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고려나전, 0.3㎜ 극초정밀 예술에 반하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세밀가귀(細密可貴)’. 1123년(인종 원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의 나전 솜씨는 세밀해 귀하다(螺鈿之工 細密可貴)”(<고려도경>)고 했습니다.
‘나전’이란 무엇일까요. 조개와 전복 등의 속껍데기를 다양한 모양으로 얇게 가공한 뒤 그릇 등에 붙여 장식하는 공예기술입니다. 보통 칠을 한 기물 위에 나전을 붙이므로 ‘나전칠기’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나전 칠 모란넝쿨무늬 경전함’(보물). 분석결과 경전함에 쓰인 나전의 두께는 0.3~0.8㎜에 불과하다. 경전함에 들어간 나전 조각은 모두 2만5000개나 됐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긍은 대국의 자존심을 지킨 탓인지 “옻을 칠하는 기술은 그리 잘하지는 못한다(漆作不甚工)”고 전제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나전의 정밀한 기술을 ‘세밀가귀’라고 극찬했습니다. 나전칠기 중 ‘칠’은 인정할 수 없지만 ‘나전’의 정밀한 기술에는 ‘엄지척’한 것입니다.
나전으로 장식된 최고급 마차
고려나전은 중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답니다. 1080년(문종 34)에는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나전장차·螺鈿裝車)를 송나라에 진상한 일이 <고려사>에 등장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나전칠기로 장식한 최고급 승용차를 송나라 조정에 선물한 거죠.
또 인종 연간(재위 1122~1146)에 사신으로 요나라를 방문한 문신 문공인(?~1137)이 요 관리들에게 고려나전 제품을 개인적으로 선물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등장합니다.
<고려사>는 “이때부터 고려나전 제품에 반한 요나라 관리들이 고려 사신이 갈 때마다 ‘선물 안 주냐’고 요구하는 바람에 큰 폐단이 됐다”고 비판합니다.
또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인 최이(1166~1249)가 “1244년(고종 32) 연회를 베풀 때는 은테를 두르고 나전으로 장식한 화분 4개에 얼음산을 쌓았다”(<고려사> ‘열전’)고 합니다.
몽골 간섭기인 1272년(원종 13)에는 “대장경을 보관할 함(경전함)을 만들라”는 원나라 황후의 요구에 따라 나전 제품을 제작하는 임시관청(전함조성도감)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칠기서인 <휴식록>은 “나전 필갑(필통)은 고려국에서 생산돼 들어온다”고 기록했습니다.
고려의 나전 솜씨가 어땠기에 이렇게 극찬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현존하는 고려나전 제품을 보면 감탄사가 나올 만합니다.
고려나전은 거북(대모·玳瑁) 등껍질과 전복 껍데기 등을 얇게 갈아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이 껍질을 일일이 곡선으로 오려내 꽃잎과 이파리 등의 무늬를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줄음질 기법이라 합니다.
예컨대 ‘나전 칠 모란넝쿨무늬 경전함’(보물)의 경우 함에 사용한 나전의 두께는 0.3~0.8㎜ 정도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꽃잎과 이파리의 한조각 크기는 1㎝를 넘지 않습니다. 작은 것은 2~3㎜에 불과합니다. 꽃송이를 이은 넝쿨은 금속선으로 만드는데 이것도 그 두께가 0.3㎜에 불과합니다.
옻칠을 한 나무표면에 아교를 묻힌 이 작은 꽃잎과 이파리 조각을 일일이 붙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성질 급한 나 같은 사람은 절대 못 할 일입니다. 극도의 인내력과 정밀함을 요하는, 그야말로 ‘극한작업’이었을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전으로 만든 경전함의 경우 2만5000개의 나전 조각을 사용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전 세계 단 22점뿐
고려 장인들이 그렇게 극한의 작업을 통해 제작한 나전은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경전함, 염주함, 향합(향을 넣는 그릇), 불자(拂子·불교의식용 도구) 등까지 해서 전 세계 22점 정도만 현전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제품 대부분은 일본과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의 주요 박물관에 흩어져 있습니다.
국내에는 불자 1점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14년 일본인 소장가에게서 나전경전함을 구입했고요. 2019년 12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전 세계에 단 3점뿐인 나전국화넝쿨무늬합(그릇)을 일본소장가로부터 구입 환수했습니다. 이로써 국내의 고려나전 유물은 온전한 것만 3점으로 늘어났습니다.
