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2일 (목) 촬영
서울 사직단(사적 제121호)입니다.
입구에 서울사직단이라고 표기한 비를 세운 건, 사직단이 이곳 외에도 전국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
등, 350여개소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사직단을 폐쇄하는 바람에 현재는 7곳 만 남아 있다고
하나 대구,광주,남원,강릉 등 여러 도시에서 복원하여서 현재는 그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사직단의 대문은 보물입니다 (보물 제 177호).
사직단의 대문은 태조3년(1394) 사직단과 함께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은 사직단의 대문은 숙종46년(1720) 큰 바람에 기우러진 것을 다시 세웠다고 하네요.
사직단의 대문은 1962년 서울시 도시 계획에 따라 원래의 자리에서 14m 뒤로 옮겨졌습니다
사직단 외부를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았습니다.
대문이 있는 곳, 동쪽에 있는 문입니다. 의식을 행할 때 이 문으로는 악공들이 드나들던 문입니다.
동쪽문을 통해 들여다 본 사직단 내부 모습입니다.
사직단은 조선시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전통사회에서 사직은 종묘와 함께 국가의 근본을 상징 했는데,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1395년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습니다.(좌묘우사)
사직단에는 동쪽에 사단(社檀), 서쪽에 직단(稷檀)을 배치했는데,
두 단의 모양과 크기는 한 변이 7.65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약 1m입니다.
단 주위에는 유(壝)라는 낮은 담을 두르고 다시 사방에 4개의 산문을 설치한 담(周垣,주원)을 이중으로
설치하고 그 외부에 제사 준비를 위한 부속시설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1910년 전후 일제에 의해 제사가 폐지된 이후 부속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두 단만 남긴 채 공원으로
조성되었었습니다.
1963년 사적 제121호로 지정되면서 1990년대에 담장과 부속 시설 일부를 복원 했으며
1988년부터는 전주 이씨 대동 종악원에서 사직 대제를 매년 거행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내용)
남쪽문입니다. 남쪽문은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모든 문을 다 열면 기가 빠진다고....
남쪽문을 통해 본 내부 모습입니다.
남쪽 문쪽에는 판석이 깔려 있습니다. 남서쪽 신실에 모셔진 신위가 이동하는 신로이기 때문입니다.
남서쪽 신실 건물이 있는 모서리를 돌아 서쪽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서쪽문입니다. 서쪽문은 임금이 출입하는 문입니다.
임금이 다니는 어로라 당연히 판석이 깔려 있습니다. 가운데 길은 임금, 왼쪽 길은 세자, 오른쪽 길은 대신이
다니던 길입니다.
앞에 보이는 단이 직단이고, 뒤에 있는 것이 사단입니다.
서쪽 문.
이제 정문으로 갑니다.
사직단의 정문입니다. 정문은 삼문으로 되어 있네요.
정문에서부터 시인이신 하종일 문화해설사님이 해설을 해 주었습니다.
정문이 북쪽인 것은 신이 북쪽에서 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북신문을 통해 사직단으로 들어 갔습니다.
신로가 사직단 안쪽 담인'유(壝)'가 있는 곳까지 이어집니다.
서쪽 문에서부터 온 어로와 북쪽문에서 온 신로가 만나는 지점에 판위가 있습니다. 신이 입장하면 임금이
이 곳에서 4배를 하며 의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판위의 위치가 잘못됐다고 해설사가 말하네요. 무었이 잘못 되었는지는 참석자는 알거예요.
사진에서 좌측인 동쪽이 사단(社壇), 우측인 서쪽이 직단(稷壇)입니다.
단이 삼단으로 되어 있는 것은 天地人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습니다.
가운데 돌이 큰 것은 사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사람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단은 황토로 덮여 있지만 그 속에 비밀이 있답니다.
