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한한(養性閑閑)하고 운심자재(運心自在)라.
“일속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한가하고 한가롭고
마음을 운전하는 것은 자유롭고 또한 자재 롭게 했으면 좋겠다.”
“공부 표준이 무엇입니까?” 하는 후진의 물음에 대한 법타원 종사의 말씀이다.
법타원(法陀圓) 김이현(金理玄) 종사(宗師)는 정읍 두승산의 넉넉하고 한가로운 품속에서
1930년 8월 28일 전북 정읍군 소성면 흑암리에서 부친 용산 김석규 대봉도와 모친 영타원 신법현 대호법의
1남 5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법타원 종사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한 가운데 성실했으며 영특하여
영육 간에 어려움이 없이 성장하였다.
소태산 대종사와 특별한 기연으로 원불교와 인연이 된 법타원 종사의 집안은 부친 용산 대봉도와
언니 범타원 종사가 먼저 출가를 하여 법타원 종사는 자연스럽게 원불교와 인연이 되었다
.
1948
년 전북여자중학교(현 전주여고)를 졸업한 법타원 종사는 봉사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사회사업을 하리라는
다짐을 하였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졸업 후 총부와 교당에서 하숙을 하면서 교육기관(계문공립, 운봉국민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6․25를 만나게 되었다.
법타원 종사는 1951년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의 요청으로 평소에 염원하던 대로 사회사업 기관인 제주도 한국보육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법타원 종사는 평소 생각하고 꿈꾸었던 자선사업, 사회사업을 통한 이상세계는 책이나 머리로서 생각되는 것이지 현실 속에서는 너무나 괴리감이 있음을 느꼈으며 또한 학창시절부터 막연히 동경하던 사회주의사상도 6․25를 통해 허구성을 깊이 깨닫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정신세계 즉 종교사업임을 자각하였다.
이러한 시행착오로 여고 졸업 후 5년 동안 방황을 하다가 원기 37년(1952)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24세에 원광대학교에 입학, 정식으로 전무출신을 지원하게 되었다.
대학
3학년 때 성업봉찬회 잔무위원으로 발령을 받고 3년간 구타원 이공주 종사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때는 교법에 대한 깊은 신심도 없었고 교양으로 살고 예절과 상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외형적인 큰 하자는 없었지만 내적으로 쌓인 실적은 없었다. 때문에 어른을 모시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죄송스러웠다.
법타원 종사는 후에 “나는 구도의 열정으로 전무출신을 서원 했던 것이 아니라 전무출신도 일종의 종교사업으로 생각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하나의 일터로 이 길을 택했던 것 같다.”고 하였다.
법타원 종사는 구타원 종사를 모시면서 그 동안 갖고 있던 세속적인 꼬리 잘라 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기가 죽어야만 살 수 있는 전무출신의 기본정신을 배우게 되었다
.
또한 불합리한 것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합리가 되는 종교적 신성을 깨닫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구타원 종사를
3년간 모신 후, 다시 1년간 수학을 하고 원기 44년 영산 제2 방언공사 경리로 영산출장소에 발령을 받은 법타원 종사에게 대산 김대거 종사를 모신 영산에서의 3년간의 생활이 진정한 전무출신으로 거듭나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대산종사를 모시고 구전심수로 직접 받든 정전공부를 통해 “몸을 내 놓고 오롯이 힘쓴다.”는 전무출신의 길과 출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비로소 출가한지 7년 만에 진정으로 심신출가를 하게 되었다.
교법으로 무장하여 공부 길을 얻고 난 후부터 법타원 종사는 진리와 법과 회상과 스승에 대한 관(觀)이 확실한 뿌리를 내렸고, 이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이 공부 이 사업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법타원 종사에게 영산은 새롭고 완전하게 거듭나게 한 성지였으며 대산종사는 진정한 전무출신으로 출가하게 한 스승님이셨다.
원기 47년부터 1년간 교육과장 겸 기숙사 학생사감, 중앙선원 사감으로 근무하다가 원기 48년에 종로교당 교무로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지역에는 종로와 서울교당 두 곳 밖에 없었고 또 교화경험이 전무한 상태여서 종로교당 발령은 약간의 두려움과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나 대산종사의 “서울에 교당 50개를 만들어라.” 하는 하명을 받고 원남·의정부·안양·신촌 등 연원교당을 내었으며 이를 연원하여 그로부터 10년 후 다시 종로교당에 부임을 했을 때는 서울지역에 교당과 기관이 약 50개정도가 되었다.
