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기행1) 위대한 어머니 신사임당 & 아들 이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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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잔칫집에 초대받은 여자 손님들이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시각 주인집 하녀가 음식을 나르다가 어느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 부인의 치마가 얼룩으로 물들었다.
그 부인은 집이 가난하여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입고 왔던 것이다.
“빌려 입은 옷인데, 이를 어쩌나”, 부인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 본 한 여인이 “그 치마를 잠시 제게 벗어 주시겠습니까.
제가 수습 해 보겠습니다”. 그 부인은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도 치마를 벗어 주었다.
여인이 붓을 들고 그 치마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엉망이던 치마가 여인의
손길이 닿는대로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고, 싱싱한 잎사귀와 꽃으로 변해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 된 것이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인은 완성 시킨 그림치마를 건네 주면서 ‘이 치마를 시장에 내다 파시면 새 치마를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잔치집에 왔다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 좋은 일을 하게 된 이 여인이 우리역사에서
훌륭한 어머니로 길이길이 칭송을 받고 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 바로 그 분
이었다. 이 이야기는 고금으로 전해 내려오는 실화이다.
신사임당(1504년~1551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었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이이 이율곡(1536.중종31 ~1584.선조17)의 어머니
이기도 하다.
강원도 강릉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본명은 인선(仁善)으로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
이다.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
학을 배웠고, 아버지를 여읜 후 아들 없이 홀로 된 친정어머니를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극진히 모셨다.
부덕과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존경을 받았던 신사임당은 후세까지 ‘훌륭한 어머니상의 전형’
으로 길이 추앙되어 오고 있다.
그림과 서예 그리고 시(詩) 짓는 재주가 탁월했고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지식도 해박했다.
500년 세월이 흘러 간 지금, 대한민국의 5만원권 지폐 앞면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처음 5만원 권 지폐발행때 사임당 신씨의 초상화를 사용하겠다는 정부방침에 일부
여성단체들의 강열한 반대가 있었다.
신사임당이 부덕과 현모양처, 어머니상의 전형으로 귀감이 되고 있음에는 이의가 없지만,
어디까지나 남성을 중심으로 한 ‘남성 역사관(history)’에 근거한 평가일 뿐,
여성을 존중하는 ‘여성의 역사관(herstory)'으로는 충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
라고 했다.
그렇지만 신사임당이 국보급 그림들을 남긴 위대한 ‘여류화가’ 였음은 왜 간과했을까.
현실적으로 아들 이이 이율곡과 어머니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한 나라의 두 종 지폐에 등장
하는 경우가 되었다.
아마 세계적으로도 찾아 보기 힘들 사례로 두 분 모자의 ‘역사적인 위대함’은 부인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임을 일깨워 준다.
이율곡은 선조 15년(1582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국방의 대임을 맡은 그는 임명 이듬해인
1583년 2월, 시급하게 해야 할 국방강화를 ‘6조계’란 글로 건의를 했다.
‘적에게 지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적을 이길 수 있는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는데, 조정의 반대와 신료들의 무관심 속에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곧 이어 4월에는 양병십만론(養兵十萬論)을 제기했다. ‘나라의 부진한 기운이 극에 이르니 10년이
못 가서 나라가 무너지는 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서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병조판서의 이 주장마저 ‘평화시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호랑이를 길러 우환을 남기는 것과 같다
(養虎遺患: 양호유환)’ 는 서애 유성룡 등이 중심인 다른 정파의 반대로 붕당에 휩싸인 조정이 묵살
하고 말았다.
이렇게 율곡의 10만 양병설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결국은 국방의 무방비상태였던 조선은 임진왜란을
당했고 서애 유성룡은 선조임금을 모시고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피난을 다녀야 하는 뼈아픈
역사의 치욕을 남겼다.
왜란이 평정된 뒤에 서애는 ‘징비록’이란 책을 남기는데 이 책에서 율곡을 거명하면서 만일 그의 말
대로 시행 하였더라면 나라 꼴이 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율곡의 양병십만론(養兵十萬論)은 400년이 지난 ‘유비무환(有備無患) 대한민국’에서 ‘율곡사업’이라는
이름의 ‘군비증강’ 국방정책으로 채택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훌륭한 역사의 교훈이다.
올해는 임진년(2012년 壬辰年), 임진왜란의 7갑자년, 420년이 되는 해다. 이 가을, 사임당신씨와 이이
이율곡 그리고 임진왜란을 머릿속에 떠 올리며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법원리에 소재한 ‘율곡선생유적지
(경기도기념물 제45호)’를 답사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는 곳이 ‘초리골등산로’로 잘 알려져 있는 삼봉산과 비학산의 산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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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지금 시중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월간 山 2012년 11월호 p200
<산따라 맛따라>(필자 박재곤)입니다.
www.sanchonmira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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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향상 수고가 많으시네요.![대박](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6.gif)
신사임당에 대하여 잘 보고 갑니다.
백철기동우님!! 감사합니다. 위 자료를 올리고 24시간이나
지났는데 백칠기동우님 혼자서 열어 보셨네요.
사무국에서도 누구 한 사람, 열어 본 사람이 없는 여기에 계
속 글을 올려야 하는지? 내 자신,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나에게 시간은 돈 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인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