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를 그린 뜻은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약속이다.
<<세한도 –추사 김정희 작(1844) [국보180호]-
종이바탕에 수묵, 세로 23cm 가고 61.2cm>>
지난 2013년 8월 1일 오후 7시
물을 보고 마음을 씻고,
꽃을 보고 마음을 아름답게 한다는
’물과 연꽃의 정원‘ 양평 세미원에서는
국보 180호인 추사 김정희(1786~ 1856) 선생의
세한도를 소재로 지은 세한정 낙성식이 열렸다.
세한도이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지은 세한정에서
한국 다 문화 중흥의 중심인물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깃든 차향을 살펴본다.
<세한도>의 언약을 구현한 “약속의 정원” 세한정
세한정은 세한도 속에 담긴 송백의 늘 푸르른 정신과
스승과 제자 사이의 변치 않는 공경과 신뢰의 장무상망 정신을 기려
“약속의 정원”으로 명명하고, 송백헌 이라는 당호를 가진
맞배지붕에 둥근 창문을 가진 그림 속이 집을 재현하여
세한도를 크게 조각하였고, 관련 글귀들이 상설 전시돼 있다.
낙성식에는 김문수 경기도 지사와 김선교 양평순수, 강지원 변호사를 비롯해
150여 명이 참석하였고, 알로이시오 초등학교 6학년 남학생들이
한복차림으로 세미원이 백련차를 스승께 대접하며 감사를 전한는
진다례 . 헌시와 헌가, 헌무 등을 진행하였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세한정 앞 팔당물은 추사선생님과 소나무의 기상,
맑고 청렴한 선비정신이 아름다운 예술로 표현된 2,500만 국민들이 생명수다.
이곳이 한국의 정신을 전국, 전 세계로 퍼드려 나가는 중심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2012년 9월부터 조성사업을 시작한 세한정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고
멀리 광주 분원요를 차경으로 하는 양평군 양서면 세미원 내 부지면적 1,200m제곱
조형물 면적 123m제곱 로 총사업비 20억원 상당을 들여
배다리와 상춘원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등 굽은 소나무와 담장 벽돌 하나하나 연화문 속에 장무상망을 새겨 넣어
선비의 지조와 기상을 표현하고 일본에 건너간 세한도를 찾아온 사연 등
역사를 느끼는 격조 있는 마음의 정원으로 탄생하였다.
아름다운 연꽃 정원에 둘러싸인 세한정은 늘 변하지 않는 인간관계를
다짐하는 상징적 언약의 명소로 감사의 다례를 행하는 사은례와
혼인례 등으로 사용될 계획이다.
조선후기 차문화의 중흥 그 중심에 있던 추사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은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서예가요
고증학, 실학, 유학, 불교 ,도교, 등 모든 분야에 정통한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요 할머니가 임금이 따님이니 왕실이 척족이요
대대로 벼슬이 높은 가히 해동의 명문거족이었다.
그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 문예를 이끌었던 추사는 다산 정약용과
초의 , 신위 등과 더불어 조선 후기 차문화의 중흥을 이룬 중추적인 인물이다.
다산의 소개로 동갑내기 초의를 만나 초의를 홍현주 등 당대 지성인들과 연결하고
벽오시사회의 장승업등 중인계급에 까지 차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추사는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사절단 부사로 사행을 떠날 때 동행하여
연경에서 용봉승설차를 마시고 차에 관한 관심이 깊어졌고,
중국의 대표적 지성인으로 차를 즐겼던 옹방강 등과 교유하며
평생을 차를 애호한 차인이다.
그이 차에 대한 이론과 안목은 초의가 대둔사에 전해오던 사원차를 복원하여
‘초의차’를 완성하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하였다.
