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념비는 울주군 상북면 신축청사 앞에 세워졌으며, 2001년 12월 필자가 비문의 내용을 썼음
울산의 독립운동사 1
언양지역의 기미독립운동 강인수 (필자 姜仁秀::언양중학교 제9회졸업생 ) e-mail: songha320@hanmail.net)
1. 언양지역의 자연환경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언양지역은 신라 때는 거지화현이었으며, 고려 조선 때는 언양현 또는 언양군으로 존재하다가 1914년에 울산군에 합병되었다. 언양지역은 현(縣) 또는 군(郡)이란 행정단위로 약 1,200여 년 동안 존속해 왔다.1) 언양은 ‘양산․경주 지구대’의 중간지점이며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지역이다. 1919년 기미년의 도보교통시대에는 언양이 울산보다 경주와 양산에 왕래가 용이했다. 또한 언양에서 울산까지는 동류(東流)하는 태화강(泰和江)이 흐른다. 언양지역은 서북의 상북면과 동북의 두서, 두동면과 남의 삼남면과 중심지대인 언양읍으로 구성되어 울산광역시의 서부 5개 읍면이 하나의 지리 경제 문화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다. 지형적으로, 영남알프스라 불리는 해발 1,000m가 넘는 고헌산(1,063m), 가지산(1,240m), 운문산(1,200m), 능동산(982m), 간월산(1,083m), 신불산(1,209m), 사자산(1,189m)이 밀양과 청도 경주를 경계로 하고 있다. 또한 언양 경주를 관통하는 ‘형산강 지구대’가 형성되어 들판을 이루고 있다. 작은 평야지만 신불산 아래의 삼남벌과 태화강 상류의 상북들과 언양들을 이루고 있다. 거리상으로는 5개면의 중심지 언양에서 경주까지는 80리, 울산까지는 50리, 양산까지는 60리로 언양은 교통의 중심지다. 가지산에서 발원한 태화강은 상북들을 거쳐 언양들을 지나 울산으로 흐르고 있다. 울산의 태화강은 영남 알프스의 고헌산, 가지산, 능동산, 간월산, 신불산에서 흐르는 각각의 지천(支川)을 합류하여 흐른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운문재를 넘어 청도로, 석남재를 넘어 밀양으로 가는 험한 산길이 있었고, 양산과 경주와 울산으로는 개활지이어서 일정시대부터 신작로가 개통되어 있었다. 언양면 남부리에 2일과 7일에 열리는 5일장은 수백 년 간 존속되어 왔으며 울산 서부 5개면은 언양을 중심으로 1919년 당시에도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제는 가지산 터널이 완성되어 울밀선이 개통됨에 따라 밀양과도 교통이 아주 좋게 되었고, 2010년에 개통될 경부철도 KTX의 울산역이 언양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온대로 영남알프스에 인접한 지역은 한서(寒暑)의 차가 심한 편이다. 강수량은 평균 1,200mm을 상회하고 있다.2)
간월산 정상
언양성터
2. 언양지역의 사회적 배경 행정적으로, 언양은 신라시대는 거지화현(居只火縣)이었다. 거지화현은 현재의 상북면 길천리 지화(只火)마을에 현청이 있었다, 그 곳에는 만당갱분(萬堂江邊)이 있고 지금도 땅을 파면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신라 4대 탈해왕 때(서기 200년경) 거지화현이었다가 신라 경덕왕(서기 757)때 언양으로 현청이 옮겨졌다. 신라시대는 언양현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지키는 요새지역이기도 했다. 고려 현종 때에는 언양현으로 동래현과 함께 울주군에 속했다가 인종 때(1143) 울주로부터 분리되어 헌양현(獻陽縣)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시대는 언양현 헌양현 언양군으로 존속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언양은 울산도호부에 속했다가 광해군 때 (1612) 다시 언양현으로 독립했다. 조선시대 언양현의 현청은 언양읍성으로, 연산군 때(1500) 현감 이담룡 이 토성인 것을 석성으로 개축했다.3) 1895년에서 1914년까지 30년간은 언양군으로 존재하다가 1914년 3월1일 대대적인 행정조직의 개편 때 언양군은 언양면으로 격하되어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까지는 면(面)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2일과 7일에 열리는 5일 장터인 언양은 1919년 당시 울산군 서부 7개면(언양 두동 두서 중남 삼동 상남 하북)의 교통 경제의 중심지였다.
울산지역의 독립운동의 특성을 보면 첫째, 장날에 일어났다. 기미년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울산군의 세 지역 언양(2일 7일), 병영(3일 8일), 남창(3일 8일)이 모두 5일장이 서는 인구 집결지였다. 둘째, 일인(日人)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은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울산이나 방어진 장생포는 더 많은 인구 집결지였으나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원인은 일인의 거주가 많았기 때문이다. 1916년 12월말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인구 조사에 의하면, 독립운동이 일어난 언양면 8,661명, 병영면(하상면) 9,241명, 남창지역(온양면) 7,684명인데 비해, 만세운동이 없었던 울산지역(당시 부내면)은 11,034명, 방어진지역(당시 동면) 7,684명, 장생포지역(당시 대현면) 7,885명이었다. 당시 일인 거주자는 언양, 병영, 남창이 각각 46명, 24명, 6명인데 비해 울산, 방어진, 장생포의 일인거주자는 각각 540명, 1,305명, 456명으로 일인거주자가 월등히 많았다. 일인 거주자가 없는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했던 것이다.4) 참조로 언양지역의 당시 인구를 살펴보면, 두동면 5,732명, 두서면 6,554명, 언양면 8,661명, 하북면 3,670명, 상남면 3,865명, 중남면 3,458명, 삼동면 4,367명으로 언양지역의 총인구는 36,307명이었다.5) 교육기관은 언양 향교와 각 마을에 서당이 존재했고 신식교육기관으로는 언양보통학교 뿐이었다. 서원으로는 반구서원(정몽주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서원으로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근처에 위치, 숙종 때인 1712년에 설립), 치산서원(박제상을 기리기 위한 서원, 영조때 1745년 설립. 언양면 만화리) 둘 뿐이었다. 언양은 경주부에 소속된 적이 많았고 전통적으로 경주 문화권에 속했다. 언어 역시 경주 사투리와 비슷하고 특히 두동 두서면은 경주와 가까워 경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종교적으로 불교는 신라시대부터 성행하여 석남사를 비롯하여 그 외에 많은 암자들이 있다. 천주교는 상북면 길천리의 창녕 성씨들이 1790년 경 성철규 등이 신자였으며,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많은 교인들이 영남알프스의 산속으로 피난을 왔었고, 해주 오씨 가문과 경주 김씨 가문에 신자가 많았다. 오한우 김교희 등 여러분이 천주교의 지도자였다.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은 부모의 유전인자가 중요하지만 한 곳에 수백 수천 년을 살게 되면 인간은 그 지역의 산천과 닮게 된다. 지형적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주민들의 언어는 강한 경음과 격음을 가진 사투리가 많이 쓰이고 있다. 언양지역 주민의 성격은 전형적인 경상도 기질로 무뚝뚝하고 고집이 세다. 언양 작천정에 세워진 삼일독립운동사적비 3. 천도교와 기미독립운동 1) 천도교 사상과 저항정신 동학(東學, 天道敎)은 “사람이 곧 하늘”이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종지(宗旨)로 하는 민족종교로 그 근본 사상은 유불선(儒彿仙)의 합성이며 또한 민간신앙과 깊은 맥이 닿아 있다.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광제창생 (廣濟蒼生)․지상천국건설을 지표로 삼고 있다. 동학은 잔반 출신인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寓)에 의해 1860년에 창도되어 그 세력은 울산 연일 영해 영덕 영천 안동 대구 등 경상도로 파급되다가 1864년 교주 수운 최제우가 순교를 당하게 되자 그 세력은 전라 경기 강원도로 거세게 뻗어나갔다. 2세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시대에 이르러서 동학의 세력 확장에 힘쓴 결과 1894년 즈음에는 30만명을 넘는 신도를 확보하였다. 1894년의 남접(南接)의 두령 전봉준과 북접의 손병희 통령 그리고 교주 최시형에 의한 동학농민군의 봉기로 갑오농민전쟁(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관군과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은 패주를 거듭하여 거의 전멸하게 된다. 동학 내지 천도교의 기본사상은 1)인내천 사상 2)개벽사상 3)민족주의 4)민간신앙6) -이 넷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내천사상은 인간지상주의와 인간평등주의이며, 개벽사상은 개혁주의와 혁명주의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바로 항일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이 기미독립운동의 기본이 되었다. 