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질녀가 출가하겠다고 월내를 찾아왔다. 언니가 되는 점순 씨는 큰스님 시봉을 하며 월내에서 1년여를 살다가 시집을 가버렸다. 절로 출가하려는가 하고 기대를 가졌지만, 업연에 끌려 속가로 나갔다. 그런 뒤여서 질녀의 출가를 더 반가워하신 것 같다.
질녀는 ‘후불(後不)’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딸 많은 집이라 더 이상 딸을 낳지 않게 해달라는 염원이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 후불이를 구경시켜 준다고 데리고 간 곳이 울산 목도였다. 그날은 큰스님과 함께 기차, 버스, 배의 순서로 갈아타며 목도에 도착했다. 모래사장에서 300m 떨어진 곳이라 이내 섬에 닿았다.
목도는 눈처럼 생겼다 해서 ‘눈 섬’이라고도 부른다. 춘백, 동백, 후박, 사철, 다정큼, 송악 등 상록수종이 많아 1962년 천연기념물 65호로 지정된 섬이다. 동물과 꽃, 나무 등 자연을 사랑하시는 큰스님이 특별히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택한 곳이다. 목도의 상록수림은 예부터 유명해 관광객이 들끓었다. 큰스님과 간 날도 사람이 엄청 많았다. 섬에 있는 유일한 건물인 춘해사라는 절에는 나이 든 대처승이 살고 있었다. 노스님과 큰스님은 잘 아는 사이인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섬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가려고 하니까 점심을 먹고 가라고 노스님이 붙잡았다. 큰스님은 끝까지 사양하고 섬을 떠났다.
막상 모래사장에 내리고 보니 밥을 사 먹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겨우 찾은 곳이 찐빵집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공교롭게도 찐빵을 찌지 않아 그나마도 사 먹지 못했다. 배는 고파오고 여기저기 헤매다 보니 ‘오뎅’이라고 붉게 쓴 글씨가 뿌연 유리창에 희미하게 보이는 집이 보였다. 들어가 보니 판자로 만든 탁자가 두 개 놓인 허름한 가게였다. 큰 냄비에 어묵 국물이 설설 끓고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골라보았다. 마침 떡가래도 있고 푹 무른 무가 있어 어묵 국물과 함께 큰스님께 갔다 드렸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신 큰스님께서 맛이 이상했든지 물었다.
“이거 무신 국물이고? 참 시원타. 느그가 묵는 건 뭐꼬?” 같이 따라갔던 월해 스님이 얼른 말을 받았다. “큰스님, 이거요. 밀가루로 만든 거라 우리가 먹어도 됩니다.” “그래, 그라마 나도 좀 도고.” 하는 수 없이 어묵을 몇 개 건져다 드렸다. 큰스님은 정말로 밀가루로 만든 먹을거리로 알고 맛있게 드셨다. 물론 따라갔던 우리 셋도 잘 먹었다. 후불이는 우리가 하는 짓이 우스웠던지 계속 쿡쿡대며 웃었다. 들킬지 봐 마음 졸이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후불이는 며칠간 월내 있더니 힘들다고 떠났다. 큰스님의 낙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큰스님이 열반한 뒤에 다시 와서 정혜라는 비구니가 돼 제방에서 입승도 사는 착실한 스님이 돼 정진에 매진했다. 잘 살더니 몇 해 전 암이라는 병에 걸려 이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 은사 스님이신 혜해 스님은 정혜 스님만 보면 이렇게 말했다. “야야, 정혜야, 큰스님 계실 때 출가했더라면 참말로 좋아하셨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럴 때마다 정혜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큰스님이 열반하신 뒤, 목도의 기억을 되살리러 가고 싶었다. 가보려고 하니 1992년부터 20년간 일반인 출입 금지가 돼 있었다. 상록수림을 보호하기 위해 문화재청이 정한 것이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려고 2021년까지 더 연장됐다고 하니 다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불교신문3179호/2016년2월24일자]
법념스님 경주 흥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