배라고 알고 있습니다. 교회당에 나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만 알고 있어요.
과연 그럴까요?
예배는 생활로 이어지는 거예요.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를 생활에 적용하는 거예요. 예배 시간에 받은 말씀이 행동과 생활로 이어져야만 신앙과 삶이 건강해지는 거지요. 그러니까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되어야지요. 그럴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성화(聖化), 곧 예수의 인격으로 승화되는 거예요. 여기에는 반드시 의로운 삶이 되고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비로소 생명∙평화∙선교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거예요. 예배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될 때 우리 삶이 생명을 낳고 평화를 누리게 되지요. 그런 삶에 바로 예수가 드러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배가 삶으로 이어지지 않아요. 말씀이 삶에 녹아들지 않아요. 그러니까 “회개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항상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거지요.
예배는 먼저 인격적인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지요. 또한 세상과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와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하는 일 때문에, 사람들 때문에, 여러 가지 고민으로 힘들고 아프고 괴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배드리는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될 때 그분이 내 사정과 형편을 잘 아시니 들어 주시지 않을까요?
내가 상대방의 사정과 형편을 알고 그 사람도 나를 알 때 비로소 믿음과 신뢰가 쌓이게 되지요. 믿음과 신뢰가 쌓이면 인격적인 만남이 되지요. 이렇듯 예수와 인격적인 만남,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더욱 건강한 생활 신앙인이 될 수 있겠지요.
예수와 인격적인 만남은 죽음과 죄로부터 해방되는 거예요. 삶의 여러 문제에서 해결되는 거예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요. 고통, 아픔, 슬픔, 상처에서 치유되어요. 억압과 지배에서 자유를 얻게 되어요. 예수를 진정으로 만나면 해방되고 해결되고 치유되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게 구원이지요. 이렇게 예수와 참 만남이 이루어지면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이렇습니다.
먼저 ‘영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이에요. 성령은 나를 변화시켜요. 진리는 예수를 통해 계시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곧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거예요. 그런 예배는 어떤 제한이나 조건이 없어요. 여기에는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말하자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매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수와 인격적인 사귐으로 예배하고 있는지요?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녀로서 예배하고 있는지요?
현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예배자로서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자는 물음입니다.
혹시 예수와 전혀 상관없이 예수가 아닌 나를 위해 예배하고 있지 않은지요. 하나님이 아닌 나를 즐겁게 하는 예배는 아닌지요. 내가 1년 52주 빠지지 않고 열심히 예배를 드렸으니 모든 일이 다 잘 되고, 직장에서 승승장구(乘勝長驅)하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거라고 믿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예배에 참석한 분들은 그렇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예수가 아닌 나를 위해 예배하는 분들이 많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예배하고 있는지요?
항상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있는지, 날마다 예수와 사귐을 이어가고 있는지, 매일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지요.
냉철한 이성적 판단 없이 무조건 감성에 매달리는 예배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모르면 의심해 봐야 하고요. 궁금하면 질문해 봐야 해요. 의심하면 안 되고 무조건 믿어야 복 받는다는 말은 가짜 믿음입니다. 그렇게 믿고 예배한다면 그건 가짜 예배입니다. 하여 성서를 알고 이해해야만 진짜 믿음, 참된 예배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혹시라도 다른 지역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성서에 나오지 않는 말은 무조건 의심해 봐야 합니다. 질문을 해봐야 해요. 그래야만 예수를 위한, 하나님을 위해 참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 이런 설교를 들으신 적 있을까요?
“바쳤더니 주시더라! 매달리니 낫더라! 헌신하니 축복받았다! 기도하니 해결되더라! 주님만 보니 평화가 왔다! 마귀의 시험을 이겼다! 유혹을 이기고 승리했다!”-(“Christian Moral Ecology/신자의 도덕적 생태계, 박충구 교수의 페이스북에서)
결국, 내 이성을 부정하며 믿었더니 높아지고, 강해지고, 부자 되고, 건강해지고, 영생의 확신 받았다는 말씀은 삼박자 구원이에요. 이건 가짜 구원이에요. 어디 가서 이런 설교에 현혹되지 마세요. 하나님은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녜요. 뭐든지 무조건 들어주는 요술램프도 아녜요.
