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손진숙
칠월 어느 날이었다. 여고 동기동창 단체 카톡방에 사진 한 장이 올랐다. 사다리꼴로 펼친 청바지. 희끄무레하게 탈색된 양 허벅지 앞면에 한 무리의 파란 꽃과 잎이 분홍과 섞여 앙증스럽게 수놓여 있고, 주름이 잡힌 허리 가운데에는 끈이 살포시 매여 있다.
사진 아래에는,
“아침에 물어보러 갔다가 또 샀다요. 끝물이라 함다. 여러 가지 와서 보고 사이소.”
“7부?”
“응”
전날 모임에 비슷한 종류의 청바지를 입고 와서 선보이던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 일을 무심히 흘려버린 터였다.
그런데 이튿날 저물녘, 이웃에 사는 여고 친구 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바지를 판다는 전통시장에 구경을 가자고 했다. 나의 관심을 끄는 옷은 아니었지만, 친구 따라 강남도 간다는데 가까운 시장이야 못 가랴 싶었다.
약속한 대로 다음 날 만나서 바지를 추천한 친구네 건어물상회에 먼저 들렀다. 친구는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여성의류 도매상으로 안내해 주었다. 제법 널찍한 점포였다. 진열대에 겹겹이 쌓인 청바지류를 하나하나 들춰 보였다. 현이는 주저 없이 카톡방 사진의 바지를 골라잡았다. 안내를 마친 친구는 간 뒤, 현이와 나는 가게 안의 각종 옷들을 둘러보았다.
사십 대쯤의 남자 주인은 나를 보더니 10년, 15년 전 옷차림이라고 하며 여기 있는 옷을 사 입고 젊게 살라고 했다. 하기야 그날 내가 입은 블라우스는 15년 전에 산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닳거나 해어지지 않으니 지금도 즐겨 입는다. 15년을 입어도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편해지는 블라우스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어 가슴 열어놓고 수다를 떨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옆에 있는 현이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상점 옷을 입으면 젊어 보인다는 주인의 말이 차츰 솔깃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마음에 반도 차지 않던 옷이었는데 허리 주름을 살펴보고, 바지통 허벅지 앞면에 수놓인 무늬를 비교해 보고, 바지의 길이를 가늠해 보기에 이르렀다.
이것저것 살피고, 비교하고, 가늠한 끝에 푸른색이 희끄무레하게 바랜 청바지를 택했다. 달걀 크기의 바퀴 문양이 양 바짓가랑이에 셋과 둘로 엇갈리게 수놓아졌다. 허리는 고무줄이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펑퍼짐한 칠부바지였다.
바지에 맞춰 입을 윗도리를 고르기 시작했다. 가격은 대개 율곡 이이가 있는 지폐 한 장이었다. 철 지난 긴팔은 삼천 원에 준다고 했다. 아무리 살펴도 마음에 드는 게 없어 포기하려다 고개를 돌리니 쇼윈도 마네킹이 눈길을 잡았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박스스타일 린넨셔츠. 마네킹 앞으로 다가갔다. 몇 가지 색상이 있었지만 흰색은 때 탈 염려가 있어 베이지색으로 정했다.
청배기바지와 함께 박스린넨셔츠를 계산대에 내밀었다. 다른 윗도리와 달리 다섯 배나 높은 가격이었다. 나도 모르게 “비싸네요.”라고 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젊게 사는 비결이다.”라며 타이르는 말투였다.
며칠 뒤 가족과 함께 외출할 때 엊그제 산 옷을 입었다. “그게 무슨 옷이고? 비구니 차림새도 아니고, 어디 나갈 때 입지 마라.”라고 했다.
뒷날 현이와 새벽 5시경 집 근처 교차로에서 만났다. 부근 해변에서 걷기 운동을 하기로 약속했다. 다이어트를 하여 옷맵시를 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막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해이해진 심신을 새롭게 다지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우리가 사 입은 옷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현이는 나와 같이 사 입은 반액가 배기팬츠와 단돈 오천 원짜리 블라우스 덕을 톡톡히 보았단다. 친지들로부터 칭찬을 숱하게 들었다고 자랑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어쩌면 이다지도 반응이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어느새 시월이다.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이 싸늘하다.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몇 년에서 십몇 년 전에 산 추동복秋冬服이다. 백화점에 쇼핑하러 갔다.
코트 하나를 골랐다. 그레이 체크롱코트다. 내 형편에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에누리를 좀 해주면 좋으련만 정가 그대로 판매한단다. 매니저 말로 15년 근무하면서 한 번도 세일을 한 적이 없는 브랜드란다. 그러면서 한 장뿐이라 다른 사람이 입지 않으니 근사하지 않으냐고 했다.
올여름 ‘여성의류 도매상’ 청바지처럼 반액 세일로 많은 소비자들을 끌어 모으는 것도 인기 상품의 비결일 것이다. 유행의 가치와희소의 가치는 양립할 수 없으며 대척점에 있는 걸까. 큰마음 먹고 흔치 않은 상품이라는 원피스형 코트를 구매했다. 가족은 또 무엇이라 언급할는지 궁금하다.
어차피 사람들의 기호나 취향은 제각각이다. 고르는 눈도 다르고, 소화시키는 체형도 다르고, 평가하는 기준도 다르게 마련이다.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안목과 방식대로 선택하는 것이 패션을 살리는 길 아닐까.
《선수필》 2020년 여름호