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
김 희 진
남편과 함께 걸었던 덕수궁 길을 걸었다. 덕수궁 나무는 벌써 단풍이 들고 있었다. 거리는 맑은 하늘 아래 생동감이 넘쳤다. 이런 날을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평소 눈에 띄지 않았던 길가 낡은 식당 앞에 늘어선 작은 화분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그것들이 아름다웠다. 덕수궁 길을 빠져나와 낡은 간판이 걸려있는 커피숍을 기웃거렸다. 입구에 걸려 있는 새 조각상은 한쪽 날개가 떨어져 나간 채 먼지가 누렇게 쌓여 있었다. 텅 빈 속을 무겁게 끌어안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시켜 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커피가 나왔지만 마실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테이블마다 여성들이었다. 대부분 60대인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내 옆 테이블에서 그녀들이 속옷 브랜드에 대해 수다를 떨면서 브래지어 이야기를 했다. 그녀들이 떠드는 ‘브래지어’라는 말이 위대한 예술이거나 보물처럼 들렸다. 브래지어가 감싸고 있는 풍만한 유방을 떠올리며 나는 암에 걸렸다는 가슴을 만져보았다. 여성이 마흔을 넘으면 가슴부터 여성성이 대폭 사라진다고들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60대에 오히려 유방이 부풀어 오르는 경향이 있다는 친구들의 고백을 많이 들었다. 60대에 왜 그런지 과학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좋아진 영양 상태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무슨 운명이기에 나는 이렇게도 비극적일까!”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붉은 해가 지는 창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해는 산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나도 따라 사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커피를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를 걷다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석양빛이 하얀 타일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붉은색에 공포를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빌딩 1층 소품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칠십쯤으로 보이는 상점 여주인이 나에게 친절하게 무얼 찾는지 물었다. 그때 한쪽 구석에 놓인 TV에서 빨치산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내 눈은 빛처럼 빠르게 TV 뉴스에 꽂혔다. “마지막 빨치산 최연희 씨가 오늘 서울대학병원에서 향년 91 세로 사망했습니다.” “아직까지 저런 사람이 살아 있었다니!” 뉴스를 들으며 상점 주인이 놀랐다. 정작 놀란 건 나였다. 나는 빨치산이었다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현기증이 일어났지만 태연한 척하려고 애썼다. 상점에는 도자기, 사진첩, 작은 액자, 열쇠고리, 엔틱풍 시계 등 많은 소품들이 있었다. 주로 수입품이었다. TV를 끄고 상점 주인이 물건을 소개했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듣다가 “암에 좋은 건 없나요?”라고 물었다. 뜬금없는 내 말에 주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주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길가로 나와 허탈하게 걸었다. 빨치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떨렸다. 죽어서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죄인처럼 걸으면서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심정을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걸어도, 걸어도 어떤 해답을 찾을 수가 없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벨을 눌렀다. 그렇게 한참 벨을 누르다가 정신을 수습하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적막으로 가득한 방에서 나는 드디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상 예수님을 향해 태어나 지금까지 나는 왜 그렇게도 가혹하게 살아야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왜 이 참혹한 병에 걸려야 하느냐고 항의했다. 예수님은 힘들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말이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 같았다. 광야에 내몰린 기분으로 옷을 갈아입은 후 밖을 내다봤다. 먹빛으로 건너간 어둠이 깔린 아파트 뒷산이 오늘따라 무서웠다. 휑하니 커 보이는 거실의 연한 베이지색 벽지가 오래된 누런 봉투처럼 칙칙해 보였고, 벽지에 그러져 있는 마름모꼴 작은 무늬가 흩어졌다 모였다 하기도 했다. 그리고 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움직임이 없는 묵직한 늪처럼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멍한 내 눈 속으로 간판들이 들어왔다. 식당, 어린이집, 체육관 등의 간판 불빛이 도시의 밤을 밝혀주고 있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나만 달라져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운명이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가고 말았다. 