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놀이>
○ 소재[은유]: 노년의 상실 = 운전면허증 반납
○ 왜[동일성]: 쓸쓸하다. 슬프다. 허전하다
○ 원관념[주제]: 노년의 상실
○ 보조관념[제재]: 운전면허증 반납
○ 형상화[창작]: 운전면허증 반납 이야기로 노년의 상실에 대한 아픔을 그려낸다.
운전면허증 반납
안순례
반납해야 한다면서 차마 그럴 수 없어 뭉그적거리기를 여러 달, 한 장 남은 달력이 통통 부어 앙탈을 했어. 어쩔 수 없이 행정복지센터에 너를 가슴에 묻고 뒤돌아서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 파기되어 너의 존재가 사라질 걸 생각하니 배 밑에서부터 가슴이 빠개지는 슬픔이 올라왔어. 검게 드리운 하늘도 눈물인양 후드득후드득.
어릴 적 그날, 경기가 났어. 유세차에서 뿌리는 전단지를 줍던 하나뿐인 어린 오빠가 치었데. 넋 나간 어매는 마루에 멍하니 앉아 독한 잎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후- 후-’ 허공에 그렸지. 독주에 만취한 아배는 시체처럼 누워만 계셨어. 그날 이후 부모님은 “차, 조심해라” 내 뒤 꼭지에 달고 살의셨지. 아득한 시간 속에 무서운 괴물 차에 가위 눌려 진저리 치며 자란거야.
둘째를 낳고 처음 서유럽 여행을 갔어, 독일 시내를 달리는 빨간 ‘무당벌레 차’를 보고 한 방에 훅 가 버렸어. 그 동안 승용차 사면 이혼도 불사하겠다고 윽박지르며 살았는데. 영화 ‘위대한 개츠비’ 데이지처럼 우아하게 머플러 날리며 달리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던 거야.
그러나 이란성쌍생아인 너를 만나는 게 녹록지 않더라고. 코스 시험 첫날, 시험용 트럭에 오르자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눈앞이 캄캄하데, 기아도 브레이크도 액셀도 뒤죽박죽 “삑--” 소리와 함께 경계선 밖으로 질주했어. 놀란 시험관이 “일 낼 여자다야” 호되게 쏘아붙이더라고. 좌충우돌했지만 이듬해 봄 8전9기로 해후의 기쁨을 누렸지. 그림자처럼 동행하며 때로는 대리인으로서 넌 뿌듯한 자랑꺼리였어.
운명은 달리고 싶다는 우리의 간절한 열망을 시샘한 걸까? 시내 연수 59일째 되던 날, 로터리 건널목에서 차로 뛰어드는 허리 굽은 할매를 피하지 못했어. 순간 하늘이 노래지더니 정신이 아득해지더군. 실신하여 액셀을 꽉 밟은 차는 붕 떠서 반대편 차로의 신호대기 시내버스를 들이받고 튕겨져 2톤 트럭을 또 받았지. 앞바퀴는 달아나고 휴지처럼 구겨진 차는 폐차장으로 갔어.
그 사고로 차에 치인 오빠 기억이 소환되어 가까이 스치는 차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러댔지. 운전이 두려워지고 공포에 짓눌려 넌 장롱지기가 된 거야. 그리고 새 옷 갈아입을 때만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어. 안쓰럽게도 젊은 날 한 번도 힘차게 달려보지도 못한 채 30여 년 허무하게 시들어가고 있었던 거야.
준비 없이 온 노년의 날. 삶에서 소중하게 지녔던 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는군. 너도 그 대상에서 피해 갈 수 없다고 해. . 분신 같은 너를 반납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 같이 서운했어. 속이 텅 빈 것처럼 노년의 삶이 허전해지더군.
애지중지 아끼던 존재들이 한 둘 흔적도 없이 없어져 갈 때 점점 작아지는 나를 보았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노년의 날은 추수를 끝낸 텅 빈 들판과 같아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쓸쓸함이 느껴져. 대책 없는 노년의 삶, 내려놓고 내려놓고 공사 중.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2023. 12.05
상실(네이버 사전)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사라짐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
첫댓글
선생님 인생은 '공수레 공수거'라고도 합디다만 글 가운데 절절히 녹아 있습니다
소중한 곳에 간직해 두었던 면허증과의 석별에 얼마나 안타까우셨습니까?
한편으로는 그래서 이런 좋은 글을 선물로 받으신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도귀한 글 보여 주시기를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