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를 찾아서
《님》과 함께…
2007년 5월 26일 토요일 오전 9시30분. 수필가 박종숙 선생님 댁에서 나와 정든 도시 춘천과 눈인사를 하면서 박선생님 차에 올랐다. 차에 기름부터 가득 채우고선 박영희 박봄심 시인과 더불어 우리 넷이 여행길에 나섰다.
춘천에서 속초지역으로 가는 길에 만해 마을에 들렀다. 만해는 한국의 대표적 시인 한용운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만해 마을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들의 서예 작품을 감상하고 그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대학 시절의 일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 교실 뒤의 벽보란에 《님의 침묵》을 써놓은 글이 있었다. 10분 휴식 시간이든가 혹은 조금 일찍 교실에 들어간 날에는《님의 침묵》을 읽으면서 강의 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를 깨치는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것을 염려하는것과 같이, 떠날 때에 만날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일부
그 때는 그냥 글이 좋아 읽었을 뿐 작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했는데 이렇게《님의 침묵》의 작자 한용운을 만나다니?! 끓어오르는 격정에 가슴이 설레였다.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만해마을에서는 한용운 시인의 시 속에서 살아숨쉬던《님》도 함께 살아 숨쉬는것을 만날 수 있었다. 여행 첫 코스부터 감동의 물결이었다. 박씨 세분 선생님께 너무 너무 고맙고 감사하여 뭐라 이루 말할 수 없어 그냥 한용운 시인의《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님》과 박씨 세분 선생님을 가슴에 담아 오래오래 기억하리라.
이색적인 조각 전시장
고성군으로 가는 길에 인제군에 있는 조각전시장에 들어갔다. 나무로 조각을 해 놓았는데 깎아 놓은 장승들이 다른데와는 유별나게 드러난 남자였다. 너무 적나라하여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였다. 그런 조각품들을 난생 처음 보는지라 흥미로왔다.
박종숙 수필가님의 말에 의하면 남근은 원래 다산(多産)과 다복(多福) 을 상징하는것이란다. 아이를 많이 낳아서 잘 살라는 뜻인데 한국 삼척에 가면 남근 공원도 있고 전통민속행사에 가끔 남근 깎기 대회를 열 때도 있다는것이다
인도 카쥬라호(에로스 사원)에 가면 성 체위가 800여가지나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 박선생님이 인도에 갔을 때 신성한 사원에 웬 불칙한 조각이냐며 희안한 발상에 어안이 벙벙했었다는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 모든 남성의 이 남근 작용이 부실했다면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과 함께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 날 많이 웃었다. 많이 웃으면 복이 온다는데, 오늘 터지는 웃음복주머니는 나를 더욱 더 행복하게 했다.
통일 전망대에서
오후 5시쯤 고성군의 통일 전망대에 도착하였다. 입장권을 구입하고 극장에 들어가 5분간 교육을 받았다. 전혀 전쟁이라는 상황을 느끼지 못 하고, 분단의 상황을 실감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영상화면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아, 언젠가는 전쟁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분단의 아픔이 무엇인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통일전망대에 올라가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서글펐다. 아름다운 금강산을 지척에 두고도 한국 돈 500원짜리 동전을 망원경에 밀어넣고서야 북한을 바라볼 수 있었다. 원하는 지점을 보려고 안간 힘을 썼으나 그 망원경을 사용 할 줄 몰라 이리저리 돌리며 진땀을 빼야했다. 저 가까운 거리를 이렇게 안타깝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에 가슴이 미어졌다. 한국(남한)과 조선(북한)의 분단상황이 새삼스럽게 실감났다. 망원경으로 아무리 봐도 잘 보이지 않아 차라리 높은 곳에 서서 희미하게 보이는 머언 산을 쳐다보기로 했다. 그림에서 봤던 기억을 더듬으며 아름다운 금강산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그리고 지금 막 육로를 건설하고 있는 도로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그 길로 자유자재로 남북한이 서로 왕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였다. 하나로 통일 되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해양 박물관에 들러서
통일전망대에서 나와 해양박물관에 들렀다. 리선생님이 전화로 지휘를 하여 김선생님 이름을 대면 입장권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입장권을 내지 않고 들어가는 특혜를 얻었다. 해양박물관 입장권은 한사람에 5000원이었으니 우리 일행은 귀빈 대접을 받은 셈이다.
해양 박물관을 구경하고서는 진주 매장에서 박영희 선생님이 7만원 한다는 목걸이를 2만원에 깎아서 샀다.
《7만원짜리 선물로 생각하고 달고 다녀요.》
박 선생님은 내게 선물로 건넸다.
진주보다 값진 선물, 박선생님의 자상한 마음이 가슴 밑바닥에서 또 다른 진주를 만들고있었다.
김일성 별장과 만원짜리 모자
오후 6시 40분, 김일성 별장으로 가는 길에 창이 좀 큰 모자를 박종숙 선생님이 만원 주고 샀다. 금방 산 모자를 쓰고 김일성 별장에 오르다가 그만 바람에 휘익 날아갔다. 공교롭게도 가시철조망으로 담을 쌓고 대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긴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앞엔《출입금지》라는 경고판까지 붙어 있었다. 관리자도 이미 퇴근한 시간이라 어떻게 할 방법도 없고 우린 멍하니 모자만 바라보면서 안타까와 할 뿐이었다.
모자를 사고 오는 길에 똑 같은 모자를 누구는 서울에서 5천원 주고 산 것을 누구는 만원주고 샀다는 얘기들을 들으면서 우리 일행은 억울해 하기도 했다. 그 말을 안 듣기만 못하다고 하면서 가는 길이었는데 그만 그 모자가 2분도 안 돼 휘익 날아가버린것이다.
우린 배를 끌어안고 깔깔대며 웃었다. 박종숙 선생님은 그 모자가 나와 인연이 아니겠지 하면서《떡을 사먹었다구 치자했다.》 찾느라 애쓰지 말고 가자는데도 박영희 박봄심 두 선생님은 모자를 되찾으려는 방도를 찾고있었다.
난 그런 그분들을 보면서 자꾸 웃음이 났다. 나는 출발하던 아침에 이미 박종숙 선생님 집에서 모자를 빌려 쓴지라 바람에 날려갈까봐 손을 모자에 딱 대고 걸어다녔다. 그렇게 바람이 쎈데 모자가 안 날아갈 리 없다는 생각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꾸 웃으면 얄미울까봐 꾹꾹 혼자 참느라 무지 힘이 들었다.
큰 길까지 거의 다 왔는데《출입금지》라고 한 곳이지만 담을 넘을 수 있다는 한 지나가던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우린 재차 모자 찾으러 돌아갔다. 박종숙선생님이 철조망을 간신히 제끼고 들어갔다. 《출입금지》구역에 들어가서 모자를 줏고 나오던 그 모습은 마치 개선장군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넷은 배를 끌어안으며 웃었다. 만원짜리 모자가 주인을 되찾게 된 사연은 김일성 별장 구경을 한것보다 더 재미있고 즐거웠다. 김일성 별장은 오후 6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겉만 둘러보고 나왔으니 더 그러하였으리라.
소나무와 남자
김일성별장을 본 후에는 이기붕 별장으로 갔다. 문이 잠겨 있어서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를 돌아봤는데 그 부근의 소나무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박영희 선생님은 나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나무가 좋아요》
바로 그 때 다른 박선생님이 대꾸를 하고 나섰다.
《그래도 난 나무보다 남자가 좋던데…》
우리 일행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무섭게 또 클클거리면서 웃어제켰다.
대화 곳곳에 양념처럼 들어가는 유머가 즐거웠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심심할 때마다 꺼내서 맛있게 즐기곤 했다. 나무보다 남자가 좋다? 그래 어쩌면 그것이 최고 명언일지도 모르겠다.
소나무 옆에서 박종숙 선생님은 계속 이야기 보따를 풀어놓았다.
《어떤 40이 넘은 노총각이 있었는데 가끔 여자 생각이 나는데 여자는 없대요. 근데 그 뒤에 동산이 있는데 거기에 소나무 숲이 있어요. 어느날 그 총각은 슬금슬금 동산 꼭대기에 기여올라갔대요. 근데 꽉 끌어안을 수 있는 소나무가 눈에 띄는거에요. 그래서 그걸 끌어안고 소나무 있는데서 사정을 했어요. 또 여자 생각이 날 때마다 그 소나무 있는데 가서 사정을 하곤 했대요. 근데 일년이 지난 어느날 산에 올라가는데 솔방울이 발밑에 뚝 떨어져서 쳐다봤대요. 그 솔방울이 <아빠 아빠> 하고 말하더라는군요. 》
화전포 콘도 소나무 숲 속에서 점잖던 박종숙 선생님이 동작까지 곁들어 천천히 얘기하는 모습 속에서 진짜 자연의 향기,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속살 맛 나는 횟집에서
대진 고등학교 선생님이신 이응철 선생님이 경동대학 한국어학과 선생님 한 분을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대진 고등학교 정문에서《속살맛 나는 횟집 》차를 따라 횟집으로 갔다.
참돔 회를 먹었는데, 그렇게 큰 물고기를 회로 먹기는 처음이었다.
그곳엔 경동대학의 한국어과 선생님이자 화포리 132에서 콘도를 운영하는 남숙희 여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통통하고 작은 키의 남숙희 여사님은 소탈한 분이었다. 게다가 웃는 소리 하나는 온 방안을 떠나갈 듯 호탕했다. 목소리도 높고 서글서글하고 아주 호탕한 분이었다. 소주 세병을 시켜 맛나는 회를 안주삼아 다 마시고는 대리운전을 시켜 콘도로 갔다.
좁은 길 옆에는 호수가 있었는데 가로등이 없어 강원도의 깊은 밤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횟집에선 꽤 먼 거리였는데, 차 안에서 듣는 개굴 개굴 개구리 울음소리가 옛날 고향에서 듣던 소리같아 더없이 정다웠다. 고향 땅을 벗어나 고국에서 오랜만에 듣는 개구리 울음소리, 마치 고향에 온것처럼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화포리 132
드리어 화포리 132 집에 도착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장은《여기 방이 많으니 아무데서나 자. 나 올라가 자야 되. 한 시간 후에 일어날게》말씀을 남기고는 뒤문으로 나가셨다.
