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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고 57회 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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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乍 晴 乍 雨 스크랩 宗系辨誣(종계변무)-上
남윤면 추천 0 조회 145 14.06.03 00:39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드라마도 발전하나보다. 요즘 방영되는 鄭道傳을 보다보면 팩션(fact+fiction) 드라마로서 모처럼 구성도 탄탄하고 내용도 고증에 비교적 충실함을 본다. 십여년 전 방영되었던 의 눈물에 비해 대사는 물론이거니와 캐스트 된 각 배역들의 갈등과 심리묘사가 보다 現實感이 있어 보인다. 손 쉽게 선과 악으로 주인공을 二分化 하지도 않응 뿐더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무턱대고 기승전결을 승자에게만 맞추는 과거 드라마의 典型에서 많이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면 시대 배경만 600년 전일 뿐 마치 3이나 5전후의 현대극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인가 시청률도 나날이 상승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렇지만 드라마는 역시 드라마일 뿐. 아무래도 시청률을 위주로 하는 만큼 사건의 전개가 과도하게 빠른 것도 있고 아예 취급하지 않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지난 주엔 이성계의 낙마와 圃隱(포은) 鄭夢周의 피살이 다루어 졌고 금주에는 포은 피살에 따른 정치적인 사후처리 및 이성계의 왕위 추대작업 등으로 스토리가 전개 되겠는데 그렇다면 오늘 얘기하려는 이인임과 관련된 소위 이성계의 宗系辨誣(종계변무) 사건은 그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아예 드라마에서 다뤄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오늘은 이 종계변무와 관련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가 멸망하기 2년 전 1390년 여름에 일이었다. 그 때는 이미 이인임도 귀양길에서 죽은지 한참이 지나고 위화도에서 회군한 신군부 세력과 신진 개혁세력이 연합하여 이 쿠데타를 반석에 올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세제개혁을 강화하는 등 연일 바쁜 즈음이었다. 趙?이라는 문신이 나라에 使臣으로 다녀와서 신군부에 놀라운 사실을 보고했다. 글쎄 高麗人 2(尹?:윤이, 李初:이초)나라엘 일부러 와서 을 개국한 洪武帝 면담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명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이 있는즉 급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고. 지금이나 600년 전이나 사람 사는 방식은 같은 것 아니겠는가. 아니 한국의 과장이나 국장급 정도가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그렇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면담이 가능이나 할 법인가. 아무튼 洪武帝 면담은 못했지만 의 공무원을 만나 회의록 작성은 했던 모양이다.

 

 

그 회의록의 내용인즉, 1,이인임의 자식인 이성계가 현재 고려왕인 공양왕과 모의하여 명나라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 2,이 계획에 반대하는 이색, 이숭인 등은 살해되었고 우현보 등 많은 사람들이 귀양보내졌다. 그러니 명나라가 고려국을 손 좀보고 차제에 이성계 일당을 도려내는 것이 명나라 안녕에 좋겠다고 말하는 윤이.이초라는 사람이 지금 명에 체재하고 있으니 趙? 당신 한번 보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작성된 그 회의록을 보여 주더란 것이다. 그래서 趙?이 그들을 만나보니까 그들이 흠씬 놀라더란다. 이것이 소위 조선 건국 후 200년간 역대 조선 국왕이 그토록 풀고 싶어했던 宗系辨誣 사건의 시발점이다. 그런데 이 종계변무 사건은 백성들이 먹고 사는 것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국왕 및 극소수층 자기들만의 관심사였다. 그렇지만 이후 조선에서 하도 집착을 하는 바람에 명이 정부는 정부대로 조선을 순치시키는 중요 수단의 하나로서, 명의 관리는 관리대로 조선으로부터 무려 200년간 개인적으로 잔전푼을 받아 즐기던 화수분의 역할을 톡톡히 한 사건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정도전 드라마에서는 이 종계변무 부분은 다뤄지지 않고 있다.

 

++ 은 조선보다 25년 전에 개국되었다. 고로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것은 명의 개국후 불과 20년 정도 이후이다. 그 때는 명도 개국 직후 아직 안정되지 못한 시기이므로 최영이 우왕과 함께 요동정벌을 결행한 것은 그리 무모한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역사에 가정은 허락되지 않겠지만. 이성계가 요동정벌 사불가론을 가지고 위화도 회군을 한 것은 쿠데타를 정당화하려는 정도전 들 후세 승리자의 관점일 것이다.

 

++ 도 회의록 내용을 不信 한 듯하다. 아니 이성계라는 자는 명을 치라는 왕의 명령도 거역하고 거꾸로 자기 나라 심장에 칼을 꽂은 자가 아닌가. 그런 자가 왜 이 시기에 새삼스럽게 명을 쳐야만 하나 그래서 그자는 무슨 정치적인 이익을 얻나라고 생각했을 것 아니겠는가.