단을 꾸밀 때 오방색의 흙으로 만들어야 하나 그건 황제의 나라에서만 할 수 있는 일,
중국의 눈치를 보던 조선은 그래도 속국이 아니고 자주 국가라는 자부심으로 동쪽의 상징인 청색 흙으로만
단을 꾸미지 않고 오방색으로 靑(동), 白(서), 朱(남), 玄(북), 黃(중) 꾸민 후 황토 흙을 덮었습니다.
서쪽에 있는 직단입니다. 풀한포기 없죠? 왜 풀이 안났을까요. 제 생각과 같았지만
해설사는 이틀에 걸처 답을 물었는데도 부정도 긍정도 안했습니다. 왜 풀이 안 날까요? 숙제입니다.
동쪽에 있는 사단입니다.
사단이나 직단이 네모난건 천원지방의 사상 때문입니다.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나다. 사직단은 땅입니다.
우리가 아끼고 가꿔야 할, 우리 자손이 대대로 살아가야 할, 터전, 우리의 소중한 땅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남쪽에 작은 돌이 박혀 있네요. 서울사직단에만 유일하게 있다는 저 석주(石主)는.
이 땅의 주인이 우리라는 것을 상징하는 석주랍니다.
안쪽담인 유(壝) 바로 앞에 왕릉의 축문을 태우는 예감같이 네모난 구멍이 사단과 직단 앞에 각각 하나씩
있습니다.
이는 이곳에 신이 좋아하는 제물을 바쳐 신이 나오게 하는 문이라고 합니다.(사진 왼쪽 아래에 있음)
제물을 바치면 신이 나온다는 문.
이 문도 고증이 잘못되어 작게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직단 뒤로 보이는 건물이 신실입니다. 신위를 모신 건물입니다.
사단과 직단은 사방에 계단이 있네요.
오래 사직단에 머물렀습니다. 한시간 조금 더 있었으니까요.
사직단을 나와.
다음 탐방 장소인 필운대로 가는 길입니다. 이곳 일대를 세종마을이라고 합니다.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위치한 이곳을 세종마을이라고 하는데,
세종마을은 조선시대에 나눈 52개 방 중에서 준수방, 인달방, 순화방 등이 속해 있으며, 웃대,상대마을(上村)
이라고도 불렸답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중인과 일반 서민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세종대왕의 생가터, 백사 이항복의 집터가 있고
또한 옥계시사(玉溪詩社,백일장)가 열리고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와 추사 김정희의 명필이 탄생한
마을이기도 합니다.
근대에는 이중섭, 윤동주, 이상, 박노수, 노천명, 이상범 등이 거주하며 문화예술의 혼이 이어졌고
현재 600여채의 한옥과 골목, 전통시장, 소규모 갤러리, 공방 등이 어우러져 문화와 삶이 깃든 마을입니다.
이 길에
티벳 난민을 돕는 카페도 있습니다. <사직동, 그가게> 라고.
빈티지한 소품들이 가득한 가게 옆에는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판매하는 카페도 있는데,
우유와 홍차를 섞어 끓인 짜이"라는 차(4,000원)와
닭고기 가슴살에 향신료가 들어간 치킨커리(10,000원)를 먹어 봤습니다.
그런대로 먹을만 했습니다.
특별한 경험을 원하신다면 한번쯤 방문해도 좋을듯 싶네요.
짜이는 힌두어로 "차"라는 뜻이랍니다.
티벳의 속담.
<사직동, 그가게> 윗집의 포토 존에
해환님께서 (이곳에 수록된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모두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배화학교입니다. 이곳에 필운대가 있습니다.
배화는 미국인 선교사 캠벨이 설립한 학교입니다.
이 건물은 배화여고 생활관입니다.
배화여고 생활관은 학교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온 1916년에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지었습니다.
선교사 캠벨( J. P. Campbell )의 동상입니다.
캠벨은 미국 남감리교의 여선교사로 1898년 10월에 종로구 내자동에 캐롤라이나 학당을 설립 했습니다.
