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체험과 백지혈인
내가 스물한살이었을 때, 나는 전국 30여개 본말사를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중이 되기 위해 스승을 찾고 있었다. 이듬해 사월초파일 날, 부산 영도 어느 보살 절에서 연등을 달러온 한 원불교 교도에게 원불교 소식을 듣고 바로 익산으로 향하였다.
황당한 삼생 인과 설화, 신이한 불사 이야기에 질렸던 판이라 시대에 맞고 대중화된 생활종교라는 원불교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 호남선 열차 속에서 마주 앉은 승객이 이리에 산다기에 원불교에 대해 물었다. 그가 이리 재산 절반이 원불교 거라고 말하였다. 이야, 거기 가면 땡잡겠구나. 나는 내심 기대하는 바가 컸다. 이리역에 내려 묻고 물어 원불교를 찾아간 곳은 갈산동 적산가옥 이리지부였다. 법당 불단에 일원상을 봉안하고 양쪽 기둥 아취에 연화 장식을 한 것이 퍽 호감이 갔다. 불단 아래 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 중년의 여교무 박제권 선생은 동산선원을 소개하였다.
동산동 야트막한 산마루에 자리잡은 동산선원은 일제 신사를 불하받은 것이었다. 내가 거기에서 만난 분은 선원 교사 신도형 선생이다. 퉁퉁한 체구에 삭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그는 영낙없는 대처승이라는 인상이었다. 그의 방의 앉은뱅이 책상에 중학생의 교과서가 꽂혀있고 그가 동전을 단 저고리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른다.
신도형 선생한테 원불교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백지 혈인 이야기였다. 종교라는 것이 한결같이 늘어놓는 이야기란 신이한 그 무엇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에 내심 나는 ‘이 또한 기성의 노대 종교와 마찬가지로구나’ 매우 실망하였다. 왜냐하면 백지 혈인 등등 신통 이적 현상은 우리 보통사람들이 도무지 미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은 도를 이루었네 하면 단박 어떤 신이한 현상, 남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월말통신> 5호에 이런 법문이 소개되었다.
한 사람이 금강산에 다녀와서 참 도인을 만났다고 자랑한다. 날아가는 까마귀를 이리 오너라 하면 그 도인의 손에 와 앉고 독한 뱀을 몸에 휘감고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종사는
“그 사람은 참 도인이 아니다. 까마귀와 뱀과 친근하니 그와 같은 류가 아닌가?”
하고 핀잔을 주었다.
‘참 도인 앞에서는 까마귀와 뱀이 무서워하며 달아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대종사 봉래정사 계실 때의 통장수 이야기를 하였다.
통장수가 실상동에 와서 어느 집에서 통매기를 시작하였다. 여러 사람이 구경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한참 동안 통매는 것을 보다가
“여보, 통장수! 통을 매려거든 통꼭지나 옳게 박으시오”
하니 통장수가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손을 덜덜 떨며 매어놓았던 통까지 도로 와해되어버리고
결국은 그 통을 매지 못하고 달아났다. 알고보니 그 통장수는 통을 맬 줄 모르는 사람이 처음으로 장사를 나온 자요, 통꼭지나 박으라고 말하던 그 사람이 통매는 데 상수였다.
그와 같이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모르는 것이거늘 도인이 아니고 어찌 도인의 깊은 뜻을 알겠는가. 뱀은 저희 구렁이들끼리, 까마귀는 저희 까마귀 떼끼리 어울리는 것이 순리이듯이 도깨비는 모든 사람들이 곤히 잠자는 밤에 설쳐야 제 격이다.
예나 지금이나 낮도깨비가 활개치고 설치는 것은 똑같다. 제대로 도 공부를 하지 않고 도통을 꿈꾸는 도깨비, 노력 없이 거짓말을 하여 성공을 바라는 도깨비, 준비 없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깨비, 돈과 권력을 최고라 여기며 힘센 것에 빌붙어 자기 출세를 도모하며 사대주의적 근성으로 대도를 기만하는 도깨비들이 판치는 세상이 낮도깨비 세상이다.
허위의식이 팽배하는 사회일수록 신통을 바라는 도깨비들이 득세한다. 요즘 도청사건으로 정치권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점차 인지가 밝아지면서 기득권을 누리는 도깨비들은 연일 속속 그들의 마각이 드러나는 일로 좌불안석이다. 세상이 밝아지면 화로 위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 도깨비들의 한계이다. 우리들은 이 도깨비의 장난에 휘둘려서 안 된다.
大明世界란 인도정의의 요긴한 법만이 세상에 서게 되는 세상이다. 대명세계의 신통 묘용은 因果로서 작용한다. 문제는 신통묘술로 어리석은 인간들을 유혹하는 도깨비들이다. 도깨비장난인 이 신통묘술은 법 아닌 것이다. 대도가 아닌 비법이다.
대종사는 신통 묘술을 크게 끄렸다. 신통묘술을 大賊(큰도둑놈)이라 하였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묘술을 道術이라 하지 아니하고 雜術이라 하는 것이다.