 

++ 趙?이 그들을 만나보니까 그들이 흠씬 놀라며 얼굴빛이 변하더란다. ! 저 양반이 어떻게 이 시간에 南京에 와있지? 이거 난감한데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한 부대상황으로 趙?이 보고한 내용이다. 그럼으로써 회의록을 보았다는 입증을 두텁게 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 종계변무에서 宗系란 소위 족보를 뜻한다. 란 무고 즉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것이니 辨誣란 무고를 변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종계변무란 잘 못 기재된 족보를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요약하면 이성계는 이인임의 자식으로 명나라 대전회전에 잘 못 기재된 것을 삭제시키는 작업을 뜻하는 말이다.

 

 

이 종계변무 사건의 정치적인 의미는 고려말 보수 기득권세력이 명의 힘을 빌려 신군부인 이성계 세력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었는데 이를 趙?이 명에 사신으로 머물면서 뜻하지 않게 알아채고 이를 정도전 등 이성계세력이 진실에 거짓을 섞어 부풀려서 반대파를 숙청하였다는 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역사속에서 또 한번 배우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신상필벌은 엄중한 근거에 의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렇지 않은 세력집단은 정통성을 얻기 어렵다. 그렇지만 어디 그런가. 어느 정도 팩트가 있으면 그것을 뼈대로 하여 자기의 이해관계의 요소를 적절히 끼워넣어 가공하는 수법! 실로 역사가 길다. 정도전을 위시한 신군부의 집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趙?이 보았다는 회의록은 자기만 보았을 뿐 공식적으로 명으로부터 받아온 것도 아니었다. 고려에 있는 신군부 집단이 갖고 있는 정보는 단지 趙?으로부터 귀로 들은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것이 실질적인 증거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었으나 그러나 정도전 등 신군부는 1590년 그당시 떠오르는 세력이었다. 챤스가 아닌가. 이렇게 좋은 먹잇감을 어찌 놓치랴. 조작도 하고싶은 판에 부풀려야 했다. 신군부 세력은 목은 이색, 양촌 권근, 도은 이숭인, 우현보 등등 수많은 눈의 가시를 淸州獄에 가두고 심문한다. 이 때의 기록을 조선왕조 太祖實錄 鄭道傳 卒記에서 본다.

 

 

庚午 陞政堂文學尹?李初誣罔之獄作 道傳力主其議 鄭夢周言於上 寢之

경오 승정당문학 윤이이초무망지옥작 도전역주기의 정몽주언어상 침지

道傳以計稟使如京辛未 上言刑賞得失 恭讓不能容貶羅州壬申 召還

도전이계품사여경 신미 상언형상득실 공양불능용 폄나주 임신 소환

與南誾等定計推戴上卽位 策勳爲一等 加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

여남은등정계추대 상즉위 책훈위일등 가문하시랑찬성사겸판상서

又以計稟使如京

우이계품사여경

 

(경오년에 정당문학에 승진되고, 윤이·이초의 무망한 옥사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로써 남경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로 폄직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을 책정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로써 남경에 갔다)

 

++ 정도전 등 이성계의 신군부 세력은 뚜렷한 증거도 들이대지 못하였지만 세력을 믿고 공양왕을 겁박하여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 우현보 등 충신 10여명을 잡아들여, 청주 옥사에 하옥하는 옥사를 일으켰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후술하는 청주 압각수 사건을 기화로 정몽주의 반박에 힘입어 이들은 일단 무죄 방면된다. 정도전 졸기는 그 부분을 상기의 붉은색 부분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들의 떳떳하지 못한 공작정치 부분은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대충 기술해 놓았으므로 後世人은 이 실록이나 졸기를 보면 그 사건의 내용을 잘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하기와 같이 청주 압각수 이야기를 부연 설명하고자 한다.

 

++ 정도전은 이성계가 명을 칠 이유가 없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경오년(1390)에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며, 조선 건국되던해 임신년(1392)에도 제 1차 종계변무사로서 명에 다녀온다. 그 때 명의 수도는 아직 남경이었다. 이 부분을 실록에서는 상기와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청주 중앙공원에 가면 지금도 수령 900년 정도가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청주 시민들은 비록 나무에 불과하지만 죄 없는 사람을 가려낼 만큼 현명함을 갖춘 확실한 역사적인 내력을 갖춘 나무로서 淸州鴨脚樹(압각수)라 하여 무척 자랑스럽게 보존하고 있다. 은행잎은 그 모양이 마치 오리발처럼 생겨서 은행나무를 鴨脚樹(압각수)라고 부른다. 청주 은행나무라고 하면 될 것을 구태여 청주 압각수라고 부르는 데는 역사적인 연유가 있음이다.

 

청주 압각수

 

위에서 말 한 대로 이초(李初)의 고변을 이유로 이성계의 신군부는 공양왕 2년인13905월 이색, 권근 등 반대파의 주요 인물 십여 명을 청주의 감옥에 감금했다.

