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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구간은 태백산과 소백산을 이어주는 양백지간구간이다
별 특징없는 구간으로 대간산꾼이 아니면 찾지 않는 구간이지만 김삿갓과
목조건물 기술의 정수라는 배흘림 기둥이 있어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최고 건물로 이름난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를 만나고,
궁예의 꿈과 단종의 슬픈이야기도 만날 수 있습니다.
양백지간
태백과 소백산을 이백이라하고 이백을 이어주는 산줄기를 양백지간이라고 한다.
양백지간은 큰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으며, 또한 인재가 많이 나왔다.
'인재는 소백과 태백 사이에서 구하라(求人種於兩白)'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으니
얼마나 인재가 많이 나왔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럴 법도 한 일이다.
하늘(태백천장)과 땅(소백지장)을 품고 있는 땅이니 어찌 인재가 많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양백대장(兩白大將) 장승은 의미 모를 깊은 미소를 짓고 있고, 항락(恒樂) 장승은 그리도 유쾌하게 웃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치령의 소백지장과 태백천장
고치령에서 도래지기까지는 이백을 연결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구간으로 민족의 애환과 희로애락이 공존하는 구간이다.
지리산에서부터 끊임없이 이어져온 백두대간은 소백산에서 비로봉을 지나 고치령에서 자세를 낮추면서 도래지기까지 이어 가는데
중간에 선달산을 솟구치며 아치형 오작교를 만들어 준다고 한다.
고치령에서 도래기재까지 산길 60여 리. 이렇다 할 이름난 봉우리를 간직하지 못한 탓에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아니면 찾는 사람이 드물고 바위를 좀처럼 보기 힘든 육산이다.
고치령
신라시대에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터를 잡았던 일로 '절터고개'라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며 옛 고개라는 뜻의 '고치'가 되었다.
'대동여지도'엔 '곶적령(串赤嶺)'으로 적고 있다.
고치령은 문경과 영주를 잇는 죽령, 영월 하동과 영주 부석을 잇는 마구령과 함께 소백산을 넘는 세개의 고갯길중 하나였다
하늘이 점지해 준 명당이 존재한다는 양백지간(兩白之間) 고갯길.
소백산맥을 넘는 3개 고갯길 중 가장 가운데 위치한 고갯길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 물자와 사람이 분주히 오가던 길이지만 지금은 잊혀진 고갯길이다.
금성대군과 단종의 밀사들이 오갔던 비운의 통로이기도 하다.
죽령이 알리고 싶은 길이라면 고치령(760m)은 숨기고 싶은 길이다.
고치령은 비운의 역사와 옛 보부상들의 애환, 선조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영남의 고도(古道)이다.
고치령(古峙嶺`770m)은 동국여지승람 영천군 산천조와 고산자
이는 고치령의 소리 옮김 표기로 같은 이름이다. 串의 음 ‘곶’과 赤의 일음(一音) ‘치’로 소리 옮김한 곶치령이 고치령으로 바뀐 것이다
든돌과 부석
영월을 흐르는 강을 거슬러 상류에 이르면 김삿갓의 묘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김삿갓 계곡이있다.
계곡은 와석계곡이라고도 불리우고 태백산과 소백산을 가르는 계곡이다.
계곡의 초입에서 백두대간의 반대편 큰 절인 부석사의 부석과 같은 생김새의 돌을 만난다.
옛날 이마을에서 태어난 아기장수가 힘 자랑을 하기 위해 집채만한 바위를 들어서 작은 바위에 올려 놓았다 해서 '든돌'이리하고 마을을 '든돌마을'이라 부른다.
'든돌, 든바우, 뜬돌’로 불리는 바위는 부석과는 전혀 다른 전설을 전한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신통력으로 들어올린 부석은 ‘도둑의 무리’로 지칭되는 사람들을 삶터에서 쫓아냈다.
든돌은 아기장수가 난리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들어올렸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백두대간 곳곳에서 찾아지는 아기장수 설화처럼 든돌의 설화에서 아기장수도 부모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기장수 설화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민초들의 기대와 권력과 맞서는 데 대한 두려움을 모두 보여준다.
아기장수의 출생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의 표현이라면 아기장수의 죽음은 비겁할 수밖에 없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두려움을 상징한다
옥동천 전 김삿갓 계곡
든돌
김삿갓 (1807~1863.