건강검진을 하라는 통보를 받고 검진을 했다. 재검이 나와 다시 검사를 받았을 때 의사가 보호자를 찾았다. “보호자와 함께 오셨나요?” 재검을 받고 난 다음 의사가 환자의 보호자를 찾는다는 건 환자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다. “저에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럴까요. 음, ……. 유방암 4기입니다. 그것도 말기로 접어들었어요.” 의사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컴퓨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 년 전 방사선 촬영과 초음파를 했을 때까지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었다. 4기도 모자라 다시 말기로 가고 있다면 살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현실인지 악몽인지 헷갈렸다. 의심과 두려움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다른 병원에 다시 진단을 받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의사는 검진 결과지를 번갈아 보며 친절하게 말했다. “너무 상심 마시고요……. “ 유방암은 비교적 예후가 좋은 암이라, 수술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하며 환자들마다 증상의 발달 양상이나 속도가 다르니 덮어놓고 4기라는 것에 너무 놀라지 말라고 의사는 당부했다. “유방만 들어내면 죽지는 않겠지요?” “긍정적인 생각이 병의 절반을 담당합니다.” 의사는 확실한 대답 대신 거듭 긍정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럴 때 환자가 과연 긍정적인 생각이 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의사도 궁색한 대답을 하느라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말았다. 텅 빈 내 속으로 어두운 터널 안 같았던 유년 시절이 폭포수처럼 쳐들어왔다. 엄마는 손수레를 끌고 시장에서 노점상을 했다. 우리 집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던 부산 아미동 산 중턱이었다. 그곳은 특히 북한 피난민들이 북적였다. 우리 집은 깎아지른 듯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우리 집 옆에 함경도 아줌마네 집이 있었고, 인심 좋은 함경도 아줌마네 집에는 노상 이북 피난민이 들락거렸다. 그런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던 엄마는 그중 인물이 번듯하게 생긴 이북 남자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내 앞에 그 남자를 데리고 와 인사를 하라고 했다. “새아버지 될 분이다 인사드려.” 엄마가 소개한 남자는 바로 다음 날부터 내 계부가 되었다. 인물이 번듯한 계부는 늘 집에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엄마가 벌어서 계부를 먹여 살린다는 걸 눈치챈 나는 계부가 미웠다. 계부 역시 자기를 미워한 나를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여겼다. “쥐방울만 한 게 어른에게 버릇없이 굴다니. 빨갱이 새끼 주제에.” “빨갱이가 뭔데요?” “니 아비가 빨치산이었잖아?” 그때까지도 나는 빨치산이 뭔지 몰랐지만, 왠지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계부는 사사건건 빨갱이 새끼라며 나를 공격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상급반에 올라갔을 때 반공교육을 받고서야 빨갱이가 뭔지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계부가 말한 빨치산과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었지만, 엄마는 내가 중학교에 가면 말해 주겠다며 대답을 피했다. 계부는 걸핏하면 빨갱이 자식이라며 험상궂은 표정으로 내 뺨과 머리를 때렸다. 심하면 무릎을 걷어차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코피를 쏟았다. 당장 집을 나가고 싶었지만 엄마가 불쌍해 참아야 했다. 그런 계부와 한 집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이었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으려고 나는 쥐새끼처럼 부엌 옆 다락방에서 숨어 지냈다. 엄마와 계부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았다. 학교에 갔다 오면 내 등에는 성이 다른 동생이 늘 업혀 있었다. 엄마도 차츰 계부에게 질리기 시작했다. 번듯한 인물에 끌려 만난 것을 후회했다. “그놈의 인물이 원수야. 옛말 틀린 것 하나 없어.” 엄마도 놀고먹는 계부의 실체를 알게 되자 돈을 내가 책상으로 쓰는 조그만 나무 상자 밑에 숨겼다. 그렇게 해서 돈이 모이면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다 팔았다. 그런데 어느 날 상자에 숨겨 둔 돈이 없어졌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처음에 엄마는 나를 의심했다. “여기 돈 둔 것 너밖에 모른다?” 엄마는 나를 의심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느 날 “그놈 짓이었어. 내가 미친년이지. 그놈의 상판대기가 뭐라고.” 라며 넋을 놓았다. 그날 엄마는 장사도 나가지 않은 채 나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계부는 엄마가 번 돈을 훔쳐다가 주로 사창가에서 탕진했다. 엄마가 계부에게 “짐승보다 못한 놈.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년들에게 바쳐!”라고 욕을 퍼부으면서 발을 구를 때마다 계부는 엄마를 폭행했다. 