동학이 일어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말기 특히 1850년대에 이르러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세도정치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종전의 유교 불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를 그 시대와 사회가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동학의 창도는 그 시대 민중의 구원의 길이 되기도 했다. 동학은 서학(천주교)에 대응하여 동학 곧 우리의 사상과 종교였다. 수운에 의해 저술된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東經大全)>과 한글가사인 <용담유사(龍潭遺詞)>란 경전의 간행과 배포로 수많은 신도를 확보하게 되었다. 제폭구민(除暴救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통한 지상천국건설의 동학 이념은 요원의 불길처럼 민중 속으로 번져 갔다. 이에 관아에서는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사교(邪敎) 죄로 체포하여 처형했다. 그러나 신도의 수는 더욱 많아지고, 2세 교주 최시형은 산골 마을에서 잠적생활을 하면서 포고활동을 감행했다. 또한 동학을 조직화하여 접(接)과 포(包)를 만들어 비밀결사처럼 단단히 뭉쳐나갔다. 1892년 봄의 보은취회(報恩聚會)에는 3만명의 신도가 모였다. 이 보은취회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감행된 최초의 민중에 의한 자발적인 민중집회였다. 이 시기에 동학은 관리로부터 수탈을 당하던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 세력이 강해져 녹두 전봉준 장군에 의해 무력화(武力化)되어 나갔다. 한편 충청도에서는 손병희 손천민 등에 의해 그 세력이 충청 경기 강원으로 뻗어나갔다. 1894년 이른 봄 전봉준 장군이 봉기하게 되고 5월에는 전라도 감영인 전주를 장악하게 된다. 전봉준을 중심한 남접의 세력은 교주 최시형을 중심한 북접세력과 손을 잡게 된다. 가을에는 남접과 북접 공동으로 기포(起包)하여 갑오농민전쟁을 일으켰다. ‘항일구국,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기치로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관군과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농민전쟁은 갑오년 12월에 끝났지만 항일저항 정신과 민족주의정신과 인간평등의 인내천사상은 백성들의 가슴속에 깊이 흐르게 되었다. 동학은 3세 교주 의암 손병희(義庵 孫秉熙)에 의해 친일적인 일진회의 이용구 송병준 등 60여인을 축출하고 1905년 천도교(天道敎)로 개명된다. 종교에만 전념한다는 교정분리(敎政分離) 약속으로 일본 통감부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얻게 된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천도교(동학)가 민족종교임을 알게 된 국민들은 관심이 높아져 가입자가 대폭 증가되었으니, 1910년에는 27,780호가 입교했고, 1911년 1월부터 5월까지에 4만여 호가 새로 입교하였으며, 평안도 함경도에 신자가 급증하였다. 1916년 경 천도교 신자수는 무려 100만명에 이르렀다. 1919년 기미년 당시 신자수는 2천만의 인구에 300만에 육박하였다.7) 제3세교주인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종하여 대혁신을 가했다.1906년 [만세보]와 1910년에는 [천도교월보]를 창간하고 교육사업에 관계하여 보성학교와 동덕학교를 설립했다. 이러한 사실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의 을미사변으로 의병활동이 강화되고 특히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인한 경술국치 때 우국지사들의 활동에 자극받은 바가 컸다.8) 1911년 의암 일행은 천도교의 성지 용담에 들렀으며 경주 황오리 전교실에서 설교를 했다. 이때 수행한 이는 총부의 간부들이요 뒷날 기미독립운동의 주요 인사들인 오세창(현기관장) 나용환(공선관장) 권동진(전제관장) 오지영(감사원장) 양한묵 (법도사) 등이었다. 1914년 제일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천도교에서는 <천도교구국단>이란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다. 천도교단은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종로 경운동88번지에 천도교대교당을 건립하여 건축 자금을 모았다. 1919년 1월 고종임금이 일제에 의해 독살되자 대대적인 민족저항운동을 준비하게 되었다. 천도교 재단인 중앙학교의 송진우 교장과 현상윤 선생과 보성학교 최린 교장이 손병희 교주를 찾아가 거사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다. 2월에는 이승훈 등의 기독교계에 운동자금을 지원하고 3대 종단의 민족대표를 규합했다 일제는 합병직후 조선총독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항일투쟁을 제압하기 위해 헌병에 의한 무단정치를 감행했다. 헌병사령관을 중앙의 경무총장에 임명하고, 헌병대장을 각도의 경무부장으로 임명하여 헌병과 경찰을 일원화했으며, 결사집회 금지 신문발행금지 독립운동가의 처단, 관리와 교원에게 제복착용과 긴 칼 곧 군도(軍刀)를 착용케 했다. 데라우치(寺內正毅)에 이어 육군대장 출신인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총독이 부임하여 더욱 강한 무단정치를 감행했다. 이러한 무단정치는 오히려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져오게 했다. 기미년 1월 권동진 오세창이 가세하여 최린 송진우 현상윤 등은 의암 손병희 교주가 머무는 상춘원에서 “독립선언운동을 대중화하고, 독립선언운동을 일원화하고, 독립선언운동을 비폭력으로 한다.”는 3대 독립운동의 방침을 세웠다. 이들은 평안도의 장로 이승훈 선생과 길선주 목사 그리고 서울의 감리교 함태영과 학생대표 박희도의 동조를 얻게 되었다. 기미년 1월말 손병희는 “고국민대회(告國民大會)”란 포고문을 통해 명성황후와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음을 전국에 알리고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민족자결주의와 약소민족 12개국의 독립도 알렸다. 2월 8일 동경유학생 백관수 최팔용 이광수 등에 의한 독립선언이 있었음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고종의 인산일(因山日: 3월3일)을 즈음하여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을 감안하여 3월 1일 정오를 거사일로 정했다. 보성출판사사장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2만 1천장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게 되었고,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송하고 만세를 불렀다. 33인의 민족대표에는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으로 구성되었다. 민족대표들이 일경에 의해 체포되자 곧 민중들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서울의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시기적으로 경제수탈 기관인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해 조선토지조사가 10년만인 1918년에 끝나게 되자, 법적인 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토지는 모두 국가의 소유가 되어 농민들은 토지를 반이나 빼앗기게 되었다. 토지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울분도 큰 자극제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9)