법타원 종사는 연원교당으로 원남교당을 낼 때 지역으로 분할해서 교도를 나누었다. 이 일은 당시 교도들에게 “연원교당을 낼 때에는 교도를 나누는 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서울지역에 50여개의 교당설립의 기초와 표본이 되었다.
법타원 종사는 종로교당의 출장지였던 안양교당과 수원교당을 개척하였으며, 원기 59년에는 동산선원교감으로 부임하여 3년간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원기 62년 다시 종로교당 교감으로 부임하여 일선 교화현장에서 전력을 다하였다.
또한 기성교당에서는 물론이고 초창이나 개척교당에서도 공부와 사업을 함께 권장하여 가는 곳마다 많은 법사와 대호법을 배출했다.
원기 67년 총부 교화부로 부임한 법타원 종사는 6년 동안 교화부장으로서 대산종사의 경륜실현과 일선 교화지원에 전력을 다 하였다.
대산종사의 경륜을 받들어 전국적으로 유아기관 설립에 노력하여 많은 유아기관이 설립되었으며, 어린이 교화를 위해 어린이 성가집 발간, 솜리 민속어린이 잔치, 전국 어린이 그림 잔치, 어린이집 교사 교육 등을 처음으로 실시하였고, 청소년과 대학생교화를 위해 대학생연합회를 창설하고 대학선방을 개설하였다.
또한 사단법인 삼동청소년회를 법인으로 정식 등록 발족하여 오늘날 국내는 물론 국제 활동까지 할 수 있는 기틀을 잡았다.
한글세대를 위해 가로쓰기 교전을 발간하고 금장전서 및 심고문집을 발간하여 일선교화현장의 지원활동에 힘썼으며, 교도 법위향상운동 및 이를 위해 법위와
연결한 단계별 교도훈련 책자 등을 만들어 훈련하게 하였으며 전 출가 교역자를 대상으로 처음 교화단을 조직 실시하였다. 또 전국 도서관 및 학교·교도소·군부대 등에 교서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여 원불교를 전국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원기 73년 중앙훈련원장으로 부임하여 내적으로는 전체적인 훈련프로그램 및 생활을 훈련생들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인정해 주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편성하여 훈련에 대한 전무출신의 의식 변화에 기여를 하였고, 외적으로는 대산종사의 경륜을 받들어 현재의 중앙중도훈련원을 신축 봉불하여 전 교역자가 훈련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법타원 종사는 수용품에 담박하고 매사에 준비가 철저하다. 또한 자신의 공부에 있어서는 상시응용주의사항 6조 공부로 수양·연구·취사에 힘을 얻는 원만한 공부인이며, 늘 스승님께 맥을 대어 감정 받고 해오를 얻으며 동지들과 문답하여 항상 배우기를 좋아하는 공부인이다.
제자나 교도를 지도함에 있어서도 신앙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고 스승과 교단에 맥을 대도록 지도하였으며 특히 어려운 동지나 제자가 있으면 말없는 가운데 손을 넣어주는 자모이다.
법타원 종사는 책임을 맡으면 늘 성리에 표준하고 무아봉공의 행을 나투어 어렵게 생각되던 일도 순리대로 이루어 냈으며, 때문에 머무르다 간 뒷자리는 언제나 조용하고 깨끗하였다.
원기 76년 3월 제11회 수위단회에서는 소태산 대종사 탄생100주년 성업봉찬 기념대회를 맞아 법위를 출가위로 사정하고 종사의 법훈을 서훈키로 결의했다
원기 84년에 정년 퇴임 하셨으며 그 후에도 영산여자원로수도원과 영산성지 중앙총부 교령으로 공사를 맡으셨습니다.
법타원 원정사께서는 평소에 제자나 교도를 지도하실 때 특히 신맥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스승과 교단에 맥을 대도록 지도하셨으며 교단의 자모로써의 일생을 살으시던 중, 지난 해부터 병환으로 고생하시다가 5월 23일 오후 2시24분 원병원 에서 열반에 드시니,
세수는 84세시오, 법랍은 60년 2개월,
공부성적 정식출가위, 사업성적 정특등 4호,
원성적 정특등으로 원불교 교단장에 해당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