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지역 물줄기와 나루포구의 위치
김해규(평택인문연구소)
1.들어가는 말
역사적으로 바다와 하천은 육로교통의 장애가 되기도 했지만 생산 활동이나 수로·해로교통, 조운(漕運), 포구상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발달했다. 또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하천부지는 간척이나 농업발전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평택(平澤)’이라는 지명에는 평야와 하천, 바다가 어우러진 지형적 특징을 담고 있다. 평택지역은 서쪽으로 아산만과 남양만을 두고 있다. 평택전역에는 수원과 용인, 안성지역에서 발원한 52개 하천이 평택호와 남양호로 흐른다. 1974년 아산만방조제, 남양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택사람들은 하천과 관련을 맺고 생활했으며, 지금도 평택호와 남양호는 풍부한 농업용수, 공업용수, 내수면어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아산만은 항만과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평택지역의 수계(水系)는 남쪽으로는 안성천, 북쪽으로는 발안천, 중북부지역으로는 진위천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아산만, 남양만에서 유입된 바닷물은 서탄면 회화리와 안성시 공도면 인근까지 밀려들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하천은 포락(浦落)과 수해(水害), 염해(鹽害)를 끼쳤고 왜구의 침략이나 청일전쟁을 통해 큰 피해를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수로교통과 조운, 포구상업, 수산업을 발달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물줄기는 평택지역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으면서도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많지 않았다. 예컨대 『평택항 30년사』 김해규, 「아산만권 개발과 평택항」, 『평택항 30년사』, 평택시, 2016
를 통해 기본적인 정리가 이뤄졌고, 『평택사람들의 길』 김해규, 『평택사람들의 길』, 평택문화원, 2019
을 통해 물줄기 주변의 삶과 문화가 정리됐으며, 평택학시민강좌 장일규, 「나말여초 서해항로와 평택」, 『2015 평택학시민강좌 자료집』, 평택문화원, 2015 ; 문경호, 「조운제도와 평택지역의 해창」, 『2015 평택학시민강좌 자료집』, 평택문화원, 2015
를 통해 몇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을 뿐이다.
본 글에서는 『평택항 30년사』에 발표했던 내용을 보완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여 평택지역 물줄기와 나루·포구의 위치를 고증하려고 한다. 위치의 객관적 고증은 평택지역 나루·포구 연구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 있어 의미가 있다. 본인은 고지도와, 실록, 읍지·지리지 등 문헌자료를 활용하여 위치를 고증하고 나루·포구의 역할을 살펴보려고 한다.
2.안성천 수계의 나루·포구의 위치
안성천은 구간에 따라 남천, 홍경천, 대천으로 불렀다. 안성시 삼죽면 배태리 국사봉, 서운면 서운산 등에서 발원하며 총 연장은 76㎞, 유역면적 1,699,60㎞이고 평택시 오성면 창내리에서 진위천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흐른다. 안성천은 안성시의 한천, 청룡천, 유천, 천안시의 입장천, 성환천, 평택시의 진위천, 통복천, 도일천, 교포천, 대반천, 도대천, 아산시의 둔포천, 등 19개의 크고 작은 지류(支流)를 갖고 있다. 안성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최대 8~9m에 달해서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었고 강한 조세(潮勢)와 해일(海溢)로 포락(浦落)이 자주 발생했으며 수해(水害)와 염해(鹽害)도 빈번했다. 예로부터 안성천에는 나루·포구가 많았다. 나루·포구는 사람과 물자의 운송 외에도 조운과 포구상업이 발달했으며, 안성천 하류와 아산만 일대 어업의 전진기지로 역할 했다.