엄마 코에서도 사흘이 멀다 하고 피가 쏟아졌다. 중학교 2학년 때 엄마가 놈에게 폭행을 당하고 코피를 쏟는 것을 보면서 계부를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등교 때부터 내리던 비가 하교할 때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데 어지러워 쓰러질 것만 같았다. 영양 결핍으로 어지럼증을 달고 살았다. 입가에는 궤양으로 늘 피가 났다. 집에 가면 동생도 봐야 하고 밥도 해야 했지만 그날은 밥도 하지 않은 채 기회를 노렸다. 나는 책가방 속에 숨겨 두었던 과도를 꺼내 가슴속에 감추었다. 그리고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처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대낮에 놈이 한밤중처럼 자고 있었다. 놈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데 다시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어지럼증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막상 놈을 죽이려 하자 호흡이 가빠지면서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더 어지러웠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놈이 거칠어진 내 숨소리에 그만 깨고 말았다. “뭐야?” 계부는 예사롭지 않은 내 표정에 조금 놀라면서도 누운 채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는 하루 종일 힘들게 일 하는데 대낮에 잠이나 자고 있어?” 나는 막상 칼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계부를 향해 거친 말을 쏟아냈다. “빨갱이 새끼가 어른에게 말하는 것 좀 보라지.” “네가 무슨 어른이야.” “뭐?” “빨갱이라니, 네까짓 게 뭔데 함부로 말해!” 나는 빨갱이라는 말에 가슴속에 품고 있던 칼을 불쑥 꺼냈다. 놈이 나를 자극하자 부지불식간에 용기가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순간 당황한 계부가 발로 칼을 든 내 팔을 걷어차며 총알처럼 일어났다. “빨갱이 새끼는 역시 다르군.” “너는 우리 엄마 피 빨아먹는 흡혈귀야. 너 같은 건 죽어야 해.” 나는 재빨리 칼을 집어 들었지만 계부의 손에 칼을 빼앗기고 말았다. 내 전모를 알아버린 계부는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날 밤 장사를 하고 들어온 엄마가 계부 앞에 엎드려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울부짖으며 나무랐다. “어리석은 것아. 아무리 미워도 이건 아니지.” 그런 일이 있고부터 계부는 더 당당하게 엄마 등골을 빼먹었다. 걸핏하면 ‘살인자’라고 나를 욕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엄마가 번 돈으로 술친구들을 불러 모아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엄마가 한마디 하면 엄마를 반 죽도록 폭행했다. 엄마는 팔, 다리, 얼굴, 등, 어디든 가리지 않고 매를 맞아 온몸에 시퍼런 멍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그런 사정을 남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입단속을 하면서 뼈가 빠지도록 시장에서 돈벌이를 했다. 나는 분해서 하염없이 울면서 그런 놈하고 사는 엄마를 원망했다. 계부가 있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친구들 집을 전전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중에서 수영이 집에서 신세를 가장 많이 졌다. 수영이는 내가 울면 함께 울었다. 수영이 엄마는 내 점심 도시락까지 챙겨주면서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수영이하고 함께 공부하면 된다고 용기를 주었다. 그래도 엄마가 가없어서 집을 영 떠나버릴 수는 없었다. 계부 말대로 아버지는 지리산 빨치산이었다. 중학교 일 학년 때 엄마가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지리산 등반을 하다가 빨치산들에게 붙잡혀가게 되었다고 했다. 나를 임신한 엄마는 밤낮으로 두려움 속에 떨며 살아야 했고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는 것도 모른 채 토벌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했다. 그 후로 남은 가족들이 모두 숨어 살았다. 나를 데리고 시댁 가족들 곁을 멀리 떠나버린 엄마는 나에게 아버지 형제들과 접촉은 물론 집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고 일렀다. 그래도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나는 엄마 몰래 여수에서 살고 있다는 삼촌 집을 동사무소 등 수소문 끝에 찾아갔다. 아버지의 혈육이라고는 삼촌 하나밖에 없었다. 삼촌 집은 전라도 여수 변두리 판자촌이었다. 눈에 보이는 세간은 방 한 칸에 초라한 이불만 개켜 놓았고, 옷가지 몇 개가 벽에 걸려 있었다. 빨치산 가족이라는 딱지 때문에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면서 행여 라도 누가 눈치챌까? 두려움에 떨면서 노동으로 힘겹게 살고 있었다. 숙모는 하나밖에 없는 귀한 피붙이가 왔다면서 정성껏 상을 차렸다. 짠지 서너 조각과 동탯국이 전부였지만 정성을 다해 차린 밥상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피붙이의 정이 흠씬 느껴졌다. “네 엄마 절대 용서 못한다.” 삼촌은 울부짖듯 말을 이어나갔다. 빨치산이 토벌되던 날은 겨울 치고도 몹시 추운 날이었다고 했다. 지리산 골짝은 바람소리에 울고 총소리에 울고 비명소리에 울었다고 했다. 호롱불의 심지를 낮추고 숨죽여 떨었다고 말하며 삼촌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인 듯 주먹을 불끈 쥐며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사망 후 삼촌은 사흘들이 경찰서로 불려 가 심문을 받았다. 