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朴正熙)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1961년 소장으로 제2군 부사령관에 재직중 청년장교들과 함께 5·16군사정변을 주도했다.
같은 해 7월 군사정변의 최고권력기관으로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해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했으며,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의 사임으로 그때부터 대통령 권한대행도 함께 맡았다.
1963년 8월 대장으로 예편하고, 1963년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에 추대되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 제9대에 이르기까지 장기 집권했다.
경제발전에 집중했으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선포했으나 1979년 측근에 의해 피격, 사망했다.
2012년 박정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박정희대통령 묘소
박정희대통령, 육영수 여사의 묘소
국립현충원
1961. 5. 16 쿠테타 거사후 3일째 되는날.
처음으로 서울시청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소장 좌측은 박종규소령, 우측은 차지철대위
이들은 훗날 '경호실장'직을 이어받는다.
1961년 5월 22일 쿠테타 본부 에서 거사 6일후,
쿠테타의 성공가능성이 보이던 때 심신의 피로누적으로 다소 초췌한 모습
5.16 후 박정희 육군대장 탄생 [1961. 11. 04]
대장계급장을 달아주는 사람은 윤보선대통령과 송요찬 내각 수반
윤보선 하야 발표.(1962.03.22)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의 결혼식 모습
대통령선거 유세 중인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 부부 [1971]
투표장의 모습
근혜양의 운동회날 모습
김형욱과 이후락,점심식사라도 하고 나온듯 여유로운 모습
김종필,김형욱,김용태, 민간인으로 유일하게 5.16에 가담한 김용태
박정희대통령은 사석에서 그에게 '두목'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사석에서는 별명을 호칭하며 친근감을 표했다.
1974년 8월 15일 참극 직전의 광복절 행사장에 입장
유신말기 민방공훈련을 지휘하는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가운데)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를 이어받는 노태우(좌측)와 전두환(우측)
10.26 사태] 박정희 독재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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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죽자, 갑자기 뜬 술이 있습니다. 바로 '시바스 리갈'입니다. 박정희가 마지막으로 마셨던 술이 '시바스 리갈'이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박정희가 양주를 마시다가 죽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평소 신문과 대한뉴스를 보면 박정희는 항상 논두렁에 앉아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임금님과 같은 사람도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서민 대통령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가 죽었던 궁정동 만찬 사진이 공개되면서 박정희가 마셨던 술이 막걸리가 아닌 '시바스 리갈'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한때는 대통령이 죽으면서 마셨던 술이 얼마나 맛있느냐면서 너도나도 '시바스 리갈'을 찾기도 했습니다.
박정희가 막걸리를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순수 막걸리보다 막걸리에 '기린 맥주'를 섞어 마시는 '비탁'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술은 양주였습니다.
『그날은 朴대통령께서 경호원을 부르더니 「내 침대 머리 맡에 양주가 한 병 있는데 가지고 오라」고 해요. 경호원이 가져왔는데 바로 이 「로얄 살루트」야. 朴대통령이 혼자 좋은 술을 마셨다는 게 쑥스러우셨는지, 「朴浚圭(박준규·당시 공화당 당의장 서리)가 미국 갔다 오면서 한 병 선물로 사왔어. 잠 안 올 때 한 잔씩 아껴 먹었어」라고 해요. 병을 들어보니 3분의 2쯤이 남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 10명쯤이 있었는데 한 잔씩 돌았어요. 처음 먹어봤는데 술 맛이 기가 막혀. 다들 「한 잔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군침을 삼켰어요. 그런데 金桂元(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 남은 술은 침실에 갖다 두겠습니다」하고, 술병을 빼앗아 경호원에게 건네줬어요. 朴대통령이 「어이」 하고 경호원을 한 번 부르기만 하고, 「술병 여기에 놔둬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거야. 얼마나 야속하던지 말이야(웃음)』 [각주:1]
박정희가 양주를 마시다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국민이 그를 양주는 입에도 대지 않는 서민 대통령으로 착각했다는 점이 배신감의 시작이었습니다.
언론이 보여주는 모습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국민들은 뒤통수를 맞은 셈입니다.
' 박정희와 함께 있던 미모의 여대생, 실제는 이혼녀'
박정희가 죽은 10월 26일 다음 날인 10월 27일자 신문에는 박정희가 만찬 도중에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신문들은 박정희가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만찬'을 하다가 사망했다고 보도했고, 국민들은 그가 말 그대로 '만찬'을 하다가 사망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여성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사망했습니다.