송적벽과 김남천은 강증산의 제자였다.
기미년 만세운동 때, 대종사가 금산사에 가서 실진한 스님을 살린 일로 생불님으로 소문이 나자 일본경찰이 민심이 소요될 것을 우려하여 대종사를 구금하였다. 뒤늦게 이 소식을 안 송적벽과 김남천은 대종사께 찾아와 증산천사께서 예언하셨다며 그를 증산 天師님의 환생으로 알고 따른다. 그러나 대종사 변산에 들어가서 마음을 관하고 인도정의의 가르침만 베풀 뿐 신통묘술의 지상선경을 도모하는 행이 없자 송적벽은 실망하여 돌아가고, 김남천은 성리 공부에 재미를 붙여 일생을 대종사 문하에서 수행 정진한다.
이씨 조선이 망하자 사이비 종교들이 판을 쳤다. 새로운 왕국을 만든다며 차천자, 조천자, 안천자, 김천자가 나와 가지고
돈의 액수에 따라 방주라 하여 3정승 6판승 도백까지 벼슬을 주었다.
오늘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백지혈인 등 신통이적에 관심 많으면 정법수행 공부를 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며 법인체험과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이다.
대종사의 신통이적 일화가 많이 전한다. 여기서 신통 이적은 본인의 믿음의 소치이지 외부의 어떤 불가사의한 위력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의 조화라는 것이다.
처사 양반이 도통을 한지 한달쯤 지났을 때였다. 보라타작 때인데 장촌댁이 초학(말라리아)에 걸렸다. 두질 세질을 하고 갈수록 증세가 고약하였다. 남편이 담배를 피우다가 부인에게 연기를 훅 내뿜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로부터 장촌댁은 병이 말끔해졌다. (장촌댁은 대사모님, 그의 남편 처사양반은 대종사이다) 머리가 아플 때는 남편이 이마에 손을 짚어주자 말끔히 개였고, 배가 아플 땐 토끼 똥을 먹으라고 하여 그대로 했더니 나았다.(박광진; 대종사의 막내아들의 증언)
장촌댁은, 남편이 아플 때(覺前)에는 허물이 없어 대하기가 수월했는데 병이 낫고부터(覺後)는 내외간이라기보다 오히려 선생으로 모시는 입장이 되었다. 이후 장촌댁은 남편에게 불평 한 마디 없고 위대한 양반으로 알고 시키는 대로 하게 되었다. 두 분은 내외간의 아기자기한 재미없이 지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
초량교도 김응원은 젊어서 남편을 잃은 뒤 3남 3녀 키우는 재미로 시름을 놓고 살았다. 막내딸이 시집 갈 준비를 다해놓고 열병으로 급사하였다. 김응원은 그 충격으로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가족들이 올리는 약사발도 집어 던지고 애통 속에 날을 보냈다. 생불님 왔다는 소문에 16세의 질녀 양남근의 등에 업혀 하단지부에 찾아갔다. 생불이란 분이 법문을 설하고 있었다. 생불님은 하늘대왕군처럼 엄청 덩치가 커고 얼굴에 빛이 번쩍번쩍났다. 대종사 목소리가 금목성이다. 대종사 법문이 가슴을 쾅쾅 쳤다.
“인간의 일은 강약이 서로 관계하고, 선악의 짓는 바에 따라 진급과 강급, 상생 상극의 과보가 있게 되니 이것이 곧 인과보응의 원리이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자기가 짓고 자기 받게 되는 것이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죄도 복도 모두가 다 자기가 지은 대로 받게 되는 것이다”
김응원은 모든 것이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인데 공연스레 제 혼자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하고 성질내고 지랄 뜬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인과 법문을 듣고 김응원은 마음속에 기쁨이 우러났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오그라졌던 다리가 펴진 것이다. 김응원은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초량교도 김응원)
한 할머니가 다급하게 조실에 달려와서 숨넘어가는 소리를 했다. 손자가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굴며 방금 죽게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사님께서 오시면 살 수 있다는 거였다.
“어시, 그런 소리하지 마라”
아무리 간청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요망 떤다. 내사 두라” 그러더니
“호박잎을 따다 배에 붙이라”고 일렀다.
나중에 할머니가 와
“종사님 덕분에 우리 손자 병이 나았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의사간디. 호박 잎이 나사줬지.
어서 병원에나 데리고 가거라”
“그래도 종사님의 신통력 덕분에…”
어쩌고저쩌고 치사를 하자 대종사는 더럭 언성을 높였다.
“요망스럽다!
내가 부처되는 공부를 가르치지 어디 요술을 부린단 말이냐!”(황정신행)
내가 이 이야기를 팔타원 황정신행에게서 들었다. 팔타원은 장안에서 여섯 번째 가는 큰부자이다. 동선 때가 되면 익산총부로 훈련 나러 왔다. 황정신행은 겨울철이 되면 인후증이 도져 동선중에 목이 아파 고생을 하였더니 옆에서 “종사님, 잡수시고 난 간장을 먹으면 낫는다”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진지상이 물러나오길 기다렸다가 간장 종지채로 마셨다. 저녁 야회 때 선방에서 대중을 앞에 놓고 종사님께서 이런 말을 하였다.