16세기에 판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고전변역원,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위현, 평택현, 수원부, 양성현, 직산현, 1985
수원도호부 편에는 안성천을 대천(大川)으로 표기했으며, 현덕면 권관리의 계두진(鷄頭津)과 고덕면 동고리의 이포진을 함께 소개했다. 또 직산현 편에는 팽성읍 노양1리의 경양포가 수록됐고, 평택현 편에는 오을미곶포(吾乙未串浦), 시포(市浦), 신덕포(新德浦)와 신증에 군물진(軍勿津), 지진(池津)이 소개됐다. 여기에서 오을미곶포(吾乙未串浦)는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었다’ 한국고전변역원, 『신증동국여지승람』 평택현, 1985
고 하므로 팽성읍 대추리에 있었던 곤지진의 다른 이름으로 파악되며, 시포는 지금은 아산시 둔포면 시포리를 말하고, 신덕포와 군물진은 통복동 신덕마을과 군문1동의 포구를 말하지만 지진(池津)의 위치는 확인이 안 된다. 군물진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청군이 상륙하면서 ‘군문포’로 바뀌었다. 조선후기 고지도와 18세기 중엽 신치의 『팽성지』에 군물진이었던 것이 1899년 『평택현 읍지』에는 ‘군문포’로 바뀌 것은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군문포는 1905년 인근에 평택역이 설치되고 근대도시가 발달하면서 평택평야의 미곡(米穀)과 경기만의 어염(魚鹽)을 평택역과 평택장에 연결시켜주는 포구로서 기능했으며, 화포와 고잔포, 삽교포로도 경기만의 어염(魚鹽)이 들어왔다.
평택지역은 조선후기 강안(江岸) 습지의 간척이 대대적으로 이뤄졌고, 포락(浦落)에 따른 마을과 포구의 변화가 있었다. 특히 19세기에는 하천의 중·하류지역까지 간척이 이뤄지면서 어촌이 농촌으로 바뀐 곳이 많으며, 기존의 포구에 토사가 쌓여 기능이 중단된 포구도 나타났다.
조선후기 수원도호부에서 편찬된 읍지(邑誌)로는 『수원부 읍지』(1785), 『화성지』(1831), 『수원군읍지』(1899)가 있다. 이밖에 『여지도서』(1757~65)와 『만기요람』을 통해서도 나루·포구를 확인할 수 있다. 읍지(邑誌)에 수록된 안성천의 나루·포구로는 이포진과 당포진이 대표적이다. 이포진은 고덕면 방축1리 앞 안성천변에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아래소청나루로도 불렀다. 이포진은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금물촌면에 있다’고 기록했고, 김정호의 『대동지지』 김정호, 『대동지지』, 한양대학교 부설 국학연구소, 1976
에는 ‘수원부 남쪽 70리 지점에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고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수원부 읍지』에는 ‘부(府) 남쪽 50리 지점에 있으며 각 읍(邑)으로 통하는 첩로’라고 했으며 『수원부 읍지』, 1785, 서울대학교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1831년에 편찬된 『화성지』 『화성지』, 1831, 서울대학교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와 1899년 편찬된 『수원군 읍지』에는 “수원부 남쪽 70리 오타면에 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1789년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화산 아래로 이장하고 수원도호부 읍치(邑治)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당포진(唐浦津)은 현덕면 신왕1리로 안성천 하류의 어업과 포구상업이 발달했던 포구다. 1785년 편찬된 『수원부 읍지』에는 ‘당진포(唐津浦)’, 1831년에 편찬된 『화성지』 『화성지』, 1831, 서울대학교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에는 ’당포진(唐浦津)‘으로 표기됐다. 두 읍지(邑誌)에는 공통적으로 ’아산 등 여러 읍(邑)으로 통하는 첩로‘라고 했다. 『수원부 읍지』, 1785, 서울대학교규장각 한국학연구소
당포진은 충청도 아산의 백석포 평택현의 경양포와 연결된 수로교통의 요지였고, 수원을 거쳐 한양까지 연결된 육로교통의 연결고리였다. 당포진은 아산만 어업의 전진기지며 포구상업이 발달했던 포구였다. 19세기 말 작성된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는 청어, 조기, 미역, 소금 뿐 아니라 미곡과 목화, 창호지, 우피, 담배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었음을 말해준다. 최춘일, 『경기만의 갯벌』, 기전문화예술총서6, 경기문화재단, 2000년
근대 이후 당포진은 신왕나루 또는 광덕나루로 불렀으며 1974년 아산만방조제 준공 전까지 어업과 포구상업으로 번성했다.