배화학당의 시초였습니다.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탐방에는 모두 12분이 참석 하였습니다.
선교사 주택의 후경.
배화여고의 본관입니다. 1926년에 지었습니다. 캠벨기념관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인 활동사항으로는 1910년 국권 상실 후 관계를 떠난 남궁억(南宮檍) 선생이 이 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9년간 봉직한 일입니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무궁화로 우리나라 13도를 상징한 지도와 태극기를 수놓게 하였습니다.
이 무궁화 지도와 태극기 수본은 차츰 각 가정으로 보급되어
국민들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홍천에 남궁억기념관이 있습니다. (백과사전 참조)
학교 식당 뒤로 가면 암벽이 있는데 이 암벽에 각자가 있습니다.
모두 세곳에 있는데 사진은 우측에 있는 각자입니다.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등 10명의 이름이 새겨 있는데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가운데에 있는 각자입니다.
이항복의 9대손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고종10년(1873)에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것으로 이유원의 장기인 예서로 새긴 각자입니다. 내용은 아래에...
我祖舊居後裔尋(아조구거후예심) 우리 선조 예 살던 곳 후손이 찾았더니
蒼松石壁白雲深(청송석벽백운심) 푸른 솔 바위벽에 흰구름 깊었어라
遺風不盡百年久(유풍부진백년구) 끼치신 유풍 백년토록 다함없어
父老衣冠古亦今(부노의관고역금) 어르신들 의관은 오늘도 예와 같네
癸酉月城李裕元題. 白沙先生弼雲臺.
필운대 각자.
필운대 글씨는 오성부원군의 글씨라는 이야기와 이유원의 글씨라는 설이 있습니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은 필운산입니다.
1537년 3월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황태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려고 한양에 들어오자,
중종이 그를 경복궁 경회루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중종은 그 자리에서
북쪽에 솟은 백악산과 서쪽에 솟은 인왕산을 가리키면서 새로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손님에게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는 것은 최고의 대접이었기 때문입니다.
한양 주산의 이름을 새로 짓게 된 공용경은
도성을 북쪽에서 떠 받치는 백악산은 공극산(拱極山),
경복궁 오른쪽에 있는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러나 인왕산이나 백악(북악)이라는 이름이 조선 초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공용경이 지은 이름은 별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살았던 집터에 <필운대>라는 이름으로 전할 뿐이죠.(백과)
각자들이 있는 바위.
필운대는 인왕산 밑에 있다. 필운대 밑에 있는 도원수 권율(權慄.1537~1599)의 집은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처갓집이므로, 이항복은 그곳에 살면서 스스로 별호를 필운(弼雲)이라고 하였다.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 글씨는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순조 때의 실학자인 유본예는 <한경지략>에서 필운대를 위와 같이 소개하였다 (백과사전)
유본예는 <춘성유기>를 지은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입니다.
필운대를 탐방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며 캠벨기념관과 옛 선교사 주택을 다시 봅니다.
배화여고 생활관
배화학당은 기독교 선교와 여성 계몽을 위하여 1898년에 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입니다.
배화여고 생활관은 학교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온 1916년에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지었습니다.
이 건물은 1971년부터 배화여고의 생활관및 동창회관, 1997년 부터는 동창회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서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제일 아래층이 반지하로 되어있어 현관으로 들어 서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현관 앞에는 돌출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를 발코니로 사용했습니다. 내부에는 중앙에 홀과 계단실이 있고
그 양 옆으로 방이 있습니다.
건물의 전체적인 외관은 서양식 붉은 벽돌벽과 서양식 기둥을 사용하였지만, 지붕은 한옥의 기와지붕을
사용하여 서양식과 한국식 건축이 섞인 독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선교사 주택을 통해 근대 서양의 주택기술과 문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이집은 서양의 주택 문화와 우리의 전통 주택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흥미로운 예 입니다. (안내문)
1916년에 지은 옛 선교사 주택.
