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삼척 바다와 함께 걷는 노정(해파랑길 32-33구간)
2018년 12월 2일 (일) 날씨 : 맑은 후 흐림 기온 : 섭씨 3~13도
걸은 거리 18~20km 걸은 시간 : 5시간 30분~6시간 동행 : 귀연산꾼 28명
<죽서루>
세월은 참으로 빠르게 흐른다. 오늘 삼척에서 동해로 걷는 해파랑길 여정은 시작 지점으로부터 무려 540km 거리다.
전체 50구간에서 35구간을 걸었으니 남은 거리도 많지 않은 셈이다.
2018년의 마지막달인데 적지 않은 참석자들이 버스 좌석을 채워줘서 고맙다.
워낙 거리가 먼 동해안길이어서 쉽게 동행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젠 정예 멤버들이 되었지만 30명 정도의 인원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해파랑길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능가하는 멋진 노정이라고 자부하고 싶을 만큼 대단한 경치를 보여준다.
지나는 중간에 만나는 문화재와 고장의 역사 그리고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주민의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매력적이다.
<삼장사>
<실직군왕릉>
<죽서루 돌담 길 만추>
지난 달 종착역이었던 죽서루의 아침은 조용하고 인적이 없다.
가을 단풍이 물결쳤던 11월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모두들 달려간다.
만추의 모습이 남아 있는 죽서루 담장을 따라 실직군왕릉이 있는 언덕으로 오르며 삼장사를 보았다.
제법 잘 정돈된 사찰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실직군왕릉은 지난 번 제재로 보지 못했기에 가까이 다가갔는데 오십천 건너의 실직왕비릉과 함께 비운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담장길을 따라 내려가니 가을 단풍의 모습이 아직도 여전하여 계절을 잠시 잊게 한다.
대나무 숲과 대비되는 단풍의 붉은 색상이 묘한 여운을 느끼게 한다.
담장 너머로 느티나무와 단풍 그리고 죽서루가 묘한 조화를 이뤄 아름답다.
빈 공간의 죽서루의 겨울은 허전했지만 담장과 늦은 단풍 그리고 고목의 구도가 한 장의 사진이 된다.
<가을 자취가 남은 죽서루>
<을씨년스런 죽서루 풍경>
<정라진 방파제에서 단체 사진>
<솔비치 해변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는 일행들>
<쏠비치 해변 이사부길>
정라진 방파제 근처에서 해안을 따라 소망의 탑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온도도 적당하고 바람도 없는데 흰 파도가 그리 크지 않은 소리를 내며 아름답게 해안으로 밀려든다.
6각정 정자와 해안의 하얀 리조트가 바다를 향해 조망을 맞으려 줄지어 서 있다.
예전 이 도로를 따라 가면 시골집과 어구들을 정비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완전히 관광지로 변한 해안 모습이다.
새천년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길은 전체 길이가 104.5km에 이른다.
길의 이름은 동해왕 이사부 장군의 해양개척 정신을 기려 ‘이사부길’로 명명했다고 한다.
이사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최초로 정벌하여 우리 영토에 편입시킨 역사적 인물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과거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출항했던 지역이 이곳 삼척 해안이라고 한다.
이사부길에서 만나는 6각정과 낚시꾼의 실루엣이 멋지게 카메라에 투영된다.
<솔비치 해변 풍광>
<쏠비치 해안>
<소망의 탑>
<소망의 탑 종을 치는 해랑님>
언덕을 오르니 바로 소망의 탑이 기다린다.
중간 정도의 돌덩이를 쌓아 만든 탑은 강렬하고 조화로우며 파란 하늘과 만나는 희망을 연상하는 구도가 인상적이다.
동그란 가락지 모양의 상단에 매달린 종을 치며 소원을 빌어 본다.
닉네임을 ‘해파랑길’에서 지었다는 ‘해랑’님이 공손하게 종을 치는 모습이 정겹다.
