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극장
그곳은 지난 날 꿈을 마음껏
꿀 수 있는 우리들의 정원이었다
집에서 코카콜라 공장 방향으로 경사진 길을 내려가면 버스와 대형트럭들이 지나다니는 큰 도로가 나오고, 도로를 끼고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만 가면 페인트칠이 벗겨져 낡아 보이는 연회색 이 층 콘크리트 건물로 태극기가 항상 게양되어 있는 동회(지금의 행정센터)가 나온다. 동회 맞은 편 길 건너에는 내가 자주 가는 만화방이 있고, 길을 건너지 않고 계속 가다보면 하교 길마다 기름이 굽는 구수한 냄새로 우리의 시선을 붙드는, 길가에 낮고 긴 앉은뱅이 나무 의자를 두고 만두를 파는 아주머니가 늘 있다. 지금은 보기 드문 반원형의 납작 만두를 집에서 한 대야 만들어 와 기름을 두른 커다란 철판에 놓고 굽는데 얼마나 향긋한 지 지글지글 만두 익는 냄새가 사방으로 풍기기 시작하면 근처를 지나는 행인들을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할 정도였다. 겉 표면을 노릇노릇하게 기름에 잘 익힌 만두를 길가에 깔린 긴 장돌뱅이 의자에 앉아서 달달한 왜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언제 먹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접시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접시에 먹다 흘린 당면가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대도극장은 만두를 파는 아주머니 바로 옆으로 네 대의 차량 정도가 주차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당시는 우둘투둘한 시멘트 바닥의 빈 공터였다)을 두고 도로면에서 움푹 들어가 있었는데, 모든 영화관이 그렇듯 입구 상단에는 당일 상영되는 영화 포스터를 화려한 색깔로 그린 대형 간판이 영화를 보러 들어오는 사람과 도로를 지나가다보면 자연스레 쳐다보게 되는 사람들을 압도하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심심하면 극장 마당으로 들어가 놀기도 하고 매표소 옆의 계단으로 올라가 복도로 난 유리문을 통해 뭔가 재미난 게 없을까 하며 극장 안을 기웃거리곤 했다.
대도극장은 입장료가 싼 편에 속했다. 내가 살던 동네 주변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세 개나 있었는데, 두 곳은 동시상영을 하는 곳이고 부산역 근처에 있는 중앙극장은 가격이 비싼 편으로 한 편만 상영했다. 영화는 비싼 가격의 값을 톡톡히 했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주로 애용하는 대도극장과 같은 동시상영 영화관들은 극장 내부가 다소 지저분한 것은 그렇다 쳐도, 영화상영 도중 필름이 난데없이 끊어져 넓은 극장 안을 순식간에 암흑천지를 만들면 사방팔방에서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부는 휘파람소리로 아수라장이 되기가 일쑤였다. 그런가 하면 멋있는 영화배우 얼굴 위로 갑자기 치지직거리며 한 줄기 번개가 지나가듯 영화화면 위를 흐리게 만들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소동이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영화가 한 번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여러 번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여기저기에서 부는 요란한 휘파람 소리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내뱉는 욕설까지 가세해서 어디 높은 사람들이라도 보게 되면 어두컴컴한 암흑천지에서 무슨 큰 사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졸지에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극장 안은 돌변하고 만다. 그러면 극장 관계자들이 부랴부랴 영사실로 달려와 손을 보게 되고, 화면이 다시 켜질 때까지 극장 안은 조잡한 홍콩 무술영화나 서부총잡이들의 활극무대처럼 소란을 떠는 관객들로 한바탕 떠들썩한 시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중에는 어린 우리들까지 이런 어른들의 무분별한 행동을 따라하며 극장 안의 의자란 의자와 그 너머 출입구 사이로 난 좁은 복도들을 마치 운동장 달리듯 소란스럽게 헤집고 다녔는데 그것은 어쩌면 영화보다도 더 재미있는 놀이였다.
