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참아라. 이 전쟁 뒤엔 영광만이 남으리!"
시넨은 목청껏 소리치며 병사들을 다독였다. 아니, 피맺힌 절규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제국군 5만 대군을 상대로 그는 만 명도 채 안 되는 병력으로 4개월간 맞서 싸워왔다. 이네아가 지금까지 제국의 침략에서 버텨온 이유는 지금 그가 지키고 있는 샤이혼 관문의 덕이라. 하지만 4개월 동안 희망조차 찾을 수 없는 이 전쟁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면 시넨이 얼마나 뛰어난 장수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활은 떨어진지 오래다. 하지만 주위가 모두 험준한 산봉우리이니 커다란 돌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힘든 상황인지라 병사들은 조를 짜서 곡괭이로 직접 돌을 캐오는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 중에 어디 하나라도 성한 자가 없었다. 하다못해 성을 지키는 시넨의 직속 기사들조차도 갑옷의 이곳 저곳이 찌그러져 피로써 그 빈 공간을 대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때면 언제나 성의 망루 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빛을 받아 눈 부시는 긴 장검을 들고 호령하는 시넨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패배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병사들은 이번에도 별다른 사상자 없이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높다란 이 관문은 적의 어떠한 공격으로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을 만큼 튼튼했다. 게다가 그 성벽 위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는 병사들의 기강은 그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오늘 교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시넨은 4개월 째 어김없이 들려오는 부관의 보고를 제지하고 반 병남은 위스키를 홀짝 들이켰다.
"휴... 이런 무의미한 싸움은 언제까지 계속 될련지..."
"내일 또 올 것입니다. 푹 쉬시지요."
"그래.... 내일도 또 오겠지."
힘없이 돌아서는 시넨의 뒷모습에선 낮에 보았던 그 당당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장군님!"
"음?"
부관의 부름에 시넨은 초췌한 눈으로 부관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넨의 모습에 부관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시넨 장군님. 시넨 장군님은 저를 비롯한 이 성의 모든 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장군님이라는 반드시 저들을 격퇴하고 이 관문의 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얼마 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도 장군님의 뛰어난 능력에 꼬리를 빼고 달아날 것입니다!"
부관의 힘있는 말에도 시넨은 그저 물끄러미 부관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부관은 멋쩍었는지 그저 뒷머리만 긁적였다. 시넨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 끝날 것이다. 이제 곧."
부관은 밝게 미소지었지만, 침실로 향하는 시넨의 얼굴에는 한 줄기 눈물이 전장의 흙먼지를 씻겨주었다.
그날 밤.
부관이 황급히 문을 열어 젖히며 외쳤다.
"장군님! 큰일입니다!"
"알고있네. 자, 나가지."
입맛을 쓰게 다시며 머리를 긁적이던 부관은 놀란 입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적의 공격을 예측한 그의 능력도 물론 대단했지만 그가 놀란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 갑옷은?"
시넨의 갑옷은 제국에서 그가 이네아에 망명할 때 입고 온 당당한 '비룡기사단'의 갑주였다. 한때 비룡기사단의 '와이번 마스터'로써 당당히 군림하였던 시넨이 수백에 달하는 궁전경비병들의 이목을 속이고, 왕과 문무백관들 가운데에 당당히 들어선 것은 이미 이 대륙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제국이 심상치 않아 밤낮을 걱정하던 왕은 그의 망명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를 이네아의 최북단, 이네아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목, 이네아 최고의 저지선인 샤이혼 관문의 수문장을 맡기었다. 물론 적국의 장수를 굳게 믿고 그에게 쉽게 지휘권을 준다는 것은 분명 이해할 수 없지만, 그만큼 이네아에는 샤이혼을 지킬만한 자도, 시넨에게 위기를 느낄만한 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넨은 와이번 마스터를 뜻하는 은빛의 경갑. 가슴팍에 용의 비상을 붉게 새겨놓은 그 경갑을 그 자리에서 벗어 던지고, 지금은 세계 최강의 제국군. 한때는 자신의 수하들을 상대로 4개월간 끝을 알 수 없는 공방전으로 이네아의 모든 이들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왕국에 그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밑에서 관문을 지키고 싶다고 온 자들만 수천 명. 물론 그중 반 이상은 저 성벽아래에서 까마귀의 먹이 감이 되어있지만 말이다.
"부관."
"아, 아예."
그의 갑옷을 보고 과거의 모습을 회상하던 부관은 그의 물음에 깜짝 놀라 대답했다.
"부관. 자네는 이네아의 참 유능한 인재일세."
"아하하. 별말씀을..."
부관은 또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이런 습관 때문에 병사들이 그를 욕할 때마다 '계집애'라고 하는 것이리라.
"자네는 지금 당장 짐을 싸들고 남쪽으로 내려가게나."
"....예?"
"시간이 없네!"
시넨의 다급한 말에 잠시 멈칫하던 부관은 고개를 크게 저으며 말했다.
"전 싫습니다! 저는 부관으로써, 아니 장군님을 존경하는 한 인간으로써 장군님과 함께 있기를, 장군님의 곁에서, 장군님이 보는 앞에서 눈감기를 소망해왔습니다. 제가 무얼 하였기에 장군님은 저를 내쫓으려 하십니까! 정 내쫓고 싶거든 그 이유라도... 아니, 장군님의 손으로 제 목을 쳐주십시오!"
부관은 감정이 격해졌는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눈에는 진실만이 담겨서 있었다. 이는 비단 부관만이 아닌, 이 관문의 모든 병사들의 뜻일 것이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부관은 지휘관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넨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명했다.
"자, 나의 부관이여! 그대는 성내의 모든 병사들을 추슬러 성문 밖에 진을 치게나!"
"옛!... 옛?"
"이왕 죽을 거 이네아의 저력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시넨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얼어 붙어있던 부관이 소리쳤다.
"저희가 이렇게 버텨있던 이유는 다, 이 관문의 견고함과 지형의 유리함이 아니었습니까?"
"와이번의 앞에 성벽이건 뭐든지 간에 아무 것도 장애 될 것이 없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
시넨은 그 말과 함께 달려나갔지만 부관은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와... 와이번?"
====================================================================================================
오랜만에 써봤는데... 어색하기 그지 없군요;;
비평, 감상, 오타신고 환영하고요.
리플은 필수!
그리고... www.f-world.co.kr 에서....
거기서만 올리기로 했는데,
어쩌다가 여기도 올리게 되었네요.
뭐 상관은 없겠죠 -_-?
첫댓글 국어는 잘못하지만.. [저는 부관으로서] 가 맞지않을까하는... ㅎㅎ 그리고 [눈에는 진실만이 담겨져 있었다]가 맞겠죠.. 그렇죠?? 암튼. 오타신고 환영한다길래.. 잘읽었네요
음... 오타신고 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모든분이 아니라. ㅋㅋ -_ -;; 세유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