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권사님이 연락이 자주 온다.
이제는 교회 내에서도 좀 심각하게 본 모양이다.
교인수도 꽤 많은 교회인데 내 가계 근처에 있고 애들도 유치원 졸업했던 교회.
이제 여 권사님 입만 쳐다보고 있다.
엄마도 둘째 누나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고.
이번에 더 좋은 기도원에 보내 주겠다고 순희한태 애기한다.
알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그런곳은 안 좋다고 안 간단다.
집도 교회도 이러고 있으면 서로 피곤하고 힘들지 않냐고.
교회에서 구역 담당하시는 분들에게까지 교회에서 얘기하시니.
그러는 사이 권사님이 그러는거다.이렇게 힘들고하니 동사무소에 애기해서 기초수급자 신청을 하라고 하신다.
내가 가게도 있고 가족들도 있는데 내 자신이 인정을 못 하겠다고 했다.
나를 위해 그런게 아니라 순희 치료를 하기위해 신청해서 되면은 치료비라도 나오지
않냐고 얘기를 하신다.
아니면 서류상으로라도 이혼을해서 한번 해 보라고 힌다.
난 싫다고 했다.
요즘은 법이 많이 바뀌어 힘들기도 하지만.
그러는 사이 순희는 교회에서 살다시피하고 배 고프다고 돈 좀 보내달라하고.
배 고프다고 울면서 전화하면 일 하다가도 내 맘 찢어진다.
" 들어와 집에가서 밥 먹고 나가..."
" 집에 못가요..."
" 집에 오면 누가 죽인데니? 엄마가 오랜다..."
" 못가요..."
" 그럼 굶어죽어 나 현장이야..."
미치겠다 정말.
어느날 권사님이 또 그러신다.
좋은 기도원이 있는데 한번 더 보내보라고.
저렇게 놔두면 교회에서도 뭐라하고 집도 그러니까 빨리 나아야 되지 않냐고.
제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외국이라도 보내지요.
어느날 준비를해서 기도원으로 보냈다.
입안에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다.
애들도 학교는 잘 적응을해서 다닌다.
순희에게 모든 신경을 쓰다보니 집도 엉망이고 애들도 어찌 배우고 크는지
모를 정도로 난 신경이 애민해져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잊었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눈에서 눈물이 나오질 않는다.
놀라운 일이 있어도 놀라질 않는다.
감정이 무감각해졌다.
집안 일도 그렇지만 가계 일도 엉망으로 되고 있다.
수금도 안 되고 맡아 놓은 일도 취소가 되고.
그렇잖아도 손실장한태 물린 돈이 삼백만원인데 부천 식당일이 문제가 있나보다.
육백오십만원짜리 간판에 백오십만원 착수금 받고 일 했는데
거의 공사가 끝날무렵 문제가 발생하여 돈이 묶였다.
식당에 얘기하니 손실장께 받으라하고
손실장께 얘기하니 식당에 애기해 보란다.
순희를 보내고 애들과 엄마와 오손도손 살고 있었다.
둘째 누나도 모처럼 찾아 온 우리집 평화에 함께 웃고 살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일 하고 있는데 전화 한통화.
권사님 전화였다.
" 재민이 아빠 순희 전화 안 왔던가요..."
" 예 무슨 일이?..."
" 순희가 기도원에서 나가고 없어졌다고 연락이 와서..."
"................"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미치는거 같았다.
사람이 이럴때 쓰는 말인가보다.
" 이게 정말...돌아버릴거 같네..."
집에와서 엄마께 누나께 말씀 드리고 어찌해야 되는지 의논을 하고 있었다.
권사님 전화.
" 기도원 원장님(여)과 아침에 직원들과 아침을 먹고 원장님이
시장으로 볼 일 보고 오신다고 나가셨는데
기도원 들어가니 순희가 없어졌더란다
운동화도 아닌 실내화를 신고..."
기도원 원장님이 권사님께 죄송하다고 연신 전화로 미안해 하시고.
누나와 함께 기도원에 가 보기로 했다.
가서 어떤 일인지 알아보야 속이 시원해질 거 같아.
권사님께 물어보고 전철을 타고 출발했다.
찾아가서 그 동네에 여기저기 물어보고 순희 흔적을 찾아 보기로.
안양역을 지나 조금 가는데 핸드폰 전화가 온다.
" 여보세요.."
" 순희 남편분이죠? "
" 네 그런데요? 누구신지?..."
" 순희를 그렇게 그런 곳에다 두고서 이렇게 도망을 오도록
방치해 두었나요..."