자료 http://blog.daum.net/limpaint/7078457
김삿갓(1807 ~ 1863 , 본명 金炳淵 ) 이 다섯살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당시 선천부사였던 그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군에게 항복하였고, 이듬해 난이 평정된 후 김익순은 처형당하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영원군 와석리 깊은 산중에 숨어 살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로 부터 숨겨왔던 집안 내력을 듣게 되었고,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과 조부를 비판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탄 자신을 용서할 수 가 없었다.
하늘이 부끄러워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던 그는 아내와 아이와 어머니를 가슴하픈 눈물로 뒤로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으니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채 세상을 비웃고 인간사를 꼬집으며 정처없이 방랑하던 그는 57세 때 전남 화순 땅에서 객사하여 차남이 이곳 와석리 노루목에 모셨다 한다.
김삿갓유적비
김삿갓 묘 - 와석리 언덕에 자리잡은 김삿갓의 묘.
와석리 노루목의 깊은 계곡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명당이라 하여 찾는 이들이 많다
임곡리 남대리 갈림길
옥동천의 시작을 아리는 북쪽의 남대리와 부석사가 있는 남쪽의 북지리 일대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산세의 아름다움은 궁예의 야망과 부석사의 신비를 풀어 줄 것이다.
부석사와 무량수전無量壽殿
자료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94926
이 사찰은 그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에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등장한다.
그녀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이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때 선묘가 바위로 변해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가운데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무량수전 (편액은 공민왕의 글씨이다.)
부석사와 궁예의 얽힌 역사적 내용은 아래 "봉황산의 부석사" 참조
자료 http://blog.daum.net/bumyee/706
또 재미있는 사실은, 안양루에 걸려 있는 편액에는 ‘봉황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지만 일주문의 편액에는‘태백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다는 점이다.
부석사가 봉황산에 있으니 ‘봉황산 부석사’라는 표현은 당연하다.
봉황산이 부석사의 主山(한양으로 치면 북악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태백산 부석사’라니‘태백산 부석사’라는 말은 몇 가지를 생각케 한다.
첫째, 태백산이 부석사의 祖山이라는 것이다.
한양으로 치면 삼각산(북한산)에 해당한다.
태백산이 부석사의 조산이니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 역시 태백산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봉황산 역시 대간의 일부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봉황산이 마루금은 아니지만 山體(산체)로 보면 분명 대간의 일부이다.
우리 전통지리에서는 대간이라는 개념을 線으로 보지 않고 영역으로 보고 있었음을 부석사 일주문 편액을 통해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산경표에서도 대간 마루금을 지나는 산뿐만 아니라 주변 산(예를 들면 오대산,
계방산, 월악산 등)도 기록하고 있다.
마루금 산행에서도 사람 발자국만 남게 되는 가느다란 선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대간의 개념을 선으로 보지 않고 영역으로 보는 것은 최근 대간 복원, 자연 및 생태
보호의 가장 기본적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둘째, *** 조산은 백두산 방향으로 정해진다는 점이다. ****
국내 모든 산의 큰 할아버지 격인 太祖山은 백두산이다.
한양의 주산인 북악이 조산인 삼각산 그리고 한북정맥, 대간을 거쳐 백두산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부석사의 주산인 봉황산은 조산인 태백산을 거쳐 백두산으로 이어진다.
만약 소백산이 봉황산 바로 옆에 있다 하더라도 소백산은 지리산 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조산이 될 수 없다.
남대리의 어래산(御來山)
단종의 혼령이 걸었을 길을 따라가다 보면 태백산과 소백산의 경계가 나온다.
그 경계에서 영월 땅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봉우리가 어래산(御來山)이다.
왕이 왔다간 산이란 뜻인지, 왕이 올 것이란 뜻인지 전하는 이야기들은 엇갈린다.
영월에서 죽임을 당한 단종의 혼백이 태백산으로 가는 길에 지난 산이라 어래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경북과 충북,강원도의 경계가 되는 삼도봉인 어래산이 남대천을 건너 바라다 보인다.
충청도의 의풍과 강원도의 영월, 경상도의 영주가 만나는 이곳은 정감록에서 이르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자,
격암 남사고가 양백지간에 숨어 있다고 이른 승지로 꼽히기도 합니다
단종의 유배지 영월 청령포
출처 http://blog.aladin.co.kr/760753173/5055039
강물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단종이 사셨던 청령포다. 청령포는 동남북 삼면은 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없이는 육지로 나갈 수 없다.