난 눈이 퀭했다. 우린 집을 둘러봤다. 서재며 주방이며 방이며 둘러봤는데 주인장의 겉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너무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고서적도 많고 상패도 더러 있고 여러 나라 골동품도 진열되어 있었다. 자그마한 공간에 나홀로만의 카페도 있었고 고풍스러우면서도 우아하게 방을 꾸며놓았다. 방을 보면서 우린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이런 큰 집을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혼자 어떻게 경영하며 살까? 걱정도 해보고, 춘천과 조금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도 가지면서 집을 둘러봤다
집주인 남숙희 여사님과의 첫 만남에서는 의아한 점이 많이 있었다. 초면에 그녀와 술을 마시면서는 지나친 호탕함에 조금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얌전하고 우아한 한국여자들을 보다가 이처럼 덤벙덤벙하고 콸콸한 모습을 보면서 과연 선생님이 맞는가도 의심스러웠다. 궁금증을 마음에 품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은근히 어디 낯선 외 딴 곳에 잘 못 들어가지나 않나 걱정까지 했던 것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 집을 향해 갔는데 집에 들어서는 순간 후유 안심이 되었다.
과연 서울여고 선생님이 맞는가도 의심을 했던 것이 상패도 있는데다, 많은 고서적을 보면서 다 풀어졌다. 뿐만 아니라 나는 감탄만 연발하면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꾸며놓은 집안의 구석구석을 보면서 남숙희 여사님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날 밤의 일은 술이 한 거라구 너그러운 량해를 하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술을 마시지 않은 상황하에서 깨여난 내일의 남숙희 여사님의 실체가 어떠한지 보기로 했다. 크게 중요한것은 아니지만 한국여성으로서는 너무나 특이해서 그 여사님을 보고 놀랍고 신비로왔다. 한국에 그런 여성도 있나싶도록. 정열에 넘치고 소탈하고 화통하신 남숙희 여사님은 실로 내게 신비스러움과 수수께끼를 남겨 주었다.
황홀한 이벤트 시작.
밤 9시, 우리는 화포리 132 콘도에서 박종숙선생님이 고안해낸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세분이 준비해 온 잣, 방울 토마토, 마른 감, 물위에 뜨는 연꽃 초. 이집트 와인을 상위에 올려 놓았다.
전등불을 다 끄고 촛불을 피우기로 했다. 근데 초불을 피울 수 있는 라이타를 찾느라 집안의 서랍들을 다 뒤졌지만 라이타가 없었다. 넷이 동원하여 뒤졌지만 끝내 찾아 내지 못 하고 가스로 하려고 했는데도 그걸 켜는 방법을 찾지 못해 한참동안 연구해야 했다.
와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불을 끄고 촛불을 켜놓고 와인 한잔 마시고 가위바위보 하라는것이다. 나 박봄심 선생님 박영희 선생님 셋이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내가 일등, 박영희 선생님 2등, 박봄심 선생님이 3등을 했다. 박종숙 선생님은 종이에 접은 선물을 풀었다. 브로치였다. 일등은 돌고래, 이등은 나비, 삼등은 진주 꽃.
돌고래를 박종숙 선생님이 넘겨 주었다.
옆에서 박영희 선생님이
《아 돌고래 나와 바 꿔줄래요? 》
《그래요, 가지세요》
박영희 선생님이 가지신 나비와 바꿔 드렸다. 근데 생각해보니 오늘 진주 살 때 박봄심 선생님이 아까 진주 매장에서 산 브로치와 오늘 받은 선물이 비슷했다. 그래서 나비 브로치를 박봄심 선생님 드리고 박선생님이 받은 선물을 내가 가지기로 하였다. 박봄심선생님은 사양하다가 받는데, 나비를 보면서 소녀처럼 좋아하였다. 그분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실은 나도 돌고래, 나비가 더 깜찍하고 내 스타일에 맞는데 그분들께 드렸다. 즐거워하는 그분들 보면서 나도 부자가 된 듯 흐뭇하고 행복했다. 선물까지 받고 촛불을 켜고 와인을 마시는 분위기가 너무너무 즐거웠다. 이렇게 사는것이 행복이구나 느끼는 순간이었다.
와인을 마시면서 그 분들이 살아가는 인생살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들의 세상에 더 가까이 들어가게 되었다. 친분을 쌓는것이란 사람을 알아가는것이리라. 거실에서는 박종숙선생님과 박영희 선생님이 얘길 나누고, 방안에서는 나와 박봄심 선생님이 얘기를 나누었다.
새벽 3시 30분이 지나서야 우린 자리에 누웠다. 도란 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감사했다.
화진포 바닷가
2007년 5월27일 일요일 새벽 6시 30분. 벌써 웃음소리와 함께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장께서는 이미 아침상을 마련해 놓았다. 옆집 칠순 잔치가 있어서 거기서 반찬을 얻어왔다며 쟁반 가득 들고왔다. 덕분에 우리는 푸짐한 아침을 먹었다.
차 한잔 마시고 화포리 바닷가로 향했다. 화진포 호수를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호수 주위를 감돌며 바닷가로 향했다. 해님이 솟은 맑은 하늘에 쪽빛 바다 물결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아예 신을 벗고 맨발로 걸어다녔다. 바다물에 발도 담그다 밀려오는 파도에 옷을 흠뻑 적셨다. 모래 사장을 걸으면서 삼킬 듯 몰려오는 파도에 흠칫 놀라면서도 신나게 바다와 하나가 되고있었다.
박종숙 선생님은 내 모습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고, 박봄심 선생님은 나에게 준다면서 이쁜 조개껍질을 줏느라 모래사장을 살피고있었다. 바닷가에서 나와 큰길로 갔더니《가을 동화》를 찍은 현장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난 흥분되어 포즈를 취해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광개토왕릉이라고 알려진 섬에서도 사진을 남겼다. 한국의 역사적인 인물 광개토왕릉도 만나보고 가을 동화도 본 하루는 보람차기만 했다.
《가을 동화》는 우리 학생들이 좋아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강의할 때 전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생겨서 어깨까지 으쓱했다.
강릉 가는 길
고성군을 돌아본 후에는 강릉시로 갔다. 강릉대학의 정연수 선생님과 강릉 시청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터였다.
강릉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우리들은 노래를 불렀다.
《숨어우는 바람소리》노래를 하면서 우리 일행은 내내 즐거웠다.
차안에서 세분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들 집에 전화하는거 못 봤어요. 전화 안 하세요? 》
박봄심 선생님은《춘련 씨랑 여행 간 걸 아니까 전화 안 해도 된다》고 박종숙 선생님은《무소식이 희소식인데》라고 하는데, 박영희 선생님의 대답이 걸작이다.
《여자는 집을 나서기가 힘들지, 떠나고 나면 잊는거야》
와~~ 쓰리박, 쓰리(three) B형님들은 역시나 역시였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박종숙 선생님께 재미난 이야기를 청했다. 박선생님은 운전을 하면서 이야기 보따를 풀어놓는데, 그중에서는 술《주(酒) 》자 얘기가 두고두고 생각해도 웃음을 자아냈다.
《아들이 공부를 하다보니 <주(酒)>자를 모르겠던 거야. 그래서 아버지한테 물었대요. 《아빠 이 글자 뭐에요? 》 그런데 문맹인 아버지는 그 글자를 바로도 보고 거꾸로도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모르겠기에 엄마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했대요. 그래서 엄마한테 물었더니 ,《너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글자다. 너네 아버지한테 물어보아라 그러면 알게다》 한거에요. 그래서 또 아버지한테 왔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자라고. 그게 뭔가? <18><10>자인가? 》
와 하하하. 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수필만 잘 쓰는가 했는데, 노래는 가수 급이고, 또 구수한 이야기는 개그맨 수준이고, 운전도 정말 잘 하고, 정말 정말 수퍼우맨 박종숙 선생님이었다.
강릉 가는 길은 노래와 이야기에 취해서 바깥 풍경을 볼 시간도 없이 배를 끌어안고 웃는 사이 어느새 다 도착하였다.
바람같이 만나 번개같이 헤여진 정연수선생님
오후 3시 강릉시청 앞에서 정연수 선생님을 만났다. 먼저 강릉대학교 캠퍼스를 차를 탄채 한바퀴 휘 돌아 보았다. 깨끗하고 아담하게 잘 꾸려진 정원이었다.
강릉에서 두번째로 간 곳은 오죽헌이다. 오죽헌(烏竹軒)은 조선시대의 위대한 학자이며 정치가인 율곡 이이 선생님이 태어난 곳이다. 또 조선의 대표적 여성이자 한국의 모범적 여인상으로 추앙받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삶이 배여있는 곳이다.
중국 학생들한테 한국어를 강의하면서 한국돈을 가르친적이 있다. 그 때 5000원 짜리에 율곡 이이의 사진과 뒷면에 오죽헌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친히 오죽헌에 와서 돈에 새겨넣기 위해 사진을 찍은 바로 그 자리에 서서 기념 촬영을 하게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었다. 오호라, 이래저래 으쓱해지는 내 마음이 그 감동을 짐작하게 했다.
그 다음에는 강릉 초당으로 옮겨 5대문장가 집안으로 알려진 허난설헌, 중국에서 시가 소개된 유명한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생가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흔적도 함께 살필 수 있었다.
저녁은 강릉 초당에서 강릉의 향토음식으로 유명한 강릉 초당순두부를 먹었다
식당에서 나와 헤어질 때 정선생님이 인사를 건네왔다.
《김선생님, 강원도 문단의 녀류 거목들과 함께 행복한 여행 하셨네요. 》
정말 강원도의 문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버스로 혼자 서울로 가기 위해 강릉터미널로 갔다. 정선생님이 우리를 배웅했고, 그곳에서 춘천의 쓰리박과도 포옹과 눈물로 작별 인사 나누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밤 10시 55분이었다. 많은 분들 덕분에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기억난다. 《살면서 나를 잘 지켜야 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가슴에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에 단기 체류하고 있으면서 바쁜 생활에도 불구하고 1박 2일의 특별한 여행을 마련해준 춘천의 박씨 세분 선생님, 함께 하기로 고성으로 우리를 초대하였으나 갑작스런 사정으로 참석은 못했지만 수십통의 전화통화로 우리를 안내한 고성의 리응철 선생님의 정성에도 역시 감격스럽다. 열정적이고 화통하신 화진포의 남숙희 선생님, 논문 집필에 바쁘신데도 함께 해준 강릉의 정연수 선생님, 그 많은 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소중하다. 아무리 많이 만나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번 만나지 않았어도 오래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너무 가슴 벅찼던 행복의 시간, 사랑을 받은데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오래오래 잊지 못할것이다.
2007년 8월 17일
벚꽃
-한중의 교류 활짝 피었다.
