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유섭 목사(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뱀 같이 비둘기 같이(마 10:16) 의 해석
[질의]
목사님 글 중 놋뱀이 예수님인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배운 것도 그러하므로 관련하여 질문 드리겠습니다.
광야에서 불순종하므로 불뱀이 나와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치료의 방법으로 놋뱀을 장대위에 높이 달게 하여 쳐다보는 자는 낫게 하셨죠. 그래서 기독교계 병원에서는 십자가 위에 뱀을 걸쳐 놓은 형상을 병원의 기호로 삼는 곳도 많은 것 같습니다.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 가은데 보내시면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실 때 자기의 속성을 본받으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불뱀(사탄)이 죽이고 놋뱀(십자가에 달린 예수)이 살리고...이렇게 이해 했는데 ...
목사님의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질의하신 분에 의하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실 때 주님의 속성을 본받으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뱀과 비둘기의 특성을 주님의 속성으로 이해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불뱀은 사탄이므로 사람들을 죽이고, 놋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기 때문에 쳐다본 사람들을 살린다고 이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소위 영해라고 하는 우의적인 해석방법입니다.
영해는 고후 3:6에서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한 말씀을 근거로 모든 말씀을 본래의 문자적 의미는 무시하고 영적 의미만을 발견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본문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무엇은 무엇에 해당하고 또 다른 무엇은 무엇을 가리킨다는 식으로 계속해서 어떤 것들에 빗대어서 해석하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다보면 원래 단어의 뜻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아는 데만 열중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또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문의 본래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불뱀과 놋뱀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본다고 하였는데, 민 20:6-9를 잘 읽어보면 둘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놋뱀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단 것(미 20:8)입니다. 놋뱀은 어떤 다른 것의 형태가 아니라, 바로 불뱀의 형태를 그대로 본따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뱀을 두고 살아서 사람을 물면 불뱀이라고 부르며, 놋으로 만들어 장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놋뱀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장대에 매달린 놋뱀은 결국 불뱀이 저주 받고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십자가에 매달려 마치 뱀이 저주받고 죽은 것처럼 그렇게 저주받고 죽으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마 10:16의 말씀에서도, 주님은 뱀과 비둘기를 염두에 두시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풀이해 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전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에서 ‘뱀 같이’와 ‘비둘기 같이’라는 어귀들은 생략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직유의 수사적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너희는 지혜롭고 순결하라’고만 하셨어도 제자들이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지혜롭고 순결하라’는 것을 간과하고, 뱀과 비둘기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직유법을 비롯한 비유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비유법은 의미를 강조하는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도 뱀과 비둘기라는 어떤 특징을 가진 동물에 비유하심으로써 본래 말씀하시려는 ‘지혜롭고 순결하라’는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뱀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징그럽게 여기지만, 한편으로는 살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하는 지혜가 탁월한 동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것은 이리 가운데 들어가는 양과 같은 제자들이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것이며, 그때 마치 뱀과 같은 생존의 지혜를 가지고 슬기롭게 모든 상황을 대처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비둘기는 순결을 상징하므로,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것은 어려운 상황을 만나서 마치 뱀처럼 지혜롭게 대처할지라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순수성은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의 요지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변질되지 않는 천국복음의 순수함을 지니되, 천국을 방해하는 악한 세력에 대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을 무슨 특별한 뜻이 있는 것처럼 복잡하게 만들어 가면 안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의 병원에서 십자가 위에 뱀을 걸쳐 놓은 형상을 병원의 기호로 삼는 곳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런 병원들이 민 21:9와 요 3:14를 결합하여 그러한 상징물을 연상해 낸 것은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그렇게 한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병원에서 어떤 상징물을 사용한다고 해도 진리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놋뱀은 어디까지나 불뱀이 저주받고 매달린 형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불뱀에 물려 고통받는 자가 그것을 바라보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바라보면 그 순종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병이 나을 수 있었던 믿음을 요구하는 징표였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역할을 다했으면 빨리 부수어 버렸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해해서 놋맴이 무슨 숭배의 대상이나 되는 줄 알고 오래도록 섬기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왕하 18:1-4에 보면, 모세가 만든 놋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으로 계속 섬기다가 히스기야 왕 때가서야 비로소 그것을 부수어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BC 15세기 경에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놋뱀이 북이스라엘 멸망하던 때인 BC 8세기 경까지 있었다는 겁니다. 상징적으로 만든 놋뱀이 무슨 큰 효험이 있는 줄 알고 백성들이 무려 7-8백년을 우상처럼 숭배해온 것입니다.
그와 같은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상에도 그와 같은 일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천주교는 수많은 조형과 상징물을 만들어내었고 나중에 그것들을 실제로 섬기기까지 했으며, 그 중에서 많은 것들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똑같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해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거의 모든 것을 영해에만 의존하는 해석방법인 ‘영해주의’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영해를 삼가야 할 것에 대해서는 ‘아르케강단’의 ‘성경해석’ 코너의 14번 ‘문자주의와 영해의 지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성경을 이해할 때 문자주의와 영해주의의 조화가 필요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