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보여행, 옛길 따라걷기 - 삼남대로 12 | |||||||||
어제 영산포부터 아흐레, 태인부터 나흘을 함께 하던 길동무가 떠났다. ”아쉽다.”만 연발하는 뒷모습에 ”길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작별인사가 묘한 여운을 남긴다. 도도하게 흐르는 금강을 뒤로하고 버스터미널 뒤 매산동 골목길로 가족의 발걸음을 시작한다.
사방팔방으로 뚫려있는 요즘의 마을을 들 때 공덕비와 서낭당의 위치는 길목을 찾는 실마리가 되기도 하는데, 공덕비는 원래 위치가 아닌 큰길을 좇아 옮겨지곤 하니 되레 혼란을 주기도 한다. 공덕비는 자치단체가 옮기기도 하지만, 후손이 옮기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서낭당은 공덕비와는 조금 다르다. 서낭당은 돌무더기, 나무, 장승 등으로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를 차지하였기에 서낭당이 있던 곳이 마을의 길목이 된다. 그러나 요즘은 남아 있지 않기에 도시화된 마을에서는 서낭당이나 장승이 있던 곳을 묻곤 한다. 매산동에서도 할머니 세 분에게 같은 물음을 하였더니, 공주대학교 앞의 매산마루를 가리키며 서낭당이 있던 곳이라 한다. 서낭당을 지나 고개랄 수도 없는 완만한 언덕을 내려와 일신삼거리에 닿으니 ‘일신역길’의 표지가 눈에 띄고 일신역(日新驛)이 있던 일신마을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고 일신역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는 못하고 있다. 관골마을은 서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데, 일신과 관골 모두 ‘일신역이 있었기에’라는 유래가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역이 있던 곳과 종사하던 사람이 살던 역마을을 뭉뚱그린 결과이다. 찰방역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일반 관아와 비슷했거나 더 크다고 추정하지만, 관아와 달리 역의 규모나 위치를 알려주는 곳은 거의 없다. 이렇듯 위치를 찾아냄이 쉽지 않으니 하루빨리 연세 드신 분들의 기억 찾기를 해야 하는데, 그나마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역의 흔적도 영원히 사라질지 모른다.
보통골에서 금강을 건넌 길손은 시목동을 거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관골마을로 이어졌으나 택지개발로 소멸하였기에 공주병원과 공주대학교로 잇는 당시의 소로를 대신하여야 하고, 음암진(陰巖津)을 공주철교로 건넌 길손은 전막교차로에서 관골마을로 향한다. 역의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일신마을을 찾았던 가족은 삼거리에서 조금 내려온 관골마을회관에서도 별 소득 없는 물음을 하고는 골목으로 들어 금강을 건너온 627번 찻길과 만난다. 공군예비군부대 일대의 하주막을 지난 삼남대로는 둑길을 따라 계속 이어야 하나 마땅한 길이 없는지라 의당으로 돌아나간다.
귀엽다는 표현이 제격일 정도로 깔끔하고 소담한 의당을 벗어나려다 ‘의당문화마을’이란 이정표가 눈길을 끌어 몇 걸음 옮겨본다. 동네는 ‘문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기에 이름만 그런가 하며 돌아서는데 가로수에 뭔가가 매달려있다. 다가가 보니 감이다. 감나무 가로수라니? 신기해서인지 뜻밖이어서인지 바라보는 가족의 눈초리도 제각각이다. 그리 크지도 않은 나무에는 제법 여문 감도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잘 익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동네의 여유로움이 포개진다. 노랫말처럼 지금이라도 서울의 을지로에 감나무를 심어보면 어떨까?
