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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교첩(이문량-충의교위) 敎牒(李文樑-忠毅校尉) |
1552년(명종 7) 10월에 충순위 창신교위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을 충의교위로 임명한 병조교첩이다. 이문량은 본관이 영천(永川), 자는 대성(大成), 호는 벽오(碧梧) 또는 녹균(綠筠)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현보(李賢輔)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충순위(忠順衛) 권효성(權孝誠)의 딸이다. 1520년(중종 15) 이후 장사랑·통사랑·종사랑·적순부위(迪順副尉)·병절교위(秉節校尉) 등의 많은 음직(蔭職)이 내려지고, 1559년(명종 14)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이 제수되었다. 특히, 이황(李滉)과는 이웃에 살면서 절친하였는데, 1564년 그와 함께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하면서 시를 읊고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뒤에 이황의 고제가 된 이덕홍(李德弘)·황준량(黃俊良) 등을 초년에 가르친 적도 있다. 교첩은 주로 5품 이하의 문무관리를 임명할 때 사용되었다. 5품 이하는 낭계(郞階)라 하며, 대간(臺諫)의 서경을 거친 뒤 왕명을 받아 이조 또는 병조에서 발령하였다. 연호 위에는 이조지인(吏曹之印) 또는 병조지인이 찍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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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탁자 : 영천이씨 농암종택
크기 : 48.0X81.5
연대 : 15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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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교첩(이문량-통사랑) 敎牒(李文樑-通仕郞) |
1543년(중종 38) 10월에 종사랑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을 통사랑으로 임명한 이조교첩이다. 교첩은 주로 5품 이하의 문무관리를 임명할 때 사용되었다. 5품 이하는 낭계(郞階)라 하며, 대간(臺諫)의 서경을 거친 뒤 왕명을 받아 이조 또는 병조에서 발령하였다. 연호 위에는 이조지인(吏曹之印) 또는 병조지인이 찍혔다. 이문량은 본관이 영천(永川), 자는 대성(大成), 호는 벽오(碧梧) 또는 녹균(綠筠)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현보(李賢輔)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충순위(忠順衛) 권효성(權孝誠)의 딸이다. 1520년(중종 15) 이후 장사랑·통사랑·종사랑·적순부위(迪順副尉)·병절교위(秉節校尉) 등의 많은 음직(蔭職)이 내려지고, 1559년(명종 14)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이 제수되었다. 특히, 이황(李滉)과는 이웃에 살면서 절친하였는데, 1564년 그와 함께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하면서 시를 읊고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뒤에 이황의 고제가 된 이덕홍(李德弘)·황준량(黃俊良) 등을 초년에 가르친 적도 있다 | |
기탁자 : 영천이씨 농암종택
크기 : 49.5X75.5
연대 : 15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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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교첩(이현보-상의원판관겸춘추관기주관) 敎牒(李賢甫-尙衣院判官兼春秋館記注官) |
1507년(중종 2)에 봉훈랑 봉상시 판관 겸 춘추기주관 이현보(李賢甫, 1467~1555)를 봉훈랑 상의원 판관 겸 춘추관 기주관으로 임명한 이조교첩이다. 교첩은 주로 5품 이하의 문무관리를 임명할 때 사용되었다. 5품 이하는 낭계(郞階)라 하며, 대간(臺諫)의 서경을 거친 뒤 왕명을 받아 이조 또는 병조에서 발령하였다. 연호 위에는 이조지인(吏曹之印) 또는 병조지인이 찍혔다. 이현보는 본관이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이고, 참찬 이흠(李欽)의 아들이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그는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 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
기탁자 : 영천이씨 농암종택
크기 : 41.0X71.0
연대 : 15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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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교첩(이현보-세자시강원사서-1) 敎牒(李賢甫-世子侍講院司書-1) |
홍치 17년인 1504년(연산군 10) 1월 17일에 선무랑 성균관전적으로 있던 이현보(李賢甫, 1467~1555)를 선무랑 세자시강원사서로 임명한 이조교첩이다. 교첩은 주로 5품 이하의 문무관리를 임명할 때 사용되었다. 5품 이하는 낭계(郞階)라 하며, 대간(臺諫)의 서경을 거친 뒤 왕명을 받아 이조 또는 병조에서 발령하였다. 연호 위에는 이조지인(吏曹之印) 또는 병조지인이 찍혔다. 이현보는 문신이자 시조 작가로,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이며, 참찬 이흠(李欽)의 아들이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가히 지냈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이황(李滉), 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그는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 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
기탁자 : 영천이씨 농암종택
크기 : 42.0X69.5
연대 : 15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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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교첩(이현보-통사랑) 敎牒(李賢甫-通仕郞) |
종8품 승사랑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있던 이현보(李賢甫, 1467~1555)를 정8품 통사랑으로 품계를 올려준 이조교첩이다. 홍치 15년 10월은 1502년(연산군 8) 10월에 해당한다. 이현보는 문신이자 시조 작가로,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이며, 참찬 이흠(李欽)의 아들이다. 그는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 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첩은 주로 5품 이하의 문무관리를 임명할 때 사용되었다. 5품 이하는 낭계(郞階)라 하며, 대간(臺諫)의 서경을 거친 뒤 왕명을 받아 이조 또는 병조에서 발령하였다. 연호 위에는 이조지인(吏曹之印) 또는 병조지인이 찍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