운동장 끝에 또 한 채의 옛 건물이 있습니다.
과학관으로 사용했던 이 건물도, 선교사 주택과 본관 건물과 함께 모두 서울시문화재로 등재되었습니다.
지금은 비어 있는것 같네요.
운동장 끝에서 보면 두 문화재 건물이 어우러져 더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운동장 끝에 회화나무 고목이 두 그루 있습니다.
이 고목나무 아래 기와집이 바로 청전 이상범 화백의 집입니다.
배화의 교훈은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바로 信,望,愛 죠. 그 교훈이 바위에 새겨 있습니다.
세번째로 홍건익 가옥을 탐방 했습니다.
필운동 홍건익 가옥(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3호)
필운동 홍건익 가옥은 1934년에서 1936년 사이에 지은 한옥입니다. 740.5m2의 대지에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 등 다섯 동이 낮은 언덕을 따라 자연스럽게 놓여 있고,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 중에서
일각문, 우물, 빙고까지 갖추고 있는 집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이집은 전통 한옥의 배치를 취하면서도 , 근대 한옥의 요소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안채 대청마루의 풍혈판에 새겨진 팔괘문양과 별채의 화초벽을 장식한 태극문양,이화꽃문양, 연꽃문양
등 장식요소들이 돋보입니다.
서울시가 이 집을 매입할 때에는 전체적으로 심하게 퇴락한 상태로, 증축되거나 변형된 부분들도 많았는데
1930년도 중반에 지어진 한옥의 기본적인 구조와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어
2013년에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필운동 홍건익 가옥은 2015년에 복원 공사를 완료했으며
현재는 서촌의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소이자 주민들을 위한 사랑방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홍건익 가옥이 토지대장에 처음 등장한 1912년에 이 대지의 소유주는 고영주였습니다.
1934년에 홍건익이 이 땅을 매입해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었으므로 현재는 홍건익 가옥이라 부릅니다.
고영주는 역관으로 중인이 많이 살던 서촌에 대를 이어 살고 있었지요.
조선시대의 중인은 기술과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전문직 종사자로, 관청으로 출퇴근이 편한 청계천과 인왕산
일대에 주로 거주했습니다.
중인의 양반과 평민 사이의 계급으로, 이들은 양반보다 신분은 낮았으나 대체로 부유하고 지식과 교양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중인들은 대를 이어 직업을 세습하고 한 동네에 모여 살면서 결혼도 중인 집안끼리 하였습니다.
고영주와 형제들, 조카들도 필운데 주변의 옥동, 통동에 거주하였습니다. 역관들은 아들이 10세 전후가 되면
역과 시험을 준비시켰다고 하네요. ㅠㅠ 그때나 지금이나 그넘의 시험은.... (안내문 참조)
고진풍(1812년생)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역관이었습니다.
첫째 고영주(1840년생), 둘째 고영희(1849년생), 셋째 고영선(1850년생), 넷째 고영철(1853년생)입니다.
이중 막내 고영철은 1882년 조미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뒤 1883년 미국에 파견한 일종의 답례사절로
서양에 최초로 파견한 외교 사절단에 역관으로 참여 했습니다.
당시 전권대신은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24세)이었고,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 등 개화파 인사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여기에 중국인 오례당(吳禮堂)과 일본인 미야오카, 미국인 로웰이 역관으로 참여해 일행이 모두 11인
되었습니다,
고영철의 아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년생)입니다.
그는 역관(프랑스어) 이기도 했습니다.
고영철씨 일가가 살았던 홍영익 가옥에 있는 우물입니다.
일각문을 통해 후원으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별채입니다.
별채는 본채와 떨어져 있는 채로 주로 사색을 즐기는 공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가옥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전망이 좋은데 현재는 작은 도서관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이용이 가능하니 좋은 날, 별채에서 책 한번 읽어보시지요.
별채 우측 외벽을 장식한 문양입니다. 1934년 지을 때의 모습 그대로라고 합니다.
