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괘릉(慶州掛陵) - 사적 제26호 (지정일 1963.01.21),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 산17 (75,372㎡) 소재 괘릉은 정식 능호은 아니고 별칭이며, 통상 신라의 38대왕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괘릉의 위치는 물이 발원하여 갈라지는 곳으로 남쪽으로는 울산의 태화강, 북쪽으로는 유일하게 북쪽으로 흐르는 형산강을 이룹니다. 그러기에 능을 쓰기에는 부적합 곳입니다. 그래서 물위에 능을 만들어 걸었다 하여 걸괘자를 써서 괘릉이라 합니다. 원성왕은 북천 폭우로 인해 왕위에 오를수 있었던 왕으로 물과 인연이 깊은 왕이었나 봅니다. 괘릉은 현존하는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한 무덤이며,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벽한 능묘제도를 대표합니다. 우리 나라 왕릉은 대개 후`대 왕들의 참배 등을 고려하여 국도(國都) 주변에 입지시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고려조와 조선조의 왕릉들은 하나같이 산수환포(山水環抱), 사신상응(四神相應: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조화를 이루는 곳)의 명당 지세에 터잡고 있는데, 경주의 옛 신라 왕릉들은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경주 일대에는 평지릉(平地陵)이 있는가 하면 산지릉도 있고, 또한 문무대왕릉처럼 독특하게 수중(水中)에 입지해 있는 능도 있습니다. 수중릉이야 예외로치더라도 주로 평야지대에 터잡던 능묘가 산중턱이나 기슭으로 옮겨 입지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풍수지리설이 바야흐로 그때부터 능묘 입지의 주요한 변수로 적용되기 시작했던 까닭인 것입니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한 괘릉(掛陵)은 그러한 과도기에 조영된 왕릉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 능묘는 우리 나라 풍수지리설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숭복사(崇福寺) 비문(碑文)과 연관돼 있는 능입니다. 때문에 그보다 앞서 만들어진 선도산 자락의 태종무열왕릉 (654-661 재위), 송화산 중턱의 전(傳) 김유신(595-673)묘, 내남면 부지리의 경덕왕릉(742-765 재위) 등이 모두 풍수적으로 그럴듯한 자리에 터잡고 있기는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어디까지나 괘릉이 우리 나라 풍수 분묘의 기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성왕(元聖王: 785-798 재위)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는 괘릉은 사실상 풍수적으로 그렇게 좋은 터에 자리잡고 있지 않습니다. 무작정 괘릉터를 대단한 명당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것은 알고 보면 순전히 숭복사 비문의 내용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억측에 불과 하며, 최치원이 찬(撰)했다는 그 비문의 내용은 도대체 어떤 것이며, 또한 괘릉터가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풍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숭복사 비문에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이 적혀 있습니다. 괘릉터에는 원래 원성왕의 어머니인 소문왕후의 외삼촌이자, 왕비인 숙정왕후의 외조부되는 파진찬(波珍 ) 김원량(金元良)의 원찰(願刹)이었던 동곡사(洞鵠寺)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옵니다. 그런데 원성왕이 붕어하자 유명(遺命)을 받들어 그의 시신을 토함산 서쪽 동굴에서 화장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 그 뼈를 묻을 마땅한 장소를 고르는 것이 크게 문제됐던 것입니다. 신라시대에는 왕의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 방식과 화장한 뼈를 바다나 산에 뿌리는 산골(散骨) 방식도 있었지만, 대개는 화장(火葬) 한 뼈를 땅에 묻는 것이 일반적인 장묘 방법이었습니다. 