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 <26> 화폐 이야기 (6) 한국의 화폐 속 초상을 그린 화가들
고대 화폐는 디자인이 엉성하고 조잡했다. 세월이 갈수록 화폐 디자인이 세밀하고 복잡하며 아름다워졌다. 화폐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다. 전쟁 때문에 과학과 산업이 발전하듯이 화폐 디자인도 위조(僞造) 때문에 점점 발전해 가고 있다. 화폐 위조 기술이 쫓아오면 화폐 디자인 기술은 저만큼 더 멀리 달아난다.
화폐에 인물 초상, 동물, 식물, 풍경 등의 그림을 넣기 시작한 것은 미적(美的) 목적도 있지만, 화폐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다. 사진보다도 그림이 훨씬 더 위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화폐, 특히 지폐에는 그림을 넣고 있다.
화폐에 들어가는 인물은 거의 다 초상화(肖像畵)이다. 어느 나라나 그 화폐에 들어가는 초상을 그리는 화가는 당대 최고 화가가 맡는다. 화폐의 인물 초상을 그린 화가들의 라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진화가들과 연결된다. 어진화가(御眞畵家)란 당대 최고 화가로서 어진(御眞), 곧 임금의 용안을 그리는 화가이다.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顔), 성안(聖顔), 천안(天顔), 옥안(玉顔), 성면(聖面)’ 등으로 말한다.
사람의 얼굴을 그림에서는 ‘초상(肖像, portrait)’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림에서 임금의 얼굴은 ‘초상(肖像)’이라고 하지 않고, ‘어진(御眞), 어용(御容), 진용(眞容), 진(眞), 수용(晬容), 성용(聖容), 영자(影子), 영정(影幀),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의 다양한 용어로 말해 오다가, 1713년(숙종 39년) 숙종의 어진을 그릴 당시 학자이자 문신인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의 건의에 의해 ‘어진(御眞)’이라는 말로 통일되었다.
임금의 어진은 조선 때뿐만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그려져 왔으나, 조선 국왕의 어진마저도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워낙 전쟁이 많았던 우리나라인지라 불타 없어지고 노략질당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어진 중에 어떤 것은 반쯤 불에 탄 것도 있다.
어진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어진이 실제 임금의 얼굴과 일치하느냐이다. 어진은 그리는 방식에 따라 ① 도사(圖寫), ② 추사(追寫), ③ 모사(模寫) 세 종류로 나눈다. 도사(圖寫)는 임금이 생존해 있을 때 직접 얼굴을 보고 그린 어진이고, 추사(追寫)는 기록과 기억에 의해 생존하지 않은 임금의 얼굴을 그리는 어진이며, 모사(模寫)는 다른 화가가 그려놓은 어진, 즉 원본을 보고 그대로 베끼는 어진이다. 어진은 함부로 그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사든, 추사든, 모사든 간에 실물과 똑같이 묘사한다. 어진은 주로 비단에 그렸기 때문에 그림의 수명이 짧았다. 그래서 어진이 낡아지면 원본대로 다시 만드는데, 이를 이모(移模)라고 한다. 이모(移模)는 모사(模寫)에 해당된다.