당시 만찬에 참석했던 여성 한 명은 모대학 연극영화과 3학년 휴학 중이었던 신재순이었고, 다른 한 명은 가수 심수봉 씨였습니다.
당시 신재순 씨는 대학 2학년 때 결혼해 딸까지 두었던 이혼녀로 미혼 여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박정희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싱글 남녀의 만남으로 보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났습니다. [각주:2]
웃긴 것은 김정일의 기쁨조에는 그리도 비난하던 사람들도 박정희가 여성들과 술자리를 즐기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에는 그다지 나쁜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박정희가 여성들과 잦은 술자리와 만남을 가졌지만, 그를 비난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육영수 여사의 사망으로 그가 외로웠다는 점과 일본 군국주의 문화로 성적인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여성편력은 육영수 여사가 생존해 있을 때도 있었고, 일본 군국주의 문화는 그만큼 그가 일본군 출신이라는 점만 더 드러낼 뿐입니다.
박정희의 인생을 보면 분명 육영수 여사가 살아 있을 때와 죽었을 때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육영수 사망 이전에는 검소하거나 막걸리를 즐겨 마셨지만, 그녀가 죽자 막걸리보다는 양주를 검소함보다는 타락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재혼했었다면 달라졌을까요? 당시 박정희의 재혼을 추진했던 일도 있었지만, 그의 딸 박근혜 현 대통령이 반대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녀가 미혼의 나이에 청와대 안주인 역할을 포기했다면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
' 권력다툼이었는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위한 의거였나?'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던 이유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설과 우발적으로 죽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최후 변론에서 했던 말을 보면 단순한 우발적인 범행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둘째 이 나라 국민들의 많은 희생을 막는것이오
셋째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것입니다.
넷째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은 10.26혁명 결행 성공과 더불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김재규의 주장에서 민주주의 회복과 국민들의 많은 희생을 막는 부분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열흘 뒤에 박정희가 사망했는데, 만약 그가 죽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가 발포 명령을 통해 민간인을 학살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보면 부마사태에 대한 박정희와 차지철의 입장은 단호했으며, 그가 죽지 않고 그 분위기를 계속 유지했다면 어떻게든 유혈사태는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박정희가 죽었을 당시 모든 언론은 차지철과 김재규의 권력다툼이라고 했지만, 김재규는 이미 'YH무역 여공 농성사건'과 '신민당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 사건' 등을 보면서 박정희가 판단력을 잃고 있다고 봤습니다.
김재규가 볼 때에는 이미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었고, 박정희만 사라지면 민주주의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김재규 前중앙정보부장 묘소
하지만 사건의 가장 큰 발단이 된 걸로 추측하는 내용은 바로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갈등이었다.
박정희보다 더한 독재자로 알려진 차지철은
그 당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성공할 줄 알았던
10.26사태는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에 의해 체포되고 다음 계획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결국은 19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김재규 前중앙정보부장의 '최후진술'
여러분,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여야 합니다.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건국이념이요, 우리의 국시입니다. 수없이 많은 국민들의 희생을 치르고, 전체 국민이 수난을 당하며 지켜온 자유민주주의입니다. 무슨 이유로든 이것은 말살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10월 유신과 더불어 까닭 없이 말살되어버렸습니다. 10월 유신은 국민을 위한 체제가 아니라 박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위한 체제였습니다. 저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이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의무와 책임은 있어도 이를 말살할 권한은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는 모순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특히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의 소리가 높아지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라는 소리가 높아지자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주 회복의 불길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번져나갔습니다. 전국에 팽배한 상태까지 번졌습니다. 제가 정보부장으로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유신 체제를 유지하려면 정부와 국민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예상됩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비교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그만둘 때 그만둘 줄 알았으나 박 대통령은 많은 국민이 희생되더라도 끝가지 방어를 해낼 사람으로 그만둘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자가 나도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본인은 이를 알기 때문에 유신 체제를 지탱하는 지주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자만, 더 이상 국민들이 당하는 불행을 방관할 수가 없어 이 사회의 모든 모순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뒤돌아서서 그 원천을 두드려 부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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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마지막으로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20~25년 앞당겨놓았다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갑니다. 대한민국의 발전이 잘 되도록 기원합니다. 대한민국의 앞날에 ‘자유민주주의 만만세’를 기원하고, ‘10.26 민주혁명 만만세’를 기원합니다. 다만 제가 이 세상을 빨리 하직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만발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는 그 여한이 한량없습니다.