2) 울산교구의 설립 언양의 기미만세운동은 천도교가 그 주동역할을 했다. 천도교 울산교구가 울산에 설립되지 않고 언양지방에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언양군교구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개편으로 언양군이 없어지고 울산군에 병합되자 울산군교구로 명칭이 개정되었다. 울산군교구(언양군교구)는 간월산 아래 상남면(지금은 상북면) 거리(巨里) 마을에 세워졌다. 천도교 울산교구가 울산이나 언양에 세워지지 않고 서북 외따로 떨어진 산골 거리 마을에 세워졌다. 누구에 의해 세워졌으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원인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울산교구의 성립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중앙총부의 전도와 자극에 의한 것이요, 둘째는 경주 최씨 문중의 영향이며, 셋째는 상남면 면민의 자부심이며, 넷째는 피신하기 높은 산이 마을 뒤에 있다는 지리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첫째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현희 교수에 의하면 “울산군 상남면(현재의 울주군 상북면)에 천도교가 포교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9월 이후부터였다. 울산교구가 설치되어 교인을 포섭하면서 포교가 개시되었다. 따라서 교구가 생기고 초대교구장에 최해규(崔海圭)가 취임하였다가……."10) 로 되어 있다. 천도교 포교사 임명수(林明洙)가 간월산 줄기 오두산 아래 마을 상남면 거리(巨里)에 나타나 포교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포교사 임명수는 당시 단군교의 신자인 최해규를 만나게 되었다. 최해규는 임명수의 감화를 받아 천도교 교인이 되었다.11) 당시 울산교구의 포교일지인 “연원록”(淵源錄)12)과 울산교구의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한 비망록 비고장(備考帳)13)이 있다. 연원록에 의하면, 전도사 김문성 박지석 백봉기 등 3인이 울산군 울산면의 옥교동과 북정동에 거주하는 김소룡 차덕출 박금화 가족을 포교하였으며, 전도사 임명수가 언양면 송대리 거주 최해규와 그의 가족 (처 김규화 부 최석호 모 장석화 자 최학식 여 최학순)을 포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도사가 된 최해규는 하북면 산전리의 김교경(金敎慶)가족을, 김교경은 상남면 길천리의 이규천(李圭千) 가족과 중남면 신화리의 곽해진(郭海鎭) 가족을, 전도사 이규로(李圭璐: 상남면 거리 거주)는 상남면 길천리의 김정권 가족을, 전도사 곽해진은 중남면 교동리의 유철순(兪哲淳) 가족을 포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고장에 의하면 한 번 납입한 금액이 개인마다 1원에서 10원 정도인데 1910년 당시 살 한 가마에 10원이었다. 교구채무보상으로 납입한 액수는 26원이었다. 상당액이 독립군자금으로 상납했을 것이라고 보여 진다. 그렇다면 전도사 임명수는 어떤 분이었으며 어떻게 언양지방에 와서 포교를 하게 되었는지 <천도교창건록>14)과 <의암 손병희선생 전기>15) 에 의거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임명수의 출생지는 두만강 북안 간도의 작은 도시 두도구(豆導溝)이며 1900년에 입교하였고 도호(道號)는 설암(雪庵)이었다. 백두산 근처 장진 연길 등에서 포교활동을 하였고 부인은 김명화이다. 임명수는 접주 수접주를 역임했고 천도교 총부의 종법사, 감사원, 종리사 등 천도교의 요직에 근무했다. 그리고 1909년 12월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이 양산 내원사 적멸굴에서 49일간 독공할 때 동행을 한 분이기도 하다. 의암 선생의 전기에 의하면 “1909년 12월 20일부터 그 다음해까지 성지 순례를 위해 경주에서 통도사에 들러 49일 독공(篤工)을 하고 다시 양산 천성산의 적멸굴에 들러 49일 기도를 했다. (적멸굴은 수운 최제우가 독공을 한 곳으로 천도교에서는 성지로 여긴다.) 그때 수행한 사람은 임명수 박명선 윤구영 최준모 김상규 등이었다. 이들은 계곡 바위에 6명의 이름을 새겨 기념하였다.” 이때 임명수도 수행을 했으며 그 기간은 1909년 12월 20일부터 1910년 3월사이다. 일행은 경주를 거쳐 통도사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중간지점인 언양을 통과했을 것이고, 이때 언양면(송대리 404번지)에 거주한 최해규가 임명수를 만나 전도를 받았다고 보아진다. 임명수는 1910년 천도교중앙총부의 학무원이었고, 1911년에는 감사원장 대리, 1912년에는 감사원장, 1935년에는 고향 두도구 지방종리원장을 지냈다. 두도구는 독립투사들이 자주 드나들던 국경도시이며 만주의 유지 모임인 간민회에서 1918년 11월 “무오독립선언”을 하자 일본군이 용정 백자가 두도구에 군인을 상주시키기도 했던 곳이다. 이것을 감안하면 임명수는 민족의식이 남달리 강했으리라 보아진다. 천도교 경주군교구는 현재 황오동 229번지 있으며 1910년 1월 중앙총부의 정광조 종법사가 내려와 교구의 설립을 안내하여 그해 6월에 경주군교구를 설립하고 초대 교구장에 손병규 씨가 맡게 되었다. 의암 일행이 1908년부터 2년간 전국순례를 할 때 1910년 2월에 적멸굴을 탐방했고 귀로에 경주를 탐방했다. 이즈음 경주교구와 언양교구(울산교구)의 설립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아진다. 1910년에 천도교 언양군교구가 설립되고 최해규가 초대교구장이 되었다. 3년 후인 1913년에 김교경이 교구장을 물러 받아 제2대 교구장이 되었다. 김교경이 1913년 5월에 중앙총부(천도교대도주)로부터 언양군교구장으로 임명을 받았고 1914년의 행정개편에 따라 언양군이 없어지고 울산군에 통합되자 1914년 7월에 다시 울산교구장으로 유임 임명을 받았다.16) 우리는 이상의 기록에서 1910년에 최해규가 전도를 받아 울산교구(언양교구)를 세웠다는 결론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최해규는 천도교에 입교했을 것이며 언양지역에 상당한 신자가 있었기에 1910년에 교구를 세웠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김교경이 기미년 이후 계속 서울에 머물게 되자 1920년부터 중남 신화리에 거주하던 곽해진이 울산교구장을 대리하게 되었다. 다음은 둘째의 경우 곧 경주 최씨의 영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동학(천도교)은 경주 최씨 최진립의 7세손인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다. 수운 최제우는 조선 초기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을 지낸 최예(崔汭)의 후손으로 일명 사성파라 한다. 정무공 최진립은 임란 때 의병대장을 지내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는 공주 영장으로 청나라군과 싸워 전사한 애국의 장군으로 그 후손에 여러 명의 무관이 있었음을 보아 동학의 검결(劍訣: 동학경전의 하나인 용담유사에 실린 한글가사의 하나로 검무(劍舞)와 관계되는 내용)과 수운의 무적(武的)인 면은 가계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17) 사성공파 최예의 무덤과 재실이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에 있고,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무덤은 언양읍 반연리에 있으며 최진립의 친동생 육의당(六宜堂) 최계종(崔繼宗)의 무덤은 경주 석장동에 있다. 언양군교구(울산군교구)를 세워 초대 교구장이 된 최해규는 최계종의 11대 후손으로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해규가 언양면 송대에 살았고 한때는 한 마장 거리의 상남면 양등리에 살았던 것으로 보아 문중일에 관계하여 경주 최씨들과 왕래가 자주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당시로서는 언양이 경주문화권에 속했다. 동학이 사교(邪敎)로 인정을 받았을 때나 갑오농민전쟁 시대에는 유림들로부터 이단시 또는 도외시 되었겠지만 교정분리(敎政分離)의 원칙에 따른 천도교로 개명되고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락되고 망국의 비분강계 속의 우국인사들에게는 인간지상주의와 민족종교란 이념 때문에 친근감으로 여겨졌을 것이며 자연적으로 동학사상에 접근하게 되었을 것이다. 최해규의 11대 선조인 육의당(六宜堂) 최계종(崔繼宗:1570-1647)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숙부 최봉권과 형 정무공 최진립과 함게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 장군과 김언과 더불어 화왕산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선조 26년(1594)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정유재란(1597)에는 형 최진립 장군과 함께 울산성 전투에 공을 세웠다. 이들은 양반가문으로서 영화를 누리던 중 왜의 침입에 목숨 걸고 나섰다. 바로 귀족주의의 임무를 수행했다. 곧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프랑스어:Noblesse oblige)는,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보통 사회지도층이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의 단어이다.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뜻이 되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최진립과 최계종은 이조참판을 지낸 경주 만석군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아 귀족으로 살면서 전쟁이 일어나자 귀족의 임무를 다했다. 부 최경천(父 崔擎天)의 분재기(分財記)에 의하면 최계종에게 50간의 집과 노비 200명이 상속으로 물러주었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최계종은 서생포 첨사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다시 남포(藍浦: 충남의 서해안)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현재 말로 하면 명령불복종죄로 귀양살이를 했다. 