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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교육처럼](이지현 글, 지우출판)을 읽고
– 인문고전을 읽는 중등교육과정을 생각하며
장주경
언젠가 장샘칼럼에 [교과서 없는 중고등부는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은 그 글의 2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개교 이래로 10년이 넘도록 저는, 우리 교육이 떠받들고 있는 ‘교과서’라는 것이 사실은 아이들의 지적 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아이들의 지성을 길러주는 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책’이며, 이를 바탕으로 하는 독서와 토론임을 강조해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요? 아이들의 지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으면서도 ‘입시’라는 특권을 쥐고 있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검인정 교과서는 12년이라는 학령기 내내 여전히 권좌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읽은 지는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간단히라도 서평을 쓰고 싶었던 책이 [프랑스 교육처럼]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프랑스에서는 ‘교과서’를 주된 텍스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서구 선진국 대부분이 교과서 없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공교육이 매우 강하고 홈스쿨이나 대안학교 등은 인정하고 있지 않는 나라 정도로 알고 있는데, 교육과정에서 교과서의 비중이 거의 없다는 점에 대해서까진 세세하게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프랑스가 ‘이렇게까지’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는 무척 놀랐습니다. 유명 대입시험인 ‘바깔로레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프랑스의 초중등 아이들 대다수가 교과서 없이 - 있지만 실제로 교실에서는 쓰지 않고 - 독서와 토론을 통해 수업을 한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교과서는 참고용으로만 사용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주제를 아이들이 선택한 책을 통해 공부한다는 점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모든 수업이 일종의 프로젝트 수업인 셈입니다. 프랑스의 바깔로레아는 바로 그런 배움들이 공립 교육과정 동안 집적되기 때문에 가능한 시험인 것이지요. ‘언어 없이 사고가 가능한가?’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서 발췌한 본문을 읽고 논평을 쓰시오’와 같은 문제가 바깔로레아의 문제입니다. 학생들은 이에 대해 논술 형태로 답을 적어야 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야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스스로 책을 읽고, 스스로 읽은 내용을 정리하며,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깊이 있게 토론을 해보지 않은 아이는 그 시험에 답을 적을 수가 없습니다.
교과서 없는 교육의 핵심은 바로 ‘생각하게 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저자는 힘써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육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이것이 대입 시험인 바깔로레아에서 검증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입니다. 시험도 교과서 내용의 숙지도를 ‘객관식’으로 묻기 때문에 아이들 스스로 문제의식을 통해 주제를 선택하여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 할지라도 문제제기 능력이나 창의성과 같은 요소가 부족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경우는 대안학교조차도 대부분 일반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과서를 안 쓰면 부모님들이 불안해하여 학교에 보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교과서 없이 수업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교과서를 중심의 교육과 함께 또 하나의 문제는 상대 평가에 있습니다. 교과서 숙지 정도가 평가의 기준이 되고, 더욱이 그것을 상대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몇 점을 받았는가보다, 내가 몇 등을 했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교과서 자체의 숙지도만을 평가하는 것도 아이들의 지적 성장의 관점에서 보면 참 애석한 평가법인데, 여기에 상대평가가 더해지면 시험의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의 인성이 훼손되는 부작용까지 겪게 됩니다. 친구들을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이겨야 할 경쟁 상대로 보게 되기에 학교를 통한 공동체성과 사회성을 기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프랑스의 교과서 없는 수업과 논술형으로 진행하는 대입시험, 친구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 절대평가, 그리고 충분한 독서와 깊이 있는 토론이 가능한 교실 분위기, 이 모든 것이 특정 대안학교들에서가 아니라 전체 국민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환경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 책에서 두 번째로 제 마음을 끌었던 것은 교사의 권위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어린 학생들도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교사들의 설 자리가 있을까 싶은데도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고 합니다. 