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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관리에 대한 원칙은 성경뿐 아니라 세상속의 전문가에게도 배울 수 있으며 살아가는 동안 경험으로 자연스레 체득하기도 한다. 문제는 알고 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는 것을 삶에 적용하는 데에는 굳센 의지와 출중한 지혜가 필요하다. 특히 마음가짐이 견고하지 못하다면 작심삼일로 허망하게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한 돈 관리에 있어서 꼭 필요한 마음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탐욕을 버려라.
성경에는 탐욕으로 일생을 망친 자들의 이름이 적잖이 열거되어 있다. 아간, 발람, 엘리사의 종 게하시, 가룟 유다, 마술사 시몬,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 적지 않다. 이들의 공통점은 황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다 생명을 잃거나 그동안 쌓아온 인격과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자들이다. 탐욕의 출발은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을 위해 쌓아두려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성경은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단호하게 경고한다.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자는 천국에 자리가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탐욕은 성공과 부자의 길을 좇는 모든 자들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 위장하고 그들의 생명과 영혼을 노리고 있다.
성경적인 돈 관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중의 하나는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탐욕을 버린다는 것은 부자의 꿈을 접는 것이며 성공으로 향한 길을 돌이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모두 탐욕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을 감찰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탐욕의 덫에 걸리기 십상이다. 탐욕을 버린다는 것은 세상이나 인간적인 방법이나 지혜를 버린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일확천금을 얻으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과 불의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은밀하게 속삭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들키지만 않는다면 눈을 질끈 감고 결코 놓지 말아야 할 절호의 기회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지만 이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불법과 불의한 모든 수단이나 방법은 탐욕으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탐욕을 버리는 것은 모두가 좇는 세상풍조에서 벗어나 외롭게 사는 것일 지도 모른다. 남들이 모두 하는 것을 나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은 학교에서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그런 기분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런 기분에는 아랑곳없이, 성경은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탐욕은 투자나 사업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서민이거나 지극히 평범한 소비자에게도 가까이에 탐욕이 존재한다. 과소비나 충동구매뿐만 아니라 신용카드사용이나 생활비대출 등, 현대사회에서 거리낌 없이 행하는 일에도 탐욕은 스며들어와 있다. 도시에서 번듯한 30평 이상의 아파트에 사는 것을 포기하고 남의 이목을 무시한 채 아담한 열대여섯 평의 임대아파트에 살아야하는 것을 뜻할지 모른다. 대출을 얻지 않고는 집을 살 수 없다는 이들도 탐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분양가의 절반 넘게 대출을 얻는 것과 10~15%의 소규모의 대출을 얻는 것은 다르겠지만, 빚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다. 이는 조급하고 탐욕스러운 자신을 만족시키는 세상의 방법이다. 전세방을 전전하는 이들조차 타고 다니는 중형차를 포기하고 대학생들이나 여성들이 주로 애용하는 소형차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명품이나 백화점의 쇼핑은 사치이고 철지난 상품을 파는 할인매장이나 길거리의 땡 처리 상점의주고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친구나 이웃의 생활수준에서 한참 떨어지더라도 만족해야 한다. 어쩌면 그처럼 비루한(?) 삶이 자신에게 꼭 맞는 스타일이라고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이 욕심 없는 삶이다. 겨우 생계비를 넘는 박봉이라도 수입에 맞추어서 살 수 있는 생활방식이 탐욕을 버리는 삶의 기본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세상의 것을 좇는 탐욕을 버리고 주어진 삶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천국백성의 자격의 으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세상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면 천국은 오르지 못할 나무와 같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좁다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먹고 사는 걱정을 멈추라.