그런데 그해 여름 청주에는 대홍수가 났다. 며칠째 불어난 큰 물로 청주 관아는 물론이고, 시내의 거의 모든 집들이 물에 쓸려 내려갔으며 이색 등이 갇혀 있던 감옥도 물에 잠겨 무너지고 갇혀 있던 사람들까지 휩쓸려갔다. 그때 이색은 감옥 곁에 서 있는 큰 나무의 가지 위에 올라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기적 같은 이 상황을 전해들은 공양왕은 이는 곧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라며 이색을 풀어줬다고 한다. 그때 이색과 함께 풀려나온 권근이 감옥에서 석방되면서 " 옛날 중국의 주공이 어린 성왕을 섭정할 때 근거없이 소문으로 모함을 받고 물러나니 별안간 큰 바람이 일어 벼를 쓰러뜨렸다" 는 고사를 이용해 시를 읊었는데 그때 지은 鴨脚樹라는 시가 지금도 나무 앞의 시비(詩碑)에 남아 옛일을 증거한다.

 

압각수 비

 

 

流言不幸及周公(유언불행급주공)/근거없는 소문으로 주공에게 불행이 미치니

忽有嘉禾偃大風(홀유가화언대풍)/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 벼를 쓰러뜨렸네

聞道西原洪水漲(문도서원홍수창)/왕이 청주에 큰물이 넘쳤다는 말을 듣고

是知天意古今同(시지천의고금동)/하늘의 뜻이 예나 이제나 같음을 알았도다

 

++  西原은 淸州의 옛 지명이다.

 

 

어쨌거나 정도전 등 신군부 세력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파를 하나하나 숙청하고 제일 마지막에는 정몽주를 주살하며 고려의 명운을 끊고 이성계를 보위에 올린다. 그러나 여전히 찜찜한 것이 남아 있었으니 명나라 대명회전에 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재한 것을 바로 잡는 일이었다.

 

나라의 건국 시조의 가계가 명나라의 권위 있는 서적에 엉터리로 기재되었으니 조선에서는 통탄할 일이었지만 어찌보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은 장장 200년이란 세월을 끌면서 조선의 왕과 관리들의 애간장을 바짝바짝 태우면서 갖은 실속을 다 채우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에야 겨우 매듭을 짓도록 허락해 준 것이었다.

 

그간 조선에서는 명나라에서 정식으로 요청함은 물론 조선에 오는 칙사에게 계속적으로 이를 바로 잡아 줄 것을 부탁하고 정도전을 제 1대 종계변무 주청사로 파견하는 등 수십차례의 奏請使(주청사)가 명나라를 오고 갔던 것이다. 그 주청사 중에는 역사상 유명한 이도 적지 않은데 ?齋(충재) 권벌도 종계변무 주청사 출신이고 임란 전 栗谷 李珥는 수모를 당한 지 2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를 고치지 못해서는 말이 안 된다며 똑똑한 사람을 주청사로 뽑아 명나라에 보내어 강력하게 고쳐 달라고 주장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특별 상소를 할 정도였다.

 

++ 풍수지리상 마을 立地4吉地의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경북 봉화의 닭실마을이 있다. 안동 권씨의 파조로서 기묘사화에 연루 파직 귀향한 조선 중기의 文臣?齋(충재) 권벌이 거처하던 靑巖亭이 지난번 정도전과 정몽주가 이생에서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던 드라마 촬영장소이다.

 

 

그러나 종계변무 문제는 율곡의 주장대로 똑똑한 사람의 지혜와 경륜으로서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1390년에 시작된 문제가 1589년에 가서야 해결될 때 까지 기라성 같은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가 200년간 노력했으나 전부 무위에 그쳤지만, 정작 그 해결은 똑똑하다고는 할 수 없는 中人으로서 일개 譯官의 개인적인 人間關係에 기인된 결과였던 것이다. 적다면 적다고 할 수도 있는 개인의 善行이 그로 기인하여 돌아온 報恩의 결과가 실로 200년간이나 풀지 못했던 국가의 숙원사업을 성취토록 하였으니 이하 그實例로서 내주에 소개하고자 한다.

 

                                                        

                                                          20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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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6.03 17:05

    첫댓글 소설같은 역사이야기 "宗系辨誣"를 이토록 재미있게 소개해주니 이 공간이 풍요로워 지누나!
    다음호에는 洪모 역관의 흥미진진한 story가 기대됩니다.

  • 작성자 14.06.03 18:19

    어찌 할꼬. 洪譯官 이야기를 이미 눈치 채버렸으니. 차제에 宗系辨誣(下)는 도가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네. ㅋㅋ. 나는 이번주에 단오가 들었으니 단오에 대한 이야기나 하려네. please!!

  • 14.06.03 20:12

    전엔 알지도 못했던 스토리지만 아주 흥미롭다.
    정치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구만..

  • 14.06.03 21:17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굵직한 사건들, 목숨을 버리며 충절을 지켰던 사람들..등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정도전이란 드라마를 보면서, 그리고 윤면이를 통해 숨겨진 재미있는 사건들을 대하니 흥미롭다.

  • 14.06.04 02:40

    앞으로 우리 사극영화들은 남 윤면 감수 라는 도장이 찍혀야 개봉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하갰다.

  • 14.06.07 08:49

    우리나라 사극 드라마는 무궁무진하겠다..윤면이 글을 따라가다보니 글방의 훈장선생한테 흥미진진 미스터리 소설책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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