“전라도 간장은 짜서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는 것인디, 여기 중에 어떤 사람은 종지채로 마신 사람이 있다. 그런 멍청한 사람이 어디 있냐”
“그래도 병이 나았는데요 뭐”
황정신행이 궁시렁거리자 대종사 나무래었다.
“그런 소리하지 마라”
“사실인데 뭐 그려셔요”
“내가 고쳤간디. 간장이 고쳤지”
“다른 간장을 먹으면 그대론 걸요”
“요망한 소리한다”(황정신행)
양하운 대사모가 병으로 고생하였다. 이 소식을 고하자 조실에서 일러주었다.
“황토를 물에 풀어서 훌훌 마시거라”
처방대로 행하였더니 양하운의 병이 나았다.(황정신행)
정성숙이 독감을 앓아누워 있었다. 대종사가 이마를 짚어주며 말하였다
“이마가 참 단단하구나.
신심만 있으면 쉽게 나을 것이다”
잠시 후 정성숙은 이마가 시원해졌다.(정성숙)
대종사는 말하였다. “병을 낫게 한 것은 너의 믿음이다.”
‘엄마는 약손이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엄마를 믿기 때문에 엄마의 사랑으로 아픈 배가 나았던 것이다. 도는 물 긷고 빨래하는 것처럼 평상심이다. 도는 폼 잡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에서 도를 본다.
김중묵이 총부 산업부에 근무하였다. 종사님은 걸음도 빨리 걸으시고 부채질도 마구 부치시고 걸핏하면 제자들 혼을 내고 종사님은 무서웠고 훌륭한 어른으로 안 보였다. 영산님도 사산님도 다 뚱뚱하여 종사님과 같이 보였다. 서대원 선생은 모든 행을 선적으로 하고 범연하지 않았다. 서대원 선생은 목청이 좋고 유창하게 글을 새기는 것이나 걸어가거나 부채질하는 것이 한가하고 일심을 챙기는 것 같아 도인다워 보였다. 종사님은 욕심 많은 늙은이 같고 서대원 선생이 더 위대한 어른으로 알았다. 김중묵은 내심 서대원 선생을 인격적으로 의지했다. 대원 선생이 절에 들어가 버리자 중묵은 맘이 허퉁하여 의지할 데가 없었다. 대체 절에 가서 참선 공부를 해야 견성을 하지, 절에 가서 수양 위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장 쫓아가고 싶었다. 충청도 어디에 있다고 하는데 행방을 몰랐다. 대원 선생이 한번 왔다. 얼마나 좋은지… 하루는 세탁소에서 도배를 하고 있는 판인데 “중묵아” 하고 부른다. 종사님이었다.
“네 이놈, 여기 누가 제일 도가 장하다는 생각이 드느냐?”
중묵은 종사님한테 맘이 안 갔다. 그렇지만 어디 안 그런다고 하겠어.
“종사님이셔요”
“뗏기놈, 나는 내비리두고. 누가 나무래냐?”
“저 서대원선생이 젤 도인으로 보입니다”
그런게 아무 말도 안 하고 가셔. 그 날 야회 때 종사님이 대중 앞에 말씀하셔.
“아, 저 대원이란 놈이, 일하기 싫은 게 손을 끊고 절에 간 놈이 젤 도인이라네” 하고 막 야단을 쳤다.
이때 중묵은 비로소 삼학 병진을 해야지. 수양 위주만 해서는 안 되는구나. 일도 하고 수양도 해야 되는구나, 하고 눈이 확 뚫리기 시작했다. 정당한 비판이 생기기 시작하였다.(김중묵)
거듭 말하는 바지만 도는 도복을 입고 폼을 잡고 점잖게 말 잘하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로 여기면 도깨비장난 치는 무리들이 들끓기 마련이고 요상한 말, 거짓말로 현혹하기 마련이다. 스승은 제자의 기틀을 보아 자극을 주거나
힌트를 주어 기가 막히게 변화로 이끄는 것이다.
대종사 어느 교당을 방문하였다.
“왜 도량을 청소하지 않느냐”고 마치 본 듯이 꾸중하였다.
20일 전에 비가 내린 낙숫물 흔적을 보고 지적한 것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한 달 동안 청소 안한 줄 아느냐 그 신통에 감복한다.
대종사의 장남으로 왜정 때 일본서 대학을 이수하고 (불법연구회 시대에 대학을 나온 이는 이 사람뿐이다) 신언서판이 툭 드러나는 숭산 박광전은 6.25 동란시 교정원장 자리를 끝으로 오직 교육사업에 매진하여 오늘의 원광대학교를 이루었다.
당연히 문도들이 많이 따를 법하고 한 회상의 우두머리가 될 법한데 그는 산골 야산 고담한 스님처럼 평생을 청한 자적하였다.
내가 숭산 총장을 취재한 적이 있다.