도의는 <다신전>과 <동다송>을 편찬하고 추사의 소개로 알게 된
추사의 형제들과 왕의 부마인 홍현주와 그 형제들,
다산이 아들인 유산가 형제들, 신위, 박영보 허련, 조희룡 등에게
자신이 제다한 차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차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여
“차는 군자와 같아 삿됨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차의맑은 색향미와 기운이 군자를 닮았고,
이런 차의 효능을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 예술의 세계를 향상시키고자
사대부들이 차를 애호하게 되면서,
당시 문인 문화를 향유하고자 했던 중인층에게 까지 음다문화가 확산되었다.
추사가 정치적인 질곡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학문과 예술, 불교와 차 덕분이었다.
누명을 쓰고 10여 년 제주로 유배된 시절에도
모진 풍토와 시름을 차로 극복하였다.
따라서 추사의 유배시절
그의 예술적 승화는 차를 통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의에게 걸명의 뜻으로 글을 써서 보내 차를 받기도 하고
초의가 직집 차를 들고 제주도로 오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세한도>의 바탕에는 차향이 짙게 배어 있다.
늙은 소나무는 김정희 자신을,
푸른 소나무는 이상적을 ,
나머지 두 그루는 제주도로 자신을 찾아준 제자 소치, 허련 과
자신이 재배한 차를 제주도 까지 보내주었던 초의 (1786~1866)를 상징한다.
지조와 의리의 상징 세한도
세한도는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의 서권기 문자향이 느껴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이다.
그림 오른쪽 위에 예서체로 ‘세한도’라 씌여 잇고,
그 왼쪽에 행서체로 ‘우선시상 완당’
[‘우선’ 이것을 감상해 보게, 완당] 이라고 세로로 써 있다.
우선은 이상적의 호로 완당 김정희가 통역관 출신이 제자 이상적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신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책을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이 그림을 그려 주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온 지 5년째인 1844년 ,
그의 나이 59세 때이다. 허름한 종이 세 장을 이어 붙여 그린 <세한도>는
귀양살이의 궁핍한 생활을 은연중 표현하고 있다.
창문 하나만 나 있는 집 한 채를 사이에 두고 깊은 상처로 껍질이 벗겨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와 그 옆에 푸르른 소나문 한 그루,
그리고 마주보이는 곳에 잣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사람도 배경도 없다.
<세한도>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이상적의 지조와 의리를 비유한 것이다.
그림 옆에 강하고 굳센 필치로 발문을 썼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 ‘장무상망’ 즉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를 새긴 낙관을 찍고 ,
왼쪽 발문이 시작되는 곳에 완당이라는 호를 찍었다.
손재형이 지켜낸 ‘아름답고 거룩한 가르침’ - <세한도>
추사의 마음이 그려진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신의와 의리로 굳게 다져진
아름답고 거룩한 가르침이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선물 받고 감격해 답 글을 보냈을 뿐 아니라,
그해 겨울 연경에 통역관으로 가서 청나라 명사들에게
<세한도>를 보여주었다.
김정희와도 친분이 있던 16명의 문인들은 세한도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 각자 그림에 대한 감상을 적어주었다.
이 글을 보고 완당은 많은 문인들이 자신을 잊지 않고 있음을 알고
유배생활을 견뎌내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 후 그림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에게 넘겨지고 다시 얼마 후
추사 연구에 심취했던 일본인 학자 후지스카 교수에게 넘어가고
1944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후지스카 교수는 그동안 모아 두었던 추사의 모든 자료와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해 버린다.
이 소식을 접한 서예가 손재형(1903~1981)선생이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습이 심한 동경으로 쫒아가
두어 달간이 끈질긴 노력 끝에 <세한도>를 되찾아 온 후 얼마 되지 않아
후지스카 교수의 집은 폭격을 맞아 추사의 자료가 거의 잿더미가 되었다.
해방 얼마 후<세한도>가 돌아온 사실을 알고
정인보, 오세창, 이시형 등 한국 문화계의 거두들이
이 위대한 문화유산을 되돌려 찾아진 사연을 찬양한 발문이
<세한도>의 뒷자락에 더해지게 되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1974년 12월31일 대한민국 국보 180로 지정되었다.
소유자는 손창근 이고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