교실 밖에서는 아이들과 교사가 마치 친구처럼 친밀하게 지내지만 일단 교실 안으로 들어가면 교사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집니다. 아이들도 그런 교사에게 순종합니다. 권위와 순종의 법칙이 프랑스 교실 내에서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 감동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학생 인권’이라는 미명 하에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지요. 최근, 인근의 모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수업 중에 여선생님을 향해 욕을 하고 ‘너 오늘 나한테 처맞을 줄 알라’며 그 선생님에게 돌진해가는 것을 다른 학생 하나가 제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문제의 학생은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워낙 심각한 수준의 교권 침해가 만연하여 이 정도의 일들은 큰 문제를 삼지도 않고 넘어가는 것일까요. 실제로 교사를 때리는 폭력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인데... 학생간의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교사에 대한 학생의 폭력이 – 언어적 폭력까지 포함하여 – 일어나기도 하는 곳이 우리 공교육의 현장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프랑스에서는 교사에게 단지 무례한 말을, 그것도 과열된 토론 중에 쓰는 정도만으로도 정식으로 징계를 받습니다. 철학 수업 시간에 열띤 논쟁을 하다가 교사에게 상스런 말을 쓴 아이에 대해 교사는 정중하게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것임을 통보했고 그 학생은 순순히 징계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징계위원회가 있는 날 그 아이는 정장을 입고 학교에 왔고 평소에 하던 귀걸이도 빼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학교 풍경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교사의 권위가 인정되는 교실에서만 수업을 통한 아이들의 성장이 가능합니다. 권위가 있고, 권위에 대한 존경이 있으며 그로 인해 유지되는 질서가 있을 때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사유하며 성장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교육이 주는 자극은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교과서 없는 수업과 교사의 권위를 존중하는 문화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매주 한 편의 시를 암송한다거나, 학생은 토론자로 모든 자료를 준비하고 선생님은 진행자로서 질문을 던지는 역할만 한다든지, 수학 문제의 답이 하나가 아니며 숫자보다 글을 더 많이 써야 한다든지, 예술 교육은 학교가 아니라 마을에서 충분히 기회를 제공해준다든지... 프랑스의 교육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모습들은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더불어 우리 산돌자연학교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개교 이래로 교과서 없이 ‘살아있는 책’을 통해 공부하는 학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지만, 이 방식이 사실은 이미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된 방식일 뿐 아니라, 원리적으로도 공부란 본래 ‘책’을 통해서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우리 교육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주 한편의 시를 배우는 것이라든지, 독서와 토론을 기반으로 하는 중고등부 교육과정을 운영해오고 있다는 사실 등이 프랑스 교육과 비슷한 점도 많아서 책을 읽는 내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저는 이 책에 나오는 프랑스 교육의 모든 방식을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택하고 있는 샬롯 메이슨 교육과는 공통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교실에서 연필 대신 볼펜을 쓰게 하는 프랑스식 방식 같은 것은, 저는 샬롯 메이슨 교육의 원리에 입각해서 반대합니다. 샬롯 메이슨 교육에서는 틀린 것이 무엇인지를 각인하는 것보다 바른 것을 모델로 따라가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이렇게 다른 점도 있지만 인문 교양 교육의 관점에서, 샬롯 메이슨을 따르는 우리 학교의 교육은 서구 선진국의 교육방식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인문 교양 교육은 어느 시대에 국한된 교육법이 아니라 모든 문명,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교육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의 학부모님들은 자녀가 중학생 정도까지는 이러한 교육을 받는 것을 어느 정도 수용하지만, 입시를 코앞에 두고 있는 고등부에 이르면 거의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점입니다. 가장 좋은, 가장 수준 높은 공부법이지만 고학년으로 갈수록 환영받지 못하는 공부법이라니요...
