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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일곱 차례 교통사고
정진석
각종 교통수단이 발달됨에 따라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라졌다. 전국은 물론 세계가 1일 생활권에 들어간 감이 있다. 한편 교통수단이 발달된 오늘은 운명재천(運命在天)이 아닌 운명재차(運命在車)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섯 차례나 교통사고를 겪었다.
첫 번째는 대학 1학년 때인 1973년 봄철에 공주시 장기면 부근에서 당했다. 공주교육대학에 재학 중 주말에 직행버스를 타고 대전 집에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 버스가 도로를 이탈해서 모내기를 한 지 얼마 안 된 성싶은 논 가운데를 돌고 있었다. 농로에서 짐을 잔뜩 실은 덤프가 버스의 옆을 받아친 것이다. 균형을 상실한 버스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를 두 그루나 분지른 후, 도로가 논으로 빠진 것이다. 승객들은 끝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은 실로 책임감이 강한 기사님 덕분에 논바닥을 두 바퀴 반 정도나 돌은 뒤에야 비로소 엔진이 꺼진 버스에서 구두를 벗어 들고 논 가운데에서 논둑으로 나왔다. 이때 피투성이가 된 기사님을 비롯해서 다수의 승객들이 유리 파편에 다쳤다. 그런데 필자는 운전석 쪽 맨뒤에 앉아 자고 있었는데, 아주 운 좋게 하나도 안 다쳤다.
두 번째는 필자가 대전시 괴정동에서 살 무렵인 1991년 여름방학 중 가족들과 시내에 외식하기 위하여 택시를 타고 나들이 나가다가 시내 쪽을 향하여 직진하던 택시가 좌측에서 나오는 1t짜리 타이탄 트럭과 주도권을 다투다가 그만 옆을 툭 치는 바람에 밀려서 인도로 어지럽게 달리다가 급정거했다. 찌그러진 택시 안에서 겁에 질려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때도 요행히 인가 담벽과 부딪치지 않는 바람에 큰 부상을 모면할 수 있었다. 아직 어린애인 작은아들을 빼고 필자와 아내와 큰아들 셋이 교통사고 전문병원에서 X-레이 및 CT 촬영을 했다.
다행히 외상은 크게 없어서 보험회사로부터 약간의 보상과 함께 치료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그후 불과 1∼2개월 후부터 차 타기가 두렵고 날마다 출근길이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의식에 갇혀 몹시 죽음에 대한 걱정에 시달리는 교통사고 후유증을 되게 앓았다. 이 같은 혹독한 후유증이 해소 내지는 극복되기까지는 아마 1년가량이 소요되었던 같다.
세 번째는 1996년 5월 5일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대전시 신탄진쯤 지점에서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났다. 앞에서 달리다가 급정거한 승용차를 필자가 탄 택시가 들어받은 것이다. 정신을 차릴 만하니까, 조금 있다가 다시 뒤차가 치는 것이다. ‘죽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동시에 다른 차에 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잠시 경과 후, 연이어 또 들여받쳤다. 당구공이 부딪히듯 이런 식으로 6중 추돌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기다리고 있었던 양 불과 얼마 안 경과되었는데, 렉카차들이 몰려왔다. 고속도로에서는 연쇄추돌사건이 발생하면 뒤차가 부서진 앞차를 변상해 준다고 한다. 아무튼 혼쭐을 뺀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도 다치지 않았다.
네 번째는 2005년 여름철 밤에 군산에 갔다가 새벽에 돌아서는 길, 졸지에 커브길에서 전봇대에 부딪친 것이다. 졸음운전이 원인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까 본네트에서 연기가 퐁퐁 났다. 마침 길가 경운기를 고치는 카센터 부부가 아침 청소를 하러 나왔다가 이를 발견하고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가 물을 몇 차례 끼얹어 주었다. 소나타 차의 앞부분이 많이 손상되는 통에 가까스로 어렵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역시 약간 몸이 쑤신 것 이외는 외상을 입지 않았다. 이 사고로 소나타를 폐차시키고 중형차인 무쏘를 구입하였다.