조선 왕들 중에 가장 많은 어진을 남긴 왕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였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의 어진은 무려 26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면 조선 국왕들의 어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조선의 27명 왕들과 추존왕들의 어진이 전해졌으나, 전화(戰禍)로 소실(燒失) 또는 약탈되고, 1935년 일제 통감부{統監府 : 총독부(總督府) 전신}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① 초대 태조(太祖), ② 제7대 세조(世祖), ③ 원종{元宗 : 제16대 인조(仁祖)의 아버지로서 추존왕(追尊王)}, ④ 제19대 숙종(肅宗), ⑤ 제21대 영조(英祖), ⑥ 제22대 정조(正祖), ⑦ 제23대 순조(純祖), ⑧ 익종{翼宗 : 제24대 헌종(憲宗)의 아버지로서 추존왕}, ⑨ 제24대 헌종(憲宗), ⑩ 제25대 철종(哲宗), ⑪ 제26대 고종(高宗), ⑫ 제27대 순종(純宗), 이렇게 12명의 어진 46점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보다 적은 숫자였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것은 우리나라 최고 왕으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 제4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 재위 1418-1450)의 어진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화폐 속에 있는 세종대왕의 어진은 실물을 보고 그린 도사(圖寫), 또는 원본을 보고 베낀 모사(模寫) 어진이 아니라, 기록과 기억,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추사(追寫) 어진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5,000년 동안에 겪은 크고 작은 전쟁은 약 1,000번이나 된다. 5년에 1번꼴로 전쟁을 치른 셈이다. 6‧25전쟁 이래 남북의 통일이나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이기는 하지만, 63년 동안 전쟁 없이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감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루속히 남북이 통일되어 평화와 번영을 이루는 대한민국이었으면 좋겠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과거 일을 잘 잊어버림’, ‘욱 하는 것’ 같은 민족기질과 “밥 먹었느냐?”라는 인사는 잦은 전쟁과 연관이 있다. 전쟁이 났을 때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피란(避亂)을 놓쳐 죽을 수밖에 없으니 모든 것을 빨리 해야 직성이 풀린다. 전쟁이 나면 밥을 굶는 일이 다반사이므로 식사 여부를 묻는 것이 인사가 돼버렸다. 전쟁으로 생긴 슬픈 일을 일일이 기억하다가는 울화통이 터져 살 수 없으니 애써 과거 일을 잊는 것이 상책이었다. 또 전쟁을 많이 경험한 민족은 이성적이기보다 감정적이다. 순간적으로 화를 분출함으로써 마음을 다스린다고 할까. 떡, 엿, 비빔밥, 국밥, 설렁탕, 곰탕 같은 음식도 전쟁과 연관이 있다. 어진을 거의 다 잃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많은 전쟁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보다 훨씬 적게 전쟁을 겪은 민족인데도,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은 수없이 많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한민족은 위대하다. 반성하고 개선해야 할 점도 많지만….
그러면 조선의 어진들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일까? 6‧25전쟁 때 어진들을 용두산(龍頭山)의 부산국악원으로 옮겼으나, 1954년 12월 10일 그곳의 피란민 판자촌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그나마 남아 있던 대부분의 어진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 중에서 태조, 영조, 철종, 순조, 익종의 어진을 화마(火魔)로부터 건져냈지만, 얼굴이 남은 것은 영조와 철종 어진뿐이었다. 영조와 철종 어진만이 2008년 8월 15일 설립된 서울 세종로의 국립고궁박물관에 현재 전시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2008년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1908년(순종 2년) 창경궁 내에 황실박물관이 개관되었고, 1938년 일제에 의해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되었으며, 1946년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칭되었고, 1961년 덕수궁사무소가 되었다가, 1969년 덕수궁미술관이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었으며, 1992년 덕수궁사무소가 문화재청 직속의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이 되었고,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을 대대적으로 확대‧개편하였으며, 2008년 8월 15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개관했다.
태조의 어진은 26점으로서 여러 곳에서 봉안되었으나, 도사(圖寫) 어진은 다 없어지고, 1800년대 중기에 제24대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의 어진과 제25대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의 어진을 그린 어진화가 조중묵(趙重默, ?-?)이 모사(模寫)한 <조선 태조 어진>이 전라북도 전주시 한옥마을 입구에 있는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되어 있다. 이 <조선 태조 어진>은 조선 말기에 그려진 것이지만, 모사(模寫)하여 재현(再現)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초상화를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소중한 그림이다. 그래서 보물 제931호이던 것을, 2012년 문화재청이 국보 제317호로 격상, 지정했다.
조선의 전통적인 어진은 왕이 홍룡포(紅龍袍)를 입은 모습의 초상화이다. 그러나 조선 태조는 홍룡포 외에 청룡포(靑龍袍)를 입은 어진도 남겼는데, 조중묵이 그린 <조선 태조 어진>이 그러하다. 전통적으로 중국(中國)의 상징색은 노랑이다. 그래서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 황룡(黃龍)이다. 고려(高麗)의 상징색은 파랑이다. 그래서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 청룡(靑龍)이다. 왕의 의복인 곤룡포(袞龍袍)의 흉배(胸背 : 의복 앞뒤에 수놓은 그림)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龍)을 붙인다. 이것은 신분의 표시이다. 신하는 용을 수놓을 수 없고, 품작(品爵)에 따라 학, 호랑이, 기러기 등등으로 구분한다. 중국의 황제는 황룡포(黃龍袍)를 입고, 고려의 왕은 청룡을 수놓은 청룡포(靑龍袍)를 입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청색 곤룡포, 즉 청룡포를 입은 것은 왕국의 제도 정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에 조선은 상징색을 빨강으로 했다. 그래서 조선의 왕들은 홍룡포(紅龍袍)를 입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2013년 전주 경기전의 <조선 태조 어진>을 모사하되, 청룡포 대신에 홍룡포를 입은 모습의 태조의 어진을 모사하여 국립고궁박물관에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조중묵(趙重黙, ?-?) <조선 태조 어진>(1800년대 중기작, 비단에 전통 채색, 150×218cm, 국보 317호, 전주 경기전)
조선의 도화서(圖畵署)는 예조(禮曹)에 속한,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한 관청으로서 현재 서울 종로구 공평동 또는 견지동에 위치해 있었다. 그 중에서 뛰어난 화원(畵員)들은 궁 안에 들어가 궁중화가(宮中畵家)가 되었다. 또 그 중에서 뛰어난 화원, 특히 임금의 어진(御眞)을 그릴 자격을 얻은 최고의 화원을 ‘어진화가(御眞畵家)’라고 했다.