1899년에 편찬된 『직산현 읍지』 『국역 직산현지』, 성환문화원, 2000
에는 경양포가 소개됐다. 경양포는 고려시대에는 아산 편섭포라고 불렀으며 12조창 가운데 하나인 하양창이 설치됐다. 그러다가 고려 후기 경양현이 설치되면서 경양포로 바뀌었고 조선 건국 후에는 직산현에 통폐합되어 경양면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편에 ‘경양포는 직산현의 해포(海浦)’라고 기록했고 평택현의 해창(海倉)이라는 기록도 있다. 포구상업도 크게 발달했으며, 해방 전후까지만 해도 아산만의 어염(魚鹽)이 거래되고 생선회에 술을 마시며 유흥을 즐기는 장소였다.
18세기 중엽 신치가 편찬한 사찬(私撰) 『팽성지』 평택시문화원, 『향토사료집』제1집, 1991
에는 곤지진, 신덕포, 삽교포, 시포가 수록되었다. 곤지진은 팽성읍 (구)대추리 마을에 있었던 포구로 오성면이나 고덕면으로 건너가는 나루이면서 안성천 하류 어업의 중심이었다. 신덕포는 앞서 말했던 통복동 신덕마을에 있었고, 삽교포는 안성천에서 도일천이 갈라지는 입구로 신대3동 삽교마을에 있었다. 현재 안성천 북쪽에 위치한 신덕포와 삽교포가 당시에는 안성천 남쪽 고을 평택현에 속했던 것은 안성천 물줄기가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진위현에서는 1843년, 1891년, 1899년 세 번에 걸쳐 『읍지』가 간행됐다. 1843년 『진위현 읍지』에는 통복동의 통복포, 1899년 『진위군 읍지』에는 군문동의 군문포, 고덕면 해창 4리의 해창포, 신대동의 고잔포가 수록되었다. 위의 세 포구는 16세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나타나지 않고 19세기 말에서야 문헌에 등장한다. 이것은 조선후기 간척사업으로 삼남대로와 충청수영로가 바귄 것과 관련 있다. 다시 말해서 18세기 말까지 충청수영로는 삼남대로를 따라 소사동과 안성천 넘어 충청도 평택현 방면으로 나아갔는데, 19세기 평택시 칠원1동 갈원에서 통복동의 통복점을 거쳐 군물포를 통해 평택현으로 건넜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안성천에는 안성천 하류 어항이었던 현덕면 대안4리의 구진, 포구상업이 발달한 팽성읍 노양2리의 노산포, 노성1리의 신성포, 어항이었던 현덕면 권관2리의 석화진, 그리고 안성천과 진위천 일대 궁방전이나 역둔토의 곡식을 반출했던 고덕면 동고리의 수어창진, 그리고 오성면 당거리, 팽성읍 석봉리, 안중읍 삼정리에도 나루가 있었다. 다음은 안성천 수계의 나루·포구의 위치다.
3.진위천 수계(水系)의 나루·포구 위치
진위천은 조선시대 장호천(長好川) 또는 구천(龜川)으로 불렀다. 안성천의 제1 지류로 유로연장 32km다.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서 발원해서 용인시와 화성시를 거쳐 오성면 창내리 부근에서 안성천과 합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호천(長好川)은 현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용인 속현으로 되어 있는 처인(處仁) 동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옛 양지현 서편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진위현)객관 남쪽을 지나 다시 서편으로 흘러 수원부 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위현 조, 한국고전변역원, 1985.
