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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사이트에서 ‘그해 여름’이라는 제목을 검색해보면 일단 한국영화 한 편이 상위에 올라온다. 그리고 똑같은 제목의 대중가요도 등장한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같은 제목의 소설을 비롯해 여러 권의 책도 나열된다. 이처럼 몇 개의 단어를 조합해 만들어진 어구(語句)가 여러 장르에 걸쳐 똑같은 제목으로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곧 ‘그해 여름’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도대체 그해 여름에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영화와 음악 그리고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얘기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각각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즉, 표면적으로 제목만 같을 뿐, 영화나 소설 혹은 음악이 모두 똑같은 ‘그해 여름’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화에서도 또 다른 사연을 간직한 ‘그해 여름’을 만날 수 있다. 마리코 타마키가 스토리를 쓰고, 질리안 타마키가 그림을 그린 <그해 여름(원제: The One Summer)>이 그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그해 여름’의 이야기는 이제 막 인생의 봄을 맞이하는 한 소녀의 기억을 빌려 시작된다.
여름에 휴가가 더해진 시간에는 이와 같은 여유로움이 허락된다. ‘그해 여름’의 시작도 여느 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인공 ‘로즈’는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도시를 떠나 ‘아와고 비치’에 머무른다. 해변과 더불어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자리 잡은 한적한 휴양지는 평범한 가족이 한여름 더위를 피해서 머물기에 안성맞춤이다. 너무 한가로워서 자칫 무료할 수도 있는 곳이지만, 로즈에게는 매년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친구 ‘윈디’가 있어서 심심해보이지 않는다. 윈디의 가족 역시 휴가기간 동안만 오두막을 빌려 이곳에 머무른다. 오랜만에 만난 두 소녀는 일 년 사이에 있었던 다양한 개인사, 가령 ‘남자친구가 생겼는지’ 혹은 ‘서클 모임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등과 같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의 경험을 서로에게 들려준다.
일 년간의 신상(身上)을 교류한 후 소녀들이 즐기는 여름휴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곧 도시의 일상을 벗어나서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로즈와 윈디는 근처 대여점에서 빌려온 공포영화를 어른들이 빠져나간 오두막에서 함께 보며 두 사람만의 시간을 공유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19금 DVD’를 허락해준 대여점 남자점원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대여점에 들를 때마다 로즈는 점원이 신경 쓰이기도 하며, 점원과 그의 여자친구가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까지도 로즈와 윈디에게는 주요한 수다거리가 된다. 비록 점원에게 여자친구가 있다 하더라도 혼자서 품고 있는 마음에는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 휴양지에서의 첫사랑은 대개의 경우 충동적이어서 금기시되기도 하지만,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어쩌면 평생 동안 품고 가기에 가장 적당한 ‘이벤트’일 수도 있다.
휴양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호기심을 작동시킨다.
이처럼 일상을 탈출한 해방감과 더불어 약간의 일탈이 더해진 주인공의 휴가는 더없이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만족스러워 보이는 시간들 속에도 균열은 생기기 마련이니, 그 시작은 부모님의 불화에서부터다. 아빠는 엄마와 말다툼이 있은 후 홀로 도시로 떠나버린다. 남겨진 엄마는 제 한 몸 추스르기도 힘겨워 주인공의 끼니도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한다. 게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가던 대여점 점원이 연인에 대해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소녀를 둘러싼 세상은 핑크빛이 아닌 잿빛으로 급변한다. 여기에 언제나 마음이 통할 것 같았던 친구 윈디와의 관계마저 삐거덕거리게 되면 주인공의 왠지 모를 불안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로즈에게 유독 ‘그해 여름’이 기억에 남게 된다면, 다른 해와는 다른 ‘불안감’이 큰 몫을 했을 것 같다.
로즈의 ‘그해 여름’을 보며 문득 우리는 우리들의 ‘그해 여름’을 떠올릴 수 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돌멩이를 수집해 자신의 방에 모셔두는 모습으로부터 친구와 공깃돌을 가지고 놀던 그 시절이 생각날 수도 있으며, DVD 대여점 점원에 대한 수줍은 관심은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은 짝사랑의 기억을 소환시킬 수도 있으리라. 혹은 19금 공포영화에 대한 두려움 섞인 기대감은 어른들 몰래 생애 처음으로 홀짝이던 알코올에 대한 기억을 불러올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그해 여름> 속 주인공의 모습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뭐 그리 큰일도 아니었는데...’라며 피식 웃을 수도 있는 기억들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어 보인다.