귀양살이가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광해군 1년 (1619) 향리 근처(경주시 외동면 제대리)에 육의당이란 별장을 짓고 거기서 만년을 보냈다. 18) 최해규 씨는 추수가 끝난 음력 10월에는 묘제에 참석했을 것이다. 최해규 집(언양 송대)에서 11대조 육의당 최계종 무덤은 80리, 사성공 최예의 무덤은 50리, 정무공 최진립 무덤은 30리 상거이므로 모두 도보로 왕래가 가능한 곳이다. 최계종의 묘소는 경주시 석장동 서록(西麓: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근처)에 있다. 묘제는 매년 10월에 지내며 육의당(외동면 제대리 322번지소재, 시도유형문화재 제263호)의 향사(享祀)는 3월에 지낸다. 그리고 성균관사성을 지낸 사성공파의 시조 최예의 묘와 재실은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에 있다. 최예의 묘제 역시 시월에 지낸다. 그리고 정무공 최진립의 묘소는 언양면 반연리의 가막못안(현재 울산과학대 근처)에 있다. 최해규는 장남으로서 조상(부;錫浩 조부:寅壽 증조부:世仁) 묘소가 언양면 반연리 톳골에 있고 바로 곁에는 정무공 최진립장군의 묘소가 있으므로 많은 최씨 문중 사람들과 교유가 있었을 것이다. 최해규는 청년시절부터 천도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우국충정에서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여 한때는 단군교를 믿기도 했고 을사년(1905) 경에 천도교를 믿게 되었고, 1910년 이른 봄 서울에서 의암 손병희를 수행하여 내려온 전도사 임명수로부터 정식으로 전도를 받고 자문을 받아 1910년 9월에 천도교 언양군교구를 설립했다.19) 최해규의 처가는 상남면 길천리 김씨 가문이었으며 일시 상남면 양등 마을에 거주했지만 언양면 송대리에 주로 거주했다. 경주 석장동의 최계종 묘소나 시조묘 최예의 묘소도 하루 왕래길이다. 특히 정무공 묘소는 한나절 거리다. 장남으로서 최해규는 묘제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을 것이다. 경주 최씨인 최제우는 정무공 최진립(경주 최 부자의 1세)의 후손이고 2세 교주 최시형 역시 후손이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최제우가 사도난정죄로 처형당하고 동학이 핍박을 받던 갑오농민전쟁시기에는 예외겠지만 의암 손병희 교주 시대에 이르러 순수한 종교로 인정을 받아 그 간의 금기가 어느 정도 깨어졌을 것이고 오히려 일제시대 민족의식의 싹틈과 괘를 같이하여 민족종교인 천도교가 많은 신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후손들은 임란 때 의병을 일으킨 정무공과 육의당의 정신을 흠모했을 것이고 경주 최 부자의 최준이 의병들을 위해 많은 군자금을 비밀히 만주로 보냈던 것을 감안하면 최씨 문중의 모임에는 민족에 대한 애국심 내지 천도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을 것이다. 계종의 아들 8명의 우의를 기려 지어진 경주의 팔우정(지금은 그 자리가 팔우정 로터리로 되어있음)과 그 아들들이 지은 서악서원 그리고 교촌 최 부자 집안을 보더라도 경주 최씨의 후손들은 경주에서는 최고의 문벌이며 우국정신이 강한 가문이다.20) 그리고 울산교구가 경주와 왕래가 많았다는 것은, 1914년 9월에 종령110호에 의해 울산교구는 진주대교구에서 경주군대교구에 소속하게 되었다.21)기 때문이다.
셋째로, 1915년 6월초에 천도교 교인 김영걸이 교구장 김교경과 더불어 석수 함석헌(중남 수남리 거주)이 작천정 입구 바위에 천도교의 종지 人乃天(인내천)이란 세 글자를 새겼다. 이것은 천도교인들의 왕성한 활동의 일면을 보여주는 증거다. 넷째로 왜 하필 상남면 거리 마을에 세워졌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거리마을은 길천리와 한 마장 정도로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산골로 은신하기 좋은 곳이다. 현재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신불산 간월산 능동산 가지산 일대는 1860년 병인년 즈음의 천주교 박해 시대에 많은 천주교 교인들이 은거하던 곳이다. 간월공소 대재공소(일명 죽림굴) 살티공소 등에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가 몇 달간 머물기도 한 곳이다. 이러한 은신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능동산 아래 거리 마을에 언양교구(울산교구)가 설립된 것이다. 1910년 당시로는 천도교 역시 동학의 후신이기 때문에 일제는 항상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포교사 임명수는 백두산 유역의 산골을 다니며 포교했던 것처럼 영남 알프스의 산골 마을에서 포교를 시작했던 것 같다. 면사무소 마을을 피해 윗마을인 거리로 정했고 교회 부지는 거리 마을의 착실한 천도교 교인이요 부자인 이규로 교인이 땅을 제공하고 건축비의 반을 담당하게 된 것도 한 이유이다. 실제 교구 건물이 세워진 것은 1913년 9월이다. 4. 기미독립운동의 준비과정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한 울산교구장 김교경이 서울의 탑골공원의 3․1만세운동을 직접 지켜보고 울산교구의 교인들에게 독립신문과 국민회보의 기사를 편지와 함께 보내면서 곧 거사를 준비하라고 당부했다. 서신 내용은 “이번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려고 작성한 국서에 조선이 자원하여 합방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고종황제는 이와 같은 거짓말 문서에는 국새(임금의 도장)를 찍을 수 없다며 순종에게 날인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황제는 옥새를 찍어가려면 대한제국은 합방을 반대하였는데, 이완용 윤택영 조중응 등 7명이 임금에게 강압하여 문서에 옥새를 찍었다고 사실대로 고쳐 쓴 문서라야 옥새를 찍겠다면서 황제가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날 밤 일본인들이 고종황제를 독약으로 시해하였다.”22) 이 글을 본 울산교구의 천도교인들은 심한 충격에 사로잡혀 즉시 교인들을 소집하여 의논한 후 희문의숙 출신인 이규장을 서울로 보내어 지시를 받아오게 하였다. 이규장(李圭章:상남면 거리)은 교구당이 있는 마을에 사는 휘문의숙 출신의 청년으로(당시 28세) 상경하여 김교경 교구장(당시 49세. 하북면 산전리 거주. 산전리는 교구당이 있는 거리마을과는 불과 2km 거리다.)을 만나 그 간의 국내정세와 거사 준비에 대한 필요한 지시를 받아 울산교구로 돌아왔다. 최해규(초대교구장. 언양면 송대리), 곽해진(중남면 신화리), 이규천(상남면 길천리 지화), 유철순(중남면 교동리), 이무종(상남면 길천리), 이규로(상남면 거리), 이규장 등 7명은 비밀리 회의를 개최하고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유림측은 이무종 이외에 이규인(李圭寅) 등이 가세했다. 당시 울산교구에는 80여명의 교인들이 교구 발전을 위해 성금을 납부했는데 그 기록은 “비고장”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비고장은 이무종의 막내 동생인 이갑종 씨에 의해 전해져 왔다. 이들 7명은 교구가 있는 거리까지의 거리가 불과 반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사람들로 가장 먼 곳이 중남 신화리의 곽해진 교인인데 그도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이중 이무종과 이규인을 제외하고 다른 분들은 무두 천도교 교인이었다.23) 휘문의숙 동문인 이규장 이무종 두 사람이 총참획을 맡게 되었고, 이규장은 조직과 동원 연락을 맡았고, 이무종은 선언문 등사와 태극기 제작을 담당했다. 휘문의숙 동문인 황선운(黃善雲: 울산군 두동면 월평리)을 오게 하여 이무종과 같이 선언문과 태극기 제작에 동참하게 했다. 언양 장날인 4월2일을 행동개시일로 잡고 길천리 이무종의 사랑방을 본부로 삼았다. 이무종이 3월29일 자기 집에서 100미터 거리인 상남면 면사무소(길천리 825번지. 현재의 경로당 자리)에 밤중에 잠입하여 등사기를 훔쳐와 황선운과 둘이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새벽에 다시 면사무소에 갖다 놓았다. 태극기는 이규장과 황선운이 손수 한지에다 그려서 이를 대나무와 싸리나무를 사용하여 손잡이를 만들었다. 이무종은 자기 가족들도 모르게 비밀히 진행했다. 한편 이규인의 빈집에서 이무종 최해선(崔海璿:일명 允奉) 이규인 세 사람이 밤을 새워가면서 태극기 42개를 제작하기도 했다.24) 전국적인 독립운동 때문에 일제경찰은 사전예방 차원에서 요시찰 인물을 잡아들이는 예비검속령에 따라 몇몇 독립 인사를 예비 검거했다. 일제 경찰은 요시찰 인물인 최해규 최해선 형제와 중남면의 곽해진 유철순 들을 언양주재소로 구인해 갔으나 너무나 태연한 자세에 일경은 아무런 일이 없을 것으로 간주하여 모두를 돌려보냈다. 이에 더욱 의기가 충천한 이무종 이규장 이규인 이성영(상남면 양등리) 강경찬(상남면 길천리) 최해선 등은 4월1일 밤 밤을 지새우며 시위 때의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 의논하였다. 3월28일에 양산에서 2천여명의 농민 학생들이 헌병분견소와 군청 앞에서 만세를 불렀으며 4월1일은 양산 통도사 스님들 100여명이 부근 촌락민들과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이 전해져25) 이들은 더욱 고무되었다. 