진위천이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붙여졌다. 일제는 유로구간에서 가장 대표적인 행정구역명을 이름으로 정했다. 제1, 제2 지류로는 오산천과 황구지천이 있고 관리천도 큰 지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진위천에는 서탄면 회화리 부근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어선과 상선들이 들어왔으며 곳곳에 나루와 포구가 발달했다. 진위천의 대표적인 나루·포구로는 다라고비진, 해창포, 동청포, 토진, 항곶포가 있었다. 나루·포구는 수로교통의 역할과 함께 상선(商船)들이 드나들며 어염(魚鹽)을 곡물과 교환해갔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도호부 편에는 진위천 수계(水系)에서는 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만 소개했고 항곶포나 동천포, 해창포는 없다. 이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포구들은 중요성이나 규모 면에서 언급될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듯하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수원부읍지』(1785)에도 다라고비진만 나와 있다. 수원도호부에 속했던 종덕면(고덕면의 일부)의 동청포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반면 1899년 『양성군 읍지』에는 동청포와 항곶진이 나와 있다. 그것은 동청포와 항곶진이 양성현의 두입지(頭入地)였던 청북읍으로 건너가는 주요 나루였기 때문이다. 1899년 『진위군 읍지』에는 군문포, 해창포, 고잔포와 함께 황구포가 있다. 항곶진과 황구포는 같은 지명이다. 『진위군 읍지』에 동청포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앞서 밝혔듯 양성현의 두입지(頭入地)였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진위천 수계(水系)에서 언급된 나루·포구는 아래로부터 고덕면 궁리의 다라고비진, 해창4리의 해창포, 동청2리의 동청포, 옛 황구지리의 항곶진(황구포)이고, 이밖에도 청북읍 토진리의 토진(土津, 톷나루), 오성면 안화리의 안화나루, 신리 삼동촌의 신리나루가 있었다.
그러면 나루·포구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고덕면 궁1리 궁안교 아래에 있었던 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은 조선후기 진위현 오타면에서 수원부 지역(서평택)으로 건너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 초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수원도호부 편
에는 “장호천(長好川)은 객관(客館) 남쪽을 지나 다시 서편으로 흘러 수원부 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으로 들어간다”라고 기록했고, 또 1785년과 1793년『수원부 읍지』에도 언급됐지만 19세기에 편찬된 읍지(邑誌)에는 없다. 이것은 19세기 지속적인 경계조정에 따라 본래 수원도호부에 속했던 나루들이 진위현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제강점기 다라고비진은 소청나루로 불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만의 새우젓배, 굴배, 소금배가 들어와 포구상업을 했으며, 서평택지역으로 건너가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배를 탔다. 그러다가 1938년 다라고비진에 콘크리트 다리가 놓였고,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 포구의 기능은 중단됐다.
해창포는 고덕면 해창 4리에 있었다. 『진위군 읍지』, 1899
고지도와 1911년경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 『조선지지자료』 경기도편, 경인문화사, 2010
에는 해창진(海倉津)으로 표기되었다. 해창진에는 진위현의 해창(海倉)이 있었고 세곡이 운송되는 길목에는 해창점이라는 주막도 있었다. 동청포는 고덕면 동청2리에 있었다. 이 마을에는 뱃터, 장터와 같은 지명이 있는데 과거 포구가 있던 곳이며 포구상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동청포 일대는 고려시대 종덕장이 설치됐고 조선 태종 17년 수원부에 내속되어 종덕면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도호부, 1985
그러다가 1789년 『호구총수』가 발간될 때는 진위현 고두면에 편입됐으며 『호구총수』, 1789
1895년 수원군에 재 편입됐고, 1914년 진위군에 통합되었다.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
19세기 후반 편찬된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는 “백화염 1항아리마다 1냥, 석화염 1항아리마다 1냥 5전을 고종 21년(1884) 해방영에서 거둬갔고, 배 1척마다 2냥을 제세로서 수북면의 서상돈이라는 인물이 거둬갔다”는 기록이 있어 19세기 말까지 포구상업이 발달하고 나루로서 기능을 했음을 알게 한다.
항곶진(沆串津)은 서탄면 황구지리에 있었다. 이곳은 사리 때 바닷물이 역류하고 진위천과 황구지천이 합류하는 지점이었다. 『진위현 읍지』 『진위현 읍지』, 1899
에는 황구포(黃口浦), 또는 항곶포(項串浦)라고 했다. 항곶포는 화성시 팔탄면과 양감면 사람들이 진위방면으로 건너가는 나루였다 최춘일, 앞의 책
.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양감면 용소리, 사창리 아이들이 나루를 건너 서탄면 금각초등학교를 다녔고 서정리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이곳을 이용했다. 또 김장철에는 옹진군의 용유도나 오성면 당거리 어부들이 강다리, 숭어, 새우젓, 어리굴젓, 민어포, 소금을 싣고 와서 곡물과 물물교환을 했다.