“총장님은 어째서 문도들을 양성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심리가 묘해. 학문적인 거시기. 과학적인 거시기, 합리적인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어. 내가 요상한 소리를 안 하니 무슨 매력이 있겠나?”
“요상한 소리라뇨?”
“신통 방통 영통을 말하는 거지”
“종교가에서 당연히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까?”
“거 다 구라여!
대종사님은 大忌事로 여겼어.
어리석은 사람들 꼬시는데 그것이 잘 먹혀.
대종사님께서 신통묘술은 대적이라 하였어”
여성계의 원로이고 고고하기 학 같은 구타원 이공주도 이 점 꼭 같은 견해였다. 구타원은 한번 아니라 여긴 사람은
그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었다 하여도 예우를 하지 않았다. “흥!” 할뿐 몸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1년에 한두 번쯤 필자도 한남동 수도원에 자료 수집차 드나들곤 했다. 무슨 이야기 끝에 대종사님의 신이한 자취에 관심을 보이면 구타원은 정색을 하고 꾸중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종사님께서 신통 이적을 쫓는 것은 대적이라고 하셨어!”
왜 기적을 바라는가
사람들은 자기가 힘든 것을 요행수로 해결하려 든다. 요즘 가뜩 힘든 경제에 잘 뜨는 인기 드라마가 백마 탄 왕자와 신드렐라의 헤피 엔딩이 베스트에 오른다. 요즘 한창 떴던 <김삼순>도 백마 탄 왕자 재벌에 대해 몸매도 학력도 없는 삼순이가 기죽지 않고 똥배짱을 내밀고 대시한 것이 대중들의 공감을 쌌다. 이 똥배짱은 파리에 가서 제빵 기술을 배워오고 1급 파티쉐로서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김삼순은 2005년형 신드렐라이다.
백마 탄 왕자를 선망하는 한 자기 변화는 백년하청이다. 쉽게 사는 길은 로또 복권을 사거나 그마저도 미심쩍으면 마리하나를 복용하는 수밖에 없다. 환각제를 먹으면 자기 마음대로 도취한다. 착각이지만 그 순간만은 행복하다. 보통사람들이 아는 도는 힘들지 않고 이적을 행하는 것으로 안다. 모세가 무슨 주문을 하고 두 팔을 쫙 벌리자 홍해가 갈라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 초자연적인 행태의 이적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천기를 잘 보는 영리한 사람이 음력 보름에 진도나 하섬 앞바다에서 와서 때를 맞춰 무어라 궁시렁거리며 “보라, 하늘이 내게 임하셨도다” 하는 거나 같다.
멍청하니까 속는 것이다. 이는 대종사 사상으로 볼 때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인과를 모르면 무지가 죄악이 된다. 이순신이 울돌목 해전에서 12척의 배로써 2백여척의 왜선을 대파시킨 것은 지역 토박이 어부들이 주는 정보에 귀 기울여 수차 점검하고 해류에 휘말리지 않도록 거듭 훈련하고 철두철미 준비하였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재갈공명이 적벽대전에 역풍을 예견했기 때문에 바람과 불을 이용하여 조조의 대군을 격파시킨 것이다. 이것은 천문과 지리, 인문에 통달한 그의 식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신통으로 보지만 아는 사람은 그 시기와 상황에 맞는 정보력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대종사는 대각 이전 산신령과 도사 만나기 등 9년간의 구도과정을 통해 신통이적의 허망성을 철두철미 깨달았다.
경술년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강제 합병될 때 그해 가을에 부친이 돌아가시고 붙여먹던 전답마저 다 뺏기고 지주인 읍내 조박사집에서 빚독촉은 갈수록 극심하고 일시에 살림은 곤궁해지자 대종사 탄식한다
조실부모 이내 몸이 사방에 우접 없이. 일일삼시 먹는 것이 구설음해 욕이로다. 입술을 깨물며 이제 남에게 의지하여
산신령에게 기도한다, 도사를 찾는다, 속고 속고 또 속고 다시는 밖에서 도를 구하지 않으리라 굳은 결심을 하였다.
자력으로 내 안에서 도를 찾아야겠다는 자각이 생겼다. 그래서 개교의 동기에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강조하였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 인간으로서 할 만큼 노력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면 모르거니와 애당초 횡재수로 팔자를 고치려 드는 이보다 어리석은 이는 없다.