김재규는 유언으로 "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맘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이 시간이 명예롭고 보람되고 즐겁다"라는 말을 남긴다.
아직까지도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게 나뉘지만 역사의 사실은 김재규에 의해
민주주의가 올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전두환, 노태우에 의해 또다시
제5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신군부 독재시대가 온 것이다.
김재규라는 인물에 의해 역사가 바뀐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그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
잘했는지 잘못되었는지는 역사를 더 알아야 하는 숙제인듯하다.
아이엠피터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어도 민주주의 혁명은 일어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만약 부마항쟁을 총칼로 진압했다면 4.19혁명과 같은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그것이 우리의 역사를 바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임으로 국민이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봤습니다.
"나는 혁명은 결행하였으나 혁명과업은 다른사람의 손에 의하여 수행될것이며,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요"
연회실 옷걸이에는 대통령의 상의가 걸려 있었다.
주머니에는 지갑과 도장, 구두 주걱이 달린 열쇠 고리 등이 있었다.
현관 입구에는 이날 대통령이 신고 온 구두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두 번째 총탄은 대통령의 가슴을 관통했다.
최고 권력자가 안전가옥에서 가장 믿었던 심복에 의해 살해 당한 것이다.
문제는 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았느냐는 것이었다.
연회장은 총격 직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합수부도 처음엔 무능을 질책 당한 김재규가 저지른 사건으로 몰아갔다.
당시 심수봉은 합수부 조사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다투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이는 강요된 진술이었다고 폭로했다.
"대기실에서 굉장히 분위기가 좋았어요.
거기 조그맣게지만 TV도 틀어놓고.
그때 그게 AFKN이었을 거예요.
기다리는 동안에 무슨 소리가 크게 났다면 저희한테 들리고
경호원들이 긴장을 안 하겠어요?
그런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 심수봉, 가수, 10.26 연회 참석
심수봉과 신재순이 합류한 것은 연회가 시작된 지 40분후.
연회장 분위기에 대한 진술도 김계원과는 달랐다.
"분위기는 좋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봤을 때 대통령도 몇 번 뵈었고, 저를 아주 반가워했고요.
또 차지철씨도 심수봉씨 노래 잘 듣고 있다는 둥 약간 농담도 하면서 분위기가 그랬으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노래 좀 듣자고 하셔서 TV를 끄고 제가 먼저 노래를 한 거죠."
- 심수봉, 가수, 10.26 연회 참석
심수봉은 이전에도 김재규를 연회에서 만난 적 있었다.
그런데 이날 김재규는 처음부터 여느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두 발을 쏜 후 김재규의 권총이 고장났다.
김재규는 거실로 나와 궁정동 의전과장 박선호의 권총을 받아들었다.
그런 후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가 차지철을 향해 한 발을 발사했고
뒤이어 대통령의 후두부에 다시 한 발을 발사했다.
대통령은 피격 직후 비서실장 김계원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됐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D.O.A 된 상태로 도착했습니다.
D.O.A라는 게 'death on arrival(도착시 이미 사망)'입니다.
그래서 내가 들어가면서
"이 친구들아 D.O.A면 나한테 왜 연락을 해?
수도 병원이나 어디 영안실에 연락해가지고 준비를 해주지.""
- 김병수, 전 국군 서울지구병원장
3년간 대통령을 모셨던 김병수는
아래배의 흰 반점을 보고 박정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정적인 사인은 가슴을 관통한 제 1발.
제 2발은 확인 사살 정도의 의미였다.
"(총알이) 귀보다 조금 위로 들어가서
이쪽으로 통과해서 왼쪽 상악동(위턱뼈 가운데 공동) 끝에 박혀 있어요.
그게 엑스레이에서 확인이 됐죠."
- 김병수, 전 국군 서울지구병원장
절대 권력 박정희의 사망!
김재규가 쏜 두 발의 총탄이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 놓았다!
그런데 궁정동 안가 중 김재규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왼쪽 끝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외견상 유신 독재를 보위하고 있었던 김재규.
