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더 이상 동아시아 역사의 거짓을 더는 거론하는 것이 진부할 정도지만
漢武帝에 의해서 설치 되었다는 襄平城의 역사 속에서 平壤城이 어떻게 거짓으로
해석되는지 襄平城의 역사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维基百科는 襄平城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 합니다.
襄平城是中国东北历史上第一个国家燕国的军事要塞。
襄平城是前284年左右兴建的燕长城的东部堡垒,本为東胡、山戎與箕子朝鲜的重要城市。
양평성은 중국 동북역사상 일개 국가인 연나라의 군사 요새 였다.
양평성은 기원전 284년 연장성의 동부 군사 요충지이며
본래는 동호이며 산융인 기자조선의 중요 도시다.
이 설명에서 "紀元前108년 漢武帝가 樂浪朝鮮을 멸망시키고
낙랑조선의 王儉城에 양평성을 설치 했다" 라는
설명을 쏙 빼 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화사관적으로의 箕子朝鮮은 遼寧省 일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화사관과는 다르게 대한민국 식민사관적으로의
箕子朝鮮의 위치는 북한 平壤 일대 입니다.
중화사관적으로의 襄平城은 지금의 遼陽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중공 역사 설명과 한국 식민사관의 양평에 관한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襄平城이 箕子朝鲜의 중요 도시이다?
그 어느 기록에도 箕子朝鲜이 도시를 설치 했다 라는 기록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箕子朝鲜의 도읍지는 어디였을 까요?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공히 箕子朝鲜의 도읍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襄平城이 箕子朝鲜의 중요 도시이다 라는 설명은 거짓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합니다.
公元前222年,燕国终被秦吞并。
秦始皇二十六年(公元前221年),全国分为36郡,辽东郡仍沿袭燕国郡制,郡府设在襄平县。
즉, 기원전 222년 秦나라가 燕나라를 격파하고 병탄했다.
기원전 221년 전국을 36군으로 나누고, 요동군을
연나라의 연국군제를 그대로 따라 군부를 양평현이라 했다.
燕나라를 병탄 했는데 연나라의 군제를 따라 그대로 襄平县으로 했다?
도데체 어느 기록에 燕나라가 郡制를 실시 했다 라는 기록이 존재하며,
燕나라에 襄平县이 있었다 라는 기록이 존재 하는 가요?
필자만 燕나라가 郡制를 실시 했다 라는 기록을 보지 못한 것일까요?
朝鮮이라는 이름의 나라에 기록으로 남겨진 도시 이름은 王劍城이 유일무이 합니다.
즉, 壤平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08년 漢武帝가 樂浪朝鮮 征伐에 성공을 하고 한사군을 설치하고
그 治所를 낙랑조선의 王儉城에 설치 했다 라는것은 王儉城=襄平城 일수 밖에 없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189年,辽东太守公孙度(襄平人)自立为辽东侯,称平州牧,分辽东郡为辽东、
中辽、辽西三郡,辽东郡领襄平、居就、安市等8县。
公孙度之孙公孙渊执政后,自立为燕王,置百官有司,不久称藩于东吴孙权。
魏景初二年(238年),司马懿奉命率魏军讨公孙渊,
同年公孙氏割据政权被消灭,辽东郡并入魏国版图。
魏在原公孙氏控制地区设平州(仍治襄平城),辖辽东等5郡。
在襄平设东夷校尉,统管高句丽等东夷民族。
曹魏时辽东郡辖9县,襄平为首县。
后平州合并于幽州。
189년 요동태수 공손도가 燕王을 자처 하면서 양평현에
공손연의 國都를 설치 했다라는 설명을 하면서 공손도의 國都가
"遼東城" 이라는 설명을 또 쏙 빼버립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공손도를 遼東太守이며 공손도가 遼東에서
燕王을 자처 했으며 고구리등과 같은 東夷民族 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손도가 遼東을 통치하던 후한말의 관료라고 하지만 漢나라의 太守라는 위치는
漢朝로 부터 임명이라는 형식적 절차를 거치기는 하지만 독립된 영토와 백성으로 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독자적이 병력을 소유한 國家의 君王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입니다.
公孫度는 遼東太守 입니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公孫度를 임명에 의해 여기 저기 任地를 떠도는
임명직 관리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역사 倭曲인 것입니다.
《三國志 公孫度傳》의 기록에서 보듯이 公孫度가 통치하고 반란을 일으킨 땅이
遼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는 것입니다.
《禹貢錐指》
然自朝鮮以至日照皆青也,所遺多矣。
그러함으로 조선은 청주에 두루 미친다.