시집 식구들 몰래 갓난아기인 나를 데리고 야반도주한 후 엄마가 소식을 끊었다고 하며, 나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게 가장 원망스럽다고 말하며 삼촌은 치를 떨었다. 나머지 일가친척들은 빨치산 협조자로 몰려 극심한 고초를 겪다가 죽었다고 했다. 삼촌은 줄곧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어디선가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아버지 사진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유복자로 엄마 뱃속에 두고 처형당했던 탓에 젊은 청년이었다. “가까운 절에 네 아버지를 올려두었다. 제사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이제부터 제사 때마다 올게요.” 삼촌은 아버지 사망일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 빨치산이 가장 많이 사살된 날을 잡아 아버지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삼촌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빨치산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어 지리산, 남부군, 태백산 등 빨치산에 대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을 보면서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빨치산이 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쩌다 엮인 억울한 사람들도 많았다. 아버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계부와 갈등이 심해질 때마다 아버지가 더욱 가엾고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조차도 내 머릿속에서만 허용되었다. 행여 아버지에 대한 말이 입 밖으로 새어나가는 날에는 나 역시 빨갱이가 되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날마다 누가 알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며 숨을 죽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을 가슴에 품고 세상 누구에게도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지독한 환경에서도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런데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이모가 등록금을 만들어 보겠다며 대학에 갈 것을 권했다. 나는 학비가 싼 국립대학 영문과에 합격했다. 영문과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좌제가 있는 한국, 좋은 추억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내 나라가 싫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연좌제도 문제가 되었지만 엄마가 가여워 떠날 수가 없었다. 엄마는 계부에 이어 동생들 때문에 이중삼중 마음고생을 겪고 있었다. 계부와 엄마 사이에 난 자식들은 엄마 속을 무척 썩였다. 여동생은 중학교 때부터 가출하여 엄마와 내가 사흘들이 찾아다녀야 했고 남동생 둘은 싸움질로 경찰서를 드나들었다.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 두 남동생은 모두 중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나는 그들이 형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게, 그들과 반쪽 형제라는 사실이 정말 싫었다. 지난날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이제는 암에 걸려 죽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힘들 게 산 나만 죽고 행복하게 살아온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무 일 없이 잘 산다는 것이 불공평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행복하게 사는데 나만 억울하게 죽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붙들고 내 처지를 털어놓으며 밤새도록 울고 싶었다. 오진이라는 말이 입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기적, 기도, 자살 등의 단어가 자꾸 떠올랐다. 수만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메웠다. 가슴을 만져보았다. 가슴 안쪽과 겨드랑이 쪽에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멍울이 만져졌다. 유두를 꾹 눌러보았다. 분비물이 나왔다. 그것들이 나를 야금야금 죽여 가고 있었다. 통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습격한 통증 때문에 나는 맹수에게 붙잡힌 어린 짐승처럼 방바닥을 이리저리 굴렀다. 암은 맹수이고 나는 어린 짐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증으로 한바탕 구른 뒤 밖으로 나왔다. 나무들이 나뭇잎을 떨어내고 있었다. 나무와 나뭇잎의 이별을 보면서 흙 한 줌을 집어 들었다. 머지않아 나도 한 줌 흙이 될 것이었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한탄이 다시 밀물처럼 쳐들어 왔다. 이제야 세상이 모두 아름답고 선하게 보였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다시는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프고,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보면 나만 떠난다는 생각에 슬펐다. 