80년이 된 문양이 있는 벽입니다.
이 벽에 가만히 손을 대고 있으면 그리움과 쓸쓸함이 함께 밀려 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는 안하시고....
별채에서...
후원에서 바라 본 별채 마당입니다. 사진찍기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커피 타임.
후문으로 나왔습니다.
인근에 조선 최후의 도화서 화가인 심전 안중식 선생에게 사사한 이상범화가의 집이 있습니다.
1897년 충남 공주시 정안면 속성리에서 태어난 청전 이상범은 1906년 서울로 올라와 보흥학교와
계동보통학교를 거쳐 서화미술강습소에서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서 서화를 배웠습니다.
1921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상으로 작가활동을 시작한 청전은 1942년부터 1972년 작고할 때까지
이 주택에서 살았습니다.
청전의 작품활동 완성기가 1946년부터이니 누하동 주택은 온전하게 청전의 삶과 함께 한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배렴과 박노수 등이 배출되었고 "청전양식"이라 불리는 작품세계도 완성되었습니다.
이 주택은 ㄱ'자 안채와 ㅡ'자 행랑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근대 도시한옥의 구성을 갖고 있지만,
도시한옥에서는 드물게 부엌에 찬마루를 갖고 있는 것이 독특합니다. (안내문)
대청마루에서 본 안마당과 장독대입니다.
화백이 직접 만들었다는 장독대 뒷담 벽화가 전쟁으로 파괴 되었습니다.
그나마 파괴되지 않고 일부 남았던 담을 보수해 조금이라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충(忠) 신(信)이라는 글씨는 지금도 또렸합니다.
사랑채 뒤로 보이는 회화나무는 배화여고 운동장 끝에서 보았던 나무입니다.
예전엔 이런 스타일의 주택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개발이란 미명 아래 우리의 전통은 무자비하게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노천명이 살던 집도 이제는 헐리고 새로운 집이 들어 섰습니다.
한옥으로 지었지만 전같이 살갑진 않네요.
예전 노천명이 살았던 집의 모습은 이랬었습니다.
저 창가 아래에서 맴돌던 김기림의 그림자가 아직도 머물고 있는듯 했는데... 이제는 떠났겠죠.
이 집은 서울미래유산이었습니다. 보존도 못할걸 유산으로 지정은 왜 했는지요.
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걸려 예정 답사지역 몇 군데는 패스 했습니다.
그리고 늦은 점심으로 된장국밥(5,000원)과 육회비빔밥(7,000원)을 11명이 먹고
10명만 자신이 먹은 밥값에 1,000원을 더해 냈습니다. 그래서 10,000원이 남았으나
안내자의 밥값 7,000을 지불하고 보니 3,000원만 남았네요. 일일 총무인 산그리메님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22일 답사시 남은 돈 24,000원은 방글이님이 보관하고 있으니까. 역사탐방방의 기금은 27,000원
이 되었습니다.
식사 후 마지막으로 이상의 집을 들렀습니다.
이상의 집입니다.
이상에 관한 이야기는 쓰지 않겠습니다. 이 천재 시인의 이야길 쓰려면 죽을것 같아서요.
큰뜰님께서 이상의 집에서 참석자 중 원하는 분, 9분에게 캡슐커피를 사 주셨습니다. 맛있게 잘 마셨습니다.
지금까지 마신 커피 중 기억이 될만한 맛이었습니다.
오늘 탐방하려다 못한 곳도 살짝 소개합니다.
인왕산 아래 서촌 오사정의 하나인 백호정(풍소정)
바위에 백호정이란 각자가 남아 있습니다.
오사정은 다섯군데의 활터를 말하는데 옥동에 있던 등용정, 삼청동의 운용정, 사직동의 대송정 사직공원의
등과정(현 황학정) 그리고 누상동의 백호정(풍소정)을 일컷는 말입니다.