고려 예술을 대표하는 ‘세밀가귀’ 제품이 이렇게 적은 숫자만 남아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죠.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조선 개국과 함께 화려함을 배격하는 분위기가 강조되면서 쇠퇴한 측면도 있답니다.
예컨대 1448년(세종 30) 6월 30일 세종은 “속절(俗節·철이 바뀔 때 제사를 지내는 날)에 진상하는 함을 나전으로 꾸미지 말라”는 명을 내리거든요. 그렇게 공이 많이 들어가는 제품을 왕실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쓰겠습니까. 게다가 나전 제품은 옻칠한 나무에 0.3㎜~1㎝의 문양을 수천~수만개 만들어 아교로 일일이 붙여 만들지 않습니까. 세월이 지나면 그 문양이 떨어지기 쉽죠. 게다가 잦은 병란(임진왜란·병자호란·한국전쟁 등)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국보경’의 미스터리
아쉽지만 여기서 눈을 돌려보죠. 고려 장인들의 1500년 전 선배가 제작한 또 하나의 극초정밀 제품을 봅시다.
그것이 지금까지 ‘다뉴세문경(고리가 많은 가는무늬 청동거울)’으로 알려진 ‘고운무늬 거울’(정문경)입니다.
‘고운무늬 거울’은 1960년대 논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병사들이 발견했답니다. ‘고운무늬 거울’은 방울 8개 달린 팔주령(2점), 포탄 모양의 간두령(2점), X자가 교차된 조합식(1점) 및 아령 모양의 쌍두령(2점) 등 다양한 청동방울과 함께 발견됐는데요.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제정일치 지도자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였습니다. 이 청동기 세트는 중간상인을 거쳐 ‘고운무늬 거울’은 숭실대박물관으로, 나머지 청동 방울 세트는 호암(리움)미술관으로 넘어갔습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청동기 세트는 ‘고운무늬 거울’(1971년·숭실대)과 ‘청동방울 일괄유물’(1973년·호암)의 이름으로 차례로 국보가 됐습니다.
기원전 3~2세기 청동기시대 작품인 ‘국보경’(‘고운무늬 거울’)과 13~14세기 고려시대 작품인 ‘나전경전함’의 정밀도는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1500년 시공을 초월한 장인들의 인내심과 집중력을 보여준다. / 숭실대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런데 숭실대 소장 ‘고운무늬 거울’은 처음부터 ‘국보경(국보거울)’으로 일컬어질 만큼 국보 중 국보로 통했습니다.
이 ‘국보경’은 기원전 3~2세기를 살았던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이 ‘국보경’에는 반복된 동심원과 그 동심원 안에 새겨진 무늬, 그리고 직선을 이리저리 규칙적으로 새긴 삼각문양 등이 정밀합니다. 확대경을 들이대고 세어본 선만 1만3000개가 넘습니다. 선의 간격은 0.3~0.34㎜, 원의 간격은 0.33~0.55㎜에 불과합니다.
‘0.3㎜’ 두께라면 어떻습니까. 기시감을 느끼죠. 바로 ‘고려나전 경전함’(보물)에 사용한 나전의 두께가 0.3~0.8㎜ 정도이고, 금속선으로 꽃송이를 이은 넝쿨의 두께가 0.3㎜에 불과하다고 했죠. 0.3㎜의 극초정밀 예술이 1500년의 시공을 초월한 장인들의 인내심과 집중력을 보여줍니다. ‘국보경의 선=1만3000개, 고려 경전함의 나전 조각=2만5000개’라는 사실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고요.
황금비율을 맞춘 장인의 센스
참 신비로운 일이죠. 2300년 전 청동기시대 장인은 어떻게 이러한 극초정밀의 문양을 새기고, 또 주조했을까요.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의 박학수 학예연구관(현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실장)이 참빗살 21가닥(0.33~0.55㎜ 간격)의 끝을 얇게 깎아 만든 일종의 다치구(多齒具) 컴퍼스로 동심원을 그려봤는데요. 그 결과 참빗살처럼 대나무 껍질로 만든 다치구 컴퍼스로도 ‘국보경’의 동심원 문양을 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의문점이 생깁니다.
0.3㎜의 극초정밀 청동거울을 어떻게 주조했단 말입니까.
2007년부터 1년간 국립중앙박물관의 분석 결과 숭실대 소장 ‘국보경’의 실체에 한걸음 다가가게 됐는데요. 즉 ‘국보경’은 구리와 주석비율로 따지면 ‘65.7(구리) 대 34.3(주석)’였습니다.