" 누구신지요 "
" 잘 아는 사람인데 나중에 통화 하자구요 순희 여기 군산 있으니까...."
" .............."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전화 한 통.
내려가다가 어느 전철역에서 내렸다.
둘째 누나와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 역전 광장 의자에 앉았다.
누굴까?
전화한 사람이.
엄마랑 모든 가족에게 연락을 하고 집으로 왔다.
다음날.
순희가 연락이 왔다.
군산 언니 있는 보육원으로 왔다고.
물어 보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 기도원 원장님이 시장 가시고 없는데 함께 있는
장애아 동료가 여기서 있으면서 원장님 말 안 듣고
말썽 부리면 멀리 이상한 곳으로 너를 보내버린다고 하더란다
그러면서 빨리 도망 치라고 했다고..'
그래서 너무 무서워 실내화를 신은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돈 삼십여만원으로
군산에 있는 보육원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고.
괜히 그 장애아가 거짓말을 해서 그렇게 됐다고
나중에 원장님이 권사님께 전화를해서 너무 죄송하다고.
내가 내려가며 받은 그 남자분 전화는 내 생각에 그 보육원에 원장님(이사장) 같다는 생각.
언니 연락처도 모른다더니 어떻게 알고 또 기도원이 경기도인데
군산까지 어떻게 찾아 갔을까?
밖에도 혼자 못 나간 사람이.
얼마후.
순희 큰 언니가 전화가 왔다.
순희를 왜 저러도록 방치해서 병을 키웠냐구.
왜 저런 곳에 보내서 도망치게 했냐구.
나에게 쏘아 붙였다.
" 그럼 친언니가, 오빠가, 배 아파 난 딸을 엄마가 뭐가 부족해 친 동생을
그런 고아원에다 버렸냐구.
당신들은 편하게 집에서 살고 두 동생은 저런 고아원에서 찾아오는
부모도 형제지간도 없이 고생하며 살 고 있는거 아냐구...."
한바탕 쏘아주고픈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다 넘어간다.
언니는 뭐라 하면서 순희가 안쓰럽다는듯 혀를 차며 전화를 끊었다.
내 소리도 듣지 않고.
정말 말이 안 나왔다.
2009년 1월 14일.
이사장님과 통화를 하고 " 희망의 그루터기 " 에 입주 신청을 했다.
차라리 둘째언니와 거기서 맘 편히 있는게 나을 거 같아 허락을 했다.
나중에 좋아지면 오라고.
순희를 보내고보니 집안이 안정이 되어 온다.
그사이 부산 누나는 이런 기회에 부산으로 이사 오라고 한다.
2월2일.
권사님이 동사무소에 " 복지대상 신청서 " 를 재출하고 기다렸더니
나의 가계,가족사항 등 모든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신청이 완료 됐다고 연락이 왔다.
사실 정상적으로 하면 할 수 없는 그걸 권사님은 해 주셨다.
순희는 장애2급으로 나왔다.
순희를 전입까지 시켜서 군산에서 살게 했다.
이제 정부에서 조금 나오는 장애 보조금으로 순희는 군산에서 살게 되겠지.
큰 맘을 먹기로 했다.
부산으로 이사를 가기로.
애들에게 이야기하니 전학가기 싫고 갈려면 학기가 끝나고 반 편성할 때쯤 가잔다.
들어가기가 쑥쓰럽다고.
사실 간판업도 요즘은 면허도 따야 되고 협회도 등록하고 구청도, 세무서도 등록해야 되는데
난 무면허로 구청만 등록되어 있다.
나만 그런게 아니고 여러 간판업들이 이렇게 어렵게 버티고 있다.
간판하나 만들어 허가를 맡으러 구청엘 가면 구청 직원들이 암암리에 허가 내주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한다.
돈을 안 주면 시간을 질질 끌고 이것저것 괜히 트집을 잡고 허가를 안 내준다.
가계 주인은 밀린 점포세를 달라고 마냥 전화는 오고
거래처에서는 외상값좀 갚으라고 물건 시키면 잘 안 가져온다.
돌아보니 가계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외상값도 3군데 천육백만원, 점포세도 보증금이 오백만원인데 삼백만원이나 밀려 있었다.
집도 전세 삼천만원이었는데 가게가 어렵다보니 어찌 이사하며 줄여서 오백을 외상 갚고.
남는건 전세방 이천오백이 내 재산 이것뿐.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2년전 권리금 좀 준다고 할때 가계 뺐으면 좀 건졌지.
그러나 쉽지가 않다.