대종사의 생질 서대원은 길룡리에서 외삼촌의 구도 행적을 따라 수행하다가 마침내 출가하였다. 원기15년, 대종사 경성에 한 달 작정하고 갔다가 1주일도 못되어 짐 꾸리며 “어서 가야겠다. 본관에 큰일 있다” 익산으로 내려왔다. 그때 조실이 금강원인데 서무부 서기로 근무하는 생질 서대원이 옆방에 잤다. 새벽 4시경에 조카놈이 변소에 간 줄 알았는데 뒷마루에 탕 소리가 났다. 서대원이 도를 이루고자 금강원 조실 뒤 마루에 작두를 갖다놓고 손가락을 잘랐다. 서대원이 최근에 감명을 받은 것은 달마(一祖)가 한 법문 중에 도를 구하기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不惜身命)는 것이다. 그래서 서대원은 혜가처럼 ‘위대한 도’를 이루기 위해 과감하게 손가락을 잘랐다. 혜가(二祖) 못지않는 인물이 된다면 내 결코 혜가에 지지 않으리라. 스승 앞에 팔을 자르니 눈 속에서 파초가 솟아나 이를 바치더라는 아름다운 표현에 서대원은 황홀했다. 스무 한 살의 꿈 많은 청년 서대원이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도를 이루면 큰 위력과 무슨 권능이 나타나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파초가 끊은 팔을 장엄하는 표현에 서대원은 기만당한 것이다. 도는 말장난으로 치장될 수 없는 것이다. 서대원은 그래도 정신을 못 차렸다. 처음에는 손가락 한 마디였는데 관리 부족으로 손가락이 썩어 들어가 결국은 팔목까지 베어야 했다. 파초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는 결코 위대한 것이 아니다. 도는 平常心이다. 그냥 그대로이다. 신통은 나무 짊어져오고 물 긷는 것처럼(神通竝妙用 運水及搬柴) 일상생활을 잘하는 것이다. 우리 바로 옆에 있다. 손님에게 “차 한 잔 들게” 권하는 데에도 뜰 앞에 있는 잣나무에도 개새끼도, 똥친 막대기에도 도가 있다. 누런 불상만 부처가 아니다. 경속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보면 도는 쉬운 것이다. 모르니 어려운 것이고 굉장한 것 같고 그래서 엉뚱한 상상을 한다.
방언공사를 이루고 9인 조합원들이 도 공부할 것을 걱정하였다.
“언 막는 것이 평지로 산을 쌓듯이 어렵더니 도 닦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꼬”
그러나 대종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도 공부는 코풀기보다 쉽고 썩은 새끼 끊는 것보다 쉽다”
법인기도는 저 하나 잘되자는 기도가 아니다. 법인기도의 대전제는 시방 세계 일체 생령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기도드림에 있다.
대종사 9인 제자들에게 물었다.
“창생을 위해 죽을 수 있느냐?”
“예”
언하에 죽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일체 사량 분별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언어도단의 입정처이다. 지가 죽으면 모두가 부처가 되고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니 새 이름 법명을 받는 것이다.
지가 깨어지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법명을 주어서는 안된다.
100일 기도는 도 얻는 비결을 공개하기 전의 식전행사에 불과하다. 열흘에 한번씩 하는 일과성 행사로 결코 이루지 못한다. 도는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듯하게 장엄하고 떠벌리게 광고를 하거나 폼 잡는 것이 아니다.
100일 기도라 해봤자 열흘에 한번씩 기도하는 것이니까 모두 합쳐봤자 10일 기도밖에 안된다. 11번째, 12번째 기도날까지도 별 효험이 나타나지 않았다. 12번째 이날부터가 법인기도의 핵심이다.
음 7월16일부터 7월26일까지 열흘간 백일기도을 시작한다. 열흘간 9인 단원들이 한 일은 죽기로 결심하고 칼을 가는 것이다. 왜 죽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왜, 누구를 위해 죽느냐?
김훈의 <칼의 노래>란 소설에는 임진왜란시 승리의 상징인 거북선이 등장하지 않는다. <칼의 노래>는 죽음의 서사시이다. 정묘재란에 모진 형벌을 치르고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이 자기 주위- 임금을 비롯하여 당권에 눈이 어두운 신료들…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것들 이것이 마구니이다. 임금이란 자는 연전연승하는 이순신에게 자기 자리를 뺏길까 걱정하고, 조정의 서인들은 동인들이 득세할까 걱정하고, 명나라는 원병 요청에 출전을 하였으나 자기 나라의 오랑캐 여진족의 준동이 더 걱정이다. 이순신은 임금부터 왜군과 명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임을 간파하고, 그들에게 어차피 개죽음을 당하게 될 바에야 차라리 남아대장부로서 뜻있게 죽을 장소를 찾는다. 풍전등화 누란의 위기에 처한 백성이 정성들여 만들어 준 명검, 불의를 보면 칼은 늘 징징 울고 있다. 적들에 의해 아들도 죽고 애인도 죽고 부하도 죽고 백성도 죽고 결국 자기도 죽는다. 그것이 백성들을 위하여 잘 사는 방법이다. 영원히 이름을 남기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처럼 여한 없이 피흘려 죽어야 영원히 산다.
누구를 위해 죽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스승의 명령 때문에? 나라를 위해? 조직의 명령에 따라서? 충효의 논리, 샤나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사무라이가 할복하는 것처럼 그런 개죽음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대종사 물었다.
“창생을 위해 죽을 수 있느냐”
여기에 쾌연히 응답할 줄 알아야 한다. 인류를 위해, 세계를 위해 감사히 이 몸을 바치겠다는 행이 나와야 된다.
그 결과는 진리가 그에게 임하고 우주심을 체득하게 된다.