사실 요약하자면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가족이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매년 방문하는 휴양지에 들렀고, 그곳에서 여름 동안 겪는 일을 담아낸다. 그러니 일상적이기도 하며, 또한 평범한 얘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주인공의 시선이 더해지면 이야기를 조금 특별해진다. 소녀는 그곳에서 일상에서는 쉽게 만나지 못한 몇 가지 경험을 했고, 그것은 어쩌면 앞으로 그녀의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그해 여름’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가가 궁금해! - 마리코 타마키(글) & 질리안 타마키(그림)
마리코 타마키(Mariko Tamaki)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소설과 만화스토리 작업을 병행해오고 있다. 그녀가 스토리를 맡았던 작품으로 <Emiko Superstar>(2008), <스킴(Skim)>(2010) 등이 있는데, 특히 질리안 타마키와 처음 작업한 <스킴>을 통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2014년에 발표한 <그해 여름>을 통해 칼데곳 상(Hornor Book), 마이클 프린츠 상(Honor Book), 이그나츠 상 등을 수상했으며, 아이스너 상, L.A. 타임스 상 등에서는 최우수상에 노미네이트 된 바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뉴욕타임즈>, <타임스매거진>, <퍼블리셔스 위클리> 등 여러 매체로부터 2014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밖의 작품으로 <Cover Me>(2000), <True Lies>(2002), <Fake ID>(2005), <Set Me on Fire>(2012), <Saving Montgomery Sole>(2016) 등과 같은 소설과 산문이 있다.
질리안 타마키(Jillian Tamaki)
캐나다 오타와에서 출생했으며, 마리코 타마키와는 사촌지간이다. 앨버타 디자인 스쿨을 졸업했으며, 만화와 함께 일러스트레이션을 선보이고 있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해 <뉴요커>,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에 그녀의 그림이 게재되면서 유명해졌다.
<GILDED LILIES>(2006), <INDOOR VOICE>(2010), <SuperMutant Magic Academy>(2015) 등을 발표했으며, 자신이 작업한 그림들을 모아놓은 블로그(http://blog.jilliantamaki.com/)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그해 여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첫사랑의 기억이 머무르고 있을 수도 있으며, 가슴 뛰는 경험과 마주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주인공 로즈에게 있어서도 ‘그해 여름’이 특별히 기억되는 이유는 비슷하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사람으로부터 상처 받기도 하며, 같이 있으면 언제나 즐거울 것만 같았던 친구와도 감정적인 균열이 생긴다.
‘그해 여름’에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주인공. 그녀에게는 엄마의 관심이 필요해보이지만, 엄마 역시 고민이 많아 보인다.
특히 엄마와의 불화는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항상 자신에게 다정해야 할 존재라 여겼던 엄마는 무슨 이유에선가 휴가 내내 불안한 느낌이라서 곁에 다가가기조차 쉽지 않다. 여기에 엄마와 아빠의 다툼은 사춘기 소녀의 불안정한 심리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녀도 어른이 되면 깨닫게 될 것이다. 어른들도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단지 소녀의 성장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소녀의 눈을 통해 어른들 역시 많이 부족하고 때로 어리석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겪었던 두근거림이 떠오른다면 ‘그해 여름’에 깊은 동의를 보내게 될 것이다.
여름휴가의 묘미는 뭐니뭐니 해도 ‘일상으로부터 탈출’일 것이다. 때로 탈출의 경계가 무너져 방종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적당한 지나침’은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을 버틸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원동력이자 보상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제 막 ‘틴에이저’에 접어든 소녀라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가슴 뛰는 시기가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이런 광경은 왠지 낯익다. DVD가 비디오테이프 혹은 성인잡지로 대체될 수도 있으며, 반짝이는 눈망울이 소녀가 아닌 이제 막 거뭇한 수염이 나기 시작한 소년일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누구나 한번쯤 거쳐 갔던 시절의 모습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만일, 당신이 이 시절의 ‘호기심’이 소중해질 나이라면, ‘그해 여름’에 대한 기억 또한 아련히 떠오르지 않겠는가.
참고자료
홈페이지 마리코 타마키 홈페이지 질리안 타마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