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문학》 2022. 1. 〈목동살롱〉
김동리 선생님 또는 내 문학의 어두운 저 편
노 창 수
(시인·한국문협 부이사장)
나의 60년대는 가난했으되 찬란했다. 함평군 학교면 리(里) 소재지의 학다리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그 무렵, 각 대학에선 문학 콩쿠르가 많았다. ‘전국고교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이 그거였다. 대학들은 이 정보를 공문으로 고등학교에 알렸고, 문예부 선생님은 그것을 노트에 써와 종종 전달해주셨다. 그 소식은 내 문학에의 불꽃을 당기는 심지가 되었다. 응모한 작품이 자주 뽑히곤 했으니까. 그때 입상한 곳은 동국대, 서라벌예대, 경희대, 한양대. 청주여대, 충남대, 전남대, 조선대, 동아대, 홍익대 등의 공모로 기억된다. 이외에 체신청, 경찰청, 안보기관, 은행, 전라남도 등에서도 작품을 모집했는데 상위 급에 선정되곤 했다. 당시 고교생들의 로망 지(誌)인 《학원》의 ‘학원문학상’에도 산문부에 가작과 입선 등 두 번 입상했다. 그런 저런 실적으로 학교에서는 나를 ‘문예장학생’으로 선정해 주었다. 혜택은 수업료 감면이었다. 그러니, 우리집처럼 가난한 살림엔 큰 시혜가 아닐 수 없었다. 하루는 가정환경을 확인하기 위해 담임선생님이 우리 오두막을 실사(實査) 차 방문했다.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골방의 먼지 속에서 가마니를 짜다가 선생님을 맞기도 했다. 교직원회의에서 별 이의 없이 통과되어 첫 특기자 장학생이 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작품 투고에 더 열을 쏟았다. 고교 1학년 때 서라벌예대 문예현상모집에 「감나무」라는 단편소설을 써 응모했다. 우수작이었다. 2년 뒤 그 대학 문예창작과를 진학할 때, 필기고사에 이어 2차 고사인 특기자 전형을 치렀다. 지면으로만 뵈던 김동리 선생님을 그 면접에서 만났다. 선생님은 당신이 심사한 작품의 상장을 보고 알고 있다는 듯 ‘열심히 하게!’ 하며 미소를 보내셨다. 작품을 관심 있게 읽었다는 평도 덧붙여 주셨다. 오늘날에 문협 사무실에 와서 보니, 선생님은 당시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직에 있었고 이사장은 박종화 작가였다.
면접이 끝났다. 하지만, 난 서울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빨리 고향에 가야 했다. 아버지의 천석고황이 깊어졌기 때문이었다. 광주의 큰 병원에 수술을 위해 날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병원비로 송아지 한 마리와 벌고 있는 논의 반을 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날씨마저 추운 겨울 날, 아버지는 이불에 싸여 소달구지를 타고 학다리역으로 갔다. 수술 후 입원 생활은 일주일도 넘었다. 늘어난 병원비로 또 빚을 내야 했다. 난 학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어머니의 권유와 모교 선생님의 뒷받침으로 등록금이 저렴한(당시는 고등학교 보다 더 쌌다) 교육대학에 입학하고자 했다. 헌데, 입시를 5개월 앞둔 어느 날, 라디오에서 ‘제1회 대학입학학력고사’를 시행한다고 했다. 지금의 ‘수능’과 같은 제도이나 대학을 가느냐 못 가느냐를 가르는 시험이었다. 나는 재수생 아닌 재수생, 그러나 다행히 합격을 했고 목포교육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산간 오지 학교에 오래 근무했다. 소설 습작을 했지만 교직과 소설 쓰기의 병행은 벅차기만 했다. 학교에선 교무 중책을 맡았으며, 밤이면 동료들과 술 마시느라 문학을 아예 놓아버릴 뻔도 했다. 괴로울 때 김동리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알고 보니, 당시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인 선생님은, 편지만 쓰지 말고 소설 한편을 보내라고 아픈 곳을 찔렀다. 지금 그때의 소설이 내 낡은 서랍 안에 누워 있다. 「비밀생존계획」이 그것이다. 「기억의 바다」, 「빛나는 탈출」 등도 있다. 대학 다닐 때와 산골학교 근무 때 송기숙 선생님께 지도 받아 퇴고를 거듭한 작품이었다. 헌데, 낡은 무기와 신발 때문인지 난 신춘문예의 최종 전투고지에서 늘 넘어지곤 했다. 해서, 김동리 선생님, 그리고 아, 일주일 전 타계하신 송기숙 은사님께 마냥 빚진 마음뿐이다. 소설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혁명을 일으키려던 한 때의 우직한 소설가, 그는 지금 바위 아래 잠든 ‘립 반 윙클’이거나 회나무 밑 ‘남가일몽(南柯一夢)’에 빠진 순우분일까. 하지만 워싱턴 어빙의 글과 개미굴 담화와는 달리 그는 깨어날 기미조차 없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