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성공회 의료, 고아 선교의 효시 노라(Nora) 수녀
○최초로 내한한 영국 성 베드로 수녀회 선교사들
양화진 외국인 묘지공원 북쪽 언덕에는 성공회(Anglican)선교사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1892년 영국 성 베드로수녀회 최초 선교사로 내한한 세분 수녀 묘지도 있다.
초대 주관(책임) 수녀로 최초의 고아원 운영과 의료선교에 헌신하다가 1919년 별세한 노라(Nora)수녀의 묘지가 그 첫 번째이다.
함께 내한한 6명의 간호 수녀 가운데 웹스터(Webster, 1856-1898) 협동수녀와 로이스(Lois, 1854-1899) 봉사수녀의 묘지가 두 번째 경우이다.
알마(Alma, 1906년 5월 6일 별세) 수녀의 경우는 강화의 십자산에 묻혀있으며, 양화진에 안장되지는 못했다.
성공회 묘역의 성역화 차원에서 앞으로 알마 수녀의 양화진 이장(또는 추모비 건립) 문제는 신중히 검토해 볼만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1889년, 영국 캔터베리 대교구에서 코프(Charles Corfe,고요한) 주교가 한국 최초의 주교로 선임되어 내한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수녀들의 도움 없이는 여성을 위한 선교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국 출발에 앞서 성 베드로 수녀회의 프란시스(Sarah Frances) 원장에게 한국에서 함께 선교할 수녀들의 파송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수녀의 파송을 편지로 거듭 요청했다.
한편 성 베드로 수녀원은 인도, 스리랑카 등으로부터 선교 수녀의 파송 요청을 받은바 있으나 코프 주교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최초의 해외 선교지역을 한국으로 선택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1891년 노라 수녀를 비롯한 로잘리(Rosalie), 마가렛타(Margaretta), 알마, 로이스, 웹스터 수녀 등 6명의 선교사가 선발되었다.
이들은 6개월간에 걸쳐 런던의 성 죠지병원과 메틀로폴리탄 병원에서 간호교육과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짐을 꾸려 1892년 6월 14일 ‘카타지’호 배편으로 알버트 항을 출발하여 긴 항해를 마치고 1892년 11월 4일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 베드로수녀회 수녀 선교사로 내한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낯설고 먼 땅에서 복음을 들고 내한한 초창기 수녀들은 개척과 도전의 삶이었다.
새로운 기후 풍토에 적응해야 했고, 시베리아 북서풍이 몰고 온 영하 20도의 추운 겨울을 견디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외로움을 이겨내어야 했고, 힘든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같은 환경에서 그들은 의료선교와 고아원 운영 등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면서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영국 성공회 최초의 고아원과 노라 수녀
대체로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고아원 사회복지사업은 1893년부터 성공회 주교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노라(Nora, 1849-1919) 수녀의 열정과 봉사로 서울 정동에서 이루어 졌다.
그는 초대 주관수녀로 고아원 운영과 강화지역 선교에 크게 기여했다.
1894년 3월, 고아 1명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수녀들은 버려진 아이들이 들어 올 때마다 세례를 주면서 돌아가며 대모(代母)가되었다.
세례는 그 자체의 목적도 있었지만 부모의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부쳐주는 의미도 있었다.
고아들은 1895년 5명에서 1899년에는 20명의 늘어났다.
이 무렵 고아원의 영아(嬰兒) 사망률은 50%정도나 되었기에 수녀들의 또 다른 봉사는 고아들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이었다.
많은 고아들이 양화진에 이름 없이 묻혔다.
수녀들은 양화진에 아이를 묻으면서 자신들도 그곳에 묻히고 싶어했다.
“주교 님께서 늘 묘지로 사용하겠다고 한 장소이다.
이곳은 프랑스 남부 피서지 ‘포’나, 이태리 남부 항구도시 ‘나폴리’보다 아름답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양화진을 표현했다.
1913년에는 24명의 고아를 양육했다.
그 후 1913년 7월 22일 고아원은 수원으로 옮겼다.
1921년 10월 30일 ‘피득보육원’이라는 고아원 전용 건물을 교동11번지에 건축했다.
그 후 이 고아원은 장애인 사업을 위하여 1973년 8월 30일 폐원된 것으로 전해진다.
선교 활동 시작 10년째 되는 1902년 성탄절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0년 전 성탄절에는 성탄의 기쁨을 나눌 사람이라곤 우리 집 중국인 요리사와 그 부인, 아이들 몇 명이었다.
그러나 이번 성탄절(1902)에는 많은 교인들과 세례 준비 자로 교회가 꽉 찼고, 또 오후에는 여자들과 고아들을 데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노라 수녀는 초창기 제1대 주관(감독) 수녀로서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수녀들을 이끄는 책임자로서 헌신했다.
1919년 11월 30일 18년간의 선교활동을 끝내고 암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성공회구역 차-4)에 안장되었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09-05 (119 호)
주) '대한성공회 성가수도회 사진으로 보는 80년' 에는 1892년 내한한 수녀님은 5명으로 나오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노라 (Nora, 1841. 2. 3 생, 1919년 한국에서 별세)
로잘리 (Rosalie, 1843. 3.16 생, 1919 이한 귀국)
마가렛타(Margaretta, 1859. 8.20 생, 1909 이한 귀국)
알마 (Alma, 1854.10.31 생, 1906년 5월 6일 한국에서 별세)
로이스 (Lois, 1855. 3.27 생, 1899년 한국에서 별세)
* 위 본문 글에는 노라 수녀의 출생이 1949 년으로 되어 있으나 성가수도회 책자에는 1841.2.3일 생으로 되어 있으며,
로이스 수녀의 출생이 1854 년으로 되어 있으나 성가수도회 책자에는 1855.3.27일 생으로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