다섯 번째는 2005년 12월 4일 초저녁 무렵, 은산면을 지나 규암면으로 접어들어 모리부락 언저리에서 전날에 내린 눈 때문에 생긴 빙판길에서 미끄러진 것이다. 순식간에 중앙선을 넘어서 그리 크지 않은 가로수를 두 그루나 부러뜨리는 바람에 다행히 방향이 180도 가까이 오른쪽으로 바뀌어 극적으로 논바닥에 그대로 곤두박질치지 않고 도로 위쪽을 향하여 업히듯 선 것이다. 또한 정말 운이 좋게도 도랑물이 넘쳐 들어오지 않게 하우스 옆을 가리고자 블럭담을 쌓아둔 곳에 뒷부분 범퍼가 걸쳐 얹힌 것이다. 이때 만일 도로 위에서 논바닥에 떨어져 곤두박질쳤거나 뒹굴어 쓰러졌거나 뒤로 발랑 뒤집어 넘어졌을 경우에는 크게 부상 또는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튼실한 무쏘차, 그리고 범퍼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여섯 번째는 2009년 9월 16일 퇴근 후, 구룡면 구봉리 농로를 달리게 되었다. 길을 잘못 들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T자형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경우였다. 후진을 하는데, 경사로 인하여 차체가 무거운 무쏘가 브레이크에 상관없이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악세레이터를 밟으면 앞으로 경사진 시멘트 부분을 차고 올라갈 것으로 오판한 나머지 사정없이 밟았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어이없게도 그냥 논으로 쑤셔 박히다시피 빠진 것이다. 기어가 후진 상태에서 악세레이터를 밟았으니, 차가 뒤로 갈 수밖에. 천만다행하게 비닐하우스 끝부분 지지용 쇠파이프에 걸리는 바람에 논둑 콩밭에 걸친 것이다. 렉카차가 꽤 시간을 허비하면서 간신히 길 위로 끌어올렸다. 이럴 경우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브레이크를 최대한 힘줘서 밟고 버티는 상태에서 전진기어로 바꾸고 악세레이터를 밟거나 4륜을 놓고 시도했으면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 여섯 번째는 순전히 운전 미숙이 그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곱 번째는 2010년 겨울철 눈이 온 날 아침, 부여군 홍산면 소재 부여산업과학고등학교를 향하여 출근길에 빙판이 진 도로에서 미끄러졌다. 이때는 예전에 빙판에서 사고를 겪은 경험을 살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부러 암벽 쪽이 아닌 중앙분리대에 살짝 부딪혀서 멈춰 서는 통에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세 차례는 타인의 부주의 탓으로 교통사고를 당한 셈이고, 네 차례는 필자의 부주의로 인하여 교통사고를 낸 셈이다. 곧 후자에 있어서 네 번째는 졸음운전 탓이요, 다섯 번째는 빙판 부주의 탓이요, 여섯 번째는 후진 운전미숙 탓이요, 일곱 번째 역시 빙판 부주의 탓이었다.
이처럼 필자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나 교통사고를 당하고 또 저지른 꼴이다. 이렇게 무려 일곱 차례나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신체상 아무런 탈이 없는 필자를 보고 지인들 중에는 '불사조(不死鳥)'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다.
더욱이 필자의 과실로 일으킨 차량 사고시 요행히 네 차례 다 공통적으로 인명 피해를 내지 않은 것을 기적 같은 행운이자 큰복으로 여기고 있다.
필자는 2001년 1월에사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늦깎발이로 당시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자동차운전면허증을 취득하였다. 그리고도 꽤 망서리고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2004년 10월 1일에 운전대를 처음 잡았다. 원래 겁도 많지만 젊은 시절에는 술을 먹었기에 스스로 운전석에 앉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운전을 배우지 않았다.
비록 운전을 배운 지는 필자의 나이로 보나 남들에 비해서 비교적 짧은 경력밖에 안 되지만, 퇴근 후나 주말에 워낙 장거리를 자주 달린 통에 주행거리로 치면 주로 출퇴근만 하는 분들이 한 15∼20년 이상쯤에 해당되는 거리를 겁 없이 달리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아직까지 운좋게 인명 피해를 내지 않았다. 또한 개나 고양이 따위 표가 나는 짐승을 죽이지 않으려고 힘쓴 결과, 단 한 마리도 죽이지 않은 것을 작은 자긍심과 위안으로 삼고 있다.