소망의 탑을 지나 낭만가도를 알리는 지점에서 갯바위에서 낚시하는 모습이 제법 근하게 오버랩 된다.
오늘 걷는 길에서 바다와 냇가에서 낚시 모습을 많이 보게 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쉼터를 지나 두꺼비 바위를 보게 되었는데 이곳은 새해 해맞이 장소로도 각광 받고 있는데 이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집안이 번성하고 행운이 깃든다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두꺼비 바위는 근처에서 잡기 힘든 강섬돔(53cm) 대어를 낚시로 잡은 후 낚시꾼들로부터 오삼바위로 불리기도 한다.
낚시하기 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낭만가도 안내판>
<삼척 관광 안내지도>
<갯바위 낚시>
<역동적인 조각상>
<동해를 배경을 인증 샷!>
<두꺼비 바위(오삼바위)>
<후진항>
후진항에 들어서며 어부들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해신당을 지나니 쏠비치 해안과 지붕이 파란 건물들이 멋지게 나타난다.
해안은 둥그런 모양으로 활처럼 휘어져 있고, 언덕에 하얀 건물과 지붕이 아름다운 자태로 주변과 잘 어울린다.
주말에는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고운 모래와 흰 파도 그리고 파란 하늘과 바다가 굉장히 이국적인 풍경이다.
<해신당>
<쏠비치 해안과 호텔>
<증산 마을>
쏠비치 리조트를 지나 증산마을이라는 표지석을 바라보며 추암 해변에 당도했다.
몇 년 전에 추암 일출을 보려고 해변가 민박집에 머물렀던 추암 해수욕장은 변해도 너무 바뀌었다.
추암역에서 보이던 모습은 건물에 가렸고, 상가와 식당들이 병풍처럼 해변에 장벽을 형성했다.
허름하던 집들과 상가들이 없어지고 화려하고 높은 빌딩들이 찻집과 식당들로 해변을 포위했다.
이런 변고가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아도 세상이 엄청 변했다는 감탄이 아닌 놀라움만 표현할 뿐이다.
<추암 해수욕장과 촛대바위>
<해암정과 능파대>
<해파랑길 안내판>
<촛대바위>
<들국화>
촛대 바위에 달이 걸려있는 풍경과 어둠을 뚫고 해가 떠오르는 일출은 명승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700년 전 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안빈낙도 여생을 즐겼던 ‘심동노’는 이렇게 노래했다.
우거진 방초와 자욱한 구름 속에 길이 났는데
산 속에서 나오는 시냇물에 복숭아꽃 떠 있네.
걷다가 우연히 바위가 앞길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개와 닭소리 나는 곳에 집이 너 덧 채 있네.
일찍이 갈매기와 더불어 바닷가에서 늙으니
일생의 행적이 바람결 같구나.
부귀공명은 다 헛된 일이니
매미껍질 벗듯이 일찍이 관직을 버렸다오.
- 심동로가 해암정을 지을 당시 쓴 시-
<촛대바위>
능파대에 들어서니 왠 크레인을 탑재한 배들이 보기 흉한 모습으로 카메라 뷰를 망가뜨린다.
촛대바위를 찍으려 해도 영 구도가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공사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모처럼 찾은 해파랑길 방문객들은 아연실색이다.
그래도 애를 써서 구도를 맞춰 보지만 멋진 촬영은 쉽지 않다.
일행 몇 몇에게 인물 사진을 찍어 주고 서둘러 해암정으로 향했다.
<능파대 각자>
능파대(凌波臺)라는 이름을 새긴 한명회(韓明澮)의 일화를 떠올린다면 이곳의 당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의미심장하다.
한명회라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도 추암(錐岩)이라는 이름을 능파대로 바꾸지 못한 사연은 기구하다.
참고로 추암은 송곳바위라는 뜻이다. 한명회는 송곳바위가 못마땅했다.
속되고 촌스럽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능파대’라고 이름을 고쳐서 기문까지 써서 걸었다.