그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고전 독서와 토론 교육이, 그들의 대입시험인 바깔로레아의 성공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많이 읽고, 많이 토론하고, 많이 써본 아이가 대입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대입 제도가 어마어마한 다양성을 갖추고 있어, 어떤 방식으로든 열심히 공부를 한 아이를 포용하는 형태입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시절에 인문 고전을 열심히 읽고 토론하고 탐구한 아이는 이러한 이력이 고스란히 에세이와 AP(Advanced Placement: 대학교 학점을 고등학교 과정 중에 이수하는 것)의 우수한 성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고등부 시절에 인문 교육을 받으면서도, 대입 준비를 별도로 진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비단 미국 프랑스의 일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진국들의 입시의 방향입니다. 무엇이든 고등부 시절에 열심히 읽고 글을 써본 아이들에게 대입이 훨씬 유리해질 뿐 아니라 대입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나라도 상대평가의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능이 점차 지능화되어가고 있기에 아무래도 지독하게 어려운 책을 읽고 분석해 본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 유리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 지나치게 길고 어려운 지문을 읽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우리나라 수능을 위해서는 오직 문제 풀이만을 전문적으로 연습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선정한 주제를 놓고 넓고 깊게 책을 읽고 친구들과 충분히 토론하는 시간을 고등부 시절에 확보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국 어려운 책도 많이 읽고 동시에 문제 풀이 연습도 징그러울 정도로 해본 아이들이 수능을 잘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서글픈 현실이지만, 이른바 ‘스카이’를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이런 이중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상위권 대학 진학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놓고 수능을 위해 일치감치 학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면 고등과정을 통과한 아이들에게 마땅히 길러져 있어야 할 인성과 창의성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대학 진학 이후에도 세계각국의 인재들과의 경쟁에서도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 제도란 모름지기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울타리로서 기능해야 하건만, 제도 자체가 아이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이런 불합리를 언제까지 묵과해야 할까요? 더군다나 4차산업혁명이 이미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작금에까지 오지선다형 수능 시험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학교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앞으로도 계속 우리 학교의 중고등부 교육과정에 대한 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프랑스 교육처럼]이란 책과 관련된 점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중고등부 시절에 인문 고전 교육을 체계적으로 강화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일반 학교의 독서 교육과 기독교 학교의 그것은 ‘세계관’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인지하고, 다니엘과 같이 철저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바탕 위에 고전 교육을 해나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에게 대학 진학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제시해주어야 하겠습니다. 한국 대학뿐 아니라 외국 대학 진학, 그리고 한국의 대학 중에서도 미래적인 대안을 가진 대학, 그리고 기독교 대학 진학 등으로 아이들의 진학 지도를 다양화해주어야 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한국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나라들로 뻗어나가길 소망합니다. 이러한 진학 방향은 크리스천들이라면 더욱 열심히 찾고 두드리고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의 입시를 선택한 경우에는 인문 교양 교육과 입시 지도가 동시에 진행될 수 있도록 전략을 구사해야 합니다. 이 역시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어야 합니다. 10학년까지는 소양교육에 집중하고, 11학년부터는 진학 지도에 집중하는 시간 구성에 있어서의 전략과 아울러, 독서와 토론이라는 본질적인 교육방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기능적’인 공부를 함께 할 수 있도록 계획표를 짜고 실천할 수 있도록 멘토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합니다.
대입이라는 관문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 관문을 부정하지 말고 대응하되, 오직 그 속에 아이들을 집어넣으려고만 함으로써 오히려 더 먼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은 범치 않아야 할 것입니다. 더 큰 무기를 들고 그 관문을 통과하도록 준비시키는 일이, 적어도 한국 안에서 대학을 가려고 하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적 자세여야 할 것입니다.
교과서 없이 공부하는 학교는 가능합니다. 가능할 뿐 아니라 훨씬 우수한 교육을 할 수 있습니다. 권위와 순종의 법칙이 살아 있고,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학교, 그 학교를 나온 아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 어떤 시대적 변화를 만나더라도 지혜롭게 대처하고 이겨내며 자신이 속한 그 어디에서나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아이로 서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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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응원해드리고 싶은 글, 주제네요! 교과서 아닌 책을 읽고, 토론하고, 잘 듣고, 정리해서 쓰고! 정말 멋진 수업이죠~^^
@찬유엄마 답글 감사합니다.
청소년기라는 소중한 시기에 자기 세계를 발견하고 깊이 있는 탐구를 할 수 있다면 평생의 자산이 될 가라 믿어요.
미래의 아이들은 국적은 한국일지라도 세계속에서 살아가게 될것을 생각하면, 한국형 입시체계가 과연 우리아이들이 살아갈 시대에도 유효할만큼 좋은 교육인가를 반문하게 됩니다. 많은 사교육계의 스타강사들이 10년내에 입시형 사교육 시스템이 무너진다 하고 한국형 IB(국제 바칼로레아)가 도입될것이다 하는 교육계 인사의 말을 들었을때 입시형 공부에 치중하느라, 고전인문을 읽지못한 아이의 미래가 과연 밝을까? 사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가 과연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칠만한 인재로 자라게 될까? 많은 생각을 하게됩니다. 구시대를 산 엄마로서^^ 어차피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함을 알기에..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지, 잘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따라가는 것은 가장 안전하고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뢰하며 따라갈 수 있는 교육철학과 교육자가 있는 산돌이 있어 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교육은 방향성이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꾸준히 걸어가는 것이 속도를 내어 헤매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믿습니다. 변하는 시대일수록 변하지 않는 진리를 붙들고 가야 변하는 시대조차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부모님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