참고적으로 몇 차례에 걸친 필자의 과실 내지는 과오 때문에 저지른 교통사고시 보험 혜택을 통하여 보험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정평이 나있는 보험회사에 가입하는 것이 좋을 성싶다. 특히 우리 선인들의 말씀인즉, '싼 게 비지떡이다.'는 가르침을 깊이 음미해봄직하다. 곧 애초 자동차종합보험 가입시 보험회사가 재정상 튼실한 곳에 가입해야 여러모로 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거니와 결국 손해를 덜 본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긴 다소 보험료가 싼 보험회사의 경우, 가입 당시에는 기분이 좋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만일 사고시에는 아쉬움과 후회가 막심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통감되지 않나 싶다. 대체로 재정이 열악한 보험회사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통고해도 유사시 사고처리담당자가 사고 현장에 도착하는 시각이 더디고 설령 출동했다고 해도 큰 보험회사 소속 직원에 견줄 때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협상 과정에서 퍽 불리한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심지어 영세보험회사는 인력이 전폭적으로 달리니까 출동조차 하지 않은 채 사고 처리 비전문가인 렉카 운전자에게 사고 현장 사진 촬영 및 사고 경위 등 기초조사까지 위탁하는 매우 안타까운 실정이다. 더욱이 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그 바쁜 진행중에 공연히 사무실에 앉아서 주책없이 도움도 안 되는 전화만 빈번하게 하는 통에 혼자서 관련 일을 도맡아 감당해야 할 렉카 운전자가 부득이 전화도 받아야 하기에 일의 맥이 중간 중간 끊기고 이로 말미암아 고객이 신경질이 날 만큼 견인을 비롯한 사고 수습이 자연히 더디어지기 일쑤다.
그리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해서 종합보험 이외에 꼭 운전자보험도 하나쯤 들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필연성도 새삼 느꼈다.
혹 이 글을 읽는 지인이나 애독자들한테 작은 보탬이 될까 싶어서 주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교통사고를 처리하면서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귀띔한다.
1.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에는 아주 큰사고가 아닌 경미한 사고일 경우에는 최대한 경찰서에는 알리지 않고 보험사와 상대방과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므로 상황에 맞게 잘 판단해서 처리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2. 교통사고 당시 서로가 경황이 없어도 반드시 챙겨야 할 사항이 있다고 한다. 곧 상대방의 성명과 주소는 필수사항이며, 추가로 주민번호와 면허증번호를 메모해 두면 차후 만약을 대비해 퍽 유용하다고 한다. 그것은 심성이 고약한 사람을 만나 상호간에 합의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사전에 인적 사항을 파악해 두지 않으면 공탁을 추진하기에 매우 난감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쌍방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공탁을 해야 하는데, 요즈음 개인정보 강화 때문에 이런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갖추지 못할 경우, 공탁조차 걸지 못할 악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고 한다.
3. 또한 자동차보험도 통상 종합보험에서 자기신체사고로 보험을 드는데, 자기신체사고보다는 보험료 3∼4만원쯤 더 들어도 자동차상해로 특약가입해 두어야 자기차량에 동승한 자기 가족들 모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각자 한번쯤 확인하고 필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성싶다.덧붙여 고백컨대, 개인적으로 우리네 인생살이가 그러하듯 운전시 후진은 전진보다 몇 갑절 훨씬 어려우며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참, 아주 중요한 것을 깜박할 뻔했다. 운전자 개인의 부주의나 운전 미숙 때문에 일으킨 경미한 사건일 경우, 보험회사측에는 도움을 요청해도 가능하면 경찰의 신세를 지지 않는 것이 퍽 유리하고 최선이라고 한다. 이 밖에 설령 차와 차끼리 접촉이나 충돌 또는 추돌 따위로 인하여 양자간 갈등시에도 대형사고가 아니라면 되도록 쌍방합의하에 서로 손해를 보는 심정으로 양보하는 것이 대단히 슬기롭고 현명한 처세라는 것이 교통사고 체험운전자들의 중론인 것 같다. 그것은 오늘날 되발아진 현대인들이 예전과 같이 경찰의 말을 듣지도 않고 또한 신뢰하지도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경찰의 중재로 좀처럼 원활하게 성립되지 않거니와 공연히 범칙금과 벌점만 가중되기 일쑤라고 한다.