한번은 이 극장에서 우리의 먼 조상의 과거에 해당되는, 학교 국사시간에 누구나 배운 적이 있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곽재우 장군에 대한 영화가 ‘홍의장군’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적이 있다. 영화에서는 바야흐로 수염이 얼굴 전체를 더부룩하게 감싼 채 위엄이 가득히 서린 우리의 곽재우 장군님이 지역의 용감무쌍한 의병을 일으키기 전으로, 경상도 지역은 임금이 계신 한양을 향해 물밀 듯이 민가와 관가를 잔인하게 유린하며 북상하는 왜적들에 의해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어른들과 우리들은 모두 영사실에서 비추는 한줄기 빛을 제외하면 주변이 온통 시커멓고 냄새나는 어둠 속에서, 실제 서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안 봐도 뻔한 것이 얼굴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주먹을 꽉 진 채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여기저기서 흘리고 있었다. 우리처럼 어린 아이를 비롯한 민가의 백성들이 무도한 왜적의 칼과 창에 찔려 비참하게 쓰러지고 혹은 급히 피난 가는 애처로운 장면들은 너무도 길게 느껴진 나머지 영화를 계속 보는 것 자체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나마 군사라고 모아 겁도 없이 분탕질하는 나쁜 왜적 놈들을 대적하기 위해 달려간 관군은 또다시 눈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는 것이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이건 너무 무기력하다 못해 어른들은 우리나라가 저 지경, 저런 지옥 같은 처참한 광경인데도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미는 데 그만 그 순간 영화 장면 속으로 와락 뛰어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때였다. 주변에서 ‘와아’하는 커다란 흥분의 함성과 함께 극장 안이 떠나갈듯 하게 요란한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뭔가 해서 어른들 틈새에서 고개를 얼른 쳐들고 보니, 먼 언덕에서 백마를 탄 채 붉은 갑옷 차림의 ‘홍의장군’이 커다란 번쩍이는 장검을 높이 빼어들고 ‘전군, 앞으로!’라고 외치자 그 언덕 밑에 그때까지 숨죽인 채 숨어서 기다리던 수많은 병졸들이 일제히 ‘와아’하는 함성을 내지르며 왜적을 상대하기 위해 힘차게 달려 나오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화면이 탁하고 껴져버렸다. 하필이면 이 순간에 우리의 오래되고 낡은 극장의 필름이 매정하게 끊겨버렸던 것이다.
그 날 극장 안에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마침 그 날은 도시 내의 거의 모든 작업자들과 학생들과 일선 공무원들을 포함한 일반인들이 편히 쉬어야 하는 평화로운 일요일의 정오를 막 지난 시간대여서 극장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평소의 소란스런 휘파람과 야유 정도로 끝날 사안이 아니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가 이제 막 기사회생의 찬스에 돌입하여 시원 통쾌하게 복수를 하려는 참인데, 이게 웬 일이란 말인가!
영사실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되고 화면에 홍의장군과 그의 용감무쌍한 병졸들이 왜적을 소탕하기 위해 장쾌하게 달려 나오는 장면이 보일 때까지 극장 안은 완전 무법천지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극장 안을 술래잡기하는 양 소리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손가락 두 개를 좁게 오므린 입 안으로 밀어 넣은 채 괴상한 휘파람을 목청 높여 내지르는가 하면 빨리 영화를 보여 달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등 그 소리와 소란이 극장 안을 꽉 채운 채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지경의 일요일 오후 막장으로 치달았다.