《遼史地理志》
舜以青州越海,又分為營州,則遼東本為青州矣。
순임금이 바다 건너를 나누어 영주라 했는데,
즉, 요동은 본래 청주라 한다.
《晉書地理志》
舜以青州越海,又分為營州,則遼東本為青州矣。
순임금은 바다를 건너 청주를 다스렸으며
또한 영주로 나누었다.
즉, 요동의 근본은 청주인 것이다.
거짓으로 해석되는 현재 동아시아 역사 해석으로의 青州는 산동 반도 입니다.
그렇다면 遼東이라는 땅은 지금의 遼東半島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지금의 遼東半島가 靑州 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 기록은 舜 임금이 青州를 나누어 遼東과 營州를 설치 했다 라고 분명하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遼東과 營州는 堯, 舜 때의 青州에 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大命題 때문에 公孫度의 營州를 위 지도와 같이 산동반도로 비정하는 비정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명백한 억지 비정이며 거짓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公孫度 때의 靑州와 遼東 그리고 營州의 위치는 산동반도 일까요?
현재의 산동반도는 절대로 公孫度 때의 靑州 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襄平縣 이라는 땅은 절대로 지금의 遼陽 일수 없는 것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위키 백과는 公孫度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식민사관적 위키 백과는 "공손도는 중국의 동북방의 변방 태수로서
독자 세력을 구축한 양평현 사람이다" 라고 설명을 합니다.
식민사관적으로의 東北方이란 지금의 遼東半島 북쪽을 의미합니다.
晋大兴二年(319年)鲜卑族慕容廆建前燕,攻陷辽东郡,占据襄平,
并把辽河以东地区划为辽东属国,治所在襄平。
319년 모용외가 요동군을 공략하고 양평을 점가하여
양평성을 국도로 삼고 전연을 건국하고 요하의 동쪽지구인
요동속국의 양평이 있는 곳에 치소를 두었다,
公元404年(东晋元兴三年)高句丽据有辽东之地,改襄平城为辽东城。
404년 요동 땅은 고구리가 차지 했으며 양평성을 요동성이라 했다.
광개토태왕 때 고구리는 공손도의 요동성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 받아 遼東城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襄平一名至此废除。後燕地入高句麗。北燕又喬置遼東郡於今遼寧西部。
이로서 양평이라는 이름은 폐지 되었으며 후연의 땅에 고구리가 들어 왔다.
북연 또한 지금의 요녕성 서부에 요동군을 설치 했다.
前燕과 등이 襄平이라는 땅을 통치 했으며 後燕의 땅에 고구리가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즉, 後燕의 땅을 고구리가 차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前燕은 前秦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이중적 주장을 합니다.
前秦에 의해 멸망한 後燕의 땅이 였던 곳을 고구리가 차지 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後燕의 영토는 고구리의 영토라야 하는 것입니다.
즉, 오호십육국 때, 특히 광개토 태왕과 고려 태왕 시기의 고구리 영토는 모두 거짓으로 비정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前秦이 고구리였거나 고구리의 역사를 前秦이라는 이름으로 교체를 했거나
둘중 하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 프레임에 갖혀 있는 사람들로서는 믿기 어렵지만
前秦의 영토는 고구리의 영토와 닮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물론 오호십육국 때에는 지금의 하북성과 요동반도는 역사에 등장 할 수 없는 땅이기 때문에
그 땅 역시 고구리의 영토일 수 없습니다.
為西元586年(隋文帝開皇六年)平原王遷都到最後一個首都長安城,
新唐書認為長安城就是平壤即樂浪郡,於是國內城附近的平壤就與今日之平壤混淆。
586년 평원왕 때 장안성으로 천도를 했는데, 신당서에는 장안성의 위치를 낙랑군이라 한다,
장안성은 국내성 부근이라고 하며 지금의 평양이라 하지만 진위는 헷갈린다.
즉, 중화 사관적으로는 신당서에 장안성은 낙랑군에 존재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은 長安城을 國內城 부근이며 북한 平壤이라고 주장 하지만
그 眞僞는 헷갈린다 라는 것입니다.
헷갈릴수 밖에....,
억지 사관으로 일관하는 중화사관으로도 한국의 식민사관 논리는 헷갈린다 라는 것입니다.
고구리의 遼東城의 역사는 동북아시아 역사가 거짓일 수 밖에 없다 라는 논리의 키워드 입니다.
옳고 그름의 정확한 판단은 이 글을 읽고 계신 귀하가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