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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문(眞言門), 진언승(眞言乘), 금강승(金剛乘), 구생승(俱生乘), 지명승(持明乘), 시륜승(時輪乘), 비밀 불교
밀교는 비밀 불교(秘密佛敎)의 줄임말로 현교(顯敎)의 상대 개념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현교는 석가모니의 설법이나 경전을 통해 드러나 있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밀교는 언어나 문자에 의해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방법에 의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밀교를 가리키는 다른 말로 진언문(眞言門), 진언승(眞言乘),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이 있으며,
후기 밀교 시대에는 구생승(俱生乘), 지명승(持明乘), 시륜승(時輪乘) 등도 밀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그러나 밀교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다.
다양한 지역에서 그만큼 다채로운 종교성과 문화를 수용하면서 유포됐기 때문이다.
외형적으로는 범신적인 불타관(佛陀觀) 하에서 이들 제존(諸尊)의 진언, 다라니와 의례 절차, 만다라 등의
종교적 요소를 중요하게 인식하는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그것을 통한 종교 체험을 통해 궁극적인 종교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하여
새로운 실천적 · 신앙적 불교로서 확장됐다.
밀교는 대승불교의 한 분야로 교학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7세기이다.
대승불교의 화엄(華嚴) 사상 · 중관파(中觀派) · 유가행파(瑜伽行派) 사상 및 인도 전통 종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
그러나 그 이전 대승불교에서도 밀교 성립의 요인은 충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 불교는 부파 불교 시대(소승 불교 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 중심의 경향이 매우 짙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교학(敎學)의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 불교 운동이 밀교이다.
당시까지 발전되었던 불교 사상의 두 주류인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공 사상(空思想)과 유가 유식 학파(瑜伽唯識學派)의
유 사상(有思想)을 동시에 계승 · 발전시키면서, 바라문교와 힌두교 및 민간신앙까지 폭넓게 받아들여,
그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정립한 것이 밀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밀교 사상의 이론적 원리[敎相]를 체계적으로 밝힌 『대일경(大日經)』과 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金剛頂經)』은 밀교의 근본 경전이다.
이에 의하면 밀교는 법신불(法身佛)인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한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의 수행법을 닦아 익히면 이 육신 자체가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밀교의 수행자는 누구나 입으로 진언(眞言)을 염송하고 손으로 결인(結印)을 하며
마음으로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신구의(身口意)의 삼밀가지(三密加持)를 행하여 중생의 삼밀과 부처님의 삼밀이
서로 감응 일치 하여 현생에서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근본 경전을 중심으로 조직된 밀교가 성립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에 진언과 다라니를 비롯한 밀교 소재들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밀교 사상을 초기 밀교라고 하고, 그 이후의 것을 중기 밀교라고 하여 구별한다.
이후 후기 밀교가 발달한다.
후기 밀교에서는 8세기경 성립한 탄트라의 대락 사상(大樂思想)의 교학을 바탕으로
의학과 생리적 지식을 수행 절차에 반영한 생기차제(生起次第)와 구경차제(究竟次第)를 실천한다.
이러한 인도 밀교의 두 형태 가운데서 중국에 먼저 전래된 것은 초기 밀교 계통으로
동아시아에는 초기 밀교와 중기 밀교가 큰 영향을 미쳤다.
322년(동진의 원제(元帝) 5) 최초로 전래된 뒤, 초기 밀교 계통 경전인 『대공작왕신주경(大孔雀王神呪經)』 ·
『관정경(灌頂經)』 등이 번역되면서 차차 전파되었다. 725년 선무외(善無畏)가 『대일경』을 번역하고,
753년 불공(不空)이 『금강정경』을 번역하여 밀교의 정통 사상인 중기 밀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 뒤 밀교는 송나라 때까지 크게 발전하여 깊은 신앙의 의지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기 밀교를 삼국시대부터 불교 수용과 함께 받아들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밀교에 대해서는 그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는 7세기 초부터 초기 밀교 계통이 전래되었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기 밀교 계통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교는 고려, 조선시대까지 불교 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밀교는 이론이나 교학적인 발전보다는 실천적 수행 면에 치중되었으며,
독자적인 발전보다는 선(禪)이나 정토 신앙 또는 천태종(天台宗) 등과 밀접한 관계성 속에서의 발전을 보았다.
특히, 고려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진언 염송을 통한 밀교 신앙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의 밀교는 신라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성취를 위한
목적보다는 세간적 성취를 위하여, 전쟁 방지 및 병의 치료와 같은 목적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에 최초로 밀교를 전한 승려는 안홍(安弘)이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혜숙(惠宿)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서역승(西域僧) 세 사람,
중국 승려 두 사람을 데리고 귀국하여 황룡사(皇龍寺)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栴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고,
640년(선덕여왕 9) 만선 도량(萬善道場)을 회향하였다.
안홍과 거의 같은 시기의 밀교승으로는 명랑(明朗)이 있다.
명랑은 632년 당나라로 가서 3년 동안 유학한 후 귀국했다.