그렇다. 운전은 무엇보다 안전운전이 최고이고 최선책일 것이다. 이 순간순간 앗찔앗찔한 운명재차(運命在車)의 연대기에 오늘날까지도 별 탈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필자의 운전 실력 덕분만이 아닌 성싶다. 아니, 확실히 그렇게 믿고 있다. 사실 그간 아슬아슬했던 위기 상황을 여러 차례나 넘긴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그동안 퇴근 후의 주행시, 특히 야간 운행시나 장거리 주행시에는 대개 옆자리인 조수석에 앉아준 분의 공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 밖에도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운전자들의 기가 막힐 만큼 아주 잘 하는 솜씨 및 서로 양보하고 배려해 준 덕택이지 싶다. 실로 우리 고장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알게 모르게 수많은 낯모르는 분들로부터 운행 과정상 도움을 톡톡히 받은 덕택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어떤 분의 경우, 거의 예술에 가깝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의 빼어난 운전 실력으로 위기상황에 처한 필자를 여러 차례나 감싸준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를 고맙게 여기면서 운행시 빚을 갚는 의미에서 초보자나 필자보다 미숙한 운전자들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데 힘쓰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재 거리에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 운전이란 아주 짧은 한 찰나에 의해서 생사가 뒤바뀔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시동을 걸기 전에 키를 꽂으면서 수시로 이를 다시 한 번 뇌리에 새기고 안전운행을 다짐하며 항상 겸허한 자세로 교통법규에 순응하는 가운데 안전속도 및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운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하늘에서 필자를, 우리들을 지켜봐 주시는 신께, 아울러 더불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에게 두루 감사함을 새삼 느껴 본다.
이제까지 아주 맛있게 먹은 음식들
사람한테 먹는 것은 우리가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해 나감에 있어서 기본사항이자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음식이란 사람마다 식성과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또한 같은 음식이라도 조리자나 제공자, 허기의 정도 및 식사 장소의 주변 환경과 그날 구성원의 분위기에 따라, 혹은 주인이나 종업원의 매너에 따라 식욕의 강도와 감미로운 맛깔 음미의 척도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노름이나 투기 또는 허영이나 사치를 부려야 망하는 것이지, 적어도 먹어서 망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비록 미식가는 아니지만, 외식을 퍽 즐기는 편이며, 곧잘 맛찾아 음식 탐색길에 나서곤 한다.
현재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음식을 먹어 왔다. 그 가운데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다시 먹어보고 싶은 눈에 삼삼한 음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선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유난히 국수를 비롯한 밀가루 음식을 즐겼던 필자를 위하여 퍼지지 않게 정성껏 삶아주면 한 양푼씩 맛있게 먹었던 국수의 맛을 영 잊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 6〜7살 때, 가난한 마부 아버지께서 대전시 성모병원과 병참학교 언저리 명정로에서 사주시곤 했던 반 그릇짜리 보신탕 맛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꼽을 수 있는 것은 대전대흥초등학교 6학년 무렵, 외갓집 김제 부량면 금강리 365번지 후포부락 백산이모님께서 김치와 콩나물을 넣어 해주신 콩나물볶음밥이 정말 꿀맛이었다.
또 대전시 문화동 천근방죽 근처에서 한 쪽 다리를 저시며 오는 묵장수 할머니의 도토리묵, 대흥동 떡장수 아주머니의 이튿날 또 먹고 싶던 겁나게 맛났던 고명떡은 아직까지도 입맛이 다셔진다.
이외에도 초등학교 상급학년 시절에는 대전중앙시장 노상에서 배추껍데기를 넣고 끓인 5원짜리 수제비를 일삼아 사먹곤 다녔다. 또 대전시 옛전신전화국 부근 대흥동 <대흥칼국수집>의 새곰달작지근한 깍두기 곁들여 먹은 칼국수도 무척 맛있었다.
중학교 1학년 무렵, 처음 나왔을 당시 국물에 밥 말아 먹은 삼양라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교 시절, 소낙비가 좍좍 억수로 쏟아지던 상황 아래 운동장에서 팬티 차림으로 농구를 한 후, 충남공고 전기과 급우들과 함께 학교 앞 중화요리집에서 먹었던 한기를 싹 가시게 할 정도로 뜨거운 우동 한 그릇 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대학 졸업 후, 첫사랑 실연기에 친구 이상진이 사준 대전시 선화동 얼큰하고 칼칼한 선지국밥, 그리고 대흥동성당 부근 <마도로스집>의 벌건 고추장에 버무린 양념두부를 얹은 얼얼한 칼국수는 맛이 제법 있었다.