‘능파는 급류의 물결 또는 ’파도 위를 걷는다.’는 뜻으로 미인의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뜻한다. 결과적으로 한명회의 개명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여기서 능파(凌波)란 이름 그대로 ‘파도 위를 걷는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연상한다.
<해암정 뒷편 기암>
<손가락 모양의 기암>
<해암정>
해암정은 평범한 정자지만 허목과 심지양, 송시열, 정철의 일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당대 최고의 권력과 문예가 한바탕 요동쳤던 해암정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초라하고 단촐한 정자의 모습을 간과하지 않으리라.
정자 현판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한명회의 ‘능파대기(凌波臺記)’다.
“흡사 사람이 눕기도 하고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하는 것 같이 또는 호랑이가 꿇어앉은 것 같기도 하고 용이 비틀거리는 것 같이 천태만상을 이루었으며 소나무가 우거져서 그 사이로 비치니 참으로 조물주의 작품이라 하겠다.
강원도 경포대와 총석정과 그 경치가 비슷하며 기이한 점은 더 좋다. 속되게 ‘추암’이라고 이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이제라도 자연에 대해 부끄럼이 없게 ‘능파대’라 하고 그 이름을 고치노라.”
한명회의 촛대바위 표현을 보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껴본다.
정자 정면에는 세 개의 현판이 있다.
왼쪽 전서체 ‘해암정’은 시택 심지황이, 가운데 해서체 ‘해암정’은 우암 송시열이, 오른쪽 초서체 ‘석종람(石鐘襤)’은 송강 정철이 썼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은 영의정을 지내다 2차 예송논쟁에서 패해 덕원으로 유배를 가던 중 이곳에 들러 현판 글씨를 썼고 시도 한 수 남겼다.
草合雲深逕轉斜(초합운심경전사)
풀은 구름과 아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든다.
송시열의 유배 길에는 따르는 문생이 많았는데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유생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조정은 그를 다시 포항 장기로 안치했다가 4년이 지나서 다시 거제로 보냈다.
재미있는 일은 예송논쟁(禮訟論爭 : 조선 시대,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된 두 차례의 예법에 관한 논쟁)의 결과로 얻은 삼척과 동해시의 어부지리다.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은 1차 예송논쟁에서 패해 삼척부사로 좌천됐다. 그 결과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동해 척주비’를 삼척에 남겼다.
죽서루의 ‘제일계정(第一溪亭)’도 그의 작품이다. 2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패해 덕원 유배가 결정됐다.
해암정 현판글씨와 시문이 동해시의 관광자원이 된 연유가 허목과 송시열의 논쟁이었다니 아이러니하다.
<시택 심지황이 쓴 현판>
<우암 송시열이 쓴 현판>
<송강 정철이 쓴 석종람(石鐘襤) 현판>
<해암정>
<동해 조각공원>
해암정 뒤편으로 언덕을 오르니 조각공원이다.
일행들은 조각공원 넓은 쉼터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준비한 도시락을 꺼낸다.
김장할 때 담근 겆저리와 맛있는 반찬들이 여기저기서 춤을 춘다.
시장할 때 먹는 해파랑길 점심은 느긋한 풍요의 시간이다.
의미를 가득 담고 있는 조각상을 둘러보고 일행들은 추암역을 지나 동해자유무역지역관리국 건물을 지난다.
<많이 변한 추암역 근처 모습>
<조각공원 작품>
<추암역>
<동해자유무역관리원>
<만경대 근처를 지나며>
<전천과 멀리 보이는 두타산과 청옥산>
다소 휑한 느낌이지만 이내 전천으로 이어져 다행이었다.
전천에서 보는 두타산과 청옥산의 백두대간 주능선의 경관이 예사롭지 않다.
고적대와 연칠성령을 넘나들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바닷물과 만나는 전천에서 고기들이 보이지 않아 모두들 의아해 했지만 상류 지점에서 많은 치어들이 발견되어 다행으로 여겼다.