불교식 다비(茶毘)의 영향을 받은데다 완전한 뼈를 얻기 위한 이른바 화기세골(火氣洗骨)의 한 수단으로써 화장 방법을 이용했던 까닭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원성왕의 능묘터를 정하는 일이 난관에 봉착하자 급기***곡사터를 능터로 삼자는 의견까지 개진되기에 이르렀는데, 그에 대해 그 옛날 공자의 집을 유씨(遊氏)의 사당으로 삼으려 한 중국의 고사를 예로 들면서 반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능터로 삼는 쪽으로 기울게 됐던 것이었습니다. 괘릉의 또 다른 풍수 의문은 바로 수중 안장설(安葬說)입니다. 본래 그곳 능을 건 후,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기 때문에 괘릉이라 불리게 됐다는 것인데, 과연 그곳에 연못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런 장례 방식이 도대체 어디에 연유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수중 왕릉인 문무대왕릉을 흉내내어 그런 장례 방식을 취했던 것은 아닐테고, 그렇다고 '청오경'에 나오는 "늪과 물가, 연못과 호수는 진룡(眞龍)이 쉬는 곳이니 진실로 그 안에서 구할 것이오, 삼가 밖에서 찾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沼沚池湖 眞龍憩息 情當內求 愼莫外覓)"라는 구절을 잘못 이해 하여 그런 행태를 보였을리도 만무한 것입니다. 어찌됐든 요즘의 음택(혹은 묘지)풍수 논리로 보자면 그야말로 풍수 금기사항을 철저히 외면한 묘가 바로 괘릉인 셈이다. 절터에다 능묘를 조성한 점도 그렇고, 뼈가 쉽게 썩을 수 있는 물 속에다 유해를 안장한 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법, 비록 신도(神道) 초입에 놓여있는 서 역(西域)사람의 얼굴을 한 무인석 만큼은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괘릉터를 통하여 한국풍수가 초기에는 어떻게 전개됐던가를 아는 것 만으로도 그 능묘가 지닌 풍수사(史)적 의의를 헤아려 줌직합니다.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는 숭복사는 동서의 3층 석탑만 남겨 놓은 채 폐허가 돼 있었습니다. 그토록 넓었다는 사찰 경내에는 지금은 대규모 감나무 밭이 들어서 있고, 그저 이곳 저곳에 간간이 눈에 띄는 커다란 돌들만 숭복사의 옛 영화를 전해 줄 따름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료들을 살펴본 결과 괘릉은, 옛 동곡사터를 능터로 바꾸고, 수중에 안장되었다는 것이 그 당시 유풍수지리설이 유입되어 조영된 과도기적 능으로서 풍수에 의한 것만은 확실하나 정확하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했는지는 현재 이상의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미스터리로 남겠네요. |
ㅡ 네이버의 지식 검색창에서 ㅡ |
신라 38대 원성왕이 잠들어 있는 괘릉은 경주 불국역에서 울산방향으로 승용차편으로 5분정도 거리에 위치에있다.
7번국도에서 괘릉 이북에 들어서면 제법 키큰 소나무가 운치있게 방문자를 기분좋케 맞이한다.
그렇치만 그입구 중간 소나무 숲길에 제법 운치있는 바위가 개인의 무덤을 알려주는 묘지석으로 둔갑해 있을때
실망감으로 다가와 자리 잡는다.
몇년전 방문해 왔을때 보다는 훨씬 장리가 잘된 화장실과 주변 경관이 더 깨끗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경주 북천(알천)이 홍수나서 그 틈새를 이용해서 왕이되었다는 김경신 원성왕과 선대 선덕왕의 유언으로 왕위
계승을 인정받고도 왕위를 찬탈당한 김주원은 강릉으로 가서 강릉김씨의 시조가되고 그 아들 손자들이 왕권을
찾고져 반란을 일으켰으나 멸문지화로 문을 닫는다.
피비린내나는 권력의 쟁탈전에서 살아남은 원성왕 김경신은 이제 역사의 승자가되어 신라시대 왕릉급 최고의
건축미의 백미로서 후대에 우리들에게 귀중한 사료로 자리 메김하고있다.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승자만이 모든 진실의 대변인처럼 오늘도 우리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원성왕릉을 알려주는 화표석을 맨앞으로 그 뒤로 무인석 문인석이 어렴풋이 굽어진 소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다.
괘릉 (掛: 걸 괘 陵)의 괘는 이제 닳아서 잘보이질 않는구나~`
릉의 이름을 알려주는 화표석 육각 석기둥에는 아무런 글자도 보이질 않는데 세월에 묻혀버린것일까?
왕릉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때 좌측의 무인상
왕릉을 정면을 바라보았을때 우측의 무인상은 좀 더 이국적이다
눈이 매섭고 움푹하게 더 들어가고 코는 뭉툭하며
입은 굳게 다물며 굳은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이 모습은 우리네 얼굴과 다른 서역인 즉 이슬람인들의 모습이다.