8월21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비로소 대종사는 그 비법을 말한다. 도 이루는 방법은 네가 죽어야 창생이 산다는 것이다. 생명 희생을 강조하였다.
<회보> 60호 회설에 <구인선배의 희생적 정신을 체득하라>는 글이 있다. 이 희생정신은 철저한 구도 의지에 의해 가능하다. 오직 죽음으로서 법을 구하고 오직 죽음으로서 창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실행만 있을 뿐이다. 죽기를 한정하고 구하는 자는 반드시 찾고, 죽기를 한정하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반드시 천국의 문이 열린다.
생명 희생이란 망념이 찌든 이 몸 희생, 즉 업장 청산을 말한다. 업장 덩어리 이 몸을 죽어야 본래 정신이 부활한다.
죽음 체험은 일종의 정신 세탁운동으로 실제 피 흘려 죽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체험을 하게 된다. 온갖 집착의 덩어리 몸뚱이에서 해탈이 되면 無我 상태가 된다. 이 육신으로부터의 자유가 열반이다. 망념이 청산되고 무아의 바탕 위에 창생(大衆)을 위하는 마음이 나온다. 의식의 차원이 우주의식으로 확대된 경지이다. 그러자면 자발적인 희생정신이 발로되어야 하며, 그러기까지 낱 없는 정성의 기도가 필요하다.
천지신명은 어떤 정성에 감동하는가.
대종사 말하였다.
“남음 없는 마음으로 대중을 위하는 사람에게 어찌 천지신명이 감응하지 않으며, 또 그 소원에 성공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천지와 나는 상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절대적인 관계이다. 절대적이란 상대가 없다는 뜻이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져버렸다. 내가 없어야 천지와 하나가 된다. 천지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이 천지 감응이다. 희생적 정신을 다른 말로 하면 사무여한 무아봉공 정신이다.
우리는 이때까지 맨손도장을 찍어 어찌 혈인이 나올 수 있느냐 이게 참말이냐, 가짜냐에 관심을 가졌을 뿐 사무여한 무아봉공에 대해선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법인절은 일과성 행사로 그칠 뿐 ‘사무여한 무아봉공’이라는 8자 암호문을 해독하지 못하였다. 혈인에 관심 있는 사람은 사무여한 무아봉공 공부하기가 어렵다. 법인체험은 무 자리 체험이다.
혈인은 말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혈인에 재미를 붙이면 사도에 떨어지고 진리와 거리가 멀어진다.
최후의 희생일 8월21일(음7.26)이 되었다.
어느 영화 제목에 장례의식을 ‘축제’라고 표현한 것처럼 대종사는 최후 희생일에 도실 가득 음식상을 차려놓고 9인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비장하고 숙연해야 할 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 몇날 며칠 정성껏 숫돌에 갈아 새파랗게 날이 선 비수를 앞에 놓고 제자들은 오히려 희색이 만면하였다.
천지신명의 조화인가. 거기에는 아홉 제자들은 없었다. 창생을 위해 죽을 수 있느냐, 예, 하는 그 순간 그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는 오직 한 사람, 두루마리 한지에 건감간진 순대로 이재풍 이인명 김성구 오재겸 등등 각기의 이름을 썼지만 그들은 없었고 당신님 한 분만 있었다. 아홉 제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가 죽어 시방 세계의 일체 생령이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면 이 어찌 영광이 아니오리까”
백지에 무인을 찍는 것은 나 없음을 확인하고 스스로 하늘임을 체득하는 自證 행위이다. 천지신명 앞에 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신명의 감응이고 진리의 조화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나 없음’은 텅 빈 자리 천지(우주; 세계) 자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확연히 진리를 체득하고 거듭 난 하늘사람으로서 세계인, 봉공인, 법사이다. 그래서 대종사는 그들에게 이날을 기념하여 새 이름 법명을 준 것이다.
이를 일러 전무출신자라고 하며, 그 정신을 사무여한 무아봉공의 창립정신이라고 말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은 망념이 치성하였던 세계이다.
인지가 미해 우리는 혈인 성사에 집착하였다. 진리적으로 볼 때 白紙에 拇印은 당연히 無印으로 나타남이 옳다. 대종사의 天眼으로 볼 때 인증이 된 것이다. 이 고기누깔 肉眼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천지의 감응은 흔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이 흔적이 나타났다면 이것은 인간의 더러운 욕망에 의한 착시현상일 따름이다. 천지의 감응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일종의 정신감응이다. 이것이 법인 체험이다.
혈인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기미년 법인 성사 때 9인 단원들이 무인한 그 증서를 대종사께서 불살라 하늘에 고했는데, 불법연구회 주재 사찰 형사 황가봉은 이런 증언을 했다.
한번은 조실에 갔더니 9인 선배들이 찍은 혈인을 보여주더라는 것이다. 불살라 하늘에 고한 그 증서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대종사는 마술사가 아니다. 짐작컨대 다른 기도를 할 때 인주에 찍은 지장일 것이다. 완강한 중생을 제도하려 함에
때로는 부득이 방편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신통이적은 혹세무민의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래서 신통을 대적이라 하였다.