거사의 준비는 탑골공원의 3․1운동의 자극에 따라 천도교 교인이 중심이 되어 거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상남면 길천리 왼쪽 황토색 건물 뒤가 경로당(상남면 면사무소) 5. 기미독립운동과 언양 장날 4월2일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 1896년부터 장날은 양력으로 시행하게 됨에 한일합병 이후 전국의 5일장은 양력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언양 장날은 2일과 7일에 열렸다. 4월2일 언양 장날은 상쾌한 봄바람이 부는 청명한 날씨였다. 이른 아침부터 거사 주동인물 이무종(상남면 길천리), 이규인(상남면 길천리 지화), 이성영(상남면 양등리), 강경찬(상남면 길천리), 최해선(상남면 길천리), 이규경(상남면 길천리), 이종능(상남면 양등리) 등 7명은 언양면 남부리의 장터로 향했다. 본부를 장터 입구의 언양면 서부리 석남집(술집)에 정하고 태극기의 일부는 남부리의 문화상회에 맡겨두었다. 요원들은 11시에 만세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장터로 다니면서 알렸다. 울산군의 상남 하북 언양 두동 두서 중남 삼동면 그리고 양산군 하북면 등에서 모여든 장꾼은 11시에 접어들자 2천여 명이 모였다.26) 제일 먼저 김만출(일명 김제호. 중남면 교동리)이 위장하여 가지고 온 태극기를 장터의 청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등 교인들이 장판을 돌아다니며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태극기는 대개 장꾼들이 물건을 넣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망태기에 넣어 짚으로 덮었다고 한다.27) 기미를 알아챈 순사가 장터를 누비다가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있던 수남 마을의 정병한을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해 갔다. 이를 본 김성진(중남면 교동리 62세) 노인이 사태의 긴박함을 느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품속에 숨겨둔 태극기를 꺼낸 청년들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장꾼들은 태극기를 들고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갑자기 장판은 만세소리와 군중들의 태극기를 흔들며 지르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서태식(상남면 길천리), 신동목(삼동면 금곡리), 김정원(상남면 명촌리), 강기형(상남면 길천리), 김한준(상남면 거리), 김낙수(상남면 등억리) 등은 장꾼들을 향하여 “조선인이면 누구든 만세를 부르라.”고 고함치며 시위를 유도하였다. 장터는 곧장 감격과 흥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급거 상황을 파악한 일본 주재소(언양파출소) 순사와 울산본서(경찰서) 순사 수십 명은 주동자 몇 명을 주재소로 연행했다. 이에 노한 군중은 주재소로 몰려갔다. 석방을 요구하며 돌을 마구 던졌다. 시위군중들에 비해 수적으로 부족한 왜경은 급기야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재소는 지금의 언양초등학교 정문 근처에 있었으며 언양성벽 서편에 위치했다. 언양성은 1,500년 연산군 6년에 현감 이담룡이 삼국시대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둘레 3,064척 높이 13척이었다. 임란 때 흐무러진 것을 광해군때 9년(1647)년에 개수했다. 성벽 위에 올라간 왜경은 급기야 총을 발사했다. 만세를 부르던 군중에게 발포를 가하자 몇 명이 중상을 입게 되었다. 손입분(孫粒粉. 복득이 엄마, 언양면 남부리 거주))이란 여자가 가슴에 총상을 입고 비명을 질렀다. 김길천(金吉千. 곽해진의 모친. 중남면 신화리 거주)이란 여인이 다리에 총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 김종환(金鍾煥)은 총알이 손을 지나가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었다. 또한 정달조(鄭達祚)도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 외 경상까지 포함하여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언양주재소 앞은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러나 만세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장판에서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 만세소리가 들렸다. 이날 27명이 검거되었으니, 허황 신동목 박채우 강재주 이민연 김성진 이규경 김경수 김종백 김정수 김정욱 정태윤 윤봉수 손수복 서석룡 강문필 김운봉 정용득 최한홍 김한준 강기형 서태식 김낙수 김정원 이성영 최해선 이무종 등이다. 이들은 모두 울산경찰서로 끌려가 부산이나 대구에서 재판을 받아 형고를 치르게 되었다. 1년 6개월로부터 6개월의 감옥형이 18명, 태형이 13명, 집행유예가 2명으로 모두 32명이었다. 주동인물인 김교경 이규장 최해규 이규인 이규로 이규천 강경찬 곽해진 유철순 황선운 등 10명은 다행히 몸을 피하여 검거되지 않았다. 언양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 사람으로 밝혀진 사람은 모두 49명이다. 곧 검거된 32명, 피검을 면한 주동인물 10명, 중상자 4명, 그 외 적극 행동했으나 피신한 강경찬 이종능과 자진 출두한 김원룡이다. 장판에 나온 장꾼인 농민들이 적극 가담한데 반해 언양지역의 많은 천주교 신자는 거의가 가담마지 않았다. 그 당시 언양지역에는 직동과 살티와 순정에 천주교 공소가 있었다. 이들 공소는 이미 1860년대 천주교의 박해시대부터 있어왔다. 천주교 신자는 서울의 3․1운동에도 거의 관계하지 않았고 33인 민족대표에 한 사람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는 천주교 자체가 박해시대의 수난 때문에 정치와 손을 떼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일 것이다. 6. 기미독립 후의 상황 기미년 독립운동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생기고 국제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방향을 바꿨다. 무단통치를 하던 하세가와 총독이 물러나고 사이토(齋藤實) 총독이 부임하여 경찰헌병정치를 없애고 관리와 교원의 제복과 칼 착용을 중지시키고 학교설립과 신문발행을 허가했다. 이에 많은 우국지사들은 한정된 범위 안에서 신교육울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화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1) 주동인물의 행적 <울산유사>에는 최해규, 곽해진, 이규로, 이규천, 유철순, 이무종, 이규장 7명을 주동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주동 인물은 김교경 최해선 황선운 이규인을 첨가여 모두 11명이다.28) 11명 중에 천도교 교인이 9명으로 주축이 되었고 유림측인 이무종 이규인이 이에 합세하였다. 그러나 이 두 유림도 천도교와는 깊은 관계가 있다. 이무종의 친구요 휘문의숙 동기인 이규장이 천도교 신자요 이규인 역시 천도교에 여러 번 나갔으며 성금까지 한 번 낸 기록(비고장)이 있는 걸로 보아 천도교 교인들과는 깊은 관계였다.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형고를 살아 그 증거가 있는 분은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포장 등을 추서 받았지만, 기록상 그 공로가 밝혀지지 않은 김교경 최해규 곽해진 황선운 등 의사들은 아직도 아무런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규장, 이규인 의사(義士)는 늦게마마 2008년 8월 15일에 건국포장을 받게 되었다. 당시 기미년 언양 만세운동을 총 지휘하고 선언서와 각종의 신문을 보내어 만세운동을 유도한 당시의 교구장 김교경, 그리고 울산교구를 설립한 초대 교구장 최해규, 3대교구장인 곽해진이 사실상 거사의 지휘자였다. 단지 검거되지 않아 형고를 겪지 않았을 뿐이다. 최해규의 동생 최해선은 가장 열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년 6개월의 형고를 치렀는데 형님인 최해규의 감화로 열렬한 천도교인이 되었다. 유림으로 자기 집을 본부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총참획을 맡았던 이무종, 한양으로 상경하여 김교경 교구장으로부터 일체의 독립운동에 관한 문서를 받아와 독립만세를 실제적으로 지휘했던 청년 총참획의 이규장. 이무종(27세)과 이규장(28세)은 실제 독립운동의 독립지휘자였으며, 휘문의숙 동문이었다. 두동에 거주했던 황선운(24세)도 동문이어서 함께 이무종과 태극기를 손수 제작하고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또한 당시 면장의 아들로 자기의 빈집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이규인, 요시찰인물로 언양주재소에 예비검거되어 풀려난 최해규 최해선 곽해진 유철순 등이 주동인물이었다. 이하 주동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신변사실과 독립운동 때의 역할에 대해 언급해 보기로 한다.