의당을 벗어나면서 주춤거린다. 여기부터 옛길은 소멸하였기에 수촌초등학교를 거치는 찻길을 이을까 망설인다. 그러나 망설임 뿐, 그나마 옛길의 흔적이 있는 들로 들어서 둑을 타기로 한다. 올라선 둑은 발목까지 휘감는 수풀이 성가시지만 나름의 상쾌함을 준다. 둑길을 20여 분 걷던 걸음은 개울로 내려가 내를 건너게 된다. 옛길도 들 가운데를 곧게 이어오다 이곳을 건넌다. 그런데 내에는 잠수교도 아닌 게 건너려면 건너보라 배짱을 부리니 이를 어쩐다. 바닥에는 차 한 대 지날 폭으로 시멘트를 깔았으니 분명 길이지만 자동차가 아닌 걸음은 길이랄 수 없고, 종아리까지 차는 물살도 제법이다. 둑을 계속 탈까 두리번거리는데, 위에서 삼태기를 든 청년이 고기잡이에 열중이다. 그렇다면, 물이 깨끗하다는 말이네? 신발 벗어! 내를 건널 때 물이 더러워 주저하고, 둘째로는 고르지 못한 바닥으로 맨발이 불편해서인데, 지금은 옛사람을 흉내 내기에 모두 적합하다. 물도 깨끗하여 미끄럽지도 않으니 혹사당하던 발바닥이 뜻밖의 호강이다. 어미와 아이는 고기잡이를 참견하다 물장난도 하더니 아이는 젖은 옷을 핑계로 아예 자맥질이다.
옛길을 찾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접하는 자료가 대동여지도인데, 지도를 볼 때 몇 가지 읽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읍치는 동그라미로 표시하여, 동그라미 하나는 읍성이 없고 동그라미가 겹이면 성이 있다는 말이다. 공주는 겹 동그라미이다. 물줄기는 하류에서 두 줄로 오르다 상류의 어느 지점부터 한 줄이 된다. 두 줄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뱃길이 중요했던 만큼 물줄기는 굽이대로 자세히 그려 놓았다. 길에는 거리를 표시하느라 10리마다 점을 찍었고, 고개는 높이만큼 짧게 찍어 걸음이나 시간을 가늠토록 하였다. 이런 정도에 봉수, 역, 곳집 등의 표를 참조하면 지도를 파악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특이한 점은 직선으로 처리한 길이다. ‘검은 먹으로 찍는 목판본에서 물줄기와 구분’하려고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손으로 그린 동여도도 마찬가지이기에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보다는 외길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들어서면 나가는 곳이 정해진 고속도로를 직선으로 그렸다고 헤맬 자동차는 없다. 대동여지도도 고속도로처럼 외길의 개념이라는 생각이다. 공주에서 차령까지도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하나뿐이었으니 ”이 길만 따라가세요.”라면 그만이듯. 이런 개념 없이 대동여지도를 보면 길이 물줄기와 겹치는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다. 굽이를 그대로 표시한 물줄기에 직선으로 길을 긋다 보니 실제는 강을 건너지 않는데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게 보인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도 길을 찾느라 단단히 골탕을 먹었다. 그뿐인가? 대동여지도는 정안천 서쪽의 광정을 동쪽에다 표시하였는데, 이런 때는 물줄기를 무시하고 길 중심으로 방향을 보아야 했지만 그대로 믿고 허우적거렸으니 ”대동여지도 엉터리야.”라는 타박이 절로 나오곤 했다. 물론 몰랐을 때라 그저 송구스러울 뿐. 그런데 정말 엉터리로 그린 곳이 있다. 그것도 대대적으로.
영남대로를 준비하며 부산지역의 땅이름 찾기에 들어갔다. 대동여지도는 해운대부터 해안을 따라 좌수영, 포이포, 감동포, 개운포, 초량왜관, 부산포, 두모포, 서평포, 다대포, 몰운대 순이다. 현대지도에도 모든 땅이름이 빠짐없이 있지만 갑작스런 미궁에 빠진다. ”으잉, 수영강 서쪽에 있는 좌수영이 오른쪽에 있네? 아니, 초량왜관과 감동포는 왜 이쪽에 있는 거야. 해운대 위의 이 물줄기는 뭐고? 그리고 보니 해안도 엉망이네? 대동여지도, 이거 순 엉터리 아냐!” 한마디로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다. 이전에 나온 해동지도나 읍지도는 정확하다. 모든 지도를 집대성한 고산자가 이를 모를 리 없다. 판각수의 실수일까? 글씨체를 찬찬히 보면 판각수가 두 명 이상임을 알 수 있고, 할배는 판각 재주는 없었을 테니 시키는 대로 했을 판각수의 실수는 아니다. 의문이 든다. 소설은 받아쓰기가 되지만 머릿속의 지도는 설명이 안 된다. 그렇다면, 판각수에게 무엇을 보고 새기라 하였을까? 또한, 대동여지도의 모본으로 알려진 동여도도 똑같으나 30여 년 전의 청구도에는 오류가 없다. 도대체 왜일까? 안팎의 정세에도 밝았을 고산자가 이렇게 지도를 만들었을 때는 분명 곡절이 있지 않았을까? 부산은 왜인들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임진왜란 때의 거점이었다. 그렇다면, 왜국을 견제하느라 일부러 엉망으로 그렸을까? 개인적인 추정이지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대동여지도를 만들고 난 10여 년 후, 왜국은 정한론을 앞세워 운양호사건부터 조선 침략을 시작하였고, 구한말 일본제국의 첩자가 침략용 한반도 지도를 만들면서 들고 다닌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에 놀랐다는 뒷얘기도 있기에 그렇게 믿고 싶다. 정말 그런 속셈이었다고? 그래서 후대에 엉터리라고 할 줄 알면서 동래지역을, 뒤죽박죽 태연자약하게 그렸다고? 할배는 산천을 모두 알아야 하고 평화로울 때는 백성과 나라의 경영을 위해, 적이 쳐들어왔을 때는 광폭한 무리를 무찌르는데 도울 것이라며 대동여지도를 만든 이유를 예언처럼 말씀하셨다. 대동여지도, 그런 할배를 믿고 싶다. 엉터리 고산자 할배를.