2007년 4월 경기도청에 근무하는 리선생님과 허선생님으로부터 경기도청 벚꽃 축제에 초대받았다. 서울대학 언어교육원 한국어 양성 과정반에 함께 다니고 있던 중국에서 온 선생님들을 모두 데리고 오라고 하여 처음엔 저으기 놀랐었다. 헌데 그 마음이 하도 고맙고 푸짐하여 같은 학과 한족선생님들을 모두 동행하여 벛꽃 나들이에 나서게 되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따뜻한 날씨, 거리는 물 뿌리고 청소라도 한듯 깨끗하고 아늑하였다. 날씨는 조금 흐려있었는데 흐린 날씨와 상관없이 축제 분위기에 사람들의 얼굴은 밝아보였다.
우린 서로 길을 잘 못 들어서는 바람에 약속 시간보다 한시간이나 늦어졌다. 그날 행사로 바삐 보내야 하는 리선생님은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있었다. 리선생님을 보는 순간, 멀리서부터 반기며 웃는 모습이 매우 친철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후 허선생님도 카메라를 들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일행은 두분의 배동하에 경기도청 벛꽃을 구경하였다. 경기도청 벚꽃은 32년이 지난 꽃 나무란다. 실실이 휘늘어져 손에 닿일듯 낮게 내려 앉은 구름같은 벚꽃은 환상적인 분위기였다. 연분홍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나는 싱그러운 꽃 향기에 흠뻑 취해 그만 넋을 잃고 잠깐 동안이나마 나이를 잊고 천진한 모습으로 즐거움에 도취되어 포즈를 취하고 행복에 잠기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꽃 향기 맡으며 꽃비인양 산야에 연분홍피를 토할 모습을 그려보며 중국의 유명한 아동작가 빙심이 쓴 벚꽃문장을 문뜩 떠올라 보았다.
4월이 되면 일본은 어디로 가나 벚꽃 천지인데 일본의 문인들은 아름답기는 하나 쉽사리 지는 벚꽃을 보고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고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장렬한 희생을 연상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벚꽃을 사랑하는 까닭은 선참으로 즐거운 봄 소식을 알려주는 꽃이기 때문이란다. 즉 봄날의 즐거움과 힘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벚꽃 개화기는 보통 일주일밖에 피지 않는다. 온 겨울 찬바람에 시달리던 벚꽃은 화창한 봄을 맞아 소리없이 일시에 피어난다. 한송이 두송이 피는것이 아니라 천만송이 억만송이가 약속이나 한듯이 하루 아침에 만개하여 쓸쓸한 황야에 아름다운 꽃의 세계를 펼쳐놓는다. 하지만 그 화사하고 어여뿐 벚꽃은 피기 시작하여 질 때까지 열흘 밖에 안걸린다는 것이다.
중국 청조말년의 시인 황준헌의 벚꽃 노래에는 이런 시구절이 있다
묵강*의 푸른 물에 잔물결 이는데
강기슭에 울긋불긋 곱게 핀 벚꽃
온 도시가 떨쳐나와 꽃구경 하며
사람마다 벚꽃 노래하누나
·……
꽃피는 열흘이라 온 나라 들끓으며
해해년년 꽃 시절 맘껏 즐기네.
*묵강: 일본에 있는 강 이름이다.
櫻花歌
黃遵憲
墨江潑綠水微波
万花掩映江之沱
傾城看花奈花何
人人同唱櫻花歌
...
十日之游擧國狂
歲歲歡虞朝復暮
이 시는 봄날 벚꽃 구경을 하며 온 나라가 기쁨에 들끓는 광경을 아주 잘 그려내였다. 꽃 피는 열흘 - 그야말로 단촉한 동안이다. 순간에 피었다 순간에 사라지는것이 벚꽃의 아름다운 매력이다. 순간적인 아름다움, 소리없이 생을 시작하여 불같이 살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벚꽃의 인생. 꽃처럼 짧은 인생을 살고 순직한 수많은 영웅들의 장렬한 희생이 벛꽃들의 락화로 상상되면서 잠깐 가슴 한끝이 아려난다. 벚꽃이 일본사람들의 국화로서 사람들에게 봄날의 즐거움과 힘을 주는것이라면 꽃 다운 청춘을 바친 영웅들은 우리 마음속에 피어있는 한떨기 꽃이 아닐까?
오늘 또 한 송이 꽃이 핀다. 이국 타향에서 싱그러운 벚꽃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는 친절한 두분의 배려로 가능했다. 그 두 분은 중-한 친선의 꽃바다에서 친선의 배를 타고 찬란한 내일의 봄날을 맞는 만남과 화합의 장이 아닐까? 회억을 더듬노라니 가슴 후련해지고 힘이 샘솟는 아침이다.
2007년 6월 27일 심양 서재에서
향이가 남긴 자취
내가 맡았던 학생들은 졸업한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내가 담임을 그만두어야 했던 리유를 궁금해 한다.
담임을 그만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다, 몸이 편찮다고 해야 놔줄 것 같아 건강 핑계를 대었었다.
1998년 우리학교가 대학전과대학으로 승급을 하면서 첫기의 담임을 맡게 될 때의 일이다. 교사가 된지 8년이 넘었지만 담임은 처음이었다. 누구나 처음 시작하는 일은 설레고 또 그만큼 정열도 끓어 넘친다. 막중한 임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잘 해보려는 욕망으로 밤이나 낮이나 학생들 속에 묻혀 살면서 피곤한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또 반급을 잘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반급 간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의 당안을 깐깐히 훑어보았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오기 전에 벌써 마음속에 간부들을 어림짐작해두었다.
9월3일 신입생 입학 날이었다. 입학 첫날 저녁 자습시간에 자기소개를 시켰다. 그리고 왜 사범학교에 지망하게 되었냐는 질문을 더 첨가시켜 대답을 하도록 하였다. 첫날 자기소개 시간은 즐겁게 지나갔다.
어떤 학생들은 난생 처음 기차를 타 보았고, 어떤 학생은 또 큰 도시에 처음 와 보았는데 학교가 좋아서 사범에 온것이 신기하고 기쁘다면서 연신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또 어떤 학생은 기숙사 생활을 처음 해서 학교도 좋고 기숙사도 좋은데 밤에 잘 수 있겠는지 근심을 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룡이는 사범 통지서를 받고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잡아 동네에서 잔치를 벌였다고 했다. 대부분 학생들이 사범에 온것을 행운으로 생각했고 또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향이라는 학생은 고중에 입학하여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사범에 가라고 하여 억지로 왔다면서 못내 락심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단발머리에 거무칙칙한 운동복을 입었는데 다른 학생들과 동갑내기건만 퍽 성숙되어 보였다. 내내 우울한 표정이 마음에 걸리긴 했어도,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조리 있고 또 길게 말을 잘하였기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날 바로 연이를 반장 시키겠다고 점을 찍었다.
이튿날 나는 향이를 사무실에 불러와 반장하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흠칫 놀라며
《저 중학교 때 간부노릇 안 해 봤어요.》하면서 조금 흥분하는 기색이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서 이젠 이미 사범을 선택한 이상 더는 후회하지 말고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하면서 우리 함께 잘 해보자고 했다. 연이는 쾌히 승낙을 했다. 무척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자기를 생각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 후로 얼굴이 조금씩 밝아진 향이는 내가 담당하던 <열독과 습작> 강의 시간에 발표도 잘 했다. 그리고 한 주일마다 직주 평비 성적을 학교에서 공포하는데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건만 학생회에 올라가 수첩에 적어서 나한테 꼭 꼭 바치고 한 주일 있었던 반급일도 회보하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반급의 정황 뿐 아니라 학생들이 밤에 외로워하는 것이라든가, 나를 매우 어려워한다는것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자주 기숙사에 학생들을 보러 다녔다.
교실보다 기숙사가 속마음을 나누고 외로움을 달래주기는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학생들과 마음을 나누려고 저녁자습이 끝나면 가곤 했다. 연락 없이 기숙사에 들이닥칠 때가 더 많았으니 학생들은 내복이나 잠옷바람으로 나를 맞곤 했다. 308호실에 갔을 때 향이는 색이 바랜 내의를 입고 있었다. 학생들의 입은 옷을 쭉 관찰하니 향이가 제일 빠지는 것 같았다.
한 달이 지난 후 80원을 주고 속내의 한 벌을 사서 다른 학생들 몰래 향이에게 주었다. 안 받겠다면서 끝까지 사양하는것을 공작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잘해줘서 장려의 상 의미로 주는것이니 부담을 갖지 말라고 설득하느라 퍽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받아든 향이의 모습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 후로 향이는 더 신심이 나서 매사에 열심이었다. 향이와 나, 우리 둘은 호흡이 잘 맞았다. 향이가 반급 일들을 잘 마무리해 주면서 학기말에 우리 학급은 1학년 첫 학기에 모범 반급으로 선정되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물론 다른 학생들의 노력과 심혈이 깃들어 있었겠지만 반장 향이의 공로가 무엇보다도 컸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세상은 순탄하게 돌아가는것을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 또 나의 유력한 조수였던 향이가 2학기에 그만 실종되는 사건이 생겼다.
2학기 개학 날 이였다. 향이는 나를 찾아와 반장을 그만두겠다는 갑작스런 말을 전했다. 리유를 물어도 능력이 안 되고 어쩌고 하면서 어물어물할 따름이었다. 나는 《네가 여태 잘 해왔고 또 능력도 있는데, 다른 잡생각은 하지 말거라》하고 타일렀다.
그 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토록 매사에 성실하던 향이가 갑자가 그만두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언제 시간을 내어 속마음을 나누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게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주말 저녁이었다. 향이와 담화를 하려고 향이가 묵고 있는 기숙사 308호로 찾아갔다. 그 날 나는 기숙사 대문을 잠그는 시간이 될 때까지 향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향이가 더는 간부노릇 안 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들으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헤어질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나올 때는 내가 바래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향이는 기어이 우리 집 문 앞까지 따라나왔다. 당시 내 살던 집은 학교 울안에 있었으니 기숙사와 그리 멀리 있지는 않았다.
향이와 나는 쑥쑥 빠져드는 눈길을 밟으며, 펑펑 쏟아지는 밤눈을 맞았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향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하면서 헤어졌다.