그런데 가슴 속에는 남 모르게 민주 회복의 열망을 품고 있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김재규는 79년 들어
'자유민주주의' '대의를 위하여' 등 파격적인 내용의 글을 남겼다.
"이 나라에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 시켜 놓자,
대통령 각하하고 나하고 있어서의 의리도 소의에 속하는 건 한꺼번에 다 끊어바친다.
대의를 위해서 내 목숨 하나 버려버린다."
- 김재규
그런데 79년 접어들면서 유신 독재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미국과는 주한 미군 철수, 핵개발 등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18년 장기 집권에 대한 저항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부산에 내려가 봤더니
학생 일부가 소동을 피운 게 아니고
전체 학생들이 민중과 더불어 소위 민란을 일으킨 상황입디다.
그게 끔찍한 이야기거든."
- 고 이재전, 전 경호실 차장
10.26 / 12.12 사태
정부의 2인자 역할을 한 김재규1926~1980 중앙정보부 부장과 차지철1934~1979 경호실장 사이에 갈등과 권력 다툼도 벌어졌는데,
이 모든 것이 폭발한 사건이 1979년 10월 26일에 일어난 10.26 사태이다.
이날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김재규,차지철 등등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잔치가 열렸는데,
김재규는 여기에서 때를 노리다가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총알을 쏘아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과 유신 독재는 한순간에 종말을 맞았다.
10.26 사태가 일어난 동기로는 김재규의 개인적인 불화, 독재 정권에 대한 염증, 민주화를 향한 열망 등
여러 가지가 지목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기에
이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좋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박정희가 사망하자
당연하게도 국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부랴부랴 국무총리 최규하1919~2006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뒤 1979년 12월 6일에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최규하가 맡은 임무는 임기를 다 채우는 것보다는 10.26 사태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독재 정치를 종식시킨 뒤
민주적으로 선출된 다음 대통령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새로 출범한 최규하 정부의 책임이 막중했으나. 그 직후 군사 독재가 재림하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10.26 사태)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35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했다. 박정희는 62세를 일기로 서거했고,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부터 만 18년 5개월 10일 만의 일이었다.
좌로부터 김재규, 박정희, 차지철
1975년 10월 14일 영동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 사진, 박정희 대통령 뒤로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건설부장관. 김재규 뒤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 경호관.
문제의 발단 중에 하나는 김재규(육사2기, 1926-1980)와 차지철(육군포병간부후보생, 1934-1979) 간의 갈등이다. 차지철은 1974년 8월 15일 발발한 육영수 여사의 피격 사건 이후 박종규 경호실장 후임으로 8월 22일 경호실장으로 임명돼 경호실을 권력의 중심으로 키워나갔다.차지철은 이후 국회, 행정부, 군 인사 등을 좌지우지하고 야당에 정치 공작을 피는 등 국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2친자로서의 위세를 떨쳤고 유신시절 내내 지나친 월권행위로 야당은 물론 여당인 공화당으로부터도 원성을 많이 샀다.
이런 상황에서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의원의 국회의원직 제명이 발단이 되어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자 부마민주항쟁 처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증폭되었다.
당시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전국의 대도시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높은 민란으로 파악하여 박정희에게 보고했지만, 박정희와 차지철은 북한 간첩의 개입 내지는 김영삼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불순한 사건으로 호도하고 대형 학살을 예고하는 언행을 했다. 즉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그럴 경우 발포를 하겠다”고 버럭 화를 냈고, 차지철 역시 “캄보디아에서 3백만 정도 죽였어도 까딱 없으니 데모대 1~2백만 정도 죽여도 걱정 없다"고 부추겼다. 또 차지철은 "데모대를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강압적으로 눌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마항쟁
운명의 1979년 10월 26일 당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당진 송신소 건물은 중앙정보부 에서 관리하는 건물인 바, 부장인 김재규가 당일 아침 완공식(삽교천 포함)에 참석할 의사를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로 밝혔지만,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 인데 중정 부장까지 자리를 비우면 어쩔 것이오? 김부장은 그냥 서울이나 잘 지켜 주시오" 라면서 단칼에 끊어버렸다.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4시 10분경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궁정동 행사에 올 것을 통보 받았고 4시 30분경에는 비서실장 김계원도 통보를 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행사
김재규는 궁정동에 먼저 도착한 후 안전가옥 집무실에서 오후 4시 40분 육군참모총장인 육군대장 정승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시국 얘기를 나누자’며 그를 안가로 초대한 뒤, 중정 제2차장보 김정섭도 저녁 6시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했다.