양정학원 옆에 세워진 비
1) 김교경(金敎慶: 1871-1933) 울산군 하북면 산전리에서 탄생. 서당훈장을 하다가 1911년 천도교 전도사에 피임되고 1913년 최해규의 뒤를 이어 천도교 울산교구장이 되었다. 1917년 천도교중앙총부로부터 봉훈(奉訓: 천도교의 직책의 하나))직을 임명받았다. 1919년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여 서울에 머물면서 지하신문인 [독립신문]과 [국민회보]를 직접 필사하여 울산교구로 보냈으며 상경한 이규장에게 직접 필사한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 [국민회보](고종황제의 일본인에 의한 독살설의 내용 게재)를 전해 주며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천도교 지원 명분의 많은 독립자금을 천도교중앙총부로 보냈다. 언양만세운동으로 체포된 교인들이 김교경은 만세운동과 전혀 무관하다고 계속 주장함에 피검을 면할 수 있었다. <천도교약사>29)에 의하면 1921년 4월에 선거에 의해 천도교 의결기관인 의정원을 60명 선출함에 의정원으로 선출되었다. 1922년 동지들인 향사(鄕士) 이규로 김찬희 김석한 성충갑 김형한 이규천 등 여러분과 향리에 <양정학원>을 건립하여 후진들에게 신교육과 민족혼을 일깨웠다. 이후 서울에 거주하면서 중앙총부에서 순회교육 명분하에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중앙총부에서의 직위는 천도교연합회 선전부 간부였다. 자료30)에 의하면 김교경은 1929년(당시 58세)에서 1931년 사이에 서울의 천도교연합화에 머물면서 ‘천도교 교화’라는 명분으로 교인들을 대상으로 구국정신 함양과 항일운동에 앞장 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교경은 일본 고등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김교경은 계속 서울에 머물다 귀향한 후 별세하여 화장하였으며 무덤을 서지 않았다. 생김은 약간 큰 키에 등근 얼굴로 인자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31) 2) 이무종(李武鍾: 1893-1961)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에서 탄생했다. 길천 마을은 간월산 줄기 박얼산 아래의 들판 마을로 상남면(지금의 상북면 남서쪽)면사무소가 있었고, 이무종의 집은 마을의 뒤쪽 후리에 있었다. 기미년 당시 27세의 선비로, 본관은 경주 이씨, 선무원종공신 첨지중추원부사 이섬(李暹)의 후손이다. 길천리와 명촌리 양등리에 경주 이씨들이 여러 집 거주했으며 독립운동 때 이씨들인 길천리의 이규천 이규인 이규경 이성영 양등리의 이규장 이규로 등이 다 같은 문중 집안 사람들이었다. 이무종은 독립의사 이규천의 조카이기도 하다. 언양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독립선언서 등사와 태극기 제작 등을 같은 휘문의숙 동문인 이규장과 황선운과 더불어 만들었고 당일 만세 운동의 총참획이었다.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형고를 치렀다. 이무종 의사(義士)는 성격이 온건하면서도 조직적이고 치밀했다. <형사제판서 원본제10책>의 기록에 의하면, “피고 이무종은 대정8년(1919) 3월29일 경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에 거주하는 최윤봉(최해선)과 이규인와 더불어 각지로 다니며 조선독립시위 운동을 개시하고 4월2일 언양장날 시위가 있다는 것을 다수인에게 선동하였고 4월1일 밤 세 사람은 이규인 소유의 빈집에서 구한국국기 42개를 작성하여 다음날인 2일 장날 최윤봉 이규인 양인이 숨겨 가지고 언양읍내 남부리 시장에 도착하여 시장의 다수 군중에게 나누어 주어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게 했다. 독립만세를 높이 외친 피고 서태식 김낙원 신동목 김정원 강기형 김한준 등도 기를 잡고 만세를 높이 외쳐 안녕질서를 방해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옥 후 이무종 의사는 1922년 일본의 문화정책의 시대를 맞아 3․1운동의 동지들과 함께 흐무러진 천도교 교회 자리에 신식 교육기관인 “양정학원”을 세워짐에 이규장과 함께 교편을 잡았고, 1924년에는 이규장 최지형 곽해진 유철순 황선운 김원룡 김기오 윤동명과 “사시회(四時會)”를 만들어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조선일보 언양지국을 경영하기도 했다. 이무종 의사는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3) 최해규(崔海圭:1882-1958) 울산군 언양면 송대리에서 출생.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초시(初試)에 급제. 천도교 울산교구 초대교구장(1910-1933)을 지냈다. 경주 최씨 성균관사성을 지낸 최예(崔汭)의 후손이며, 최예의 6세손이 육의당 최계종(정무공 최진립의 동생)이며 최해규는 최계종의 11대 후손이다. 최계종은 형 최진립과 함께 의병장으로 출정하였으며 무관이 되어 정유재란에는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최해규는 언양면 송대리 404번지에 거주했으며 처가는 상남면 길천리이었고, 장남이어서 자주 최씨 문중 모임 특히 묘제나 향사에 참례하여 구국정신과 민족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나 직계인 육의당 최계종의 후손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선친(錫浩)과 조부(寅壽)와 증조(世仁)의 묘소가 언양면 반연리 톳골에 있고 바로 곁에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묘소가 있으므로 최씨 문중의 사람들과 교유가 많았다. 청년시절부터 천도교에 관심을 두었으며 우국충정에서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여 단군교를 믿기도 했다. 1910년 이른 봄 서울에서 의암 손병희를 수행하여 내려온 전도사 임명수로부터 정식으로 전도를 받고 자문을 받아 1910년 9월에 천도교 언양군교구를 설립했다. 최해규는 보통 키에 눈썹이 짙고 안광에 정기가 넘쳤다. 땅땅하고 다부지게 생겨 성격이 강직하고 힘이 장사고 음성이 우렁찼다. 미남형으로 술을 자셔도 흐트러짐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여 천도교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일시적으로 천도교 포교를 위해 윗마을인 상남면 양등리에 거주한 바도 있었다. 1913년 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등학교)를 설립할 때 언양향교 소유의 땅 82마지기를 인감 도용하여 매매하여 설립자금을 조달하자, 언양 유림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1914년 마지막 언양 군수 정철정이 좋은 일을 위해 한 일이니 용서하라고 중재에 나서 변호하기도 했다. 최해규는 이 일로 3년간 피신했으며 뒷날 위증죄(1917년 울산지청 판결 위증죄: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로 판결이 났지만 형고를 치르지는 않았다. 또한 상남면 등억리의 부자 김찬희에게 독립자금으로 쓰기 위해 논 15마지기를 양도 받은 바가 있다. 최해규는 의협적이고 선구자적인 기질을 타고 났다. 1915년에는 김교경을 대신하여 일시적으로 교구장에 재선임되기도 하였다.32) 상경했다가 귀향한 이규장으로부터 3․1 만세 소식을 듣자 같은 마을에 사는 이무종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동생 최해식 최해선과 같이 행동할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동생 최해선(일명 윤봉)은 거사 준비 중 2일전에 언양주재소에 요시찰인물로 곽해진 유철순 이규장 등과 예비 검거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4월2일의 언양만세운동에는 동생 해식 해선과 함께 삼형제가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고 특히 막내인 해선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감행했다. 최해규는 만세운동 후 그해 5월에 다시 거사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만주로 피신했다. 26년간 만주의 안동지방 탄산성 오룡배에서 생활하다가 광복과 더불어 귀국했다. 만주에서 생활하던 중 고향의 처자식을 돌볼 수 없어 현지에서 새 부인을 맞이하여 생활하였다.33)