몸은 나날이 나빠져 가고 슬픔은 나날이 불어났다. 앞으로 혼자 살아갈 남편이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 옷을 미리 정리해 놔야 할 것 같아 남편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장을 뒤져 입지 않은 옷들을 재활용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구겨진 옷들은 다림질했다. 한참 다림질을 하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은 지리산에서 버섯 농장을 하는 친구에게 가 있었다. 남편은 지금까지 해오던 서업을 정리하고 친구처럼 시골에 가서 버섯농사를 짓고 싶다고 했다. 남편 목소리를 듣자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과의 결혼은 그야말로 남남북녀가 만나는 것 같은 어려운 결혼이었다. 직장 친구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나는 키도 작고 얼굴이 예쁜 편도 아니다. 스펙도 그저 그렇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문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빨치산 딸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마치 불행했던 나의 지난날을 보상이라도 해 주듯이, 세상에서 여자는 오직 나 하나뿐인 것처럼 나를 사랑해 주었다. 처음부터 남편은 자기 어머니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선택했다. 목숨을 걸다시피 한 시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혀 우리는 결혼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걸 알아버린 시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놀랐다. 그리고 나에게 노골적으로 퍼부었다. “감히 빨치산 딸이 멀쩡한 남의 아들과 결혼을 하겠다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모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남편은 이미 각오한 일이라면서 함께 극복해야 한다고 나를 달랬다. 변명 같지만 함께하자고 설득하는 남편과 차마 헤어질 수가 없었다. 우리는 결혼식을 무시한 채 동거를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날마다 찾아와 헤어지지 않으면 자살하겠노라고 협박했다. 시어머니의 협박에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아들을 낳았다. 아이를 낳으면 달라질 줄 알았지만 시어머니는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둘째를 낳았다. 그때까지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다. 남편은 첫아이를 낳았을 때 출생신고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지만 내가 말을 듣지 않았다. 부모님 허락을 받고 당당하게 아이 출생신고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신이 내 편을 들어준 것처럼 둘째 백일 날 기적이 일어났다. 시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백일 상을 차려준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손녀를 안으면서 우리에게 결혼식을 서두르라고 했다. 아이를 둘이나 낳고 결혼식을 올리면서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울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남편은 지리산에 간 지 무려 두 달 만에야 돌아왔다. 두 달 동안이나 친구 농장 일을 도와주면서 배워보니 버섯농사 아무나 지을 게 못된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남편을 보자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 덮어 놓고 울어대는 나를 향해 영문을 모른 남편이 놀란 눈으로 다그쳐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유방암 말기라는 말을 해주었고 남편은 사색이 되었다. 남편이 믿을 수 없다면서 다시 재검사를 받자고 했다. 쓸데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남편의 성화 때문에 또다시 세 번, 네 번, 검사를 받아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수술할 필요가 없다고 우겼지만 남편이 완강하게 수술 절차를 밟았다. 결국 수술을 단행했다. 남편은 수술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나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말기 암은 역시 수술 후 예후가 기대에 미치지 않았다. 항암 치료와 함께 여러 가지 보조 치료를 부지런히 했지만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권하는 민간요법부터 무엇이든 암에 좋다는 건 다 해보았다. 모두 쓸데없는 짓이었다. 의사들과 남편은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면서 나를 위로하느라 바빴다. 그럴수록 나는 절망으로 빠져들었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불씨가 서서히 꺼져가듯 그렇게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절망하면서도 남편의 성화 때문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서서히 지쳐갔다. 항암치료를 위해 며칠간씩 입원하면 남편과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병원 생활 대신 남편과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었다. 