지금도 다리를 놓지 않은 건 배를 타고 건너면서 단종의 원통한 마음을 느껴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솔숲에 단종의 어소가 보인다. 단종은 외부와 단절된 이 적막한 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도 길지 못했다.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고,
단종은 영월 읍내에 있는 동헌 객사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가 그해 10월 24일 세조의 사약을 받았다
관음송. 단종의 거처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로 단종이 두 갈래로 갈라진 곳에 걸터앉아 쉬었다고 한다.
당시 단종의 모습을 지켜보고, 단종이 오열하는 모습을 다 들었다고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른다. 수령은 600년 정도
남대리, 궁예의 야망이 시작되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무수한 왕 가운데 궁예는 가장 민중에 가까이 있었던 왕이다.
영월 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주천강이 열리고, 더 올라가면 법흥사가 있다.
궁예의 이야기는 그쯤 어디에서 시작된다.
신라 경덕왕의 아들로 태어난 궁예는 신라말 혼탁한 정세에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 유모의 기지로 살아나 이곳 영월에서 자란다.
성장해 지역의 토호 양길의 수하에 몸을 의탁해 세력을 키운 궁예는
제 이름의 군사를 이끌고 후삼국의 한 축으로서 북을 울리게 되는데 그 첫 공격지가 부석사였다고 한다.
영월에서 부석사로 가려면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지나야 한다.
어래산은 어쩌면 미륵정토를 앞세운 궁예가 지난 곳이란 뜻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어래산에서 궁예를 만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남대리는 궁예의 훈련지로 알려져 있다.
미내치(美乃峙) 영주시 부석면 소천리
경사가 원만하여 옛 주민들이 고개의 정상을 향하여 걷다가 보면 벌써 고개가 끝났다는데서 유래한다.
마구령(馬駒嶺)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에 있는 마구령의 유래는 이 길이 충청도와 강원도를 있는 관문으로
장사꾼들이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하여 마구령이라 하였으며 경사가 심해 마치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하여 매기재라고도 불렀다한다
옛기록에 馬兒峴으로 기록된 이곳이 마구령으로 불리어 짐은 메기재의 借音說 또한 그럴듯하다
갈곶산
실제 산경표에도 갈곶산이라는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근대에 와서 누군가가 붙인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저수령 이후(구체적으로는 황장산 이후) 山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봉우리는 처음 만난다.
촛대봉, 묘적봉, 도솔봉 심지어 비로봉까지 모두 **봉이고 ××봉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소백산을 형성한다.
봉황산(부석사품은산) 갈림길
갈곶산에서 대간 마루금 진행과는 반대방향으로 봉황산이 있으며 이 봉황산 아래 부석사가 자리잡고 있다.
부석사에서 자개지맥이 오른쪽 병풍(우백호, 한양으로 치면 인왕산 줄기)이라면
다음 구간인 옥돌봉에서 시작되는 문수지맥이 왼쪽 병풍(좌청룡, 한양으로 치면 대학로의 낙산 줄기)이다
부석사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부석사의 풍광은 장엄하다.
경상도를 이루는 수많은 산들과 물줄기들이 모두 부석사의 품에 안기는 듯 펼쳐진다.
양백지간은 바로 부석사에서 바라보이는 땅을 이르는 말이다.
천년왕국을 이어온 신라에 반기를 들었던 궁예는 세력을 얻은 뒤 부석사의 한 전각에 걸린 신라 왕의 초상에 칼을 들이댔다.
그 초상의 주인은 궁예의 아버지인 헌안왕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초상에 칼을 들이댔다는 것은 패륜을 상징하고,
신라 왕의 초상에 칼을 들이댔다는 말은 최초로 민중에 기댄 권력을 세워 미륵정토를 구현하려던 개혁군주로서 궁예를 상징한다
늦은 목이
왼쪽은 옥동천이 발원되는 남대리 계곡이며, 오른쪽은 오전약수(조선 전국 약수대회에서 1등한 약수)로 유명한 오전리로 가는 방향이다.
선달산
신선이 놀았다고하여 “仙達山”, 먼저 올라야 한다고 하여 “先達山”,남쪽 기슭에 신선굴(神仙窟)이 있어 선달산이라 했다고 한다.
박달령
태백산의 산신을 모시는 박달령 산령각
고치령에는 山神閣으로 되어 있고 박달령에는 山靈閣으로 되어 있다.
