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인고의 의지로 이별의 정한 극복
*영변에 약산- 평안북도 영변군의 약산 동대
*사뿐히-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시원하게
*즈려 밝고-즈르 밝고의 방언. 발밑에 있는 것을 힘주어 밟음\
2)진달래꽃의 정리
갈래 : 서정시, 자유시, 민요시, 전통시
형식 : 4연 12행. 각 연은 3행
심상 : '진달래꽃'은 정(情)과 한(恨)의 표상으로 사용됨.
성격 : 토속적, 민요적, 전통적, 향토적, 여성 편향적
경향 : 유교적 휴머니즘(哀而不悲의유교정신)
미감 : 애상미(哀傷美)
운율 : 3음보의 민요조 리듬, 각운
어조 : 이별의 슬픔을 참고 견디는 애절한 여성 화자의 목소리
표현상 특징
① 민요조의 3음보 리듬의 사용과 향토성 짙은 시어를 통하여 친밀감을 얻고 있다.
② 역설법과 반어법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③ '-오리다', '-옵소서' 등의 종결 어미를 통하여 여성적 정조를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④ 수미 상관의 구조를 통하여 구조적 안정감을 얻고 있다.
⑤ 각 연은 행 배열에서 동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둘째 행이 길이가 가장 짧고, 셋째 행이 가장 길이가 길며, 첫재 행은 그 중간임).
의의
① 한국 서정시의 절조로 평가되고 있다.
② 우리 현대시의 대표적인 이별 노래로 널리 애송되고 있다.
③ 고려 속요의 가시리, 황진이의 시조, 민요 아리랑 등의 맥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다.
제재 : 진달래꽃
주제 : 이별의 정한과 그 승화(초극)
*여성 편향적-여성답거나 여성과 같은것<여성적>
*유교적 휴머니즘-유교의 정신을 바탕을 둔 인문사회
*각운 -구나 행의 끝에 같은 울림의 말을 반복하는 방법
*애상미-몹시 슬퍼하고 가슴이 아파함의 아름다움
*완곡하다-말이나 행동을 드러내지 않고 돌려서 말함
*수미상관<수미상응>-처음과 끝이 서로 같음
*면면히-끊어지지않고 쭉 이어지다.
*정한-뜻정(情)과 한할한(恨)이 합쳐짐
*애송-즐겨 읊거나 부름
*초극-극복하다
*승화-사물을 보다 더 높은수준으로 발전시킴
3)율격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7.5조 3음보
└───7───┘ └─5─┘ 이시는 리듬은 7.5조의 3음보를 기본으로 한다. 각연마다
말없이 고이보내 드리우리다. 7.5조 3음보가 중첩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1,2행은 완
└───7───┘ └─5─┘ 만하게 읽히는 반면,3행은 급박하고 절박하게 읽히는 것이 특징이다.이러한 리듬을 통해 '이완-긴장-이완-긴장' 이라는 완급의 조절을 보여주는데,이는 이별에 처한 화자의 절제와 동요의 갈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리듬뿐만 아니라 장면의 급속한 전환이나 시어의 표현(역겨워,고이,사뿐히,즈려)속에서도 그러한 긴장과 이완이 주요한 형식적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음보:시를 읽을 때 한호흡 단위로 읽어지는 운율단위.
ex>[‘나 보기가/역겨워/가실 때에는/// 말없이/고이 보내/드리오리다’는 3음보의 운율이라고 하는 따위.]
2.전통시가와의 비교
1)도솔가
760년(경덕왕19) 4월 초하루, 해가 둘 나타나서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으므로, 왕명에 따라 월명사(月明師)가 산화공양을 하면서 <산화가>도 부르고 이 노래도 지어 부르자, 괴변이 곧 사라졌다는 유래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에 전한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은 이 노래를<산화가>가 아니라 <도솔가>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삼국유사》에 이두로 된 4구체의 원가와 한역시가 함께 실려 있어, 향가의 해독과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조선고가연구》(양주동)의 해독문을 보면 도솔은 미륵을 지칭한 말로서, 미래불로서의 미륵불을 모시는 단을 모아놓고 이 노래를 불러 미륵불을 맞이하려고 한 것이다. 떨기 꽃을 통하여 미륵불을 모시겠다는 뜻이므로, 전형적인 찬양가이다.
신라의 향가(鄕歌).
저자 : 월명사(月明師)
장르 : 향가
발표 : 760년(경덕왕19)
-산화공덕을 노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달래꽃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님
*산화공덕:부처님앞에 꽃을 뿌려 그 공덕을 비는일
전 4절, 매절 2행, 후렴구로 이루어져 있는 기승전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려가요라는 확증은 없으나, 가풍이나 시정으로 보아 고려가요로 추정한다.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서정시로, 가사가 애절하고 간결하여서 순박한 맛이 역대 이별가 중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악장가사(樂章歌詞)》에는 전편이,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는 <귀호곡(歸乎曲)>이라 하여 1절만 수록되어 전한다.