현대 화폐 속의 초상을 그린 화가들의 전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진화가와 만나게 된다.
화폐 속의 초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구한말(舊韓末,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까지의 시기)의 궁중화가 내지 어진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헌종 9년)-1897(고종 34)}은 고아로 떠돌아다니다가, 그림에 재능이 많았던 역관(譯官) 이응헌(李應憲, 1838-?)의 집 하인이 되었다. 이응헌은 중국을 오가며 중국의 유명한 그림과 글씨를 소장하게 되었다. 하루는 배운 것이 없는 장승업이 주인의 허락을 받아 그림을 모사하게 되었다. 장승업의 그림 재능을 알아본 이응헌은 그를 후원했고, 도화서 화원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에게 인도했다.
‘조선 4대 화가’ 하면 ①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 ?-?), ②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③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④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이다. 네 명 중에서 장승업이 가장 어려운 환경 조건 가운데에서 명화가가 되었다. ‘조선 3대 화가’ 하면 그 유명한 겸재 정선을 빼고, 오원 장승업을 넣을 정도이다.
‘조선 화가 삼원(三園)’ 하면 ①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②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 ③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이다. 장승업은 자기 호(號)를 스스로 지었다. 그는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대단해서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면서 “나도 원(園)이다”라고 하면서 ‘오원(吾園)’이라는 호를 자칭했다.
장승업은 자유분방(自由奔放)하여 주문받아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싫어했고, 술을 마신 후에라야 그림을 그리는 별난 버릇이 있었다. 아마 불행한 어린 시절에서 붙은 버릇이었을 것이다.
예술가 하면 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 그리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술 마시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또 술 때문에 손 떨림 현상이 생기면 화가의 생명은 끝이다. 성악가가 성대를 아끼듯이, 화가는 손이 생명이다. 건강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거기다 어느 화가의 말에 의하면 평정(平靜)의 마음, 선한 생각을 가져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했다.
장승업은 천재 기인(奇人) 화가였다. 그는 고종의 부름을 받아 궁중화가가 되었으나, 술을 마시기 위해 세 번이나 궁중규율을 어기고 담을 넘어 무단 탈출했다가 고종의 노여움을 샀다. 그러나 그때마다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의 간청으로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장승업은 뛰어난 솜씨를 가졌지만, 술 때문에 고종을 그리는 어진화가의 영예는 누리지 못했다.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쌍마인물도(雙馬人物圖)>(부분, 연대미상, 비단에 담채, 124×33.6cm, 고려대박물관)
오원 장승업의 화풍은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철종 12년)-1919}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철종 4년)-1920}에게 계승되었다.
조석진과 안중식은 8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평생 친구로 지내면서 당시 화단의 쌍벽(雙璧)을 이루었다. 1881년(고종 18년) 조선은 중국 청(淸)나라 톈진{天津(천진)}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했다. 그들은 서양으로부터 들여온 신식 무기의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우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조영석과 안중식은 제도사(製圖士)로서 영선사의 일행이 되어 톈진에 가서 1년 동안 미술을 배우고 돌아왔고, 그 후에도 둘은 청국과 일본에 여러 번 가서 견문을 넓혔다. 다시 말하면 서양화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적용했다. 특히 서양화의 기법을 적용한 그들의 초상화는 조선 초기는 물론이고, 처음으로 서양화 기법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영‧정조 시대의 초상화와도 달랐다. 어진화가가 된 두 사람은 1919년 서화협회(書畵協會) 회장을 번갈아 맡으면서 후진들을 양성했다.