그런데 그 말은 내가 향이로부터 이세상에서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선생님, 감사합니다》가 향이로부터 듣게 되는 마지막 목소리일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향이는 월요일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책상 위에 있는 책을 말끔히 정리를 한걸 보면 어딘가 떠나려는 작정을 이미 해둔 모양이었다. 나는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즉시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집에도 가지 않았다는것이다. 혹시 서탑에 일하러 가지 않았나 싶어서 반 학생들을 몇개 조로 나누어 식당, 노래방, 커피점 등에 들어가서 향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일일이 확인을 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에 우리는 낮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향이를 찾으러 다녔다. 당시 나는 퇴근하기만 하면, 3살난 아들을 남편한테 맡겨놓고 밤늦도록 향이를 찾으러 심양 북역, 태원가, 서탑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향이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 매일 밤 12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실망한 마음과 지친 몸 때문에 나의 삶까지 황폐해져 갔다. 향이를 찾으려는 내 집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마음 고생은 점점 더 심했다.
혹시 향이를 찾는 실마리라도 있을까 하여 향이 어머니는 기숙사에 와서 향이의 이불과 소지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때 옷들을 정리하던 중에 향이의 어머니는 학생증과 일기책을 찾았다. 그 일기책을 펼치는 순간 첫 페이지에 나한테 쓴 편지가 들어있었고, 향이 어머니는 이 편지를 내게 전해줬다.
《존경하는 선생님, 그동안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믿어주셔서 실로 고마웠어요. 저 원래는 초중을 졸업하고 사범통지서를 받았을 때 이미 죽으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선량하고 열정적인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저를 따뜻한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반장까지 맡겨주셔서 차마 죽을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의 뜨거운 사랑은 제 인생을 반년 연장시켜주셨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미안해요. 선생님의 성의를 저버리고 믿음을 배반하고 떠나야만 해요. 하지만 저 세상에 가서도 저는 영원히 선생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 정말 고마웠어요. 눈 오는 날 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많이 많이 흘렸어요. 좋은 선생님을 영영 불 수 없게 되어 마음이 너무나 아팠어요.
그리고 저 영원히 부모님 원망 할 거예요. 부모님이 저를 버렸어요. 저를 낳은 것까지 미워요. 저 불효라고 욕하지 마세요. 선생님, 사랑하는 선생님. 용서하세요. 그리고 건강하세요.
1999년 3월 17일 학생 김연》
그리고 향이의 일기 다음 페이지에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들로 가득 담겨 있었다. 대학에 가는것이 꿈이었는데 부모님은 가정 경제사정이 곤란하다는 리유로 억지로 사범에 가게 한 일, 집에서 남동생과 싸워도 다짜고짜 자기를 나무라는 아버지, 위에 언니가 있는데도 언니는 대학입시 공부해야 한다면서 집의 자질구레한 일은 자기에게만 시켜 죽도록 부려먹는다는 일, 색다른 먹을 것이 생겨도 언니와 남동생만 챙겨주고 자기 몫은 없었다는 일, 둘째로 태어나 집에서 늘 사랑을 못 받아 이젠 사는 게 신물이 나서 죽으려한다는 결심 등등
향이가 쓴 일기는 여섯장이었는데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죽겠다는 말들이 수두룩하였다. 일기를 읽으면서 향이는 지금 삶이 힘들어 어딘가 죽음의 도피처를 찾아간것만 같다는데 생각이 이르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래도 나는 행여나 넓은 중국 땅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
4월 5일 청명날, 향이 부모님은 할아버지 산소에 갔다가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이의 주검을 발견했다. 할아버지 무덤 옆에는 빈 독약병과 술 한 병이 놓여있었다.
향이 부모님은 시체를 발견하자 즉시 학교를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와 친척들은 향이의 죽음이 학교의 책임이라면서 향이의 시체를 학교에서 처리하고 배상금으로 돈 10만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향이의 어머니는 학생들이 수업 중인데도 불구하고 복도에서
《향아, 향아, 》
이름을 부르며 울며 불며 소동을 피웠다.
향이의 가족들은 학교에서 돈 10만원 내놓지 않는다면 시체를 학교까지 실어오겠다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산에 누워 있는 시체를 내려오지도 않고 부모 친척 할 것 없이 모든 친인척이 학교에 몰려와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향이의 친척들 대부분은 시골사람들이었지만, 그중 이모 한 사람이 요녕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데 그 이모까지 더욱 날뛰면서 《못된 가시나 죽으려면 그냥 죽을게지. 선생한테 유언 남길건 뭐람》하고 중국말로 연신 향이를 나무라고 있었다.
그러면서 학교측에 책임을 추궁하자면 단서를 없애야 한다면서 일기책을 달라고 요구하고있었다. 학교측에서는 그것을 주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난 돌려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대학에서 선생을 하고 있다는 이모가 제일 앞장서서 어떻게 하면 돈을 짜낼까만 궁리하면서 분주했다.
하지만 이모란 작자는 심양시내에 살고 있어도 향이가 반년동안 한번도 찾아가지 않을만큼 소홀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아이의 죽음, 그런 슬픔 가운데서도 돈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참으로 세상이 무섭고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 사람들이 가증스럽게 느껴지다가도 가엽기까지 했다.
외롭고 험한 산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향이의 주검은 돌볼 생각을 하지 않고 돈 10만원의 배상에만 급급해 억지를 부리며 떼를 쓰는것은 어떤 심사일까? 사랑에 린색했던 자신들을 자책하는 마음의 표현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렇게 막무가내인 부모님이 과연 하늘아래 몇이나 될 것인가? 세상이 무섭고 인심이 두렵다.
유족이 행패가 심해지자 학교측에서는 경찰에 신고를 하였다. 결국 법원에서는 향이가 쓴 유언과 일기, 그리고 향이와 한학기 동안 수십차 담화한 내용이 담긴 내 일기 등을 보면서 학교측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우리학교학생이었던 향이였기에, 학교지도부에서 마을 사람들을 고용하여 산에서 향이의 시체를 내려오게 하고 새옷 한 벌 사 입혀 장례절차가 도왔다.
화장하는 날, 통곡하는 그의 엄마를 보면서 나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미여졌지만 또 한편 날 붙잡고 향이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릴까봐 더럭 겁도 났다. 물론 내 잘못은 없었다지만, 학교를 찾아와 강짜를 부린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못미더웠던 것이다.
향이가 내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내가 향이를 사랑한데 대한 응답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향이는 유언장을 통해 향이의 죽음이 나의 책임도 아니고, 학교 책임도 아니라는 근거가 되게 했다. 그리하여 그 유족들이 학교에 요구한 돈 10만원을 배상하지 않아도 되는 확실한 근거가 되었다. 향이의 유언장은 부모에게는 빚진 자식이 됐다지만 내게는 곤란한 처지에서 구해주는 다행스런 글들이었다.
그 일이 있고난 후부터 나는 자주 악몽을 꾸기 시작했으며, 깊은 잠에 들 수 없었다. 몸살로 한 주일동안 강의를 나가지 못하기까지 했다. 반급에 들어갈 때마다 비여 있는 자리를 볼 때마다 향이의 모습이 사물사물하여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향이가 없는 교실은 무척 허전하고 쓸쓸했다. 나는 강의하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핑 돌고 목이 꺽꺽 막혀 강의를 중지했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향이로 하여금 참 오랜 시간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그럴 때는 향이가 괘씸하고 얄미워지기까지 했다.
삶이 아무리 아프고 힘들더라도 제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이 지독한 녀석.부모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향이는 죽음으로 부모님께 반항을 했던 것일까? 죽을 용기가 없어 술로 용기를 얻어서까지 죽어야 했던 걸까? 향이는 죽음에 도전했던 걸까, 아니면 참다운 인생에 도전을 했던 걸까?
향이가 죽은 지도 몇년 흘러갔다. 이제는 막무가내이던 향이의 부모님에게도 련민이 느껴진다. 오죽했으면 선생님한테는 유언을 남기면서 부모님께는 한마디 말도 없이 생명을 마쳤을까? 또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부모의 마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 주검을 보던 순간에 받았을 부모님의 충격은 어떠했을까? 향이를 생각하고, 그들의 부모를 생각하면 또다시 가슴이 저려온다.
한창 꽃 필 나이에 죽은 불쌍한 향이, 난 누구보다 향이를 사랑했던 까닭에 그 애가 미워지기까지 한다. 반급의 그 어느 누구보다 접촉이 잦았고 또 함께 많은 일들을 하면서도 그 애의 마음이 이렇게 모질고 지독한지 몰랐다. 지금 돌이켜 볼 때 죽기 위한 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기에 나한테 더 잘하려고 애 쓴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향이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이 향이를 좀 더 따뜻하게 보살피고 사랑을 베풀었다면 향이는 살 수 있었을까? 모든게 부질없는 생각이라지만 나는 또 다른 향이가 나타날까봐 못내 두려웠다. 향이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의 교육방법에 문제가 없는지를 곰곰이 돌아보곤 했다. 향이의 죽음은 학교교육의 차실로 빚어진 비극은 아닌지 점점 교육의 사명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학생들을 사랑한다는것,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관심깊에 지켜본다는것, 학생들과 관계를 맺어나간다는것, 많은것을 배웠다. 향이는 내게 교육자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크나큰 교훈을 남기고 갔다. 더 이상은 이 땅에 향이와 같은 삶을 살다가는 학생들이 없기를 빌고 또 비는 것이다.
2005년 3월 18일
우리하나 되어 낙동강 노래를 소리높이 부르고 외칠 날
2007년 1월 4일 태백문협 지부장인 정연수 선생님과 석재준 이사장님 등 태백문협 회원들께서 우리글사랑 <중-한 국제백일장> 시상식을 위해 3박 4일의 일정을 잡아 심양에 오셨습니다. 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모처럼의 좋은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심양을 방문하셨습니다.
1월 5일 심양화신조선족소학교에서 시상식을 갖는 날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사회를 맡아 많이 긴장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따분한 시상식을 좀 재미있게 하겠는가 고민도 했었습니다. 생각던중에 우리 중국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이 한국 태백이라고 하면 모를 것만 같은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습니다.
하긴 요즘 중국의 조선족은 한국 하면 삼척 동자는 물론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 웬만한 도시는 다 알고있습니다. 심양 조선족들은 가족이거나 혹은 친척들중 한국에 가본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집에서는 이미 가족이나 친척 구성원 한명쯤은 한국에 가서 지내는 상황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란 말도 많이 들었고, 실제 흐르는 한강도 잘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족중에서 그 한강의 발원지가 태백에 있다는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비록 교과서에서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를 배웠다하더라도 그 민족의 성산인 태백산의 이름을 지금까지 계승하고 있는 태백산이 태백시에 있다는것 역시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환웅이 무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우리 민족의 력사적인 산을 말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교과서에도 나오는 조명희의 소설 <낙동강>이 있어 낙동강이란 이름은 우리들에게 더없이 친숙하고 유명하지만 그 발원지가 바로 태백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소설 표현처럼 1천3백리(소설에는 7백리로 등장하지만) 길이길이 흐르는 물이 곁가지 강물까지 한 몸에 뭉쳐서 남해바다로 향하여 나가는 그 낙동강의 발원지를 말입니다.