1975년쯤 문학스승 韓性祺 시인님과 둘이 먹은 유성우체국 뒤편 <한흥집>의 순대국밥은 진짜 맛있었다.
1979년 초임지 첫직원여행길 제주항 부둣가 음식점에서 하도 맛있어 전날밤 마신 술이 덜 깬 상태에서 객기를 부리다가 그만 아슬아슬하게 카페리호를 놓치는 통에 아주 고생하게끔 만든 육개장이 있다. 또 누가 빚어준 왕만두국도 추억 속 음식의 하나로 빼놓을 수 없다.
1986년 태안고 재직 시절, 태안읍사무소 입구 <광탄집>에서 이강로 선생님이나 이만규 시인과 어울려 막걸리를 곁들여 먹은 돼지갈비는 별미였다.
1988년 공주여고 재직 시절, 황명주 선생님을 비롯한 동료교직원들과 시내 어느 한식집에서 먹은 간고등어구이백반 맛을 영 못 잊고 있다.
1989년 충남교육연구원 파견 근무시, 서산 어느 학교 출장길에 서산교육청 장학사 몇 분과 시내 어느 음식점에서 먹은 새조개가 참 맛있었다.
1995년 강경상고 재직 시절, 전주 덕진공원 앞 전주비빕밥, 1996년 방랑길 여행중 남원 춘향터널 부근 <춘향기사식당>(주인 : 신명희)에서 베푼 덕분에 장거리 보행 탓으로 몹시 지쳐 있었으며 더욱이 두 끼를 굶은 허기진 상태에서 얻어먹은 백반 한 그릇의 그 꿀맛과 또 이 무렵 여행중 임실 읍내 어느 주막집에서 무공해인물 심광만(임실군청 직원) 씨가 순정으로 사준 돼지고기찌개백반이 가슴에 새겨져 있다.
1997년 논산시 대교 다리 근처 <대교야식>의 시래기와 통감자를 넣고 자갈자갈 끓인 감자탕도 꽤 먹을 만했다.
1999년 예산전자공고 재직 시절, 덕산 <동치미냉면집>의 국물까지 다 먹어지는 동치미냉면, 예산 <곰례네>의 개고기 수육 등이 맛깔스러웠다. 이 무렵, 故 장문환 시인님이 예산 읍내 어느 중화요리집에서 사주신 잡탕밥의 맛을 못잊어 그 대신 지금도 간혹 부여군 홍산면 <도성각>에 가서 잡탕밥을 찾곤 한다.
2003년 예산여고 재직 시절, 대술면 묵집의 입에 살살 녹아드는 정말 시원한 묵탕밥, 예당저수지 <대흥식당>의 민물새우를 넣고 팔팔 끓인 어죽, 수덕사 언저리 <자연식당>의 맛난 산채정식, 예산읍 장터 부근 <서울닭강정집>의 얼얼하게 맛깔스런 닭강정 등이 기억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005년 이곳 부여에 이사 온 첫해, 종업원들을 관리하기에 바쁜 작은누나가 손수 쩌 가지고 대전에서 달려오곤 했던 유년기 향수어린 쑥개떡에는 뭉클한 형제애가 흥건히 배어 있었다. 이 무렵, 작은아들 용수와 둘이서 먹은 궁남지 부근 <오리마당>의 정갈하고도 노릿노릿하며 담백하고도 구수름한 맛이 돌았던 오리훈제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 해 태안에 들렸다가 돌아오는 길, 서산시 해미면 <우리들교회> 박종용 목사님의 부인 전영월 사모님이 해주신 겉절이가 곁들어진 청국장백반은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을 참꿀맛으로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후, 부여시낭송회 초대사무국장 박종학 소설가와의 동행으로 논산역 부근 어느 허름한 간이음식점에서 먹은 국물이 끝내주던 동태찌개백반, 부여읍 동남리 동남아파트 맞은편 <벌교식당>에서 우리나라 전통적인 아낙네의 특출난 손맛이 그대로 우러나는 청국장찌개백반과 갈치조림백반, 백마강가 <장원막국수> 집의 가느다란 면발이 구미를 돋우는 막국수 등이 상당히 맛있었다. 특히 부모님의 성묫길에 강경읍 변두리 중화요리집<대만원>의 독특한 쇼스로 버무린 탕수육이 구미에 척척 당겼다.
여러 해 전, 여행길에 우연히 홍성군 광천역 앞 <명가>에서 한번쯤 먹어봄직한 섞어냉면도 발견했다.