두 사람은 당대 최고 화가로서 오원 장승업처럼 인물, 산수, 화조 등 장르 구분 없이 잘 그렸다. 그런데 안중식이 어진을 그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 <도원문진도(桃源問津圖)>(1913년작, 비단에 채색, 164.4×70.4cm, 리움미술관)
<도원문진도(桃源問津圖)>(1913년작)는 본관이 ‘순흥(順興)’이고 서울 출신인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도원문진(桃源問津)’이란 ‘도원경(桃源境)을 찾아 포구에 닿았다’는 뜻이다.
인간의 심리 중에는 상향의식(上向意識)이 있다. 현재보다 더 높고 더 나아지려고 하는 의식이다. 인간의 상향의식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교육된 결과라기보다는 본성적(本性的)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본래의 인간은 완전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상향의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욕을 부리는 폐단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의 상향의식은 매우 강하여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이다. 사람은 누구나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세계를 추구한다. 그러한 세계를 ‘이상향(理想鄕, Utopia)’, ‘낙원(樂園, Paradise)’이라고 한다.
성경의 ‘에덴(Eden) 동산’, 플라톤의 ‘아틀란티스(Atlantis)’,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 남미의 ‘엘도라도{El Dorado, 황금향(黃金鄕)}’, 티베트의 ‘샹그릴라(Shangri-La)’, 중국의 ‘도원경(桃源境)’ 또는 ‘무릉도원(武陵桃源)’, 한국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栗島國)’ 등이 있다.
중국의 이상향인 ‘도원경(桃源境)’ 또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한 사람은 동진(東晋) 말기부터 남송(南宋) 초기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이다. 그는 12년 동안 벼슬을 했으나, 워낙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고 자연을 좋아했기 때문에 정치를 버리고 낙향하여 자연을 벗하여 평생 시를 썼다. 전원시(田園詩)의 초석을 놓은 도연명을 빼놓고는 중국 문학을 논할 수 없을 정도이다.
‘도원경(桃源境)’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遠記)』에 나온다. 어부가 한 포구에 이르러 보니 복숭아꽃이 끝이 없었다. 복숭아밭 끝에서 좁은 동굴을 통과하니 갑자기 드넓고 눈부신 세상, 즉 별천지가 나타났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遠記)』를 그림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것은 안견(安堅, ?-?)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년작)였다. 필자의 글 ‘옹달샘 <14>’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일본이 약탈해 가서(그들은 약탈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현재 일본 나라{那良(나량)}현 덴리{天理(천리)}시에 있는 덴리대학교{天理大學校(천리대학교)} 도서관에 전시해두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공개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래 조선의 산수화가들은 도연명의 ‘도원경’을 수없이 그려 왔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수묵담채화여서 색채가 거의 없고, 흑백이다. 그러나 안중식의 <도원문진도>는 청록색이 강렬한 견본채색화(絹本彩色畵), 즉 비단에 채색한 그림이다. 또 안중식의 <도원문진도>는 서양화의 ‘색원근법(色遠近法)’이 사용되었다. 필자의 글 ‘옹달샘 <14>’에서 소개한 바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고안하여 <모나 리자>(1503-1506년작)에서 처음 사용한 ‘색원근법(色遠近法)’은 근경(近景)에는 채도(彩度)가 높은 색채, 즉 강하고 선명한 색을 칠하고, 원경(遠景)에는 채도가 낮은, 즉 희미하고 약한 색을 칠함으로써 원근감(遠近感)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원근감이 없으나, 안중식의 <도원문진도>에는 원근감이 뚜렷하다. 그림을 다시 한 번 보고 ‘색원근법’을 감상하시기 바란다. 근경에 있는 소나무 여섯 그루마저 채도의 차이를 두어 원근감을 표현하고 있다. 서양화에서 ‘색원근법’보다 먼저 고안된 것으로서 ‘선원근법(線遠近法)’이 있다.
동양화(중국)에도 원근법이 있었다. ① 고원법(高遠法)은 화가가 경치를 쳐다보고 그리는 것이고, ② 심원법(深遠法)은 화가가 경치를 내려다보고 그리는 것이며, ③ 평원법(平遠法)은 화가가 눈높이에서 그리는 것이다. 이 동양화의 ‘삼원법(三遠法)’은 서양화의 원근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안중식은 <도원문진도>의 근경(近景) 오른쪽에는 동양화의 ‘심원법(深遠法)’을 사용했다. 여섯 그루의 소나무 아래 부분은 화가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그린 그런 모습이다.