오후 5시 20분,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안가에 도착했다. 김재규는 김계원과 안가 앞마당에서 부마항쟁 때 부산에서 직접 확인한 민심을 얘기하였고 당시 상황을 호도하고 있는 차지철을 심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차지철 이 자식 오늘 해치워 버릴까요?" 라는 등 격한 반응도 보였다. 평소 김재규를 친동생처럼 아끼던 김계원은 ‘내일 민정수석의 대통령 보고 때 차지철의 월권에 대해 각하께 보고하도록 하겠다’면서 김재규를 달랬다.
준공식을 마치고 오후 6시쯤 궁정동 안가에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일행이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재규와 김계원은 안가의 ‘나’동 연회장에 안내하면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도 초대되었다.
연회에서는 당시 부마사태와 김영삼에 대한 처리문제를 두고 논쟁이 오고 갔으며 박정희는 김재규를 많이 질책했고 차지철은 이를 거들었다.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김계원은 이야기 주제를 돌려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10월 27일 새벽 5시의 궁정동 안가 현장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저녁 7시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집무실 책장에 숨겨놓은 자신의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던 의전과장 박선호(김재규가 체육교사를 하던 시절 김재규의 제자)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김재규의 6사단장 재임 당시 전속부관)을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어
사태에 따른 명령을 내렸다.
7시 38분 다시 연회로 돌아왔을 때는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7시 41분 김재규가 발터 PPK를 꺼내 쏘아 차지철의 오른 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뒤이어 차지철에게 제3발을 쏘려 했으나 발터 PPK가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차지철은 밖으로 뛰어나가 화장실로 피신했다.
김재규의 제 1발을 신호로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은 주방에서 식사 중이던
김용태 경호실 운행계장과 김용섭 경호관을 사살했다. 같은 시각 경호원 대기실에서 마른 안주를 먹으며
AFKN TV 방송을 보고 있던 정인형과 안재송이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가려 하자
박선호가 권총으로 제지하며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 라고 애원했지만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사살한 데 이어서
친구인 정인형도 살해하고 말았다.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의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렸고
김재규는 저항하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거꾸러뜨린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에게 후두부를 향하여,
마지막 탄을 발사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결국 이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과 함께 있었던
정인형 경호처장, 안재송 경호부처장, 김용섭 경호관, 김용태 운전기사 등 6명이 희생됐다.
심수봉과 신재순(당시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3년), 10.26사건 당일 박정희의 최후 술자리에서 시중을 든
'그 때 그 여인들'이 군사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됐다.
당시 일류 가수와 여대생 광고모델인 두 여인이 대통령의 비밀연회장에 동석했던 사실이
법정을 통해 공개되면서 절대권력자의 사생활 타락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정부는 27일 새벽 전국(제주도 제외)에 계엄을 선포했으며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됐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됐다.
10월 28일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사건 전말에 대한 수사 보고를 하였고
이로써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시해 사건에 대하여 브리핑하는 인간백정 전두환 소장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11월 3일 거행됐다.
한편 박정희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를 잽싸게 파고든 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그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 혐의를 씌워
체포하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최규하를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육군본부에 갔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허수아비로 만든 이후, 1980년 5월의 5.17 내란과
그 다음날부터 벌어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거치면서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의 꼭짓점에 서는 데 성공하며 또 다른 군사정권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12.12 사태로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박탈됨과 동시에
육군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국방부 군법회의 재판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80년 6월 1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며, 19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사면,
복권되었다가 1988년 군적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10.26 사태의 책임자들은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의 시해사건 상고심 판결에서 김재규와 중앙정보부원 4명에게 각각 사형을 확정하고 김계원은 무기선고를 내렸다. 국내외에서 김재규의 구명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지만 김재규,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은 5월 24일 처형됐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 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김재규 前중앙정보부장 최후진술 중에서 **
시해 사건에 대하여 브리핑하는 인간백정 전두환 소장
전두환과 신군부의 독재 정치
전두환1931~과 노태우1932~를 비롯한 '신군부'라고 불리는 군부 세력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한 뒤 5.17 내란까지 벌여서 아예 대한민국의 국정을 잠식해 버렸다.