한 평생을 했던 가계를 접는다는게 어렵지.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져서 슬픔이 뭔지 기쁨이 뭔지 눈물도 웃음도 사라졌다.
8년이라는 짧지만 긴 시간을 순희에게 소비하고 보니 남는 건 허탈뿐이었다.
내 자신도 잘 한건 없지만 정말 후회되고 어찌 해 볼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내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순희가 싫어 항상 낚시터로만 다니고.
집에 와서 얼굴 대하는게 싫어 술독에 빠져 살고.
엄마의 잔소리 ,인상 쓰는게 싫어 늦은 밤에 들어 오고...
나도 잘못한 것이 많다.
순희에게 따뜻하게 대해 줄껄.
술 안 마시고 오면 좋아하기는 했지만 더 신경을 쓸껄.
우울해 있으면 더 다독거려 줄껄.
우리 애들은 벌써 저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변해 있고.
항상 잘 보고 살았으면서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모든걸 내려 놓고 이제 내 맘으로 편히 보니 그렇게 이쁘게 커 있었다.
자고 있는 애들 볼에다 뽀뽀를 해 주었다.
항상 해 주었던 그런 맘이 아닌 진짜 아빠의 사랑스런 뽀뽀로.
" 애들아! 아빠가 부산으로 이사하면 정말 아빠로써 따뜻하게 대해줄께 사랑한다..."
누나께 방을 알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주인집 아저씨께 이사 하겠다고 대충 얘기를 드렸다.
또한 가계도 정리를 하겠다고 함께 했던 이씨에게 했더니 옆에 의료기에서
내 가계를 얻어 트겠다고 한댄다.
돈도 없고해서 흥정을 하고 이사 비용 오백만원을 받기로 했다.
몇년 전 천만원 권리금 준다해도 못 버렸는데.
말도 많고 미안하고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래처 외상 값.
후램 사장님이 저번에 오셔서 한바탕 하고 가셨다.
이사 간다고 말 하기 전에.
그리고 아크릴 사장님께( 외상 값 칠백오십만원) 얘기를 했다.
가계를 정리하겠다고.
권리금 받으면 갚고 나갈려고 했는데 권리금도 없고 빈 손으로 나가게 됐으니
내가 부산가서 직장 다니며 한달에 조금씩이라도 갚아 나가겠다고.
정말 살아가면서 아크릴 사장님처럼 좋은 사람 만나기 힘들다.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거래처에서 소문이 자자했었다.
몇 년전 광릉 수목원 집에 갔을때 연세 많으신 부모님와 함께 사시는데
맛있는 대접을 잘 받고 왔었다.
며칠 후.
사장님이 오셔서 부산가서 열심히 살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라고 하신다.
사실 거래처에서는 순희와 이렇게 사는걸 잘 모른다.
거래처 배달하는 친구가 한번씩 얘기해서 알겠지만
항상 나에게 그런 얘기를 누구도 말 안한다.
미안하다고 하고 조금씩이라도 갚겠다고 했더니
그냥 두란다.
열심히 살고 힘 내라고.
사실 내가 돈이 있어도 못 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열심히 해도 수금도, 남에게 사기 당하는 일이 빈번하니 사장님도 잘 안다.
나에게 돈이 없다는 걸.
그리고 다음날 후렘 사장님도( 외상 값 육백삼십만원) 오셔서 잘 살아라고 하고 가신다.
그렇게 저번부터 외상 달라던 후렘 사장님도 아마 아크릴 사장님이 얘기를 하신 모양이다.
나머지 조금씩 있던 외상들은 모두 갚고 큰 외상은 이렇게 맘 좋은 사장님께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에서 연락이 왔다.
방을 얻었으니 정리를 하고 이사 준비를 하란다.
속전속결로 일이 진행됐다.
짐도 싸고 가계도 정리가 되고 순희도 이제 안전하게 보내 놓고.
그리고 이사 할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데 일주일 쯤 남기고 부산 누나 전화.
" 정룡아 큰일 났다 "
" 왜 또 무슨 일이야? "
" 그전부터 아파트를 팔려고 부동산에 내 놓았는데 아파트가 팔렸다.."
" 그럼 다시 사면 되고 나 이사하는거랑 무슨 상관..."
" 매형이 회사가 멀어서 회사 가까운 곳으로 이사 할려고 내 놓았는데
한 사람이 와서 갑자기 자꾸 팔아라 해서 기회다 싶어.."
" 알았어요 그럼 가까운 곳으로 가면 다시 내 방도 알아봐야겠네..."