저도 지난 2004년 한국 태백에 가서야 그러한 소중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연수 선생님과 알게 되면서 정선생님의 글을 통해 태백이라는 곳이 그렇게 성스러운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태백문협 회원들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태백시 황지연못을 거닐 때 조명희가 쓴 소설 <락동강>에 나오는 시가 떠올라 흥분에 떨면서 읊었었습니다.
봄마다 봄마다
불어내리는 락동강물
구포벌에 이르러
넘쳐넘쳐 흐르네
흐르네 에 헤- 야.
철렁철렁 넘친 물
들로 벌로 퍼지면
만 목숨 만만 목숨의
젖이 된다네-
젖이 된다네 에- 헤- 야.
이 벌이 열리고-
이 강물이 흐를제
그 시절부터
이 젖 먹고 자라왔네
자라왔네 에 헤- 야.
천년을 산 만년을 산
락동강! 락동강!
하늘가에 간들
꿈에나 잊을소냐-
잊힐소냐- 아- 하-야.
이 강과 이 들과 저기에 사는 인간 - 강은 길이길이 흘렀으며 인간도 길이 길이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락동강 물을 마시며 살고 있는 우리 고국의 동포들, 교과서에서 배울 때의 락동강은 우리 생활과는 아득히 먼 신화처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의 발원지가 태백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나 놀랐고, 흥분된 마음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신화의 나라로 들어간것처럼 신비로웠습니다. 정녕 제 자신이 락동강 발원지 바로 옆에 서서 친히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격동에 부풀어올랐습니다.
그때 감격스런 표정과 함께 포즈를 취해 사진 한 장을 남겼습니다. 학교에서 락동강 과문(단원)을 강의 할 때 학생들한테 사진을 보여주면서 제가 락동강 발원지에 가봤다는 얘기를 곁들여 생동감 있는 강의에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었지요. 또 학생들에게 태백 얘기도 하면서 언제라도 기회가 있으면 태백을 알리고 자랑해야겠다고 늘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마침 이번 시상식이 좋은 찬스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백에서 오신 손님들을 소개하기보다 우선은 태백이 어떤 곳인지 자랑하고 싶었고, 그 자랑스런 땅 태백의 사람들을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생각해낸것이 정연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던 태백시의 소개를 더듬어 정리해봤습니다.
태백에는 서해로 흘러가는 한강의 발원샘이 있고, 남해로 흘러가는 락동강의 발원샘이 있고, 동해로 흘러가는 오십천의 발원샘이 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동해, 서해, 남해를 두루 흘러가는 강의 발원지가 태백이라는것입니다. 또 태백에는 한반도의 등줄기를 지탱해주는 태백산맥의 중심산인 태백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대륙의 유구한 력사와 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구문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태백은 한국인의 강과 바다의 고향이요 모든 산의 고향인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태백인의 고향뿐만 아니라 강과 함께 유구한 세월을 지내온 우리 조상들의 고향인 셈입니다. 마르지 않는 태백의 발원샘, 쉬지 않고 끝까지 흘러가는 강물의 끈기는 바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태백사람들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태백은 석탄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석탄을 통해 태백시와 태백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태백 사람들은 가슴속까지 후벼서 파낸 석탄으로 구들장을 데워주듯이 자신의 모든 정열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넉넉함과 따뜻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냥 정연수 선생님과 접촉하다보면 근엄한 대학의 교수님 같지 않고 흙냄새 풍기는 풋풋한 시골 사람같이 편안한 느낌이 들고 금세 친해지고 정이 들며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나눠 주는데 습관이 된 태백처럼 태백 사람들도 배려함이라든가 나눠주는 마음이 넉넉하고 푸짐합니다.
10년 전에 백두산 가는 길에 잠시 심양을 거쳐가신 후로 처음 오신다는 석재준 한마음신협 이사장님께서는 해외 방문인데도 관광에는 염두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얼을 지켜나가는 자그마한 소학교(초등학교)와의 시상식에 친히 참석하여 진지한 열정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는 과업에 동참해주신 모습이 너무 너무 존경스럽고 또 내내 고마웠습니다.
이토록 힘이 되는 모국의 따뜻한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는 늘 외롭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지켜주는 따뜻한 분들이 계시기에 이 강과 이 들과 저기에 사는 인간들이 하나가 되어 락동강 노래를 소리높이 부르고 외칠 날도 멀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2007년 1월 31일
당선 소감
한국영농신문사에서 제정한 제 4회 한국 농촌문학상에 입선되었다는 통지서를 받는 순간 놀람과 희열에 심장이 멎는듯 하였습니다.
너무 큰 영광을 주셔서 흥분에 떨리고 설레이는 마음을 한참동안이나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글을 쓰며 산다는것이 행복이라는것을 확인해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행복한 감정을 감사하다는 말로 바꾸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선정해주신 한국영농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농촌》이라는 단어는 저에게 언제나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농촌문학상이라는 이름에 더욱 기쁜 마음에 젖어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저는 소학교를 졸업한 뒤 우리 글을 배워야 한다는 부모님의 지시대로 집에서 6킬로미터나 떨어진 조선족중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꼭두새벽에 집 문을 나서서 장장 한시간 반을 걸어서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면 해가 서산마루에 꼴깍 넘어간 어둑컴컴한 밤이 되었습니다. 허허 만주 벌판이라 겨울엔 서북풍이 세차게 휘몰아치고 눈보라가 귀를 따갑게 합니다. 비가 오는 여름날이면 장화를 신고도 걷지를 못할 정도로 도로 사정이 열악했습니다. 신발을 손에 들고 바지를 무릎 위까지 둥둥 걷고 진흙탕물을 튕기면서 질퍽질퍽한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우리말과 글을 배울 수 있다는 일념에서였습니다. 1930년대 항일 독립군 총사령관인 량세봉 장군의 외손녀로 태어난 저에게는 어릴적부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렵게 지켜온 민족정신이며, 저 또한 어렵게 배워온 우리말과 글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글을 배우는 유년의 고통스런 체험이 꿈과 희망을 단련해준 계기였다면, 오늘 고국으로부터 받게된 수상의 영광은 한글이 중국 조선족사회의 영원한 모국어로 계승되도록 미력한 힘을 보태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였습니다. 저는 료녕성 조선족사범학교의 강단에서 우리 한민족의 말과 글을 가르치면서 한시도 한글이 갖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잊어본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중국 조선족 후손 만대에까지 우리 글이 전해질 수 있도록 민족의 정신을 담아낼 것입니다.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키워주시고 지켜보아 주신 많은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많이 부족한 데도 불구하고 글을 뽑아주신 한국영농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07년 5월 20일 서울대에서...
외할아버지 령전에
2003년 8월에 나는 한국 국립국어연구원의 초청으로 한국에 갔다가 국립묘지를 방문 배알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주르륵 주르륵 내리고있었다.
역에서 국립묘지까지 가는 시간은 한참이나 걸렸다. 나는 안내원 아저씨의 안내로 량세봉 할아버지의 묘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항일명장으로 유명한 량세봉장군은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큰 외할아버지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 외할머니의 시형이 되는 셈이다. 큰 외할아버지의 묘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묘지에서 동쪽으로 한 이십여메터 떨어진곳에 자리하고있었다.
비록 세대적인 차이로 한번도 뵈온적이 없지만 큰 외할아버지는 나의 마음속에 언제나 큰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깊이깊이 존경하고 있다. 나는 할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다소곳이 절을 올리고 기념으로 사진도 찍으면서 우리 가문에 이처럼 훌륭한 분이 계심으로 또 한번 자랑을 느꼈다.
큰 외할아버지는 30년대 남만일대를 주름잡으며 항일투쟁을 벌려 이름을 떨친 조선혁명군 총사령이라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한 때는 력사의 뒤안길에 가리워 억울하게 오명을 가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다행이 뒤늦게나마 요즘은 국내외학자들 뿐만아니라 중소학생들 한테도 널리 알려지도록 제자리를 찾을수 있어 너무 고맙고 감개무량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개에도 아직 유감으로 남는것이 있으니 집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당시 량세봉장군과 함께 항일혁명을 하고도 오늘날까지 인정을 못받고 있는 량시봉할아버지에 대한 유감이다. 량시봉은 량세봉의 친동생이며 나에게는 외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외할머니에게서 량세봉할아버지와 량시봉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들을 들으며 커왔기에 두분 할아버지를 마음속으로 영웅처럼 모시며 존경해 마지않는다. 그리고 그 어렵고 처절했던 항일의 이야기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
국립묘지를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음이 착잡했고 또 아프기도 했다. 그 마음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어 안정을 찾을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이렇게 필을 들어 뭔가 적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비록 일기와 같은 짧디 짧은 이 글이 외할아버지의 생전의 유언인- 《나는 민족한테 한점 부끄러운 일을 한적이 없다. 나도 민족독립을 위해 싸운 한국독립당의 한 성원이였음을 밝혀달라》는 절절한 애원을 얼마간이라도 위안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필을 들었을 뿐이다. 덤으로 할아버지가 생전에 당한 설움과 억울함도 다독일수만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가 하는 바람도 가지면서 말이다.
당시 나의 외할아버지인 량시봉이 량세봉과 같이 지하활동을 하면서 독립활동을 하였다는것은 지금에 와서 단지 신빈, 청원의 일부 학자들한테만 알려졌을 뿐이다.
