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11: 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 히 11: 8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
히 11: 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기었다.
에녹의 옮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며 천국이 참으로 있다는 생생한 증거이다. 본문은 에녹이 옮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긴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녹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었고, 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옮기어졌다.
1]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옮기웠으니) 하나님이 그를(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아니하니라)
본 절은 창 5: 21-24에 나오는 에녹에 관한 인용이다.
* 창 5: 21-24 –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맛소라 본문에는(MT)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되어있는 반면 70인 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니'로 되어 있다(창 5: 24, Bruce, Morris, Lane).
'옮기셨으니'(메테데켄)은 '변화하다'라는 뜻을 갖는 동사 '메타티데미'의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바뀌다', '변화되다'를 의미한다.
이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움 받았음을 암시한다.
저자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옮겨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믿음으로'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이나 유대 전승에서는 에녹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유대 전승에서 모든 세대의 회개의 표본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시락의 교회서 44: 16, Lane, Bruce).
저자가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개종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6: 1)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믿음은 회개와 동일시 될 수 있으므로 유대 전승에서 회개의 표본으로 나타났던 에녹은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될 수 있다(Luhrmann).
에녹의 믿음은 그가 옮김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본 요인이었다(Lane).
에녹이외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사람이 또 한 명 있는데, 그는 엘리야선지자였다.
* 왕하 2: 11 -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2]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본문은 에녹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근거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 5: 22-24의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MT)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창 5: 22, 24) 70인 역에서는 이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본 절뿐만 아니라 에녹에 관한 유대 전승마다 나타나는 어구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임을 나타내고 있다(시락의 교회서 44: 16; 지혜서 4: 10,14).
저자는 '믿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연결 지어 다음 절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히 11: 6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
1]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은 단지 내적인 마음의 태도만이 아니라 외적인 믿음의 행동을 요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입증된다. 따라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고, 순종없는 삶은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저를 옮기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2)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계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탄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약 2: 19 -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1: 1, 2) 하나님의 실존적(實存的) 존재를 뜻한다(Bruce).
(3)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상 주시는'(미스다포도테스)는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Bruce).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 시 43: 4 -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히 11: 7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
1]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고하심'(크레마티스데이스)는 '신적인 의사소통'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 혹은 '신탁'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8: 5; 12: 25).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에게서 들은 계시를 액면 그대로 믿었음을 반증한다. 즉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1 절).
2]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경외함으로'(율라베데이스)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두려움'이란 의미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다'를 의미한다(Robertson).
'율라베데이스'는 '거룩한'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고 '두려움'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으나 전자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노아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방주를 예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준비하였기 때문이다(Morris).
3]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이로 말미암아'(디 헤스)에서 '이'(헤스)는 지시 대명사로 '믿음'이나 '방주' 또는 '구원'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헤스'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by his faith, NIV, Robertson).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Bruce).
노아의 믿음은 옳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세상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정죄 받았다.
결국 노아의 믿음은 그 당시 사람들의 불신앙을 정죄한 것이었다(Morris).
4] 믿음을 따르는(좇는)
'믿음을 좇는'(카타 피스틴)은 노아의 의가 실현되는 방법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아가 믿음이라는 규범을 따라 하나님에게서 의를 수여받았음을 시사한다.
노아는 믿음을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였다(창 6: 22, Bruce).
5] 의의 상속자가(후사가) 되었느니라.
따라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는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수여하신 의를 공유하고 상속하였음을 의미한다(Lane).
3. 믿음의 족장들 ( 11: 8 – 22 )
⑧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⑨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⑩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⑪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⑫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⑬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⑭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⑮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⑯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⑰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⑱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⑲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⑳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히 11: 8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한 민족의 조상을 삼으려 하셨을 때,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창 12: 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순종하며 나갔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즉시 그를 따랐다.
* 마 4: 18-22 - ⑱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⑲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⑳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도 비슷하다. 우리는 천국까지의 과정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부르심(소명, 召命, 라:vocatio, 영:calling, vocation, 독:Beruf)
기독교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회개하고 믿으라는 소명과 세상에 있는 이웃에게 봉사하라는 소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후자를 취급하려고 하며, 특히 일상생활의 일과 연관시키려고 한다. 전반적으로 구약성서는 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창세기 3: 14-19은 ‘일’이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한다고 자주 해석되지만,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한 그 이전의 말씀은, 구약 전체에 수없이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정직한 일은 칭찬을 받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는 구약의 특징인 일상생활의 일반적인 긍정을 반영한다. 신약에서는 실질적으로 히브리적이므로 일을 가치있게 생각하고 태만을 정죄한다. 그러나 신약의 대부분이 세상의 임박한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중세시대에는 신성한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중세 시대에는 일상생활의 일을 통하여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종교적 중요성으로 인상적인 신학적 반영을 하지 않았다. 중세의 보편적인 수도원 생활과 사제의 직분을 높임으로 일상적인 일과 세속적인 직업의 가치를 떨어뜨린 문제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혁명적인 사회적 결과를 가져온 서양 문화에 일의 독특한 개념을 제공했다고 사회역사가들은 주장했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은 신성한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의인화된 사람은 생활에서의 역할이나 소명이나 신분을 통하여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성취할 수 있었다.
칼빈은 대조적으로 소명의 무용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비판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표시로 그 사람의 소명을 성공으로 유발해서, 현대 자본주의의 "직업윤리"를 위하여 놀라운 자극을 주었다.
현대적인 기술과 대량생산의 등장으로 근로자들은 따분하고 단조로운 일을, 특히 주인에게 혹사당할 때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하기에 더욱 어려웠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이론서의 노동은 생산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고용주에 의해서 간주된다고 주장했을 때, 그의 견해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윤리학자들에게 무서운 도전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하다고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이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에 무관심하거나 그 불공평을 옹호했다. 이 개혁운동 이후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은 소명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들은 재산, 국가의 역할, 노동과 관리의 권리와 의무, 결혼, 전쟁, 그리고 관계되는 문제들에 관하여 글을 썼다. 천주교는 이러한 문제들을 자연법의 이론으로 취급하고,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실용주의 입장과 상대적으로 한정된 공익의 입장에서 취급한다.
1]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저자는 본 절에서 19절까지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앞서 언급된 아벨과에녹, 그리고 노아는 그 믿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구약성경에 없어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 6)라는 말씀에서 그의 믿음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칼루메노스)는 '칼레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즉시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음을 시사한다(Westcott).
순종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2] 장래의 유업(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즉시 길을 떠났으며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인지 모르고 있었다.
* 창 12: 5-6 –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다시 가르쳐 주신 후에야 알았다.
* 창 12: 7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은 찾아가야 할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