누나는 내가 잘 모르지만 고등학교 늦 공부를 하러 다닌다고 들었다.
배움의 욕심이 많아 매형 말씀이 누나는
풍선아트, 꽃꽂이,피아노, 분재, 연필 수채화 등등 해아릴 수 없이 배우러 다니고
이제는 고등학교 공부하러 다닌단다.
이 늦은 50 나이에 졸업장 타서 어디에 쓰려고.
날짜는 흘러 전화가 왔다.
지금 살고 있는 북구 구포에서 한시간이 족히 걸린 금정구 구서동에 내 전세방을 얻고
누나 아파트도 계약을 했단다.
2월24일 이사 날짜가 잡혔단다.
그럼 우린 그동안 내려가면 방도 ,애들 학교도 어떻하냐고 했더니
누나네서 자고 이삿짐은 누나 다니시는 교회 창고에다 두고
애들도 학교 전철타고 한달만 다니라고 한다.
그동안 금정구에 있는 가서 애들 학교 전학 준비도 하고
부산 날씨는 겨울도 따뜻하다고 겨울용품이라든지 모든걸 버리고 오란다.
방 두개에 복잡하니까 장농도 다 버리고 옷장 하나와 사람만 오란다.
집에 새로 들어 온 젊은 사람이 혼자 들어온 거 같아 장농을 얘기했더니
두고 가란다 고맙게 쓰겠다고.
순희가 시집 오면서 사 왔던 튼튼한 장농인데 문이 너무 무거워 자주 경첩이
부셔져서 몇 번 사다가 고치고 했던 장농이다.
이삿짐을 쌌다.
모든걸 버리고 간단하게 모았다.
애지중지 길렀던 예쁜 열대어 어항.
놓아둘때 없으니 버리고 오라고 누나가 사정하던 어항도 물을 빼어 두고.
그리고 화물차를 불러 짐을 실었다.
모두 버리니 작은 차로 한 차 밖에 안되었다.
시골 작은 형님이 올라오셔서 도와주셨다.
몇 십년전 큰 형님 작은 형님이 시골로 이사가던 그 모습이 떠올라 숙연해졌다.
그리고 형님과 나와 함게 부산으로 출발했다.
둘째 누나도 동생도 조카들도 우리 떠나는 걸 배웅해 주었다.
그래 부산에선 더 잘 살겠다고.
몇 시간 후.
부산에 도착했다.
먼저 와 있던 애들이랑 누나가 교회로 와서 도왔다.
교회 허름한 창고에다 모든 이삿짐을 내렸다.
그리고 누나네 아파트로 갔다.
다음날 애들 학교에 가기로 했다.
잠에 취한 애들을 깨워 나섰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 재민, 희정이를 데리고 전철을 탔다.
집 앞에 구명역에서 타고 서면에서 갈아타고 남산역에 내려
걸어서 약 5분거리다.
한시간 족히 걸렸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체육복도 사고 필요한 용품도 사고.
그래도 한 학년 교체 주기에 들어가서 다행이다.
학교 들어가는거 보고 끝나면 데리러 오겠다고 하고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운동화도 없고해서 신발 가게를 찾으니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은 신발 가게는 가까운 이마트와 근처 시장에 가야 된다는 거.
집을 계약한 곳이 이 근처라는데 어덴지는 모르겠고.
한시간 거리를 집에 왔다 데리러 가기를 며칠.
이제 아빠 안 데리고 갈꺼니까 둘이서 가라 했더니 눈이 휘둥그래진다.
다 큰 녀석들이 둘이서 거길 못 가 했더니
둘이 전철타고 학교에 다녔다.
날짜가 되어 방을 보러 가기로 했다.
애들 학교 가면서 나랑 매형,누나랑 나섰다.
학교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 금정산 바로 아래에 아파트가 우뚝 서 있다.
아파트 아래 모양이 똑같이 지어진 2층 주택이 여섯동 있다.
골목 안 맨 끝집 2층.
올려다보니 키가 큰 흑인 외국사람 부부가 서 계셨다.
올라갔더니 흑인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한국어로 " 안녕하세요? " 하신다.
" 아~ 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다음 질문이
"간판 사장님이시죠?"
하시는 게 아닌가.
" 네~ 저를 아세요? "
" 서울 신대방동 삼거리에서 간판 하시잖아요 "
" 네 그런데 어떻게 저를..."
" 네~ 제가 신림동 쪽에 사는데 자주 신대방동을 지나다니면서
사장님을 길에서 자주 보아서 알지요."