필자의 글 ‘옹달샘 <14>’에서 조선의 산수화가들은 줄곧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를 그려오다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에 의해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그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 바가 있다. 겸재 정선 이후 조선의 모든 산수화가가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만을 추구했던 것이다. 심전 안중식은 관념산수화를 즐겨 그렸다. <도원문진도>는 관념산수화로서 걸작(傑作)이다.
초상화, 곧 어진(御眞)을 논하다가 산수화 쪽으로 한참동안 이야기하고 말았다. 뛰어난 장승업과 안중식이 왜 어진을 그리지 않았는지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본관이 함안(咸安)이고 황해도 옹진(甕津) 출신인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철종 4년)-1920}도 오원 장승업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서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함께 어진화가였다. 조석진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화가였던 할아버지 임전(琳田) 조정규(趙廷奎, 1791-?)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그는 그림의 여러 장르를 두루 잘 그렸다. 1900년(고종 37년)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의 어진을 그려 정3품(正三品)의 벼슬에 오르기도 했다. 심전 조석진의 <고종 어진>(1900년작)은 6‧25전쟁 때 소실(燒失)되고 말았다. 1900년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철종 4년)-1920}과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철종 1)-1941}이 공동으로 그린 모사(模寫) 어진 <영조 어진>은 현재에도 남아 있다[조금 후에 소개함.].
심전 조석진의 산수화도 많이 있으나, 잉어 그림인 <군리도(群鯉圖)>를 소개한다. ‘리(鯉)’는 ‘잉어 리’이다.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 <군리도(群鯉圖)>(제작연대미상, 비단에 수묵담채, 58.0×38.5cm, 개인소장)
고종(高宗) 당시 어진화가 중에 뒤늦게 어진화가가 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인물 중에 본관이 평강(平康)이고, 서울 출신인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철종 1)-1941}이 있다. 석지 채용신은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보다 3년 연상이고,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보다는 11년이나 연상이다. 그런데 그는 조석진과 안중식이 1881년(고종 18년) 영선사(領選使) 일행으로서 중국 청나라에 파견될 때 함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스승인 오원 장승업은 고사하고, 누구에게도 그림을 배운 기록이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 채권영(蔡權永)이 무관(武官)이었으나,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채용신은 아주 늦게 화가가 된 인물이다. 석지 채용신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전문화가가 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석지 채용신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처럼 천부적인 그림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석지 채용신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37세(1886년)에 급제하여 56세(1905년)까지 관직에 있으면서 칠곡(경상도) 군수와 정산(충청도) 군수를 지낸 후 종2품(從二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언제 그림을 그려서 어진화가가 되었을까? 참 신기한 인물이다.
뒤늦게 화가가 된데다 특정한 스승도 없었던 탓인지 석지 채용신은 화가 인맥이나 계보도 없다. 그런 때문인지 석지 채용신은 1905년(56세) 관직을 그만두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가 유학자들과 우국지사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서양 초상화 기법을 터득하고 극세극채색(極細極彩色)을 사용한 석지 채용신은 독보적(獨步的)인 초상화가였다.