같은 말이나 사찰에서는 "산령각"으로 쓴다.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고개로, 마루에는 옛날부터 산령각이 있었는데, 매년 사월 초파일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단종은 죽음을 맞이 하러 청령포 가기위해 지나가던 고개 마루라고 한다
박달령에는 정자가 있어서 쉬어가기로는 참 좋은 곳이다
박달의 뜻 http://www.koreasanha.net/bbs/view.php?id=sanha5&no=4420참조
배달(倍達)→백산(白山)의 다른 표기이다.
백산(白山)→백달(白達:밝달 .박달)→배달(倍達:ㄱ탈락)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박달은 백달의 모음변형이며,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이다.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우리는 백산(=배달)민족.곧 백두산 민족이다 (아래 재해석 참조)
소백산에서 태백산까지 역사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소백산은 불교에 관한 지명이 대부분이나
고치령부터는 배달민족(삼일신고.격암유록.정감록 등) 고유의 지명이 사용되고 있고 단군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단종의 비극과 김삿갓의 해학 그리고 부석사의 정서가 어울어진 양백지간에 속하는 고치령에서 도래기까지
마루금은 오전약수 한모금에 목축임하고 산신에 대한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불교의
정서가가득배어있는 사찰에 대한 고찰과
배달민족(백의민족)의 뿌리인 단군의 성지(천제단등)가 있는 태백산을 소백산과 이어주는 샤머니즘의 길목이기에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 보고자 하였다
옥돌봉
옥돌봉에서 도래기재로 내려서는 길은 봄이면 철쭉이 군락을 이루는 곳이다. 철쭉 군락 속에서는 유래를 찾기 힘든 550년 된 철쭉나무가 자란다.
백두대간 등산로에서 살짝 비껴난 비탈을 지키는 철쭉은 나무 둘레가 1m가 넘는다. 수령과 크기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경우라 한다.
옥석산 이라 불리기도 하는 “옥돌봉“은 桓因이 “옥이 안 난 곳이 없고 선경이 아닌 곳이 없다”고 하여 “옥돌봉“이라 하고
정상에 있는 흰 바위가 “예천까지 빛이 난다“ 하여 예천바위로 불리기도 한다
도리기재
도래기재를 넘어서 영월 방향으로 우구치리가 있다. 금정으로 불리는 그곳은 금광이 열리면서 인구가 수천 명에 이르고 극장이 설치될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당시 캐낸 금이나 은 등의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도래기재 아래에는 1925년 터널이 뚫렸다.
통행이 금지된 지 오래지만 터널은 ‘금정수도’라는 이름표를 단 채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우구치리에서 금정수도까지 광물을 운반하는 삭도를 ‘도래기’라고 부른 데서 고개 이름이 연유했다는 것이 금정광산의 내력을 아는 이들의 말이다.
송아지만 한 금이 묻혀 있다는 금광은 폐광된 지 오래고 금정수도 역시 통행이 금지된 지 오래다
도래기재 유래
이번 구간도 역시 쉼없는 역사의 한 복판을 걷게 될 것 입니다.
거기에 가을의 정취를 흠뻣 만끽할 수 있는 대간길이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가을의 아름다운 산들과 역사의 향기가 함께하는 대간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초보산꾼 도 덕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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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삿갓..
대간이 선의 개념이 아닌 영역이다라는 것을 배웠네요..
제가 좀더 공부해야 겠습니다..도덕산님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것을 배웁니다..감사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무조건 마루금만을 강조했는데
대간하면서 전체적으로 보는 방법을 알 아 가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상세히 알려주시니 너무너무고맙습니다/ 대간길도 대간길이지만 도덕산님의 역사공부가 더욱더 재미가 있습니다/
대간길 걸어가면서 역사의 뒤안길을 새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홀로 호남정맥을 하면서 지도에 나와 있는 마을들이 궁금했습니다. 물이 다르면 문화가 바뀌기 때문에 양쪾의 마을마다 어떤 다른 문화가 있을까 항상 궁금했었는데
이런 잠재의식 속에 살아 있던 생각들이 대간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항상 격려해주시는 오딧세이님 감사합니다.
대간길은 못가도 도덕산님의 글은 항상 읽고있습니다 또한 제가 모른것도 마니 배우네요
이번 구간도 안산하시고 행복한 하루되세요
머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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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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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 운산형님께 안부전해주고,,조만간 보자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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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소리님 반갑습니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좋은 글을 올리지는 못합니다.
삶의 향기나 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석사에 언젠가는 한번 가봐야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