우리는 신통이적의 자취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법인 체험에 전력을 해야 할 것이다. 법인 체험은 법계의 인증을 받는 것이다. 진리 체득이다.
도(진리)는 자기희생을 해야 체득한다. 이를 견성, 또는 무아 체험, 삼매 체험이라고 한다. 나는 이를 ‘대종사 체험’이라 명명한다. 근기 따라 다르지만 이 체험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죽고 또 죽을수록 심도가 깊을수록 법력이 깊어지고 법력은 더 향상된다.
우리는 혈인의 이적을 찬송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법인을 체득하여야 한다. 그러자면 내 업장 청산부터 해야 한다. 단도를 숫돌에 날이 새파랗게 서도록 간다는 것은 죽음이 실제 상황임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일을 이루려 함에 있어 사생결단을 내고자 함이 아니라, 일도에 죽는다는 단단한 각오이다. 이렇듯 법인 체험에 임하는 기본 정신 자세가 중요하다. 왜 내가 죽어야 하는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여기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당위성을 발견해야 한다.
옛말에 살신성인이란 말도 있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듯이 이 한 몸 죽어 창생을 위해 새로 거듭나자는 것이다. 그만큼 서원(초발심)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死無餘恨 無我奉公’은 새 하늘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수련 방법이요 창립정신이다. 여덟 자 이 암호문, 이 메시지를 깨쳐 활용하여야 우리가 거듭날 것이다.
8월21일 이날은 인천이 하나되는 축제의 날이다.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사무여한 무아봉공의 프로그램 개발이다. 그러자면 먼저 우리부터 제대로 죽어야 된다. 참으로 죽은 자만이 창생을 살릴 수 있다.
성인은 미래를 예비한다. 강증산은 소태산의 출현을 예언하였다.
◦ “내 일을 해 줄 사람이 뒤에 나온다. 초막에서 성인이 나오리라.”
대종사는 노루목의 다 찌그러진 초가 오두막에서 대각하였다.
◦ 솥이 들썩이면 미륵이 나올 날이 멀지 않았다.
변산과 모악산은 불가분의 불연이 있다.
김제 사람 진표는 백제 유민이다. 신라에게 망해 핍박받는 백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간절히 염원하였다. 지장보살이 그에 감응하여 “망신참회를 하라. 그러면 너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망신 참회란 자기 몸을 죽이며 참회하는 공부이다. 진표는 변산 천길 낭떠러지 불사의방장에 매달려 자기 몸을 짓찧으며 수행하였다. 그러나 뜻 같지 않자 천길 낭떠러지에 뛰어내렸는데 미륵불이 나타나 수기를 주었다.
“모악산 용소에다 미륵불을 세우거라”
금산사 앞 연못에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사는 연못이 있었다. 근방에 사람들이 눈병을 앓았는데 용소에 숯을 한 섬씩 넣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용은 물의 왕, 숯은 불이 타고남은 덩어리이다. 그리하여 천년 묵은 이무기는 용이 되어 승천하고 미륵불 건립 불사가 시작되었다. 철로 만든 6장불을 세우자 자꾸 내려앉았다. 미륵이 일렀다.
“가마솥위에 세우거라”
그랬더니 미륵이 바로 섰다. 금산사 미륵전에는 11.8m의 미륵불이 가마솥을 밟고 서 있다.
강증산 선생이 죽기 전에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거라 하였다. 증산선생 화천한 뒤 10년 뒤 그의 생일에 대종사 금산사에 왔다. 미륵전에는 증산의 제자들이 증산천사 재림을 기다리며 치성을 들이고 있었다. 하루는 불공을 드리던 스님이 죽자 대종사가 중의 이마에 열 十자를 긋고 살려준 일이 있었다. 절에서는 미륵님이 나왔다고 하고 증산의 제자들은 천사님이 재림하셨다고 소문이 났다. 기미년 만세사건으로 시국이 뒤숭숭하던 때라 김제경찰서에서 민심이 결합되고 동요하는 것을 단속하기 위해 대종사를 연행해갔다. 1주일 뒤 대종사 영광으로 내려오고 그 뒤 변산 입산하게 된다.
송적벽과 김남천은 증산 생전에 “영광에 소식 있거던 짚신 들매고 쫓아가라” 말을 기억하고 대종사를 찾아 몰려왔다.
“나는 시루가 아니다. 솥이다”라고 하며 호를 소태산이라고 하였다. 대개 아호는 자기 고향 지명에서 따온다. 증산은 두승산 시루봉 아래에서 태어났고 소태산은 산태극 수태극 작은소드랑섬 큰소드랑섬이 있는 와탄천에서 태어났다. 소드랑은 솥뚜껑의 사투리이다. 솥의 의미는 매우 뜻이 깊다. 대종사, 변산에서 3강령 8조목 등 교강을 내놓았다. 대산종법사 말하였다. “3학은 세계인을 살리는 솥이다” 솥은 발이 3개 달렸다. 대종사 예언하였다. “앞으로 가마솥에 콩 튀듯이 도인이 나오리라” 소태산이란 솥에 들어가야 산다는 뜻이다.
