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문학기행
아름다운 길을 걷다
이 지 숙(82)
섬진강 물소리에 봄이 흐른다.
이른 사월은 남쪽으로만 귀가 열린 것 같다. 마음도 온통 꽃소식으로 성급하다.
내일은 남쪽 지방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비를 뿌리겠다는 일기예보를 듣는다. 일찍 떠나야 하는 여행길. 눈은 감았지만 섬진강의 얕은 물소리가 비를 보태 출렁인다. 한 밤 중에 일어나 우산을 챙기니 잠은 멀리 달아나버린다.
아침 7시 출발. 잠을 설친 까닭에 졸다가 언뜻 보이는 야산은 진달래꽃이 군데군데 피어있을 뿐 나무들은 아직도 겨울이다. 4시간을 달려가니, 작은 봄비가 차창 밖에서 전북 임실임을 알려주었다. 회문산 휴양림의 안내판이 보이는 곳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니, 감나무 하나 둘 보이는 아담한 마을이 보인다. 섬진강 강물이 산을 끼고 흐르고 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작은 길을 따라 매화꽃 피어있는 집들을 지나친다. 가느다란 비는 어느새 그치고 마을은 조용하다.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진메마을이 있다. 작지만 아늑한 김용택시인의 생가가 커다란 느티나무를 뒤로 한 채 지나친다. 느티나무에서 만나 걸어서 강변까지 가기로 한 일정. 늦게 도착한 우리의 잘못으로 버스를 탄 채 강변에 도착한다. 점심시간에 맞춰 임실 주민들이 준비해 준 다리 밑의 만찬은 낭만이었다. 고구마 순으로 맛깔 나는 감자탕과 두툼한 손두부와 김치, 싱싱한 하루나 무침에 따뜻한 밥, 사선막걸리로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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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 김용택시인과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고,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이야기를 듣는다. 섬진강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강을 바라보는 눈빛에 젖어 가슴이 짠하다. 섬진강의 강물이 예전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더 나빠지지 않도록 노력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강물도 큰소리로 호응을 하는 듯하다.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진메마을 · 구담마을 · 천담마을의 물줄기가 깨끗한 이유를 자정작용으로 설명해 주신다.
자정작용의 요건은 다른 강과는 달리 크고 작은 돌이 많아 산소공급이 이루어지며, 산으로 둘러싸인 지리학적 위치로서의 맑은 공기, 강 주변에 심어진 나무들의 작용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정작용을 아이들의 성장과정과 연관시켜 설명해 주신다.
선생님은 지금의 생활이 어린이들과 함께 있지 않아 좋다고 하셨지만, 말씀마다 아이들이 묻어있어 섬진강의 물처럼 마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40여 년 동안 교사로 한 생을 살아오신 선생님. 2학년만을 고집하여 가르친 이유를 말하시는 선생님의 변명이 꼭 2학년과 닮으셨다. 순수하시고, 요령 없이 진실하시며, 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시는 섬진강의 40년 지기. 지금도 너무 행복하다 하시면서 지난 일을 추억으로 얘기하시는 선생님. 2학년 학생에게 ‘벚꽃’을 설명해 주고 직접 보면서 시를 적으라고 했더니 이렇게 적었단다. 한 녀석은 벚꽃을 보고 있으면 차분해 진다는 느낌으로, 또 한 녀석은 도저히 생각해도 시를 못 적겠네. 선생님 뭘 써요? 라고 해서 내었단다. 솔직하여 좋은 그래서 감동하는 것이 시라는 것이라고. 아이의 것을 고쳐 다듬는 것이 아이들의 시가 아니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연이 주는 것을 받아쓰는 것이 시라고 했던가. 이런 순수함이 어릴 때의 마음속에서 점점이 자란다면 커서 세상을 보는 눈도 맑아지리라 믿는다.
강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온통 매화나무가 길을 만들어 놓았다. 많이 알려진 곳이라 생각 했지만 시내버스나 마을버스가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인가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흔한 펜션이나 음식점이 없어 좋았다.