석지 채용신과 소림 조석진이 함께 원본을 보고 모사(模寫)한 <영조(英祖) 어진(御眞)>(1900년작)은 걸작이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는 27명의 조선 왕들 중에서 최장수(83세), 최장 재위기간(52년) 기록을 세운 왕이다. 1744년(영조 20년) 당시 어진화가 장경주(張敬周, 1710-?)와 김두량(金斗樑, 1696-1763)이 공동으로 도사(圖寫,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한 <영조 어진>을 1900년(고종 37년) 소림 조석진과 석지 채용신이 모사(模寫)한 것이다. 그런데 1954년 부산 용두산 화재 때 원본인 도사(圖寫) 어진은 타버렸고, 조석진과 채용신이 그린 모사(模寫) 어진 <영조 어진>과 어진화가 이한철(李漢喆, 1808-?)과 조중묵(趙重默, ?-?)이 그린 <철종 어진>만 건져냈다. 그것도 <영조 어진>은 온전하나, <철종 어진>은 세로로 절반이 타고 없는 것이다.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모사 <조선 영조 어진>
(1900년작, 비단에 전통 채색, 110.5×61.8cm, 보물 932호, 국립고궁박물관)
또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은 제26대 조선 왕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의 어진도 그렸다. 중국 청(淸) 제국(帝國)의 황제(皇帝)는 노란색의 황룡포(黃龍袍)를 입는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은 중국의 간섭 때문에 황룡포를 입을 수 없고, 홍룡포(紅龍袍)를 입어야 한다. 그런데 석지 채용신은 황룡포를 입은 고종의 어진을 그렸다.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의 제작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제작연대 미상인 채용신의 <고종 어진>이 1920년대에 그려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워낙 뛰어난 솜씨로 그려졌기 때문에 그런 주장이 나왔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은 1900년부터 1905년 사이에 그려졌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고종이 황룡포를 입었다는 것은 고종이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년(고종 34년) 10월 12일-1910년 8월 29일(순종 3년)}의 황제(皇帝)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국 청과 일본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기 작전을 하던 조선은, 일본이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 6.-1895. 4.)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하자 청국과는 관계를 끊고, 싫든 좋든 간에 일본과 가까운 척해야만 했다. 나라의 크기나 힘으로 볼 때 조선은 전혀 제국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것과 제국으로 바꿀 것을 조선에 권고했다. ‘조선(朝鮮)’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꾼 것은 ‘억지춘향’ 식이었다. 그래서 대한제국을 따로 구분하는 역사학자가 있는가 하면, 조선의 연결로 보는 역사학자도 있다. 또 석지 채용신이 관직을 그만두고 서울 떠난 것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진 1905년이었기 때문에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은 1900년부터 1905년 사이인 것이다. 어쨌든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은 공식적으로 볼 때 <고종황제 어진>이라고 해야 옳다.
아래에 소개하는 석지 채용신의 <고종황제 어진>을 보면 소림 조석진의 어진과는 다른 초상화 기법을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진처럼 세밀하고 정교하며 입체감이 뛰어나다. 사실 채용신은 카메라를 초상화 그리기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채용신의 초상화는 한국화(동양화)이지만, 서양화 기법을 도입한 한국화(동양화)였기 때문에 아주 뛰어났다. 석지 채용신은 독보적인 초상화가임에 틀림없다. 고종 뒤에 있는 배경 그림, 즉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는 후에 10000원 지폐를 이야기할 때 설명하겠다.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 <고종황제 어진>(1920년대작, 비단에 전통 채색, 137.0×70.0cm, 보물 ?932호,
원광대학교박물관)
조중묵(趙重黙, ?-?)의 <조선 태조 어진>(1800년대 중기작)이나 조석진(趙錫晋, 1853-1920)‧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모사 <조선 영조 어진>(1900년작)과 채용신의 <고종황제 어진>을 비교해보니 어떠한가? 대답은 뻔하다. 그러니 채용신은 고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지 채용신은 56세 때인 1905년(고종 42년) 서울을 떠나 전주로 내려가 은거(隱居)하면서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 즉 유학자(儒學者)들과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을 찾아가 초상화를 그려 남겼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김영상(金永相), 전우(田愚), 황현(黃玹), 최치원(崔致遠) 등의 70여 점의 초상화, <고종대한제국동가도(高宗大韓帝國動駕圖)>, 그리고 <운낭자이십칠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황장길부인상(黃長吉夫人像)> 등 여인상 등 100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나라를 잃은 슬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림 그리기를 가르쳐줘봐야 일본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제자들을 미리 내다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지방에서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석지 채용신은 많은 제자를 양성하기 않았다.
서울에서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 1902-1953),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1899-1978),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6-1977), 심향(心香) 박승무(朴勝武, 1893-1980),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 1884-1933),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 등인데, 이들은 현대 한국화단을 수놓은 화가들이다.
단,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은 1909년부터 1915년까지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배움으로써 대한민국 최초 서양화가로서 우리나라에 서양화의 씨를 뿌린 개척자가 되었다.
이들 중에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는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가가 되었다. 그는 조선의 마지막 왕 제27대 순종(純宗, 1874-1926. 재위 1907-1910)의 어진을 그렸다. 이당 김은호는 순종의 어진을 세 번(1912년, 1923년, 1923-1928년 사이) 그렸는데, 모두 나라를 잃은 후에 그린 것이며, 아래에 소개하는 것은 1923년작이다.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순종황제 어진>(1923년작, 노란색 종이에 채색, 59.7×45.5cm, 국립현대미술관)
소림 조석전과 심전 안중식의 제자들 중에서 화폐 속의 초상과 관련 있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고종 29년)-1979}만을 이야기하겠다.