4) 최해선(崔海璿): (1898-1934. 일명 允奉)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에 거주했다. 초대 천도교 울산교구장인 최해규의 아우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예비검거되어 풀려났으며 4월2일 만세운동 당일에 적극 참가한 죄로 체포되었다. “대정8년(1919) 3월29일 경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에 거주하는 이무종과 최윤봉(최해선) 이규인은 각지로 다니며 조선독립시위 운동을 개시하고 4월 2일 언양장날 시위가 있다는 것을 다수인에게 선동하였고 4월1일 밤 세 사람은 이규인 소유의 빈집에서 구한국국기 42개를 작성하여 다음날인 2일날 최윤봉 이규인 양인이 숨겨 가지고 언양읍내 남부리 시장에 도착하여 시장의 다수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게 했다. 독립만셀르 높이 외친 피고 서태식 김낙원 신동목 김정원 강기형 김한준 등도 기를 잡고 만세를 높이 외쳐 사회의 안녕질서를 방해했다.……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형고를 치렀다.”(<형사제판서원본제10책>-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 뒤에 최해규 최해식 두 형과 함께 만주 봉천 등으로 망명하여 36세에 병사하였다. 최해선은 키는 왜소한 편이지만 눈썹이 짙고 하관이 빠르고 성격이 강건했다. 최해선 의사에게는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5) 곽해진:(郭海鎭: 1888년생-) 울산군 중남면 신화리 마산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한학을 공부하여 학식이 뛰어났다. 1913년 경 전도사이요 울산교구장이었던 김교경에 의해 전도를 받고 천도교인이 되었으며 전도사 순회교사 강도원(講道員:교리강의담당) 등의 직책을 가졌다. 울주군 중남면 교동리의 유철순 가족과 중남면 신화리의 윤기호 가족 등을 전도 포교했다. 언양만세운동에 주동역할을 했었지만 몸을 피하여 검거를 면했다. 만세운동 때 어머니 김길천(金吉千) 여사가 왜경에 총에 다리관통상을 입고 얼마 후 운명하게 된 슬픔을 맞이했다. 독립운동 후 교구장 김교경이 서울에 머물며 중앙총부의 일을 하게 되자 곽해진은 1920년부터 울산교구장을 맡게 되었다.(<비고장>의 성미자금영수증에 기재됨) 기미년 이후 문화정책이 펼쳐지자 김효동(중남면 면장을 역임 1920-1925)과 합심하여 1923년 중남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김원룡(삼남면 면장 역임 1925-1932)과 윤동명이 교편을 잡았다. 곽해진은 인자한 선비형의 얼굴이며 봉사정신이 많아 1년 동안 삼남면 면장(1933-1934)을 맡으면서 작천정 벚꽃나무길 개설에 힘을 쏟았고 삼동면과 중남면이 1933년 통합되어 삼남면으로 될 때 호적부의 등본 정리에 공로가 많았다. 또한 3대 울산교구장으로 있을 때 삼동전교실34)과 중남전교실35)을 운영했다.36) 기미독립 후 곽해진은 삼남면 면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아드님 곽동하 씨가 중남교구장을 지냈다. 중남교구는 해방후 일본인이 사용하던 학교(삼남면 수남리)를 천도교인들이 인수하여 교회로 삼았다. 그 후 1986년에 삼남면 교동 27-3번지로 이사하여 현재의 언양교구가 되었다. 현재 천도교 언양교구는 기미년 독립에 관계했던 그 후손들이 신자로 있고 또한 천도교의 약세로 인해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다.37) 6) 이규장(李圭章:1892-1940) 울산군 상남면 거리에서 출생. 기미년 당시 28세. 경주 이씨로 선무원종공신 첨지중추원부사 이섬(李暹)의 후손이다.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천도교인 이규로에 의해 입교하였으며 착실한 천도교 교인으로 교구에서는 서기의 직책을 가졌다. 휘문의숙과 보성중학을 졸업했다. 고종 인산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여 서울에 머물던 울산교구장 김교경을 찾아가 김교경 교구장으로부터 독립운동 지시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같은 휘문의숙 출신인 이무종과 함께 언양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휘문의숙 동문인 이무종과 함께 언양만세운동의 총참획을 맡게 되었고 이규장은 조직과 동원 연락을 맡았고, 이무종은 선언문 등사와 태극기 제작을 담당했다. 휘문의숙 동문인 황선운(두동면 월평리)을 오게 하여 이 무종과 같이 선언문과 태극기 제작에 동참하게 했다. 일시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1922년 귀국하였으며 1924년에는 곽해진 이무종 최지형 황선운 유철순 김원룡 김기오 윤동명 등과 “사시회(四時會)”를 만들어 신문화운동을 전개했다. 이규장은 이무종과 함께 1927년 4월1일 길천보통학교가 개교할 때까지 1922년부터 5년간 양정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2008.8.15.) 7) 이규인(李圭寅1890-1927) 상남면 길천리 132번지 지화마을에서 출생했다. 경주 이씨로, 선무원종공신 첨지중추원부사 이섬(李暹)은 10대 선조이며, 상남면 면장 이조영의 아들이며 독립의사 이규경의 형이다. 8년간 피신생활을 하였던 관계로 가정은 피폐했다. 키가 장대했고 힘이 세었으며 성정이 호매(豪邁)하고 도량이 넓었다. 피신 때 부친상을 당해(이조영) 집에 왔을 때 도망치려고 일본 헌병 2명과 격투하던 중 한국인 순사보 이명동(李命同)으로부터 극심한 구타를 당했으나 힘이 장사라 세 사람을 물리치고 도망치자 일본 헌병이 총을 난사하였으나 무사히 도망을 쳤다. “피고 이규인은 대정8년(1919) 3월29일 경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에 거주하는 이무종 최윤봉(최해선)과 더불어 각지로 다니며 조선독립시위 운동을 개시하고 4월2일 언양 장날 시위가 있다는 것을 다수인에게 선동하였고 4월1일 밤 세 사람은 이규인 소유의 빈집에서 구한국국기 42개를 작성하여 다음날인 2일날 최윤봉 이규인 양인이 숨겨 가지고 언양읍내 남부리 시장에 도착하여 시장의 다수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독립만세를 높이 외친 피고 서태식 김낙원 신동목 김정원 강기형 김한준 등도 기를 잡고 만세를 높이 외쳐 안녕질서를 방해했다…….”(현사재판서 원본 10책) 이규인 의사는 38세를 일기로 운명하였으며 무덤은 울주군 상북면 도동리 송락골 기슭에 안장되어 있다. 2008년 8월 15일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38)
8) 이규천: (李圭千: 1876-1962)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에서 출생했다. 독립의사요 천도교인. 교구에서는 강도원 금융원 등의 직책을 가졌다. 경주 이씨로 선무원종공신 첨지중추원부사 이섬(李暹)의 후손으로, 언양만세 운동의 총참획인 이무종의 삼촌이다. 주동인물의 한 사람이었으나 피신하여 검거되지 않았다. 1922년 이규로 김찬희 김석한 성충갑 김형한 김교경 등과 폐쇄된 울산교구당을 중수하여 양정학원을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언양 작천정이 언양의 유력자인 오병선이 울산의 김홍조에게 매각하여 사유화하려하자 최지형 곽해진 유철순 등과 그 소유자를 설득하여 1926년에 공용화 시키는 것에 공이 많았다.39) 9) 황선운:(黃善雲 1896-1982) 본관은 평해이며 울산군 두동면 하월평 1001번지에서 출생. 울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휘문의숙을 졸업하였다. 귀향하여 동문인 이무종과 함께 4월2일 언양기미독립운동을 위해 며칠간 상남면 길천리의 이무종 집에 머물면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피검을 면하였으며 몇 해간 동지 김찬성(봉계리 거주)과 만주로 피신하였으며 독립단 조직을 하기도 했다. 보통 키에 약간 야윈 모습이지만 두뇌가 명석했다. 문화정책이 펼쳐지자 1923년 월평에 두동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고 박근기(朴根基)와 같이 교편을 잡았다. 그 외 통도사학당 교사, 두동강습소, 3․1학당 교사를 역임한 교육자이며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자녀들은 모두 서울로 이거하여 3남3녀 중 2남 황우익은 의학박사 4남 만익은 서울대교수를 역임했다.40)