힘차게 팔을 들어 올리는 이자세는 가히 역동적이다
왕릉 중심으로 좌우에 화표석 한쌍 ,무인석상 한쌍,문인석상 한쌍,그리고 사자 두쌍이 남북을 지키고있다.
문인상도 그냥 평범하게 서있는것도 아니라 굳게다문 입술위의수염은 위엄이 넘치고,가늘게뜬 눈과
눈과 턱주위를 가로지르는 구렛나루 수염은 살아있는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리고 문인복속에 양손에는 칼을 움켜잡고있다 학계에서는 중국계속의 위그르인으로 보고있다
곱쓸곱쓸한 머리모양을 가진 사자 네마리가 사방을 감시하고 있는데
이 사자는 동쪽에서 서쪽 방향을 보면서 감시하고있다.
이사자는 동쪽방향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돌려서 북쪽을 감시하는데
앞발의 한쪽은 앞으로 뛰어나갈듯이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있다.
이렇케 사자가 방긋 웃는모습의 석상은 보기어렵다 고 윤경렬 선생은 그당시 화랑들의 얼굴이라고 한다
어쨋거니 살기는 괜찮았는지 아님 국력의 자신감 표현인지 모를 일이다
서쪽방향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감시하는사자
서쪽방향에서 머리돌려서 남쪽을 감시하는 사자 이렇케 네마리가 사방을 감시한다.
왕릉 정면에서 좌측의 문인상 얼굴이 네모진 모습이 중국사람 형태를 띄고있다
다른각도에서본 왕릉 정면애서 우측의 눈이 매서운 무인상
선대왕 선덕왕은 자식이 없자 후계왕을 자신의 조카 김주원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으나
왕위 즉위식때 장마 홍수로 지금의 용강동즘에서 북천내 (알천)을 넘지 못하자 상대등을 하고있던 김경신(원성왕)
일파들이 이것은 하늘의 뜻이라 공론을 만들어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물과 연관이 있는 원성왕 김경신은 연못을 묻고 그위에 물이 괼것을 우려해서 관을 걸어서 봉분을 세웠다고 하는데~
오늘도 장맛비 때문인지 왕릉앞에는 물이 질퍽질퍽거려 왕릉으로 접근하기가 어렵다.
왕릉 주위를 둘러싸고있는 소나무들
왕릉앞 상석도 그당시것이 분명한듯 안상문 모양의 상석 문양이 희하게 남아있다.
전형적인 12지신상이 새겨져있는 호석
상석옆에 홈이파인 것이 석등 자리인가?
문화재에서 3차원 스캐너 작업이 한창이다
12지신상을 보호하기위한 돌기둥 난간이 봉분을 둘러 싸고 있다
배수시설이 잘되어있다
왕릉 뒷편을 돌이서는데 외국에서 관광오신 관관객을 볼수있다
아마 미국인들 같은데
2백년된 미국인들에게는 천년의 왕조를 이해할수있을까?
역사상 천년의 왕조는 신라와 로마밖에 없다는 사실을 저들은 알까?
그래도 신기한듯 사진을 많이도 찍는다
성조기옷을 입고도
멋있게 찍어시고
부부인듯 다정도 하고
모델처럼 예쁘기도 하시고
ㅡ대충해석하면 2009 미국 교육자들을 위한 한국연구 워크 숍 이네요ㅡ
한국 문화 많이 이해하시고 즐거운 여행되시라고 손을 흔들었더니 내눈과 마주친 외국인
한참동안 환하게 웃으면서 헤어졌네요.
원성왕시절 울산 개운포항을 통하여 이슬람의 서역인들이 많이 드나들던 서라벌 경주가
이제는 세계각국에서 이곳을 찾는 관광명소가 되기를 바랄뿐이다
2009.07.21.
아래사진은 좀 더 가까이 찍은 사진 있니다.
첫댓글 한번씩 갈때마다 달라지는군요.. 25년전에는 울타리도 없고 그저 한번씩 돌아보시는 지정관리인만 있었고.. 왼쪽 숲속에 우물(?)도 있었는데.. 봉분위로 휘어진 소나무도 있었고.. 초등학교 시절의 모습이 눈에 가물가물합니다. 학교우물소독할때면 물뜨러 주전자들고 휘~휘~ 가던곳인데요
왼쪽 숲속에 우물이라![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
초등시절이 그리웠겠네요 ![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6.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