" 그런데 어떻게 여기사세요? "
" 2년전에 이사를 와서 여기 사는데
바로 저 아래 금정교회에 형님이 계셔서 다녀요"
"나는 서로 안면이 없으니까 모르지만 저를 자주 보셨군요."
이런 우연이 있을까?
흑인 아저씨가 살던 집을 내가 얻었다.
누나네서 먹고 자고 며칠.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날마다 의논했다.
대충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계획을 짜야하기에.
그 결과 운전면허를 따서 과일장사를 하기로 했다.
시간나면 누나와 함께 청과물시장 가서 수박이며 과일들을 알아보았다.
차로 싣고 다니며 어떻게 팔아야하는지 생각도 해보고 ...
2월24일날 구서2동 1016-25번지로 전입신고를 했다.
그리고 28일날 이사를 했다.
2천8백만원 전세.
이 돈으로 서울에선 꿈도 꿀 수 없는 방이다.
도배도 모든 일들을 일사천리로 했다.
교회 창고에 있던 짐들을 가져와서 집에 들여 놓고보니 이제 부산 사람이 된 거 같다.
2층에 방 두 개에 좁은 집이지만 정말 도와주신 모든 가족들이 고마웠다.
정리를하고보니 급한게 돈이였다.
무일푼에 한 푼이라도 빨리 벌어야겠기에 운전면허에 도전하기로 했다.
몇 십여년 전 새벽에 일어나 서울 문래동 자동차 학원에 다니며
처음 도전했던 시험.
실기에서 한번 떨어지고 시간이 없어 그만 두었던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을해서 하루라도 빨리 하기로 했다.
먼저 필기시험.
부산시 남구 UN공원 근처에 있는 " 남부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장 "에 등록했다.
그리고 2009년 5월 4일날 첫 시험에 필기 합격을 했다.
이제 운전을 배울려고 여기저기 알아보니 접수 불가.
1종으로 12일날 범어사역 근처 " 현대자동차 운전학원 " 에 등록을 했다.
약 100 여만원.
집에서 약 2 KM.
도보로 30 여분.
버스도 지하철도 타기 어려운 정정쩡한 코스.
무조건 걸어다니기로 했다.
햇볕은 왜그리 강한지 정말 걷는데 더웠다.
그래도 무조건 걸어가서 연습하고 오면서도 걸어오고.
5월 23일 첫 시험에 불합격.
6월 5일에 불합격.
6월13일날 합격을 했다.
이제 도로주행만 남았다.
접수를 할려고보니 이번에도 접수불가.
미리 접수한 사람들이 많아 한 달이상 기다리란다.
난 급해 죽겠는데.
여기저기 전화해도 당장에 접수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서면 산 꼭데기에 있는 학원에 접수.
서면로터리에서 기다리니 통근차량이 왔다.
접수를하고 다음날 전철로 출근.
화물차를 타고 급경사진 내리막 길을 한참 내려가니 여기가 연습 코스란다.
아파트 지으려는 빈 터를 돌아 2차선 시장길을 돌고 개천을 돌고.
그래도 이 학원 차량은 새차에다 그래도 깨끗하다.
더워도 에어콘은 틀 수 있으니까.
속도를 내어 달려보지만 내 맘대로 되지를 않는다.
그리고 첫 도로주행 시험에 합격.
2009년 7월 2일 운전면허 1종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매형과 누나와 나랑 계획을 짠다.
하루가 급하게 무엇이든 해야겠기에.
애들은 둘이서 학교에 잘 다니고.
엄마도 건강하시니 모두 기분이 좋다.
건강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못하니 계단을
내려가서 수퍼에 가시는 것도 어렵다.
차는 어떤걸로 살까?
과일 장사는 어느 지역 어데에서 할까?
일요일 시간을 내어 셋이서 중고매매센터에 갔다.
가격대비 차량노후에서부터 여러가지가 있었다.
매형은 새차를 사자고 하고
누나는 내가 초보니까 우선 돈도 그렇고 하니 적당한 걸로 중고.
젊은 판매사원이 화물 1톤 까스차량을 애기한다.
300만원에 가져가라고.
무엇에 홀렸나 모두 오케이하고 계약금 걸고 사버렸다.
니제 내 이름으로 차량이 인도 되었다.
15년 전 서울에서 화물차 새걸로 사서 동생이 몰고 다니던 기억.
두번째 차량을 샀다.
다음날 가져 가라고 하는데
집으로 가져가는게 문제였다.
부산시 사상구 엄궁동에서 두실 우리집까지 약 25 KM.
매형은 일
8월12일 엄마 넘어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