량시봉은 1900년 12월 22일 평안북도 철산군 서리면 면상동에서 태여나 1917년 형님 량세봉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농사일을 하였다. 그는 농사일을 하면서 형님 량세봉을 도와 민족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1918년 그는 흥경현 홍묘자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웨치며 3.1운동에 참가하였던 것이다》(참고자료: 《조선혁명군 총사령 량세봉연구》625페지) 3.1운동은 실패하였지만 그들의 투쟁 의지는 더 높아졌으며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 또한 더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토론한 결과 형님 량세봉은 집을 떠나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동생 량시봉은 안해 김화순과 함께 산골에서 량세봉의 가족들을 돌보면서 독립운동을 돕기로 하였다. 그후 약정대로 량시봉은 독립운동을 위해 량식과 돈을 모으는 일을 도와주었다. 《특히 흥경에서 량세봉이 인솔하는 유격대원들이 쓰는 총을 감추는 위험하고도 중요한 일은 량시봉의 임무였다. 날이 갈수록 독립운동의 조직력량이 확대되고 일본제국주의 타격이 커감에 따라 이름난 량세봉과 량씨가족을 모두 살해하라는 포고령이 내렸다. 하여 량세봉가족은 신빈을 떠나 량씨성을 김씨로 고치고 청원현 소산성자로 이주하게 되었다.》(참고자료: 《国民府朝鲜革命军의 独立运动回顾》桂基苹 419페지)
소산성자에서 량시봉은 김성삼이란 지주의 소작료를 가꾸면서 온 집식구가 생계를 유지하였다. 몇년후 김성삼이 청원거리에 정미소를 경영하였는데 거기서 악착스레 일을 하면서 돈과 량식을 독립군에 지원 하였다. 량시봉은 후방에서 독립군을 돕는 일을 하다가 1933년에 김구선생이 조직한 한국독립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소개인은 만주 산성진 조선족중학교 교장이였던 김소묵이였다고 한다. 독립당에 가입한후 줄곧 비밀리에 혁명을 하였다.
1945년, 드디여 광복을 맞았다. 모두 기쁨과 환락속에서 해방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량시봉가족들은 불행하게도 량시봉이 한국독립당이고 독립운동민족주의 분자라는 미명하에 량시봉은 청원 감옥에 1년동안 갇혀있으면서 변소청소 등 궂은일로 갖은 괴로움과 학대를 받았으며 집식구들은 마을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갔다. 퍽 후에야 무순시와 청원현에서 공작대가 내려와 석방시켰다.
1970년 또 한차례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량시봉은 석달동안 감금되여 고문을 받았다. 그 때 뒤잔등에 반혁명분자라는 글자를 부치고 마을로 다니면서 조리돌림을 당했는데 석가래로 때리고 몽둥이로 때려 목의 피줄이 터졌으며 온몸은 상처투성으로 만신창이 되어서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가 되여서야 집으로 돌려 보냈다. 원래 살던 집도 정부에서 다른 사람한테 주고 고농인 최태화가 살던 오막살이 단칸방에서 옮겨들어 살게 되었는데 집에 있었던 물건까지 몽땅 가져가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량시봉의 안해와 자식들이 생산대에 나가 일하는 공수는 남의 절반밖에 주지 않았다. 설상가상이라고 최씨의 집에서 7개월가량 있는 사이 량시봉며느리가 해산하게 되였는데도 걸칠 이불마저 없었다.
마침 맘씨 착한 한족 아줌마가 마대를 얻어 주어 몇달 동안 마대 신세를 졌다고 한다. 그처럼 해방후에도 량시봉할아버지는 운동 때마다 편안한 날이 없이 시달림을 많이 받다가 뇌혈전으로 3년동안 몸져누워 앓으시다가 1979년 9월 9일 한많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림종에 남긴 말은 다 한마디,《나는 민족한테 한점 부끄러운 일을 한적이 없다. 나도 민족독립을 위해 싸웠다.》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눈을 감는 마지막순간까지도 이 한마디를 외웠을가, 한이 얼음덩이처럼 가슴에 응고된채 저세상 사람이 되여버린 외할아버지 량시봉의 일생을 생각하노라면 눈물보다 가슴이 답답해남을 어쩔수 없다. 이제라도 그 한을 풀어드릴수만 있다면 구중천에서라도 환한 미소를 지을것만 같은 느낌이 새삼스럽다.
어느덧 외할아버지가 돌아간지도 20여년이 넘었다. 아직까지 외할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지 못해 너무 황송하고 안타깝지만 나로서는 그냥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다. 힘도 빽도 없는 일개 아녀자인 내가 어쩌랴.
나는 한국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큰 외할아버지 량세봉장군의 묘소 앞에서 두분의 명복을 빌면서 언젠가는 외할아버지의 한으로 남은 소원을 꼭 풀어줄것이라고 기약없는 기도를 드렸을 뿐이다.
2003년 8월 29일
핸드폰에 깃든 사연
한국법원에서 《주운 휴대전화전원 끄면 절도죄》라는데 주운 휴대전화 리용하면 무슨 죄겠는가 궁금하다.
며칠전에 내가 백제원 커피숍에서 핸드폰을 상위에 놓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커피숍에서 친구가 저녁 7시에 만나자고 했는데 7시 반이 넘도록 오지 않아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댔다. 우린 9시까지 커피숍에서 얘기를 나누고 헤어져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쩌면 커피숍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택시를 돌려세워 커피점으로 달려갔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2층으로 올라갔다. 다행이 손님은 없어 한시름이 놓였다. 혹시 커피를 날라준 아가씨가 방을 치우면서 핸드폰을 건사해 줄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잔을 치운 아가씨 보고 상위에서 핸드폰을 보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못 봤다는 것이다. 아니, 내가 분명히 여기에 두고 갔는데 혹시 내가 나간 다음 다른 손님이 이 방에 들어왔냐고 물었다. 그 사이 손님은 안 들어왔다는것이다. 하긴 내가 이탈한 시간이 불과 반시간도 안 되는 사이였다. 그 아가씨는 그 칸의 걸상 아래를 올리 훑고 내리 훑으면서 소파 위의 깔개도 툭툭 털며 찾는것이였다. 하여 나는 걸상 위에 있을리 없고 상위에 놓았는데 너 정말 못 봤냐고 또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는 정말 아무것도 못 봤다는거다.
그날 밤 나는 허탕을 쳐서 풀이 죽었지만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 와야 했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잃은 핸드폰으로 하여 나의 마음은 사뭇 아팠다. 그 핸드폰은 지난해 12월에 1700원 주고 샀다. 그리고 살 때부터 여지껏 카바를 씌워 아직 새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올해 9월에 후배가 행운이 따른다는 이쁘고 깜찍한 하얀 진주방울 고리까지 달아매 주었는데 잃어버려서 정말 서운하였다. 속도 많이 상했다. 나는 여지껏 조그마한 물건같은것을 잃어본적이 없었다. 평소에 잃는 연습을 했어도 이렇게 속이 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주 다니는 친정길에도 양말 한짝 두고 오면 속이 타서 못 견디는 성미인것을... 짐이 아무리 많고 번거로와도 내가 쓰는 물건은 가져갔다가 꼭 챙겨 오군 하는 성미인데 말이다. 그런 내가 핸드폰을 친정이 아닌 커피숍에 두고 왔으니 속이 안 상할리가 없었다. 그날 밤 남편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이불속에서 끙끙 앓으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너무나 아쉽고 서운했다.
이튿날 하루종일 우울한 기분이였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내 핸드폰에 전화를 여러번 걸었다. 그 때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그러나 핸드폰 잃었다는 신고를 하고픈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냥 그 아가씨한테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여 나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커피숍에 또 갔다. 그 아가씨를 보고 말은 걸지 않고 커피 한잔 마시다가 그냥 돌아왔다. 못 봤다는 아가씨한테 또 물어봤자 민망할 것만 같아 그저 그 아가씨 보기만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저녁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아가씨가 가져간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그 짧은 시간에 다른 손님이 들지도 않았다니 말이야. 그래서 오후에 그 아가씨를 찾아갔지 뭐니. 핸드폰 잃어버린 주인에게는 입력된 전화번호가 있는 만큼 중요한 거니까 돌려달라고 요구했어. 너 그 핸드폰 팔아야 돈 몇푼되겠냐? 내가 돈 200원 줄테니 주인이 오면 돌려주고 우린 서로가 이 일 없었던 걸로 하자며 조용히 타일렀어. 그 쯤 했으니 너 그 아가씨 찾아가면 돌려 받을 수 있을 거야. 》
나는 친구가 미안해 하는 데다 또 친구의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고 해서 이튿날 또 커피점에 갔다. 들어가서 그 아가씨를 보는 순간 갑자기 아무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들어갔다가 그냥 택시를 잡아 타고 급급히 돌아왔다. 다시는 그 커피숍에 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면서 빨리 그 곳과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였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친구한테 인젠 그 핸드폰 더는 갖고픈 마음이 없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말고 미련을 두지 말라고 전화를 했다.
토요일 아쉽지만 더는 잃은 핸드폰을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연통회사에 가서 핸드폰을 잃었다는 신고를 한 다음 돈 50원 주고 원래 번호를 쓰기로 한채 1630원짜리 새 핸드폰을 샀다. 수속절차를 하면서 보니 10월 23일에 요금 100원을 넣었는데 불과 열흘도 안 되 남은 요금이 38원이였다. 순간 흠칫 놀랐다. 누군가 계속 전화를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관절 얼마나 큰 리득을 보려고 남의 가슴에 아픔을 주면서 전화를 마구 사용하는지 그 사람이 죽도록 얄밉고 괴씸했다. 하지만 어쩔수 없이 전화요금 100원 더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 10시에 있은 일이다. 핸드폰을 충전하고 있었는데 핸드폰에 전화가 들어왔다.
《워쓰 니 노우 꿍 니 깐 선머 ? 》‚(나 너 남편인데 지금 뭐하고 있어?) 엉 노우 꿍(남편)이라니 누군데? 전화 잘 못 걸었다고 말하고 전화를 놓으려고 하는데
《너 금요일 메신저 보내놓고 왜 통화가 안되냐? 장거리전환데 농담할 새 없다》
제편에서 길림에서 전화하는데 롱담한다고 짜증을 부리는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이름을 말하면서 전화 잘 못 걸었다고 했더니
《아,홍이 언니 아니에요? 난 욱이인데 서탑에 출근하는 홍이 대상이에요. 홍이 잘 지내고 있어요?‚ 》
(나한테 사촌동생 홍이가 있다.) 근데 서탑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오,오‚》얼버무렸다.
그리고 자는 남편을 깨워 커피점에 홍이 찾으러 갔다. 커피점에 들어가 홍이가 누군가 물었다. 과연 그 며칠 내가 찾던 그 아가씨였다.