불자(拂子). 선승(禪僧)이 마음의 번뇌와 티끌을 없앤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손에 드는 의식용 도구다. 거북 등껍질인 대모로 장식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대 청동기의 합금비율을 기록한 중국의 <주례> ‘고공기’가 설명한 ‘구리-주석 황금비’는 ‘67(구리) 대 33(주석)’입니다.
숭실대 소장 국보경(66 대 34)은 고대 청동거울의 황금비와 견주면 단 1% 정도의 오차만 보였습니다.
황금비율이 왜 필요할까요. 청동거울의 경우 주석의 함유량이 많아질수록 색깔이 적색에서 백색으로 변합니다. 주석의 함유량이 10~20%는 담황색, 20~30%는 회백색, 30~40%는 은백색을 띠게 되죠. 은백색을 띠면 당연히 거울의 빛 반사 성능은 좋아집니다.
그래서 <주례> ‘고공기’가 이상적인 청동합금 비율을 ‘주석 33%’라 한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청동거울도 주석 함유량을 30% 이상으로 높이면 만사 오케이겠네요.
그러나 중국이나 국내의 다른 청동거울은 주석의 함유량이 현저하게 적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석 함유량이 많으면 색깔은 은백색으로 변하지만 22%가 넘어가면 치명적인 단점이 생깁니다. 인장강도(잡아당기는 힘에 견디는 저항력)가 급격히 떨어져서 거울이 쉽게 깨집니다.
기원전 3~2세기 ‘국보경’을 만든 장인은 쉽게 깨지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황금비율로 알려진 구리·주석 비율(67 대 33)에 맞추려고 분투했습니다. 0.3~0.55㎜ 간격으로 그은 1만3000여개의 선과 천신만고 끝에 다 그려넣은 동심원이 아차! 하는 순간에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결국 ‘국보경’은 청동기 제작기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최상의 황금비율로 제작했음을 알 수 있죠. 덕분에 색상과 반사율 면에서 최상의 조건을 갖춘 극초정밀의 예술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고요.
물론 국보경에는 주조 때 몇가지 흠결이 보이기는 합니다. 국보경은 ‘주물사 주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해석하는데요. 주물사 주조법은 입자가 미세하고 점토분이 많은 모래를 굳혀 그 위에 문양을 새긴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제작하는 기법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모래가 거울 앞뒤로 혼입되기도 하고, 쇳물을 부을 때 거푸집이 분리돼 다른 곳에 박혀 있기도 했고요. 다른 결함도 확인됩니다. 거푸집의 주물사에 수분이 너무 많았거나 점토분이 적어 일어나는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이런 흠결은 보다 정밀한 청동거울을 제작하고자 했던 장인의 치열한 분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국보경에는 또한 당대 청동기 장인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문양이 보이는데요. 동심원의 한가운데를 장인의 손으로 그린 흔적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다치구 컴퍼스로 그린다 해도 한가운데 부분은 동심원으로 표시하기 어렵거든요. 한가운데엔 컴퍼스를 그릴 때 생기는 자국(원점)이 존재했을 겁니다. 아마도 그 자국을 주물사로 메우고 그 위에 화룡점정하듯 마지막 동심원을 손으로 그려넣었을 겁니다. 초정밀의 완벽미를 과시하면서 일말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장인의 센스가 아닐까요.
2019년 말 일본의 개인소장가에게서 구입 환수한 나전국화넝쿨무늬합. 전 세계 딱 3점뿐인 유물이다. 화장용기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 문화재청 제공
“고운무늬 거울의 원조가 있다”
고려나전의 원조가 청동기시대 ‘고운무늬 거울’이라면, 이 ‘고운무늬 거울’의 원조도 있지 않을까요.
최근 ‘국보경’ 문양의 원형을 신석기시대 대표유물인 덧띠·빗살무늬 토기에서 찾는 연구가 시도되고 있습니다(김찬곤의 <빗살무늬토기의 비밀>·뒤란·2021).
국보경의 무늬가 기존의 견해대로 태양이나 햇빛이 아니고, 덧띠·빗살무늬 토기의 문양 역시 기하학 무늬가 아니라는 겁니다. 정문경이나 덧띠·빗살무늬 토기 문양은 하늘과 비, 구름을 그린 무늬라는 겁니다.
1975년 당시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도쿄(東京)에서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10주년 기념 특별전 제목을
‘한국미술 5000년전’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1973~1975년 사이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기원전 3000년 전 유물인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됐거든요.
토기를 3~7단으로 나눠 갖가지 무늬를 새긴 선사인들의 예술품으로 읽은 겁니다.
이기환의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