10) 이규로(李圭璐: 1878-1920) 울산군 상남면 거리에서 출생. 경주 이씨로 선무원종공신 첨지중추원부사 이섬(李暹)의 후손으로 1911년에 입교했고 금융인(金融人:재정담당) 공선원(共宣員: 선전담당) 강도원(講道員:교리강의담당)의 직을 가졌다. 1913년 2월부터 9월까지 언양교구 건물을 지을 때 총 금액 560원 중에 256원을 기부한 부자였다. 당시 쌀 한 가마에 10원 정도였다. 착실한 천도교인으로 최해선(상남면 길천리) 이규장(상남면 거리) 김정권(상남면 길천리) 가족을 전도했다.41) 주동인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나 요행히 피신하여 형고를 면했다. 원래 경주 사람이었고 아들 대에 이르러 모두 경주로 이사를 갔다. 11) 유철순(兪哲淳: 1890년 생) 중남면 교동의 천도교인으로 곽해진의 포교로 가족이 입도하였으며 교구에서는 서기와 전제원(奠祭員: 의식 담당)의 직을 가졌다. 3․1 만세운동에 관계하였으며 열렬한 교인으로 중남면 교동리의 김기룡 가족 등을 포교하였다. 후덕하게 생긴 용모로 많은 신자를 확보했다. 그러나 후손의 대가 끊겨 자세한 행적을 알 길이 없으나 해방 후 삼남면 농민조합장을 역임한 바 있다.42) 2) 수형자들의 행적 언양만세운동의 수형자는 모두 32명으로, 1년 6개월이 2명, 1년이 4명 , 6개월이 11명 태형이 13명. 집행유예가 2명이었다. 이중 1년 형을 선고받은 이규장은 도망하여 형고를 치르지 않게 되었지만 피신생활로 가정이 파탄되었고, 1년 형을 받은 이규경은 이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6개월 형을 받은 김낙수(金洛綬. 상남면 등억리)는 옥중에서 순국했으며 뒷날 대통령표창을 받았다(91). 김성진(金聲振. 중남면 교동리)은 3년 집행유예를 받았지만 고문으로 불구의 몸이 되었고, 이민연(李民淵. 언양면 서부리)은 집행유예 1년을 언도받았다. (1)1년 6개월을 받은 분 이무종 최해선은 앞에서 언급되었으로 생략한다. (2)1년형을 받은 분 이규장 이규경 이성영 안덕원 4분으로, 이규장은 피신하여 형고를 면했고 이규경은 이심에서 무죄가 되었다. 이성영:(李成榮: 1879-1942) 경주 이씨로 선무원종공신 첨지중추원부사 이섬(李暹)의 후예. 상남면 길천리 출생. 언양의거 때(41세) 이무종 이규인 강경찬 최해선 이규경 등과 거사를 모의하고 진행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안덕원(安德元)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 거주. 4월2일 언양만세운동 때 피검되어 대구감옥에서 1년의 형고를 치렀다. (3)6개월 형고를 받은 분 11분 최한홍(崔翰鴻) 22세.언양면 서부리 박채우(朴采佑) 38세. 중남면 상천리 강재주(姜在周) 61세. 중남면 교동리 김정원(金正元) 40세. 상남면 명촌리 김제호(金濟浩) 晩出. 중남면 교동리 김한준(金漢俊) 36세. 상남면 거리) 강기형(姜琪馨) 44세. 상남면 길천리 대통령표창(95) 서태식(徐泰植) 30세. 상남면 길천리 대통령 표창(93) 허황(許惶) 46세. 언양면 송대리 신동목 김(辛東睦) 23세. 삼동면 금곡리 언양의거 후 김낙수와 함께 대구의거에 참가하였다가 대구형무소에서 1년형을 살고 나옴. 김낙수(金洛綏: 1880-1919) 상남면 등억리 출생. 언양의거에 참여하다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의 형을 박고 복역 중 6월에 옥중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애족장이 추서됨 (4)태형 형고를 겪은 분들, 13명. 김종백(金鍾百) 기미년 당시 29세. 상남면 양등리 출생 정용득(鄭龍得) 35세. 상남면 길천리 정태원(鄭泰源) 41세. 동래 정씨. 상남면 길천리 출생 강무경(姜武慶) 언양면 남부리 출생 김정욱(金正勖) 상남면 명촌리 출생 서석룡(徐錫龍) 21세. 언양면 남부리 출생 유득룡(劉?得龍) 상남면 상천리 출생 김경수(金卿洙) 28세. 상남면 명촌리 출생 윤봉수(尹鳳水) 30세. 언양면 직동리 출생 강문필(姜文必) 46세. 언양면 남부리 출생 김운봉(金雲峯) 25세. 언양면 남부리 출생 손수복(孫秀福) 44세. 언양면 송대리 출생 김송근(金松根) 상남면 길천리 출생 *김송근은 태형 60도, 그 외는 모두 태형 90도 3) 그외 참여자들의 행적 이규경(李圭庚:1902-1933) 천도교인 이규인의 동생. 언양의거에 참가하여 체포됨. 당시 18세. 부산지방법원에서 1년형의 선고를 받았으나 2심 때대구고법에서 무죄로 석방됨. 김원룡 동래고보 학생으로 150명과 단체의거에 참가하고 다음날 언양에 와서 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자진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가는 길에 일경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으로 천식병에 걸렸으며 삼일동지회의 발전에 헌신하다가 천식병으로 사망함. 김성진(金聲振) 62세. 중남면 교동리 출생. 집행유예 3년. 이민연(李民淵) 61세. 언양면 서부리 출생. 집행유예 1년. 강경찬(姜慶讚) 1900-1961 진주 강씨 찰방계현의 후손. 상남면 길천리 출생. 주동인물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으나 체포되지 않아 형고를 면했다. 이종능 (李鍾陵)1900-1991. 착실한 천도교 교인으로 언양 장날에 만세를 불렀으나 피신하여 형고를 면했다. 4) 중상자 손입분 (孫立粉) 흉부관통상. 복득이 엄마 언양면 남부리. 김길천(金吉千) 곽해진의 모친. 길천댁. 다리 관통상-중남면 신화리. 정달조(鄭達祚) 다리 관통상. 김종환(金鍾煥) 손가락 2개 절단. 총상-언양면 남부리. 이상에서 밝혀진 적극적인 독립운동자를 각 형태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형량별로는 1년6개월: 2명, 1년: 4명, 6개월: 11명, 태형: 13명, 집행유예: 2명으로 모두 32명이다. 둘째, 감옥별로는 대구감옥 10명-이무종 최해선 이성영 이규장 이규경 안덕원 최한홍 김정원 김락수 최윤봉 신동목은 2심판결 (대구고법) 부산감옥 8명-박채우 강재주 김재호 김한준 강기형 정용득 허황 이민연은 1심판결. 울산지원 14명-정용득 김성진 김정욱 김종백 정태원 강무경 서석룡 유득룡 김경수 윤봉수 강문필 김운봉 손수복 김송근은 태형. 셋째, 성씨별로는 경주 이씨와 경주 최씨가 많았다. 경주 이씨- 선무원종공신 첨지중추원부사 이섬(李暹)의 후예. 이무종 이규장 이성영 이규경, 이규로 이규천 이규인. 경주 최씨-최해규 최해식 최해선의 삼형제. 최한홍. 넷째, 지역별로는 상남면민이 제일 많았다. 그 중에도 길천리가 많았다. 상남면 길천리-이무종 이규인 이규천 이규경 정용득 강기형 정태원 서태식 김송근 강경찬 이규경 11명. 상남면 거리-이규로 이규장 김한준 이종능 4명. 상남면 명촌리-김정원 김정우 김경수 3명. 상남면 양등리- 이성형 김종백 2명. 상남면 등억리-김낙수 1 명. 언양 남부리-손입분 김종환 강무경 서석봉 강문필 김운봉 6명. 언양면 서부리-최한홍 이민연 2명. 언양면 송대-허황 손수복 2명. 언양면 직동리-윤봉수 1명. 중남면 교동리-김성진 김재호 강재주 3명. 중남면 상천리-유득룡 박채우2명. 중남면 신화리-김길천 곽해진 2명. 삼동면 금곡리-신동목 이상에서 상남면-21명. 언양면-11명. 중남-7명. 삼동면-2명. 양산군 상북면 소토-1명으로 상남년 길처리와 명촌리 양등리 사람이 주축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종교별로는 천도교가 중심이었다. ---------------------------------------------------------------------------------- *참조: 필자 姜仁秀: 현재 부경대학교 명예교수. 소설가 . cafe.daum <강인수 사랑방>을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