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연구년을 보내는 동안 박물관 두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예일대학교 박물관과 시카고 박물관이었는데, 훌륭한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보다는 박물관을 운영하는 일에 나는 다소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모든 곳이 다 똑같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두 곳의 박물관 관람료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모금함 같은 플라스틱 통 하나를 갖다 놓고 관람하는 사람이 내고 싶은 만큼 내고 들어가고, 또 관람을 하고 난 다음에 마음에 감동을 받았을 경우인지는 모르나 나올 때 얼마의 액수를 내고 박물관 건물을 나온다. 돈이 없는 사람은 무료다. 그런데 대부분의 문화적 부유를 느끼는 사람들은 많은 돈을 내고 관람을 하고,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공짜로 그리고 적은 액수의 돈을 내고 피카소와 같은 유명한 그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우선 이런 사고의 발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물관 관람료는 항상 성인과 학생에 따라 금액이 정해진 것에 익숙한 나로서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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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삶의 공정을 생각하게 했다. 공정이란 영어로 페어니스(fairness)다. 공정은 공평과 다르다. 공평은 분배의 법칙에서 골고루 나누어 갖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 경제의 원칙이나 윤리의 원칙에서 공평은 매우 중요한 결정의 표준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이 분배의 원칙인, 공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야단을 치고 법석을 떤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공평보다는 공정이 받아들인다면, 어떨까를 생각해 본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이 공정이 적용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미국의 경우이지만, 차 보험금을 결정할 경우에 차등의 원칙이 적용된다. 금액의 결정은 차 종류뿐만 아니라 브레이커의 특수 장치를 설치할 경우에 그 만큼 해당되는 돈을 삭감해 준다. | |
특수 브레이커는 사고를 어느 정도 예방하는 것이기에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생각해 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차등을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추어 골프에도 이 차등이 적용되는데, ‘핸디’라는 게 있다. 내기를 할 경우에 이 핸디를 고려한다. 골프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핸디를 적용하여 내기하는 제도다. 차등이란 공정이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자 요소다. 사회 전반에 이 공정의 개념을 갖는다면, 사회는 아름답지 않을까. 선진사회일수록 이 공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듯하다. 즉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고, 그것으로 사회의 약자나 배려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제도화한다. 선진사회의 기부제도도 이러한 몫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공정의 원칙은 아름답다. 만일 이것이 역으로 적용된다면, 어떨까. 그건 악이고 부조리다. 많이 가진 사람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사회에 해악을 끼칠 뿐만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를 추하게 만들지 않을까 싶다. |
요즘 자율형 사립고의 부정입학에 대한 문제가 뉴스를 통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서울시교육청이 26일 사회적 배려대상자가 아님에도 학교장 추천을 받아 자율형 사립고에 부정입학했다는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이 이날 사회적 배려대상자의 전형으로 자율에 부정입학한 의혹을 받고 있는 학생 248명에 대한 특별조사를 실시한 결과, 13개교 132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시교육청은 그들에 대한 합격취소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제도는 뭔가. 그 제도란 이것이다. “3년간 학생을 지도하여 학생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중학교 교장에게 고교다양화 정책에 따라 추진하는 자사고 입학이 필요한 학생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주고 갑작스런 파산, 신용불량, 노인, 장애인 가족의 장기 의료비 등으로 인한 부채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추천토록 하는 제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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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자면, 그건 사회적 배려대상자를 고등학교에 진학하도록 학교장이 추천하는 제도다. 따라서 가난하고 생계가 어려운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진학하도록 도움을 주는, 그야말로 매우 공정한 제도이며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의 훌륭한 모델이라고 보인다. 물론 사태의 근본적인 책임은 "처음부터 불명확한 기준의 잘못된 제도를 만든 교과부에 있음을 지적하며 규탄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편법이다. 허술한 제도는 그것을 악용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법망을 피하는 일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사회적 배려대상자들이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언제나 배운 사람들 가진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한다. 편법과 부정입학을 한 부모들의 말은 어떤가. 당연히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올 법하다. “허술한 제도의 부실운영의 모든 책임을 학생들에게만 묻는 비교육적이며 비인간적인 처사에 분노를 느끼며 아이들이 원상 복구될 때까지 모든 법적대응을 강구할 것을 결의한다.” 그들은 집회에서 “모든 사태의 책임은 처음부터 불명확한 제도를 만든 교과부에 있다”며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때까지 ‘합격자 지위 보전을 위한 가처분 신청’ 등 법적 대응을 강구하겠다.” 편법을 쓴 부모들은 법을 안다. 그들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며 사회적 배려대상자들이 아니다. 그래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닌가. 그들은 무엇이 문제이며 무엇을 위해서 해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들이다. “배운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 더 한다.” 이런 말들은 아마도 사회적 약자나 배려자들로부터 한탄스럽게 내뱉는 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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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장 1절에서 4절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것은 헌금에 대한 예수의 평가다. 어느 날 예수는 사람들이 헌금을 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하고 들어갔다. 예수는 두 종류의 사람이 헌금하는 것을 세심하게 관찰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한 종류의 사람은 부자이고 많은 금액을 헌금함에 넣었다. 