영화는 그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되는 법이다. 어제 홍의장군과 그의 용감무쌍한 병졸들이 통쾌하게 물리쳐 모두 죽어나자빠진 왜적 놈들도, 의리의 사나이 박노식이 검은 가죽장갑을 낀 채 환상의 돌려차기와 박치기에 이단 옆차기로 뉘어버린 뒷골목 깡패새끼들도, 넓고 거친 서부 광야를 먼지를 폴폴 날리며 달리는 말위에서 우리의 친구 카우보이가 권총으로 쏘아 넘겨 뜨린 무수한 인디언들도 오늘 극장에 가서보면 모두 다시 살아나 어제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이 대도극장의 영화는 언제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계속 상영되는 것이고,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도 어제 있었던 그 소란스런 일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싶게 또다시 정답게 극장을 찾아와 동시 상영되는 두 편의 영화를 마치 다정한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처럼 기꺼이 보았던 것이다.
아버지도 영화를 좋아하셨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러 극장에 정기적으로 간다는 것은 형제가 많고 할머니와 삼촌과 함께 여덟 명의 대식구가 운전을 해서 벌어들이는 아버지의 조그만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먹고살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극장에 가기도 했다. 그것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말까 한 드문 일이다.
하루는 웬일인지 일찍 퇴근하신 아버지가 급히 누나와 나를 부르더니 극장에 가자고 하셨다(밑에 동생들은 아직 영화를 이해하지 못할 나이였다). 누나와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엄마가 없는 형제들이 서로 협력해서 북돋아가며 저희들 힘으로 힘들게 역경을 헤쳐 나가며 살아가는 영화(‘엄마 없는 하늘 아래’)로 영화를 보는 내내 아버지는 닭똥같이 소리 없는 눈물을 얼굴 위로 흘리고 계셨다. 당황한 나는 누나에게 손짓으로 아버지가 운다고 알렸지만 어린 탓에 누나도 어쩔 방법이 없이 모른 채 영화를 보는 척 할 뿐이었다. 평소 술을 드시고 오시면 부엌에 마련된 마당 한구석에 주저앉아 큰 소리를 내시며 어린 내가 방에서 나가 말릴 때가지 주정을 부리곤 하셨지만 이렇듯 눈물을 많이 흘리며 우는 경우는 여직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아버지는 육이오 전쟁 중 합천에서 부산으로 할머니와 피난을 내려와 할아버지 없이 일찍부터 돈을 벌어야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하셨다). 영화 한 편이 끝나고 극장에 밝은 조명이 들어와도 고개를 숙인 얼굴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무안했던 아버지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척 밖으로 나가셨다 손에 우리가 먹을 과자를 사서 곧 돌아오셨고, 누나와 나는 이어지는 서부 총잡이 영화를 과자를 맛있게 먹으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 보고난 후 어두컴컴한 길(극장은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다)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대도극장에서는 가끔 영화뿐만 아니라 TV에서도 유명한 연예인인 가수와 코메디언을 초청해 재미있는 쇼를 열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동네 주변에 늘어선 전봇대와 벽에는 그들 사진이 들어있는 포스터가 여러 장씩 붙으며 극장에서 나온 아저씨들이 보러오라고 골목을 다니며 큰 소리로 선전을 했다. 실제로 포스터에 사진이 나온 연예인들이 모두 극장에 출연했는지는 모른다. 쇼는 동시 상영하는 영화와 달리 입장료가 무척이나 비쌌고 더구나 어린 애들은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에 한 번도 비싼 요금을 물어가며 들어가 구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저마다 어떤 연예인들이 극장에서 쇼를 마치고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며 자랑하는, 마치 실제로 그 쇼를 구경한 것처럼 학교에서 떠벌렸다. 그러나 여름날 학교를 다녀와 집으로 들어가는 문 주변에 더위를 피해 앉은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씀을 듣고 판단하건대, 얼굴이 가장 크게 나온 연예인들은 대개 안 나온다며, 비싼 입장료내고 들어가 봐야 아무 얼굴도 못보고 마는, 그냥 속는 거라고 혀를 차는 소리를 여러 번 들은 터라 애들 또한 어른을 닮아서 거짓말을 하는구나 싶었다.
(202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