세상에서 먹고 사는 걱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죽어서야 겨우 멈추게 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불황이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다면 걱정을 넘어 심각한 수준이다. 주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경제가 호전되리라는 기색은 전혀 없으며 신문들은 앞 다투어 실업자의 증가, 주가폭락, 물가상승, 회사의 도산, 이자의 폭등 등의 암울한 기사만 쏟아내고 있다. 회사가 점점 적자 폭이 늘어나 해고의 칼날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불안감에 적지 않은 회사원들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자영업을 하는 이들은 더욱 심각하다. 매출이 끊기는 것도 기가 막히는데 자고 나면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신생업체의 범람으로 인한 과도한 가격경쟁의 피 말리는 싸움은 가실 줄을 모른다. 어디 그뿐일까? 대학을 졸업한지 오랜 자녀들은 취직하는 법을 잊어버려 아직도 용돈을 대주어야 하는 사실은 자신의 노후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서브프라임사태를 불안하게 지켜보며 그나마 최후의 보루로 삼고 있는 집값마저 폭락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자살하는 사람들이 부러운 처지에 내몰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끼치는 불안감이 갑자기 엄습해온다.
마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런 나의 이런 절박한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교회의 목사는 설교 때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성경말씀만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하고 있다. 사실 크리스천에게 염려와 두려움은 믿음과 반대되는 마음의 상태이다. 믿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며 쭉정이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으로 심판의 날에 빈손으로 쫓겨 날 것이라는 경고가 따라다니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형식적인 믿음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지만 세상에 나가면 여지없이 불안과 두렴에 휩쓸리고 만다. 그래서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교회에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기도해야만 그나마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진통제의 효과로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근본적인 처방이 없이는 이런 증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가 물에 빠진 사건을 잘 아실 것이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와 같은 능력을 요구해서 처음에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산 같은 파도를 보자마자 두려움이 엄습하는 순간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 베드로의 경험은 우리의 두려움과 걱정이 어디에서 오는 지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우주만물을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사람보다 월등히 더 많은 개체수로 함께 살아가는 동식물들은 불황은 물론이고 경제에 대한 개념조차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굶어 죽는 일이 없다. 부지런하게 먹이를 찾아 움직이기만 하면 충분히 생존하며 종족을 번식시키고 살아간다. 만약 우리에게 곤충이 지닌 본능만 주어졌더라도 걱정의 의미 자체를 모를 것이다. 물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먹이가 없다면 굶어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포함한 온갖 동식물을 만드셨으므로 그들이 충분히 먹고 살만한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그 책임을 훌륭하게 이행하고 계시다. 하찮은 곤충조차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만물의 영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받은 자녀들인 크리스천들이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면 이는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탓이다.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님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의 차이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으며 우리가 열심히 일만 한다면 등 따습고 배부르게 먹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다. 물론 우리의 끝없는 욕심까지 채워주지는 않는다. 충분히 먹고 사는 일용할 양식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욕심을 낮추고 좁은 집이라도 만족하며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다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다음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지는 일에 온 맘과 정신을 쏟아 붓는 것에 달려있다. 물론 오래 들어온 설교와 별 다름 없는 처방일지 모르지만 아는 것과 행동에 옮기는 것과는 다르다. 행동에 옮기는 데는 만만치 않은 훼방꾼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오래 살아온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 말하는 것은 세상 살기가 불안하다는 것이고, 영적인 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견고한 믿음이 말하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둘의 싸움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그날까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면 환경에 상관없이 평안이 자리 잡고 있을 터이요,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바람과 파도가 넘실거리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면 공포와 불안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을 것이다. 즉 육체의 생각과 믿음의 싸움이 우리 내부에서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날마다 성령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지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그분의 평안함이 자신을 지켜주시는 일 뿐이다. 그러한 삶은 오랜 경건의 훈련으로 얻어진 쉼 없는 기도를 통해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능력이 몸에 밴 사람만이 가능할 것이다.
신령한 지혜를 구하라.