5.17 내란이란 전두환이 군대를 이끌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 최규하1919~2006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압박해 전국으로 계엄령을 확대한 사건이다. 전두환은 이어서 모든 정치 활동이나 시위,집회를 금지했고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이 연행되었다. 일명 '삼김'으로 불리며 민주화 운동의 축으로 활약했던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은 각각 사형이 선고되고 집과 보안사령부에 감금되었다.
또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기구를 세워서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모두 자신들의 손아귀 안에 틀어쥔 뒤 최규하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세웠다.
이에 국민들은 신군부에 저항하며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지만 5.18 민주화 운동에서의 광주 시민들이 잔혹하게 진압당하고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 기세가 잦아들고 말았다.
결국 신군부의 집권으로 인해 박정희 정부에 이은 두 번째 군사 독재가 찾아왔다.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이 5.18 민주화 운동을 명분으로 반 강제로 물러나고, 박정희 시절 세워졌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이른바 '체육관 선거'라고 불리는 간접선거를 실시했다. 장충체육관에서 치뤄진 이 선거에서 전두환이 무려 99.9%의 득표율로 당선하면서 전두환은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취임 이후 전두환은 범죄자들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강제 수용소인 삼청교육대를 설립했고, 여기에서 나온 이후에도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하는 법인 사회보호법을 실시해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들까지 잔혹하게 탄압했다. 또 '언론통폐합'이라는 정책으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들을 폐간시켜버린 뒤 남은 언론 기관까지 정부의 입맛에 맞는 뉴스만 보도하는 독재 정권의 홍보 대사 정도의 역할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는 뉴스 보도가 모두 땡 하는 소리가 난 뒤에 "전두환 각하께서는..."이라는 문구로 시작했다고 해서 '땡전뉴스'라는 조롱 섞인 별명까지 생기기도 했다)
이어서 취임한 해 10월 27일에는 7년 단임제로 헌법을 개정해 제5공화국의 문을 열었고, 민주정의당 같은 자신의 정당들을 만들어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로 보이도록 했다. 이듬해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른 간접 선거로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이 이 같은 독재 정책에 저항할 것을 염려해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3S정책(스포츠, 성 개방, 영상 산업 진흥)을 실시해서 사회,문화 쪽으로 개방 정책을 펼쳤고 컬러 텔레비전이 보급되는 등 산업 개발 쪽으로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 정책들은 국민들의 눈을 독재에서 돌리기 위해 만든 우민화 정책일 뿐이었다.
결국 이처럼 국민들을 기만한 정권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신군부의 집권, 그리고 광주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손에 박정희,차지철이 사망하고 근 19년간 이어진 박정희의 독재 정권이 종결되었다.
그러자 급하게 국무총리 최규하1919~2006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임시 대통령 격으로 박정희 정권의 공백을 메우고 혼란을 수습하는 책임을 맡았다.
한편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번이야말로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루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유신 헌법을 폐지하고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를 실시하자는 민주화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특히 서울의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이 시위에 앞장섰다. 때문에 1979년 10월 26일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상황을 체코의 '프라하의 봄'에 빗대어 서울의 봄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박정희 독재의 붕괴 이후 민주화를 향한 열기는 뜨거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군대 내에서는 하나회라고 불리는 육군 출신 장교들끼리의 불법 사조직이 있었다. 10.26 사태가 일어난 것을 발표하기도 했던 보안사령관 소장 전두환1931~과 9사단장 소장 노태우1932~가 이들 하나회를 조직한 주동자였는데, 하나회에서는 장교들이 하나회 출신 후배들에게 높은 자리를 물려주는 것과 같이 사사로이 직급을 주고 친목질을 하는 등 불법적인 비리를 저질렀다.
또한 하나회 출신 군인들은 5.16 군사정변 때의 박정희와 같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다시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고, 정승화 총장이 군부 내에 하나회라는 조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한발 더 앞서서 아예 군부를 잠식해 버린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결국 1979년 12월 12일, 하나회 출신 군인들이 기습적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자신들을 견제했던 정승화 총장을 무력으로 체포하고 군대 내의 반대파들을 경질시키거나 요직에서 제외시키는 등 하룻밤 만에 군부를 장악했고, 이전의 군부와 다른 성격의 신군부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는 국민들의 여론과 아직 만만치 않은 반대 세력 탓에 5.16 군사 정변 때와 달리 정권을 바로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국민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권력을 잠식해 가고 있었고, 이듬해 5월 17일에는 아예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발동시킨 뒤(5.17 내란) 대한민국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김대중,김종필,김영삼 등등 민주화를 주창하는 정치인들을 연행했다.