사실, 과거 한국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마치 도깨비방망이처럼, 요술램프처럼 뭐든지 해결해 주는 분으로 여겼던 게 아닐까요? 그러니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만사형통하고 뭐든지 해결되는 것으로 여겼으니까요.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놓쳐 버린 거예요. 생활신앙을 외면한 탓이에요.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를 생활로 이어가지 못한 탓이에요. 하여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과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겁니다. 아무리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고 섬겨도 항상 제자리걸음인 거지요.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예배하면 어떨까요?
내가 여행지를 먼저 공부하고 가면 아는 만큼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를 아는 만큼, 이해하는 만큼 신앙과 삶이 새로워질 거예요. 따라서 예배가 교회당에서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가 된다는 걸 발견하게 될 거예요. 바로 내게 주어진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 겁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동선을 따라가 봅시다. 그가 예수를 만남으로써 삶이 전혀 달라졌던 거예요. 어떻게, 왜 그의 삶이 변화되었는지 그 까닭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 당시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들에게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었지요. 예수 일행이 갈릴리로 여행하던 중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게 되었어요.
여기서 예수 일행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게 되었다는 건 본문에서 뭔가를 말하고 싶은 거예요. 곧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 앞에서는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단 뜻이에요. 유대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사마리아인보다 덜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하나님의 은총은 구분 없이 누리는 것임을 말하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총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겁니다.-(『관주∙해설 성경전서』, 독일성서공회 해설, 대한성서공회, P.199)
예수는 수가란 동네에서 물을 긷는 사마리아 여인과 마주해요. 물을 달라는 것으로 서로 대화가 시작됩니다. 물을 달라는 말에 여인은 반문해요.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서로 친하게 지내지 않는데 어찌하여 그것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9절)
여인의 반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에 예수는 자신이 생수(10절)라고 말해요. 다시 말해서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해요(14절). 그러나 여인은 앞으로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여인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해요. 이와 반면 예수는 여인의 속 마음까지도 꿰뚫어 봐요. 지금 남편이 없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어요.
여인은 속마음을 들켜버린 거예요. 그러니 당혹스러울 수밖에요. 하여 여인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예수가 여느 사람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건 유대인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인식(認識)이에요. 예수가 누구인지 어렴풋하게 알게 된 거예요. 하지만 온전히 아는 게 아녜요. 여인은 남편이 없다는 말에 얼른 화제를 바꿉니다. “주님, 제가 보니 당신은 예언자이십니다(19절).“
여인은 자기 신상에 관한 물음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나 봐요. 하여 여인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를 두고서 그동안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오래된 논쟁을 끌어들여 대화를 바꿔요.
여인은 자기 조상들이 예배드린 그리심산(신 11:29)과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을 언급해요. 그러나 예수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21절) 하면서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해요.
예수는 장소가 아니라 ‘때’을 말씀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거예요. 예배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말씀한 거예요.
사실, 유대인들에게 차별과 혐오를 받아온 터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동시에 예수의 말씀은 약속이지요. 여기서 나를 믿으라(21절)는 예수의 말씀은 그 약속을 확고히 하고 있어요.-(『요한복음서』, 이영헌 역주, 분도출판사, P.107)
장소가 아니라 “때”가 중요하다는 예수의 말씀은 반전이지요.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유대 사람들이나 예수의 말씀은 지금까지의 전통과 통념을 깨는 거예요.
지금까지 사마리아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배드렸던 거예요. 곧 그들의 예배가 진정 하나님께 드린 게 아니고 민족적∙정치적 명예심에서 드렸던 겁니다. 이를 예수가 지적한 거예요.
이와 반면 유대인들은 합법적인 예배를 드린 거예요. 그리고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온다는 것은 메시아가 유대인들 가운데서 나온다는 뜻입니다(22절). 이건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사 역할이 예수로 인해 다시 확인된 겁니다. 말하자면 구원은 예수의 인격 안에서 실현되는 거예요.
그런데 21절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이른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뉜/νῦν, 23절)입니다. 예수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임을 선포한 거예요.
사실, 때라고 하면 떠올리기 쉬운 게 종말의 때 아니면 메시아가 오실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바로 지금임을 강조한 거예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예배하고 있었는지, 예수가 과연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예배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뭔가 죄를 짓는 것 같았고 뭔가 마음이 불편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예배 장소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장소와 시간이 중요한 게 아녜요. 하나님을 예수처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는 거지요.