수성동 계곡의 기린교.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은 정치적 야심을 가진 형 수양대군에 맞서 어린 조카 단종을
위해 목숨까지 걸며 신의를 지킨 왕자였습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그는 이곳 수성동 계곡에 비해당이라는 별장을 짓고 살며 시와 그림을 즐겼습니다.
게으름 없이'라는 뜻의 비해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한 사람을 섬기라는 의미입니다.(안내문 내용)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 터.
박노수 미술관.
박노수 가옥 (서울시 문화재 자료 제1호)
박노수 가옥은 조선후기 친일파인 윤덕영(1873~1940)이 그의 딸을 위해 1938년에 건립한 이층집입니다.
1층은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었고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한옥과 양옥의 건축기법 외에 중국식 수법이 섞여 있고 안쪽에 벽난로를 3개나 설치하는 등 호사롭게
꾸몄습니다. 2층에는 원래 베란다가 있었으나 30여 년 전에 방으로 바꾸었습니다.
1973년 화가 박노수(1927~2013)가 이 가옥을 인수하여 거주하였고 박노수가 사망하기 전인 2011년에
종로구에 자신의 작품, 고미술품, 고가구와 함께 기증하여 보수를 거친 후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백과사전)
미술관 앞, 뜰에 있는 박노수가 디자인한 탁자.
박노수의 그림이 있는 탁자.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 아방궁이라 일컬어지던 송석원으로 들어 가는 길 입구에 세워 있었을 돌기둥.
돌기둥 두 개가 빌라 주차장 입구에 지금까지도 무심하게 서 있습니다.
저 돌기둥의 역사가 궁금하네요.
옥인시장에 있는 오래된 중국집.
해물 칼국수.
오늘 답사팀은 이 집을 선택했습니다.
후기를 마칩니다.
첫댓글 바위솔님의 후기 읽으면서 행복해 합니다^^
어제 기억이 새롭습니다.
공부 많이 했습니다.
보고 또보고,오늘밤 ,또 보고 읽어야 되겟읍니다 ,,상세히 올리신 사진 .내용,을 두손모아 ,
감사드립니다 ,,병원예약으로 ,,참석 못 한점 ,,아쉬웠으나 ,,다행히 ,,사진으로 대신하였읍니다 ,,
수고 많으셨읍니다 ,,고맙읍니다 ,,
바위솔님과 함께하는 역탐의시간
알차고 즐거운 시간이었 습니다
수고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시간 현세와 역사가 있는 시간 의미가 세롭습니다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는 이상 이야기와 어제는 사직단에 대하여 해설사의해설이 너무나 좋았읍니다.
복습으로 방장님의글이 있어 재복습이 됩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늘 건안 하십시요.
이,~많은 사진,,자세한 내용들,,편집 하시느랴 ,,!! 넘 ,수고 많으셨읍니다 ,,
감사 합니다 ,,~~~~~
역사의 숨결 속에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렇게 깊이있게 손안에 넣어주신 바위솔님.
내일이면 기억이 희미해지겠지만 이 순간 만큼은 의미있는 느낌으로 잘 간직하겠습니다.
참여하지못해 많이 속상햇는데
방장님의 후기로 마음 달래봅니다.
많은 사진과 해설 정말 고개가
숙여지네요.
수고하셨어요. 고맙습니다.
잘 보고, 가슴에 담고 갑니다~~
참가는 못했지만 눈으로 보는 현장 사진과 상세한 해설은 간 듯 본 듯 진배가 없습니다
땅과 건물 거리마다 선조의 이야기와 역사가 녹아든 현장 아닌 곳이 있겠나 생각됩니다만,
그 시대를 이끈 선각자의 발자취에 후손이
찾아가서 서 보는 일도
숨쉬며 사는 동안의 보람이고 희열이겠죠
노고가 깃든 탐방기 잘 읽었습니다
기회 되면 역사탐방길에 따라나서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