나는 그 아가씨를 밖에 불러내여 내 핸드폰 달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무슨 핸드폰이요? 난 못 봤어요.‚ 》
시침을 뚝 따면서 못 봤다는것이다. 그래서 나는 눅잦혔던 목소리를 좀 높여 나 알고 왔으니 지금이라도 내 핸드폰 내놓고 오늘 산 핸드폰 니 가지라면서 영수증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자기는 기어이 그 핸드폰 모른다고 딱 잡아 떼는 것이였다. 이 때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남편이
《야! 너 가져갔다는 증거가 있어서 찾아왔는데 안 내놓을래?》 꽥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끄떡이 없었다. 뻔뻔스레 고개를 쳐들고 얼굴 색 하나 변하지가 않았다. 나는 하도 기가 막혀
야, 욱인 누구냐? 여기 핸드폰에 전화가 들어왔는데 이건 어떻게 해석할래? 그래두 모르겠냐? 》
《나 욱이 알아요. 근데 그 핸드폰 내게 없어요. 친구가 뺏아갔어요. 》
《친구한테 가서 가져오거라》
《친구 흑룡강 갔어요. 나두 못 찾아요. 연락처 없어요. 》
여러번 상냥한 말투로 달래기도, 때로는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물었지만 승인 안하던 아가씨가 엄연한 증거앞에서도 한다는 소리가 고작 자기한테 없고 친구한테 있다는것이다. 그리고 잘못을 뉘우치려는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억이 딱 막혔다. 미련하고 우둔한 애를 앞에 두고 뭐라 할 말을 못 찾아 한참 망설이다가
《그럼 이 일 어떻게 할래? 너를 생각해서 파출소에도 커피점 경리한테도 알리지 않았으니 내 핸드폰 지금이라도 가져오면 새 핸드폰 너 줄게‚》 하였다. 하지만 그 아가씨는《 못 찾아요. 친구가 멀리 가져 갔어요.‚ 》
이 때 커피점 경리가 밖에서 뭘 하냐고 나왔다. 하여 일의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펄펄 뛰면서 아가씨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가씨 아빠가 전화를 받았는데 커피숍으로 온다는 것이였다. 그걸 알고
《아빠가 알면 욕 먹어요. 나 감옥에 들어갈래요.》
너무 어처구니 없는 그 말에 나이를 물었더니 23살이라고 한다. 나는 그만 말문이 꽉 막혔다
한시간 반이나 기다려서야 드디어 홍이 아빠가 커피점에 왔다. 여직 홍이도 잘 못했다고 사과를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죄송하다고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제발 파출소에 신고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였다. 내가 보기조차 구차하여 이러지 마시고 내 핸드폰만 주면 되니 홍이한테 다시 물어봐 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가져간 핸드폰은 돌려줄 수 없고 새 핸드폰 값 물어 주겠다면서 사정하는 것이였다. (난 원래부터 전혀 파출소에 알릴 생각은 없었다. 조용히 둘이서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었을 뿐이다) 나는 그 애 아빠 말을 들으면서 련민의 감정이 북받쳤다. 하여 소원대로 따라주고 총총히 집으로 돌아 왔다.
집에 돌아오니 밤 12시 15분이였다. 핸드폰 범인은 찾아서 새 핸드폰으로 탈바꿈했다지만 착잡한 생각에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그 뻔뻔스럽고 무지한 커피숍 아가씨의 얼굴이 그냥 눈앞에서 얼른거려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잃었을 때보다 더 잠을 설치였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수치를 전혀 모르는 그 애, 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한밤중에 딸 대신 빌어야만 했던 그 아빠, 과연 백제원 커피숍 종업원으로 그냥 일을 할수 있을는지?
노신 소설《약》에서 혁명가 하유가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무지막지한 옥지기 아의더러 《불쌍하다》아의한테 맞으면서도《불쌍하다》 연신 안타까와 부르짖던 구중국의 최하층사람들한테 무지몽매하고 우매속에서 깨여나라는 웨침일수도 있는 그 말이 연상된다. 한국법에는 찜질방 탈의실에서 시가 5만원 중고 휴대전화를 주워 전원을 끈뒤 찜질방 옷장안에 보관하고 있다가 도난 신고를 받고 경찰관에게 붙잡혀 재판에서 벌금 100만원 안기고 절도죄로 처벌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워서 전원을 끄고 보관한 것만으로도 절도죄가 성립되는데, 주운 핸드폰으로 사방에 전화를 걸기까지 한 그 애는 , 가져갔는가를 묻는데도 시침을 뗀 그 애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결국엔 증거 앞에 실토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티끌만치도 없는 그 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지한 그 아가씨가 그저 불쌍하게만 생각된다.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커피점 경리도 알게 되었는데 그 직장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을까? 혹시 그 날 밤으로 쫓겨나지 않았는지? 그 밤중에 아빠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는것은 아닌지, 그로 인해 그 가정의 평화가 깨지는것은 아닌지? 만약 내가 핸드폰을 커피숍에 두고 오지 않았더라면 혹시 나의 불찰로 그 애를 궁지에 몰아 넣은거는 아닌지? 내 탓도 있지 않을는지?
하여튼 그 아가씨가 불쌍하게 생각된다.
2004년 11월 18일
가슴아린 오해
회백색 하늘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운동장으로부터 휘뿌연 먼지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려주면서 얼굴을 스쳐 지난다. 겨울이지만 철에 맞지 않게 춥지도 않고 그냥 찌뿌등하여 궂은 얼굴을 하고있다. 이런 침울한 날엔 마음도 몹시 울적하다. 차라리 비가 내려 내몸을 푹 덮어씌우든지 했으면 마음이 후련할것 같다.
오늘은 좀 일찍 출근하였다. 문을 열기 바쁘게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급히 달려가 수화기를 귀에 대니 교장실에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는것이다. (우리 교연조의 전화는 교내에서만 통화가 된다.) 누굴가? 누가 나를 찾을가? 이미 친구들과 연락이 끊어진지도 오래되었는데, 교장실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사람도 없고 또 올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일찍 누굴까? 교장실로 달려가 전화기를 쥐는 순간 나는 놀랐다. 4년동안 소식 없었던 언젠가 나를 몹시 실망주었고 오해도 풀지 않은채 떠나버렸던 친구 H였다. 워낙 다혈질이여서 쉽게 격동이 잘되는 나이건만 그날은 나답지않게 전화받는 내 마음이 너무너무 평온하고 침착하였다.
H는 대학교 때의 동창이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오동통한 볼은 자못 복스럽게 생겼다. 그런데다 단벌머리에 키까지 작아 더욱 깜직하고 귀염스러웠다. 우리는 한 기숙사에서 4년동안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었다. 네것, 내것 구분없이 아주 자별한 사이였다. 하느님의 조화라 할가 우린 한 고향 친구도 아니고 또 심양사람도 아니건만 운명은 우리를 한시내에 배치시켰다. 참말 행운이였다. 하여 졸업후에는 사이가 더더욱 가까워졌다. 또한 우리둘은 다 집에서 외동딸, 언니 있는 것을 무척 부러워하면서 자라왔기에 친자매처럼 지내었다. 우린 하루라도 떨어져서는 서로 그리워서 못견딜 지경이었다. 너무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고 다니였기에 상호간의 동사자들로부터 키, 생김새, 옷차림이 너무 비슷하여 정말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게 한사람 같다는 평을 밥기도 하였다. 그런데 내가 먼저 결혼하였다. 결혼후에는 독신 때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항상 가까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된다. 그런데 그녀가 문득 한국에 시집가면서 간다는 말도 없이, 전화한통없이 그저 훌 떠나버렸다.
그래도 나는 믿어지지 않아 맞바람을 맞아가며 씽씽 자전가를 타고 H가 있는 회사로 확인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현실은 틀림이 없었다. 그때 H와 한 회사에서 사업하고 있는 친구부터 그녀가 나한테 많은 오해를 품고 또 마음 내키지 않는 길을 걸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대관절 무슨 일일가? 내가 무얼 잘 못했을가? 어떤 일로 마음이 상했을가? 왜 나한테 말도 없이 떠났을가? 너무 친숙하고 너무 똑 같아보여서 질투에서 오는 복잡한 심리일가? 아니, 누가 말을 잘못 전달이라도 한게 아닐가?… 나는 나의 지난 일을 여러모로 검토해보며 의문을 풀지 못한채 그냥 되돌아왔다. 그러나 자존심만은 몹시 상하였다. 나는 풀지못한 오해로 하여 마음이 얼마나 괴로왔는지 모른다. 친구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딱 친구로부터 진심과 믿음이 배반당했다는 생각에 더더욱 가슴이 아팠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욱 서글퍼져 잊으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은근히 편지라도 한장 오지 않겠는가 고대하기도 하였다. 무슨 오해였는지 알고 싶었고 속시원히 나의 마음을 풀어놓고 싶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H가 나를 찾아오리라고 굳게 믿었다. 또 기다렸다. 항상 솔직한 마음, 후더운 인정, 진실한 나 그대로였기에……!
한국에서 4년간 육체고생, 정신고민, 친구로부터의 불신임 등 별의별 고충을 겪으면서 아직도 옛친구인 내가 가장 진실하고 믿음이 간다면서 자존심도 다 버리고 귀국하자마자 나를 찾았다면서 점심에 만나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H의 모습은 예전대로고 말하는 모습도 스스럼없었지만 나는 좀 어색한 기분이었다. 더욱이 친숙한 사이의 오해는 속에 두면 둘수록 더욱 가슴에 옹이 맺힌다. 그리고 친구에게 그릇된점이 있을때 가차없이 지적해줄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만이 우정은 더욱 깊어간다. 그저 정주고 마음만 주면 친구가 아니다. 희망이 크면 클수록 주는 실망도 더 크다고 남달리 친했던 사이기에 상하는 상처는 더 아프고 짜릿짜릿 쓰려나는 것이다.
나는 도무지 그녀를 살갑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한 내 애정은 완전히 식어버렸는지 모른다. 내 이상으로 사랑했던 H. 누구보다 더 믿고 진정을 주었던 H였다. 비록 오늘의 만남으로 얼었던 내 가슴이 얼마간 녹기는 했지만 옛날의 우리 사이로 돌아가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상처가 아무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왜냐하면 그녀가 나에게 준 상처는 그만큼 깊고 컸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불신임, 질투, 배신, 그리고 내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모욕이 상처를 남긴 끈이였기 때문이다. 도무지 쉽게 용서를 할 수 없는 《오해》였다. 너무도 깊고 아픈 상처이기에 여기에서는 잠시 줄인다.
커피점에서 우리는 밤장막이 드리울때까지 서로 살아온 얘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또 한번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날은 흩날리는 진눈깨비가 내 몸과 마음까지 흥건히 적셔주었다.
1997년 겨울
해바리기씨와 침대표
1월 20일이 수업날이여서 나는 3일전에 차표를 끊어야 했다. 뒤늦게 시작한 연구생 공부때문에 3년간을 이렇게 겨울이면 이맘때, 여름이면 8월에 연길을 다녀오군 했다. 그때마다 침대표를 사는것이 은근히 신경 쓰이게 하는것이였다. 지난번 여름에는 침대표가 없어 좌석권을 떼고 승차했었는데 밤새 무진 고생을 하기도 했었다. 하긴 심양에서 연길까지는 장장 14시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니 지루한것이야 말할것도 없다. 그래서 침대표를 사는것이 큰 과제중의 하나였다.