혹시나 주변 시멘트 공장 때문에 물고기들이 살지 않았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전천(箭川)을 따라 걸으며 만추의 고즈넉한 풍광에 빠진다.
갈대와 자운영 그리고 노란 나뭇잎을 머금은 버드나무를 보며 운치 있는 정취를 만끽했다.
<자운영>
<두타산(1,352.7m)과 청옥산(1,403.7m) 그리고 고적대 모습>
<전천(箭川)의 평화로운 모습>
<전천의 만추>
<전천을 건너 동해역으로 향하는 일행들>
<해파랑길 쉼터>
전천을 지나는 작은 다리를 지나 일행들은 동해선 철도를 따라 길을 걷는다.
해파랑길 쉼터에서 모두들 안내판에 적혀있는 지나온 거리에 대해서 화들짝 놀랐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을 떠난 여정이 어느 새 532.2km라는 믿기지 않는 기록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체 770km의 해파랑길에서 이 만큼 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사람이 걸어서 간다는 것이 무한이라지만 대단한 역정이라 여겨진다.
동해역을 지척에 두고 반가운 해후를 했다.
아주 오래 전 함께 산행했던 지인들이 무릉계곡 여행으로 묵호에 왔다가 연락이 되어 만났다.
동해역에서의 반가운 만남이 짜릿했던 것은 그들과 동행이 되어 누볐던 오지와 전국 명산을 찾았던 기억 때문이다.
인간의 정은 오래 전 맺은 인연이지만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기억에 맺혀 있어 생생하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부터 532.3km를 왔음을 알리는 안내판>
<귀연 옛 식구들과의 해후>
<동해역>
동해역!
승객이 많지는 않아도 정동진을 찾아 떠난 관광객들이 대부분 지나는 곳이었다.
삼척선, 묵호항선, 북평선이 갈라져 나가는데 모든 여객 열차가 정차하고 강원본부의 대표역이기도 하다.
역 구내에 객차와 화차, 기관차 등을 관리하는 사무소 등이 있어서 역 규모가 매우 크다.
동해시가 생기기 전에는 북평역(北坪驛)이라는 이름으로 영업하였다.
역무실에서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스탬프를 날인할 수 있으며 한때 영주역으로 향하는 무궁화호 열차의 시발역이기도 했다.
또한, 바다열차가 평일 기준 1일 4회 정차하고 주말에는 1일 6회 정차하고 있다. 역 구내의 산업선전철준공기념비는 한국철도공사 선정 철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예전에는 영동선 전철화 구간이 끝나는 역으로 2003년부터 시작된 동해~강릉간 전철화 공사가 끝나 2005년 9월 8일부터는 기관차의 교체 작업이 사라졌다.
<송정리 사적비>
<동해역>
<공원을 지나며>
<홀로 우뚝한 바위>
<관해정>
<송림 숲을 지나는 모습>
<고불개 해변>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해파랑길>
<인동초>
<묵호항 근처 해변>
인적이 드문 동해역을 지나 대로를 따라 걷다가 우측으로 방향 전환하여 한섬 해변으로 향했다.
철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해안에 해파랑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송림을 지나는 환상의 코스다.
고불개 해수욕장과 하평해변을 따라 큰 해송들이 오솔길을 이루어 걷기 좋다.
특히 예전 군부대 철조망을 걷어내고 조성된 길은 밧줄을 쳐서 길 안내를 쉽게 해 놓아 편리하다.
하얀 인동초를 발견하고 줌 샷으로 찍었는데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도 꽃을 피운 생존의 힘에 놀란다.
멀리 묵호항과 방파제가 보이는데 길은 이리저리 바위 절벽을 따라 철로를 왼쪽에 두고 이어진다.
<묵호항 방파제>
<해안과 해파랑길 그리고 동해선 철도>
<묵호항과 하평 해수욕장>
<묵호항>
<묵호항 방파제>
<동해선 굴다리 내부 어린이들 그림>
<묵호항 역>
<묵호항역>
마지막 백사장이 보이는데 하평해수욕장으로 묵호항역이 근처다. 묵호항역은 화물차를 선적하는 곳으로 꽤 넓다.