끝으로 아이들의 소풍날이면 으레 새벽에 일어나 온 정성을 다 들여 예쁘게 싸주고 남은 아내의 김밥 맛은 최상의 일품이다. 특히 운전할 때 조수석에서 건네주는 김밥은 별미였다.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빚은 사람이라든가 음식점 중에는 현존하지 않는 주인공이나 식당이 다수이기에 못내 그립고 아쉽기 그지없다.
이 밖에도 남들이 맛있다는 것, 소문난 집 들을 헤아릴 수 없이 기웃거려 보았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음식은 한 마디로 정성(精誠)을 쏟은 것이 최고 맛깔스런 법이다.
사람은 음식을 함께 먹는 데서 정(情)이 붙기 마련이다. 물론 음식은 어떤 것을 먹느냐도 무시할 순 없지만, 무엇보다 무슨 음식을 먹든 좋아하고 정겨우며 사랑스런 사람과 더불어 서로 더 먹으라고 권하면서 오순도순 둘러앉아 먹었을 때 가장 맛깔스런 것이 아닌가 싶다.
각자 세상에서 으뜸으로 소중한 가족들과 미각을 잃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하나라도 더 함께 식사를 하면서 아름다운 낭만과 향기로운 추억을 쌓아둘 필요와 가치가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과연 어디 가면 또 오래 잊혀지지 않을 만큼 맛깔스런 음식을 맛볼 수 있을까?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보릿고개 시절인 60년대 궁핍한 어머니께서 끓여 주셨던 우거지를 사정없이 넣고서 아마 양을 늘리려고 물을 잔뜩 붓고 팍팍 끓인 탓에 짓퍼졌을망정 입천장이 델 정도로 뜨끈뜨끈하고 얼큰하게 맛깔스럽던 물칼국수라든가 수제비나 마른국수 한 그릇이 간절하게 생각난다.
정신적인 本鄕, 文學의 마을을 되찾아 가는 길
아, 필자도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먹고 말았구나. 아무래도 자녀나 제자들한테 학구적인 면이나 사회적 신분상을 통한 모범을 보이는 쪽은 지나가버린 것도 같다. 어쩌면 이제부터는 필자의 비전이나 발전에 주력하는 쪽보다는 청출어람(靑出於藍)에 기대를 거는 겸허한 자세로 필자의 2세들과 제자들을 더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할 연륜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필자도 가정에서는 모범적인 가장, 자상한 남편, 사랑스런 아이들의 앞날을 정성껏 밝혀 주는 좋은 아빠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야 할 것이다. 동시에 학교에서는 한 명이라도 더 가정적인 결함이 있다거나 크고 작은 일들로 마음이 아픈 제자를 찾아 가까이 다가가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는 교사가 되고자 좀 더 힘써 나가야 함이 온당할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꿈의 설정과정에서 지난날 필자와 같거나 비슷한 처지에 봉착해서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 학생, 그리고 가정 환경적인 면에서 불행한 학생 등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발견해서 그들의 마음 벗이 되어 주고 싶다. 한낱 보잘 것 없는 평교사로 마무리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명교사에 불과하지만, 교단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교직을 천직으로 믿고 그야말로 어린 가슴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하면서 겨우내 얼어 죽지 않고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불우한 학생들을 얼싸안고 함께 울어 주고 손목을 꼬옥 한 번 잡아 주고 어깨를 붙들어 주고 등을 두드려 주고 함께 웃어 주는 친구 같은 선생님, 다정다감하고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선생님, 방황하고 흔들리는 학생들의 고민을 그대로 들어 주고 다독거려 주고 비밀을 지켜 주는 신부님 같은 선생님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앞으로 학생들한테 밤길의 나침반 구실을 하는 북극성, 새벽을 알리는 샛별, 목마른 심마니들의 생명수가 되는 돌샘 약수, 마을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정자나무 따위와 같은 존재로서 마냥 위안이 될 수 있는 덕사(德師)가 되도록 가다듬어 나가고자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필자는 정열과 욕망 속에 지쳐버린 나그네가 되어 시골 도련곁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부단히 마음 비우기 연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변두리 면 소재지에 아담한 꽃동산을 임시로 마련하고, 틈나는 대로 아직도 비가 한 번만 내리면 또 다시 헝클어지는 마음밭의 어수선하게 무성한 잡초를 뽑고 뽑으면서 스스로 감고 헹구고 빗질하고 행주질하고 다독거리고 추스르고 있다. 또한 퇴근 후에는 날마다 한두 시간씩 울안의 꽃밭에 수없이 솟구친 잡초들을 솎아내면서 지내고 있다. 작은 화원에 올망졸망 총총히 심은 각종 풍신난 꽃과 나무들을 바라보며 돌보는 쏠쏠한 재미에 고부라지게 맛들려서…
돌이켜 보건대, 필자는 감성적인 두뇌를 가지고 섣불리 논리적이고 이지적인 세계인 학문의 길로 발을 잘못 들여 놓는 통에 허욕과 허깨비에 홀려 헤매느라고 오직 한 번뿐인 귀중한 인생을 필자만의 본향(本鄕)인 문학(文學)에서 많이 벗어나 헛살아온 것만 같다. 수시로 자아성찰적인 자세와 집요한 극기 정신으로 매사 뜨겁게 사랑하고 진실로 성실하고 근면하며, 알뜰하고 야무지고 암팡지고 옹골차게 살아오지 않은 큰죄값 치고는 처절하게 달기만 하다.