그렇다면 참된 예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야겠지요. 예수와 인격적인 만남, 곧 그분과 사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지금 예수와 함께 예배가 시작되는 거예요.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지금’, 곧 자신과 함께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밝힙니다. 이건 예수와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에요.
이제 사마리아 여인과 약속한 게 더욱 확고해졌어요(21절).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요 14:16~17) 그래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사실, ‘진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 자신을 가리켜요(14:6). 진리인 예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8:32).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진리인 예수와의 사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요 2:21)이기에 그렇습니다.
참된 예배는 날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거예요. 이건 내가 ‘하나님의 자녀’란 자의식을 잃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께 드릴 예배는 ‘지금’이라고 했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예수를 근거한 새로운 예배 방식입니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예수와 함께 드리는 거예요. 여기에는 어떤 제한이나 조건이 있을 수 없어요. 영과 진리 안에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배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던지 여기에는 차별이 없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지금’이란 말에는 시간과 관련된 ‘현재’, 또는 ‘즉각적으로’ 때를 뜻해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참된 예배는 주일날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로 머물러선 안 되겠지요. 매일 매일 예배로 이어져야 해요. 예배가 생활 속에 파고들어야 우리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로 변화되는 거지요.
일상에 주어진 모든 일이 예배의 자세가 되고 머무는 곳이 어디든지 예배의 때가 되어야지요. 주어진 하루하루 일상에서 말씀에 잇대어 살려고 애씁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고 부단히 힘써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실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와 함께 날마다 예배의 삶을 사는 거지요. 예배(禮拜)란 말을 한자로 풀어보면 온 정성을 다해 감사드린다는 뜻이에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받든다는 뜻일 겁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예배를 이렇게 말해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 12:1/표준새번역)
여기서 바울은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라 요청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어요.
몸을 하나님께 드리다(파리스테미/παρίστημι)에서 드리다 또는 바치다 하는 말은 구약의 제사 용어입니다.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리듯이 우리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의미입니다. 일상생활을 제물로 바치라는 비유예요.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여기서 몸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이에요. 바울은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몸은 삶 전체를 가리켜요. 그러니 하나님의 소유인 몸, 곧 삶 전체를 바치라는 거지요. 말하자면 우리 일상생활 전체를 헌신하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이어지는 거예요.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 또는 봉헌하라는 거지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힘쓰라는 거겠지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당한 예배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예수와 함께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겁니다.
날마다 예수와 사귐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일상생활이 바로 참된 예배가 되는 거예요.
“주님, 하루하루 주님과 뜨거운 사귐으로 살래요. 날마다 모든 일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싶어요. 하루하루 소망하는 저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니 부족하고 연약한 제 삶을 지금 받아 주세요.”
예배의 자세로 사는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간구와 고백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런 고백으로 살 때,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얻게 되지요. 큰 위로를 얻게 됩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큰 울림이 되고요. 그 말씀이 생활 속에서 나를 성숙하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참다운 예배, 합당한 예배를 삶 속에서 이어가는 예배자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도 남달라야 하겠지요. 그런 성도라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삶, 곧 예배가 무엇일까 늘 고민하게 될 거예요.
“지금 내 실존(實存), 곧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이것을 따져볼 때마다 예수와의 사귐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선명해질 겁니다.
이제 메시아가 오실 걸 기대하는 여인에게 예수는 “네게 말하는 내가 바로 그다.”(26절) 하면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힙니다. 이에 메시아 예수를 만난 여인은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언했습니다(39절). 이렇게 여인은 생각하고 결단하는 주체적 개인으로 우뚝 선 겁니다. 자의식을 갖게 된 거예요. 결국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와 인격적으로 만난 거예요.
그렇습니다. 참된 예배는 예수를 인격적인 만남으로 시작하고 예수가 구원자임을 증언하는 삶입니다. 말하자면 삶 전체가 예배인 거지요.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삶 전체가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요. 2024년 기장총회 주제처럼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평화∙선교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올 한 해 동안 예수와의 사귐이 끊어지지 않고 우리 삶 전체가 예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기도 / 자비하신 하나님!
2024년 올 한 해는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평화∙선교 공동체”를 이루게 하소서. 예수와의 사귐이 계속 이어지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 안에서 삶의 자리가 예수를 드러내고 예수를 증언하는 참된 예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