토진(土津)은 청북면 토진1리의 나루로 자연지명으로는 톷나루, 텃나루, 선살미나루라고 했다. 톷나루는 관리천을 건너 어연리 황곡이나 백봉리로 건너갔던 나루였다. 또 오성면 양교리나, 백봉리, 토진리 사람들이 진위방면으로 갈 때도 이용했다.
4.발안천 및 아산만 수계의 나루·포구
발안천은 평택시 포승읍과 청북읍 북쪽을 흘러 경기만으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화성시 봉담읍 태봉산과 건달산 일대에서 발원하는데, 유로연장은 30km이며 유역 면적은 61km²이다. 1974년 발안천 하구에는 남양만방조제가 준공됐다. 방조제 건설로 총저수량 3,100만㎡, 유효저수량은 1,800백만㎥에 달하는 남양호가 만들어졌다. 포구로는 포승읍 홍원리 자오포, 호구포와 청북읍 삼계리의 옹포, 신포, 고잔리의 고잔포가 있었고, 포구를 중심으로 조운과 포구상업, 어업이 발달했다.
아산만은 충청남도 당진군과 아산시, 경기도 평택시 사이에 발달한 만(灣)이다. 물굽이의 폭은 약2.2km이며 상하 40km다. 우리나라에서 조석간만의 차가 가장 큰 곳으로 물의 흐름이 빠르고 강안침식에 의한 포락이 심했다. 포구로는 포승읍 만호5리의 대진(솔개바위나루)가 대표적이며 이밖에도 계두진, 신전포가 있었다.
옹포(甕浦)는 청북읍 삼계1리에 있었던 포구다. 청북읍 일대는 조선시대 양성현 감미동면 1899년 『양성군 읍지』에는 “감미동면은 관문으로부터 60리 지점에 있다. 송산리, 대양리, 고관리, 창리, 반촌리가 있다”고 기록되었다.
으로 옹포에 해창(海倉)을 두었다. 양성현 해창(海倉)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 조선 전기에도 설치됐는지는 알 수 없다. 1899년에 편찬된 『양성군 읍지』 『양성군 읍지』, 1899
에는 “해창(海倉)은 4개이다. 감미동에 있는데 포면세와 대동미를 바쳐 올리는데 봄을 기다렸다가 포장하여 낸다”고 했다. 옹포는 우리말로 ‘독개’다.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 일대에서는 옹기를 많이 구웠는데 이곳의 옹기들이 반출되는 포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저포(苧浦)’라고 했다. 감미동면 일대의 모시가 포구를 통해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수원부선세혁파성책』 『수원부선세혁파성책』, 1886
에는 옹포에서는 청어, 조기, 갈치, 고등어, 북어, 민어, 미역, 대합, 김과 같은 해산물과 미곡, 소금, 소가죽, 백목과 같은 품목을 거래했다고 기록했다. 조운(漕運)과 포구상업이 발달하면서 옹포에는 객주(客主)와 여각(旅閣)도 생겼다. 옹포는 1920년대 초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삼계리와 옥길리 사이에 장둑을 축조하면서 물길이 막혔다. 그 뒤로는 장둑 아래로 어선과 상선들이 드나들었고, 한국전쟁 뒤 고잔리 입구가 간척되면서 포구의 기능을 상실했다.
자오포와 호구포는 포승읍 홍원리에 있다. 홍원곶에는 조선시대 국영 마장(馬場)이 설치됐다. 홍원곶에 마장이 설치된 것은 세종 13년(1431년)이다. 『세종실록』13년 3월 28일(1431), 목장을 할 만한 곳을 찾아 소를 기르게 하다
또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편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도호부, 민족문화추진회, 1985
에도 “홍원곶(洪源串)은 용성현(龍城縣)에 있는데 부(府) 남쪽까지 55리이다. 둘레가 75리이고 목장이 있다”라고 기록했다. 홍원2리 마장(馬場) 마을과 낡은성, 석정리 장성 등은 당시 마장의 흔적이다. 자오포와 호구포는 홍원관의 소와 말들이 입 반출되던 포구이며, 화성시의 장안나루와 연결되었던 수로교통의 요지였고, 남양만 어업의 배후 기지였다. 발안천 하구는 봄부터 숭어와 강다리, 병어, 밴댕이와 같은 다양한 어종들이 잡히는 천혜의 어장이었다. 특히 홍원3리 ‘감배’ 마을은 1974년 남양방조제 준공 전까지 어업을 했다.