통일 전쟁기 명랑은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임시로 절을 짓고 『관정경』에 의거하여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서 비법에 밝은 12명의 승려와 함께 문두루비밀법을 설행하여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이러한 명랑의 비법은 그 수용 초기부터 호국 이념과 연결되면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법맥은 안혜(安惠) · 낭융(狼融) · 광학(廣學) · 대연(大緣) 등으로 계승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문두루법(文豆婁法, Mudra)은 『관정경』 제7권에 의한 것이다.
이 경은 주로 제석천(帝釋天)과 사천왕(四天王)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과
그 나라가 어려울 때 신인비법으로써 구제될 수 있는 방법과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 사악한 귀신 때문에 공포에 떠는 사람이 있거나,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다른 나라가 침략을 할 때는 마땅히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법을 행하면 모든 재난을 극복하여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개인과 국가적 재난이 문두루법을 행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오방의 신장이
각각 7만의 부하 신을 거느리고 문두루법을 행하는 목적에 부응하여 보호해 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인비법은 『관정경』에서 사상적 · 의례적인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신라의 신인비법은 『관정경』 사상을 주축으로 하면서, 그 위에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과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사상까지도 폭넓게 수용하였다.
따라서 신라 신인비법의 사상은 독자성을 가지고 발전하면서도 용이나 사천왕, 제석천 등의
사상을 무리 없이 포섭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상은 소재 활동(消災活動)과 짝하여 신라 밀교가
무속신앙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결과가 되었다.
한편 밀본(密本)과 혜통(惠通)은 신주를 통한 질병 치료와 재앙에서의 구원 활동을 했다.
밀본은 『약사경』 독송을 통해 무당이나 다른 불교 승려가 치료하지 못한 선덕여왕의 병을 치료하거나
승상 김양도(金良圖)의 병을 낫게 했다. 혜통은 진언을 외워 신문왕의 등창을 낫게 했다.
명랑의 신인비법을 중심으로 한 밀교 의식은 고려시대에 가서 신인종(神印宗)이 성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고,
치병과 치유의 특징은 고려시대에 와서 총지종(摠持宗)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명랑을 신인종의 초조(初祖)로, 혜통을 총지종의 초조로 삼고 있다.
이밖에도 의림은 805년(애장왕 6) 103세의 나이로 밀교의 전교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는 주로 순밀 계통의 태장계법과 금강계법을 위주로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이 시기 현초(玄超) · 혜일(惠日)과 같은 밀교 승려들의 활약으로 신라 밀교는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밀교 사상도 신인비법(神印祕法) · 사리탑(舍利塔) · 오대산 신앙(五臺山信仰) ·
소재 활동(消災活動) 등을 통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 신앙 운동은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그것은 당나라의 오대산 신앙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자장 당시는 오대산 신앙이 크게 발전하였거나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신라에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8세기 초 정신대왕(淨神大王)과
그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에 의해서였다.
이들 세 부자가 오대산 신앙을 전개한 사실은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와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전해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보천과 효명은 오대산에 들어가 수양을 하였다.
하루는 산의 다섯 봉우리를 보려고 산에 올랐더니 동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관음보살이,
남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지장보살이, 서쪽 봉우리에서는 아미타불을 수위(首位)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북쪽 봉우리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수위로 500의 아라한(阿羅漢)이, 중앙에서는 비로자나(毘盧遮那)를
수위로 1만의 문수보살이 각각 나타났으므로 예배를 올렸다.
그 뒤, 보천 태자만이 오대산에 계속 남아 『수구즉득다라니경(隨求卽得陀羅尼經)』을 매일 염송하면서 50년을 수양하였다.
이러한 보천이 말년 나라를 지키고 이익하게 할 비법을 남겼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동쪽 봉우리에는 관음방(觀音房)을 두어 관음상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福田)을 두어 낮에는 『금광명경』과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및 천수주(千手呪)를 외우게 하며,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하게 하고, 원통사(圓通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남쪽 봉우리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지장보살상과 붉은 바탕에 팔대 보살(八大菩薩)을 수위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게 하고
점찰예참(占察禮懺)을 행하게 하고, 금강사(金剛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서대(西臺)에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과 흰 바탕에 무량수불을 수위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행하게 하고, 수정사(水精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북대(北臺)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석가상을 모시고, 검은 바탕에 500 나한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經)』과 『열반경』을 읽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행하게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중앙은 진여원(眞如院)으로 문수상을 진흙으로 만들어 모시고 그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를 수위로 하여
36 화형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과 600권의 『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여, 화엄사(華嚴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이러한 오대산이라는 지역을 상징하여 오색 · 오방 · 오불로 체계화한 구조와 사상의 내용은
밀교의 본지 수적(本地垂適)과 만다라(曼茶羅)에 근원을 두고 있다.