하나님은 지혜로 세상을 지으시고 우주를 운행하시며 대자연을 다스리고 계시다. 그러한 지혜가 우리에게 있다면 하는 일마다 형통할 것이고 놀라운 열매를 맺을 것이다. 같은 땅에 농사를 지어도 두 배를 거두는 자도 있지만 다섯 배를 얻는 사람도 있다. 학생들이 같은 환경에서 같은 시간을 공부하여도 성적이 천차만별인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각자에게 주어진 지혜가 다르기 때문이다. 돈 관리에 있어서도 이런 지혜가 있다면 남다른 열매를 맺을 것이고 평생 돈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부의 사람들은 이런 분야의 지혜를 세상에서 배워 삶에 적용하고 있다.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으며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배우는 지혜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이 많다. 하나님의 지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세상의 지혜는 다만 자신을 위해 탐욕스럽게 쌓아두고 사용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기도로서 강력하고 끈질기게 요청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목적과 분야에 따라 다양하지만, 돈 관리에 필요한 지혜는 절제나 자족, 정직, 성실 등의 성품을 포함해서 수익을 올리는 능력과 위험을 피하는 분별력 등도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돈을 어떻게 벌어들이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방법인지 아는 통찰력이 그중 으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그러기에 앞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혜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돈 관리에서 지혜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끈기 있게 하나님께 요구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또한 안다고 하더라도 쉼 없는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다. 오직 영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경건한 훈련을 통해 항상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지혜를 요청을 빼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필자도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기도할 때마다 신령한 지혜를 간절히 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만 얻게 된다면 하는 일에 형통하게 되고 풍성한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을 불 보듯 환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방법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다. 성경은 지혜의 보고(寶庫)이다. 특히 지혜서로 일컬어지는 잠언과 전도서 욥기 등은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지 일목요연하게 말하고 있다. 특히 잠언은 지혜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혹자는 잠언이 이미 읽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며 세상에서 배우는 내용과 유사한 고리타분한 도덕적인 경구로 생각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세상의 교훈과 다르게 놀라운 영적 능력이 있다. 기도하면서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쓰며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통찰력을 얻게 된다. 필자는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지만 여행을 가거나 휴가 시에 여유시간이 있으면 특히 잠언과 전도서를 즐겨 읽는다. 아마 지금까지 수백 번도 더 읽었겠지만 읽을 때마다 색다른 가르침을 얻으며 깨달음도 다르다. 그리고 평상시에 일상의 삶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중요한 지침이 되어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복잡한 삶에 적용할 때 적절한 안내자가 되어주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도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확연하게 알게 해준다. 그래서 늘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나 복잡다단한 대인관계를 해결하기에 앞서 성경에는 어떤 말씀이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을 정도이다.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이 전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인지 아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지혜인지 분별하는 것도 다름 아닌 성경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처럼 성경을 통해 지혜를 얻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도를 얻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지혜를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돈 관리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 분야에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이들의 조언을 새겨듣는 일도 필요하다. 각종 재정관련 책이나 세미나, 경제신문이나 신문의 경제란, 경제잡지, 언론매체 등도 재정 관리의 지식과 지혜를 얻는 주요한 통로이다. 그렇지만 크리스천이라면 성경적이고 영적인 지도자들의 조언과 세상의 가르침을 구별해서 들어야할 것이다.
성실하게 일하라.