산책길에 나섰다. 헐렁한 남방을 걸치고 청바지를 입은 남편 모습이 멋져 보였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었지만 남편은 아직도 젊어 보였다. “저기 앉읍시다.” “기억나요? 애들 어릴 때 김밥 싸서 당신은 큰애 안고 나는 작은애 업고 소풍 왔던 때. 지금 생각하니 힘들어도 그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 “맞아. 작은놈이 유별나게 별나고 연년생이라 당신이 고생 많았지. “참 시간이 빠르다.”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하는 남편의 눈빛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따뜻했다. 나는 건강했다면 무얼 하지? 머리카락이 있다면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자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측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주로 아이들 키울 때 이야기를 했고, 시어머니 반대로 힘들었던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그런 다음 나는 조심스럽게 빨치산이라는 나의 아버지 일로 남편을 힘들게 했던 것을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는 죽어도 당신에게 죄인이지 뭐예요.” “당신이 무슨 죄가 있어.” “부모 죄가 자식 죄래요. 세상이 다 그렇잖아요.”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이야.” 남편은 내 말을 피했지만 세상은 그랬다. 부모에 따라 자식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남편은 내 말을 듣지 않을 양으로 붉게 물들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점점 붉어져 가는 노을을 바라보다 현기증으로 휘청거렸다. 이제부터 나는 눈 뜨면 살았구나. 얼마를 살든 나머지 시간을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 밖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은 탓에 나는 취미생활을 하지 못했다. 지금부터라도 나를 위하여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잘하지 않았던 화장을 해보기로 했다. 병색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화장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아니 남편에게 명랑하고 밝은 모습을 각인시켜주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립스틱을 사러 갔다. “어떤 색 찾으세요?” 종업원이 물었다.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눈치 빠른 점원이 아주 새빨간 색을 보여주었다. “붉은색!”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새빨간 색은 빨치산, 빨갱이라는 말과 바로 직결된 탓이었다. 그래서 나는 빨간색을 경멸해 왔다. 빨간색이 맹수처럼 두렵고 폭탄처럼 무서웠다. 그런데 빨간색을 내밀다니, 불에 댄 듯이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백화점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머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머리카락이 항암 치료로 모두 빠져나가버린 민둥한 머리라는 것을 감지했다. 가슴이 미어졌다. 꿈이라면 빨리 깨고 싶었다. 한편 갑자기 살고 싶은 생각이 밀려들었다. 초겨울 벌거숭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뭇잎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를 힘껏 감싸 않았다. 그러다 혼자 실성한 것처럼 헛웃음을 웃었다. 어느새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통증으로 피폐해진 마음이 찬바람에 화상을 입은 듯 쓰라렸다. 아침노을이 붉게 드리운 나무 위로 지난 시간의 더께만큼 회한도 깊었다. 떠나간 사람들 이름을 읊조리며 안부를 중얼거렸다. 나에게 이별의 그늘은 넓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매일 복용해야 하는 일정량의 항암제와 고독과 슬픔도 함께 복용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얼굴 곳곳에 통증의 흔적이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하루가 다르게 현실로 나타났다. “당신, 화장실에서 뭐 하는 거야?” 화장실에 갔던 나는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거실 마루에 누워있었다. 남편이 내 손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마룻바닥은 소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후로 부쩍 머리가 무겁고 구토 증세도 심해졌다.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떨리기까지 했다. 다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뇌 초음파, MRI 등 나는 초조한 마음을 안고 다음 날 오라는 의사의 말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뭉게구름 사이로 엄마 얼굴이 떠 있었다. 다음날 의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남편을 바라보았다. 또 하나의 병, 벌써 뇌종양으로 전이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어서 오라는 전보를 받은 기분이었다. 