매화는 활짝 피어 바람에 향을 보내는데, 그 아래 땅에 엎드린 파란 개불알꽃이 무더기로 고개만 내밀며 바람에 흔들린다. 짙은 풀색 광대나물도 층층이 분홍 꽃을 피우고 강둑에서 날아오는 매화꽃잎을 받아들인다. 하얀 봄맞이는 긴 줄기를 뻗으며 봄을 노래한다.
짙은 매화 향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봄 들녘에 부지런한 농부가 옮긴 분뇨의 냄새가 그냥 좋다. 섬진강 바람이 불면 매화 향기가 일고, 산마루 언덕배기에서 바람이 불면 그 고매한 분뇨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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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불알꽃(봄까치꽃) 매화
쉬지 않고 흘러가는 은빛 물결. 섬진강은 아름다운 강이다. 이름 하여 ‘아름다운 길’을 강물과 함께 자연과 벗 삼아 걸어가는 것은 행복을 만드는 길이다. 아름다운 길을 만들기 위해 도로를 새로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흙을 밟고 가는 길이 좋은데,’ 하며 혼자 욕심을 내지만 나이 드신 마을 분들이 계시니 수긍이 간다. 매화의 향기는 절정에 달하고 우리의 발걸음이 마을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니 커다란 나무가 마을의 이정표처럼 서 있다. 마을회관을 100m 쯤 앞두고 고목나무 공터에 '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라고 쓴 기념비가 나온다. 공터에 서면 섬진강이 굽이치며 흘러가는 물줄기가 한 눈에 보인다. 구담(九潭)마을은 본래 안담울이었으나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에 자라(龜)가 많이 서식한다고 하여 구담(龜潭)이라는 설과 이 강줄기에 아홉 군데의 소(沼)가 있다하여 구담(九潭)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흐르는 강물위에 정겹게 놓인 징검다리는 물장난을 치고 싶은 동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직은 이른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슬기를 잡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구담마을을 보고, 온 길을 되돌아서 걷는다.
김용택 시인의 생가가 있는 진메마을에 도착한다. 커다란 정자나무의 수령에 마을의 편안함이 다가온다. 키보다 낮은 흙 담이 집안에서도 섬진강의 물살까지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시인의 방엔 책들로 가득 차 있고, 늘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을 멈추지 말라는 퇴계선생의 시 제목을 옮긴 현판(觀灡軒)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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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헌의 단체사진 덕치초등학교 교실
생가를 나와 선생님께서 오랫동안 근무하시다 정년퇴임한 덕치초등학교를 찾았다. 36명이 전교생이라는 자그마한 학교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처럼 서 있었다. 2학년 교실이 있었을 2층에 올라가 벚꽃 너머 ‘그 여자네 집’을 살펴본다. 어디쯤일까. 생각보다 멀게 느껴진 마을이 곧 피어 날 벚꽃으로 가려진다. 오래된 세월을 이긴 듯 벚꽃은 우람한 둥치를 드러낸 채 버티고 서 있다.
어둑해지는 하늘은 인내의 한계를 넘긴 아이처럼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한다. 알차게 보낸 하루의 기행이 조용히 내리는 비로 마무리를 한다. 다시는 못 올 것 같았던 진메마을· 구담마을. 돌아가는 발걸음에 정이 들었는지 다시금 오고 싶은 ‘아름다운 길’로 새겨둔다.
여행을 다녀오면 거짓말을 하고 싶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는 거짓말이 아니라 주변에서 불러일으키는 자연이라는 힘이 가해져 나타난 감정의 격해짐이라 본다. 바람에 일렁이는 작은 봄까치꽃의 흔들거림과 가벼운 걸음걸이에서 오는 산뜻한 바람의 유혹이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마법의 약을 얹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섬진강의 푸른 강물과 매화 향기 가득한 거리를 생각하면, 날개옷을 휘날리며 춤을 추 듯 날아가는 선녀가 어른거린다.
2010.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