묵호항역에는 돌하르방이 서 있는데 철로 옆 설명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제주도 돌하르방은 여산(女山)인 한라산의 음기를 잠재워 한 해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한라산을 바라보는 남근을 깎아 세운 것이 현재의 돌하르방의 기원이라고 한다.
돌하르방은 단순한 수호신의 의미를 넘어 제주도의 문화적 상징이자 자부심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지난 1990년 초까지 묵호역과 묵호항역 주변은 묵호항의 대표 어종인 오징어와 명태의 풍어로 뱃사람과 상인들로 흥청거리는 파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후 계속된 흉어와 묵호항역 앞바다에 방파제가 건설되면서 어민들은 하나 둘 묵호항을 떠났고, 그 와중에 묵호항역 앞 유모씨의 집에 있던 돌하르방을 직원들이 발견했다.
이 돌하르방의 주인은 역 앞에서 식당을 하면서 수석을 취미로 하던 분이었는데, 어느 해 제주도로 여행을 떠낫던 유씨는 서귀포 모처에 있던 돌하르방을 보고 한 눈에 반해 그 이듬해 다시 제주도를 찾아 돌하르방 주인에게 몇 날을 애원하여 어렵게 육지로 가져와 30년 가까이 애지중지하다가 식당을 그만두면서 묵호항역에 기증했다.
묵호항역 직원들은 역 입구에 기단을 만들어 돌하르방을 세워 철도의 발전과 직원들의 건강, 행복을 기원하였다.
돌하르방의 영험 덕분인지 묵호항역은 큰 사고 한번 없이 최고의 물류역으로 거듭나고 직원과 가족들 모두 활기차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생활해 오고 있다.
묵호항역 구내에 있는 돌하르방은 ‘머리를 쓰다듬으면 취업의 문이 활짝 열리고, 코를 만지면 사랑과 다산의 축복을 내려주며, 턱을 만지면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을 묵호항역 직원들은 계속 이어가고 있다.
<묵호항역에 있는 제주 돌하루방>
<묵호역>
묵호항역의 돌하르방과 헤어져 묵호 시내로 접어드니 오른쪽은 수산물시장이고 왼쪽이 묵호역이다.
가장 멀리 걷는 일행도 묵호항역에서 만났기 때문에 오늘 예정 시간을 맞춰 33구간을 묵호항에서 끝냈다.
상당히 먼 거리로 여겼던 32-33구간을 무사히 걸었기 때문에 다음 구간 34코스를 진행하기에 여유가 생겼다.
파란색 기차 모양의 묵호역 쉼터는 앙증스럽고 재미난 모습이다.
창가로 보이는 버스와 기사님의 여유 있는 모습이 반갑다.
조금은 부족함을 느꼈던 뒤풀이지만 모두들 무사히 걸었음에 만족하고 대전으로 향했다.
동해안의 절경을 만끽한 하루가 즐겁고, 해암정과 추암 촛대바위와 능파대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쏠비치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과 바닷길을 따라 송림을 걸었음도 대만족이다.
삼척과 묵호의 해파랑길 조성이 상당한 배려와 철저한 준비로 만들어졌음도 실감했다.
아름다운 바닷길을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해파랑길을 만든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참가자 모두가 총무와 운영진이 되어 솔선수범으로 무사히 걸을 수 있었음에 고맙다.
<묵호역 앞에 설치된 쉼터>
December Morning - Jim Brickman
첫댓글 항상느끼지만 후기글에 더욱더 해파랑길이 기다려진답니다~~^^
먼 길이었는데 모두들 무사히 완주해서 기쁨이 큽니다. 처음보다 더 애착이 가는 이유는 점점 더 해파랑길의 매력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에서도 문의 전화가 꽤 오네요. 동행이란 게 정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