대진(大津)은 포승읍 만호5리에 있는 포구다. 다른 이름으로는 한진(漢津), 솔개바위나루 등으로 부른다. 대진은 1872년 『지방도』 수원부편에 ‘6세기 이전 백제의 혜군(충남 당진 면천의 옛 지명) 가리저에 속했고, 6세기 후반 신라가 점령한 뒤로는 대당교역이 이뤄졌던 곳’이라고 말했다. ‘대진(大津)’은 시대마다 ‘대진(大津)’ 『태종실록』11년 7월 25일(1411) 외
, ‘대진포’ 『세조실록』3년 2월(1457) 외
, ‘대포진’ 『수원부 읍지』, 1785
, 한진(漢津) 『화성지』, 1831
처럼 조금씩 다르게 불렸다. 또 여말선초에는 극심한 왜구의 침략으로 화성시 화량진에 경기도수군절도사가 배치되고 포승읍 만호리에는 수군도만호(첨사)가 설치됐다. 수군첨사는 세조 때 왜구의 침입이 잠잠해지면서 만호로 격하됐다가 아산만 인구 국화도로 통폐합됐다. 조선후기 대진은 충청도 내포지역과 연결된 해로교통의 중심이며, 아산만 어업의 전진기지였다. 대진은 넓이가 10리가 넘는다고 했다. 『만기요람』 『만기요람』, 민족문화추진회, 1984
에는 “바람이 일면 파도가 매우 심하다”고 해서 조세(潮勢)가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포구상업이 발달하면서 1960, 70년대에는 횟집과 술집들이 많아졌다. 횟집에서는 생선회와 막걸리를 팔았는데 손님들은 평택 시내와 멀리 안성에서도 왔다.
계두진(鷄頭津)은 현덕면 권관1리에 있었다. 자연지명으로는 ‘닭이머리’다. 『대동지지』에는 “계두진(鷄頭津) 남쪽으로 80리인데, 아산(牙山)으로 통한다.”라고 하여 아산의 공세포나 백석포와 연결된 수로교통의 요지였음을 말해준다. 고지도에는 계두봉 아래에 위치했고 아산의 여러 포구와 연결된 해로교통의 요지였음을 표시했다.
석화진은 권관2리 고잔마을 앞 노랑바위를 말한다. 노랑바위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돌곶이’라고 했다. 대체로 나루보다 어항(漁港) 역할을 많이 했다. 1911년경 편찬된 『조선지지자료 『조선지지자료』 경기도편, 경인문화사, 2010
』에는 ‘석화진’은 보이지만 계두진은 없다. 또 석화진의 위치도 두메리 부근이라고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위치와 다르다. 계두진은 1974년 아산만방조제 준공으로 사라졌다. 석화진은 방조제 준공 뒤에도 한동안 나루와 어항 역할을 했지만 곧 중단됐다.
5.맺음말
나루·포구는 인마(人馬)의 운송에도 사용됐지만 조운(漕運)과 포구상업, 어업도 발달했다. 평택지역에도 52개 하천에 나루와 포구가 발달했다. 이들 나루·포구는 수로나 해로교통에도 활용됐지만 조운과 포구상업, 어업에도 활용되었다.
평택지역에는 수 십 개의 나루·포구가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 고증이 미흡했고 포구의 기능에 대한 연구도 부족했다. 본 논문은 고지도와 읍지(邑誌), 지리지(地理志), 실록(實錄), 만기요람(萬機要覽), 조선지지자료와 같은 문헌자료를 활용해 위치(位置)를 고증하고 역할을 살펴봤으며, 시대에 따른 위치변화의 일면을 살펴봤다. 정확한 위치고증은 객관적 연구의 기초이며 출발이다. 이번 연구를 기초로 평택지역 나루·포구 연구가 객관적으로 연구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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