현대어로 해석
가시려 가시렵니까
버리고 가시렵니까 ⇒원망적 애소
⇒임이 떠나는 것을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별의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떠나지 말라는 애원을 담고 있는 표현
날러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렵니까 ⇒애소의 고조
⇒이별에 대한 옛날 우리 여인의 전형인 수동적 자세가 드러나 있다.
님 잡아 둘 것이지만
서운하면 아니 올까봐 ⇒절제와 체념
⇒떠나는 임을 붙잡고 싶지만 그러면 영원히 나를 떠나 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담고 있다. 임을 보내는 서러움이 절제된 가운데 드러나 있다.
서러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자마자 곧 다시 오소서 ⇒기도자적 애소
⇒'셜온'의 주체는 임이 아니고 임과 서러운 이별을 하는 서정적 자아이다. '가시 듯 도셔오쇼셔'는 '가시자마자'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은근한 역설적 표현으로, 언제까지나 떠난 임을 기다리겠다는 간절한 기다림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함축적으로 주제가 드러난 부분이다.
*애소-애절하게 하소연함
이별의 정한을 노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달래꽃과 유사
3)황진이의시조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현대어로 해석
아아! 나의 일이여 그리워할 줄을 몰랐더냐
있으라 했더라면 가겠느냐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워 하는 정은 나도 모르겠구나.
*어져 : 아아(감탄사)
*내 일이야 : 내가 한 일이여
*그릴 줄을 : 그리워할 줄을
*이시랴 하더면 : 있으라고 하였더라면
*가랴마는 : 갔을까마는
제재 : 이별
성격 : 서정적, 감상적
주제 : 임을 그리는 마음
배경 : 작자가 사대부(士大夫)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여 스스로 시(詩)와 서예, 묵화와 음률을 배워 문인을 비롯한 석학들과 교류하였다.
작품해석:이 작품은 사랑하는 임을 마음 속으로만 사모하다 말도 못하고 그냥 보내고만 자신을 한탄하고 있는 노래이다. 초중장은 임을 보낸 후의 후회를 나타내고 있으며, 종장에서는 떠나 보낸 후의 더욱 간절해지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체념조로 가라앉히고 있다. 감탄사 '어져'로 풀 길 없는 애타는 심정을 토로하였고,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으로 회한의 정을 고조시켰다. 여성의 섬세한 표현이 부드럽고 고운 시어를 구성하고 있으며, 임을 위해 떠나 보낸 뒤 말없이 임을 그리워하는 동양적인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별의 정한을 노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달래꽃과 유사
3.시인 김소월 소개
1)시인인 김소월의 삶
본관은 공주. 본명은 정식.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성도, 어머니는 장경숙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사립인 남산학교 를 거쳐 오산학교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을 교장으로 서춘·이돈화· 김억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목도꾼-목도로 물건을 나르는 일꾼
*훈도-학문이나 덕으로써 사람을 변화시킴
*관동대진재-1923년 9월 일본 간토[關東]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에 수반하여 일어난 일본 역사상 최대의 지진 피해.
*시재-시적재능 *염세증-인생이 싫어지고 모든게 기찮아지는 증세<정신병>
*아편-마약에 한종류
2)김소월의 주요 사건.
1904년
아버지께서 목도꾼들에게 몰매를 당했고, 이로 인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죽을 때까지 폐인생활을 하였다. 북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 부랑자들에게 구타를 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국이 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게 되다.
이 때를 즈음하여, 유학과 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훈도 밑에서 구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많은 민담,민화 등을 들려주었던 숙모와 숙부로부터 소월은 많은 영향을 받게 되다.
*구학문-재래의 한문학
1909년
남산보통학교(일설에 의하면 사립학교)가 설립되자 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하여 집안은 더욱 쪼들리게 되었으나 할아버지의 훈도와 할머니,어머니의 지성어린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다.
*신학문-개화기때 들어온 서양학문
1915년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다. 5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다.
이 때 소월시의 원천(源泉)이 된 한시,민요,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6년
세살 많은 홍실단 여사와 결혼하다.
연변-북한 자료에 의하면, 남산학교를 졸업한 후집에서 쉬다가 이 시기에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하여 시를 짓기 시작했고, <먼후일>을 썼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먼후일<시>-1925년에 간행된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되었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애써 잊으려는 안타까움이 서린 애달픈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1920년
이 시기에 <그리워>(창조 5호, 1920. 3) 등과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학생계 창간호, 1920.7)를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하다. <춘조>를 《학생계》(3호, 10)를 발표하다.