부자란 상징적으로 사는데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예수는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라고 말씀했다. 반면에 다른 종류의 사람은 과부이고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다. 과부가 다 가난한 사람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당시의 과부는 가난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예수는 “구차한 중에서(her poverty)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리라”고 말씀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한 비유는 아주 날카롭게 대립적이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예수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비유인지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헌금에 대한 예수의 평가는 분명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그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했다. 이유는 뭘까. 그것이 공정이기 때문이다. 공정은 돈의 액수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분배의 원칙에 따라 평가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헌금에 대한 예수의 평가에서 우리는 평등한 원칙에서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라는 응보적 차원을 강조하는 ‘보상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와 분배나 몫을 공평성의 원칙에서 강조하는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를 초월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를 실천하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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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공정으로 본 미국의 철학자가 있다. 그는 하버드대학교의 철학과 윤리를 가르쳤던 존 롤즈(John Rawls)다. 그에 의하면, 정의로운 사회는 두 가지 기본원칙을 수행한다. 제1원칙은 각 개인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동등한 자유와 공존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도로 광범위한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제2원칙은 사회적 불평등이나 경제적인 불평등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2원칙이 허용되는 경위는 (1) 사회 안에서의 최소의 수혜자들 혹은 사회의 약자나 배려자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여야 한다는 경우와 (2) 불평등의 근원이 되는 직위나 직책은 공개되어야 한다는 경우에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정의를 이야기할 때, 염두에 둔 것은 차등의 원칙이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평이나 효능에 따라 사람이나 사물을 평가하지 않고, 공정하게 평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나 배려대상자들은 평등의 원칙이 아니라 공정의 원칙에서 이해하여야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납득할만하다. 신체적으로 결함을 가진 사람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 정치적으로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동일하게 요구하거나 평가하지 말고, 상이하게 혹은 차등하게 평가되어야 그것이 합리적이고 공정하다고 믿는다. 그들의 출발은 정상인과 다르다. 차등은 공정이고 그것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가진 사람과 배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양보하고 그들에 대한 배려를 염두에 두는 것이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공정을 생각하고 고민할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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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글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지만 읽을거리가 많습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감사합니다.
언어들을 비틀지 않나 싶어 걱정이 있긴 해요^^
아아 그놈의양심은..
어떻게 어디까지 신뢰할만한 것일까요 ?
기준이모호한것도 한몫더 하고있지않습니까 ...
이 모호한 양심도 사회적 합의에 의해 그 기준을
결정할 날도 멀지 않았을까 싶어요^^
시대와 문화에 따라 양심은 다른 견해를 갖기 때문이죠^^
위의 글에서 '공정'을 다른 말로 한다면 '상대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개인의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 의무가 다르게 적용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전체적인 맥락에는 동의가 되지만 그러한 개념이 현실화가 되는데는 어려움이 있을것 같네요. 한 예로 공정을 범죄에 적용한다면 범죄자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범죄자 어린시절의 환경이나 배경을 참고 해서 벌을 정해야 하고, 반대로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더 중한 벌을 받아야 하니까요. 하나님은 모든 마음을 통찰하시는 분이시니까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현 시대에 서양의 많은 선진국들이 우리보다 '공정함'이 앞서 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현실이죠. 하지만 역사를 좀더 거슬러 가보면 그들이 현재 그러한 공정함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의 선조가 저지른 약탈과 핍박과 전쟁으로 이뤄낸 약탈의 산물(너무 과격한가요..??^^)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나요? 현재 선진국 대다수 들은 대부분 부유한 환경(약탈에 의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로 자신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고도 부유함을 지겨나갈 수 있는 기반이 이미 갖춰진 상태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내것을 더 내어 놓는 다는 것에 별 거부감이 없을 수 있지요. 자신들은 이미 그거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착취를 했으니까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들이 박물관의 입장료를 도네이션으로 하는 것은 국제 사회의 비판 때문인것로 알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유물들을 모아논 곳인데 대부분의 유물은 그들이 약탈해온 것이지요. 그런에 약탈한 물건을 전시해 놓고 돈까지 받으면 정말 도둑놈이 되니까요.(도둑놈+장물아비??)그래서 과거에는 일정한 돈을 받았는데 국제 사회의 여론 때문에 도네이션으로 바꾸게 되었지요. 르부르 박물관이 입장료를 받는 것이 피난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요. 그러한 이유로 침략(가진자들의 횡포는 있었지만...)이 아닌 자국의 힘으로 이뤄낸 경제와 한국의 국민성은 비록 현대의 서구 사회보다 떨어지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라고 생각 합니다. 위에서 말한 '공정을' 평가의 자대로 두고 말한 다면요.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 그리고 미국와 일본에 방치되고 있는 한국의 유산들이 조속히 반환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