이제 필자의 정신적인 본향(本鄕), 즉 파라다이스인 문학(文學)의 마을을 향하여 더 저물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본연의 제 길로 귀도(歸道)하고자 훨씬 멀고 돌아서 가야 하는 유유하고 평탄한 들길이 아닌, 질러갈 수 있는 샛길 코스인 험준하고 가파른 산정을 넘느라고 헉헉거리면서 외도(시 쓰기보다 학계로 들어섬)했던 두 갈래 길목에서 너무 멀리 빗겨 떠나와 있기에 마치 집 없는 달팽이마냥 가물거리는 기억을 이리저리 더듬어 가며 되찾아 가고 있는 중이다.
필자의 미래의 삶은 가노소롬한 농장이나 하나 장만해 놓고, 이 찬란하고 화려한 꽃시대에 소외당하고 밀려난 꽃나무나 돌보면서 좀 더 겸허하고 너그럽고 부지런하고 매사 착실하도록 갈무리해 나가고자 한다.
실상 필자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필자가 잘 되기를 지켜봐 주신 분들께 빚만 겁나게 진 채무자 인생이다. 도로 갚을 때가 되었건만, 가진 것이 없는 가난뱅이일 뿐이다. 한 마디로 부모님과 형제들을 위시한 혈육, 그리고 여러 친구들 및 주위 친지들께서 거들어 주신 인덕(人德) 하나로 근근한 가운데서나마 행복하게 연명해 온 삶인데, 이 수없이 고마운 분들의 사랑과 보시를 보답할 길이 묘연하기만 하다. 어쩔 도리 없다. 아낌없이 베풀어 주신 고운이들로부터 받은 갖가지 묵은 사랑빚 대신 가치 있는 좋은 시를 빚고 예쁘고 향내 나는 꽃나무를 가꾸어 씨렁덩 돌리고 싶다. 그리고 욕심 같아서는 이 은인 분들을 1년에 한두 차례씩 필자가 가꾸어나갈 이 이상적인 꿈의 화원 <龍山樂園>으로 초대해 詩와 꽃의 잔치를 열고 싶다.
필자의 생애에 있어서 이 같은 마지막 목표를 말년에 실현해 보고자, 지금 참신한 시상을 하늘과 산과 강과 들과 샘에서 끊임없이 타레박질로 건져 올리고 있는 한편, 꽃과 나무의 세계에 관한 서적들을 뒤적거려 보면서 각종 나무들의 어린 묘목들을 키우고 아울러 실험 삼아 꺾꽂이, 접붙이기, 휘묻이, 포기나누기 등 짬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시도해 보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남은 나날들은 “훈훈한 인정과 올곧은 양심을 가지고 매사 성심성의껏 최후 순간까지 최선을 다 하자.”는 좌우명 아래, 보다 값지게 알알이 수놓아 나감으로써 문학사에 남을 만한 시 두세 편과 국문학계에 작은 보탬이 될 만한 논문 한두 편 쓰고 말리라. 그리하여 스승님께서 고상하게 빚으신 인품과 드높이 쌓아 놓으신 학문탑의 밑 언저리나마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 보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자아성찰적인 자세를 묵묵히 견지해 나갈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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