어진화가 이당 김은호는 순종(純宗) 외에 태조(太祖), 세조(世祖)의 어진을 모사(模寫) 또는 추사(追寫)했고, <이충무공상(李忠武公像)>(1950년작), <의기논개상(義妓論介像)>, <신사임당상(申師任堂像)>, <이이상(李珥像)>, <춘향상(春香像)> 등을 남겼다.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는 향당(香塘) 백윤문(白潤文, 1906-1979),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3-2001),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현초(玄艸) 이유태(李惟台, 1916-1999), 심원(心園) 조중현(趙重顯, 1917-1982), 유천(柳泉) 김화경(金華慶, 1922-1979), 오당(吾堂) 안동숙(安東淑, 1922- ) 등이 있다.
월전 장우성의 제자인 일랑(一浪) 이종상(李鍾祥, 1938- )은 이당 김은호의 제자이기도 하다고 했다가 논란이 일자, 약간 배운 것으로 궁색한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이들 중에서 한국 화폐 속의 초상을 그린 화가 4명은 다음과 같다.
① 100원 주화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명종 원년)-1598(선조 31년)} 장군 : 월전 장우성
② 1000원 지폐의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연산군 7년)-1570(선조 3년)} 선생 : 현초 이유태
③ 5000원 지폐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중종 30년)-1584(선조 17년)} 선생 : 일랑 이종상
④ 10000원 지폐의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태조 5년)-1450(세종 32년), 재위 1418-1450} : 운보 김기창
⑤ 50000원 지폐의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연산군 10년)-1551(명종 6년)} : 일랑 이종상
일랑 이종상은 두 인물, 그것도 모자(母子)의 초상을 그리는 영예를 안았다.
화가들이 그린 초상(肖像)이 실제 인물과 같지 않다는 논란이 일어서, 문화공보부는 1973년 동상‧영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표준영정제를 공식 도입했다. ‘영정(影幀)’보다는 ‘초상(肖像)’이라고 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심의를 받은 표준영정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화가들은 다음과 같다.
① 월전 장우성은 이순신(100원 주화), 정약용, 강감찬, 김유신, 유관순, 윤봉길, 정몽주 등 7점의 표준영정을 가지고 있다.
② 운보 김기창은 세종대왕(10000원 지폐), 을지문덕, 조헌, 김정호, 무열왕, 문무왕 등 6명의 표준영정을 가지고 있다.
③ 일랑 이종상은 율곡 이이(5000원 지폐), 신사임당(50000원 지폐), 광개토태왕, 장보고, 김홍도, 원효대사 등 6명의 표준영정을 가지고 있다.
한국 화폐 속의 인물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사전 작업으로서 조선 후기의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부터 오늘날의 일랑(一浪) 이종상(李鍾祥, 1938- )까지의 한국화가들, 그리고 화폐 속의 초상과 관련이 있는 어진화가들을 살펴보았다. 감기 몸살 가운데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2013.12.10.(화). 조귀채]
첫댓글 두고 두고 음미하면서 읽어보겠습니다.
너무 깊이가 있고 작가의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슬쩍 흟고 가기에 아까운 내용들입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았습니다~~ㅉㅉ
작가님 덕분에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오늘 부산은 따뜻했는데,,,
내일부터는 추워진다고 합니다.
건강관리 잘하십시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옹달샘 <26>은 앞으로 이야기할 화폐 속의 초상화 및 산수화를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한 사전 작업입니다. 이 글을 읽지 않으면 이후에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옹달샘 <26>을 꼼꼼하게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9명이 읽으신 시점에서 옹달샘 <26>의 '조선 태조 어진' 그림 바로 위에 있는 단락의 내용에 5줄 가량(곤룡포에 관한 이야기)을 추가했으므로 그 부분을 다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몰랐던 내용들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긴 글인데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가능한 한 좀 짧게 쓰겠습니다.
이 글의 끝 부분 '① 월전 장우성은 화폐 속 초상을 그리지는 못했다'는 내용의 오류를 바로 잡았습니다. 월전 장우성의 이순신 표준영정은 100원 주화 속에 들어 있습니다. (2013.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