이 사이에 국민들은 군사 독재의 재림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고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대규모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신군부의 집권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한편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꾸준히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5월 17일 전국에 계엄령이 확대 조치되고 민주화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저항의 불길을 더욱 키웠고,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앞에 모여 시위를 계속했다.
그런데 광주에 계엄군 공수부대가 내려와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시위대나 무고한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체포했으며, 나중에 가서는 시민들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오히려 그들에게 총을 쏘고 발포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광주 시민들은 이 끔찍한 진압에 광주 MBC에 불을 지르거나 금남로에서 택시, 버스들을 동원해 시위를 벌이는 등 저항했지만 이미 눈이 먼 계엄군의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즈음에 계엄군은 광주를 외부로부터 고립시키고 이 민주화 운동이 '빨갱이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면서 왜곡했고, 너무도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현재 그 사망자와 부상자만 해도 수를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때문에 몇 십년 전까지 이 5.18 민주화 운동의 참극은 진실이 알려지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이라도 진실이 규명되고 있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10.26) 후
최규하가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된다.
최규하는 대한민국의 제 10대
대통령이다.
제 4공화국의 2번째 대통령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이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지
8개월여 만에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79년 12.12 사태
1979년 12월 12일(12.12사태),
전두화,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군사 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주동이 된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국가 권력을 탈취했다.
이어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그들은 거침없이
제 5공화국 수립의 단계를
밟아나갔다.
12.12주역
1980년 5월 17일
'서울의 봄'
대규모 시위 발생 :
신군부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남 → 신군부는 이를
구실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함
1979년 10 · 26 사태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12 · 12 쿠데타 등
불안정한 정국의 추이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국민들은 오랜
유신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주 사회에 대한
희망을 키워 나갔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처에서
민주화의 물결은 봇물 터지듯이
솟구쳤다(서울의 봄).
사람들은 이제는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행보에 신경을 썼으나,
두 사람은 단결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부는 새로운 민주 헌법의 제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이에 학생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이제까지 정부의 태도를 볼 때,
최규하 정부는 민주화 의지가 없다고
단정하였다.
학생들은 5월이 되면서 거리로 나왔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계엄령 하인데도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의 계엄령 전국 확대
대통령에 당선된 지 일주일 만에
12 · 12 쿠데타를 당한 최 대통령은
그 뒤 군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하였다.
전두환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나 집회가 공산주의자의 선전에
말려들어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강력한
군의 힘을 동원하여 막기로 작정하였다.
이러한 군의 요구를 이겨내지 못한
최규하 정부는 5월 17일 그간의
부분 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확대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정치 활동이 정지되었고,
언론 검열이 강화되었다.
또한 김대중과 김종필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체포되었고,
김영삼은 연금되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전국의 각 대학과 주요 도시에는
공수 특전단을 비롯한 군부대가
투입되었다.
12 · 12에 이은 신군부의
제2의 쿠데타였다.
체코의 '프라하의 봄' 이
소련군의 탱크에 짓밟혔듯이
'서울의 봄' 은 신군부의 장갑차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2.12사태와 5.17 비상 계엄이
배경이 된,
5.18 민주화 운동(1980)
청주고졸검정고시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내용입니다.
청주중앙검정고시학원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과 전라 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정 수립,
신군부 세력의 퇴진 등을 요구한
민주화 운동이다.
12·12 사태를 통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중심이
된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 과도 정부를
무력하게 만들고 민주적 정부 수립
일정을 제시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학생 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시위를 계기로
학생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위협을 느낀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투옥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시민들은 집권 세력에 의해 폭도로
매도당한 채 고립된 속에서
군의 잔악한 진압과 학살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적 무장을 갖추고
이후 10일 간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군의 대대적인 폭력 진압으로
민주화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민주회복,대통령 직선제
10.26
부마사태
12.12
서울의 봄
5.17
5.18
4.13호헌조치
6월 항쟁
6.29선언
** 정치적 게시글이 아닌,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글임을 밝힙니다..
첫댓글 격변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