거리에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얀 알약이 혀에서 녹아들면 나도 한 잎 낙엽처럼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약을 삼키지 않고 입속에서 굴렸다. 다시 돌아오는 봄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딱 한 번만 봄을 보고 가고 싶었다. 남편은 나를 데리고 공기 좋은 시골로 가기로 했다. 나 역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라면 더 이상 헛되이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남편과 함께 나머지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시골집 방 한 칸을 얻기로 했다. 목조 건물로 지어진 집이 좋았다. 집주인이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다. 중년 안주인이 시골 생활에 대한 이야기며 마당과 부엌 정원 등을 보여주며 차를 대접했다. 뽑아온 배추를 씻고 파를 다듬고, 강아지도 뒤란의 물길도 그 집을 지켜 온 감나무, 매실나무, 어린 불두화 등등 모두가 아름다웠다. 우리는 서둘러 시골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고 난 후 우리 부부의 마음은 고요해졌다. 더는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시골장도 마음에 들었다. 시골 장은 한산하면서도 생기가 넘쳤다. 농가에서 직접 가꾼 농산물이 대부분이었다. 장사는 주로 할머니들이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돈주머니 전대를 꺼내 천 원짜리와 백 원짜리 동전을 세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문득 저렇게 돈을 벌어서 무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 생활을 하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점점 죽음이 두렵지도 않아졌다. 떠나갈 나보다도 혼자 남겨질 남편을 걱정하기에 바빴다. 나는 내가 떠난 후 남편이 혼자 살기를 원치 않았다. 남편이 좋은 사람을 만나 외롭지 않게 살기를 바랐다. 나 때문에 젊은 시절 고생한 것을 보상받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치 유언을 하듯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이 외롭게 살지 않았으면 해요.” “느닷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 좋은 사람 만났으면 해요.” “이제 보니 당신 참 나쁜 사람이구만. 내 가슴을 그렇게 난도질을 해야 속이 시원해?” 때마침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남편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우리는 곧 이별할 것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오래 기억되고 싶은 욕심도 버리기로 했다. 아침 새소리에 눈을 떴다. “살아 있었구나!” 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사다 놓은 채소를 손보고 있었다. 나에게 배운 대로 끓는 물에 데쳐서 나물을 무치고 있었다. 내가 떠난 후를 생각해 음식 하는 것을 가르쳤다. 제법 솜씨가 늘어 시골로 온 후로 직접 반찬을 만들었다. 나는 혀가 갈라져 맛을 알 수가 없었다. 맛은 모르면서도 남편의 수고를 생각해 맛있다고 칭찬을 해주면서 먹으려고 애썼다. 친구 수영이가 나를 만나러 온다는 연락이 왔다. 여고시절 계부 때문에 집에 가기 싫어하는 나를 위해 울어준 친구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자 수영이가 하루빨리 보고 싶었다. 수영이는 삼십여 년 전 혼자된 몸이었다. 수영이는 서울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남편이 죽자 시골 학교로 지원하여 전근을 갔다. 퇴직 후에도 밭을 일구며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우리는 전화로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옛날처럼 지내왔다. 그런데 내가 아프면서 수영이를 멀리하려고 애썼다. 그동안 문병을 오겠다는 것을 온갖 핑계를 대가면서 막아왔는데 이곳까지 악착같이 나를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저녁 길을 걸었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노인이 너덜너덜해진 상자 따위를 집어 들어 손수레에 싣고 있었다. 빗물이 뚝뚝 흐르는 비닐에 싸여 있는 신문을, 배달원이 낡은 촌집 대문 안으로 목을 뽑으며 집어넣고 있었다. 뇌종양이라는 새 병을 하나 더 얻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아직 내가 있음이 신기했다. 나는 남편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고, 제일 잘하는 것이 음식이었다. “뭐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만든 잡채와 갈비찜이 최고지.” 남편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무리하면 안 된다고 말렸지만 나는 순간순간 찾아오는 통증을 참으며 평소 내가 자신 있게 만들었던 갈비찜, 잡채, 생선전 등 갖가지 나물을 장만하여 그득하게 상을 차려냈다. 그리고 와인까지 곁들였다. 나도 와인을 한 잔 했다. 남편은 내가 와인을 마시는 걸 말리지 않았다. “여보 수영이가 온대요.” “뭐, 수영 씨가 여기까지?” 남편도 수영이를 잘 알고 있어 반가워했다. 나는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수영이 어떻게 생각해?” “수영 씨? 참 좋은 사람이지. 당신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수영이가 온다고 하니까 반가워서 그렇지.” 