오늘아침 신문에는 20대의 어느 젊은이가 19억 원의 로또복권에 당첨되어 부자의 반열에 올랐으나, 기쁨도 잠시 과도한 씀씀이 때문에 10개월 만에 흥청망청 다 써버리고 금은방을 털다 경찰에 검거되어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돈 관리를 잘 하는 일과 성실하게 일하는 일을 별개일 것인데, 왜 성실한 노동이 지혜로운 돈 관리에 필요한 요소일까? 성실한 노동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돈 관리는 그야말로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성실한 노동은 땀과 노력을 통해 얻는 소득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다. 땀에 밴 지폐는 결코 헛되이 사용되지 않는다. 어렵게 번 돈인 만큼 값지게 사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평생을 시장구석의 좌판에서 김밥을 팔아 번 돈을 귀한 곳에 사용하라며 대학에 장학금으로 맡긴 할머니의 사연은 모두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 돈이 얼마나 힘들게 벌을 돈인지 모두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오늘 아침의 신문기사처럼 수십억의 엄청난 돈일지라도 노동의 땀이 배어있지 않기에 유흥가에서 쾌락의 도구로 사라졌고 또다시 유흥비가 필요해 절도행각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들은 쉽게 번 돈에 이미 중독되어 있기에 힘들고 어렵게 돈을 벌수가 없다. 그동안 절도로 훔친 금품도 유흥가에 뿌려졌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것이다. 이처럼 성실한 노동은 돈 관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절제와 자족의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실한 노동은 쓸데없이 소비하는 시간을 미리 차단해준다. 평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고, 휴일에는 피곤에 절은 심신을 쉬거나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행사로 바쁘다보면 쓸데없는데 보낼 시간이 없다. 그렇지만 돈벌이를 하지 않고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이들은 어떠한가? 텔레비전만 쳐다보다가 홈쇼핑의 광고에 세뇌가 될 터이고 심심하기에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은 홈쇼핑 광고책자를 뒤적거리다가 생각 없이 전화를 들게 된다. 어디 그뿐일까? 시간이 넘쳐나기에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어가며 백화점이나 쇼핑가를 하루 종일 헤매고 다니게 된다. 이들은 유통업계나 신용카드사의 봉으로 취급을 받는다. 충동구매와 과소비의 주 대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쇼핑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면 하루 종일 백화점에서 소일하며 흥청망청 신용카드를 긁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성실한 노동은 가정의 수입을 더해주는 수단 외에도 과소비를 막아주는 중요한 방패의 역할을 한다.
하늘에 소망을 두라.
요즈음 중국에서 발생한 멜라민 파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탐욕에 눈이 먼 목축업자들이 원유에 탄 공업용 멜라민으로 이미 아기들 몇 명이 사망했고 전 세계적으로 수효를 알 수 없을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다른 이들의 생명이나 건강은 아랑곳없이 많은 돈을 챙길 수만 있다면 이렇게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람들은 도처에 많이 있다. 그전에도 공업용색소나 불량만두 파동이 그러했다. 그래서 이런 기사를 접할 때는 치를 떨며 분노를 쏟아낸다. 마치 우리들은 이런 사람과 동떨어진 의인처럼 생각하겠지만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확실하고 비밀보장이 유지된다면 불법적이거나 불의한 일에 자유롭지 못할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싫어하시겠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멀리 떨어져 있음이다.
돈 관리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우리가 아주 먼 거리를 두고 있어 마치 죽어서야 만날 수 있는 처지라면 그분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돈이 하나님의 소유이고 우리는 잠시 맡은 관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내가 고생하고 애써서 번 돈인데, 내 마음대로 나의 목적과 즐거움을 충족시키는 일에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렇지만 언젠가 우리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이 살던 이 땅에서의 행위에 대해 조목조목 심판을 받을 거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과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 않고 그리 멀지않은 장래에 이 땅을 떠나야만 하는 나그네의 신분이다. 마치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어느 화창한 봄날에 소풍 왔다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주저 없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상 사람은 죽어봐야 알지 그것을 증명해보라고 종주먹을 들이대며 따지겠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 탐욕을 버리고 절제와 인내의 열매로 자족에서 얻어지는 평안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면 참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내가 벌어들인 돈일 지라도 나의 생활을 만족하게 충족하고 남은 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수 있다면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 게다가 신령한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활짝 환경을 열어주신다면 아무리 불황이라도 하는 일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고 형통한 삶으로 채워질 것이다. 아마 이런 모습들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새벽마다 단잠을 쫒으며 새벽예배에 참석하려 애쓰고 소중한 돈을 헌금으로 아깝지 않게 드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의 반열에 서기전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머리와 가슴속에 무엇이 가득 차 있는지 분별력을 가지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령이 내안에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이미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마음과 탐욕으로 채워져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먼 상상 속의 나라에 불과할 것이다. 이 땅이 아닌 천국의 소망을 잊지 않고 있다면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겠지만, 땅에 머리를 들이박고 오직 땅에서 얻을 것만을 찾고 있다면 인간적인 지혜로 부유하게 살다 떠날지는 모르겠으나 더 이상은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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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