20초면 충분한 내를 1시간 넘게 건너고는 찻길 너머 인절미의 유래가 있는 목천리 어귀로 들로 들어선다. 한동안 옛길을 대신하는 들은 마을길로만 쓰이는 옛 찻길에게 넘겨주어 모로원(毛老院)이 있던 양달, 모란마을로 안내한다. 모란을 지나면서 새 길과 주거니 받거니 하다 피난길의 인조가 쉬어갔다는 석송리의 석송정(石松亭)에서 가족도 쉼을 한다. 쉴만하면 무조건 쉬어가는 원칙은 여전하다. 4시가 다가오는데 해는 여전히 뜨겁기만 하고 볼품없는 찻길은 점차 지루한데, 아이와 어미는 소곤소곤 깔깔, 희희낙락이다. 귀를 털어보니 ‘생각나는 낱말 찾기’를 하고 있다.
”읽고 싶은 책은?” ”만화책.” ”제일 느린 거.” ”달팽이. 아니다, 도보여행!” 어미에 이어 아이가 문제를 낸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거는?” ”바로 너, 기연이!” 돌아서며 아비가 답하니 가족의 한바탕 폭소는 자동차의 굉음도 뒤덮기에 충분하다. 뜨거운 해님도 부지런히 걸으라고 재촉하지만 빙그레 웃음 주는 여유는 잊지 않는다.
새 찻길을 걷던 걸음은 굴다리로 건넌 옛 찻길로 장원리의 궁원(弓院)으로 향한다. 활처럼 생겼다고 활원으로도 불리기도 하는 궁원은 맞은편 산기슭의 구활원에 있었는데 이곳 운궁리로 옮기면서 이름까지 따라왔다. 이곳에서 광정으로 가려면 보물리를 통해야 한다. 모든 들이 그렇지만 옛길은 남아있지 않으니 적당하게 갈라 하얀 모래 그대로인 정안천을 다시 만난다. 보물리는 내를 건너야하지만 다리가 없기에 호젓한 둑길을 이어 올라가는데, 앞선 아이와 어미가 갑자기 빨라지더니 이내 달음박질이다. 왜? 하며 고개 쳐든 아비도 냅다 뛴다. 우뚝한 미루나무. 그늘이닷! 예전의 둑에는 미루나무가 많았고, 들에 있던 둠벙에도 그늘이 있어 농부가 손도 씻고 참을 먹으며 쉬게 해주었지만 둑을 정비하고 바둑판 논으로 이조차 옛 풍경이 되어버렸다. 둑에서 만난 그늘도 처음인 듯싶다. 땀을 말리던 아내가 전화기를 꺼낸다. 오늘의 목적지로 잡은 광정에만 잘 곳이 있다 하고, 엊그제 무턱대고 여관을 찾았다가 낭패 볼 뻔했기에 확인부터 하려고.
아쉬운 쉼을 벗어난 오롯함은 정안천을 보통교로 건너 산기슭의 옛길을 찾아내 흙으로 이어가는데 끄트머리에서 여관이 불쑥 튀어나와 ”까꿍”하며 놀래준다. 위치를 아무리 설명해줘도 아리송하기만 했던 곳이. 자유촌 가족(jayucho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