남편을 수영이에게 맡길 수만 있다면 나는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 수영이가 부디 내 소원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마지막 잔을 나누고 함께 손을 잡고 누웠다. 누워서도 우리는 이야기를 쉬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편은 어느 결에 잠이 들었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통증을 앓고 있었다. 비몽사몽, 통증 속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얼음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맞죠? 왜 그렇게 사셨어요. 내가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세요?” 내가 서럽게 원망을 퍼부었지만 이십 대 젊은 얼굴을 한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슬픈 눈빛으로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기만 하던 아버지는 등을 보이며 어디론가 바삐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나는 빨치산이 아니란 말이에요. 아버지도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말해주고 가란 말이에요.”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다 어떤 늪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내 몸이 늪에 점점 깊이 빠져들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늪 속을 들여다보았다. 온통 붉은 피로 가득했다. “악!” “당신 왜 그래?” 내가 지른 헛소리에 남편이 놀라 소리쳤다. 나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통증은 마치 남편에게 들키면 안 되는 것처럼 그쯤에서 멈췄다. 잦은 통증의 빈도나 증세로 보아 나는 겨울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도 끝나가고 있었다. 아픔도 절망도 느낄 수 없었다. 죽음을 향한 갈망만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이불을 덮어 쓰고 눈을 감았다. 어쩌면 한 겨울에 떠나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빨치산 딸이라는 그 붉은 오명을 하얗게 덮어버릴 수 있는 눈 속에, 할 수만 있다면 한겨울 하얀 눈 속에 깊숙이 묻히고 싶었다. (끝)- ----2019. 5월호 <문학도시> 신인상 작품. ---------------------------------- 김 희 진 주 소 : 양산시 평산로 116 107-2404 한일유앤아이 전 화 : 010-3112-1202 약 력 : 2006년 《문예운동》 시 등단, 《문학예술》 수필 등단 항주 서로 유람--소은 김희진 사이트에서 -------------------------------------------- < 소설 신인상 심사평> 좋은 소설은 치밀한 문장으로부터 강 인 수(소설가) 단편 <늪>의 스토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60대의 여인인 나는 말기암의 진단을 받고 덕수궁 길을 걷다가 시골에 버섯 농사를 알아보러 내려간 남편을 생각한다.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야 하는지 한탄한다.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아 나는 죽지만 홀로 될 남편이 불쌍하고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빨치산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가 지리산에서 총살당하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도망 나와 피난시절 아미동 산마을에서 살다가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룸펜이었다. 어머니 등골을 빼먹는 의붓아버지. 중학생일 때 내가 죽여 버리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나는 가출을 하고 친구 수영이 집에서 기거를 한다. 뒷날 내가 결혼을 하려는데 빨갱이 딸이라 하여 남편 쪽 부모가 반대하여 나중 아이 둘을 낳고나서야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내 병은 더하여 뇌종양까지 덮쳐 시골에 가서 생을 마감하려고 내려간다. 친구 수영이가 기어코 나를 만나겠다고 한다. 그녀는 홀로 된 지 30년. 친구에게 남편을 맡기고 싶었다. 나는 이제 병마로 쇠잔하여 죽음이 목전에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수영을 기다린다. <늪>은 화자(narrater)인 나의 자전적 이야기를 단편에 담았다. 단편은 인생의 단면(斷面)이라는 걸 인식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삼인칭 서술이 소설의 기본이란 것도 인식해야 할 것 같다. 지문 속에 나오는 “변명 같지만”이란 말은 작중 화자와 작가 자신과의 혼돈에서 빚어진 결과다. 응모자는 오래 전부터 문학공부를 많이 해 온 것 같다. 문장의 기초가 탄탄하다. 좋은 문장이란, 치밀한 묘사와 적절하고 참신한 비유의 문장을 말한다. 본문의 “빨간색이 맹수처럼 두렵고 폭탄처럼 무서웠다.” “하얀 알약이 혀에서 녹아들면 나도 한 잎 낙엽처럼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약을 삼키지 않고 입속에서 굴렸다.” “아침 새소리에 눈을 떴다. ‘살아 있었구나!’ 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사다 놓은 채소를 손보고 있었다.” 이런 문장들이 돋보인다. 소설의 기초는 건전한 인생관과 좋은 문장, 그리고 적절한 구성이다. 이런 측면에서 <늪>을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신인 김희진 씨는 앞으로 좋은 작품을 쓸 것이라 기대되는 작가다. 정진을 바란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