신라의 오대산 신앙은 자장에 의하여 당나라 신앙 형태에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오대산 신앙이 시작된 교리적 근거는 60권의 『화엄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제27과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文殊舍利法寶藏陀羅尼經)』의 교설에서부터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오대산 신앙의 중앙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이 위치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신라의 오대산 신앙이 그 출발부터가 현교(顯敎)와 밀교의 융합에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8세기 초 중국에서는 선무외 · 금강지 등이 중심이 되어 천수관음조상법(千手觀音造像法) ·
지장화상법 등을 정립하여 밀교적인 관음과 지장 신앙을 전개하였고, 또한 불공(不空)은 함광(含光)과 더불어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밀교적 문수 신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시기에 신라에서는 명효와 의림 등의 밀교승들이 있어서
당나라의 그러한 교법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때이다.
보천이 신라 오대산 신앙을 체계화한 것도 8세기 중엽이었다.
그는 철저한 밀교의 진언승(眞言僧)이어서 수구다라니를 매일 염송하였고,
토속신(土俗神)이 와서 보천에게 수계까지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민속신앙이 밀교에 포섭되는 한 실례이기도 하지만,
보천은 문수보살로부터 관수까지 받을 정도로 밀교 신앙에 철저하였다.
따라서, 보천에 의해서 체계화된 신라 오대산 신앙이 밀교적으로 전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십일면관음이나 천수천비(千手千臂)의 관음은 밀교적 요소들이 포함된 것이다.
이러한 관음을 염송하는 천수주가 『인왕경』과 함께 관음방에서 독송된 것이나,
오방에 오불을 배치하고 다섯 가지 색을 배대하여 오원(員)의 복전을 둔 것은
모두가 순연한 밀교적 수행법의 하나요, 신라 특유의 만다라적 체계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오방불(五方佛)의 배치법은 현교나 밀교의 전통적 만다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것이다.
따라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앙 운동은 신라 밀교만이 발전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만다라라고 할 수 있다.
신라시대 사리탑에 대한 신앙이 처음으로 밀교 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은
706년(성덕왕 5)이다. 이해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탑의 이층에다 부처의 사리와 함께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였다.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작은 탑 99개 또는 77개를 조성할 것과 이 다라니의 공덕을 교설한 잡밀 계통의 경이다.
이 경은 중국에서 695∼704년 사이에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하였고,
이 시기에 당나라에서 총지법(摠持法)을 공부하고 귀국한 명효가 『불공견색다라니경』과 함께 신라로 가지고 왔다.
그 뒤부터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조탑경(造塔經)으로
널리 받들어서 중요한 탑 속에는 반드시 이 경이 봉안되었다.
751년(경덕왕 10)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면서 이 경을 넣었고,
855년(문성왕 17) 경주 창림사(昌林寺) 삼층 석탑에도 이 경이 봉안되었다.
828년(흥덕왕 3)에 세워진 경상북도 영일군 법광사(法光寺)의 삼층 석탑에서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가 새겨진 사리병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신라 사리탑 신앙이 다른 밀교 경전과도 연결을 맺은 좋은 예이며, 9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현상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된 동화사 비로암(毘盧庵)의 석탑에는 사리장치와 함께
금동사방불함(金銅四方佛函)이 봉안되었는데, 이것은 태장계와 금강계, 잡밀과 순밀,
현교와 밀교가 융합된 삼종실지(三種悉地)의 만다라 사상을 사리탑 신앙으로 응용, 발전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비로암의 석탑을 계기로 신라 사리탑 신앙은 점차 풍부한 밀교적 사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화사 금당암(金堂庵) 삼층 석탑과 봉화군 서동리 동쪽의 삼층 석탑, 봉화군 취서사(鷲棲寺)의
석탑 등은 모두가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삼종실지의 만다라 사상에 근거하여 건립하였다.
특히, 취서사 석탑의 경우 무구정광단(無垢淨光壇)을 건립하고 밀교적 의식까지 거행하였으며,
871년에 중수한 황룡사 구층 탑에는 99기의 작은 탑과 함께 사리 · 다라니경 등을 봉안하였다.
또한, 895년(진성여왕 9) 백성산사(百城山寺)에서는 길상탑(吉祥塔)을 세우면서,
『법화경』 · 『금강반야경』 · 『금광명경』 · 『진언집(眞言集)』 · 『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77기, 99기의 작은 탑도 봉안하였다. 이때 특히 77기, 99기의 작은 탑을 봉안하면서
그 각각의 탑 속에 진언을 또 봉안하였다. 이러한 백성산사의 길상탑을 통하여
신라의 현교와 밀교는 자연스럽게 융합됨은 물론, 그 사상면에 있어서도
더욱 깊고 넓은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신라 승려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밀교를 배운 이들의 이름이 다수 확인된다.
그 중 불가사의는 대일경 권7에 대한 주석서인 『대비로자나경공양차제법소』를 찬술하였으며,
혜초는 『왕오천축국전』뿐만 아니라 『만수실리대교왕경』 한역에 참여하고
그에 대한 서문을 작성하였으며 불공의 대표적인 제자로 꼽혔다.
이들뿐 아니라 다수의 신라 승려들이 밀교의 법을 계승하며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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