1922년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하다. 동급생에 나도향이 있었고 한 반 아래에 박팔양이 있었으나 특별한 교우관계를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1운동 이후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함박눈>(개벽 28호, 10)을 발표하다.
*배재고보-배재고등학교
1923년
배재고보(7회)를 우수한 성적으로(총 44명중 4등) 졸업하다. 고향에 돌아와 평북 정주군 림포면 사립학교 교원이 되다. 아동교육에 종사하면서 시 창작에 정진하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서정시를 창작하고, 그것들을 《개벽》 등에 발표하다. <장별리>도 이 때 지은 작품이다. 사립학교 교원생활이 창작이나 집안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 시기에 집안이 더욱 피폐해져 가다.
처가의 도움으로 일본 동경에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다. 학자금이 제대로 조달되지도 않았고 상과에 취미도 없어 괴로운 학창생활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10월경 귀국하다. 이즈음에 서울생활을 하게 되고 나도향 등과 어울렸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의 서울생활의 느낌을 시로 읊은 것이 <서울밤>으로 추측된다.
1924년
김동인 김찬영 주요한 김억 전영택 김유방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가담하여 서울에 체류하였으나, 곧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방현)에서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를 맡아보며 소일하다.
그러나 《동아일보사사1의 기록에 의하면 소월이 동아일보지 국장 일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26년 8월부터이고, 그만둔 시기는 1927년 3월이다.
*영대-1924년 8월 5일에 창간된 문학 동인잡지
*소일하다-어떤일에 마음을 붙여 세월을 보냄
1925년
유일한 시론 <詩魂>(《개벽》 59호, 5)을 발표하고, 이해 말에 《진달래》(12)을 매문사에서 상재하다. 1934년6월 사남 낙호가 출생하다.12월 23일(일설에 의하면 24일)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 자택에서 사망/자살하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마약 중독으로 추정된다.
《조선중앙일보》(12.30)에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씨의 돌연사망 기사가 났고, 《동아일보》(12.30)에 소월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흐릿한 소월 사진이 소개되다. 소월은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터진고개에 묻히다.
*상재하다-글자를 목판에 새김
*돌연사-갑작스런죽음
*매문사-출판사이름<뜻은 돈벌이를 위해 글을씀>
3)김소월에 작품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 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 (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 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 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보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 〈첫치마〉,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제비〉, 〈강촌 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삭주구성 朔州龜城〉, 〈가는 길〉, 〈산 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 新天地》의 〈왕십리 往十里〉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 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 〈꽃촉 (燭)불 켜는 밤〉(1925), 〈무신 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 〈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 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 文明》에 〈지연 紙鳶〉(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 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 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게재지별-신문,잡지 등에 글을 올린 순서
4)김소월의 작품경향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 〈첫치마〉, 〈금잔디〉, 〈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먼후일〉, 〈꽃촉불 켜는 밤〉, 〈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 〈건강(健康)한 잠〉(1934), 〈상쾌(爽快)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 〈팔벼개 노래〉(1927), 〈돈타령〉(1934), 〈삼수갑산 (三水甲山)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3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 素月詩抄》(1939), 하동호(河東鎬)·백순재(白淳在)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느낀점
26번 이은조:이번 조별발표를 통해 마야의 진달래꽃이나 노바소닉의 진달래꽃이 김소월시인의 진달래꽃을 토대로 만든 것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김소월시인의 진달래꽃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막상 해봄으로써 김소월 시인님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번에 내가 맡게된 역할은 김소월 시인에 대한 조사였다.
27번 이훈희:이번 조별발표는 중학교 조별발표 때 보다 시간은 많았지만 평일에는 야자에, 학원에 만날 시간이 없고 토요일 일요일에는 서로 만나기 귀찮아서 만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고, 버디버디를 통해 각자 조사해온 것을 토대로 정리 해봄으로써 김소월 시인님의 시세계에 대해 약간이라도 알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 같아 좋았다.
이번에 내가 맡게된 역할은 진달래꽃에 대한 조사와 모은 자료에 분석.정리 하는 것이었다.
28번 전민석:내가 알고있던 시중의 많은 시가 김소월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마지막에 아편을 먹고 죽었을 때에는 정말 죽을 수밖에는 방법이 없어나?라고 30년이라는 세월이 준 무상함에 비판도 해보고 그렇게 좋은 시를 많이 짓고 죽었다라는 것에 작은 감동을 느꼈다
이번에 내가 맡게된 역할은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과 진달래꽃과 관련된 시나 시조를 조사해오는 것이다.
(홈페이지:http://zenoshock.x-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