그날 나는 심양북역에서 심양-연길행 기차표를 샀었다. 겨울이라 출입문과 멀리 떨어져있는 중간쯤의 침대표를 사고 싶어 매표원보고 그렇게 해달라고 했더니 없다는것이였다. 이미 다 나갔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12호 차간의 2호석을 내주는게 아닌가, 그래서 요즈음은 새해의 벽두이기에 인구류동량이 많은 가보다고 생각하면서 출입문의 바로 옆이긴 하지만 침대석표를 사게 된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자아위안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런데 3일후, 심양-연길행 렬차에 몸을 실었을 땐 나의 자아위안이 현실과 한참 동떨어져있음을 인차 눈치챌수가 있었다. 글쎄 12호 차간의 중간석이 듬성듬성 빈자리가 있는것이였다. 기분이 상하고 얼마간 화도 났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먼 출장을 떠나다보면 이런 일을 당하는것은 여상사라는것을 나는 주위에서 들어서 알고있다. 매일 개혁을 부르짓지만 아직도 삭막한 현실을 아녀자인 나의 힘으로 어찌하랴.
온밤을 떨며 지새야 하는 고생을 생각하니 걱정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하여 생각다 못해 나는 승무원에게 자리를 좀 바꾸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키가 작달막하고 실눈을 가진 서른댓 되여보이는 남자승무원이 시물시물 웃으면서 자기가 팔고있는 해바라기씨를 사주면 자리를 바꾸어주겠다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반가운 그 말에 귀가 번쩍 열리는 느낌이였다. 실은 해바라기씨는 별것이지만 그것을 사주는것으로 자리를 바꿀수 있다는것은 유혹이였다. 그러면 온밤 추위와 문을 여닫는 소리에 시달리지 않고 편히 자면서 연길까지 갈수 있는것이 아닌가, 이런 호판을 누가 마다하랴. 그래서 나는 무작정 그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해바라기씨를 살테니 그럼 표를 바꿔주세요.》
나는 인민폐 10원을 내놓았다.
그런데 실눈의 그 승무원이 10원을 더 달라는것이 아닌가.
《10원 더.》
《?》
내 느낌에도 내 눈이 퀭해졌을것 같았다. 도대체 이사람이 얼마나 되는 해바라기씨를 나에게 팔려고 이러나싶었다. 가끔 시장이나 식품가게에서 해바라기씨를 사봐서 알고있지만 단돈 2원어치만 사도 온 하루 까먹을수 있는것이 해바라기씨였다. 그러니 놀랄수밖에 어정쩡한 기분에 10원짜리 한장을 더 내밀었더니 시무룩이 웃으며 해바라기씨를 꺼내는것이였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리 50그람짜리 봉투해바라기씨 4개를 내 침대우에 던져주는것이였다. 그러면서《네개요. 적소? 더 있는데…》하는것이였다. 한봉투에 1원씩하는 해바라기씨를 5원에 팔다니?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나왔지만 그래도 어쩔수가 없었다. 단지 춥지 앟고 소음이 적은 곳으로 옮겨 편히 하루밤을 잘 넘길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에 잠자코 있을수밖에 없었다.
나는 풀었던 짐을 챙겨가지고 다시 10호석 중간침대로 가서 내가 소지했던 침대시트를 펴고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문득 아직 표를 바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승무원을 찾아가 내 표와 10호석 침대표를 바꾸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랬더니 승무원의 대답은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그냥 있어도 괜찮다는것이였다. 그래도 난 안된다고, 빨리 표를 바꾸어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조르다싶이 하였다.
그러자 승무원은 《이 아줌마 일없다는데두나…일이 있으면 날 찾소.》하며 제쪽에서 짜증을 내며 가버리는것이였다.
당당한 그의 태도에 나는 별일 없겠지 생각하면서 자리로 돌아와 책을 펼쳐들었는데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동안 자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깨우면서 제자리에서 자지 앟고 남의 자리를 차지했다면서 불쾌해 하는것이였다. 날보고 제자리로 가라는것이였다. 《아니, 여기가 내자리가 맞는데요…아까 렬차승무원이 자리를 바꿔줬는데요…》를 거듭 강조하면서 그냥 내 자리라고 우겼다. 하지만 차마 해바라기씨를 사는 대신 자리를 바꾸었다는 말은 할수가 없엇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손님은 내 눈앞에다 자기의 표를 내보이면서 자기의 자리가 확실하니까 무작정 내놓으라는것이였다. 눈을 펀히 뜨고도 할말이 없는 립장이 되고 말았다. 그럼 당당했던 그 승무원은? 나를…어쩌면 작은 리익때문에 이런 편법을 쓰는 그 승무원이 한심해났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이렇게 벌어서야 얼마나 가치있게 쓰랴싶었다. 또한 그 편법에 내가 편승한, 아니 내가 우선 그 조건을 지어준것 같아 찜찜해났다. 나는 내 자신을 꾸짖으며 내가 폈던 침대시트를 둘둘 말아가지고 다시 내 원래 자리로 돌아오고말았다. 그때는 이미 시간이 새벽 2시를 달리고있었다. 나의 목적지인 연길역에 도착하자면 아직도 대여섯시간은 지나야 했지만 나는 그 실눈을 가진 남자승무원을 다시 찾아가고싶은 생각은 꼬물도 없었다. 피곤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몸은 오싹오싹 더 추어났다. 생각해보니 웬지 당한 내자신이 은근히 미워났다. 그리고 실눈을 가진 그 승무원도 얄밉고 괘씸했다. 오늘은 비록 내가 당했지만 다음은 또 누구 차례일지 그 누가 알랴! 철도청의 철저한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한, 그리고 프로정신과 직업도덕이 우선시 되지 않는 한 내가 당했던 불가사의한 일(비록 하잘것없는 일이라도)들이 근절되지 않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물론 언제든지 근절될 때는 있을것이라고 믿음을 가겼지만말이다. 그날은 참 내 마음이 찝찝했었다.
2002년 12월 5일
성숙하여 가는 제자를 지켜보며
하루 아침 학교에 출근하니 책상우에 편지가 놓여있었다. 봉투에 발신인의 주소도 없이 개봉한채로였다. 속지를 꺼내보니 졸업반의 박창녀학생이 쓴 편지였다. 《4년동안 선생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문학에 눈을 티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에게 인생을 알게 한 스승은 김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수고많았습니다…》고맙다는 인사를 글로 써서 가져다 놓은 것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속이 좀 꽁한편인 그는 지난해에 있었던 일 후로는 나를 보면 왠지 부끄러움을 타며 슬쩍 웃고는 피하는것이였다. 일이 있을 때도 만나서 직접 얘기하지 않고 종종 글로써 의사를 표달하군 하였다. 이 편지는 그 실습가기전에 하는 인사인셈이다.
지난해 5월, 료녕성 중소학생즉석작문콩클 때의 일이다. 학교지도부에서는 지도 교원 임무를 나에게 맡기였다. 때마침 우리학교는 《5.1》절 휴식을 한주일가량 하게 되었다. 학교지도부의 지명으로 이 학생이 나와 함께 휴식하지 않고 학교에서 주숙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짓기 훈련에 전념하였다. 학생들의 사로를 틔워주기 위하여 낮에는 대자연을 한껏 혼상하며 관찰하게 하였고 저녁에는 제각기 글을 섰다. 또 서로 교류하면서 글짓기 련습에 여념이 없었다. 그 네명가운데 둘은 도시학생이였다. 도시에서 자란 학생들은 고향, 향토같은것에 대한 문장을 쓰라고 하면 좀 어렵게 생각한다. 하여 비록 도시에는 대 자연의 봄을 싹틔울 터전이 없고 시내물이 흐르는 강과 조약돌이 없지만 그래도 공원이나 유보도를 거니느라면 먼가 착상이 떠오를것이고 또 시내를 돌면서 의식적으로 관찰하여도 뭔가 숨쉬고 있는 것이 보일것이라는 계시를 주어 의식적인 관찰로 무엇을 발견하게 하였다. 결과 며칠 안되는 동안에 학생들이 쓴 문장이 제각기 대여섯편씩 되었다. 친히 관찰하고 또 실제 있는 체험을 썻기에 글들마다 비교적 생동하고 감칠맛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콩클준비를 참답게 하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하는 일의 보람을 가슴깊이 느꼈다.
드디어 콩클의 날을 맞았다. 모두가 높뛰는 심장을 무마하며 결과를 초조히 기다렸다. 공든탑이 무너지랴! 1등에서 3등까지 셋이나 등수에 걸렸다. 그때 나는 너무너무 격동되여 눈물까지 흘렸었다. 외계와의 경쟁이 별로 없는 우리 학교에서 8년만에 처음 느껴보는 별미의 감정이었다. 또 학생들과 고락끝에 맛보는 한없이 아름찬 기쁨과 환락이였다. 허나 마음 한구석에는 아쉬움도 있었다. 유독 박창녀가 등수에 걸리지 못했기때문에! 항상 승리자의 배후에는 패배자가 뒤따른다는 도리는 알고있는 우리지만 자존심이 강한 그로서는 접수하기가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는 시상식이 끝나자 바람으로 숙소에 돌아와서 엉엉 소리내면서 흐느꼈다. 나도 마음이 쓰렸다. 울고있는 그 모습을 그저 지켜만 볼수는 없었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괴롭고 위축감을 받았을 때 실컷 울고나면 속도 풀리고 마음도 얼마간 가라앉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단 한마디 《문학의 길은 좌절이 많고 평탄치 않습니다. 오늘 감수를 일기로 적어 두세요》하는 말을 남기고 나왔다…….
그때로부터 나만 보면 괜히 부끄러워하면서 외면하던 그가 후에 글도 자주 쓰서 책상우에 놓고 가군하였다. 사람됨됨이가 퍽 성숙되여가고 또 글도 점점 여물어가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가르침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 나도 시장경제의 충격속에 흔들려 본적이 있었는데 이때야 비로소 내가 하는 일의 신성함을 심심히 알았고 또 보람도 가지게 되었던것이다. 알게 모르게 진실하게 커가고있는 학생들의 밝은 얼굴에서 무등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트림없이 변함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애어린 새싹들을 훌륭하게 자라게 할 마음을 더욱 굳게 다지군 한다!
2000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