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오씨(咸陽吳氏)시조 오광휘(吳光輝)는 도시조 오첨의 24세손 오현필(보성오씨의 시조)의 넷째 아들이다.시조 오광휘는 고려말에 문과(文科:대과)에 장원급제하고, 상서성 좌복야(左僕射:고려 문종 때 둔 정2품 부총리)를 거쳐, 흥양위상장군(上將軍:정3품)으로 있을때, 삼척 울진지역에 출몰했던 명주적(溟州賊)을 토평한 공으로, 추충정난광국공신에 서훈되어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기에, 보성오씨(寶城吳氏)에서 분관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함양(咸陽)으로 하였다.시조 오광휘 아들 오홍예(吳洪芮)의 손자 오적(吳迪)이 함양군(咸陽君)에 습봉되고, 오적(吳迪)의 증손 오상덕(吳尙德)은 고려말에 소부시소감(少府寺少監:고려 충혜왕 원년에 선공사(繕工司)에 합하였던 내부감을 고쳐 두었던 관직 궁궐의 재정을 담당하고 기물이나 공예품을 제작하는 관청)을 지내고, 조선 개국후에 은퇴하였다.함양(咸陽)은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때는 속함군(速含郡) 또는 함성(含城)이었으며,757년(경덕왕16)에 천령군(天嶺郡)이라 개칭하였으며, 고려초에는 허주(許州)로 개칭하였다.983년(성종2)에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하였으나,1010년(현종1) 함양군으로 개칭하였다.1395년(태조4) 함양군으로 하였으며,1914년 군.면 폐합으로 안의군(安義郡)에 있던 7개 면을 통합해서 함양군으로 합병하였다. 1933년 위성면이 함양면으로 개칭되고 1957년에는 석복면(席卜面)을 함양면에 통합하여 함양읍으로 승격되었다.인구조사에서 함양오씨는 1985년에는 5,354가구 22,158명이었고,2000년에는 8,270가구 26,339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