대종사님 교법은 어느 한 사람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여 내놓은 교법이 아니다. 가마솥이란 용광로, 잡철을 다 녹여내는
망념을 청산하는 수행 공동체란 뜻이다. 가마솥에 불을 땐다. 열심히 공부가 순숙되어 한 놈이 ‘앗, 뜨거라’ 하고 튀어나면
너도나도 튀어나온다. 이것이 가마솥 수행공동체의 천여래 만보살 공부법이다.
◦ 증산선생은 대종사 10인 1단 조직을 예언하였다.
증산선생이 제자 아홉을 불러 자리에 앉게 하고 김갑칠에게 대나무를 하나 짤라 오게 하였다. 열 마디 중에서 한 마디를 잘라내고 이는 두목이고 나머지 아홉 마디는 가르침을 받아야 하니라. 이 말을 증명하기 위해 갑칠에게 밖에 나가 하늘을 보라. 별이 몇 개 나왔느냐. 별 아홉 개가 나왔습니다. 9인 제자와 대종사, 10인 1단을 예고하였다.
강증산은 소태산의 출현을 예언하였고 소태산은 오는 세상에 천불만성의 출현을 예고하였다. 그러면 왜 우리 교단은 아직도 가마솥에 콩 튀듯이 도인이 배출되지 않는가?
일제 강제기이였기 때문에 제대로 사무여한 무아봉공 수행법을 행하지 못하였다. 인심이 미개하여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시행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시도해볼 때가 되었다. 충무공처럼, 예수님처럼 우리는 죽을 자리에 기꺼이 죽어야 한다. 이 도덕사업은 혼자서는 안 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살신성인하여 자기가 부처가 되었다 해도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여기 불종자가 하나 있다. 자기가 자라온 고향으로 돌아가 가시덤불 속에 살면 거친 잡초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삼밭에 살면 삼밭에 쑥 크듯이 늘씬하게 자라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 울타리를 벗어나 공도사업에 하고자 나온 이들 끼리 한데 모여 도덕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불보살을 양성하여 불국토를 건설해야 한다. 대종사가 신룡벌에 재가출가 차별 없는 도덕 공동체를 구현하였듯이 선지자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유토피아를 염원하여 왔다. 단군조선의 神市, 탐라국 해녀들의 이상향 이어도, 홍길동의 율도국, 불교의 니르바나 등이 신들이 사는 세상, 부처님들이 사는 불국토이다.
혼자서 절대 부처가 될 수가 없다. 보임공부는 더불어 같이 하는 것이다. 스승은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 스승은 스승을 만든다. 스승을 딛고 그와 같은 차원으로 올라선 스승들의 공동체의 단합의지로 衆聖共會가 이룩된다. 불보살은 불보살들 끼리 도덕공동체 안에서 한데 어울려 보림공부를 해야 한다. 지 혼자 부처가 못된다. 완전 회상이 衆聖共會이다. 衆聖共會는 뭇 성인이 한데 어울려 사는 공동체이다. 이것이 시방 세계의 일체 생령이 영원한 행복을 얻는 길이다.
대종사는 당신의 대각 기념일을 혼자 즐기지 아니하고 일체 생령과 더불어 같이 부처되고자 공동생일 기념일이라 하였다. 시속 말로 ‘지 혼자 좋으믄 머슨 재민겨.’ 대종사는 대각후 읊은 <경축가>에서 우리 천지 만만세라 하였다. 대종사의 자비정신은 일체를 부처로 보았다. 장삼오사 갑남을녀의 죽음을 보고 열반이라 하였다. 대종사는 자신의 무덤조차도 필남필부의 공동묘지에 함께 자리하였다. 이는 오는 세상이 전반세계가 될 것임을 예비한 것이다.
대종사는 자신의 열반을 예감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나를 믿지 마라. 진리를 믿어라”고 하였다. 사람은 죽으나 진리는 영원하다. 몸은 죽어 사라지나 영혼은 멸하지 않는다. 육신에 집착된 내가 죽어야 진리가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등상불, 人格 신앙을 배격하고 각자의 자성불을 찾으라고 하였다. 참 기적이란 내가 죽어 진리로 사는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息妄現眞, 망념이 죽고 참이 드러나고 법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법인체험을 한 사람이라야 물질의 항복을 받아 정신이 주인이 된다. 그러자면 중성공회의 도덕공동체에서 상당한 시간의 보림공부를 해야 된다.
정신의 주체를 확립하면 당연히 파란고해에 헤매는 중생을 광대 무량한 낙원으로 이끌어 오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성불제중이다.
물질의 항복을 받아 정신의 주체를 확립한 사람이 法主이다. 법주는 단수가 아니라 複數이다. 중성공회의 도덕공동체의 일원이다. 우리 모두가 법주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法主임을 깨달을 때 더 이상 미망은 존속하지 않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것이 해탈 도인의 면모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